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기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해
알겠어?"
사장은 제법 규모가 큰 양복점으로 상옥을 데리고 들어갔다
'사장림을 뵈러 왔는데요."
"예, 제가 주인입니더. 무슨 일로 오셨는교?"
'그러세요. 특별 주문을 하려고 하는데 가능한지 모르겠네 요?"
'말씀해 보이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보겠
습니더."
"이 사람 양복을 맞춰야 되는데 오늘 오후 5시까지 한 벌 해 주
시고 나머지 두 벌은 내일 오후까지 해주실 수 있으세요?"
허휴 "
"대금은 오늘 선불로 드릴 테니 최고급으로 해주세요."
'갑자기 결혼이라도 하십니꺼?"
"호호호, 그래요. 오늘밤 5시에 결혼식을 해야 해요."
"오늘은 한 벌만 해 드리면 되고예. 내일 두 벌 맞춰 주면 된다
이 말 아입니꺼?"
양복점 주인은 난감해 하면서도 최고급품 양복을 세 벌씩이나
한꺼번에 주문하고 대금도 선불로 주겠다는 사장의 주문을 받아
들였다.
"바쁘게 주문한다고 옷 잘못 만들면 반품할 거니까 잘해 주세
요."
"양복에 대해서는 안심 하이소. 자랑이 아이고 부산에서 우리 양
복점만큼 잘하는 곳 없다 아입니꺼."
상옥으로서는 기가 찰 일이었다. 단 번에 세 벌씩이나 양복을
맞추고 한 벌은 오늘, 두 벌은 내일까지 라니, 번갯불에 콩 볶는다
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하루 사이에 양복을 세 벌씩이나 맞춰 입
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연예인도 아닌 내
가무슨 옷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러나 모든 것을사
장에게 맡기기로 한 이상 사장이 하는 대로 두고 볼 수밖에 없었
다
사장은 양복 색상까지도 상옥의 의사는 들어 보지도 않고 결정
해 버린다.
"베이지 화이트는 오늘 해주시고 다른 것은 내일까지 해
주세요."
양복점 사장은 상옥을 거울 앞에 세우고 사이즈를 재기 시작했
다. 상옥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기 짝이 없다고 생
각했다. 며칠 동안 면도를 하지 못해 털북숭이가 된 데다 땟국물
이 주르르 흐르는 옷을 걸치고 있었다. 영락없는 각설이였다.
"몸매가 아주 좋습니다. 겉보기와는 아주 딴판인데 예. 무
슨 운동 하십니꺼?"
재단사는 상옥의 몸 치수를 재면서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상옥
은 고교시절부터 보디빌딩과 유도를 했기 때문에 몸매가 괜찮은
편이었다.
사장은 다시 상옥을 데리고 백화점에 들러 생활용품 등을 준비
했다. 사장은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색상과 디자인을 따져 보며
세밀히 신경을 썼다. 마치 누님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상옥은 걱정이 되었다. 오늘 쓴 돈만 해도 기십만 원은
족히 될 텐데 어쩌나 싶다. 얘기 듣기로는 화류계 여자들이 이런
식으로 올가미를 씌운다는데 자신도 그 꼴이 되는가 싶어 내심
겁도 난다.
"왜, 걱정돼? 돈 많이 쓴다고."
사장이 상옥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물었다.
"걱정할 것 없어. 그냥 주는 것은 아니지만 상옥이가 걱정 안
해도 되는 거니까. 안심해 "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주는 것도 아니라면서 걱정
할 것도 없다니 묘한 기분이 든다.
"이제 대충 된 것 같으니까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그들은 가까운 식당에 들러 식사를 했다. 그러나 상옥은 꼭 모
래알을 씹는 느낌이 들었다 마주 앉은 사장의 얼굴이 수빈의 얼
굴과 자꾸만 겹쳐진다.
'상옥이, 식사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닙니다. 생각은요."
"식사하는 표정이 왜 그래? 맛이 없어?"
"아닙니다. 사장림.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
"나 상옥이한테 부탁이 있는데, 밖에서는 내게 사장이라는 호칭
을 쓰지마. 그냥 누나라고 편하게 불러. 영없장에 있을 때는 사
람들의 눈이 있으니까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알았어?"
"하지만, 어떻게 사장님께
"아니야, 난 그게 좋아! 편하고
"알겠습니다. 사장림이 편하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상옥인, 내가 몇 살이나 돼 보여'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도 한번 맞춰 봐!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같은 이십대 같은데요."
