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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1)
신 6:1-9
1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2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3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 6:1-9 / [율법의 근본인 하나님 사랑]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도록 내게 부탁하신 그 명령과 계명과 규정들을 내가 이제 전하겠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이제 요단강을 건너가서 차지하고 살 땅에서 지켜 행해야 할 법입니다. 2)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명령하는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모두 지키십시오.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또 손자들이 언제나 주님을 경외하며 살면 주께서 여러분에게 길이길이 복을 누리며 살게 하실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주님의 명령을 듣고 그대로 지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일이 그대로 이루어져서 여러분이 복을 받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4)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ㄱ) `우리의 하나님은 여호와요, 여호와는 한분뿐이십니다.' (ㄱ. `여호와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여호와뿐이십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원문에서 첫 단어와 마지막 단어가 대문자로 되어 있고 `증거'`증언'이라는 뜻을 나타내어 이 말씀을 언제나 증거하라는 것으로 보인다) 5) 그러므로 마음을 다 쏟고 정성을 다 기울이고 힘을 다 바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십시오. 6)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명하는 주님의 말씀을 항상 마음에 품고 사십시오. 7) 자녀들에게 이 말씀을 분명히 가르쳐 주십시오. 여러분이 집에서 자녀와 함께 앉아 있을 때나 함께 여행을 할 때나 잠자리에 누울 때나 잠에서 일어날 때에 항상 이 말씀을 자녀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8) 여러분은 이것을 손목에 매달고 다니며 항상 기억하고 두 눈 사이에 붙여 표를 삼으십시오. 9) 또 여러분의 집 문기둥과 성문에도 모두 이 말씀을 써놓으십시오.
본문은 “쉐마 이스라엘”로 선민 이스라엘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1-3) 모세가 아라바 광야에서 백성에게 설교할 당시의 상황을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의 광야생활을 마감하는 상황입니다. 출애굽을 통하여 자유를 얻었지만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척박한 땅 광야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로 기본적인 삶은 살았지만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광야에서의 삶을 마감하기 직전입니다. 또 하나는 온갖 우상을 숭배하고 음란한 삶을 사는 가나안 토착민들을 만나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기회이자 동시에 위기이었습니다.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금 상기시킵니다(1). 이 명령대로 살면 자손 대대로 축복을 누리고 크게 번성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4-9) 본문의 “들으라”는 히브리어로 쉐마입니다. 통상 4-6절까지를 쉐마라고 합니다. 예수께서도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를 물을 때 쉐마의 첫 부분을 말씀하여 쉐마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마 22:34-40). 미국 코헨대학교 총장 게리코헨 박사의 제자 김형종 교수가 있습니다. 그가 저술한 「테필린」에 쉐마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세밀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쉐마의 핵심은 3가지입니다. 첫째 “들으라”입니다. 이 말은 명령어로 듣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굳게 믿고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사랑하는 방법은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먼저 쉐마를 자신의 마음에 새기고(6) 다음에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강론(講論)하고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이마에 붙여 표로 삼고, 집의 문에 기록하라고 했습니다. 손목에 맨다는 것은 말씀을 행동지침으로 삼으라는 것이고, 이마에 붙이는 것은 생각을 말씀과 일치시키는 것이고, 문에 붙이는 것은 집에 들어가고 나갈 때마다 보라는 것입니다. 코헨 박사는 아론의 147대 직계 후손으로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적용: 당신은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의 시작인 쉐마를 알고 있나요? 당신은 하나님의 명령인 쉐마를 실천하며 살고 있나요?
