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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1일, 김성일(金誠一)은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어 한양에서 출발하였습니다.
1591년에 김성일은 경상감사 김수가 경상도 내지(內地) 곳곳에 성들을 쌓아
백성들을 대대적으로 부역(賦役)에 동원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이에 경상감사 김수(慶尙監使 金晬)가 조정에 아뢰길
"영남의 사대부가 작은 폐단을 싫어하여 이의(異議)를 떠들어대면서 갖가지로 방해 하옵니다.”
라고 하니
김성일을 싫어하는 관료들은 이에 동조하여 근거 없이 김성일을 헐뜯었습니다.
1592년에 이르러 경상우병사 조대곤(慶尙右兵使 曺大坤)이 늙고 나약하여
변방의 임무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여론이 일어 조정에서 경상우병사를 교체하려고 했는데
유성룡은 이일(李鎰)같이 군무(軍務)를 잘 안다고 알려진
무변(武弁-무관武官)을 임명하자고 주장했으나
선조 임금이 특별히 승지 김성일(承旨 金誠一)을 경상우병사에 임명했던 것이었습니다.
그가 한양에서 출발하려고 할 때, 그를 아는 사대부들이 안타까워하며 탄식하고
어떤 사람은 김성일이 남쪽으로 떠날 때 길에 나와서 위로하니
이에 김성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는 크고 책임은 무거우니 하늘 같은 은혜가 망극(罔極)하오.
이 몸이 죽지 않으면 오직 온 힘을 다할 뿐,
성패(成敗)는 말할 바가 아니오."
그리고 그가 한강을 건너면서 한강유별(漢江留別)이란 시를 지었습니다.
부월 들고 남쪽 향해 길을 떠남에
仗鉞登南路
외로운 신하 한 번 죽음 각오했다네.
孤臣一死輕
늘상 보던 저 남산과 저 한강 물을
終南與渭水
고개 돌려 바라보니 남은 정 있네.
回首有餘情
김성일은 충주 단월역(忠州 丹月驛)에서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서둘러 경상우도로 내려갔습니다.
(택당집澤堂集에는 김성일이 상주(尙州)에서 부산에 일본군이 쳐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이때에 조선이 생각하는 일본군에 대한 지식으로 일본군 규모를 판단하여
침략한 일본군이 10000여명 밖에 안 된다고 조정에 보고(報告)하고
서둘러 경상우도(慶尙右道)로 내려 갔다고 합니다.
택당 이식澤堂 李植은 선조수정실록을 만들때의 사관史官이라
택당집의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에 기술했는데
학봉집에는 그 기록에 반박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1592년 4월 17일 새벽, 한양의 조선조정에 일본군이 쳐들어왔다는 보고가 이르자
대신과 비변사가 빈청(賓廳)에 모여 청대(請對)하였으나 임금은 비답하지 않았는데,
이때 선조 임금은 일본군의 대규모 침략에 놀란 상황 이었고
신하들은 임금을 안심시키려고했었습니다.
마침내 관료들이 계청(啓請)하여
선조 임금은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중로(中路)에 내려보내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左防禦使)로 삼아 경상좌도(慶尙左道)에 내려보내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右防禦使)로 삼아 서로(西路)에 내려보내고,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아 죽령(竹嶺)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鳥嶺)을 지키게 하고,
전 강계부사 변응성(前 江界府使 邊應星)을 기복(起復)시켜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날 임명된 장수들은 모두 당장 소유한 병력이 없어
단지 스스로 군관(軍官)을 뽑아 휘하에 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성응길,조경,유극량,변기,변응성은 얼마 안되는 군관과 병력을 데리고
먼저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때 선조 임금은 일본군이 쳐들어온 책임을 따지고자 하였는데
희생양으로 경상우병사로서 내려가고 있었던 김성일을 선택하여
김성일을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편 경상도 내륙으로 진격하는 일본군의 전황(戰況)은 순조로웠습니다.
서울로 가는 3개 길을 53400명에 이르는 일본군 3개 번대가 각각 맡아 진격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지역장악(地域掌握)을 위해 병력(兵力)을 나누지 않고
오직 서울을 향해 길을 따라 대규모 병력을 집중(集中)시켜 이동시켰습니다.
길을 따라 목표 완수(目標完遂)를 위해 쳐들어오는 대규모 일본군과 달리
그들을 막아야 할 조선측은
일본군이 침입하면서 저지르는 학살,방화,약탈,강간에 대한 공포가 널리 퍼져
피난가는 백성들과 관리들이 많았고
조선 중기 이후 군역(軍役)을 꺼리고 피하려는 사회풍조(社會風兆)로 인해
백성들이 군역을 피해 떠돌아 다니거나 대립(代立)을 하며
군역을 기피(忌避)하여 군대에 동원할 수 있는 장정들의 수는 많지 않았으며
개전 초기에 울산의 경상좌병영이나 대구 감영에 병력을 집결하라는 명령들이 있어
경상도 내륙 고을들의 군사들이 경상좌병영이나 대구로 갔기 때문에
경상도 내륙 지역 각 고을들은 자기 고을에서 징집한
수십에서 수백의 병력으로만 일본군의 침입을 방어하거나
고을 안에 군대가 없는 상황에서 집중된 일본군 대병력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4월 18일에 밀양(密陽)을 함락한 일본군 1번대는
순조롭게 영남대로(嶺南大路)를 따라 북상(北上)하여
4월 19일에 청도(靑道)를 함락시켰습니다.
이때 청도군수 안촌 배응경(靑道郡守 安村 裵應褧)은
개전(開戰)되었을 때 부산,동래 등 여러 고을이 빠른 속도로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청도에 군사를 모집하는 격문(檄文)을 띄우고
한편으로 군량을 모으고 청도성의 성곽(城廓)을 수리(修理)하며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경상좌병사 이각이 그를 포망장(捕亡將)으로 임명(任命)하여
밀양 무흘역(密陽 無屹驛)에 가서 밀양 방면에서 도망쳐 오는 도망병을 잡는 일을 하였는데
밀양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급히 청도로 돌아갔으나
이미 청도의 백성들과 군사들은 밀양의 패배 소식를 듣고 달아나서 성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때 배응경의 휘하에는 아주 적은 수의 병력 밖에 없어지만
그는 청도를 방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경상감사 김수(慶商監使 金睟)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이웃 고을들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경상감사 김수는 이미 4월 18일 밤에 낙동강을 넘어 초계(草溪)에 있었고
청도에 일본군이 쳐들어오던 4월 19일엔 합천(陜川)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김수는 배응경을 직접적(直接的)으로 지원할 수 없었고
또한 배응경이 청도를 일본군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배응경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웃 고을들에서 지원군을 보내주는 것이었지만
이웃 고을들은 대구(大邱)나 경상좌병영(慶商左兵營)으로 병력을 보내어 군대가 없거나
일본군에 대한 소문으로 백성들과 관리들 모두 두려워하며 피하고 있어서 지원군이 오지 않았습니다.
또한 배응경이 지원군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때 경상감사 김수의 영(令)이 도착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대는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배응경은 문관文官이었습니다.)성(城)을 지키기 어려울 것이니
거취(去就)를 마음대로 하라.]
