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밥을 많이 얻어 먹었던 병관이가 아들을 결혼시킨다고 와 달라한다.
그가 잘 나갈 때는 술을 얻어먹기도 했는데,
아프고 나서는 연락도 받지 않는다.
참 못된 친구다.
일요일 산행 약속도 있어 토요일 아침에 차를 끌고 광주로 간다.
차를 아파트에 두고 버스를 타면서 기훈이한테 전화하니 서울이랜다.
천정이 높은 결혼식장에 아는 이가 없으니 차라리 편하다.
몇 명 안되어 항상 붙어다녔던 친구들도 하나도 안 보인다.
그의 부인은 얼굴 기억도 희미하다.
신랑인 환웅이도 얼굴을 모르겠는데 삼촌이라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형제들을 물으니 저쪽에 큰 형을 가리킨다.
70이 넘으신 훈식 형님은 나보다 더 젊게 보인다.
자주 뵙지 못했지만 날 기억해 주신다.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밥을 차려 주셨던 영희 누님도 돌아가셨다 한다.
11시 결혼식이 시작되자 식당으로 가 밥을 먹는다.
스크린에 식장을 비춰준다.
소주와 맥주 한병을 가져와 혼자 먹는다.
우울해진다. 나에게도 그렇고 친구에게도 그렇다.
반찬은 셀수도 없이 많다. 술 안주를 우겨 넣는다.
전화기가 소리내어 울린다.
순천에서 택시운전을 하고 있는 손관선이다.
호동에 사는 친구와 둘이 와 내 앞에 앉는다.
관선이가 술을 두번 가지러 간다.
나도 술이 취한다.
그는 더 먹자고 하는데 난 얼른 산에 가 계곡에 들어가고 싶다.
그와 함께 터미널 앞에서 헤어진다.
언제 지킬 기약도 없이 순천에서 한번 보자고 한다.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용연마을로 올라간다.
계곡 원시림은 이끼가 푸르다.
사진을 찍으며 쉬지 않고 걷는다.
40여분 걸어 용추폭포 아래에 닿는다.
도리포가 분적산에 있다며 증심사에서 한잔 하자고 한다.
내일 만날 것이지만 그러자고 한다.
용추폭포 아래서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간다.
장마 중의 물은 그리 차지 않다.
두어번 드나들고 부지런히 식당으로 달려간다.
도리포는 홍어무침을 시켜놓고 이미 소주 한병을 비워가고 있다.
언론사 편집부에서 일했다는 그의 고향친구가 와 합석한다.
낮에 마신 술이 몸에 남아 있는지 금방 취한다.
내일을 위해 참고 일어나 광주극장으로 간다.
페펙트 데이즈라는 일본 영화를 본다.
공공하장실을 청소하는 남자의 사연은 잘 알려주지 않는데
왠지 쓸쓸하다. 책이 가득한 서가 앞에서 책을 보기만 하는 외로운 남자가 불쌍하다.
거리는 어두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