성경의 선언대로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진실 또는 참이라는 말은 꾸밈이나 거짓이 없다는 말입니다. 영문 편지 끝에 “진실한 당신의 친구” 아무개로부터 라고 할 때 “진실한”(sincere)이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유래하여 대리석 조각품이 땜질하지 않은 것 즉, 꾸밈이나 거짓이 없는 순수한 것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시 89:34)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시고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는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 설 교 >
고마운 선생님
신 6:1-9 / 김상복 목사
오늘은 스승의 주일입니다. 우리 일생에 많은 스승을 만나게 하셔서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보통 선생님’은 말을 많이 하고, ‘좋은 선생님’은 설명을 잘 하고, ‘우수한 선생님’은 본을 보여주지만, ‘위대한 선생님’은 감동을 준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66권의 책을 주시고 그 책을 통해 이 땅의 지혜와 하늘의 신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2천여 년에 걸쳐 40여명의 저자가 쓴 이 66권의 성경은 여행기, 역사서, 편지, 잠언, 묵시록 등 여러 가지 문학의 장르로 이루어져있으며, 그리스어, 아람어, 히브리어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수백 가지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마디로 사랑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자신과 자연과 환경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의 심성을 치료하셔서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하리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진리를 통해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의 많은 선생님들 중에 가장 훌륭한 선생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지혜와 좋은 품성과 우주의 원리를 가르치시고, 영원한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그 사랑을 직접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를 감동시키시는 ‘위대한 선생님’이십니다. 그 분에게 감사를 드리십시다.
예수님 역시 위대한 선생님이십니다. 공생애 3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선생님으로 사셨습니다. 소크라테스와 마호메트는 60여세까지 가르쳤고, 석가모니는 80여세까지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겨우 3년 동안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감동과 감화로 인간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켜 사랑하며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스승으로 삼아 그 분에게서 배우면 삶이 절대적으로 풍요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에 성령 선생님께서 오셨습니다. “내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줄 터인데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성령님은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 오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열고 하늘의 비밀과 땅의 비밀을 깨닫고 이해하도록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를 감동하시고 감화하십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기 전에 무엇을 합니까? 먼저 기도하지요. “하나님, 말씀해주십시오. 주의 종이 듣겠습니다. 성령님이여, 이 말씀을 깨닫게 하여주시옵소서.” 성령님께서 선생님이시기 때문에 성경을 펴고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의 도움을 받으면 우리의 눈과 귀가 뜨이고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이 나타납니다. 성삼위 선생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가르쳐주심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올립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지식을 배우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없는 지식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 노력으로는 부족할 때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선생님이신 성령님을 통해 순종하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분의 도움을 받으면 배운 것을 그대로 삶에 실천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배움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 적용하여 행동화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자들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본문의 모세가 그렇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한 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가르치시고 모세가 그 말씀대로 백성들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도록 했습니다. 모세, 에스라, 과거의 선지자들, 제사장, 레위인들이 선생님들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비롯해서 사도들이 모두 선생님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 가르침이 신약성경 27권 안에 기록되어 우리도 그 가르침을 오늘도 배우고 있습니다. 신학자와 목회자, 전도자, 교회학교 선생님, 사랑방장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의 사랑을 알고 땅의 진리와 하늘의 진리를 배울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저는 모태신앙인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면 성경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매주 성경구절을 암송해왔는지 체크를 하셨습니다. 제가 지금 암송하고 있는 성경구절은 거의 주일학교 때 외운 것들입니다. 교회학교에서 성경암송대회를 하면 선생님들이 우리를 격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게 하셨습니다. 참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 때는 무슨 말인지 모르고 그저 외우기만 했는데, 장성하여 옛날에 암송했던 그 말씀들이 무슨 뜻인지 하나씩 깨달으면서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는 금요일 저녁에 초등학생들을 위한 ‘어와나’ 훈련이 있습니다. 제가 금요부흥회를 마치고 지하로 내려가다가 한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너 어와나 하러 왔니?” 물었어요. “아니요, 저는 어와나 졸업했어요.” “그래? 그런데 오늘 밤에 왜 나왔지?” “어와나 보조 교사거든요.” 중학교 1학년인데 보조교사가 되었답니다. 제가 그 아이를 꼭 안아 주며 “너 정말 훌륭하구나! 어려서부터 주일학교 보조교사를 하다니 정말 복 받았구나. 출발이 참 좋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도 중학교 1학년 때 주일학교 보조교사를 시작으로 미국 갈 때까지 계속 교회학교 교사를 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 많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다음 세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가르치는 은사를 받았으면 어린 생명에게 영원한 영향을 끼치는 교회학교 선생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98세까지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신 유명한 분이 있습니다. 큰 가구회사 사장을 지낸 디제이 더프리라는 분은 연세가 많아 어쩔 수 없이 주일학교 교사직을 그만두면서 “사장을 사임하는 것은 쉬웠지만 주일학교 선생을 사임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고 했습니다. 큰 회사사장을 지낸 분이 98세까지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예수를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위해서 기도하는 일이 학생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겠습니까! 또 한 분, 유명한 주일학교 선생님은 카터 전 미국 대통령입니다. 그 분은 지금도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대통령의 반에 들어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대통령이 아니라도 좋아요. 윗사람이 자기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그 사랑을 체험하게 하면 얼마나 큰 감동이겠습니까!
