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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한국사 무너지는 경상도
제국의명장 추천 0 조회 1,415 09.04.03 00:03 댓글 2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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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4.03 20:55

    첫댓글 개전 초기 적전도주한 장수중에 군율에 의해 참 당한 고위장수는 이각이 거의 유일한 케이스인데, 그에 걸맞게 행적이 꽤나 찐따스럽군요 =.=);;;

  • 작성자 09.04.03 22:13

    개인적으로 악명높은 원균보다 이각의 행적이 더욱 추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동래,소산역,언양,경상좌병영을 도망쳐 다니며 군사들에게 직접 적과 맞서싸우는 의지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외에도 성응길의 경상좌도 조선군이 붕괴된 것에도 이각이 공헌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울산 경상좌병영에서의 도주로 인해 경상도 조선 육군의 절반은 이각에 의해 사라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각은 초기 조선군 대응을 망친 주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전초기에 적전도주 했다가 군율에 의해 참수된 장수들은 몇 명 더 있습니다.

  • 09.04.03 23:54

    이각만큼 고위 무관이 참당한 사례가 더있습니까 - _-)? 좀 생소한데요. (이각이 너무 대표적이라 그런건가)

  • 작성자 09.04.04 00:30

    이각 만큼의 고위무관은 아니지만 고을 수령 정도 되는 사람들이 군율에 따라 효수 되었습니다. 군율을 집행하는 것은 4월 말 이후 강화되었는데 군율을 적용하여 기대되는 효과와 다른 역효과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신각은 억울하게 군율에 적용되어 참수되었고 유극량은 군율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적의 함정에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야 했습니다.

  • 09.04.04 20:47

    저 경상우수군의 일본함대 10척 격침은 그냥 자기만 주장하는 겁니다만!? 다른 기록이나 왜군 측 기록을 보면 그런 얘기가 전혀 없죠. 그리고 원균이 병력을 모으려는 노력을 했다는 것은 처음 듣는군요. 어선을 보고 왜군으로 착각해 도망간 자가 무슨 용기를 가져서 병력을 모으려는 노력을 했겠습니까?

  • 작성자 09.04.04 23:48

    경상우수군의 일본함대 10여척 격파 소식은 일단 원균에게서부터 나온 정보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난중일기,정만록,조선왕조실록,쇄미록에 저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정보는 최소한 공문서로 작성되어 전달된 것으로 짐작됩니다.(소문이라고 하기에는 전파 속도가 매우 빠르며 관리들에게 전달했으니...,) 즉 거짓이라면 그것을 공문서로 전달한 원균의 배짱(?)이 대단하다고 볼 밖에요..., 그저 개인의 판단에 맡길 따름입니다. 그리고 원균이 거제에서 퇴각한 이후 경상우수군을 다시 긁어모은 것은 우치적,이운룡이 맡았다고 기술했습니다.

  • 09.04.04 23:55

    그런데 일본측 기록에는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싸우기 전에 그들이 조선수준과 싸웠다는 기록 자체가 없지요. 숭무주의로 인해 전공에 광분한 왜군이 왜 조선수군을 격파했다면 그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실록이나 여타 기록들은 설사 잘못된 사실이라도 일단 적고 보는 것이 특징입니다. 예를 들어 난중일기 같은 기록에도 사소한 오류나 잘못이 눈에 띠지요. 명나라 송응창 장군이 직접 군대를 끌고 온다든가 하는 것 따위의 잘못된 소문같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 09.04.04 23:52

    또한 초유사 김성일의 장계에는 원균이 고작 배 1척 거느리고 병사 없이 격군만 데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왜적이 쳐들어 온다니까 지례 겁을 먹고요. 김성일이 독촉해 돌아가려 하자 왜군 100명이 쳐들어 온다니까 거기에 또 겁을 먹고 도망갔지요. 겨우 100명의 적병에게 겁에 질려 도망간 자가 어떻게 10척의 왜선을 격파했다는 겁니까? 그리고 설령 왜선 10척을 격파했다고 한들, 자침시킨 수십 척의 전함과 해산시킨 수만 명의 병사들로 인한 피해를 생각하면 도저히 칭찬할 수 없는 자입니다.

