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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침입과 병자호란 비교
10세기부터 14세기는 거란과 여진, 몽고 세 나라가 힘차게 굴기했다.
가장 먼저 거란이 떨쳐 일어났다.
거란은 퉁구스와 몽고의 혼혈족으로 알려진 동호계(東胡系)의 한 종족명이지만 몽고족과는 언어와 일상문화가 거의 같았다. 그래서 거란도 흉노족의 후손으로 본다.
거란은 10세기 초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라는 걸출한 영웅이 나타나 흩어져 있던 부족을 통일하고, 916년 거란국의 건국을 선언한다. 얼마 뒤에 요(遼)로 국호를 바꾸어 강국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러한 세력을 배경으로 925년 2월에 동쪽의 발해를 침공해 이듬해 2월에 멸망시켰다. 또한 중국을 침략해 연운(燕雲) 16주를 영토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거란과의 우리민족과 관련은 고구려 때부터이지만 특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였다. 이 때에는 거란도 부족분열상태로부터 '요'라는 통일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고려에서는 거란을 발해를 멸망시킨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 하여 고려 태조 때부터 견제했다.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통일해 나라를 세운 뒤, 922년(고려태조 5)에는 낙타와 말을 보내면서 고려에 수교를 요청하나 태조는 거절한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되자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여 고려 국내정치 상황에 이용한다. 그런 관계로 태조는 발해유민들의 눈치를 보면서 거란에 대해서 적대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942년에는 거란의 태종(太宗)이 보내온 낙타 50필을 만부교(萬夫橋) 아래에서 굶겨 죽이고, 사신 30인을 유배를 보내 버린다. 우리 중, 고 국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만부교사건'이다.
이는 고려의 현명치 못한 조치였다. 이 사건은 거란의 고려 3차례 침입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거란은 고려와 외교적으로 잘 풀어 가려고 했는데 고려가 거란을 얕보고 아주 무리한 선택을 했다. 얼마든지 외교적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해가 서희가 태어났던 해였다. 서희가 조금 일찍 태어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이러한 고려의 대 거란정책은 이후의 고려 왕들에게도 계승되었다. 물론 고려도 그러면서 가만히 있지는 않았고 거란의 침략에 대비했다
고려 광종 때에는 서북 쪽에 맹산·숙천·박천·문산 등 청천강 유역과, 동북 쪽으로는 영흥·고원 등에 성을 쌓거나 군사시설을 갖추고, 또 광군 30만으로 광군사(光軍司)을 설치하는 등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거란의 3차에 걸친 침공은 고려와 우리 역사에 큰 충격과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1차 침입은 993년(고려 성종 12) 10월 소손녕(蕭遜寧)의 침입이었다. 80만 대군이라는 말이있지만 믿기 힘든 내용이다. 어쩟든 소손녕은 고려를 침략하여 초기에 승세를 잡는다.
이에 고려 조정은 두려움에 떨면서 거란에 항복론이 대두되면서 대동강 이북의 땅을 거란에 떼어 주자는 주장이 유력하게 일어 났다. 그러나 이때 우리 역사상 외교의 최고 귀재로 이름 높은 서희가 홀연히 나타 난다.
서희는 소손녕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소손녕은 고려를 침략하여 몇 번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한 곳에 주둔하면서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서희는 소손녕이 무리해서 개경까지 남하 할 낌새가 없다고 보았다. 서희는 당시 중국정세가 거란이 고려에만 매달려 있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마침 고려의 항복을 촉구하다가 회답이 없어 초조해 있던 소손녕이 청천강 남쪽의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했다가 실패해 전의를 잃게 되었다. 이에 양국간에 화전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서희와 소손녕과의 담판이 이루어졌다.
서희는 소손녕이 고려의 잘못으로 지적한
① 고려가, 거란이 점유한 고구려 옛 땅을 침식한 점과, ② 이웃나라인 거란을 버리고 바다를 건너 송나라와 교류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서희는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서희는 ①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이며, ② 고려가 거란과 교류하고자 해도 중간에 여진이 가로막혀 있어 불가능하니 이 지역을 회복해 성보를 쌓고 도로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손녕은 논리정연한 서희의 말을 기쁘게 받아 들이고 서희에게 잔치까지 벌려 준다.
이 담판의 결과 고려는 이른바 조공도(朝貢道) 개척을 명목으로 청천강 북쪽에 있는 압록강 동쪽 280리의 땅에 대한 점유를 거란으로부터 인정받는 대가로 송나라의 연호 대신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에 합의하였다.
고려가 별로 준 것도 없이 거란으로 부터는 엄청난 것을 얻는 참으로 뛰어난 우리나라 역사상 찾아 보기 힘든 외교적 승리의 성과였다.
이로 부터 600년 후 정묘호란이 거란 1차 침입과 비슷했다.후금도 고려에 세과시만 하려고 했다. 후금도 당시 명과 상황이 녹녹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 조선에는 서희같은 외교술의 대가가 없었다. 일방적으로 조선은 후금의 요구를 다 들어 주었다.