저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교회학교 선생님은 제가 중학생 때 토요일 밤마다 저를 불러냈습니다. 저를 옆에 앉혀놓고 본인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엎드려 기도합니다. 저보고 기도하라고 말 하지 않았지만 그분이 하니까 저도 할 수 없이 기도합니다. 그분이 계속 기도할 때 저는 자고 그랬지만 나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그 선생님이 참 감사하지요.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좋은 선생님은 부모입니다.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치라”(1-2절)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자기 자신과 자녀, 손자까지 삼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선생님으로 임명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자손들에게 하나님 섬기는 것을 가르치면 가장 귀한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자손들에게 소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사실 최고의 선생님은 부모와 어른들입니다. 자손들에게, 아래 사람들에게 좋은 본으로 깊은 감동을 남기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제가 성경을 제대로 전에는 성경의 분량이 너무 많아서 힘이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읽기가 쉽지 않아요. 어느 젊은 변호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도대체 성경 전체가 무엇을 가르치려는 것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는 이웃사랑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상관하지 말고 너는 사랑의 훈련을 꾸준히 해서 사람을 무조건 사랑하라. 또한 너 자신을 사랑하라.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네 주위의 환경과 여건을 사랑하라.” 사도 바울은 “모든 율법의 요약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 한 가지를 가르치기 위해 성경 1500페이지가 있습니다.
사랑은 성경이 존재하고 하나님이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이것을 깨닫기 전에는 기독교, 교회, 성경은 복잡하게 여겨졌지만 깨닫고 나니까 간단합니다. 사랑 한 가지면 됩니다. 사랑만 내 가슴에 일어나면 이웃, 가정, 나 자신, 내 주위의 모든 것을 즐기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 세상 만물을 통해서 가장 중요한 것 하나, 사랑을 배워서 여러분의 삶이 사랑으로 가득 차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도 우리 선생님입니다. 우주의 작은 부분을 연구해 논문을 쓰면 박사라고 합니다. 천문학 박사는 별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있는 별을 보고 작은 한 부분의 지식을 찾은 사람입니다. 생물학자, 경영학자 등 많은 전문가들 덕분에 우리가 많은 도움을 받고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어른들도 참 좋은 선생님이지요.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참 많습니다. 제가 일생을 살면서 두 가지 때문에 큰 유익을 얻었습니다.
첫째는 음악입니다. 음악은 인생을 즐겁게 합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찬송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음악을 좋아하고 즐기면 마음이 아름답고 평화로워집니다. 제가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님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하루는 형님이 저를 데리고 책방에 갔습니다. 피아노 교본 한 권을 사서 저에게 주면서 “오늘부터 이거 연습해!”라고 했습니다. 저는 형님이 어려워서 연습을 했습니다. 그때 피아노 레슨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도 제가 음악을 즐깁니다. 제 딸 셋도 모두 제가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딸들도 평생 음악을 즐기며 살고 있지요. 윗사람의 한 마디가 제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어른이시라면 여러분의 자녀, 손자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영어입니다.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니까 피아노를 배우라고 했던 형님이 저에게 또 왔습니다. “영어 시작했냐?” “예.” “오늘부터 1학년 교과서를 다 외워라.” 나보다 위의 어른이 말씀하시니까 그만 다 외워버렸습니다. 길을 가면서도 중얼중얼 했습니다. 2학년 때는 형님이 외우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제가 그냥 다 외웠습니다. 교과서를 다 외우니까 영어에서 앞서게 되지요. 고등학교 영어 클럽에서는 영어성경을 외우라고 해서 고1부터 고3까지 매주 영어성경을 외웠습니다. 지금 기억하는 영어성경은 다 고등학교 때 외운 것입니다.
