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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6 / 승리하는 성도의 삶 (아2:10-14)-교회창립주일
오늘은 주는 교회 창립 기념 주일입니다.
불신자건 교인이건 교회가 전도할 때나 교인들을 권면할 때 하는 말 중에 ‘인생의 방황은 예수그리스도 만나면 끝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인생을 가장 축복된 인생으로 만들어 가는 가장 축복된 결단입니다. 그렇기에 교회가 해야 할 일 중에 가장 우선적인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해주는 일 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과 성도를 향해 예수님을 믿어 복 받은 인생이 되라는 권면을 수시로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축복 하심 곧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복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의외로 많은 사람이 심지어 교인 중에서도 축복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남보다 돈이 많으면 축복받은 걸까요?
인생에 아무런 고통이나 어려움, 갈등이 없으면 축복일까요?
아닙니다. 사람이 만족하고 행복하다는 것이 고통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고통이 있을 때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그것은 오히려 비극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분을 심방한 적이 있는데 그분이 제게 “지금 저를 가장 비참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묻더니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한번은 방문한 친구가 실수로 뜨거운 녹차를 자기 허벅지에 쏟았는데 뜨거운 줄도 아픈 줄도 모르겠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살이 타들어 가는데도 아픈 걸 느끼지 못할 때의 그 기분은 하반신이 마비됐을 당시보다 더 비참한 기분이 들게 하더랍니다.
우리가 정상이요 너무도 인간적이란 증거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실망하고 낙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는데도 겉으로는 고민이 없는 척하는 것은 위선일 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 행복한 인생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눈물을 없애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가 있기에 눈물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울어야 할 때는 울어도 됩니다. 고통스러울 땐 괴로워해도 되고, 화날 땐 분노해도 되며, 욕심이 생기면 욕심을 내도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과 함께 감정을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럴 땐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님이 주신 감정까지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는 것, 고통스러워하는 것, 분노하는 것, 욕심을 내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우린 연약한 인간이기에 살면서 당연히 그런 연약한 모습들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믿음으로 살고자 하면 눈물, 고통, 분노, 욕심 등이 우리의 마지막 모습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일단은 인생의 어려움 앞에서 슬퍼하고, 고통받고, 분노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끝내는 게 아니라 그다음에 할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8;28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인생의 모든 행복과 불행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세상사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손길을 피하여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울고만 싶은 상황을 만났을지라도 실컷 울 만큼 울고 난 다음에는 그런 눈물까지도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우리의 ‘현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걸 아십니다. 우리에게 실패가 있는 것을, 우리에게 실망이 있는 것과 우리에게 가난과 고난이 있는 것도.
다 아시기에 하나님은 또한 마냥 기다리십니다. 현재의 내 모습이 우는 내가 아니라, 고통스러워하고, 분노하거나 욕심만 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실 것을 믿는 것이 나의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를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예를 들어, 소금의 화학적 명칭은 염화나트륨인데 원소기호로는 NaCl입니다. 이때 Na는 나트륨, Cl은 염소를 표시하는 원소기호인데, 이 둘이 각기 따로 존재할 때는 인체에 부작용을 가져오는 독성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둘이 화학적으로 합쳐지면 인체에 유익하고 필수적인 염화나트륨 곧 소금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심’도 이런 식입니다. 나트륨이든 염소든 또는 염화나트륨인 소금이든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입니다. 따라서 세상 어딘가엔 나트륨이 있겠고 어디엔 간 염소도 있겠지요. 하지만 필요할 대면 하나님은 그 둘을 합력하여 사람에게 유익한 소금이 되게도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입니다. 각각도 있게 하시지만, 필요할 땐 그것들을 합력하여 선이 되게도 하시는 것. 이게 저나 여러분에게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누구에게도 인생에서 슬픔이나 고통이, 분노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필요할 때면 그런 것을 다 합력하여 소금처럼 우리 인생에 유익한 것이 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언제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될 때.