조선은 광해때부터 후금이 융성하기 시작했으니 고려 때 이와 비슷했던 거란의 침입을 철저히 연구하여 후금 여진의 침입에 대비했어야 했다. 그러나 인조와 조선사대부들은 그러하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에 고려는 이듬해부터 새로이 점거하게 된 강동지역의 강동6주의 행정구역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우리 민족의 생활권을 압록강 연안까지 진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고려는 중국 쪽 침략에 대비할 수 있는 강동 6주라는 최고의 요새를 가지게 된다.
1010년(현종 1) 11월강조(康兆)가 목종을 시해한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거란 성종의 직접 침략한다. 거란의 2차 침입이다.
1009년 권신 강조가 목종을 폐위,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거란의 성종은 고려의 정변을 듣고 목종 폐위의 이유를 묻다가 1010년(현종 1) 11월에 정변에 대한 문죄를 명분삼아 친히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서북부에 침입해왔다.
거란의 제2차 침입은 명분도 뚜렷하지 않은 전쟁에 헛되이 많은 인명과 물자를 잃게 된 대표적인 전쟁이었다. 고려가 잘했건 잘못했건 강조의 변은 고려의 내정이었을 뿐이었다.
어쩟든 거란은 고려의 강경한 대항에 여러 고난을 겪지만 개경을 점령까지 한다. 고려 현종은 나주까지 피난 갔다.
지금 역사적 시각으로 보면 거란은 참 싱겁기 짝이 없었다.
거란 황제가 40만 대군을 데리고 직접 출정하여 수많은 고난 끝에 고려 수도 개경까지 함락했지만 고려 현종의 친조 약속 받고, 강조만 처형한 채 순순히 퇴
각하고 만다.
물론 거란의 《요사》에도 나오듯이 거란에게 고려는 “길이 멀고 양식이 끊어진 데 있었다.” 말처럼 고려 대항이 만만치 않았고 고려에만 오래있기에는 중국대륙 상황이 녹녹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거란이 제2차 침입에서 되돌아가는 조건으로 요구한 국왕의 친조(親朝)가 1012년에 고려에 의해 거부되자 거란은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한다.
이에 고려는 1013년에 거란과의 국교를 끊고, 1014년에 윤징고(尹徵古)를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국교 회복을 요청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거란과 정면으로 대결할 태세를 공개적으로 보이기에 이르렀다.
고려의 거란에 대해 '배째라는 식'을 넘어 뒷통수를 치며 배짱 좋게 나가는 것은 당시 고려 상황으로서는 조금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그만큼 고려는 당시 중국대륙 상황을 꿰뚫어 보고 있었고 자신감도 차 있었다고 보여 진다.
당연히 거란은 고려의 이런 행위에 펄쩍 뛰었다.
이에 거란은 이송무(李松茂)를 보내어 강동6주의 반환을 다시 요구하였다. 고려는 당연히 거절했고 거란은 장수 소적렬로 하여금 압록강을 건너 고려 흥화진 등을 치게 했으나 크게 패하고 돌아 갔다.
이 해부터 거란은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가설해 강동에 보주성(保州城)을 쌓고 강동 6주 탈취 기지로 삼았다.
여기서 서희의 안목이 뛰어 났음을 알 수있다. 이에 비해 거란의 소손녕은 너무나 순진했다.
서희는 당시 강동 6주의 엄청난 지리적 여건을 소손녕보다 몇 배 앞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거란은 서희에 속아 고려에 강동 6주를 반환한 것을 땅을 치고 분해했으나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다.
1015년에 거란이 건설 중이었던 가교와 보주성이 완성되자, 거란은 흥화진·통주에 침입하고 용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려군의 굳건한 방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거란은 야율행평(耶律行平)을 보내어 6주의 환부를 또 다시 강요한다. 고려는 거절을 넘어서 아예 사신을 억류 해 버렸다.
이에 거란은 다시 이송무를 보내어 6주의 환부를 다시 요구한다. 고려가 또 단칼에 거절하자 거란은 무력으로 흥화진과 영주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한다. 이처럼 거란은 서희의 외교술에 당한 강동 6주 때문에 고려와의 외교전과 무력전에서 실패를 거듭하였다.
고려와 거란의 이 역사적 사실을 구쏘련이 알았다면 구쏘련이 알래스카를 똥 값에 미국에 팔고 땅을 치고 후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에 거란은 모병령을 내려 동경(東京)의 승려 일부와 상경(上京)·중경(中京) 및 제궁(諸宮)에서 정병 5만5천을 뽑아 1017년에 침입해 또 크게 손실만 입고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거란 2차 침입 후 고려는 국방은 강건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런 침입에 버틸 수 있었다.
거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듬해 12월에 소배압을 총지휘관으로 한 대규모의 군대로서 고려를 다시 침입했다. 이것이 거란의 제3차 침입이었다.
고려는 상원수 강감찬(姜邯贊)과 부원수 강민첨(姜民瞻)으로 하여금 20만의 군대를 인솔하게 하였다. 이들은 지금의 안주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흥화진 방면에서 거란군을 무찔렀다.
