콘체르토는 20세기 음악에서 중요한 위치를 누렸다. 현대의 청중은 유서깊은 영웅 숭배의 전통을 고수하고 한편 연주가들은 계속해서 무대를 지배하고 있다. 오늘날 교향악단은 거의 모든 음악회에 독주자를 기용하고 있다. 이러한 관습은 청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공공연하게 이루어진다. 뛰어난 독주자들은 엄청난 연주료를 요구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들은 새로운 작품을 위촉할 만한 자금은 축적하여 그들의 재능을 과시할 새로운 콘체르토를 만들도록 한다. 물론 그들의 연주 곡목이 20세기 이전 작품이 대부분이기는 하다. 그러나 일반적 의미에서 20세기 콘체르토의 기교 과시 성향은 많은 19세기 콘체르토의 기교 과시를 능가한다. 동시에 오케스트라의 역할도 부활되었다. 그리하여 독주자의 엄청난 기교는 오케스트라의 화려함과 잘 어울리고, 독주자와 오케스트라는 대부분의 20세기 콘체르토에서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통합되기도 하고 대치되기도 한다. 독주자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극적인 긴장은 이들 작품에서 강력한 창조적 요소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현대 작곡가들은 이러한 극적 내용을 계발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창안해냈기 때문이다.
먼저 1917년 혁명 이후 소련 작곡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 고립된 공헌에 관해 서술함으로써 20세기 작곡 영역을 생각해 본다.
1.구소련에서의 콘체르토
1917년은 러시아 음악 역사상 운명의 갈림길에 놓인 해였다. 음악 세계가 림스키 코르샤코프와 발라키레프, 스크리아빈의 죽음으로 인하여 구양식의 중요한 대표자를 잃어버린 바로 그때 혁명과 새 과격 정권은 음악을 비롯한 예술분야에 곧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다. 혁명 직후 그들의 중요한 제자인 라흐마니노프와 프로코피에프가 조국을 떠났고, 그 몇 년 전에 스트라빈스키가 떠났다. 결과적으로 20세기 직후에 태어난 다음 세대 작곡가들이 새로운 체제 내에서 성숙기에 도달하기까지는 상당한 틈이 벌어졌다.
구소련 연방의 음악에서 네 명의 중요한 작곡가가 대두된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와 드미트리 쇼스타고비치는 20세기 콘체르토에 뛰어난 공헌을 하였다. 조금은 덜 중요한 작품을 만든 두명의 작곡가는 드미트리 카발레프스키와 대게 공산당 노선을 따랐으나 규칙을 어겼다고 1948년 비판을 받은 아람 하차투리안이다.
★드미트리 카발레프스키(Dmitry Kabalevsky, 1904~1987)는 시인이며 화가로서 시작하였으나 그의 많은 피아노 제자를 위해 곡을 제공하려고 작곡에 착수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더 나은 작곡가로서의 훈련을 위해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했다. 그의 음악은 러시아의 민요적 소재에 근거를 두고 있고 공인된 전음계적 화성과 조성적 화음을 주로 사용하지만 약간의 활기찬 불협화음을 동반한다. 그는 러시아 민속 음악과 관련되어 있는 당김은 리듬을 사용하는 전통적 형식으로 그의 음악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의 <피아노 콘체르토 가단조 Op.9>(1928)는 차이코프스키 콘체르토에 근원을 두고 있고, 마지막 악장에 민요를 포함한다.
★아람 하차투리안(Aram Khachaturian, 1903~1978)은 그의 <피아노 콘체르토>를 1936년에 작곡했다. 익곡은 서방 세계에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이다. 그의 고향인 아르메니아와 인근 지역의 민요에 대한 하차투리안의 깊은 애착은 민요에서 영감을 받은 긴 선율에 잘 반영된다. 적당한 오케스트라 음향은 플렉사톤이 약간 부가될 때 독특한 색채감을 발휘한다. 플렉사톤은 1920년대에 발명되었으며 톱과 비슷한 소리를 내는 타악기이다.
-금세기의 음악에 더 큰 공헌을 한 프로코피에프와 쇼스타코비치에 관심이 모아진다. 두 작곡가 모두 공산당원의 심한 비평을 받았지만, 때때로 깊은 존경을 받기도 하였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 Prokofiev, 1891~1953)
그는 동양인인 동시에 서양인이었고 혁명 직후부터 1932년까지 망명 생활을 하였다. 13세때 상트 페테스부르크 음악원에 입학원서를 내면서 프로코피에프는 네 편의 오페라, 두 곡의 피아노 소나타, 한 곡의 교향곡, 많은 피아노 소품을 포함하여 다수의 작품을 제출했다.