미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영어성경이 훤하니까 한국에서 온지 3년 밖에 안 된 저를 미국교회 목사로 앉혔습니다. 매주 영어로 설교를 준비하게 되자 영어실력이 또 늘었습니다. 그러자 신학교에서 교수로 오라고 하더군요. 윗사람이 저보다 먼저 알고 한 마디 가르쳐주신 덕분에 저는 영어 때문에 미국에서 무시당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부모, 어른들이 한 마디 말해주고, 한 가지 가르쳐 준 것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학교 선생님께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글을 쓰는 것, 수학, 영어, 물리, 지리, 역사 지식은 모두 선생님들께 배웠습니다. 그분들의 가르침 때문에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적인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라고 하면 저의 고등학교 생물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혼자 서울에 와서 외롭게 생활하고 있는 저를 많이 사랑해주셨습니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분을 생각하면서 대학교 4학년 때 ‘세포학’ 과목을 들었는데 생물전공 4학년이 배우는 과목을 문과 계통의 제가 선택해서 거의 낙제할 뻔 했습니다. 그 선생님을 꼭 한 번 다시 뵙고 싶었는데, 어느 날 우리 교회에 나타나셨습니다. 제가 예배를 마치고 밖으로 나갔는데 그 선생님께서 제 앞에 나타나셔서 “내가 자네 소식을 듣고 왔네” 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음악은 참 좋아하지만 미술은 좋아한다고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전시회에 누가 데리고 가면 할 수 없이 가는 수준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미술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제가 할렐루야교회에 오던 해부터 담임목사인 저를 초청할 때마다 미술전시회에 갔습니다. 처음 간 전시회에서 작품의 의도를 잘 몰라서 작가에게 물었습니다. “집사님, 무엇을 그리신 건가요?” “선과 공간입니다.” “언제부터 이것을 그리기 시작했습니까?” “30년 정도 되었습니다.” 선과 공간만 그리다보니 작품이 팔리지 않아서 많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잘 팔리는 그림을 그릴까 생각도 했지만 마치 외도를 하는 것 같아서 못하겠더랍니다. 저는 아직도 그림을 잘 볼 줄 모르지만 그 분의 그림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매 해 그 분의 전시회에 가보면 그 선과 공간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그분의 사정이 많이 달라져서 전시회를 하면 미국, 프랑스, 남미 어디서든 작품이 바로 싹 팔립니다. 죽도록 충성하면 결과가 그렇게 되는 것을 봅니다. 미술에 문외한이던 제가 전시회에 갈 때마다 물어보고 배우면서 점점 미술이 좋아졌어요. 작가들에게 작품에 대해 설명을 들으면 그분들이 마치 철학자나 신학자 같기도 하고 너무 재미있어요. 요즘은 미술관을 찾아가기도 하는데, 지금 우리 교회 1층에 아예 화랑을 차려 놓았습니다.
우리 교회에 김병종 서울대 미대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 교회에서 미술에 관한 강의를 하면서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찼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아름다운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보고도 아름다운지 모른 채 지나칩니다. 김 교수님은 아무리 바빠도 종종 멈춰서 아름다운 것을 쳐다보라고 하십니다. “장미꽃을 15분만 계속 쳐다보면 감동으로 눈물이 납니다.” 저는 그렇게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후로는 아름다운 꽃 한 송이라도 발걸음을 멈추고 그 빛과 모양과 냄새를 음미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전문가의 한 마디가 세상을 더 아름답게 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선생님이 됩니다. 여러분의 모습과 말하는 것을 보고 들으며 배웁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기쁨과 감사와 감격 속에 살아야하는지를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배우지요. 때로는 실수와 실패가 선생님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실패를 통해서 배우는 한 그 실패는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를 발전시키고 성공하게 만드는 선생님입니다.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다면 실패를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태도를 바꾸도록 은총 주셔서 일생 사는 동안 많은 것을 꾸준히 배우고 성장하여 주위 사람들과 후손들에게 훌륭한 선생님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보내주신 선생님들에게 감사를 드리십시다.