이에 소배압은 사잇길로 개경으로 들어가다가 자주(慈州 : 평안남도 순천군 慈山)에서 뒤쫓아온 강민첨에게 공격을 받았으나 물리치고 1019년 정월 개경에서 하루 거리인 신은현(新恩縣)까지 침입하며 개경을 압박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려 현종의 대책이었다. 현종은 강조의 변으로 즉위하자마자 거란의 2차 침입을 받아 나주까지 피난을 갔지만 3차 침입 때는 달랐다.
거란이 개경 하루거리 코 앞까지 왔지만 현종은 피난가지 않고 거란과 끝까지 싸울 것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한다.
이 당시 강감찬의 대군은 거란보다 훨씬 멀리 북방 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고려 현종의 이런 대찬 결정은 조선의 선조와 인조와는 너무 달랐다. 그리고 이 점이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고려 현종이 대차게 나오자 거란군은 개경함락이 힘들다고 생각했다. 또 고려군과 싸움마다 불리하게 되어 남은 군대를 모아 되돌아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고려군은 도망가는 거란군을 내 버려 두지 않았다. 고려 강감찬은 도망가는 거란군을 뒤쫓아 공격하여 많은 손실을 입혔다. 특히, 귀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거란의 10만 대군 중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명밖에 되지 않았다. 거란군의 대참패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3대 대첩에 드는 그 유명한 강감찬의 '귀주대첩'이었다.
이와 같은 거란의 참패는 강동 6주를 빼앗겨 제압하지 못하고 강동 6주를 피해 너무 성급히 진군한 데 있었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의 승리는 거란 1차 침입 때 서희의 외교술이 한 몫 크게 한 것이다.
거란의 세 번 고려침입으로 거란의 손실과 민생고는 고려가 입었던 피해에 못지 않았다.
거란의 3차침입은 고려가 승자였지만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단지 거란의 침입을 막아냈을 뿐이다. 거란은 이후에도 건재했다
고려와 거란의 세 차례 전쟁은 승자와 패자가 가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거란의 3차 침입의 패배는 양국간에 화해분위기를 무르익게 하였다. 1019년 8월부터 고려와 거란 사이에 사절이 왕래했으며 국교가 회복되었다.
고려는 이후부터 송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거란의 연호를 쓰게 되었다. 당시 이미 송은 거란에 제압당해 남쪽으로 쫒겨나 남송으로 명맥만 근근히 이어가고 있었다.
고려의 거란선택은 국제질서 상 당연한 일이었다.
병자호란에서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도 망해버린 명을 우러러보며 명분과 의리만 찾으면서 소중화주의를 외쳤던 조선사대부와는 확연히 비교 되는 일이었다.
이로써 거란이 고려에 요구했던 강동6주의 반환과 고려국왕의 친조는 자연 백지화되어 거란이 멸망하는 1125년까지 약 1백년간 양국간에는 평화적인 국교가 유지되었다.
거란의 제1차 침입에서 제3차 침입 후 양국의 국교가 회복될 때까지 고려 거란의 36년간의 싸움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 인조와 조선사대부는 600년 전 거란의 침입에 대한 고려의 이러한 대처를 철저히 연구하고 따라 했어야 했다.
그러나 인조와 조선지도층은 전혀 그러하지 않았다.
거란의 침입에 대한 고려의 행태는 거란 쪽에서 보면 어쩜 너무 교활하고 야비했다. 이에 비해 거란의 행태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순진했다.
개인 간의 행태에서라면 고려의 행위는 야비했고 욕 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 간의 전쟁에서는 교활이나 야비를 따질 필요 조차도 없다. 명분도 자존심도 필요없다. 자기 백성들을 지키고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그 어떤 일보다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아쉬운 것은 서희처럼 서로 피를 흘리지 않으면서 외교적으로 해결 할 수도 있었는데 고려는 전쟁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어쩟든 고려는 거란 침입에 나름 현명하게 대처했다.
물론고려 태조 왕건부터 외교를 잘해 아예 거란 침입이 없게 하는 것이 백성들을 위해서는 최상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발해가 거란에 망한 직후라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고려는 그 후에 대처를 잘해 나라도 지키고 민족적 자존심도 지켰다.그리고 거란 3차 침입 후 고려에는 백년의 평화가 왔다.
오랜 평화는 고려를 다시 무사안일에 빠지게 만들었고 급기야 무신들의 쿠데타로 고려는 무신정권 시대로 들어 선다.
정통성없는 정권이 외침에 대해 얼마나 어처구니 없이 대처하는 지 몽고침입에서 무신정권이 그리고 조선의 병자호란에서 인조정권에서도 제대로 보여 준다.
우리는 고려가 대몽항쟁을 28년간 한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당시까지 역사상 세계 최강이었고 세계를 정복했던 몽고군에 그렇게 오래까지 대항한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속내를 깊숙히 들어 가 보면 정통성없는 정권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무신정권에 의해 많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