같은 이십대 같다는 상옥의 말에 사장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함빡 웃는다.
"이제 보니 아부할 줄도 아네.
'그럼 사장림이 늙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또 사장. 그냥 누나라고 해! 사실 우리 집 애들 중에
서 내 나이 아는 애 하나도 없어. 나 올해로 서른두 살이야, 늙었
지?"
"아닙니다. 누가 봐도 삼십 대라면 믿지 않을 겁니다. "
"그래? 고마워 젊게 봐 줘서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이
야기 잘 들어둬. 나는 여러 말 하지 않는 사람이야. 나는 다만
솔직하고 근면한 사람이 필요해. 사무장? 그거 별거 아니야."
"사무장이 하는 일은 전날 매상한 물품 보완하고, 종업원 관리
하는 일이고 멤버는 호스티스를 룸에 적당히 넣어 주면 돼. 물론
경험이 있으면 좋긴 하지. 호스티스 넣고 빼는 데 요령이 필요하
니까 무엇보다도 나를 도와 줄 사람이 필요해. 내가 왜 경험
도 없는 상옥이를 채용했는지 알아? 상옥이 나를 도와 줄 수 있
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였어."
"무슨 말씀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열심히 배워 보겠
습니다. 그리고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서면
즉시 떠나겠습니다. "
'상옥이는 잘 할 수 있을 거야."
'야화'의 여사장 오선영과 상옥은 이렇게 해서 또 하나의 어긋
난 만남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날 밤, '운명을 아는 자, 남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만, 그 말을 알기 전에 수빈과 함께 했던 지난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한데 엉켜서 상옥의 뇌리에 폭풍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2. 그 언덕
상옥은 옛랄부터 진상미(進上米)로 유명한 경기도 이천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인근에서는 네노라하는 한의원집 장남으로
태어났다.
상옥은 아버지의 나이 마흔일곱에 처음으로 얻은 혈육이었다.
때문에 내리 3대 독자였던 그의 아버지에게 상옥의 출생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태기를 안 날부터 유
난을 떨었다. 태교를 잘해야 한다며 아내의 행동거지마다 일일이
참견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먹는 것, 입는 것조차 시시콜콜 간섭하
는 바람에 첫아들 임신이 상옥 어머니에게는 오히려 창살 없는
감옥이나 진배 없을 정도였다.
그렇듯 상옥은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아버지의 엄격한 통제 속
에 자라야 했다.
아무튼 상옥은 엄격한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인지, 예의 바르고
총명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그러나 상옥의 고통은 일찍부터 시작
되었다.
상옥이 갓 세살이 지나 아빠, 엄마라고 더듬거릴 즈음부터 그의
아버지는 상옥에게 천자문이니 명심보감이니를 가르치기 시작했
던 것이다. 여섯 살 어린 소년이 단정히 앉은 채로 공자왈 맹자왈
낭랑히 을조리는 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대단한 놈이
라 칭찬을 하여 주고, 또 다른 편에서는 안타까운 눈으로 상옥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차곤 했다. 대개는 상옥의 총명함을 부러워하
였지만 상옥을 아는 사람은 저 어린 녀석이 얼마나 닦달을 당했
으면 그 나이에 한글도 아닌 한학을 깨우쳤을까 하고 오히려 동
정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었다.
사실 상옥은 어린 시절 아버지 앞에서 오금조차 제대로 펼 수
가 없었다. 어린 상옥이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러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언제나 '아버님'이었고 '어머님'이었다.
