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이미 받은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연중 제31주일 강론>
(2024. 11. 3.)(마르 12,28ㄱㄷ-34)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2-33).”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1) 사랑은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전에’ 했었다는 말이나,
‘나중에’ 하겠다는 말은 아무 의미 없는 말입니다.
‘전에는’ 사랑했는데 어떤 이유 때문에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너 하는 것을 보고, 사랑하겠다.” 라고 말한다면,
지금은 사랑하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어떤 조건을 걸고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참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사랑 말고는 다른 이유나 목적이나 조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바로 이곳에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특정한 장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사랑하는 생활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은 성당에 있는 동안에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에는 “지금은 먹고 살기가 너무 바빠서
여유가 없다. 나중에 시간이 좀 나면 그때 신앙생활을
하겠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말은, 주님에 대한 사랑도 없고 자신의 영혼에 대한
사랑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일 뿐입니다.
지금 없는 사랑이 나중에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또 사는 것이 너무 편하고 좋아서 주님을 아쉬워하지 않고,
아예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사는 것이 힘들어지면 그때서야 잘못했다고
주님께 빌면서 도와달라고 애원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신앙도 아니고,
미신과 다르지 않은 기복신앙일 뿐입니다.
2) 사랑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하는 일입니다.
남에게 시켜도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대사제 카야파가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9-50).”
이 말은, “민족을 위해서 예수를 죽입시다.” 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그가 참으로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내 목숨을 바치겠소.”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목숨을 바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고,
남을 희생시킬 생각만 했습니다.
<그는 민족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판관 입타’의 경우도 같은데, 그가 정말로 하느님을 믿고
사랑했다면,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남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습니다(판관 11,31).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도 아니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그 서약 자체가 무효입니다.
사랑은, 목숨도 포함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아낌없이 내주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ㄱ).”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하느님과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은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뒤로 물러나 계시면서
당신의 아드님만 희생시키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사랑 실천이 ‘계명’으로, 또 ‘해야 한다.’로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하기 싫어도 하여라.” 라는 강제 명령은 아닙니다.
만일에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면,
그것은 계명 실천도 아니고 사랑 실천도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큰 기쁨’과 ‘행복’과 ‘평화’를 우리에게 주기 때문에,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계명이어서 의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쁘고
행복하니까, 또 내가 원하는 일이니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너희도 나를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고,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그러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5,9-17).
형제를(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로 실현되고,
이웃 사랑은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한다는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1요한 4,20).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신앙생활은 주님을 사랑하는 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