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
“난 뭣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어떻게 살아가야 헐 것인가를
첫째로 꼽아야 여.
내가 지금 허고 있는 작은 일부터 열심히 허겄어.
하나의 아주 작은 모래알 속에 사바세계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말과 같이, 넘들이 생각허기에 미미허고
사소한 장사판에서나마 이 넓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진리를 찾아내야겠어.
현재 나의 육체와 영혼은 험한 세상을 날아대니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세한 먼지 한 점일 뿐이란 말여.
난 증말 위대허지도 않으며 부귀영화를 누리고 사는 사람도
아니라니까.
그저 살기 위하여 발버둥치는 토담집 첫째 아들일 뿐이랑게.“
영길이는 하염없는 독백을 내뱉으며 새벽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요사이 집안에서 벌어지고 있던 뜻밖의 사건들을 신중히
생각한 후 내린 마음속의 다짐이었다.
그가 부처님을 받드는 이유 중 하나는,
세존께서는 세상사람 누구도 가볍게 보지 않으시며,
우리 중생들 개개인에 대한 장래 희망을 가지고 계신다는 점이었다.
자신은 비록 우주를 이루고 있는 한 개의 작은 먼지 한 점에 불과하지만,
우주가 존재함으로써 자신이 존재하며,
우주가 자신을 감싸고 있기에 세상을 살아간다고 믿었다.
그러한 깊은 진리 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탓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의 자세로 우선 할 수 있는 작은 일에 심혈을 기울이기로 했다.
부처님은 항상 자신을 확실히 믿고 몸소 실천하는 중생편이기에,
자신의 꿈은 십상팔구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고난 장사꾼처럼 되어갔다.
장삿속이 밝은 장사치가 아니라,
장사판의 질서를 지키는 장사꾼이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장사판의 질서는 우주의
질서와 다름없다고 여겼다.
우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단 하나의 질서 속에서
결실을 맺게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우주의 질서를 무시함으로써
불행하게 된다고 믿었다.
학업을 계속 하고자하는 자신의 의지가 꺾이지 않는 한
운명조차 그를 등한시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무작정 새벽길로 뛰쳐나왔던 당시와는 판이하게,
그는 세상살이가 꼭 고달픈 것만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사바세계의 수많은 중생들이 인생은 괴로운 것이라고 투덜대지만,
살아가는 괴로움이 있기에 행복할 수 있다는 진리를 잊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생활의 모든 것을 부처님의 가르침과 연관 시켜
더욱 매달리기 시작 했다.
집을 나오기 전 시간부터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의 아버지는 안동네 초상집에서 밤샘하고 돌아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고스톱’에서 800원을 잃고 기분이 언짢은 채 집에 돌아온
창근은 때 아닌 꿈속에서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받았다.
“네 이놈 !
800원이면 쌀 두말 값인디 순식간에 그걸 날려버려?
그 쌀 두 말로 죽을 끓이면 새끼들허고
보름은 살아가겠다.
논농사가 없을수록 쌀을 귀허게 여겨야지.
너는 마땅히 옥황상제님의 심판을 받어야 헐 거여.“
그의 아버지가 사라지자마자, 옥황상제가 커다란 지팡이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 못된 놈!
자식은 엄동설한에 장삿길에 나섰는데,
네놈은 집에서 일도 안 하고 화투판에서 놀아나고 있어?
네놈의 정신상태를 용서할 수 없으니,
끓어오르는 용암 속에서 고생 좀 해야겠다!“
갑자기 눈앞에 검은 연기가 치솟는 활화산이 나타났다.
창근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용암 구덩이에 쳐 박혀
어쩔 줄 몰라 했다.
온 힘을 다하여 뜨거운 용암 속에서 탈출하려 하였으나,
이미 자신의 두 다리가 불덩이의 뜨거운 열기에 녹아내렸다.
이제는 오도가도 못 하고 “부처님~ 지발 저 좀 살려 주시랑게요” 라고 두 팔을 휘저으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산을 휘감아 돌던 검은 연기는 금세 불기둥으로 변하여 하늘 높이 치솟았다.
창근이 꿈을 꾸고 있는 동안,
앞동산에서는 동네 아이들이 잔디밭에서 불장난을 하며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잔디에 붙었던 불길은 삽시간에 온 산을 침범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깡통에 구멍을 여러 개 송송 뚫어,
그 속에 솔방울을 넣고 불을 붙여 힘껏 돌리고 있었다.
한 아이가 돌리던 불놀이 깡통에 연결된 철사 줄이 끊어지면서,
공중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불붙은 깡통은 창근의 토담집
볏짚 지붕 위에 떨어졌다.
급기야 불길은 불어오던 세찬 북서풍을 타고 맹렬하게 안채를 태우기 시작했다.
결국 불길은 담벼락 볏짚 용마름을 타고,
외양간과 헛간까지 번져 타들어갔다.
불이 붙은 토담집 전체가 눈 깜박하는 사이에 검은
연기로 뒤덮였다.
매캐한 냄새에 잠이 스르르 깬 창근은,
깜짝 놀라 일어나 벗은 발로 토방에 내려섰다.
그는 “불이야 ! 불이야 !” 라고 정신없이 소리 질렀다.
