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우물 사연
사월 셋째 일요일은 곡우였다. 비가 내려 곡식에 이로움을 준다는 때다. 밭에 묻은 씨앗이 싹 트고 논에는 못자리를 위해 물을 가두었다. 그제 흡족한 비가 내려 초목이 한층 더 싱그럽게 보인다. 곡우 절기에 맞추어 내려준 비다. 경칩 무렵은 고로쇠 물을 받아먹고, 곡우 무렵은 곡우물을 받아먹는다. 곡우물은 박달나무나 자작나무 수액으로 초임 근무지 밀양 얼음골에서 들어봤다.
삼십여 전 같은 연령대보다 뒤늦게 교직에 입문해 밀양으로 발령을 받았다. 밀양 시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동북 방향 산골이었다. 밀양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 비포장 자갈길을 한 시간 넘게 달려 종점에 닿았다. 광주에서 담양을 거쳐 지리산을 넘어온 24호 국도가 거창에서 창녕을 지나 울산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가지산을 넘는 석남고개에 터널을 뚫는 공사를 했다.
당시 중동 사막에서 명성을 날린 ‘공영토건’이 공사를 맡아 고갯길 측량이 시작되던 시절이었다. 그 토건회사는 이후 아이엠에프 때 사라졌다. 나는 사택 사정이 여의치 않아 매일 숙직실에서 잠을 자고 밥은 학교 앞 슈퍼에서 먹었다. 그때 토목공사 현장으로 파견 나온 기사들과 같이 끼니를 해결했다. 지금은 석남터널보다 아래 가지산터널이 생겨났고 2차선이 4차선으로 바뀌었다.
소규모 학교 교직원 수가 적어도 총각인 내가 숙직을 도맡아 해 다른 동료들은 수월했다. 지금처럼 야간 전담 당직자가 없던 시절이었다. 한 달을 지내고 나니 학교 회계를 보던 선배가 숙직 수당이랍시고 몇 푼 건네주었는데 그걸 다 받지 않고 일부는 친목회비로 보탰다. 난 그 시절 대구 근교 야간 강좌 대학에 새로 입학을 해 놓고 통학거리가 멀어 휴학해 놓고 있는 상태였다.
삼십여 년 전보다 지구가 온난화되어 가고 있음을 알게 하는 분명한 지표가 있다. 그곳 초임지에서 삼월에 이어 사월 들어 두 번째 월급 받았다. 당시는 요즘 같은 통장 입금이 아니고 현금이 든 봉투로 받았다. 행정실 직원이 배치되지 않아 부부 교사로 근무하던 선배가 학교 회계와 급여를 맡아 처리했다. 두 번째 월급을 받던 날 그곳 얼음골은 눈이 내려 쌓여 희끗희끗했다.
앞서 곡우절 수액을 곡우물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난 그해 4학년 아이들을 맡아 지도했다. 어느 날 아침 한 아이가 내가 머무는 숙직실로 찾아왔다. 손에 든 투명한 유리병에 뭔가가 채워져 있었다. 요즘은 플라스틱 재질 페트병이 대세이지만 당시는 유리병이 흔했다. 됫병 소주를 담는 유리병이었다. 투명한 것으로 봐 꿀은 아닌 물인 듯했다. 담임에게 소주를 병째 안길 일이야.
그 아이는 대뜸 아버지가 선생님 드시라고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청정한 곳에서 받은 약수로 생각하고 숙직실 구석에 두었다. 그로부터 보름 정도 지난 어느 날이었다. 달이 바뀐 오월 초순이었지 싶다. 사택에 지내는 선배가 숙직실로 찾아와 같이 시간을 보냈다. 선배는 방구석에 됫병 소주를 보고 놀랐다. 총각이 무료한 시간에 술을 드나 걱정했다.
그제야 어느 날 아침 한 아이가 나에게 안겨준 유리 됫병이 생각났다. 얼음골 가까운 마을에 사는 한 아이가 가져온 것이라 했더니 선배는 내용물이 뭔지 알아차렸다. 곡우물이라고 했다. 선배는 그곳 학교에 몇 해 먼저 부임해 와 지역 사정에 훤했다. 곡우 무렵이면 고로쇠와 같은 수액을 받아 마신다고 했다. 학부모가 담임에게 곡우물을 맛보십사고 아이 편으로 보낸 것이 분명했다.
난 학부모 성의를 몰라준 체 방구석에 방치시켜 놓았다. 냉장고에 보관해도 수액이라 오래가지 못했을 테다. 투명한 곡우물은 무색무취라 겉으로 봐서는 상했는지 여부를 알 수 없었다. 수액을 상온에 한동안 두었기에 변질되었음은 당연했다. 선배는 입맛만 다시면서 귀한 곡우물을 버리게 되었다고 아쉬워했다. 내보다 예닐곱 많은 선배는 코이카 봉사활동을 떠나 페루에 머문다. 20.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