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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 2장
1.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1-5)
1:1절을 보면 사도는 자신이 사도 된 것을,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영생의 소망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사도로 세움 받은 이유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모든 일은, 사도 자신의 사사로운 소망이나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 택한 자의 믿음과, 영생을 위한 방향으로만 나아갔던 것입니다.
또한 1:3절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사도에게 맡기신 이유도, 택한 자들의 믿음과 영생의 소망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는 자신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맡겨서 이루고자 하시는, 말씀의 세계만을 염두에 두고 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스승들이 나타나, 거짓된 다른 교훈을 전함으로써, 말씀이 비방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장로와 감독을 교회에 세워, 바른 교훈만을 전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 받지 않도록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장로와 감독은, 성도로 하여금 거짓된 자들이 증거하는, 헛된 이야기에 미혹되지 않고, 하나님의 참된 진리의 말씀에만, 순종할 수 있도록 교훈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가 교회에 감독과 장로를 세우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독과 장로조차, 바른 진리의 말씀에서 떠난 채, 인간을 이롭게 하는 헛된 말에 흔들리고 미혹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교회의 위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로와 감독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성도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교훈이 아닙니다. 말씀에는 하나님의 세계가 담겨 있습니다.
곧 말씀 하나하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어떠한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세계를 그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비판하지 말라, 회개하라, 이런 모든 말씀들이, 하나님의 세계가 어떠한지를 나타내는 말씀들인 것입니다.
곧 말씀이 성도를 서로 사랑하고, 비판하지 않고, 회개하는 등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에 복종하는 세계가 어떠함을, 어둠의 세상에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지, 말씀을 실천하게 해서, 복을 주고자 하는 의도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받은 자로서, 말씀에 근거해서, 세상을 하나의 그림으로 본다면, 그 그림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겠습니까? 바로 지옥의 모습입니다. 오직 자기 욕망에 이끌려서 자신을 위해 살고, 자기 이름과 힘을 위해 달려가는 모습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처한, 지옥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의 것으로 살고자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말씀을 비방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함을, 세상에 증거하는 도구로서 부름 받았습니다. 곧 말씀에 의해서 그려지고 있는, 색깔들이고 선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도가 말씀에 순종함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는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 젊은 여자로 구분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특정 연령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가 디도에게 2절에서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라고 말하지만, 이것이 늙은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또한 3절에서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라고 말하지만, 이 역시 늙은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은 아닙니다.
사도가 이처럼 연령과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말하는 것은, 연령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특징과, 남자와 여자에게 나타나는 특징을 이용해서, 성도의 삶을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늙은 남자에게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할 것을 가르치라고 하는 것은, 오랜 삶을 산 늙은 남자는 자기 고집이 강함으로써, 생각이나 언행에 절제가 없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성도로서 나타내야 할, 경건의 모습까지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일에 있어서 성도로서 합당한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신중할 것을 가르치고, 그로 인해 믿음과 사랑과 인내가 온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늙은 여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의 늙은 여자의 역할은, 젊은 여자들에게 선한 것을 가르침으로써 교훈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깨닫게 되고 배우게 된 선한 것을, 젊은 여자에게 가르침으로써, 젊은 여자로 하여금 여자로서의 역할을 성실하게 하게 함으로써, 진리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세계가, 이 세상과 어떻게 다른가를 증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늙은 여자들은, 술에 취하기 일쑤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중상 모략하거나, 험담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러한 행실은 분명 성도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는 행실입니다. 이것이 곧 거룩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세상과 다르다는 구별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디도에게 늙은 여자들이 교회에서, 그들의 역할을 제대로 행할 수 있도록 가르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늙은 여자가 젊은 여자를 교훈해야 했던 것은,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5절). 그것이 젊은 여자의 역할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남편과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연히 그렇게 살아가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남편과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남편과 자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여자임을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당시의 젊은 여자들은, 남편과 자식을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가정 일까지 도외시 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교회 일에 치중하게 됨으로써, 결국 가정의 일은 소홀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와 하나님 때문이었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정당화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도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자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는 것도, 당시 복음이 전파된 후, 복음에 내포된 자유에 대한 사상을 그릇 이해함으로써, 여자들도 자유에 대한 주장을 하게 되고, 그 자유를 남편에게 매인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을 배경으로 하는 말입니다.
여자가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풍조는, 여자의 단정함과 정절을 대단히 중시하던 당시의 상황 속에서, 심한 마찰을 빚게 되었고, 결국 교회를 향한 비난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늙은 여자는 젊은 여자들이,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가정 일에, 소홀히 하지 않도록 교훈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도록 가르치며,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교훈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여자에 대한 얘기들이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성도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갈 수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제, 경건, 신중 등의 말이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삶에서는, 맺어질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에게 요구하는 것은, 말씀이 이끄는 삶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욕망은 이러한 순종에 반발을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인간이 구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을 맺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절제와 경건과 신중 등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말씀을 비방하는 자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린 항상 말씀을 비방하는 자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의 세계를 위한 절제와 신중과 경건보다는, 세상에서 이익을 얻는 것에 더 집중하여 살아갑니다. 내 고집과 내 성격을 만족시키는 쪽으로만 나아가려고 합니다.
