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베이지 사진과 시를 듣고 있으니 떠나간 사람이 돌아 오는게 아니라 죽었던 사람도 살아서 올것같은 기분이 드네요.
조상철대감 이름을 보니 대구의 조상현 대감 이름이 생각나고 옛생각이 떠 오릅니다. DSJ 와 SDS 두 사람이 그 장본인 이지요.
前者는 우리보다(우리 동기들 사랑방이란걸 전제로) 일년 선배였고 後者는 우리와 동기 였지요. 둘다 내 고향 대구 아가씨들 이었지만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한 여인은 曺社長 한테 물어보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수는 있을것 같고 다른 여인도 어쩌면 누가 알른지... 세상이 하도 좁으니...
松亭 솔베이지 카페 얘기이니 송정 해수욕장에서 일어난 추억이 담긴 후자 SDS 얘기가 제격 일것 같습니다.
사실 여기에 참여하고 싶은건 아니지만 원평재 대감이 올리신 글이라 한다리 끼고 나섭니다.
내가 S를 처음 본것은 중학교 1 학년때 末이나 2학년 初입니다.
정확한 기억은 없네요. 어떤 사랑의 얘길 기대 하지는 마십시요.
사실 지난 밤에도 어떤 내가 들여다 보는 카페에 Lou Salome 의 얘기가 나오길래 일부러 외면을 하였다가 또 새로운 얘기가 전개 되길래 용기를 가다듬고 긴 장문의 이야기를 글로 옮겼다가 지울까 말까 망서리기를 몇번 거듭하다가 올렸지요. 한 오분쯤(?) 지나서 다시 들여다 보니 한국에선 깊은 밤중인 시각이라 한 사람도 안 읽은걸 보고는 다행이다 싶어서 얼른 지워버리곤 몇번이나 썼다 찢어버린 사랑의 편지도 아닌데 하고 쓴 웃음을 지었답니다.
Lou Salome는 작가 로서도 유명하지만 詩人 Rainer Maria Rilke 와 신경과 의사였다가 정신분석학(Psychoanalyse)의 창시자인 Freud 와의 염문때문에 더 유명 했었지요. 작년 6월 7일 자살을 해버린 나보다 세살아래의 한국인 여자 의사가(내 처랑 1966년에 같은 비행기로 독일에 왔었답니다. 이곳에서 대학공부를 하여 의사가 되었지요) 나에게 보낸 릴케의 연시가 바로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루 살로메 에게 보냈던 그 戀詩 였답니다. 대감들 이상한 눈으로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좀 더 관심을 가져 주었고 다정하게 답글 이라도 보내 주었다면 저런 극한상황을 막을수는 있지 않았겠느냐는 자책감이 없는건 아니지만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답니다.
나름 대로의 최선을 다 하기는 했으니까요.
그리고 또 한가지 뜨는 생각을 적어 둡니다.
우리나라 외래어 표기법 문제 입니다.
지금 내가 Psychoanalyse를 쓰고보니 항상 느끼던 생각인데
그리스 신화에 Psyche 란 말이 나오지요.
한국의 사이트들을 보니까 프쉬케 라는 표기가 보이던데
한글 사랑하는 모임이나 한글학회 학자님들은 말로만 한글사랑 하자고 하지말고 당장 이런 문제나 좀 해결해 주었으면... 영어의 F 를 우리글로 어떻게 표기할 것인지 쉬운것부터 하나하나... F는 ㅍ도 아니고 ㅎ도 아닌 중간 발음인데(脣齒音)...
Psyche를 프쉬케 이건 정말 아닙니다. 대한민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교수님들이 그렇게 표기할수 밖에 없다면 문제는 심각 합니다.
국어사랑 하자고 말로만 하지말고 간단한것 부터도 해 보이시길...
Psyche 는 피쉐도 아니고 피퀘도 아닌 중간음 인데...
또 얘기가 곁길로 빠집니다.
그때 S는 대구여중 교복을 입고 있었고 나는 백삼선을 달고 다녔지요.