(안촌집安村集이나 배응경 행장行狀에 의하면
김수는 배응경의 보고를 받고 청도 이웃고을들에 청도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보냈고
배응경은 휘하의 병력이 너무 적어서 성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청도성문 밖에 진을 쳐서 청도로 쳐들어오는 일본군 1번대 선봉부대와 맞서싸우니
배응경 휘하의 대장(代將)이 일본군 선봉장(先鋒將)을 활로 쏴서 쓰러뜨리고
배응경의 조선군은 일본군 선봉대를 격퇴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청도성을 지키는 조선군 병력이 매우 적다는 것을 알고는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대규모 공격을 하니
마침내 배응경은 얼마 안되는 군사도 거의 잃었고
배응경이 싸우던 도중에 김수가 배응경에게 정예병精銳兵을 데리고 일본군의 예봉銳鋒을 피하라는
명령을 내려서 마침내 퇴각했다고 합니다.)
결국 배응경은 청도를 사수(死守)하지 못했고 피신(避身)했습니다.
청도를 함락한 고니시의 일본군은 4월 20일에 경산(慶山)을 함락하고 대구(大邱)로 향했고
4월 19일에 언양(彦陽)을 함락한 일본군 2번대는
울산(蔚山)과 경주(慶州)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4월 20일에 김해(金海)를 함락한 일본군 3번대는 4월 21일에 창원(昌原)을 점령하였는데
창원군수 장의국(昌原郡守 張義國)은 일본군이 나타나기도 전에 도망쳐버렸습니다.
한편 4월 15일에 전개된 소산역 전투(蘇山驛 戰鬪) 도중에 도망친
경상좌병사 이각(慶尙左兵使 李珏)과 그의 군대는 언양(彦陽)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을 버리고 달아나던 경상좌수사 박홍(慶尙左水使 朴泓)을 만나
합진(合鎭)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각은 울산(蔚山)의 경상좌병영(慶尙左兵營)으로 가버리고
박홍은 경주(慶州) 방면으로 도주 했습니다.
이때 울산의 경상좌병영에는 당시 조선 조정의 대전략(大戰略)인 제승방략(制勝方略)에 따라
경상좌병영에 소속된 13개 읍(邑)들에서 보낸 군사들이 집결(集結)해 있었습니다.
그무렵 4월 18일에 부산(釜山)에 상륙(上陸)한 제2번대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 22800명이
4월 19일에 언양(彦陽)을 지나 울산(蔚山)으로 진격(進擊)하고 있었습니다.
4월 18일 밤,이각은 수석진무(首席鎭撫)로 하여금 자신의 첩(妾)을 무명 1000필과 함께
대피하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에 진무(鎭撫)가 어렵다고 하니 이각은 화를 내고는 그 자리에서 진무의 목을 베고
억지로 첩과 무명 1000필을 대피하게 하였습니다.
4월 21일 새벽, 이각은 울산의 서산(西山)에 나가 진을 치겠다고 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성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니
울산 경상좌병영의 동문(東門)을 지키던 안동 판관 윤안성(安東判官 尹安性)이 말했습니다.
"좌병사 영감! 어찌 성 밖에 나가 진을 친단 말입니까?'
이에 이각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은 우후(虞候) 등 여러 수령(守令)과 성을 지키면 되오.
공이 가지고 있는 석전군(石戰軍-돌을 던지며 싸우는 병사)을 나에게 예속(隸屬)시켜 주기를 바라오.
나는 정병(精兵-잘 훈련된 병사)을 거느리고 나가 서산에 진을 치고
왜적(倭敵)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안팎에서 협공(挾攻)하겠소."
동래성과 소산역에서 있었던 일을 몰랐던 윤안성은 좌병사의 약속을 믿고 석전군을 보태주었고
마침내 이각은 서문을 통해 좌병영을 빠져나왔습니다.
이각은 성에서 나오자마자 성에서 배웅하는 윤안성과 군사들을 향해
태화강(太和江)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왜적의 선봉(先鋒)이 이미 저곳에 꽉 차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러고는 서산으로 달아나니 윤안성이 화가 나서 칼을 겨누며 이각을 욕했습니다.
하지만 주장이었던 좌병사의 도주로 좌병영 안에 있었던 조선군의 전의(戰意)는 크게 상실(傷失) 되어
군사들이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성안에 있던 우후 원응두(虞候 元應斗) 역시 도망칠 생각을 하자,
윤안성이 화을 내며 꾸짖기를,
“주장(主將)이 까닭 없이 성을 나갔으니 그 죄는 마땅히 참형(斬刑)을 받아야 한다.
그나마 너희들을 남겨두고 성을 지키게 했는데, 너희들까지 또 도망가려는 거냐!”
하니, 원응두가 감히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이 4월 21일에 울산 경상좌병영으로 쳐들어오니
우후 원응두가 먼저 도망쳐버리고 좌병영에 집결한 군사들도 또한 모두 흩어져 달아나버렸으며
경상좌병영을 지키려고 했던 윤안성 또한 안동(安東)으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 제 2번대 중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지휘하는 2번대 선봉대는
4월 19일 언양(彦陽)을 함락시키고 4월 21일엔 사잇길을 통해 경주(慶州)로 나아갔습니다.
이때 경주를 지키는 조선군의 총사령관은 경주부윤 윤인함(慶州府尹 尹仁涵) 이었습니다.
그런데 4월 17일에 조선조정은 윤인함이 늙고 나약하다 하여
강계부사 변응성(江界府使 邊應星)을 경주부윤으로 임명하고
군관(軍官)들과 함께 경주로 내려보내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변응성이 경주에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이 경주로 쳐들어오고 있었습니다.
4월 21일, 경주부윤 윤인함(慶州府尹 尹仁涵)은 포망장(捕亡將)으로서
경주성 북문을 통해 성을 나와 서천(西川)에 있었고,
경주판관 박의장(慶州判官 朴毅長)과 장기현감 이수일(長鬐縣監 李守一)은 경주성 안에서
성을 지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박의장은 일본군이 동래성을 공격한다는 급보(急報)를 받고 경주의 군사들을 데리고
경상좌병사 이각의 소속으로 동래로 지원(支援)가다가
경상좌병사로부터 경주성 수비(慶州城 守備)를 명령받고
경주성으로 돌아와 방어준비(防禦準備)를 하고 있었고
이수일은 경주성을 지키기 위해 장기현(長鬐縣)의 군사들을 이끌고
경주성으로 들어온 것 이었습니다.
4월 21일, 이날 일본군 기병(騎兵) 한 명이 경주성 동문 밖에 달려와서
패문(牌文)을 꽂아 놓고 갔습니다.
경주성 사람들이 그것을 가져다 보니,
“대마도주(大馬島主)가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니
판관(判官)은 속히 성을 나와 명령을 듣도록 하라.”
라고 씌여 있었습니다.
이때 경주는 피난하는 사람들이 집에 불을 질러 연기가 가득차고
다만 10리 밖에서 울리는 총소리를 통해 일본군이 다가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찰을 보낸 탐정군(眈精軍)은 달아났기 때문에
박의장과 이수일의 조선군은 갑작스럽게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일본군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어 있었고 경주성의 조선군은 무기가 빈약한 상태라서
수많은 군사들과 백성들이 성을 넘어 도망치고 있었으나
박의장과 이수일은 얼마 안되는 군사들을 모아 일본군과 맞서 싸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상대해야 할 일본군이 너무 많아서
마침내 일본군이 경주성 남문인 징례문(徵禮門)에 이를 때에
이수일은 경주성 서문인 망미문(望美門)을 열어 장기현으로 퇴각하였고
박의장은 경주성 동문인 향일문(向日門)과 북문인 공진문(拱辰門)을 열고
경주 북쪽의 기계(杞溪)와 죽장(竹長)의 경계 방면으로 퇴각하였습니다.
이때 일본군은 도망치는 조선인들을 추격(趨擊)하여 많은 사람과 말을 사살(射殺)하였습니다.
