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뽕 뀌고 나면 퐁 빠져나가는 슬픔
톡 건드리면 토도독 열리는 축제
변은경 시인의 첫 동시집으로, 2015년 [어린이와 문학]에 추천 완료된 「첫눈」 「바코드새」 「개똥 쉼표」, 2019년 『창비어린이』 동시 부문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어디로 날아야 할까?」 「슬플 땐 방귀를 뀌어 봐」 「혼자 걷다」(발표 당시 제목 「사춘기」)를 비롯한 49편의 작품이 실렸다. 시인은 오랫동안 어린 ‘나’와 같이 쪼그리고 앉아 작은 존재들의 말을 기다려 왔다. 뜻깊은 대상을 발견하는 밝은 눈, 대답을 재촉하지 않는 느긋한 자세, 슬픔도 퐁 날려 버리는 단단한 태도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존재들을 이야기하게 했다. 이가 빠진 접시(「접시」), 높다란 벽을 마주하고 선 나무(「나무와 그림자」), 바닥에 떨어진 깃털(「날아라, 깃털」) 들이 조용조용 꺼내는 놀라운 이야기들은 듣는 이가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천천히 걸어 볼까/ 눈부신 하늘도 올려다볼까”(「고양이와 작은 아이」) 기운을 내도록 이끈다. 시인을 따라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찬찬한 마음으로 살피면 누구나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시 축제의 마당”(이안)에 들어설 수 있다.
글 작가 변은경
2015년 [어린이와 문학]에 동시 추천이 완료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019년 [창비어린이] 동시 부문 신인문학상을 수상하였고, 2020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에 선정되었습니다. 거꾸로 가는 시계를 선물받고부터 빼빼 마른 어린 나를 자주 만납니다. 같이 쪼그려 앉아 들꽃 보는 걸 좋아합니다.
그림작가 이윤희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고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만화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만화책 『안경을 쓴 가을』, 『열세 살의 여름』을 냈고, 『두 배로 카메라』, 『10대들을 위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말하기를 말하기』, 『물이, 길 떠나는 아이』, 『이따 만나』, 『개를 잃다』, 『비밀 소원』, 『경양식집에서』, 『두 배로 카메라』, 『비밀 소원』, 『브로콜리 도서관의 마녀들』 등 다양한 책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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괭이밥 축제 / 변은경
괭이밥이 사는 자리를
미리 봐 둬야 해요
아기 손톱만 한 노란 괭이밥꽃이 지고
꼬투리가 맺히면
쪼그려 앉아 귀를 환히 열고
하늘을 향해 솟은 꼬투리를
살짝 손으로 쓸어 보세요
톡톡 토도독 톡 톡톡 토도독 톡 톡 톡톡
세상에서 가장 작은 축제가 열려요
얼마나 조그맣고 빠른지
안 보일지도 몰라요
보이지 않아도
축제는 열린 거예요
괭이밥이 꼬투리를 마구마구 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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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플 땐 방귀를 뀌어 봐 / 변은경
'뽕' 뀌고 나면
슬픔 하나가
'퐁' 빠져나가지
사람이 많을 땐 어떡하냐고?
'피시 피시' 뀌는 거지
꾹꾹 눌러서 조금씩 내보내는 거야
아무도 모르게
슬픔이 천천히 빠져나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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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센티미터 숲 / 변은경
우리 동네엔
높이 3미터 두께 1센티미터 숲이 있지
울창한 숲이 그려진
공사장 가림막에 손을 대면
마법처럼 문이 열릴 것 같다니까
어, 노란 나비가
숲속으로 날아가네
열린 문틈으로 살짝 보았는데 말이야
푸른 나무 아래
강아지풀이 살살살 모여들고
개망초꽃은 점점 더 하얘지고
넝쿨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
초록 궁전을 짓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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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흔들려도 제법 멋진 그림자의 세상
어린이의 마음에도 그늘이 있다. 높다란 벽을 마주하였을 때(「나무와 그림자」), 몸 안에 슬픔이 가득 찼을 때(「슬플 땐 방귀를 뀌어 봐」), 괜히 짜증 부린다고 혼났을 때(「혼자 걷다」), 그럴 때마다 조금씩 그림자가 드리운다. 변은경 시인은 움푹 파인 빗물 구덩이에 “나무도 하늘도 찾아와서/ 한참 동안 있어”(「빗물 웅덩이」) 주는 것처럼 속상한 아이 곁에 가만히 앉는다. 그러고는 살짝 고개를 들어 보라고 속삭인다. 흔들리는 그림자는 생각보다 꽤 멋있으니까. 긍정의 온기가 그림자까지 폭 껴안아 위로한다.