사실 이때 우리 동기생들중에 S, C 등 몇명이 연애박사(학위취득은 못했지만)로 자타가 공인 했었는데 이 S 도 그 친구들과 자주 빵집에서 만나는 걸로 알고 있었지요.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 동기생들 중에 보결생이 거의 200명 가까이 된다는 사실이 새삼 스럽게 느껴 질뿐더러 대감님들도 아시다 시피 우리 중학교때 시골의 수재들이 다 모였었는데 보결생은 내 생각에 99퍼어센트가 대구 친구들 이었으니 웃을 얘기지만 대구에서 국민학교 나온 친구들 중에 채철이 말고(채철이가 보결생이 아니란건 내가 목숨을 걸고 보증 합니다) 또 내가다닌 서부국민학교 공부 잘하던 몇명을 빼고는 모두 보결생이 아닌가 의심 스럽 답니다.(대구 친구들 한테 몰매 맞을라) 하기사 지금 그게 무슨 상관 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요. 시골 출신 다 빼고나면 대구출신 우리 동기가 몇명인데 그중에서 200명이 보결생 이었다니...
그때 이 연애박사들 팀중에 대부분이 그 클럽회원 이었던 걸로 사료됩니다. 팔자를 잘 타고 났던지 C는 지금도 로스엔젤스의 어떤 골프 클럽의 멤버라고 합디다만...
이제 또 알고보니 그 친구들 대부분이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미역국 먹고 2차 시험을 친 친구들이 굉장히 많다는건 알았는데 고등학교때도 또 부모의 돈 힘으로 어려운 관문을 넘은 친구들도 있는지 모르 겠네요.
그런데 이 S 는 집이 내가 大新洞에 살다가 중학교 1학년때 이사왔던 東仁洞에 집이 있었답니다. 집이 직물공장을 했었는데 거기에 합당하리만치 집안이 유복한 편이었지요. 그런데 품행은 방정하지 못했지만 인물은 달 덩어리 처럼 훤 했답니다.
우리동네에 보결생 Y도 살았는데 그 사촌도 대구여중에서 S의 친구였고
또 누구도 대구여중에 다녔는데...
우리집과 담을 같이하고있는 뒷집에 44회 후배 P군이 살았는데 그의 어머님이 대감님들도 잘 아시는 김영기 교장 선생님의 따님 이셨고 그의 아버지가 그 당시 대구여중 서무과장으로 재직 하셨답니다.
이분은 5 16 혁명후에 초대 대구 문화방송 국장이 되셨답니다.
S 는 성격이 참 서글 서글하고 좋아 가끔 마주치면 꼭 친구처럼 부담없이 대화가 가능했는데 내가 전제없이 상대를 하고 그녀는 나를 어느정도 내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기 때문에 그런 허물없는 관계가 형성 되었지 싶습니다.
그 당시에 그녀 에게서 직접들은 에피소드 하나-
하루는 그녀를 시청부근에서 만났는데(아마 고등학교때 였을 겁니다) 그녀가 한다는 말- "야~~ 니(너가 아닌) 참 오래간 망이다 (지독한 대구 사투리로) 내가 빵사주께 이바구나 쫌 하자" 하기에 "그럼 좋은데 소문나면 내 혼인길 막힐낀데 니가 책임 질끼가?" 하니까 "보증수표 끊어준다"기에 둘이서 낄낄 거리며 금호빵집(?)에 같이 들어간 적이 있었답니다. 금호 빵집은 시청에서 제일은행 쪽으로 조금 내려 가다가 한전 직원들의 단골 다방이었던 할남다방 부근에 있었지요.
권기진이나 권희광 등 그 동네에 살던 친구들은 잘 알겁니다.
내가 그때(고등학교 1학년때) 청구대학에 에스페란토(Esperanto 자멘호프 박사가 창제한 국제공용어)를 배운다고 다닌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갔다 오다가 만났지 싶습니다. 그때 지금 2 28 기념사업회 부의장 이신 김상숙 사장님도 청구대학의 한 강의실 에서 배운 기억이 납니다. 참 좋은 시절 이었지요. 그때 강사는 김태경씨 였다는 기억도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김상숙 부의장께서도 S를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S도 한때 경북여고를 다녔으니까요.