4월 21일, 용궁현감 우복룡(龍宮縣監 禹伏龍)은 군사 1000여명을 이끌고 경주로 내려가다가
경주 모량 길가(혹은 영천 길가에서 있었던 일이라고도 합니다.)에서
잠시 쉬며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이때 영천 하양(永川 河陽) 군사 500여명이 우복룡의 군대를 지나 북상(北上)하였습니다.
원래 하양 군사들도 용궁현감의 군사들처럼 경주로 가고 있었는데
경상좌병사 이각이 하양군 지휘관에게 하양군사들은 좌방어사의 소속이라 하여
경상좌방어사 성응길에게 보내게 했던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모르고 있었던 우복룡은 의심(疑心)을 하여 그들을 불러 세워 말했습니다.
"네놈들은 무엇인데 현감 앞을 그냥 지나쳐 북쪽으로 가는 것이냐?
너희는 이 난에 왜놈들과 내통한 반역 도당인 것이냐?"
이에 하양 군사의 지휘관이 병사의 명이라 하며 변명(辨明)하였으나
우복룡을 그 말을 믿지 않고 몰래 자신의 군사들에게 일렀습니다.
"저놈들은 왜놈들의 앞잡이거나 비겁하게 도망가는 병사들이다.
내가 신호하면 일제히 쳐죽여라."
우복룡은 자신의 군사들로 하양 군사들을 포위(包圍)한 다음,
점검(點檢)을 한다는 핑계로 하양 군사들에게 자신의 군사들을 접근(接近)시키고
눈짓을 주어 신호하여 용궁 군사들로 하여금 일제히 하양 군사들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순식간에 들판은 하양 군사들의 시체로 뒤덮고 피가 개울을 이루었습니다.
우복룡은 반역도당(反逆徒黨)들을 토벌(討伐)했다고 방어사에게 보고 했으며
그것은 전공(戰功)으로 인정 되었습니다.
이 일로 하양의 군적(軍籍)에 오른 사람들이 몰살(沒殺)을 당하다시피해서
이 사건의 피해자들(과부,고아 등)이 공무로 지나가는 관리를 붙잡으며 하소연했지만
우복룡은 이때 사건 이후 용궁현을 지켜내고 부임하는 고을들에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망을 얻었기 때문에 광해군(光海君) 때까지 이 사건은 인정 받지 못했습니다.
한편 하양 군사들을 전멸시킨 우복룡의 군대는 경주 방면에서 진짜 적(敵)인 일본군을 만났으나
이번에는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이무렵 경상감사 김수(慶尙監使 金睟)는 일본군을 피하는 동안
경상도 각 고을에 상반(相反)된 명령을 보냈습니다.
그 명령은 각 고을의 군사들을 대구 감영(大邱 監營)에 집결(集結)시키라는 것과
각 고을의 백성들을 대피(待避)시키라는 것 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상주목사 김해(尙州牧使 金懈),함창군수 이국필(咸昌郡守 李國弼),
문경현감 신길원(聞慶縣監 申吉元) 등 경상도 내륙과 경상도 북부 고을의 수령들은
경상도 내륙 고을들의 조선군을 데리고 남하(南下) 하다가
성주(星州)에 이르러 김수의 명령을 받고 대구로 진군(進軍)하여
4월 20일에 본대(本隊)는 대구 석전(石田)에 이르고 선봉대(先鋒隊)는 금호(琴湖)방면에 이르러
냇가에 노숙(露宿)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지휘해야할 총사령관(總司令官)인 경상감사 김수나 한양에서 내려와 지휘할 장군은
일본군이 대구에 나타나기 전까지 오지 않았고
오히려 대구 방면에서 피난와서 산골짝에 숨어있던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조선군이 오는 것을 보고 달여오니
조선군은 그들을 일본군으로 착각하여
말하기를 "왜놈들이 이곳에 잠복하여 우리 길을 끊으려 한다."라고 하고
그것은 순식간에 전군(全軍)에 퍼졌습니다.
이 상황에서 조선군 군졸 한 명이 피난민 한 명의 목을 베고 말하기를
"이것이 왜병의 목이다!" 라고 외치며 떠드니
지휘관인 김해와 이국필은 군대 안에 퍼진 소문으로 겁을 집어먹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완전히 착각하여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달아나니
지휘관이 없는 군대는 더 이상 통제(統制)가 되지 않고 겁에 질려
덩달아 병기나 식량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이때 군사들이 버리고 가는 활과 화살과 군량이 길에 깔리고
심지어 기병(騎兵)이 말을 버리고 달아나도 그 말을 끌고 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석전 방면의 경상도 북부 조선군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한편 상주사람 김준신(金俊臣)이 솔영장(率領將)으로서
초운군(初運軍)을 지휘하며 앞서 가고 있었는데
석전에서 고개를 넘어 머물면서 본대가 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본대가 달아난 사정(事情)을 알게되자
그는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설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가 부득이하게 휘하 군대를 이끌고
대구 금호(琴湖)까지 이르렀지만 대구부민(大邱府民)들이 말을 타거나 걸으면서
대구부에서 빠져나가 피난하는 것을 보니
김준신은 물론 그의 군사들도 대구부가 벌써 일본군에게 함락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로인해 김준신의 군대는 사기가 떨어지고 놀랍고 두려워하여
마침내 군장(軍裝)를 버리고 무너져 달아나버렸습니다.
한편 삼운군(三運軍)으로 편성된 조선군이
고령현(高靈縣) 앞 유정(柳汀)에 이르렀는데
현풍(玄風) 방면에서 달아나던 조선군 보병과 기병 30~40여명을 보고 일본군으로 착각하여
스스로 두려워하며 술렁대다가 지휘관이 먼저 달아나니
군사들도 석전과 금호에서의 조선군처럼
병기와 양식 등 잡다한 물건들을 도로에 버리고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이로서 경상도 내륙과 북부의 조선군은 사실상 없는 것과 같게 되었습니다.
또한 경상도의 조선군이 대구로 집결하다가 사라지고 백성들이 피난(避亂)함으로서
경상도의 각 고을들을 텅비어 일본군의 공격에 무방비(無防備)로 노출(露出)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훗날 함창군수 이국필은 대구에서 군대를 잃고 도망친 것은
석전에서 변란(變亂)이 있어 한 부대가 모두 죽어 한 사람도 남지 않아서
두 장수만 살아서 겨우 몸만 빠져나왔었다고 변명(辨明) 하였지만
실제로 그의 군대에 소속되어 있었던 병사들은 한 명도 죽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또한 상주군대 소속으로 석전에서 도망쳤다가 다시 고령에서 도망쳐 나온 조선군 병졸은
석전,금호,고령에서의 조선군 붕괴는 모두 싸우지도 않고 무너진 것이라서
모든 군사들이 군장과 식량만 버렸을 뿐 전사자는 없었다고 조정(趙靖)에게 증언하였습니다.
(석전,금호에서의 조선군 도주는 조정의 임란일기壬亂日記에 기술되어있습니다.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에 의하면 경상도 내륙의 군대는
대구 냇가에서 여러날 노숙하며 서울에서 올 순변사를 기다렸지만
일본군은 가까이 온다는 소식에 군사들이 스스로 놀라 서로 움직이고
큰 비가 내려 옷과 행장이 다 젖고 군량이 떨어지게 되어 군사들이 밤중에 다 흩어져 달아나고
수령들은 모두 단기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대구부(大邱府)는 4월 13일에 일본군의 침입을 알고 병력을 소집하였으며
4월 16일에 부산(釜山)의 함락을 알게 되었는데
4월 21일에 일본군이 대구로 쳐들어오자
대구부사 윤현(大邱府使 尹晛)은 군민(軍民) 2000여명을 이끌고
대구부성(大邱府城)에서 북동쪽에서 30여리 떨어진 팔공산(八公山)의
공산성(公山城)으로 들어갔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비변사에서 조정에 건의하기를
“왜적은 수전에 강하지만 육지에 오르면 불리하오니 오로지 육지의 방어에 힘쓰소서.”