프로코피에프는 뛰어난 피아니스트로서 피아노의 타악기적 특성에 의존하는 특이하며 공격적인 양식을 계발했다. 그의 성숙기 초반(1908~1917)에 만들어진 작품에는 피아노가 많이 사용되었고, 이 곡들은 추진력있는 리듬과 신랄한 불협화음, 타악기적 소리의 기이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담고 있다. 그의 다섯 곡 피아노 콘체르토 중 처음 두 곡이 이 기간의 작품이며, 이 두곡은 스트라빈스키와 바르톡의 양식과 매우 닮았다. 이들 작곡가들의 진취적이며 리듬적인 음악은 낭만주의의 관능적인 미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듯하다.
프로코피에프는 최초의 <콘체르토 내림라장조 Op.10>(1911~1912)을 그의 최초 성숙기 작품으로 간주했다. 이 곡은 원래 간소한 콘체르티노로 계획되었으나, 매우 어려운 피아노 성부를 지닌 16분이나 17분 정도의 단악장 작품으로 확대되었다. 몇 번이나 반복되며 마지막 절정을 위한 소재를 제공하는 처음의 주제는 특히 러시아적이다, 이 주제는 좁은 음역 재에서 움직이며, 짧게 반복되는 악절이 동형반복진행을 통하여 긴장을 쌓아가도록 만들었다, 더욱이 이 주제는 다를 러시다 주제들과 민요가 그러했던 것처럼 본보기가 된다. 생동감 넘치는 리듬의 반복 사용과 셋째 부분의 스케르초는 프로코피에프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이 콘체르토는 프로코피에프의 지휘 선생인 니콜라이 체르프닌에게 헌정되었고, 프로코피에프가 학생일 때 초연되었다. 이 곡은 특히 반항적인 현대 작곡가의 작품으로 간주되었는데, 귀의 거슬림에 관한 비평가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청중의 반응이 매우 좋아 1914년 5월 프로코피에프의 졸업 연주회에서 다시 연주 되었다.
두 번째의 <피아노 콘체르토 사단조 Op.16>은 첫번째 콘체르토 직후에 작곡되었고, 젊은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의 가까운 친구로 1913년 4월에 자살한 막시밀란 수미토프를 기념하기 위해 헌정되었다. 1913년 9월에 초연된 이 곡은 당황과 저항에 부딪치게 되어 러시아 음악 협회를 포함한 중요 음악 단체가 이 곡의 연주를 거부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콘체르토를 몇 곡 지휘한 적이 있는 실로티는 그의 친구들에게 "나는 프로코피에프의 두 번째 콘체르토를 연주하도록 할 수 없다. 그러게 되면 내가 지휘를 맡아야 하고 이것은 내 체력 밖이다. 드뷔시의 음악은 향기를 내품고 이 곡은 악취를 풍긴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영향력있는 작곡가인 미아스콥스키가 프로코피에프를 변호해 주었고, 이 작품은 1915년 초 러시아 음악 협회에서 연주되어서 좀더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디아길레프는 그 연주를 듣고 곧 프로코피에프에게 그의 발레 "러시아인"을 위한 음악을 만들도록 요청했다. 이것은 이 발레 감독이 서거한 1929년까지 지속된 긴밀한 관계의 시작이었다. "봄의 제전"의 초연으로 상당한 소동을 일으킨 스트라빈스키는 1915년 초 로마에서 프로코피에프의 극적이고 복잡한 콘체르토를 듣고 격찬했다.
혁명이 일어났을 때 프로코피에프의 아파트에 화재가 일어나 2번 콘체르토의 원고가 소실되었다. 1924년 기억을 되살려 악보를 재구상했는데, 그는 전곡을 완전히 새로 작곡했기 때문에 4번 콘체르토로 간주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1918년 프로코피에프는 러시아를 떠났고 르후 14년 동안 피아니스트로서 연주여행을 하면서 1923녕에서 1932년까지 파리에서 거주했다. 그의 마지막 피아노 콘체르토 세곡은 이 시대의 작품들이다. 이들 중에서 세 번째 콘체르토가 직접성과 서정성 때문에 늘 가장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나머지 두 곡은 세 본째 콘체르토가 지닌 선율적 온화함이 결여되어 있어서 자주 연주되지 않는다. 내림나장조의 제 번째 콘체르노(1931)는 처음부터 어려운 기교가 나타나는 네 악장으로 되어있다. 여기에서 왼손만을 사용하는 피아니스트는 매우 높은 음역에서 연주해야 하고 음역을 재빨리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다섯 번째의 <피아노 콘체르토 사장조 Op.55>(1932)는 프로코피에프가 구소련으로 돌아가진 전에 작곡한 마지막 작품 중의 하나이다. 이 곡은 다섯 악장과 모음곡 같은 구조 때문에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이라 불리워졌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
연상의 프로코피에프와는 다르게 성숙한 작곡가로서의 쇼스타코비치는 공산당의 통제 아래에서 생활을 영위했다. 쇼스타코비치는 프로코피에프가 누린 대중적 인기를 결코 누리지 못했다. 그의 작품에는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이 지닌 선율적 담백함과 감각적 호소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어휘는 낭만주의로부터 훨씬 멀어져 있고, 20세기적인 음향을 더 많이 내포하기 있다. 이 두 작곡가의 음악은 어시아적 유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서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프로코피에프의 암악에서 말러나 베르크나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20세기의 비러시아적 거장의 영향을 기대하지만 이러한 영향을 풍성이 보여주는 것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다.
