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心臟) (구상회)
“부정맥(不整脈)이
더 심해졌습니다.” 심전도를 한참 쳐다보던 의사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한 달 전에 심장 전문의 진찰실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부정맥이
있다는 진단을 받은 지는 수년이 되지만 아직까지는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고 있었다. “심방세동(atrial
fibrillation)이 가끔 있어 그의 합병증인 중풍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혈액 희석제(anticoagulant)를
처방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서맥(徐脈)이 있어 심장이 일 분에 30-40번 밖에 뛰지 않는 일이 가끔 일어나고 있으니 심박
조율기(pacemaker)도 넣어야겠습니다.”(보통 심장 박동은 1분에
60-100이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혈압은 40세부터
있어 혈압약을 40년 동안 먹고 있었으나 여러 해 약문 치료로 혈압이 잘 조절되고 있어 걱정하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해가 가면서 신장기능(腎臟 機能)이 악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투석(透析)이 필요한 즉전 단계에 있다. 나의 만성신부전(慢性腎不全)이 고혈압의 합병증인지 별도의 문제인지는 전문의도 확실한
답을 못하고 있다. 만성신부전은 몹시 악화할 때까지는 증상이 없는 것이 보통이라 나도 정상인과 같이 활동하고 있었다. 단, 만성신부전이
있는 사람은 심장병(心臟病)이 합병증으로 올 수 있다 하여
심장전문의를 수년 전에 보고 부정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 해
전까지도 혈액 희석제나 심박 조율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끝판에 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의학이 발전한 현재는 이 같은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도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이러한
치료가 생명의 은인이 될 수 있기는 하나 혈액희석제 때문에 별것 아닌 상처가 큰 출혈이 될 수 있고 위험한 위장출혈(胃腸出血), 뇌출혈(腦出血)등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 삶의 원동력인 심장 박동이 심박 조율기 배터리에 의존하며 살아야 한다는 불안감, 불쾌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있는데
의사는 말했다: “치료를 결정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Holter monitor(홀터 심전도) 검사를
해보겠습니다.” 그리하여 심전도를
72시간 쟀다. 검사가 끝나고 열흘이 되었는데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초조하여 의사 오피스에 전화하였다. 비서는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다시 연락하겠습니다.”하고는 이틀 후에서야 답이 왔다: “의사
선생님이 홀터 심전도 결과가 별로 나쁘지 않아 지금은 치료할 필요가 없으니 5개월 후에 다시 보시겠다
합니다.” 전에 한 말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그러나
나는 앞에 받을 치료에 지레 겁부터 잔뜩 먹고 주눅이 들고 있는 터라 5개월 여유를 주겠다는 의사와
언쟁을 벌일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집행 유예를 받은 죄수처럼… . 지난 한 달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의사가 혈액 희석제와 심박 조율기를 처방하겠다는 말을 듣고 왜 그리 당황하였을까? 왜 늙은 신체는 고장이 날 수 있고 기능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지 못하였을까? 심장을 포함한 인간의 몸은 자동차 부속품같이 xx년 품질 보증서를
받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왜 살아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기든지 담담히 받아들이는 지혜와 여유를 갖지
못하였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그것을
차분히 받아드리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선 나는 의식주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내가 어렸을 때는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없었다. 또 신체가 완전치
못한 것을 불평하기 전에 아직도 제대로 활동하는 신체 기능을 고마워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어제 밤에 1~2시간
씩 잠에서 깨기는 하였지만 여섯 시간은 잘 수 있었고,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픈 곳이 없어 지팡이나
보행기를 의지하지 않고도 곧바로 서서 걷기 시작할 수 있었다. 식욕이 줄어 소식하고 있기는 하나 세
끼를 맛있게 먹고 제대로 소화하고 있다. 몇 해 전까지 10킬로미터를 60분에 거뜬히 달릴 수 있었으나 지금은 60분을 계속 걸을 수 있으면
만족하게 생각하고 있다. 눈이 어두워졌고 귀도 먹어 가고 있으나 돋보기안경을 쓰면 큰 글자는 볼 수
있고 보청기를 끼면 큰 소리는 들을 수 있다. 기억력이 현저히 감퇴하여가고 있기는 하나 아직은 치매
증상은 없다. 많은 사회 활동은 하지 않고 있으나 몇몇 모임에는 나가고 있고, 가까운 친구와는 인터넷으로 매일 안부를 묻고 있다. 아내도 건강이
그만하고 자식, 손주 여럿 가운데 큰 걱정을 시키는 애들은 없다. 그리고
캐나다에 사는 덕분에 몸이 불편하면 언제나 의사를 볼 수 있고 치료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지난 5년 동안에 세 장기(전립선, 갑상선,피부)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았으나 세 가지 암이 다 악성이 아니고
암세포 전의(轉移)도 없어서 지금은 완치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 암 치료비에 수만, 또는 수십만 달라가 들었을 텐데 내 호주머니에서
나간 돈은 병원 주차비뿐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 구순(九旬)이 머지않은 내 또래에 이만한
신체와 정신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5개월 후에 의사를 보고 다시 검사하면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또 언제 무슨 치료가 필요하다 할지 모른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차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를 스스로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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