보나마나 보결생 이었을 테지만...
내 얘기를 들으면 어떤 대감께서나 또 친구분들이 누구란걸 아실분이 몇명은 있으리라 생각 됩니다.
그날 얘길 하다가 내가 물은 말 "S야!(영어로 이니셜을 쓰니까 토씨는 야를 달아야 겠지만 한글로 부르면 아라는 토씨가 맞습니다) 니는 맨날 공부는 안하고 연애 걸로만 댕기마 너그 집에서 아무 소리도 안하나?" 하구요. 그랬더니 그녀가 한 대답이 걸작 입니다 "왜 아무 소리도 안하겠노? 말도 마라 나가지도 못하게 한다 아이가..."
"그라마 니는 우째 나 댕기노?"
"머리를 써야제 우리 엄마가 나보고 S 야, 야 이년아 니 머하로 나 댕기노. 저년이 또 바람 넣어로 댕기나? 하면 나는 엄마 나는 바람 넣으로 댕기는기 아이고 바람 빼로 댕긴다" 한다나요.
그때 마침 보리차를 한잔 마시다가 그 소리를 듣고 웃는 바람에 그녀의 옷이 젖도록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집 주인 여자가 가져다준 걸레로 치마를 슬슬 닦을때 몸을 가만히 내 맡겼던 그녀의 능청 스러움이 지금도 눈에 선 합니다.
그랬던 그녀가 어느날 내 눈 앞에 갑자기 대구여고 뺏지를 달고 보였지요. "야 너 우째 된기고 또 연애걸다 쫓겨 났구나?" 대구여고 앞에 네거리 모퉁이 빵집이 있었답니다. 바로 그 옆집은 탁구장 이었고요. 그 빵집에 단팟죽이 그렇게 맛이 좋았답니다. 그 날은 그집에서 단팟죽 먹으면서 만났는데 그녀가 한말 "니는 너그집에서 대구여고가 가까운데 머 할라꼬 먼 경북여고 까지 오느냐" 카드라나요... 그때는 아마 고교 2학년 말경이 아니었나 싶네요.
나는 당시에도 부산에 형님 두분이 계셔서 여름 방학때면 부산에서 여름을 보냈답니다. 여름 보내기는 해수욕장이 제일이라 많은 시간을 바닷가에서 보냈지요. 부산에 해수욕장이 많이 있지만 나는 광안리 수영 해운대 송정 일광 을 자주 다녔답니다. 다른 곳에도 물론 가보기야 했지만... 그때만 해도 송정과 일광은 단지 기차를 타고서만 갈수가 있었는데 나는 2등철도 무임 승차권이 있어서(보통은 우리나라에서 3등이었지요. 유건국, 이훈태도 아마 2등 무임승차권이 있었을 겁니다) 송정이나 일광을 선호 했는데 일광은 물이 가장 맑고 조용하기로 이름이 났으나 좀 멀기 때문에 송정을 제일 많이 다녔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송정 역에서 해수욕장 까지는 허허 벌판을 한참 걸어가야 해수욕장에 다다를수 있었으며 솔베이지 같은 건물은 커녕 똑 바로 지은 한옥 한채도 없던 그런 시절 이었지요.
집도 절도 없는 허허벌판길을 바닷가에 까지 걸어 갔답니다.
어쩌다가 사람이 사는 인가가 드문 드문 있었고요.
그 고3때 여름 방학중의 어느날,
송정 해수욕장에서 해수욕을 하고 어슬렁 거리던 내 눈 앞에 나타난 S-
내가 S를 여자로 바라본 첫 순간 이었습니다.
원래 S는 살결이 희고 인물이 좋았는데 글래머 形 이었지요.
우리가 어릴때 김혜정이란 배우가 있었는데 기억 하실런지...
아마 김진규가 주연한 영화 오발탄 인가에서도 나왔지 싶은데...
하도 오래된 기억이라 자신이 없네요.
어쨌건 그 김혜정이란 여배우와 흡사하게 닮은 타잎 이었답니다.