<피아노 콘체르토 1번 Op.35>(1933)는 21분 정도의 간결한 작품이며, 현 오케스트라와 독주 트럼펫을 위한 네 악장의 곡이다. 그의 오페라 <므제스크의 맥베스 부인>이후 최초의 작품이며, 좀더 대중적이며 선율적이고 불협화음이 덜한 양식으로의 전환점에 서 있다. 이 곡은 신고전주의적 요소를 지닌 가벼운 작품이다. 이것은 피아노에서 두 성부의 대위법적 기법을 많이 사용함에서 오는 투명하고 또혓한 짜임새에서 특히 명백하다. 때때로 피아노를 타악기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프로코피에프의 접근 방식을 회상시킨다.
<피아노 콘체르토 2번>은 1957년 5월 10일 19세가 된 작곡가의 아들에 의해 그날 초연되었다. 이곡은 발랄한 활력으로 가득 찬 가벼운 작품이다. 바깥 악장들의 피아노 기법은 양손의 간단한 옥타브 중복에 의에 지배된다. 안단테의 중간 악장은 평범하지만 서정적이다. 이어서 활기찬 무곡풍의 마지막 악장이 자주 반복되는 리듬을 동반하여 나타난다.
★로디온 쉬체드린(1932년 生)
1930년대 태생의 작곡가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로 지목된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고, 1954년에 자신의 활기찬 <피아노 콘체르토 1번>을 연주하여 졸업했다. 이 콘체르토는 구소련의 다양한 인종이 지닌 민속 음악을 비롯하여 1951년 현지에서의 민요 채보를 포함하여 평생토록 깊은 관심을 자신의 작품 세계에 반영하였다. 매우 전통적인 이 작품은 전세대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의 음악에 분명한 근원을 둔다. 네 악장으로 구성된 이 콘체르토는 대중적인 러시아 선율 chastushka와 볼로그다의 민요선율을 포함한다. <피아노 콘체르토 2번>(1966)은 무조성적 요소를 지니고 있고, <피아노 콘체르토 3번>(1974년경)은 당시의 전형적인 몇 가지 경향을 혼합하고 있다.
쉬체드린은 우연음악을 뛰어난 연주가에게 더 큰 책임을 지우는 새로운 방법으로 보고 있다.
2.영국의 콘체르토
화려한 작곡가 헨리 퍼셀(Henry Purcell, 1659~1695)의 사후 중요한 작곡가가 나타나기까지 영국은 200년을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긴 시간적 틈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영국의 문화생활에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었고, 런던은 유럽에서 가장 큰 음악 중심지 중의 한 곳이었다. 18세기 동안 헨델과 J.C바흐를 비롯한 몇 명의 대작곡가들이 대륙에서 런던으로 이주했고, 19세기를 통하여 멘델스존과 드로브작을 포함한 다수의 중요한 작곡가들이 이 도시를 방문하여 이미 풍부한 음악세계를 더욱 윤택하게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에드워드 엘가의 음악적 명성이 이름을 떨칠 때까지는 유럽 대륙의 작곡가와 겨룰 만한 영국 태생의 작곡가가 태어나지 않았다.
★에드워드 엘가(1857~1934)
바이올린, 첼로, 바순까지 여러분야의 너무나 유명한 작품을 작곡한 엘가이지만 피아노 작품으로는 1909년에 시작한 피아노 콘체르토를 미완성으로 남겨 놓았다.
★본 윌리암스(Vaughan Williams, 1872~1958)
본 윌리암스의 음악은 민요 선율의 모방이나 인용으로 가득 차 있고, 기교 과시가 없는 음악 양식을 발전시켰다. <피아노 콘체르노>는 세 악장으로 되어 있고, 악장 사이가 중단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 곡은 끊임없는 토카타 양식으로 된 알레그로 모데라토 악장으로 시작한다. 두대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으로 만들어진 1946판에는 마지막 부분이 조용히 끝 맺는다.
★윌리암 월톤(William Walton, 1902~1983)
월톤은 자신을 '서정적 정감을 가득 지닌 고전적 작곡가'로 묘사했다. 길고 서정적이면서 신랄한 선율선을 만드는 그의 능력은 감탄을 받고 있다. 이 특성은 종종 강한 리듬적 특징과 혼합된다. 선율은 화려한 화성적 지지를 받는다.
