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은의 「콜로라도에서 콜라라도 한 잔」 평설/ 박대현
콜로라도에서 콜라라도 한 잔
황주은
콜로는 칼라야, 라도는 레드
붉은 땅이라는 뜻
흙이 진짜 붉어 물을 부으면 진한 벽돌색이야
그 흙에 들깨며 상추를 심고
파도 심었지
미국은 파가 비싸
킴스 오리엔탈 마켓은 마늘 냄새 버무려진 소문이 떠돌던 곳
사흘이 멀다 하고 김치를 담가 팔러 보냈지
한 고향 사람끼리 사기를 치고 당할 때
당할 일 없는 가난이 오히려 다행이던 시절
왕소금에 청교도 같던 그땐 싸구려 냉동 피자도 감사히 먹었지
베이비시터도 하고 한글학교 교사도 했는데
도끼로 얼음 깨며 새벽 같이 일자리로 나설 때
눈 덮인 산은 소름 끼치게 고왔는데
그건 참 오래된 이야기
그때 알던 A를 중앙병원에서 마주쳤지
우리 음료라도 한 잔?
콜라를 마실 때마다
생각나는 카페테리아
접시도 닦고 배식도 했던 기억을 서로 덮어두고
너희 나라 전기 들어오느냐고 묻던 에블린도
중고세탁기를 날라 준 마이클도 심장병으로 죽었다는군
콜라와 얼음 사이 떠오르는 물방울을 바라보며
이것은 붉은 흙 속에 묻은 이야기
흙을 덮을 때는 또 다른 흙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방학 때면
락스 통을 들고
모텔청소를 다니던 우리가
⸺격월간《시사사》201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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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시인에게 언어는 혼돈과 불안의 장막이다. 혹은 회의와 불신의 대상이다. 언어에 내속된 의미의 불안정성과 휘발성, 그리고 고정된 의미의 배면에 작동하는 권력체계의 허위에 대한 인식은 해체주의적 세계관을 경유하면서 시인의 사유에 의미의 크레바스를 기입하고 공백(vide)의 공간을 열어놓는다. 무엇보다 이제 시는 진리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롭다. 시의 언어가 ‘존재의 집’을 부정하거나 진리 추구를 배반하더라도 그 자체로 시적인 것의 지위를 보장받으며, 오히려 ‘시’(詩)라는 우주의 사건지평선에 닿는 일이 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발아하는 언어의 혼돈과 불안, 혹은 언어에 대한 회의와 불신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곧 새로운 시적 역능(puissance)으로 전환하는데, 그 과정에서 언어유희(pun)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유희정신은 거리두기의 정신이므로, 이전의 언어관과 세계관을 청산하는 데 유효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언어유희가 단순한 말놀이가 아니라, 일자(一者) 중심의 세계를 저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자의 진리가 지배하는 세계의 엄숙성을 붕괴시킴으로써 새로운 역능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데, 진리의 다수성(multiplicity)은 그 펼쳐진 공간에서 자유로운 생성과 분화의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인용시는 표면적으로 시인의 이국살이를 진술하면서 주체의 혼돈과 분열을 다소 건조하게 그려낸다. ‘콜로라도에서 콜라라도 한 잔’이라는 제목의 언어유희가 암시하듯이, 이 시는 무거웠던 삶을 가벼운 언어로 드러내고 있다. 인용시는 한글학교 교사, 베이비시터, 카페테리아 접시닦이, 모텔청소뿐만 아니라 직접 텃밭을 일구고 김치를 담가 파는 등의 일을 통해 생활을 유지했던, “참 오래된” 미국에서의 삶을 진술한다. 힘겨웠던 이국생활에 대한 진술은 무거울 수밖에 없는데, 의도적으로 “미국은 파가 비싸”와 같은 가볍고도 엉뚱한 진술을 통해 시적 언어의 발랄함을 표출한다.
무엇보다 ‘A’라는 명명법(命名法)은 시인의 주체가 처한 곤란을 암시한다. 중앙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A’는 정황상 같은 한국 사람이다. 시적 주체는 ‘A’로부터, 같이 접시를 닦고 배식을 했던 ‘에블린’과, 중고세탁기를 날라 준 ‘마이클’이 죽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그런데 시인은 ‘에블린’과 ‘마이클’의 이름을 직접 언급한다. 반면에 정작 같은 국적인 ‘A’는 익명의 기호로 대체된다. 이름은 존재의 고유한 표지라는 점에서 이 차이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A’는 한국 사람이지만 시인이 이름을 언급하기에 ‘불편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야기되는 효과는 주체(시인)와 타자(한국 사회)의 무의식적 불화에 대한 암시다. 즉, ‘A’라는 기호는 무미건조한 관계의 불용성(不溶性)을 함축한다.
따라서 이 시의 주체는 귀국한 후에도 주체의 원래 자리로 ‘귀국’하지 못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혹은 원래 정박점이 없는 주체였는지도 모른다. 이럴 경우, 생성의 주체는 자신을 구성하는 기호들을 ‘유희’하는 선택을 한다. 혼돈과 불안의 주체는 유희로써 정신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콜라라도에서 콜라라도’라는 언어유희의 저류(底流)에서 어디에도 정박하지 못한 주체의 비애가 감지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박대현 (문학평론가)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저서 『헤르메스의 악몽』 『혁명과 죽음』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