땅에 누워만 있던 내 그림자가
일어섰어
나랑 하루 종일
마주 보게 됐지
바람에 흔들리는 내가
꽤 괜찮아 보여
해가 뜨는 내일을 기다리는
버릇도 생겼지 뭐야
그게 다 내 앞에
높다란 벽이 생기고부터야
_「나무와 그림자」
『1센티미터 숲』 곳곳에서 시인의 단단한 태도가 빛을 발한다. 현실에 굴하지 않고 “빛나는 소용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도 이어지는 빛의 시간을 우리 앞에”(이안) 불러온다. “이가 빠져서 구석에 있다가/ 화분 받치는 일을 시작”한 접시(「접시」)는 날마다 음식 담던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화분 밑에서 나무뿌리를 토닥이고 꽃을 기다리며 주어진 하루를 충실히 살아간다. 접시의 마음은 “꽃이 춤출 수”(「꽃병」) 있기를 바라는 꽃병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시인의 세상에서 길거리의 개똥은 학원 가는 아이의 쉼표가 되고,(「개똥 쉼표」), 바닥에 떨어진 깃털은 “날기 전/ 호흡을 가다듬는”(「날아라, 깃털」) 가능성의 존재가 된다. “살짝 윙크를”(「빨간 가발」) 날리는 명랑함으로 나와 너의 가장 멋진 면을 비춘다.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시
잠이 오기를 기다리던 은택이가
쪼금쪼금 뜯는 푸른 벽지
며칠 전 등장한 뱀장어가
조금 길어졌다
아기 상어도 태어나고
뿔 달린 도깨비 해파리도 나타났다
_「벽지 바다」 부분
“선을 그으면 좁아지고 선을 지우면” 넓어지는 것은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마음의 방도 마찬가지”(이안)라서, 벽의 경계를 넘는 순간 은택이의 조그만 방은 뱀장어와 아기 상어, 도깨비 해파리가 헤엄치는 마술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시인은 자유로운 상상으로 현실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마음을 더 멀리, 더 자유로운 곳으로 데려간다. ‘나’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나’를 꿈꾸는 용기도 상상에서 나온다. 아기 모과는 “매끈하고 둥그렇게 커 볼까?/ 오이처럼 길쭉길쭉 크는 건 어떨까?” 골똘하고, 인공 폭포는 “돌멩이를 넘고/ 물고기 배”(「인공 폭포」)를 간질이며 바다로 가기를 꿈꾼다. “난 걸어서 가 볼래/ 까짓것 지구 한 바퀴” 하고 용기를 내면 “세상 모든 것이 돼”(「ㄹ」) 볼 수 있는 곳이 변은경 시인의 세계이다. 때 이른 성장을 재촉하는 어른들(「난 지금 열두 살」), 깜깜한 책 속에 갇힌 듯한 마음(「꽃갈피」) 들은 시인이 어린이의 세계에 발 붙이고 사려 깊게 관찰하였기에 만날 수 있었던 장면들이다. 시의 토대가 단단하기에 현실을 딛고 힘차게 마음껏 나아갈 수 있었다.
느리게 느리게, 라르고의 리듬으로
모두를 안아 주는 귤빛 노을의 시간
크레인 씨,
긴 팔이 부럽군요
높은 건물 짓는 것도 멋지지만
노을을 지휘하다니요
크레인 씨,
오늘따라 쓸쓸해 보여요
흐린 날은 나도 그래요
오늘 저녁은 환한 귤빛이면 좋겠어요
라르고로 부탁해요
_「키다리 크레인 씨」 전문
분주하던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 높은 건물 짓느라 바쁘던 크레인도 한숨을 돌린다. 이제 긴 팔로 노을을 지휘할 시간이다. 크레인이 손짓하자 환한 귤빛이 세상을 부드럽게 감싸고, 모두의 움직임이 느려진다. 『1센티미터 숲』에는 “하루 일을 마친 해가/ 마지막 남은 빛을 바알갛게 부풀려/ 이 세상 모두를 한 번 더 안아”(「저녁놀」) 보는 따스한 온기가 가득하다. 이 온기는 낯선 존재에 대한 공감과 환대로 이어진다. 전학 온 친구에게 내미는 수박바(「수박바 사이」), 꼼짝 못 하는 공룡 그림자가 배고플까 봐 피자랑 치킨을 그려 주는 아이(「그림자 공룡」), 온 가지를 흔들며 인사를 건네는 버드나무(「버드나무야, 안녕」)의 다정함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윤희 화가는 『1센티미터 숲』을 더욱 안온하고 활기찬 곳으로 꾸몄다. 섬세하게 쌓아 올린 공간이 시의 세계에 깊이를 부여하고, 찾아온 이들을 명랑하게 안내한다.
사랑으로 부르고 싶은 대상이 있을 때마다 어린 나는 같이 쪼그려 앉아 작은 존재들의 말을 기다려 주었다. 말을 고르고 그 말이 나아가게 길을 내어 주는 것 또한 어린 나에게 기대서 가능한 일이었다. 사랑이란 이름이 잘 어울릴 때까지, 가 보지 않은 길도 깜깜한 길도 가 볼 참이다._변은경 ‘시인의 말’에서
첫댓글 동시를 이렇게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다니,
동시 작가는 참 멋진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채미난 동시 시식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