콘체르토 형식에 대한 월톤의 최최의 시도는 피아노가 쓰이는 두 곡이다. <두 대의 피아노와 재즈 악단, 오케스트라를 위한 판타지아 콘체르탄데>로 알려진 최초의 작품은 1923년에 작곡되었으나, 작곡가에 의해 파기된 듯 악보가 없다. 두 번째 곡인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1928)는 매우 서정적인 악장을 포함하는 최초의 곡 중에 속한다. 재즈의 영향을 받은 리듬이 지배적이고, 구조는 그의 후기 대규모 작품에서처럼 주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 1913~1976)
브리튼의 서정적인 음악사고는 짧은 형식의 곡에 가장 잘 어울리고, 그는 이 짧은 곡을 중요한 대규모 작품을 만들기 위해 서로 관련지었다. 실내악과 오케스트라 음악에 이르는 광범위한 작품에서 그는 조곡과 같은 한정된 형식은 선호했고, 그의 서적 환상을 적당히 한정된 규모에 사용할 수 있는 파사칼리아 같은 변주곡을 점차 좋아하게 되었다. 그의 콘체르토는 그의 음악적 편애를 확인시켜준다.
브리튼은 실력있는 피아니스트였고 피아노의 다양한 '성부들'을 나타내기 위해 1938년(1945년에 개작됨)에 <피아노 콘체르토>를 작곡했다. 토카타, 왈츠, 리시타티보가 붙은 아리아와 행진곡으로 구성된 네 악장의 조곡같은 구조는 전통적인 화려한 콘체르토와는 전혀 다르다.
★마이클 티펫트(Michael Tippett, 1905년 生)
1953년에서 1955년 사이에 작곡된 티펫트의 피아노 콘체르토는 좀더 전통적인 양식에 대규모 작품으로, 하나의 독주 악기가 기교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그는 베토벤의 <피아노 콘체르토 4번>의 무대 연습을 듣는것이 이 작품의 형성에 영감을 주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베토벤 작품처럼 피아노가 '노래'할 수 있는 서정적인 작품을 만들려 했다. 둘째 악장은 베토벤의 기이한 중간 악장으로부터 직접적인 영감을 얻은 듯하다. 즉 피아노에 의해 완전히 조용해질 때까지 현악기들은 간헐적으로 움직인다. 마지박 악장은 오케스트라가 론도 주제를 연주하고 피아노가 에피소드를 연주하는 론도 형식으로 되어있다.
3.스트라빈스키, 라벨과 프랑스에서의 신고전주의
신고전주의란 용어는 낭만주의 음악의 무절제한 감정 표현에 대한 반항으로써 전개된 음악양식을 가리킨다. 이 새로운 양식은 '객관성'으로의 회귀와 낭만시대 이전의 음악구조와 양식적 요소의 부활에 그 근원을 두었다. 새로운 양식의 뛰어난 특징은 다음과 같다.
*좀더 친숙하고 작은 규모의 작품으로 기울어지려는 경향.
*실내악이나 소규모의 오케스트라와 같이 덜 화려한 연주집단의 사용.
*대위법적 선율이 각기 분명히 들려질 수 있도록 만든 투명한 선율 배치.
*전음계적 조성의 창조적 사용에 새로운 관심을 두지만 수정된 20세기 방법에 의거함.
*조곡, 토카타, 파사칼리아와 같은 구식 형식의 사용.
17세기와 18세기의 바로크 음악은 신고전주의 작곡가에게 특히 관심의 대상이었고,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새 양식의 요소는 바로크 시대의 많은 특징에서 유래되었으므로 신바로크주의라 불리는 것이 더 적당하다. 콘체르토는 이 새로운 양식에 있어서 다양한 변화를 겪는다. 아마도 가장 현저한 변화는 콘체르토 그로소의 부활일 것이다.
신고전주의의 양식이 프랑스에서 중요한 방법으로 대두된 것은 세계 제1차대전 이후가 되어서 였다. 이상하게도 주도니 지지자는 러시아에서 이민와 1920년에서 1939년까지 프랑스에 살았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였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
콘체르토 부류에서 스트라빈스키가 만든 다음 두 작품에는 그가 즐겨 사용하는 피아노가 등장한다.
<피아노와 목관악기를 위한 콘체르토>에서 현악기를 거의 제거한 것은-더블베이스만 요구된다-신고전주의 양식의 또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스트라빈스키와 낭만적 전통으로부터 멀어지려 했던 작곡가들은 특히 바이올린과 같은 온화한 현악기가 주관적인 정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하여 되도록 호피하려 했다. 낭만적 기법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지기 위하여 스트라빈스키는 마깥 악장들에서 피아노의 타악기적인 잠재성을 개발했다. 그래서 느린 중간 악장에서 레가토 주법이 요구된다. 스트라빈스키 자신에 의한 이 콘체르토 연주는 특히 메마르고 타악기적이었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세 악장의 카프리치오소>는 1928~1929년에 작곡되었다. 이 곡엔 스트라빈스키가 그의 작곡 영웅인 차이코프스키의 영향 아래 막 작곡한 <요정의 입맞춤>이 지닌 우아한 매력이 한층 가미되어 있는 듯하다. 카프리치오소에서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초기 콘체르토가 지닌 타악기적 특성을 제쳐두고 낭만주의가 지닌 화려한 기법의 전통에 따라 피아노 부분을 만들었다. 알레그로 카프리치오소로 도니 셋째 악장이 가장 먼저 작곡되었고 이 곡의 이름을 위한 바탕이 되었다.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
모리스 라벨의 음악은 당대의 프랑스 인상주의 대가인 끌로드 드뷔시의 음악과 관련되어 있지만, 라벨은 단지 특별한 약간의 인상파적 기교만을 사용했다.