어디서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로 살아가는 자리에서.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 인생의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든 거기서의 여러분의 ‘현재의 모습’은 여러분 스스로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임을 믿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할 때면 하나님은 축복과 은혜로 우리와 함께해주십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내용입니다. 10절 하반절과 13절 후반부를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하십니다.
‘일어나라’는 말은 쓰러졌거나 넘어진 자에게 하는 말로 신앙적으로는 인생이 주저앉았을 때라도 절대로 낙심한 모습으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넘어져 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축을 받아 다시 일어서는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그 어떤 것이 우리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워 다시 전지하며 살아가게 해줄 수 있습니까? 돈으로도, 사람도, 명예나 권세로도 안 되는 걸 아시잖아요.
인생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이후부터의 여러분의 삶은 반드시 하나님의 부축을 받아 다시 일어서는 인생을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이후로는 항상 이 찬양을 기억하시고 필요할 때마다 불러서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 손의 부축을 받아 다시 일어서고 다시 힘을 내려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찾으시고 부르십니다. 복 주시려고.
(한 번 따라 하세요.) “하나님 나를 부축해 주세요.”
다시 본문을 보세요. 14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고 하십니다.
왜 하늘을 날아야 할 비둘기가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겠습니까?
본문이 전해주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알고 봐야 하는데, 본문에서 말하는 비둘기는 야생 비둘기가 아닌 집비둘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집에 있어야 할 집비둘기인데 지금은 현실에서 당하고 있는 고통과 상실의 상처로 인해 지금은 집이 아닌 높은 바위틈 그것도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숨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원어로 보면 좀 더 분명해지는 데 본문에 나오는 비둘기는 원어로 ‘요나’입니다.
낯이 익지요? 우리가 잘 아는 선지자 요나의 이름의 뜻이 비둘기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하나님이 보시기에 요나의 형편이 어땠나요?
현실에서는 앗수르라는 강대국에 시달리며 고통과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신앙적으로는 그런 앗수르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께 큰 실망과 낙심을 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이 찾으실 때의 요나의 ‘현재의 모습’은 다시스로 가는 배 밑창에 웅크리고 숨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할 요나가 배 밑 은밀한 곳에 숨어 있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요나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네 얼굴을 보여다오. 네 소리를 들려다오.’라고.
혹시라도 전쟁 같은 삶의 현장에서 짓눌려 힘들어하는 분이 계십니까? 혹시라도 어렵고 힘든 삶에 찌들어 헤어나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 인생들을 찾아오셔서 ‘일어나 함께 가자’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이 오늘 우리가 믿어야 할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요나의 경우를 다시 보세요. 물고기 배 속에 갇혀 죽기만을 기다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요나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이때 순서를 잘 살펴보세요. 요나서와 아가 서를 같이 놓고 보면 아가 서에서 나와 함께 가지시며 나로 네 얼굴을 보고 네 소리를 듣게 하라는 하나님의 초청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다음 요나서에서 요나가 그 얼굴을 하나님께로 돌려 하나님께 소리 내서 기도합니다.
결국 기도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요나의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요나의 인생을 죽음의 자리에서 일으키셔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 계획하신 승리의 길로 돌려놓으셨습니다.
이게 우리가 어려움 중에서도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나로 내 얼굴을 보고 네 소리를 듣게 하라시는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의 얼굴을 보고 우리의 소리를 듣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찬양곡 작사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느냐고.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라고.
