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서 인쇄 현장 덮친
악질 조선인 형사…
거금 주고 무마
1919년 3·1운동 거사 이틀 전인 2월 27일 밤,
대량의 선언서를 인쇄하는 만큼 극도의 보안이 필요했다.
선언서가 한 장이라도 사전에 발각되면 독립운동 자체가 무위로 돌아가는 살얼음판이었다. 일경(日警)의 요시찰 대상인 이종일은 미리 자신의 씨족인 성주이씨 족보를 만드는 것처럼 위장막을 쳐놓았다.
실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성주이씨들은 족보를 새로 만든다는 소식에 집안의 가계보(家系譜)를 들고서는 보성사 문턱을 분주히 넘나들었다. 이종일은 족보를 만드는 틈을 타 감시의 눈을 피하면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수 있었다.
천도교가 운영하는 보성사는 최남선이 경영하는 신문관과 함께 한국의 출판 인쇄문화를 대표했다.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데도 두 인쇄소가 분담했다.
신문관에서는 활자로 인쇄판을 짜는 조판(組版) 작업을 담당했고, 보성사는 조판된 독립선언서를 종이로 찍어냈다.
현재 천안 독립기념관에 보관된 3·1독립선언서의 첫 문장은
(朝鮮이 鮮朝로 인쇄도 있다)
이렇게 표기돼 있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鮮朝(선조)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이런 실수에도 불구하고 독립선언서 문장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의 독립선언서보다 더 잘 지었다”고 격찬할 정도로 명문이었다.
독립선언서를 읽어본 사람들은 “육당(최남선)을 다시 보아야겠다”며 칭찬이 자자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이종일의 은밀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독립선언서가 발각돼 3·1운동이 무산될 뻔도 했다.
28일로 날짜가 바뀌기 직전인 늦은 밤, 인적이 드문 곳에서 돌아가는 인쇄기계 소리는 유난히 컸다.
보성사를 관할하는 종로경찰서의 한국인 형사 신철(다른 이름 신승희)이 근처를 지나다가 창문까지 굳게 닫힌 인쇄소의 기계 소리를 들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붙잡아 감옥에 보낸 악질 형사로 소문난 신철은 낌새를 눈치 챘다.
그는 곧장 인쇄소 안으로 들이닥쳤다. 족보를 찍는 중이라는 이종일의 변명을 들을 새도 없이 그의 손에는 독립선언서가 쥐여졌다.
선언서를 읽어보는 신철의 손조차 떨렸다. 상황을 파악한 그에게 육척장구(六尺長軀)의 이종일이 그대로 무릎을 털썩 꿇었다.
“이것만은 안 되오. 이 일은 멈출 수 없는 일이오. 하루만 봐주시오. 의암 선생님(손병희)한테 갑시다.”
이종일이 애원했다. 뜻밖에도 신철은 “당신이 갔다 오시오”하고 말했다. 이종일은 북촌 손병희 집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위급을 고했다.
사태를 파악한 손병희는 선뜻 5000원의 거금을 신문지에 싸서 내주었다. 평생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돈을 받아 쥔 신철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면서 겸연쩍게 웃더니 사라졌다.
그의 웃음에는 일말의 민족적 양심이 담겨 있는 듯도 했다.
그렇게 간신히 위기를 넘긴 이종일은 인쇄를 마친 후 이병헌, 신숙, 인종익 등을 시켜 독립선언서를 자신의 임시 숙소로 재빨리 옮기도록 했다.
보성사에서 직선거리로 400m 거리의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으로 가려면 파출소 앞을 지나쳐야 했다. 이들은 손수레 깊숙한 곳에 독립선언서를 감추고 그 위로는 성주이씨 족보로 덮었다.
으슥한 밤길에 손수레에 싣고 가는 물건은 일경(日警)의 눈에 띄었다. 불심검문을 당했다.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일경은 성주이씨 족보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손수레에 실린 종이 뭉치를 죄다 검색하려고 했다.
족보를 다 들어내고 마지막으로 독립선언서가 나오려는 순간, 일대에 갑자기 정전이 발생했다. 가로등의 불빛마저 꺼져버렸다. 일경이 등잔을 가지러 파출소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 파출소 상급자가 귀찮은 듯 “그만두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경운동 숙소로 들어오는 이종일은 온 몸이 땀으로 범벅돼 있었다. 긴장으로 흘린 식은땀이었다. 그를 맞이하는 손녀 이장옥에게 “큰일 날 뻔했다”고 말했다.
한편 고등계 형사 신철은 들통날 것을 우려해 동거녀까지 내팽개치고 만주로 도주했다가 1919년 5월 일제 헌병대에 체포됐다.
그는 경성으로 압송돼오다가 개성역 인근에서 기차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한다.
3·1운동의 준비 과정은 서슬 퍼런 일제의 감시망 속에서 숱한 발각 위험을 기적처럼 피해간 모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