라벨을 두 곡의 콘체르토를 1931년에 완성했다. 그는 1929년에 <콘체르토 사장조>를 작곡하기 시작했으나 한쪽에 제껴두고, 한 팔을 잃어 버린 비엔나 피아니스트 폴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특이한 <왼손을 위한 콘체르토 라장조>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몇개의 대조되는 템포를 지니며 단일의 지속적인 악장으로 된 더 진지한 작품이다. 피아노 성부는 양손을 위한 콘체르토에서 보다 더 복잡하다. 라벨은 단지 한손을 위한 작품이 지난 한계를 극복하려고 너무나 복잡하게 만들어서 악보상에는 대부분 두 개의 자리표가 필요하다. 이 특이한 작품을 준비함에 잇어서 그는 주로 약한 손을 강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체르니와 스크리아빈의 어려운 연습곡 뿐만 아니라 생상의 왼손을 위한 연습곡과 쇼팽 연습곡의 편곡집을 연구했다.
<피아노 콘체르토 사장조>는 1929년에 있었던 라벨의 첫번째 스페인 방문에 의해 영감을 받아 스페인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특히 이 콘체르토에 착수하게 된 곳이자 그의 고향인 바스께 지역에 의해 영감을 받아 작곡되었다. <콘체르토 사장조>는 모짜르트와 생상 이라는 두 작곡가의 기질로 작곡되엇지만, 스트라빈스키와 거쉬인과 재즈와 스페인 음악이 이 콘체르토를 채색하고 있어서 라벨의 가장 매력적인 작품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프랑시스 폴랭(Francis Poulinc, 1899~1963)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폴랭은 다섯 곡의 콘체르탄테 작품을 작곡했는데, 피아노를 위한 세 곡과 오르간을 위한 한 곡, 하프시코드를 위한 한 곡으로 모두 건반악기용이다. 하프시코드를 위해 작곡된 최초의 콘체르토는 분명히 가장 신고전적인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1929년 10월 콘체르토 <샹페뜨르>를 완성했고, 이 콘체르토는 20세기에 작곡된 몇 안되는 중요한 하프시코드 콘체르토일 뿐만 아니라 풀랭의 가장 초기 신고전적 작품 중의 하나이다.
그 이듬해에 풀랭은 피아노와 18대의 관현악기를 위한 안무 콘체르토인 <오바드>를 작곡했다. 이 작품의 구조는 20여분의 단일악장 속에 열 개의 분명한 부분으로 나누어져서 18세기모음곡의 구조와 닮았다.
두대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좀더 전통적인 <콘체르토 라단조>(1932)는 풀랭의 가장 자주 연주되는 곡 중의 하나이다. 곡 전체에서 피아노가 등장하고 한 대의 피아노가 자주 사용되지만 특히 기교적인 소재를 많이 맡지는 않는다.
<오르간 콘체르토 사단조>(1938)는 1936년 이후 풀랭의 음악이 좀더 진지한 성향을 띠게 되며 이러한 새로운 접근 방법이 초기의 신고전주의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풀랭의 마지막 콘체르토는 한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이다. <피아노 콘체르토>를 1949년 풀랭이 좋아했던 가수 피에르 베르낙과의 미국 여행 동안 보스톤 교향악단의 위촉에 의해 만들어졌다.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토와 같이 이 곡은 전통적인 세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4.20세기 초기의 중요한 작곡가 5인
★아놀드 쇤베르크(Anold Schoenberg, 1874~1951)
비엔나 작곡가인 아놀드 쇤베르크의 초기 음악은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 전통으로 가득 차 있다.
쇤베르크가 <피아노 콘체르토 Op.42>(1942)를 작곡했을 때 그는 68세였다. 음렬주의 기교의 중요한 이완은 이 곡의 희미한 조성적 분위기에서 분명해진다. 초고 가운데 발견된 쇤베르크의 자필 기록은 그가 이 콘체르토를 연주하게 되어 잇었던 오스카르반트에게 준 표제적 내용을 담고 있다.
삶은 참 편안했다[안단테]
증오가 갑자기 일어났다[알레그로]
침통한 상태가 되었다[아다지오]
그래도 삶은 지속된다[론도]
피아노 콘체르토는 조용하며 서정적인 악절과 대단히 떠들썩한 악절이 교차되는 감정적인 작품이다. 이곡은 독주 악기가 오케스트라와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어서 바이올린 콘체르토보다 더 교향악적으로 계획되었다.
