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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3일 토요일 오후 8시
반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에서 저는 장인 장모님, 아내, 그리고
아들 정민에게 이번 여행에서 이것 한 가지만은 꼭 지켜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제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려 하면 아무리 피곤한 상황에서도 모델들처럼 환하게 웃어주세요. 절대로 '사진 안 찍어' 하시면 안 돼요."
지금까지 평생토록 수없이 많은 여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행이 끝나고 나면 그 뿐. 아주 특별한 추억 말고는 여행의 기억은 시간과 함께 아스라이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모두들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여행에서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다." 그러나 사진 찍기에 열중하면 정작 경치를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또는 나이
든 모습을 찍히기 싫다는 이유로 사진을 싫어하는 분이 제법 있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다녀와 몇 년 후
사진을 보면 사진은 그 추억의 순간을 꼭 붙잡고 있습니다. 그럴 때면 사진이 그리 고마울 수 없습니다.
저는 이번 성지순례를 나서면서 사진을 많이 찍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텔아비브 공항에서 광고판도
찍고 자판기도 찍었습니다.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냐 싶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것도 추억이고 다
소용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연신 핸드폰을 눌러 댔습니다.
텔아비브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길에 버스 안의 풍경도 찍었습니다. 호텔에 도착하였습니다. 다들 피곤한 기색입니다. 그래도 저는 가족들 모습을 핸드폰에 담았습니다. 다들 환하게 웃으며 촬영에 응해줍니다. 호텔 방에서 밖을 바라보니
그저 그런 야경입니다. 그래도 한 장 찰칵. 아침이 되었습니다. 아침 뷔페식당의 음식 가지 수가 한국의 저녁 뷔페보다 더 많습니다. 자리에
앉기 전에 음식 사진을 6장이나 찍었습니다. 자리에 앉아서도
가족들에게 이런저런 주문을 합니다. "여보, 어머님과
같이 포즈 좀 취해 봐요." "정민아, 할아버지하고
같이 찍자."
아침 예배를 보기 전에도 기념으로 한 장 찰칵. 40명의 일행이 버스 2대에 분승하고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창밖에는
비가 내립니다. 날씨가 걱정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것도 추억이야. 비 내리는 차창 밖을 찍어보자." 제대로 포즈를 잡고 찍은 사진도 있었지만 스냅 사진도 많이 찍었습니다. 사진을 기억의 보조 장치로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된 건물
윗단도 찍고 우산을 들고 걸어가는 일행들 뒷 모습도 찍었습니다. 유상현 교수님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제롬의 동상 앞에서 짧은 강의를 하실 때는 강의 내용을 녹취하는 기분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베들레헴을
떠나 나사렛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에 해가 뜹니다. 그리
반가울 수 없습니다. 창밖 풍경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도 여러 가지 모습을 핸드폰에 담아냅니다.
마리아 수태고지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각국 성당에서 보내온 성모 모자이크가 회랑에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보내온 <평화의 모후에 하례하나이다>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들어 있지 않은 풍경 사진은 뭐하러 찍는 것일까? 인터넷에 가면 내가
찍은 사진보다 더 잘 찍은 사진이 수두룩한데. 그냥 찍으면 그런 사진과 다를 바가 없다. 나의 어떤 것이 들어가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생각한
구도, 각도, 배경이 있어야 내가 찍은 사진이 되지 않을까? 그 사진을 보면 그때 그 순간의 느낌과 추억이 되살아 나올 거야."
사실 사진을 찍을 때 누군가 지나가는 사람이 있거나 서 있는 사람이 있으면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훗날 생각하면 그냥 건물을 밋밋하게 정면에서 찍은 것보다는 행인이 있는 사진이 추억을 되살리는데 더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교회에서 나와 갈리리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아르벨 산을 차로 올라갔습니다. 가는 길에 쌍무지개가
떴습니다. 빗방울 얼룩진 차창 너머로 보이는 쌍무지개를 핸드폰에 담았습니다. 10장을 찍었을까요. 그런데 정작 아르벨 산 공원은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10분 늦었다고 들여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대신,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설교하신 팔복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이번 이스라엘
여행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일행들은 찬양도 하고 이 행사를 이끈 김상근 연세대 신학대 학장님의
설교도 들었습니다. 찬송가도 설교도 녹음하는 기분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팔복교회를 끝으로 첫날의 여정이 끝났습니다. 이렇게 사진을 찍으며 5박 7일을 보냈습니다.
나중에 집에 와서 보니 5박 7일 동안 약 1,300장 정도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 사진을 어떻게 정리할까
계속 고민하였습니다. 특히 장인어른 팔순 기념으로 간 여행인 만큼, 무엇인가
기념할만한 것을 만들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으로 동영상을 만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사진으로 동영상을 만들어 본 적이 있지만 최근 몇 년간 그런 일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해 서툰 솜씨로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제목을 넣고 사진을 골라 넣었습니다. 동영상을 만들다 보니 초점이 맞지 않는 차창 밖 풍경 사진들이 오히려 동영상을 풍요롭게 합니다. 증명사진만 있었으면 얼마나 밋밋하였을까요. 음악도 넣었습니다. 마지막 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신 길을 저희도 십자가를 지고 걸어갔는데, 그 장면부터는 음악이 <Ave Maria>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여행지인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기념관에서 찍은 사진들에 들어간 음악은 <Time to say goodbye>였습니다. 절묘한
조합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42분짜리 이스라엘 여행
동영상이 완성되었습니다.
구정 당일 처가에 세배를 갈 때 이 동영상을 가지고 갔습니다. 저녁을 먹고 모두 둘러앉아
감상하였습니다. 가족들은 다시 여행을 한 기분이라고 한마디씩 하였습니다.
여행, 사진 그리고 동영상 무엇인가 완결된 느낌이었습니다.
제 컴퓨터에는 동영상으로 재탄생 되기를 기다리는 수만 장의 사진들이 있습니다. 언젠가 그들이
동영상으로 재탄생 되는 날을 그려봅니다.
여러분의 여행 사진은 어떻게 저장되어 있는가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첫댓글 앞으로는 본인을 넣은 사진찍기 싫어도 찍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