말씀의 세계를 이루고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보다는, 내가 원하고 주장하는 대로 되어지기만을 바랍니다. 이런 모든 것이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말씀의 비방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기어코 말씀의 세계를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하시고자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면서, 말씀의 비방자인 우리의 실체를 보게 하시고, 상한 심령으로 예수님께 나오게 하셔서, 예수님의 은혜에 마음이 굴복하게 하심으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말씀의 세계는 도덕과 윤리로 치장된 세계가 아닙니다. 착하게 선하게 살면서, 세상이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말씀의 세계가 아닙니다. 말씀의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증거되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말씀의 세계를 소망하지 않습니다. 온통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를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교회에 대한 소망도 다르지 않습니다. 성도라면 성령으로 인해서 십자가의 은혜가 증거되는, 말씀의 세계가 펼쳐지는 교회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 높여지는, 말씀의 세계만을 소망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신이 꿈꾸는 교회를 품고 살아갑니다. 목사는 큰 교회 아니면, 소위 아름다운 교회라는 것을 꿈꿉니다. 성도들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이상적이며,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곧 그런 교회를 다님으로써, 종교적인 만족감을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생각을 가진 목사와 성도가 만나서, 그러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힘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민주적이며 건전한 교회라고 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높이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미 관심은 교회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리스도께 관심이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도 욕망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이러한 교회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묵상하면서, 은혜로만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서 펼쳐지는 세계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가 만들어 내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교회를 만들고자 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고 하기 때문에, 말씀이 비방을 받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6-10)
마태복음을 보면 ‘이루려 하심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천한 신분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나, 오시자마자 헤롯을 피해서 도망을 쳐야 한 것이나,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셨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고 빛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에게는, 말씀 하나하나가 고난으로 다가왔습니다. 곧 예수님은 순종할 만한 말씀에 순종하신 것이 아니라,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말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는 예수님의 일에 부름을 받음으로써,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증거할 역할자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말씀을 비방하는 것이 됩니다.
본문은 지난 시간 이어서, 젊은 남자와 종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젊은 남자와 종들에게 이런 교훈을 하라는 것은, 10절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곧 하나님의 교훈대로 살 때, 성도에게 복이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위해 성도가 존재하는 것이지, 성도를 위해 말씀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전혀 반대로 생각합니다. 성도를 위해 말씀이 존재하고, 하나님이 계시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성도를 구원하기 위해 말씀이 있고, 성도로 하여금 바른 삶을 살게 해서, 복을 받게 하려고 말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일의 중심에 인간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기 위해, 성도가 존재함을 도외시한 것입니다.
설령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도가 존재함을 안다고 해도, 내가 잘되고 뛰어난 사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훈이 빛나는 것으로 이해해 버립니다. 그래서 어쨌든 믿는 성도는, 세상 사람보다 잘돼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넘어지면 넘어진 가운데서, 실패하면 실패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역할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잘 돼야 하나님의 교훈이 빛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게, 모든 관심을 두고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6-8절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사도는 디도 자신이 선한 일에 본을 보임으로써, 책망할 것이 없게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성도를 악하다고 할 것이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으로부터 악하다는 비난을 받는 것이, 곧 말씀을 비방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교훈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맡은 청지기로서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말씀을 거울삼아 자신을 살피며, 자신의 가는 길이 바른가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9-10절 “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종은 상전에게 순종함으로써 상전을 기쁘게 해야 하고, 상전에게 거슬러(대적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하고, 상전의 재물을 훔치지(횡령) 말고 오히려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는 것이 종의 본분입니다. 오직 주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종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이 역할에 순종함으로써, 말씀의 교훈을 빛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내용을 종합하면, 성도는 자신을 위해 살 자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말씀을 빛나게 할 말씀의 도구로 부름 받았음을 알게 해 줍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겠습니까? 자신에게 돌아오는 대가가 전혀 없이, 오직 순종과 헌신과 충성만을 요구하는 말씀들에게, 관심이 있겠습니까?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반감이 일어나기 딱 좋은 내용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인 성도를, 그런 존재로 부르셨다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그 길을 가셨고, 우리에게 그 길로 따라오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손해 보지 않기 위해 거짓말하고, 부당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이득을 취하고, 남을 속여서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세상에, 비록 손해가 되더라도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해야 할 사람으로 부름 받았는데, 이것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은 돈으로 삽니다. 하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증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돈 있는 자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긍휼이 있고 자비가 있는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원합니까? 우리가 원한 대로 만들어 주신다면, 어떤 모습의 자신을 원합니까? 재벌입니까, 아니면 권력자입니까? 그러면 과연 그러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가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신 뜻을 안다면, 자신이 어떤 모습의 사람이든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할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소원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성도로서 정당한 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빛으로 새겨지고, 그 말씀이 나의 심령을 다스려서,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나라가 증거되기를 소원하고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한다는 것은, 성도가 말씀을 실천해서 말씀을 빛내자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시고, 우리를 다스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고쳐가고자 하시는 그 뜻이, 오직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엉뚱한 것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안다면, 그 뜻이 나의 뜻이 되어서,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 사는 성도가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성령이 함께 하는 성도의 온전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산다면, 그가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해도 위선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성도의 모든 삶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말씀을 보여줌으로써, 말씀을 증거할 자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을 생각한다면, 성도는 할 일이 많고, 바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도, 먹든지 마시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 일을 해도,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봉급만 받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교훈을 빛내는 자로 남아야 하기에, 할 일이 많고 바쁜 것입니다.