★안톤 폰 베베른(Anton von Webern, 1883~1945)
베베른은 1906년 비엔나 대학에서 20세기 초반기의 저명한 음악학자인 귀도 아들러의 지도를 받아 역사음악학 박사 학위를 마쳤다. 베베른의 논문은 하인리히 이삭의 음악을 다루었고, 이삭의 복잡한 대위법적 짜임새는 베베른의 음악에서 현대적 표현의 길을 열어주었다. 대학 재학 시절에 베베른은 쇤베르크의 제자였다.
<아홉대의 악기를 위한 콘체르토 Op.24>는 처음에 피아노 콘체르토로 계획되었으나 베베른은 이 건반악기를 조민한 실내악 짜임새에 통합시켰다. 이 작품에는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혼, 트럼펫, 트롬본,바이올린, 비올라, 피아노가 사용된다. 피아노는 여덟대의 다른 악기에 주로 맞서고 있으나 동시에 합주가 잘 이루어지기도 한다. 베베른에 의해 9분 정도의 길이로 명시된 이 곡은 세 악장으로 되어 있다.베베른의 역사적 중요성과 독특한 의미와 그의 콘체르토의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이 곡은 현대의 청중들에게 조차 기이하고 접근하기 어렵게 느껴지므로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
★알반 베르크(Alban Berg, 1885~1935)
베베른과 마찬가지로 1904년에 쇤베르크의 제자가 된 알반 베르크는 화성학과 대위법에 관해 업격한 훈련을 받았다. 피아노와 바이올린과 13대의 목관악기를 위한 <실내 콘체르토>(1923~1925)는 아홉 대의 악기를 위한 베베른의 콘체르토가 만들어지기 거의 10년전에 완성되었다. 베르크는 12음기법을 택한 후 초기 단계에서 이 곡을 작곡하였고, 이 작품은 음렬주의적 요소와 자유스런 무조성적 요소와 조성적 요소를 포함한다.
★벨라 바르톡(Bela Bartok, 1881~1945)
바르톡은 드뷔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프랑스 작곡가는 모든 음악가들에게 화음에 관한 느낌을 복귀시켰다. 그는 우리에게 진보적인 형식을 밝혀준 베토벤처럼 중요하고, 우리에게 대위법의 탁월함을 알게 해준 바흐처럼 중요했다. 나는 언제나 어느 누군가가 이 세명의 대가들을 종합하여 활기찬 현대적 양식을 만들 수 있을까 하고 나 자신에게
물었다.
바르톡은 바로 그렇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고향인 헝가리로부터 유래된 요소들을 덧붙였다.
이 뛰어난 작곡가는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교수였고, 그의 많은 작품 내에서 피아노를 중요한 위치에 두었다. 프로코피에프와 마찬가지로 바르톡은 피아노의 타악기적 가능성을 개발하는 데 관심을 쏟았고, 이것은 <피아노 콘체르토 1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피아노를 이렇게 사용한 것은 부분적으로 바르톡의 피아노 콘체르토 세 곡중에서 이 곡이 가장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바르톡은 피아니스트가 손 전체나 팔뚝으로 건반을 내리침으로써 커다란 군집음을 연주하도록 요구하는 혁신적인 미국 작곡가 헨리 코웰의 음악에 의해 군집음 사용에 관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피아노 콘체르토 2번>은 1번과 마찬가지로 작곡과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작곡했다. <피아노 콘체르토1번>이 지닌 화려한 기교와 타악기적 특성은 2번에서 좀더 매력적인 주제와 화려한 관현악 편성에 의해 순화되었다. 그 결과 <피아노 콘체르토 2번>은 20세기의 피아노 콘체르토 중에서 가장 탁월하며 흥분을 자아내는 곡 중의 하나가 되었다. <피아노 콘체르토 2번>은 다양한 기교와 양식을 조직적이며 대칭적인 구종에 성곡적으로 융합시킨 바르톡의 능력을 잘 예시한다. 이 콘체르토는 세악장으로 되어 있고 중간 악장이 세부분으로 되어 있어서, 가장 중간에 프레스토를 두고 아치형으로 이루어진다.
<피아노 콘체르토 3번>(1945)은 피아노의 타악기적 성질과 피아노와 타악기의 관련이 특히 강조된 초기 피아노 콘체르토와는 상당히 다르다. 여기에서는 서정성이 그것의 목적이다. 바르톡은 회복되지 못했으나 이 음악에서 표현된 것처럼 마음의 평화를 찾은 듯하다. 바르톡은 <피아노 콘체르토 3번>의 마지막 17마디를 제외한 모든 부분을 완성시켰고, 이 17마디는 작곡가의 작품에 정통한 티보 설리에 의해 메꾸어졌다.
★폴 힌데미트(Paul Hindemith, 1895~1963)
힌데미트는 오르간을 위해 두곡의 콘체르토를 작곡했다. 첫째 곡은 1927년에 연이어 발표된 실내음악 (Kammermusik)의 마지막 7번째 곡이고, 그 다음 곡은 서거하기 전해인 1962년 작품이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링컨센터 개관 연주를 위해 위촉한 후자의 작품은 1963년 4월 25일 링컨센터에서 오르가니스트 안톤 하일러(Anton Hiller)의 연주와 작곡가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힌데미트의 전형적인 후기 작품인 <오르간 콘체르토>(1962년)는 귀에 거슬리는 화성(3도의 칸초네타인 특이한 셋째악장을 제외하고)과 가장 관능적이며 모호한 관현악 기법을 혼합하고 있다.