라고 하여,
이에 조정에선 호남(胡南),영남(嶺南)의 큰 읍성(邑城)을 증축(增築)하고 수리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경상감사 김수는 더욱 힘을 다해 봉행하여 축성을 제일 많이 하였습니다.
그 결과 영천(永川),청도(靑道),삼가(三嘉),대구(大邱),성주(星州),부산(釜山),동래(東萊),진주(晉州),
안동(安東),상주(尙州),경상좌우병영(慶尙左右兵營)이
모두 성곽을 증축하고 해자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수는 성을 크게 지어 많은 사람을 수용하는 것에만 신경 써서
험한 곳에 의거하지 않고 평지를 취하여 쌓았으며
성벽 높이가 겨우 2 ~ 3장(丈)에 불과하고 참호도 겨우 모양만 갖추었을 뿐이었으며
백성들은 이런 부역에 힘들어하며 원망이 많았고
유식한 사람들은 이런 형태의 성으로는 침략군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에 이르러 성을 활용할만한 상황이나 병력이 마련되지 않아서
결국 대구부는 고니시 유키나가 군에게 무혈점령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은 김수가 지은 다른 성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후 일본군이 북상을 하여 경상도의 피점령지역(被占領地域)이 확대됨에 따라
팔공산에는 대구 뿐만 아니라
의성(義城),신령(新寧),하양(河陽),성주(星州)의 피난민들도 모이게 되었습니다.
한편 전라감사 이광(全羅監司 李洸)은 경상감사 김수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여
전라도에 대대적인 동원령(動員令)을 내렸는데
이때 전라도 백성들은 일본군이 쳐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역시 두려워하면서
미리 피난짐을 챙기고 가져갈 수 없는 것은 파묻기도 하는 등의 소란을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 영천군수 김윤국(永川郡守 金潤國)은 일본군이 영천으로 쳐들어오기 전에
경상감사 김수의 명령을 받았는데
그 명령 중에는 경주 집경전(慶州 集慶殿)에 있는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의 어진御眞을
대피시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김윤국은 그 명령을 수행하여 어진을 구하기는 했지만
영천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산 속으로 숨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일본군 2번대는
4월 22일에 영천을 무혈점령(無血占領) 하였습니다.
한편 합천군수 정현룡(陜川郡守 田見龍)과 삼가현감 장영(三嘉縣監 長翎) ,
현풍군수 유덕신(玄風郡守 柳德新),창녕현감 이철용(昌寧縣監 李哲容) 등은
구로다 나가마사의 일본군 3번대가 쳐들어오기전에 미리 숨어버렸고
일본군은 아무 저항 없이 그 지역들을 노략질하며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4월 20일, 김성일은 의령(宜寧)에 이르렀는데
김성일은 정진(鼎津-정암진鼎巖津이라고도 합니다.)을 거쳐
함안(咸安)을 통해 경상우병사 조대곤이 있는 창원(昌原)으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낙동강 오른쪽에 일본군이 많이 모여있어서 김성일 휘하의 군졸들이 서로 말하기를
“정진으로 가면 왜놈들 소굴에 가까워질 것이니
차라리 곧장 진주로 갔다가 함안으로 가는 것이 왜적과 떨어지게 되어 안전하다.
허나 주장(主將-김성일을 가리킴)이 군령(軍令)을 엄하게 하고
곧장 나아가고자 하니 아무래도 위험하다.“
라고 하고
김성일에게 아뢰길
“영감나리, 정진에는 배가 없습니다.”
라고 하여 김성일을 속였습니다.
그리고 김성일의 아들로 군에 머물러 있던 김역(金湙)에게 찾아가 말하길
“영감나리께 강물이 불고 배가 없으니 진주(晉州) 길로 가는 것이 편리하다고 말씀 드려주십시오.”
라고 부탁하여 김역도 아버지 김성일에게 진주 길로 가자고 말했습니다.
이에 김성일이 휘하 군관 김옥(金玉)으로 하여금 정진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도 역시 살펴보고 돌아와 김성일에게 아뢰길
“배가 없어서 건널 수 없으니 진주 길로 빨리 가셔야 하옵니다.”
라고 거짓 보고 하였습니다.
그때 진주 전목사 오운(晉州 前牧使 吳澐)이 의령의 촌락(村洛)에 있다가
조정에서 새로 장수가 내려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 배례(背禮)하고 말하길
“영감께서 오셔서 백성들의 기운이 높아졌는데
왜 정진으로 곧장 가시지 않고 진주로 돌아가려 하십니까?"
라고 하니
김성일이 깜짝 놀라 말하길
“나는 이 길로 온 적이 없었소.
틀림없이 내 휘하 장병들이 왜적을 두려워하여 나를 속인 것이오.“
라고 하고 직접 정진으로 달려가 살펴보니
큰 배가 정진 강 언덕에 대어 있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김성일이 거짓보고를 한 군관 김옥과 자신을 설득하려고 한 아들 김역을 잡고
참수(斬首)하라는 명령을 내리니
여러 아랫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다투어 말하기를
“거짓말을 한 죄는 여러 사람들의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제(子弟)가 임시변통(臨時變通)으로 말하는 것도 한 가지 도(道)이며,
김옥은 장사(壯士)이니 용서하여 앞으로 공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였고
김옥도 큰 소리로 말하길
“이 김옥의 죄(罪)는 마땅히 참형(斬刑)당해야 하옵니다!
그러나 공께서 싸우실 때 한 번 목숨 바쳐 속죄(贖罪)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니
김성일이 김옥에게 말하길
“네가 속죄를 요청했으니 앞으로 왜적을 만나면 반드시 먼저 나가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때의 죄까지 다스려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고 그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군사들을 재촉하여 낙동강(落東江)을 건넜습니다.
김성일의 군대가 창원 해망원(昌原 海望原-마산포馬山浦)에 이르니
경상우병사 조대곤(慶尙右兵使 曹大坤)이 이미 창원에서 이곳에 후퇴하고 있었는데,
김성일을 보자 깜짝 놀라 읍(揖)하면서 맞이하고
그에게 직인(職印)과 부절(符節)을 넘겨 주고는 곧 하직(下職)하고 가려 하니,
이에 김성일이 그를 준렬(遵烈)하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장군은 곤수(閫帥-병사나 수사를 일컬음) 신분으로 군사를 가지고도 진격하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서 김해(金海)를 함락당하게 했으니
그 죄는 마땅히 형(刑)을 받아야 하오!
더구나 세신(世臣)으로 나라의 후한 은혜(恩惠)를 받았으니,
이 극렬(極烈)한 변란(變亂)에 임(臨)해서 의리(義理)상 도망쳐서는 안 되오.
라고 하자,
조대곤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띠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었습니다.
김성일은 조대곤에게 말했습니다.
"영공(令公)이 비록 돌아가더라도 할 만한 일이 없으니
이 곳에 있으면서 나와 협력하여 왜적(倭敵)을 공격합시다! ”
이에 조대곤은 도망가는 것을 포기하고 김성일과 함께 있었습니다.