아버지가 이렇듯 봉건적인 사고방식으로 일관하였으니 상옥의 어
머니와 상옥이 받은 스트레스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토록 힘들고 고달픈 소년기를 보낸 상옥이 어느덧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당시 상옥이 살던 고향에는 농업학교밖에 없었
기 때문에 상급학교를 지망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서울로 유학을
하게 마련이었으므로 상옥의 서울 유학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상옥은 뛸 듯이 기뻤다.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로 유학한다는
기쁨보다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아버지 슬하에서 합법적으로 탈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상옥은 상당히 좋은 성적으로 서울에서도 명문이라는 덕수상고
에 무난히 합격할 수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자식을 둔 모든 부모들의 한결같은 바람은 법관이
나 고위 관리직에 오르는 것이 소망이었으나 상옥의 아버지는 상
옥이 관리가 되는 것을 읜치 않았다. 상옥의 아버지는 당시의 어
수선한 사회 분위기가 타락한 정치가들 탓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아들이 그쪽에 관심이라도 둘까봐 지레
걱정을 했다. 상옥 역시 정치가나 판검사 같은 관료가 되는 것
은 원치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장사꾼이 되고 싶
은 생각도 없었다. 상옥은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완고한 아버
지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상옥은 어려서부터 아버
지에게서 배운 한학 공부를 통하여 문학적인 소양이 같은 또래의
친구들보다는 깊은 편이었다. 특히 시를 좋아해서 마음속 깊은 곳
에서는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상옥은 실제로 시인
이 되려고 완고한 아버지 몰래 나름대로 자작시도 써보고, 외국
시인의 시들도 노트에 옮겨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꿈은 말 그대
로 꿈으로 머물고 말았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말씀은 그 자체가
법이었다. 아버지는 상옥이 덕수상고를 졸업하고 상과대학에 들어
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너는 이 아버지의 전부이며 희망임을 잊지 말아라."
아버지는 상옥을 앉혀 두고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아버님, 저는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등교를 해야 합니까? 여
기서 통학을 해야 합니까?"
'허헛, 녀석 하고. 그게 그리도 걱정이 되느냐?"
"걱정할 것 없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찌 그 먼 거리를 통학
할 수 있겠느냐. 내 이미 너의 하숙집을 정해 뒀으니 걱정할 것
없다. "
아버지의 말 한 마디에 상옥은 곧 하늘을 나는 기분이 되었다
미지의 서울 생활에 가슴이 마냥 부풀어 있는데 더욱이 하숙이라
니
상옥이 드디어 합법적(?)으로 부친의 슬하에서 벗어나는 것이
다 '이 얼마나 바라고 바라던 일이더냐! 아, 이게 꿈이라면 영원
히 깨지 말아다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망의 개학을 며칠 앞둔 1963년 2월 어느 날, 상옥은 아버지
와 함께 꿈에도 그리던 서울에 입성하였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수
학여행 때 와 왔던 서울이란 곳은 여전히 낯설고 서먹서먹하기만
했다. 서울역에 도착한 상옥의 모습은 어쩔 수 없는 촌놈, 바로
그것이었다. 호랑이 같은 아버지만 아니라면 다시 시골 학교로 옮
기고 싶다는 충동이 마음 한켠에서 일 정도로.
상옥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난생 처음 택시를 타 보게 되었
다. 군용 지프를 개조한 듯한 택시를 타고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서울시내를 달렸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서울의 거리는 정말 복
잡하고 부산스러웠다. 저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무슨 일 때문에
저토록 바삐바삐 움직이는가. 대관절 무슨 일을 어떻게 하여 먹고 사
는 것일까? 또 어디서 잠들을 자는 것일까? 정말이지 머리가 어
지러울 지경이었다.
어쨌든 상옥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두 부자를 태운 택시는 상옥
이 알 수 없는 곳으로 털털거리며 달려갔다. 얼마쯤 달렸을까.
'상옥아, 여기가 장충동이라는 곳이다. "
"무슨 동네 이름이 그렇습니까? 장충동 마치 사람 이름 같
습니다. "
상옥은 참으로 오랜만에 파안대소하는 아버지를 보았다 졸지에
촌놈은 되었을지라도 아버지가 유쾌하게 웃는 모습을 대한 상옥
의 마음은 한결 밝아졌다.
장충동 아, 장충동.
그러나
그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미지의 세계에 대한 꿈을 안고 상경
한 소년이 첫발을 내디딘 그 언덕이 평생을 가슴 쥐어뜯으며 살
아야 할 한 남자의 비틀린 운명의 첫 발자국이 될 줄을
아, 아!
만약에 상옥이 그때 그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우리네 인생은 그처럼 손쉬운 가정법(假定法)을 허락하
지 않을 만큼 고약한 것이다.
나의 밤은 그대 생각으로 미치고
낮은 그저 냉담할 뿐! 내버려 두라!
나에게 슬픔을 안겨다 주는 운명에게 나는 미소를 보낸다.
어제의 흥분은 너무나 뜨거워 나는 곧 타버릴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열정은 노을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안나 아흐마또바, 나의 밤은에서
3. 운명적 만남
상옥은 아버지와 함께 다소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고풍스
러운 한옥 앞에 다다랐다. 아버지가 미리 정해 놓은 하숙집이었
다. 하숙집 주인 내외는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아주 반갑게 맞아 주
었다. 대청마루 곁 안방에 상옥 부자와 하숙집 가족이 다 모였다.