5.유럽, 중남미, 캐나다의 작곡가들
★스페인
작곡가이자 선생이며 음악학자인 펠립페 페드렐(Felipe Pedrell, 1841~1922)은 스페인 음악의 부활에 책임을 졌다. 그는 스페인 민속 음악과 16세기 스페인의 고전 음악을 사람들에게 소개하여 그들로 하여금 스페인의 다양하고 풍성한 음악적 유산에 관심을 갖도록 자극했다. 그의 주된 제자 세 명은 이삭 알베니즈(Issac Albeniz, 1860~1909), 엥리께 그라나도스(Enrique Granados, 1867~1916),마누엘 드 팔랴(Manuel de Falla, 1876~1946)이다.
★프랑스와 스위스
프랑크 마르틴(Frank Martin, 1890~~1974)은 프랑스 혈통의 스위스 작곡가였다. <피아노 콘체르토 1번>은 그가 사용한 12음 기법을 보여주고 있고, 1936년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국제 현대음악협회의 14번째
축제에서의 초연은 다른 작곡가들도 비슷한 방법으로 이 기교를 선택하게 만든 것 같다. 그의 양식은 또한 리듬적 생동감, 오스티나토 음형, 화려한 관현악 편성으로 우아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동형반복진행하는 반음계 선율로 자유로운 형식과 간단한 3화음의 간헐적인 사용 등을 포함한다.
앙드세 졸리베(1905~1974)는 파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대분분의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의 음악에서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한 타악기는 <타악기 콘체르토>(1958)에서 선택되어졌다. <피아노 콘체르토>는 세계의 다른 지역 음악에서 전형적인 선율과 리듬 형태가 이 곡에 색채를 더한다.
<트럼펫, 피아노, 현악기를 위한 콘체르티노>(1948)는 훨씬 더 매력적인 작품이고 그의 작품 중 가장 자구 연주되는 곳이다. 피아노는 마지막 가까이에서 짧은 독주 부분을 갖고 있고 리듬적으로 활기찬 변주곡인데, 네 번째 변주를 제외한 모든 변주가 활기찬 템포로 되어있다.
★이탈리아
콘체르토의 시작이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졌지만 18세기 후반과 19세기의 대부분 이탈리아 작곡가들은 이 형식에 거의 관심을 쏟지 않았고, 대신에 오페라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독일
페루치오 부조니(Ferrucio Busoni, 1866~1924)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나 독일과 이탈리아의 혼합된 전통을 접할 수 있었다. 부조니는 5악장으로 된 대규모의 <피아노 콘체르토 다장조>(1903~1904)를 작곡했다. <피아노 콘체르토>는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필요로 하는 마지막 악장에서 데인 아담 고트롭 웰렌쉬레거(Dane m Adam Gottlovehlenschlager,1779~1850)의 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남성합창이 노래하도록 만든 후기 낭만주의 작품이다. 부조니는 이 작품에서 그의 이탈리아적 전통을 강조하려 한 것 같다.
막스 레거(Max Reger,1873~1916)는 <피아노 콘체르토 바단조 Op.114>(1910)를 아주 짧은 오케스트라 서주 수에 독주 악기가 나타나며 주제의 발전이 더 농축되어 피아노가 무거운 오케스트라 음향을 압도할 수 있도록 만든다.
보리스 블라헤(Boris Blacher, 1903~1975)는 조성적인 뼈대 내에서 매우 개성적인 양식을 형성했다. 일반적으로 밝고 유쾌한 그의 음악은 그가 "변박자"라고 칭한 박자의 체계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독특한 리듬 체계와 융합되어 있다. <피아노 콘테르토 Op.42>(1952)에서처엄 매우 전형적으로 블라헤는 볓 가지의 반복 형태 종류를 만들었다.
★체코슬라바키아와 헝가리와 폴란드
레오스 야나책(1854~1928)은 드보르작의 서거 이후 그 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작곡가의 역할을 했다.
<피아노, 두대의 바이올린,비올라, 클라리넷, 혼, 바순을 위한 콘체르티노>(1925)는 진정한 콘체르토라기보다 실내음악쪽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피아노가 나타날 때에도 다른 악기들은 네 개의 모든 악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제르지 리게티(Gyorgy Ligeti, 1923년 生)는 바르톡 이후 가장 뛰어난 헝가리 태생의 작곡가이다.
★중*남미
알베르토 히나스테라(Alberto ginastera, 1916~1983)의 <피아노 콘체르토 1번>(1961)은 대부분의 그의 콘체르토에서와 같이 다섯명이 연주자에 의한 타악기를 포함하여 큰 규모의 오케스트라를 요구한다. 음렬주의적 접근방식을 네 악장에서 나타난다.