  • 작성자 09.04.04 23:52

    그리고 원균이 병력을 모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원균의 명령에 의해 경상우수군이 한순간에 증발하는게 말이 안됩니다. 비록 경상우수영에 수군 전함과 수군이 가장 많이 배치되긴 하지만 각 포(浦)나 진(鎭)에 분산배치된 수군 전함이나 수군들을 집결시키면 수군의 40~50%정도 됩니다. 만약 원균이 병력을 집결시키려는 노력을 안했다면 원균은 거제에서 경상우수군의 일부만 해산시켰을 뿐이며 경상우수군 해산의 책임은 각 진이나 포의 장수들에게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작성자 09.04.05 00:08

    일본측은 큰 전투나 승리한 전투를 주로 기술했습니다. 조선 측은 중앙은 물론 지방의 지식인들도 기록을 하여 당시의 풍문이나 각종 전투들,심지어 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지방관들의 행적에까지 접근이 가능합니다. 반면 일본측은 기술하는 사람들이 적었습니다. 기술은 자신들 공적 찬양이나 전쟁 과정을 넓은 시각으로 서술하여 소소한 전투들을 그냥 '저항이 많았다.'로 서술합니다.

  • 작성자 09.04.05 00:30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나 지금의 사람들은 임진년 전역을 결과론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당시 상황을 이해하려면 쌍방을 객관적으로 파악한 상태에서 그 순간에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균이 어선을 왜선으로 착각하여 도망갔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거제 인근인 낙동강 하류에는 일본군 선단이 수십~수백척씩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 작성자 09.04.05 12:57

    당대의 사료라고 해서 모두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래서 원균의 행적을 의심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원균의 개전 초기 행적은 단편적이고 자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원균의 초기 행적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증인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균의 초기 행적은 간단하게 결론을 내릴게 아니라 좀더 따질 필요가 있습니다. 원균이 나쁜 인물이라면 원균을 욕하기 위해 원균을 조사하는 것보다는 원균이 어떻게 혹은 왜 그런 나쁜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살펴야하지 않겠습니까...,

  • 09.04.05 16:24

    일본 수군 영주의 규모를 생각하면, 경상우수영과 맞붙었다는 건 그 영주들 규모로 따져보면 큰 전투, 중요한 전투입니다. 100여척에 달하는 함대면 일본군 입장에선 최소 만단위가 넘어가는 거대 영주와 맞붙은 셈이거든요. 이런 전투가 없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 작성자 09.04.05 16:30

    굳이 일본측 사료를 원한다면 경상우수군과 교전하여 조선수군 전함 20여척을 나포했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종전후 100년 뒤에 나온 기록인데다가 구체적인 날짜 기술도 없고 그 이후 해전 양상은 조선 측 기록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그래도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게 박살났다는 이야기)학술지를 제외하고 소개되지 않고 있습니다.그리고 원균이 일본군 함대를 격파한 것은 거제에서 수군을 해체한 이후의 일로 기록 되어 있습니다.

  • 09.04.05 14:31

    방금 전 현대정치게시판등에서 저작권법 관련 글을 보았는데요. 어디서부터 어기까지 허용되는지 제가 좀 과문한탓인지 여전히 애매해서요... 그래서 평소에는 출처등을 밝히고 그냥 퍼가는데 오늘은 먼저 알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글을 씁니다. 윗글을 다른 카페등에 올려도 괜찮을 런지요?

  • 작성자 09.04.05 16:31

    현재 퍼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 09.04.05 16:36

    오히려 일본측 기록이야말로 과장하면 과장했지 전투기록을 축소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게 다 전공이 되니까요. 그리고 낙동강 하류에 일본군 선단이 많다 해도, 지난번 토론에서 말했듯 대다수는 수송임무에 투입되어 있었고, 해상전투 병력은 저땐 미처 도착하지도 않았습니다. 육상 병력을 해상에 투입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고요. 물론 일본 각 군의 영주들을 보면 육군이면서도 해군 지휘경험이 있는 영주들이 많고(구루시마 해적부터 육군 소속이더라... 5군이긴 하지만) 그 영주들의 전력이 해군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경험이 있는 영주와 병력들' 에 해당하는 일이죠.