얼굴은 둥글고 눈매가 시원한게 도금봉을 닮았기도 한것같고...
누구나 젊은 넘들은 자꾸 뒤돌아 볼만큼 미인 이었지요.
둘이서 수영복을 입고 모래 사장에서 만났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때 만약 솔베이지 같은 카페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 됩니다.
그녀가 하던 얘기는 내가 상상외로 놀랍게도 우리둘이 연애한다고 소문나면 큰일 이니까 조금 후에 저위에 어떤 음료수도 팔고 옷갈아 입는 천막을 쳐둔 집이 있는데 그집으로 오라는 얘기를 하고는 그 쪽으로 사라져 버렸답니다. 정말 뜻밖 이었지요. 그녀가 그렇게 말할줄은...
조금 있다가 그녀의 말대로 그집으로 갔더니 아니 이거 원 참-
그녀가 교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는데 하얀 짧은 소매의 교복 밑으로 불룩하게 두드러진 젓 가슴이 돋 보이는데 그 왼쪽 젓가슴위에 달린 교복 주머니에 새까만 줄이 보이는게 아닙니까.
부산의 명문 경남여고 교복이지요.
그래서 "너는 재주도 좋고 팔자도 좋다" 하고 연유를 물으니 대구여고 에서도 오지마라 카드라나요? 그래서 그녀의 집에서 절대로 졸업때 까지 서방질(연애)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그녀의 말) 유학을 왔는데 또 소문나서 쫓겨나면 이제 바닷속 말고는 더 갈때도 없으니 조심해야 한다면서 킬킬 거리던 그녀...
그날 경남여고의 해양실습이 마지막 날 이라나요.
그래서 선생님들도 해수욕장에 득실거리니 내일 시내에서 만나자는 언약을 하고 구세주를 만난것처럼 기뻐했던 그녀...
그녀가 그날 했던말이 아직도 기억에 선 합니다.
"오늘 집에 당장 전화해서 집에가면 또 연애질 할지도 모르니 부산에서 공부나 하고 있겠다고 전화 하겠다던가..."
그 다음날 내가 어쨌는지는 시간이 없을 뿐더러 또 썼다 찢어 버리는 편지가 되면 안 되겠기에 그만 둡니다.
몇년전 한국에 갔을때 해운대에서 며칠 일부러 묵었 었는데 해운대에서 송정으로 가는 길목 언덕에 해맏이 집이 있는데 그곳엘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내가 어릴때는 해운대에 일제시대 부터있던 국제호텔이 유명했고 내가 독일올 그 즈음엔 극동호텔이 유명했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그 S는 그후에 서울 E 여대에 입학했고 딱 한번 그후 만난적이 있었는데 더 이상 얘기는 할수가 없네요.
재미있고 아름다운 추억이야 있지만 내가 할수있는 한계인것 같습니다.
내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나게 되는 내 형님 며느리애기도 이 S의 같은 대학교 후배이고 내 조카도 또 다른 며느리 애들도 이학교 출신들이 우리 집안에 여자들 중엔 강팀 이랍니다. S 대학 출신들과 숫적으로 자웅을 겨루는 셈이지요. 누가 어떻게 그 학교엘 다녔는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흥미의 대상은 아닐터인즉... 오 그리운 S여...
언제나 해맑은 웃음으로 낙천적이던 그녀가 보고 싶어 집니다.
보나 마나 잘 살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확신하고 있으니까요.
조대감이 솔베이지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부산에 들리는날 꼭 한번 찿아가 보겠습니다.
내 젊은 날의 아름다운 추억이 묻혀있는 그 백사장도 한번 걸어 보고싶고... 그녀와 함께라면... 꿈을 꾸어 봅니다.
아~~ 그리운 옛날이여~~
글을 올려놓고 제목을 보니 생각이 나는데
장미, 마리안느....
마리안느는 서양여자들의 많은 이름이 그렇드시 꽃 이름이기도 하고
Maria 와 Anne 의 겹 이름 Marianne 랍니다.
Maria 의 불어형은 Marie 이고 영어형은 Mary 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