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서 1장 2절 – 7절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심판하고 멸망시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고 완악하며 무지한가 잘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생명에 대해서 긍휼이 여기심을 가지십니다. 요나서에 보아도 하나님은 니느웨의 수십만의 생명들을 멸하시기 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회개의 자리로 나아오길 바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태도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궁하며 무진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을 아끼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과 공의는 서로를 세위주며 견지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까지도 사랑에 기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배역한 자들을 공의로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사랑으로 아끼시고 긍휼이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서 때론 하나님의 심판이 아주 냉혹하고 철저하게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했다고 해서 바로 심판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통로들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바로 살리시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하거나 주의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했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다윗을 즉시 심판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하시기 전에 다윗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나단선지자란 말씀의 통로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 때 다윗은 나단선지자를 죽이고 말씀듣는 것을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게 하시므로 다윗을 시험하십니다. 그 때 다윗은 오늘 날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교만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성소에 나아가 회개를 선택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용서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니느웨는 백년전에 요나선지자의 회개촉구의 메시지를 받고서 회개를 선택함으로 하나님의 긍휼이 여기심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은 니느웨를 향한 심판을 연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합이나 므낫세같은 사악한 왕들까지도 하나님의 심판하심의 말씀을 듣고서 회개하였을 때는 심판을 연기하시는 것을 성경은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바라시는 것은 말씀을 듣고서 회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하나님의 뜻과 목적으로의 전환 즉 하나님의 길을 택하여 서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백년이 흐르고 요나때의 경험이 없는 세대가 일어나니 그들은 다시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장입니다. 아무리 강한 나라라도 교만으로 인해 망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부자는 교만했습니다. 자기의 부함을 자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자랑이 입으로 하는 자랑이든 또는 남의 칭찬이나 아부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드리는 것도 교만입니다. 이스라엘의 아그립바 1세도 사람들의 칭찬을 무언으로 받아드렸어도 그 교만으로 인해서 비참하게 죽는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지독하게 잔인했습니다. 그들은 일세기전에 하나님이 니느웨를 용서하신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잔인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는 사랑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보다도 더 잔인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니느웨사람들에게도 고통의 때가 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 니느웨를 향해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이 심판은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절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멸망은 확정적인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니느웨는 북이스라엘을 향해서도 잔인하였습니다. 니느웨사람들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면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세상의 사람들을 섞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빠르게 세상에 동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북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배역한 북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서 앗수르를 택하였지만 그 앗수르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보다 더 잔인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할 때 하나님은 그 앗수를 향해서 보복하시는 것입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심판했지만 이젠 하나님께서 그 앗수르를 보복하시는 것입니다. 나훔선지자는 하나님의 보복하심의 심판이 너무나 확실하다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심판하심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은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듣기를 거절하고 거듭하여 악에 속하면 하나님은 심판의 도구들을 통하여 우릴 징치하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징치한 자들에게 대해서 보복하십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복하심의 대상이 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보복하시는 날에도 하나님은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을 보호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