카를로스 샤베츠(Carlos chavez, 1899~1978)는 멕시코에서 가장 잘 알려지 작곡가이다. 그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토>(1938~1940)는 매우 세련된 리듬감과 타악기적으로 추진력이 가미된 오케스트라의 효과적인 사용을 보여준다.
★캐나다
힐리 윌란(Healey Willan,1880~1968)은 그가 고향에서 터득한 보수적 양식을 캐나다에 가져왔다.
<피아노 콘체르토>(1944)는 브람스나 엘가의 전통에 따른 선율적 작품이다.
끌로드 샴페인(Claude Champagne, 1891~1965)의 신고전주의적 형태로 되어 있는 <피아노 콘체르토 라단조>(1948)는 그의 몇 곡 안되는 추상적 작품중의 하나이다.
존 바인츠바이그(1913년 生)의 <피아노 콘체르토>(1965~1966)는 독주악기도 오케스트라가 짧은 대화를 자주 나누게 된 세 악장의 매력적인 12음기법 작품이다.
6.미국에서의 콘체르토
★에드워드 멕다웰(Edward ManDowell, 1860~1908)은 미국에서 태어난 작곡가에 의한 최초의 중요한 콘체르토로써 그의 이름이 거명될 정도로 탁월하다. <피아노 콘체르토 1번 가단조>(1882)는 프란츠 리스트에게 헌정되었다. 그보다 잘 알려진 <피아노 콘체르토 2번라단조>(1888)는 미국에서 그의 스승이었던 테레사 카레뇨에게 헌정되었다. 세 악장으로 된 이 곡은 느린 악장이 없음으로 인해 약간 특이하다.
★재즈의 영감에 의한 콘체르토
재즈는 아프리카 미국인과 유럽인의 음악적 요소가 독특하게 종합된 결과로 미국에서 발생했다. 악기와 조성적 화성체계와 근본적인 선율 구조는 유럽에서 왔다. 리듬의 다양한 형태 프레이징과 음향산출 및 약간의 화성적 이탈은 아프리카 미국인의 전통으로부터 생겨났다.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의 한 사람인 조지 거쉬인(George Gershwin, 1898~1937)은 매력적이고 기억에 남을 만한 선율 창작에 남다른 능력과 초기 재즈 양식에 대한 그의 이해력을 통합시켰다. 그 결과는 두 개의 콘체르탄테 작품으로 나타났다. 거쉬인은 유명한 무용음악단 단장이었던 폴 화이트만의 요청에 의해 재즈악단과 피아노를 위한 <Rhapsody in Blue>(1924)를 작곡했다. 이 곡은 매우 광시적이고 쉬는 부분에 의해 분리되는 많은 부분들로 구성되었다. 대규모 작품의 작곡에 대한 거쉬인으 미비한 경헙은 부분사이의 효과적인 경과국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주제의 발전보다는 반복에 지속적으로 의존하는것으로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선율의 풍성함, 활기찬 당김음, 대량의 blue음표와 재즈 화성을 이러한 기교적 결함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바장조의 콘체르토>(1925)는 그를 가장 위대한 미국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되게 하였다. <Rhapsody in Blue>의 성공에 이어 <콘체르토 바장조>역시 대성공을 거둔 이후에도 거쉬인은 그의 일생 내내 음악이론과 작곡 레슨을 받으면서 여러 가지 개선책을 지속적으로 모색했다.
후기
코리그리아노의 클라리넷 콘체르토에서 셋째 악장의 시작과 끝에 보여지는 중요한 선율적 소재는 지오바니 가브리엘리의 "Sonata Pian e frote"로부터 인용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콘체르탄테 양식을 처음 개발한 16세기 후반의 베니스 작곡가들에 의한 콘체르토의 근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거의 400년 동안 콘체르토는 독주 악기나 둑주 악기군이 오케스트라에 병치될 수 있는 가능성에 매료된 독창적인 작곡가들의 손에 의해 번창하고 있다. 기교 과시도 현재의 음악계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되어 있고, 미래의 음악계에서도 이것의 위치는 확실해 보인다. 결국 뛰어난 연주가들은 그들을 위해 작곡된 새로운 작품에서 자신의 재능을 여전히 과시하고 싶어한다. 청중들은 계속하여 기교 과시에 의해 감동될 것이고, 가장 뛰어난 작곡가들은 음악적으로 의미있는 방법을 동원하여 그러한 악절을 계속해서 그들의 콘체르토에 포함시킬 것이다. 그리고 작곡가들이 콘체르토를 작곡하기 위하여 새로운 방법을 발견할 때에도 독주자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대치와 협동이라는 근본적인 이원성은 형식의 심방부에 늘 놓여지게 될 것이다.
콘체르토는 처음 3세기 동안 화려하게 풍성하며 놀랍게도 변화된 역사를 만들면서 번성했다. 콘체르토는 20세기에서도 그것의 활력을 지속적으로 입증했고 미래에도 그러하리라는 징후가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