"상옥아, 인사 올리거라 앞으로 네가 서울에서 공부하는 동안
너를 보살펴 주실 분들이 시다. "
상옥은 주인 내외에게 큰절로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김상옥입니다. 많은 가르치심 받겠습니다. "
"오냐. 듣던 대로 똑똑허고 예의가 바르구나. 인물도 훤허고 공
부도 잘허게 생겼구먼. 이름이 상옥이라고 혔냐?"
'네, 김상옥입니다. "
"그려, 김상옥. 앞으로 이 녀석이 언제까지 우리 집에 있
게 될는지는 모르겄지만서도 서로서로 이해허면서 잘혀 보더라고
잉. 우리 현식이 허고 동갑이고 같은 학년이니께 우리 집에 있는
동안은 공부도 열심히 혀야 허는겨, 그려야 이담에 훌륭한 사람이
되는겨, 알겄쟈?"
"네, 아저씨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
하숙집 주인의 고향은 전북 정읍이라 했다. 주인 내외의 억센
전라도 사투리가 신기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정답게도 느껴졌다
처음 상면하는 사람 같지 않은 다정함이 있었다.
"이제는 유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앞으로 이 아이를 친자
식처럼 신경을 써 주시기 바랍니다 부탁드립니다"
상옥 부친의 당부에 주인 내외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어르신, 너무 염려 마시쇼. 저도 자식을 기르는 부모가 아니겄
습니까. 그러고 지가 전문적으로 하숙을 쳐. 먹고 사는 것도 아
니고 상옥이가 저그집에 있는 한은 저한티 전적으로 책임이 있으
니께 최선을 다하여 보살펴 주겄습니다 염려 노시쇼."
그렇게 하숙집 어른들과의 수인사는 끝이 났다.
"아 임자는 뭐 헤는겨? 상옥이 야가 있어야 할 방 구경을 시켜
야 되지 않는가벼.
"오매 내 정신 보더라고, 그래야지라. 그럼 상옥이는 날 따러와
보그라, 니 방에 가 보자, 그런디 니 맘에 들랑가 모르겄다"
처음 이 집에 들어설 때는 미처 살펴보지 못했으나 주인 아주
머니의 안내를 받아 집안을 둘러보니 서울의 한옥이라서인지 'ㄷ
자 형의 큰집이었다. 안마당이 꾀 넓고, 마당 한가운데 에 규모는
작지만 잘 정돈된 전원도 꾸며져 있었다. 상옥이 앞으로 지내야
할 방은 안방에서 대청마루를 건너 세 번째 맨 끝방이었다.
"워떠냐? 너의 시골집이 부자라 하던디, 방이 비좁지는 않겠
냐?"
"아닙니다. 이만하면 저 혼자 쓰기에는 충분합니다. "
주인 내외의 도움으로 시골에서 가지고 온 짐 보따리를 풀어
방을 정돈하고 나니 정말 서울 생활이 시작되는구나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상옥의 아버지는 상옥이의 방 정리가 끝나는 것을 확인한 뒤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제 상옥은 억압과 탄압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이다 정말 하늘
을 날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마디로 '고생 끝, 행복 시작'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인사를 마치고 뒤돌아 대문을 나서는 부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상옥의 가슴속이 뭉클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천륜
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상옥의 방문에 석양의 그림자가 반너
머 드리워지고 있던 시각에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누
군가가 집안으로 들어오고 대청문이 열리며 "다녀왔습니다" 하는
굵직한 목소리와 "저도요'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에 상옥의 방문 앞에 인기척이 나더니 주인 아주머니가 방문을
두드렸다.
"학생, 방에 있는가?"
'네 ! 있습니다. "
"그저 늙으면 죽어야 허는가벼, 금방 들어도 뒤돌아서면 잊어버
린당게. 그새 학생 이름을 잊어먹었당게 "
"네에, 김상옥입니다. "
"맞아, 상옥 학생. 어서 안방으로 건너가 보더라고. 우리 아덜
이돌아왔응게. 서로 통성명은 혀야지."
하숙집에는 상옥과 동갑내기인 현식이라는 아들과 여중 2년생
수빈이라는 딸이 있었다.
현식이와 수빈이는 연년생이었다.
"나 유현식이다. 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우리."