성도는 이것을 위해서 근신하면서,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돌아봐야 하고, 세상으로부터 악하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3. 속량하신 이유(11-15)
성도가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많이 들어온 말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갈수록,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희미해져가고, 대신 세상 사람보다 더 나은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의 지위나 재물에 있어서, 더 나은 자가 되어야,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하나의 관념이나 사상 정도로 머물러 버리고, 하늘의 생명도 막연하게 받아들인 채,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힘쓰는 길로만 달려가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많은 목사들이 절감하는 것은, ‘말씀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을 향한 관심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말씀만 전파하겠다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말씀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현실을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오직 말씀만 전파하겠다고 한 사람들도, 조금씩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완악한 마음을, 말씀만 전파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한 것부터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복음을 바르게 증거한다고 해도, 예수님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직접 복음을 전했을 때, 과연 그 말씀으로 마음이 바뀐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말씀만 바르게 전파하면, 사람들이 변화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큰 착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증거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씀을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나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항상 우리를 책망하면서, 무엇이 진리를 따르는 길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악한 우리 마음을 성령으로 다스리시면서,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붙드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기 위해, 말씀은 증거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11절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소위 ‘만민 구원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과 신분을 초월한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구원관은, 철저히 인종과 신분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곧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종을 초월하고 신분을 초월해서, 하나님이 택한 모든 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모든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는 것은, 은혜로 말미암아 택한 백성들이, 구원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12-13절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신다는 것은, 은혜는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성도와 함께 함으로써 양육하신다는 것입니다. 곧 구원에 이른 성도는, 구원의 풍성함을 맛보는 자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양육이란 말을 많이 하지만, 거의 목사가 성도를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의 문제로,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곧 성도를 자라게 하는 것이, 마치 목사에게 달려 있는 것으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사가 성도를 양육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다만 심고 물을 주는 사람일 뿐이며, 양육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심으로써 은혜로 양육해 가시는 것입니다. 목사의 역할은, 하나님이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사로서 심고 물을 주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성도로 양육해 가시는 것입니까? 12절의 말씀대로, 경건하지 않은 것과 세상 정욕을 다 버리는 자로 양육해 가시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로 양육하시고,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소망하고 기다리는 사람으로 양육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고쳐 가시고, 만들어 가시고자 하시는 방향입니다. 이런 사람으로 양육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이 양육하시고자 하는 사람 되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이 양육하시고자 하시는 사람으로 바뀌기를 원합니까? ‘예, 하나님, 나도 그런 성도로 세상에 머물기를 원하오니, 저를 그러한 자로 양육해 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양육하고자 하시는 사람은, 한마디로 세상사는 재미가 달라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경건하지 아니함과, 세상 정욕을 다 버리는 사람으로 양육하시겠다고 하시는데, 과연 경건하게 세상 정욕을 버린 자로 세상을 살아갈 때, 즐거움이 될 수 있을까요?
경건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삶의 중심에 두고, 구별된 자로서 말씀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삶이 과연 재미있을까요? 또한 세상정욕에서 떠난다면, 세상 것을 누리고 얻는 재미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느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이 양육하고자 하는 모습이, 마음에 안들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따로 소망하면서,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분명 하나님이 양육하고자 하는 성도의 모습에 대해서는, 관심이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양육하고자 하는 방향과는 다른 길을, 우리 마음에 두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양육하십니다. 역시 여러분은 자신이 그런 사람으로 양육되기를 소망합니까?
이처럼 하나님이 양육하시겠다는 사람과,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양육하고자 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됨에서, 정반대의 길에 서 있음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그냥 방치한다면, 우리가 흘러갈 길이 무엇이고, 마지막에 도달할 곳이 어디겠습니까? 세상을 따라 흘러감으로써, 세상과 함께 멸망으로 끝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계속 두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양육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은혜로 양육하시겠다는 것은, 사람의 힘과 노력으로는 도무지 안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양육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목사가 성도를 양육하겠다고 설치는 것이고, 또한 목사가 양육하고자 하는 것과, 하나님이 양육하고자 하시는 모습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고마울 수밖에 없는 것은, 말씀과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은혜로 양육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진심으로 하늘의 생명이 되는 것에 소망을 두고 있다면, 돈 벌고 병 낫는 은혜만을 고대할 것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고쳐가시고, 양육하시는 은혜를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14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내어 놓으신 것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해서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란, 나를 속량하신 그리스도만을 믿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 일에 열심인 것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 된 성도의 할 일입니다. 우리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고자,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속량의 이유입니다.
구원을 단순히 천국 가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 붙들려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어떤 사람으로, 양육되어 가는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