곧 조대곤의 군관(軍官)으로서 창원 병영(昌原兵營)을 지키던 사람이
일본군이 창원으로 급히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하여 돌아와 조대곤을 알현(謁見)하자
이때에 김성일이 조대곤과 함께 앉아 있다가 그 군관이 미리 겁을 집어먹어 도망쳐 온 것을 눈치채고
문책(問責)하며 말하기를,
“네가 무인(武人)으로서 비록 성(城)을 버리고 오더라도
마땅히 왜적(倭敵) 한 놈이라도 베었어야 할 터인데
지금 빈손으로 왔으니 너의 죄는 참수(斬首)해야 한다!
그러나 너를 참(斬)하는 것은 너를 죄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네 장수(조대곤을 가리킴)를 죄주는 것이다!”
라고 하고
조대곤이 보는 앞에서 그를 참(斬)하니 조대곤의 얼굴이 사색(死色)이 되었습니다.
잠시 뒤에 척후병(斥候兵)이 와서 일본군의 선봉(先鋒)이 이미 도착했다고 알리니
(학봉집에 의하면 일본군 선봉대가 김성일의 군대에게 다가온 것은 4월 21일 새벽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정찰병은 적이 5리 밖에 있다고 보고 했다고 합니다.)
조대곤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면서 김성일에게 말에 올라타자고 재촉(再促)했습니다.
그러나 김성일이 그를 꾸짖어 저지(沮止)시키고 군사들에게 망동(妄動)하지 말라고 영을 내리고,
용맹한 군사(精銳兵)를 골라 좌우의 복병(伏兵)을 잠복(潛伏)시키고 일본군을 기다렸습니다.
곧 두 명의 일본 군사가 흰 말을 타고 우의[羽衣-새 깃털 옷]과 금갑옷(金甲)에,
사방에 귀와 눈이 있어 빙글빙글 도는 게 답차(踏車)의 모양과도 같은 금가면(金假面)을 착용하고
칼을 휘두르면서 말을 달려 앞으로 다가오니 김성일의 군사들이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성일은 조대곤과 편안히 호상(胡床)에 마주 앉아 있었는데
(그러나 조대곤의 마음은 결코 편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일본군은 김성일이 꼼짝하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고,
두 명의 일본군 기병 뒤에 일본군 수십명이 부채를 휘두르면서 걸어왔습니다.
이에 김성일이 군관 20여 명(혹은 8명)을 시켜 앞에 가 그들에게 활을 쏘고
왜놈을 생포(生捕)하라고 말하고
용맹한 군사를 골라 돌격(突擊)하라는 명령을 내리며 말하길
"빨리 말에 올라타지 않는 자는 베겠다!"
라고 하였으나
군관(軍官)들과 군졸(軍卒)들은 서로 돌아보며 먼저 나가라고 미뤘습니다.
그러자 김성일은 군관 이종인(李宗仁-이숭인李崇仁에게 명령을 내렸다고 하는 기록들이 많습니다.)과
김옥(金玉)을 불러서
이종인에게는
“네 평소에 용사(勇士)라고 칭했거늘 난(亂)을 맞아 어찌 이러는 것이냐?”
라고 말하고,
김옥에게 말하기를
“너는 오늘 앞장서서 달려나가지 않을 것이냐?"
네 기왕(旣往)에 먼저 나서서 공(功)을 세우겠다고 하여 놓고
지금에 와서 회피(回避)할 수 있겠느냐!”
하니,
이종인이 활로서 금가면을 쓴 일본군을 쏘아 죽이니 일본군이 놀라서 도망치고
이에 김성일의 군졸들과 군관들이 일본군에게 돌격(突擊)하니
김옥이 앞장 서서 말에 올라타고 수 리(里) 밖에까지 쫓아가서
금가면을 말 탄 일본군을 쏘아 거꾸러뜨리고 이긴 기세를 타고 추격하여
수급(首級) 2개와 금안장(金鞍),준마(駿馬),보검(寶劍) 등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학봉집에 의하면 김옥과 김성일의 군사들은 일본군을 몇 리 정도 추격하다가
일본군 매복병을 만나 한참 동안 교전했으나 이숭인이 금가면을 쓴 일본군 장수를 쓰러뜨려니
일본군이 달아났다고 합니다.
군관 김옥의 행적과 활약은 난중잡록亂中雜錄과 학봉집鶴峰集에서 확인되고
조선왕조실록이나 징비록 등의 기록들에선 군관 이종인의 활약이 나타나 있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한 뒤, 김성일은 직접 장계(狀啓)를 써서
군관 원사립(元士立)과 이숭인(李崇仁)에게 주어 노획품,수급과 함께 조정에 올려보내게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보병(步兵)을 앞세우고 자신은 맨 뒤에서 말을 타고 천천히 함안으로 물러났습니다.
이날 밤 김성일의 군대는 함안(咸安)에 진을 쳤습니다.
이때 김성일 휘하의 조선군은 1000명도 채 돼지 않았고 무장도 형편 없었으나
이 싸움의 승리로 군사들은 자신감을 되찾고 사기가 올랐습니다.
하지만 다음날인 4월 21일에 조정에서 김성일을 압송하라는 명이 편지로 도착하니
김성일은 재빨리 한양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이때 주위사람들이 김성일을 만류(挽留)하며 말하기를
"임금님의 말씀이 아직 내리지 않았고 큰 적은 앞에 닥쳐 있는데,
병사(兵使)로서 어떻게 진(鎭)을 쉽사리 버릴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이에 김성일은
“군명(君命)을 오래 지체시켜서는 안 된다.”
라고 하고 곧 길을 떠났습니다.
이때 조선 조정은 경상우병사로 함안군수 유숭인(咸安郡守 柳崇仁)을 임명하였지만
그 소식이 도착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김성일이 한양으로 가다가 경상감사 김수를 만났는데 김수가 김성일을 위로하니
김성일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원하건대 영공(令公)께선 힘써 왜적을 토벌(討伐)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시오."
이때 김수를 모시는 관리들이 서로 말하길
"체포(體捕)된 것을 근심하지 않고 나랏일만 걱정하다니,
참으로 충신(忠臣)이구나."
라고 하였습니다.
한편,1592년 4월 19일에 경상감사 김수(慶尙監使 金睟)는 영산(靈山)에 있다가
밀양성(密陽城)이 함락되자 초계(草溪)를 거쳐 합천(陜川)에 있다가
고령(高寧)으로 가서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일본군이 경상도에서 3방향에서 북상(北上)함에 따라
그는 일본군을 피해 숨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4월 19일, 이날 경상감사 김수는 전라감사 이광에게 장계를 보냈습니다.
[경상감사가 전달하는 일입니다.
흉악한 왜적이 어제 밀양에서 성을 함락시킨 다음
또 영산에 침범하고 곧장 성주(星州) 길로 향했는데,
이어 대구 길로 올라갈지의 여부는 미리 알 수 없습니다.
현풍(玄風)ㆍ창녕(昌寧) 등지의 공사(公私) 집들은 다 비어 있고,
본도의 각 병영에서는 모두 우관(右關) 운봉현(雲峯縣)에 달려가 보고했습니다.]
이후 김수의 일행은 4월 22일에
일본군을 추풍역(秋風驛)에서 저지하기 위해 지례(知禮)로 갔으며
3일간 머무르며 책응(策應-형편에 따라 처세함)하고자 하였으나
4월 21일에 일본군 1번대와 3번대가
낙동강 하류 교통지역(落東江 下流 交通地域)을 장악함으로서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길이 막혀져서
김수는 더 이상 경상좌도의 조선군을 지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경상도의 조선 육군과 수군의 방어체제는 사실상 없는 것과 같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4월 22일, 조정에선 경상감사 김수를 도순찰사(道巡察使)에 겸한다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그가 합천(陜川)에서 적정(敵情)을 살피던 무렵,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제자 2명이 경상감사를 찾아와 일본군을 막을 방법에 대해 물었습니다.