평소 여러분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가끔 자기는 기도를 할 줄 모른다며 목사님이 기도 좀 해주시라고 하시는 분을 상담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 제목이 뭐냐고 물으면 현재의 상태나 심정적인 두려움과 걱정, 육체적 아픔이나 장래의 희망 등에 대해 술술 잘도 얘기하십니다. 그래 놓곤 막판에 ‘목사님이 알아서 기도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또 그런 분이 병원에 가선 어떻습니까? 어디가 어떻게 아프고 어떻게 치료되면 좋을지 등에 대해 의사에게 소상히 설명하고 나선 그럽니다. ‘선생님이 좀 고쳐주세요.’라고
이참에 제가 여러분에게 기도 잘하는 법을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기도하고자 하는 때면 ‘목사님’ 하는 대신 ‘하나님’ 그러세요. ‘의사 선생님’ 그러는 대신 ‘하나님’ 그러세요. 그러고는 목사에게 기도 제목이라며 했던 얘기며 의사에게 아픈 현상이라며 했던 얘기들을 하나님께도 그대로 말씀드리세요.
목사 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기도드립니다 라고 하시고, 의사 대신 하나님이 치유하시고 강건케 하시기를 구하세요.
이제부터라도 여러분에게 원치 않는 것이 있다면 또는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중간에 목사나 다른 것들을 끼워 넣지 말고 하나님께 직통해서 여러분의 소리를 하나님이 듣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게 잘하는 기도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14절을 보면 네 얼굴 좀 보자. 네 소리 좀 듣자 시던 하나님은 느닷없이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라고 하십니다.
문맥만 놓고 보면 하나님의 초청하심에 대해 우리가 아직 보여드리지도 않았는데, 들려드리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은 이미 우리 얼굴을 보셨고 우리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현실에 지치고 실망하여 뒤돌아섰고 침묵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실을 피해 배 밑창에 숨어 있는 요나를, 현실을 피해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피해 있는 비둘기를 하나님은 쭉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고 계십니다. 너희가 결국엔 나를 찾을 것이라고, 결국엔 내게 기도하리라고. 그랬기에 하나님은 미리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나를 찾는 네 얼굴이 아름답고 내게 기도하는 네 소리는 부드럽구나 라고.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기도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진정한 의미는 비나이다 비나이다라는 기복을 위함도 아니요, 일주일 만에 보는 반가운 사람과의 만남 때문이 아닙니다. 예배 안 드리면 찜찜하고 복은커녕 화를 당할까 봐 두려워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 나오는 가장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 내 얼굴을 보여드리는 데 있고, 우리가 기도하는 가장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내 소리를 들으시게 하는 데 있음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최후에 웃는 자가 승리한 자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지금 울 일이 있다 해서 실망하지 마세요. 지금 좀 힘들다고 해서 낙심하지도 마세요.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다 해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 16절을 보세요.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내 일이 하나님 일이고 하나님 일이 내 일이기에 뭘 하든 우린 하나님과 함께해야 하고 하나님 역시 매 순간 우리와 함께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둘 사이에 이 관계가 끊어지면 안 됩니다. 둘 사이에 이 관계를 계속 이어주는 것이 하나님 편에선 사랑이고 우리 편에선 믿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우린 세상에 나가서도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도 얻어야 하겠기 때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비둘기라 부르시고 요나라 하신 이유를 잘 새겨야 합니다. 비둘기에게는 귀소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자리 어떤 형편에 있든 간에 우린 ‘믿음의 귀소본능’을 발휘하여 언제든 어디서든 성도인 내가 있어야 할 자리 곧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순간의 상황만을 놓고 믿음이 흔들리거나 기도가 중단되게 하지 마시고 초지일관하게 하나님만 믿어보세요. 하나님께 기도해 보세요. 일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해 보지도 않고, 또는 하다가 흐지부지하지도 말고 여러분의 삶이 믿음으로 시작해서 기도로 쭉 이어져 나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다면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과연 우리의 얼굴만 보고 우리의 소리만 듣는 걸로 끝내실까요?
아닙니다. 처음부터 우리를 도우시려고 나를 찾으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이제도 도우시고 마지막까지 도우시사 애초부터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신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렇듯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요나 같은 인생을 사는 저나 여러분 모두에게 늘 충만하여 우리 모두가 승리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