현식이가 불쑥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해왔다. 첫인상이 나쁘지
는 않았으나 어딘지 모르게 상옥을 무시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상
옥이한테서 풍기는 촌티가 재미있는지 자꾸만 히죽히죽 웃고 있
었다.
그러는 현식이를 바라보는 상옥의 표정도 만만치는 않았다. '내
시골에서 자랐지만 고향에서는 그래도 내노라 하는 심술통에 속
하는 쪽이었다 이거야, 그으래, 좋다. 네 녀석이 서울에서 살았으
면 얼마나 살았겠느냐, 네 부친의 사투리를 들어보니 네 녀석도
토박이 서울녀석은 아닐 텐데 내가 네 녀석에게 꿀릴 필요가 없
지: 상옥은 서슴없이 오른손을 쑥 내밀었다.
"그래. 난 김상옥이라고 한다 이야기를 들으니 우린 동갑인데
다, 동급생이라 들었는데 앞으로 잘 부탁한다"
"좋았어, 생각보다는 재미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음엔 내
동생을 소개시켜 주지 얘는 이제 중 3이 되는데 좀 버릇이 없는
거 빼고는 괜찮은 애야. 앞으로 친하게 지내 봐라."
상옥은 그때서야 비로소 수빈이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있었
다. 상당히 예쁜 얼굴이었다. 그때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겼다. 수
빈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던 상옥의 얼굴이 갑자기 화끈 달아
오르고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이다. 상옥은 얼굴이 빨개져 머리를
푹 숙이고 말았다.
'어머! 이 오빠, 나 좋아하나 봐. 호호호."
수빈이의 놀리는 듯한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린 상옥은 서둘러
머리를 숙여 인사에 답했다
"안녕하세요. 김상옥이에요."
명랑한 성격이라 생각되는 수빈이의 웃는 모습이 예뻤다.
새하얗게 드러나는 고른 치열과 깊게 패인 보조개는 귀여움을
넘어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좀 억울하다. 객지 벗은 10년이라 하던데 겨우 한 살
차이에 오빠라! 난 항상 오빠 때문에 손해 보는 게 많다니까."
"그런 소리 마라. 오뉴월 하루 볕이면 풋나무 두 짐이 거
뜬히 마른단다. "
그들의 첫 만남은 이처럼 가볍고 즐거운 입씨름으로 시작되었
다. 그로부터 그들은 어울려서 며칠 동안 서울 구경을 다녔다. 앞
으로 상옥이 다녀야 할 덕수상고에도 가 보고 창경궁, 덕수궁, 비
원은 물론 남산에 올라가 야경을 보고 서울의 화려함에 놀라기도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옥이와 현식이, 그리고 수빈이는 다정한 오
누이처럼 지낼 만큼 친하게 되었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 하던가. 어느덧 상옥과 현식이는 고교 졸업
반이 되었고 수빈이 또한 여고 2학년 배지를 달게 되었다
여고 2학년의 수빈이는 모든 면에서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 밋
밋하던 가슴이 볼록하게 솟아오르고 허리는 잘록해지는 게 제법
숙녀티가 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솜털이 보송보송한 소녀였는
데 어느 틈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성숙한 숙녀로 변해 버린
것이다.
물론 상옥이와 현식이에게도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얼굴
엔 여드름이 하나 둘 자리를 잡아 가고 코밑의 가늘던 솜털도 제
법 까칠하게 굵어졌다. 더욱이 변성기를 지난 목소리는 더욱 사내
다워졌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수빈이의 모습과는 비
교가 될 수 없었다 수빈이는 정말이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상옥은 웬일인지 수빈이가 예쁘게 피어날수록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초조감에 쉽싸여 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저 가슴
밑바닥에 숨겨져 있는 감정일 뿐, 그런 수빈이 곁에서 상옥은 그
저 늘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함께 있고 함께 행동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이
함께 있는 곳이라면 산이든 바다든 모두가 에덴동산이었고 행복
의 낙원이었다. 그들은 마치 바늘과 실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
다. 어린 시절 형제도 없이 너무 외롭게 자라왔던 탓일까. 상옥은
그들 남매와 어울려 생활하는 것이 너무도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첫댓글 감사히 잘 봤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보고갑니다
잘보고갑니다
즐감 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감사히 읽고 갑니다.
잘 읽었어요..3편도 이어서 잘 볼게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잘보았습니다.
감사
블랙홀로 빠지는갑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