하지만 김수는 그들에게 좋은 방책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나이 57세되는 선비가 김수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적에게 짓밟히게 된 것은 성이 튼튼하지 않거나 군사가 용감하지 않아서가 아니오.
변방(邊方)의 장수와 수령 등이 스스로 궤멸(潰滅)하여 도망한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른 것이오.
그대는 한 도의 원수(元帥)이니 마땅히 힘을 다해 적을 막을 방책을 마련해야 하오."
두 선비들은 김수에게 적을 막을 방책(防策)을 강구(强求)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좋은 대책을 가지고 있지 못한 김수(金睟)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이었습니다.
이에 두 선비는 실망하여 물러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물러나 돌아온 두 선비 중 나이 57세 되는 선비가 나이 51세 되는 선비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 있는데
이런 대란(大亂)을 만나 적들 때문에 길이 막혀 임금이 있는 곳에 나아가 죽지 못한다면
의병(義兵)이라도 하여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어찌 평범한 백성처럼 도망하여 국가가 망하는 것을 보고 구차히 살 길을 찾겠소."
이에 나이 51세되는 선비는 동의하였습니다.
51세의 선비는 만석꾼의 대부호(大富豪)였으나 평소에 잔병(孱病)이 많았고 허약했던 사람이었는데
처음에 일본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근왕(勤王)하려고 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쳐들어온 일본군을 의병으로서 물리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나이 57세 되는 선비는 내암 정인홍(來菴 鄭仁弘) 이었고,
나이 51세 되는 선비는 송암 김면(松庵 金沔) 이었습니다.
한편 의령(宜寧)에 살던 어떤 선비는
경상감사 김수가 일본군과 싸우지 않고 도망쳐다닌다는 말을 듣고
분개하여 김수가 지나갈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김수를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주변 사람들이 말려서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일본군이 의령까지 쳐들어오게 되자
마침내 그 선비는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의령 선비의 이름은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였습니다.
4월 23일,경상우방어사 조경(慶尙右防禦使 趙儆)은 영남(嶺南)을 지키기 위해 군사들을 데리고
좌로(左路)를 통해 거창(居昌)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조경의 휘하에
돌격장(혹은 별장別將이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정기룡(突擊將 鄭起龍)이 있었습니다.
정기룡은 원래 이름이 정무수(鄭茂壽)였는데 1586년에 그가 무과 시험을 보러
한양에 상경(上京)했을때에 종각(鐘閣)에서 잠을 잔 일이 있었는데
이때 선조임금도 종각에 용이 자고 있는 꿈을 꾸어서 사람을 통해 보내어
정무수가 종각에 있음을 확인하였고
며칠 뒤에 무과시험이 치뤄졌는데 그 시험에서 정무수는 놀라운 무예(武藝)를 보이니
그 솜씨에 감탄한 선조는 정무수를 무과급제 시키고 기룡(起龍)이란 이름을 하사했었습니다.
이후 정기룡은 1590년에 경상우병사 신립(慶尙右兵使 申砬) 휘하에서 군관으로 지내고
다음해엔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를 지냈으며
1592년 4월 17일에 조경이 경상우방어사로 임명되어 영남으로 내려갈때에
그의 휘하 군관으로 소속되어 종군(從軍)했던 것이었습니다.
4월 23일,정기룡은 조경의 군대 선봉(先鋒)으로서 10여기(騎)의 기병들을 데리고
거창 신창(居昌 新倉)방면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때 그곳으로 구로다 나가마사의 일본군 3번대 선봉대 500여명이 진격(進擊)하여
정기룡의 조선군 기병들과 마주치게 되니
정기룡 휘하의 기병들은 겁이 나서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섰습니다.
이 상황에서 정기룡이 용기를 내어 말을 달려
일본군 선봉대 500명을 향해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돌격(突擊)하여 일본군을 닥치는대로 치고 베니
순식간에 일본군 수십명이 정기룡의 칼에 참살(斬殺)당하고 일본군의 대열이 흐트러졌으나
수백명의 일본군은 날쌘 용마(勇馬)를 타고 신기(神氣)의 무용(武勇)을 발휘(發揮)하는
정기룡 한 명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정기룡 휘하의 기병들이 정기룡의 무용(武勇)을 보고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게 되어
일본군에게 돌격(突擊)하니 일본군 선봉대는 완전히 무너져 도주(逃走)하였습니다.
이날 정기룡이 벤 일본군이 100여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군 본대의 대규모 병력이 신창으로 쳐들어오자
마침내 정기룡과 조경의 군대는 금산(경상도 금산慶尙道 金山,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慶上北道 金泉)으로 물러났습니다.
한편 경상우수사 원균(慶尙右水使 元均)은 거제(巨濟)에서 휘하 수군을 집결시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경상좌수군(慶尙左水軍)은 이미 완전히 사라졌고
거제 근처인 김해(金海)에 수백척의 일본군 선단(日本軍 船團)이 몰려와서 상륙하여
김해성(金海城)을 함락(陷落)하여서 거제의 상황은 불안하였습니다.
이때 원균 휘하의 경상우수군(慶尙右水軍)은
100여척의 군선(軍船)과 10000여명의 수군(水軍)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원균은 이때까지 거제에 집결한 수군 병력만으로
도저히 일본군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원균은 휘하의 함대를 모두 자침(自沈)시키고 병사들을 모두 해산(解散)시키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육지로 달아나려고 하였는데
이때 그의 휘하 장수 옥포만호 이운룡(玉浦萬戶 李雲龍)이 원균을 찾아와 말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군사를 버리고 육지로 간다면 뒷날 조정에서 문죄(問罪)하게 될 때에
무엇으로써 해명(解明)하시겠습니까?
사군(使君-경상우수사를 가리킴)께서는 임금의 명령을 받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어 나라의 중책(重責)을 맡고 있으니
의리(義理)와 직분(職責)으로는 마땅히 죽을 힘을 다해 경내(境內)를 고수(固守)하며
사절(死節) 하셔야 하옵니다!
이 성역(城域)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요충지(要衝地)이니
이 곳을 잃게 되면 전라도와 충청도를 잃게 될 것이옵니다!
지금 우리 군졸들이 비록 피폐(疲弊)해져 있다고는 하나, 이대로 지킬 수 있으며
또 듣건대 전라 수군(全羅水軍)은 건재(建在)하고
전라좌수사 이순신(全羅左水使 李舜臣)은 이름있는 장수이니
지금 도망치는 것은 전라도에 구원병(救援兵)을 요청(要請)하여
적과 더불어 한 번 싸우는 것만도 못합니다.
구원(救援)을 청하여 함께 바닷길을 막는다면 남쪽의 일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이요,
이기지 못하면 그때에 물러나도 늦지 않을 것이니
계책(計策)으로 이보다 좋은 것도 없는데 이 일을 안하고 우수사께선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이에 원균이 말하길
"그렇다면 능히 누구를 보내야 하겠나?"
라고 하니 이운룡이 대답하길
"율포만호 이영남(栗浦萬戶 李英男)이 평소부터 이순신과 서로 알고 지냈으니 보낼 만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원균은 육지로 도망치지 않고
이영남을 전라좌수영에 보내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요청을 하고
자신은 사천(沙川) 방면으로 퇴각 하였으며
이운룡과 영등포만호 우치적(永登浦萬戶 禹致積)은 흩어진 경상우수군을 다시 모으기 시작 했습니다.
(이무렵 원균의 경상우수군이 일본군 함대와 교전을 벌여 10여척을 격침擊沈시켰다고 합니다.)
