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교의 용광로인 한국 사회
한국처럼 다양한 종교 시장이 형성된 나라가 있을까. 불교·유교·도교·기독교, 그리고 한국의 근대 자생종교인 천도교·증산교·원불교, 여기에 여러 민족종교가 민중의 삶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나아가 최근에는 저 먼 중동의 종교라고 생각한 이슬람이 상륙하여 예배를 알리는 ‘아잔’ 소리가 서서히 커지고 있다. 어디 이뿐인가. 대만계, 일본계 신종교도 활동하고 있다. 인구가 많은 중국이나 세계 각지의 이민으로 구성된 미국이 다종교사회임은 익히 알고 있다. 한국은 동서양의 모든 종교가 각축하듯이 활동하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자기만의 사회 문화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며 정치적인 힘도 발휘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는 세계 어느 사회에서도 보지 못하는 광경이다.
문화의 보고인 종교의 다양성이 존재하는 이 사회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신라 최치원의 <난랑비(鸞郞碑)>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있다.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이 가르침의 근원은 선가사서(仙家史書)에 상세히 실려 있으니, 실로 삼교를 포함하고 모든 생명을 접하여 감화시킨다. 집에 들어온 즉 효도하고, 나간 즉 나라에 충성하니 그것은 공자의 교지(敎旨)와 같다. 처한 곳에서는 무위(無爲)의 일에 머무르고, 말없이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은 노자의 종지(宗旨)와 같다. 모든 악한 일을 짓지 않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석가의 교화(敎化)와 같다.” 모든 종교의 근원에서 만나고, 그 어떤 종교의 가르침도 포용하는 현묘한 도인 풍류가 중심 철학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문화적 이동과 소통로인 한반도는 사상의 용광로였다. 오늘날 한류 혹은 K-문화의 세계적인 붐은 이러한 전통의 축척이 대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이 땅의 특수한 문화와 사상이 세계적인 보편성 획득을 위해 오랜 숙성을 거친 결과다. 이 풍류야말로 한국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아낌없이 발휘하는 근원임을 이미 오랜 전에 밝힌 것이다. 그렇다고 이 풍류가 무엇인지 정확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필자의 생각으로 그것은 하나의 인격체가 아닐까 생각된다. 바람처럼 자유자재하여 어떤 굴곡에도 흔들림이 없고, 자유와 평등과 정의로운 세계를 구축하며, 마침내 자비와 사랑과 은혜의 종교적 가치마저 구현해 내는 인격자의 내면이 아닐까.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는 이러한 삶의 내용을 철학적으로 정립한 것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문화 강국의 뒤를 이은 한국인의 정신세계의 근원에는 이처럼 아시아와 세계 각지의 종교를 받아들인 그 힘이 작동하고 있다. 머지않아 나는 한국에서 숱한 불보살과 성현들, 그리고 그들이 설파한 성경현전들이 세계로 확산될 것이라고 본다. 지금은 노래, 드라마, 언어, 음식 등이 세계인들에게 환영받고 있지만, 이 역동적인 종교 사회가 융합하여 새로운 인간형, 지구적 차원의 보편적인 철학과 종교적 가르침을 설파할 구루(Guru)들이 탄생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적 이상을 펼치기에는 아직 거쳐야할 과정이 남아 있다. 종교의 자유라는 국가법의 테두리 내에서 등거리 조화를 유지하고 있지만, 종교라는 도그마를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의 한계에 처한 현실 때문이다. 다행히 과거 유럽과 현재의 중동에서 보듯 지금 이 순간은 종교전쟁으로 인한 극한의 고통이 없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2) 종교간 갈등의 현실
1998년 제주 원명선원에서 불상 750점의 머리가 잘려나간 사건이 있었다. 세계 언론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기도 했다. 한 젊은 청년이 절을 교회로 만들기 위해 자행했다고 한다. 2016년에는 한 기독교인이 김천의 개운사에 들어가 불상을 훼손하고 집기를 부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접한 서울기독대학교의 손원영 교수가 ‘개운사 훼불 모금운동’을 펼치던 중 자파의 이념과는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일탈된 개인의 이웃종교 성물 훼손과 파괴, 성역 침입, 의례활동 방해 등은 상당한 수에 이른다.