외딴집인 토담집은 무참하게 불길에 휩싸일 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엥~ 엥~’ 하는 소리를 내며 무섭게 불어오던 북서풍은
불길을 더욱 세차게 타오르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토담집은 삽시간에 폐허화 되어갔다.
창근은 무의식중에 허겁지겁 마당으로 달려 나가
이리 왔다 저리 갔다하며,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보였다.
핏기 없는 그의 얼굴 표정은 참으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따금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가 그토록 애써 이룩해 놓은 인생의 최고 걸작품을
순식간에 잃어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런 긴박한 와중에도 부처님의 무심함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고 단정 지었으나,
못내 무언가에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초상 마당에서 일 봐주던 동네 사람들이 삼례 댁을
필두로 떼 지어 몰려왔다.
각자의 손에는 양동이며 세숫대야 기타 물을 퍼 나를 수 있는
그릇들을 들고 있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즈음, 이미 토담집은 거의 타버린 상태였다.
무엇 하나 온전한 것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화마에도 끄떡없는 황토 토담과
그 위에 걸쳐있는 다 타버린 서까래뿐이었다.
겨우 형체만 남은 서까래에서 아직도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왔다.
마을 사람들은 마지막 남은 불씨를 없애기 위해 옹달샘에서
계속 물을 퍼 날랐다.
맨발로 허둥대던 삼례 댁은 마치 포수에게 쫓기는
죄 없는 노루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거의 넋이 나간 상태였다.
신기 마을로 이사 온 이후,
오늘처럼 그녀가 초라하게 보인 적은 없었다.
그녀는 삶의 의욕을 잃은 듯 목소리까지 잠겨
겨우 말을 이어갔다.
토담집 방바닥은 물바다가 되어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화마가 완전히 물러가자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진화 작업을 끝낸 후, 동네 사람들은 모두 허탈감에 빠져있었다.
지서에서 차석이 달려와 화재의 원인과 피해 상황을 꼼꼼히 적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여기 집터가 너무 쎄서 그런 것 같여.
동네 당굿을 허든가, 아니면 점쟁이헌티 가서 토담집의
액운을 없앨 방도를 알아봐야 헐거구만.”
다른 한쪽에서도 수근 거렸다.
“인자부터는 창근이가 부처님을 믿을려면 제대로 믿어야 헐 거여.
부처님은 지혜롭고 자비로운 분인가는 몰라도, 이런 일 하나
막아주지 못허면 진짜 거짓말쟁이가 분명허당게!
한번 생각혀봐~ 창룡이가 이날 이때까지 얼매나 부처님과
죽고 못 살았나.
그 사실은 여기 신기 마을 바닥뿐만 아니라,
조선 천지가 다 아는 사실잉게.”
이런 줄도 모르고 늦게 집에 돌아온 영길이는
하도 어이가 없어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순금이도 정신없이 달려왔다.
어쩔 수 없이 식구들은 집이 복구될 때까지
창근의 외갓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영길이는 썰렁한 고요가 흐르는 토담집을 밤새도록 홀로 지켰다.
그는 그칠 줄 모르고 떠오르는 상념에 사로잡혀 추위도 잊고
안마당을 서성거렸다.
“인생이란 물레방아는 이토록 고통을 겪으며 돌아야만 허나?
고난이란 수레바퀴는 언제쯤 멈추게 될 거여? 나무관세음보살········.
어쩌서 우리 집은 끓이지 않는 환난과 싸워야 허나?
아니 여~ 그게 아닐 거여.
부처님께서 더욱 큰 행복을 주시려고 시험허고 계실 거여.
무지한 우리 중생이 그토록 뜻 깊은 부처님의 심중을
무슨 방법으로 헤아려 볼 수 있겠어?
부처님의 보살핌은 변함이 없는 법이여.
어떻게 우리 토담집만이 부처님의 자비심을 독차지 헐 수 있겠어?
우리 중생들은 정신이 무너지면 온몸에 속해 있는 모든 것도
결국 잃게 되는 거랑게.
사람이란 항상 미래를 가늠할 수 없는 신비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당장의 시련 앞에서 울부짖을 필요는 없는 거여.
난 지금부터 새로운 발심을 혀야 겄어.
그렇게 혀서 새로운 인생의 길을 찾고,
새롭게 출발허는 거랑게.
어떤 사람은 그러더라고.
우리 인생이란 끊임없이 이어지는 행복과 불행의 평행선을 타고,
두 선이 합쳐지는 종착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그건 말짱 헛소리란 말여.
대우주의 출현 이후 행복과 불행의 평행선이 만나게 되어
합일점이 이루어진 적이 한 번도 없단 말여.
우리 소우주의 정신세계는 대우주의 섭리를
벗어날 수 없는 법이라니까.
난 인제부터 대자연의 이치에 어긋남 없이 살아가야겠어.
부처님은 틀림없이 우리 토담집 식구들에게 더욱 큰 행복을 주실 거구만.
관세음보살은 시방세계의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어떤 실수나 잘못도 기꺼이 용서허시는 자비심 많은 분이거든.
이제부터는 관세음보살을 끊임없이 염하며
우리 토담집을 지켜야겠어.“
카페 게시글
BL소설
문 학
이런저런 꿈 이야기 ( 19회 )
장편소설
추천 0
조회 34
08.04.01 06:57
댓글 2
다음검색
첫댓글 기대되는 작품입니다 ^^ 잘 읽었어요!
무슨 꿈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