이후 경상우수영이 있었던 거제는 더 이상 경상우수군이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나
일본군이 아직 거제로 쳐들어오지 않은 상황이여서
거제현령 김준민(巨濟縣令 金俊民)은 미리 겁먹고 달아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율포권관 이찬종(栗浦權官 李纘宗)과 더불어
거제의 방비(防備)를 강화하며 일본군으로부터 거제를 사수하고자 하였습니다.
한편 경주성에서 퇴각했던 장기현감 이수일은 장기로 돌아가
군사들을 재정비하여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하였습니다.
4월 23일, 일본군이 장기로 쳐들어오자 이수일은 군사들을 이끌고
장기읍성 밖에서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하지만 이수일의 군사들은 일본군을 보자마자 무너져 달아나서
결국 이수일은 퇴각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영일(迎日)과 감포(甘浦) 일대를 약탈하고 북상하였습니다.
한편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 2번대 주력은 4월 23일에 신녕(新寧)을 함락시키고
의흥(義興)으로 북상했지만 서울에서 내려온 좌방어사 성응길은
일본군과의 교전을 피하며 막아내질 못하고 있었습니다.
1592년 4월 20~24일 전역도
붉은색 실선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 1번대 진격방향을 나타냅니다.
밀양(4월 18일)-청도(19일)-경산(20일)-대구(21일)-칠곡-인동(22일)-선산(23일)
보라색 실선은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 2번대 진격방향을 나타냅니다.
언양(4월 19일)-울산,경주(21일)-영천(22일)-신녕,장기,영일,감포(23일)-의흥(24일)
주홍색 실선은 구로다 나가마사의 일본군 3번대 진격방향을 나타냅니다.
김해(4월 20일)-창원,칠원,영산(21일)-초계,합천/창녕(22일)-거창/현풍(23일)
갈색 실선은 일본군 후속부대의 진격방향을 나타냅니다.
녹색 실선은 경상우병사 김성일의 조선군 진격방향과 이동방향을 나타냅니다.
서울(4월 11일)-충주 단월역(상주?)-의령(20일?)-함안-해망원(20일?21일?)-함안
노란색 실선은 경상감사 김수의 이동방향을 나타냅니다.
영산(4월 17일)-초계(18일)-합천(19일)-고령(21일)-지례(22일)
하늘색 실선은 경상우도 방어사 조경의 조선군 진격방향을 나타냅니다.
서울(4월 17일)-추풍역-김천-지례-신창(23일)-지례
파란색 실선은 경상좌병사 이각의 도주방향을 나타냅니다.
언양-울산-경주-의흥
군청색 실선은 장기현감 이수일의 퇴각방향을 나타냅니다.
장기-경주-장기(4월 21일)
회색 실선은 대구부사 윤현과 대구부민들의 피난방향을 나타냅니다.
대구-팔공산(4월 21일)
분홍색 실선은 경상우병사 조대곤의 퇴각방향을 나타냅니다.
창원(4월 20일)-해망원-함안-의령
아쿠아색 실선은 상주,함창,문경 등 경상도 북부 조선군의 이동 방향을 나타냅니다.
상주-성주-석전,금호,고령(4월 19일?20일?)
연한 아쿠아색 실선은 하양 군대의 이동방향을 타나냅니다.
하양-경주-모량(4월 21일)
오랜지색 실선은 용궁현감 우복룡의 이동 방향을 나타냅니다.
용궁-영천-모량(4월 21일)
흰색 원은 조선의병을 나타냅니다.
의령-곽재우, 합천-김면, 기장-오홍,오춘수 종형제
참고자료: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징비록
연려실기술
재조번방지
난중잡록
정만록
학봉집
임란기 경상좌도의 의병항쟁
임진왜란기 영남의병연구
임진영남의병사(壬辰嶺南義兵史)
임진왜란과 김성일
임진왜란은 우리가 이긴 전쟁 이었다
임진전란사
곽재우연구
신종우의 인명사전
재령이씨종친회-식성군 이운룡공 묘비명
이충무공전서
첫댓글 개전 초기 적전도주한 장수중에 군율에 의해 참 당한 고위장수는 이각이 거의 유일한 케이스인데, 그에 걸맞게 행적이 꽤나 찐따스럽군요 =.=);;;
개인적으로 악명높은 원균보다 이각의 행적이 더욱 추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동래,소산역,언양,경상좌병영을 도망쳐 다니며 군사들에게 직접 적과 맞서싸우는 의지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외에도 성응길의 경상좌도 조선군이 붕괴된 것에도 이각이 공헌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울산 경상좌병영에서의 도주로 인해 경상도 조선 육군의 절반은 이각에 의해 사라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각은 초기 조선군 대응을 망친 주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전초기에 적전도주 했다가 군율에 의해 참수된 장수들은 몇 명 더 있습니다.
이각만큼 고위 무관이 참당한 사례가 더있습니까 - _-)? 좀 생소한데요. (이각이 너무 대표적이라 그런건가)
이각 만큼의 고위무관은 아니지만 고을 수령 정도 되는 사람들이 군율에 따라 효수 되었습니다. 군율을 집행하는 것은 4월 말 이후 강화되었는데 군율을 적용하여 기대되는 효과와 다른 역효과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신각은 억울하게 군율에 적용되어 참수되었고 유극량은 군율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적의 함정에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야 했습니다.
저 경상우수군의 일본함대 10척 격침은 그냥 자기만 주장하는 겁니다만!? 다른 기록이나 왜군 측 기록을 보면 그런 얘기가 전혀 없죠. 그리고 원균이 병력을 모으려는 노력을 했다는 것은 처음 듣는군요. 어선을 보고 왜군으로 착각해 도망간 자가 무슨 용기를 가져서 병력을 모으려는 노력을 했겠습니까?