그뿐만이 아니라 최근에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종교 편향적인 일들을 벌이고 있다. 최근 불교계 신문이 발신하고 있듯이 서울시가 공공역사 왜곡과 공공장소를 성역화하고 있다. 광화문 광장에 시복 표지판과 같은 천주교 상징물들의 설치나 서소문 공원의 성지화에 공적 자금이 투입된다는 것이다. 이웃종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수많은 불교의 문화재를 세금을 들여 보호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1800여 년 전에 정착한 불교가 한국인의 삶에 그만큼 밀착한 역사적 흔적이다. 최근 근대문화나 지역문화 유산에 이웃종교의 건축이나 성지가 채택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종교 편향에 대한 현실을 보다 면밀히 들여다보면 문제점을 잘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불교IN>(2024년10월18일자)이 보도한 것으로 현 충남 도지사는 천주교의 서산 해미국제성지 일대에 1250억 원의 세금을 투입하기로 했다고 한다. 2027년에 개최될 천주교 세계청년대회를 앞두고 이를 기획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지사는 또 대회를 계기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재방문을 교황청에 요청하고, 도청 회의에서는 “해미읍성은 천주교 성지로 보전하고 물려줘야 할 유산”이라고 말했다. 사찰의 템플 스테이처럼 천주교 스테이도 추진하기 위해 정부와도 협의를 하겠다고 한다.
이 해미읍성(海美邑城)은 1963년 사적 116호로 지정되었다. 사적지가 된 이유는 오랜 역사성 때문이다. 충청도의 군사·행정 중심지 역할을 했던 전통적인 관청과 그 부속 건물은 복원작업을 거쳐 관광지는 물론 역사체험축제의 장이 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근무하기도 하고, 동학농민혁명운동과 3·1독립만세운동의 터이기도 해서 더욱 의미가 있다. 즉 다층의 역사가 서린 곳이다. 물론 조선말기의 천주교 탄압당시 천여 명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천주교인 박해를 한 관아는 해미진영이었지만, 정확한 순교 장소에 대한 논란이 있다. 2014년 교황이 해미순교성지 기념관에서 순교자의 개막식에도 참여하고, 천주교 아시아 청년대회의 미사 주례를 서기도 했다.
또 하나는 여주시의 주어사(走魚寺)와 천진암(天眞庵)에 관한 것이다. 탄압으로 피신해온 천주교인을 도와준 승려들도 함께 처형을 당한 1801년 신유박해와 관련된 곳이다.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본 천주교 교단은 이 일대를 순교자의 성역으로 삼았다. 천진암은 정약용 형제들을 비롯한 천주교인들의 강학의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어록과 서명이 천진암 대성당 머릿돌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오랜 기간 토속 종교터와 사찰로서 기능했던 역사는 제외되었다. 알고 보면 이러한 터전들은 민족 신앙을 비롯한 불교, 유교 등의 이웃종교의 역사도 풍부한 곳이다. 하나의 종교가 독점할 수 없는 민중 전체의 신앙터인 것이다.