  • 09.04.05 16:41

    함선 역시, 국내의 물자수송선, 민간 수송선을 징발한 경우엔 전투투입은 꿈도 못꾸고, 새로 건조한 함선을 전투용으로 돌리려 해도 최소한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병력재배치, 해상전투용 무장 배치 등은 아무리 노력해도 1~2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점에서 미루어 보면 저때 원균이 조선 최대수영인 경상우수군을 이끌고 부산포로 진격했다면 아무 저항을 받지 않고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그걸 그냥 규모만 보고 해산시켜 버린 원균은 욕먹어 싸지요.

  • 09.04.05 16:43

    병력 집결은 제도화되어 있는 지라 공문만 돌리면 바로 집결이 가능했습니다. 가장 멀리 있는 진포까지도 이틀이면 충분한 거리입니다. 그리고 병력을 모으는 건 제승방략등 이미 제도화되어 있는 거라서 그걸 모았다고 원균이 칭찬들을 건 하나도 없습니다. 임란 초기 병력을 '모으는 것' 을 제대로 못한 지휘관은 거의 없지요.

  • 09.04.05 16:48

    그리고 원균의 초기 전공의 근거는 원균 자신이 올린 장계 말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 역시 교차검증이 필요하지요. 특히 원균의 장계는, 나중 연합전선을 폈을 때도 확인되지만, 같은 전투에 대해서도 유난히 장계가 늦게 올라옵니다. 그 결과 올라온 장계를 보고 조정 대신들이 고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전공을 지어내는 경우가 많으니 그럴 수밖엔 없긴 합니다만. 그점에서 볼때 저 전공은 그 존재여부부터 불분명합니다. 조선측 자료와 일본측 자료를 교차검증해도 그렇고, 조선측 자료끼리 교차검증해도 저 전공은 오로지 원균 자신의 주장으로만 나오고 있습니다.

  • 09.04.05 16:51

    나중 이순신 장군을 파면하고 원균을 대신 올릴때도 선조는 '이순신을 부른 공' 이 있다고 했지 '먼저 일본군을 격파한 공' 이 있다고 하진 않습니다. 저때 선조야 말로 원균을 옹호하는 필두였는데도 말입니다. 즉, 소위 '원균의 초기 전공' 은 이미 당대에 친 원균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파악한 전공일 뿐입니다.

  • 작성자 09.04.05 23:35

    일단 원균이 경상 우수군을 긁어모아 부산을 쳤더라면의 가정은 의미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에야 결과적으로 혹은 쌍방의 상황을 아니까 아쉬워하고 비난할 수 있지만, 당시 적군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작정 공격을 할 수 있겠습니까? 원균은 개전 첫날에 부산 방면으로 400여척의 배가 가는 것을 보고 받았고 이후 경상우수군을 집결시키면서 육지의 열읍들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이순신이라도 담대하게 쳐들어가는 것을 망설일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 작성자 09.04.05 23:38

    지난번에 bookmark님이 말하신 대로 원균은 거제 방면으로 일본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먼저 달아난 것은 사실 입니다. 이때 원균이 경상우수군을 해체 시킨 것은 이후 전역을 생각하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원균이 수군을 보존시키지 못한 것을 그의 잘못으로 여기지 그가 수군을 이끌고 부산을 급습하지 못한 것을 잘못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알 수 있는 부산 방면의 일본군 상황은 제한적일 뿐더러 낙동강 하류 지역으로 일본군 선단들이 배회하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 작성자 09.04.05 23:47

    원균의 일본군 함대 10여척 격파는 제가 살펴봐도 그 말이 원균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 원균의 장계는 매우 빨리 올라갔습니다. 5월 초에 이미 관리가 임금에게 보고했으니까요. 실록이 임진 전역 연구에서 귀중한 자료이긴 분명하나 모든 전투를 소개하진 않습니다. 정문부의 예도 있고 전국의 숱한 의병장들이나 장군들의 공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전투나 규모가 큰 전투가 아니면 기록되지 않은 게 숱합니다. 원균의 경우에는 초기 행적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되어 있어서 원균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어렵게 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원균의 초기 행적에 저는 의문을 품을 뿐, 확정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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