경상우수군의 일본함대 10여척 격파 소식은 일단 원균에게서부터 나온 정보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난중일기,정만록,조선왕조실록,쇄미록에 저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정보는 최소한 공문서로 작성되어 전달된 것으로 짐작됩니다.(소문이라고 하기에는 전파 속도가 매우 빠르며 관리들에게 전달했으니...,) 즉 거짓이라면 그것을 공문서로 전달한 원균의 배짱(?)이 대단하다고 볼 밖에요..., 그저 개인의 판단에 맡길 따름입니다. 그리고 원균이 거제에서 퇴각한 이후 경상우수군을 다시 긁어모은 것은 우치적,이운룡이 맡았다고 기술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측 기록에는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싸우기 전에 그들이 조선수준과 싸웠다는 기록 자체가 없지요. 숭무주의로 인해 전공에 광분한 왜군이 왜 조선수군을 격파했다면 그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실록이나 여타 기록들은 설사 잘못된 사실이라도 일단 적고 보는 것이 특징입니다. 예를 들어 난중일기 같은 기록에도 사소한 오류나 잘못이 눈에 띠지요. 명나라 송응창 장군이 직접 군대를 끌고 온다든가 하는 것 따위의 잘못된 소문같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또한 초유사 김성일의 장계에는 원균이 고작 배 1척 거느리고 병사 없이 격군만 데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왜적이 쳐들어 온다니까 지례 겁을 먹고요. 김성일이 독촉해 돌아가려 하자 왜군 100명이 쳐들어 온다니까 거기에 또 겁을 먹고 도망갔지요. 겨우 100명의 적병에게 겁에 질려 도망간 자가 어떻게 10척의 왜선을 격파했다는 겁니까? 그리고 설령 왜선 10척을 격파했다고 한들, 자침시킨 수십 척의 전함과 해산시킨 수만 명의 병사들로 인한 피해를 생각하면 도저히 칭찬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리고 원균이 병력을 모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원균의 명령에 의해 경상우수군이 한순간에 증발하는게 말이 안됩니다. 비록 경상우수영에 수군 전함과 수군이 가장 많이 배치되긴 하지만 각 포(浦)나 진(鎭)에 분산배치된 수군 전함이나 수군들을 집결시키면 수군의 40~50%정도 됩니다. 만약 원균이 병력을 집결시키려는 노력을 안했다면 원균은 거제에서 경상우수군의 일부만 해산시켰을 뿐이며 경상우수군 해산의 책임은 각 진이나 포의 장수들에게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측은 큰 전투나 승리한 전투를 주로 기술했습니다. 조선 측은 중앙은 물론 지방의 지식인들도 기록을 하여 당시의 풍문이나 각종 전투들,심지어 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지방관들의 행적에까지 접근이 가능합니다. 반면 일본측은 기술하는 사람들이 적었습니다. 기술은 자신들 공적 찬양이나 전쟁 과정을 넓은 시각으로 서술하여 소소한 전투들을 그냥 '저항이 많았다.'로 서술합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나 지금의 사람들은 임진년 전역을 결과론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당시 상황을 이해하려면 쌍방을 객관적으로 파악한 상태에서 그 순간에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균이 어선을 왜선으로 착각하여 도망갔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거제 인근인 낙동강 하류에는 일본군 선단이 수십~수백척씩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당대의 사료라고 해서 모두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래서 원균의 행적을 의심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원균의 개전 초기 행적은 단편적이고 자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원균의 초기 행적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증인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균의 초기 행적은 간단하게 결론을 내릴게 아니라 좀더 따질 필요가 있습니다. 원균이 나쁜 인물이라면 원균을 욕하기 위해 원균을 조사하는 것보다는 원균이 어떻게 혹은 왜 그런 나쁜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살펴야하지 않겠습니까...,
일본 수군 영주의 규모를 생각하면, 경상우수영과 맞붙었다는 건 그 영주들 규모로 따져보면 큰 전투, 중요한 전투입니다. 100여척에 달하는 함대면 일본군 입장에선 최소 만단위가 넘어가는 거대 영주와 맞붙은 셈이거든요. 이런 전투가 없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굳이 일본측 사료를 원한다면 경상우수군과 교전하여 조선수군 전함 20여척을 나포했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종전후 100년 뒤에 나온 기록인데다가 구체적인 날짜 기술도 없고 그 이후 해전 양상은 조선 측 기록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그래도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게 박살났다는 이야기)학술지를 제외하고 소개되지 않고 있습니다.그리고 원균이 일본군 함대를 격파한 것은 거제에서 수군을 해체한 이후의 일로 기록 되어 있습니다.
방금 전 현대정치게시판등에서 저작권법 관련 글을 보았는데요. 어디서부터 어기까지 허용되는지 제가 좀 과문한탓인지 여전히 애매해서요... 그래서 평소에는 출처등을 밝히고 그냥 퍼가는데 오늘은 먼저 알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글을 씁니다. 윗글을 다른 카페등에 올려도 괜찮을 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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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일본측 기록이야말로 과장하면 과장했지 전투기록을 축소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게 다 전공이 되니까요. 그리고 낙동강 하류에 일본군 선단이 많다 해도, 지난번 토론에서 말했듯 대다수는 수송임무에 투입되어 있었고, 해상전투 병력은 저땐 미처 도착하지도 않았습니다. 육상 병력을 해상에 투입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고요. 물론 일본 각 군의 영주들을 보면 육군이면서도 해군 지휘경험이 있는 영주들이 많고(구루시마 해적부터 육군 소속이더라... 5군이긴 하지만) 그 영주들의 전력이 해군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경험이 있는 영주와 병력들' 에 해당하는 일이죠.
함선 역시, 국내의 물자수송선, 민간 수송선을 징발한 경우엔 전투투입은 꿈도 못꾸고, 새로 건조한 함선을 전투용으로 돌리려 해도 최소한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병력재배치, 해상전투용 무장 배치 등은 아무리 노력해도 1~2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점에서 미루어 보면 저때 원균이 조선 최대수영인 경상우수군을 이끌고 부산포로 진격했다면 아무 저항을 받지 않고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그걸 그냥 규모만 보고 해산시켜 버린 원균은 욕먹어 싸지요.
병력 집결은 제도화되어 있는 지라 공문만 돌리면 바로 집결이 가능했습니다. 가장 멀리 있는 진포까지도 이틀이면 충분한 거리입니다. 그리고 병력을 모으는 건 제승방략등 이미 제도화되어 있는 거라서 그걸 모았다고 원균이 칭찬들을 건 하나도 없습니다. 임란 초기 병력을 '모으는 것' 을 제대로 못한 지휘관은 거의 없지요.
그리고 원균의 초기 전공의 근거는 원균 자신이 올린 장계 말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 역시 교차검증이 필요하지요. 특히 원균의 장계는, 나중 연합전선을 폈을 때도 확인되지만, 같은 전투에 대해서도 유난히 장계가 늦게 올라옵니다. 그 결과 올라온 장계를 보고 조정 대신들이 고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전공을 지어내는 경우가 많으니 그럴 수밖엔 없긴 합니다만. 그점에서 볼때 저 전공은 그 존재여부부터 불분명합니다. 조선측 자료와 일본측 자료를 교차검증해도 그렇고, 조선측 자료끼리 교차검증해도 저 전공은 오로지 원균 자신의 주장으로만 나오고 있습니다.
나중 이순신 장군을 파면하고 원균을 대신 올릴때도 선조는 '이순신을 부른 공' 이 있다고 했지 '먼저 일본군을 격파한 공' 이 있다고 하진 않습니다. 저때 선조야 말로 원균을 옹호하는 필두였는데도 말입니다. 즉, 소위 '원균의 초기 전공' 은 이미 당대에 친 원균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파악한 전공일 뿐입니다.
일단 원균이 경상 우수군을 긁어모아 부산을 쳤더라면의 가정은 의미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에야 결과적으로 혹은 쌍방의 상황을 아니까 아쉬워하고 비난할 수 있지만, 당시 적군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작정 공격을 할 수 있겠습니까? 원균은 개전 첫날에 부산 방면으로 400여척의 배가 가는 것을 보고 받았고 이후 경상우수군을 집결시키면서 육지의 열읍들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이순신이라도 담대하게 쳐들어가는 것을 망설일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지난번에 bookmark님이 말하신 대로 원균은 거제 방면으로 일본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먼저 달아난 것은 사실 입니다. 이때 원균이 경상우수군을 해체 시킨 것은 이후 전역을 생각하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원균이 수군을 보존시키지 못한 것을 그의 잘못으로 여기지 그가 수군을 이끌고 부산을 급습하지 못한 것을 잘못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알 수 있는 부산 방면의 일본군 상황은 제한적일 뿐더러 낙동강 하류 지역으로 일본군 선단들이 배회하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원균의 일본군 함대 10여척 격파는 제가 살펴봐도 그 말이 원균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 원균의 장계는 매우 빨리 올라갔습니다. 5월 초에 이미 관리가 임금에게 보고했으니까요. 실록이 임진 전역 연구에서 귀중한 자료이긴 분명하나 모든 전투를 소개하진 않습니다. 정문부의 예도 있고 전국의 숱한 의병장들이나 장군들의 공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전투나 규모가 큰 전투가 아니면 기록되지 않은 게 숱합니다. 원균의 경우에는 초기 행적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되어 있어서 원균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어렵게 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원균의 초기 행적에 저는 의문을 품을 뿐, 확정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