3) 종교간 화해와 협력, 불교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차가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 이면에는 종교 교단의 영토 확장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자짓하면 종교간 대립으로 이어져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하여 이웃종교간의 대화가 요청된다. 실제로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는 종교간 대화가 시급한 과제이기도 하다. 피터 버거나 새뮤얼 헌팅톤을 비롯한 문명 연구자들이 <진화하는 세계화>에서 말하듯 지역 문화가 세계로 활발하게 확산되고 있다. 불교는 미국이나 유럽에 상륙하여 지금은 그들의 손에 의한 서구식 불교가 창안되고 있다. 이슬람 또한 지구적인 대이동으로 인해 그들의 문화를 세계 곳곳에 이식시키고 있다. 책이나 영상으로만 알던 종교가 세계인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한국의 경우, 풍류와 같은 오랜 그릇이 있어 다양한 종교를 소화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근·현대에 그러한 그릇을 재발견한 기독교계의 인물들로는 최병헌, 함석헌, 변선환 등을 들 수 있다. 형이상학 혹은 신앙의 측면에서 유불선 삼교의 사상을 하나로 융합해 내고 있다. 또한 교회에서 예수, 예수에서 신 중심의 열린 신학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서양 종교의 대화를 추구한 종교학자 길희성은 <보살예수>나 <일본의 정토사상>에서 양자의 융합을 언어의 끝까지 추구하여 완성시키고 있다. 세계적으로는 라이문도 파니카, 폴 니터, 한스 큉 등 종교학이나 신학계에 종교간 화해와 협력의 이론과 실제를 제시한 학자들은 부지기수다.
아쉬운 점은 불교계는 특히 서양이나 중동의 종교에 대한 대화 의지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불교가 실크로드를 통해 국제화의 길을 걸었듯이 이미 자체적으로 포용과 융합의 논리가 충분하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이찬수가 선학자 스즈키 다이세츠의 즉비(卽非)의 논리와 선사상을 통해 동서양 종교 대화의 이론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명희 또한 원효의 <십문화쟁론>의 화쟁사상과 <금강삼매경론>의 일미관행(一味觀行)을 통해 종교간 화해와 소통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종교가 윤리 혹은 문화적 차원에서 종교간의 관계를 봉합하는 차원이 아닌 종교 그 자체의 궁극적 원리를 통해 회통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특히 이찬수는 <벽암록 68칙>에 등장하는 앙산 혜적과 삼성 혜연의 선문답을 통해 언어의 한계를 뛰어 넘어 종교간 대화와 화해가 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이러한 인간 존재 방식의 대화는 상대적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각 절대주체가 되도록 해주는 이중적 조건을 충실히 반영한다.”(「즉비의 논리, 회호적 관계, 선문답: 종교간 대화와 관련하여」)고 한다. 이는 바로 대승불교의 핵심 기반인 진공묘유(眞空妙有)에서 발원한 것이다. 이의 다른 이름이 현묘한 도인 풍류일 것이다. 진공은 공의 논리인 무자성공(無自性空)을 말한다. 묘유는 존재의 절대적 현현을 뜻한다. 일찍이 불교학자 기무라 타이켄이 1939년에 쓴 <불교개론: 진공으로부터 묘유로>에는 “불교야말로 반야의 지혜가 밑바탕이 된 진공묘유가 그 진수”라고 한다. 그것은 인식만이 아니라 실천의 논리이기도 하다. 모든 종교의 고유성을 해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안목을 이미 불교는 갖추고 있다. 이를 어떻게 현대적인 이해의 방식으로 한국 사회에 제시할 것인가에 대한 불교계의 노력이 요구된다.
더불어 동서양의 종교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것으로써 실천의 장이야말로 종교간 갈등을 넘어 비로소 화해와 협력이 가능하다고 본다. 인류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 기후위기나 생태계 파괴, 자본에 의한 자원고갈과 부의 양극화, 상시적인 전쟁 등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 언어를 넘어 자연스럽게 이웃종교가 파수공행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종조와 교조들의 목표다. 그들의 몸짓과 언어가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자비와 연민, 사랑과 은혜의 눈길과 따듯한 손으로 고해에 처한 민중의 피눈물을 닦아주었다. 인류의 문명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다. 불교계 또한 각자의 토굴에서 나와야 할 때다. 종교간 대화나 협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이웃의 고통을 내 것 삼고, 그들과 함께 하는 곳에 있다. 시비이해의 분별심을 단칼에 끊고, 이웃종교와 손잡고 가는 바로 그 ‘현장’에 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