하나님께서 가르치라고 명하신 것
신 6:1-3 / 송기성 목사
오늘은 기독교교육진흥주일입니다. 이 시간에도 힘써 사역하는 교사들의 헌신을 기억하며 감사와 성원의 뜻을 전합니다. 교육의 본을 몸소 보여주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사들을 격려해주시고 칭찬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은혜와 평화가 모든 자녀들과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늘 함께 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교육이란 사람을 사람다워지도록 만드는 작업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육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작업임에 틀림없습니다. 더 나아가 기독교교육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 뿐 아니라 기독교인을 기독교인답게 만드는 작업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하여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신명기 6장은 모세가 행한 두 번째 설교의 본론입니다. 그는 이것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치라고 명하신 것을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교육이며 설교이기도 합니다. 모세가 그리하였듯이 목사나 교사는 하나님께서 가르치라고 명하신 것을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듣고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실하게 가르치며, 가르친 대로 살아야 합니다.
1. 인간의 도리와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라고 명하신 것은 명령과 규례와 법도입니다. ‛명령’(미츠와)은 ‛계명’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규례’(훅컴)는 법령적이며 도덕적인 율법을 뜻하며, ‛법도’(쉬파팀)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의미합니다. 이같이 명령과 규례와 법도는 각각 구분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로 혼용되고 있으며, 세 단어가 연속적으로 사용된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강조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 명령과 규례와 법도가 그 백성이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그들과 그들의 자손 대대에 평생토록 지켜 행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와 본분임을 가르치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최우선적인 도리와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절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태어나 광야의 놀라운 체험이 없는 후손들이 그 풍요로운 삶 속에서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광야 시대를 체험한 사람들이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자손들에게 솔선수범을 보여주고 그들도 평생토록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도록 가르쳐야 함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교육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도록 가르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것인 줄 믿습니다.
제48회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자인 최승호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개척교회 목사님입니다. 최연소 합격자라는 말보다 개척교회 목사의 아들로 부각되길 바란다는 그는 만약 아직도 그리스천이 아닌 고시생과 취업 준비생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부터 풀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각종 취업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많은 크리스찬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이 시험을 준비하는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험 합격과 상관 없이 하고자 하는 일의 주인이 내가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생각, 나는 청지기라는 생각을 가질 때 소명과 소망을 갖게 됩니다.” 아멘!
전도서12:13에 ‟일의 결국은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기독교 교육은 사람의 도리와 본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도리와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자녀들에게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며, 나는 청지기라는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2. 하나님의 약속과 허락은 자기 백성이 복을 받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계명을 받았으며 그것을 백성에게 가르치라는 사명도 받은 모세는 당시 이스라엘 구세대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나안 입성의 주역으로 성장한 신세대에게도 다시금 새롭게 가르쳐야 할 필요성을 느껴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행하라’ (Hear, O Israel, and be careful to obey.)고 명하였습니다. 여기서 ‛삼가’(솨마르타)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성도의 마땅한 자세를 가리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조심스럽고도 신중하게’(carefully and heedfully)말씀을 듣고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신5:32)
모세는 그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불순종하며 좌로나 우로 치우칠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광야의 구세대도 그러했는데 가나안의 신세대는 그럴 가능성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와 본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허락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약속하고 허락하신 것은 크게 삼중 적 축복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때 개인적 차원으로는 그들의 생명이 양적으로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평화롭고 행복스런 삶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적 차원으로는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으로 그 민족이 흥왕하고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인류적 차원으로는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영적인 가나안, 즉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새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교육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도록 가르치는 까닭은 하나님의 약속과 허락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복을 받고 번성하게 되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감리교신학대학 이덕주(1952~)교수의 신앙 이야기입니다. 1954년 서른다섯에 남편을 잃고 5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던 그의 어머니 윤태신(1919-1989)권사님이 어느날 아침 식사 전 가정예배 시간에 삼남매에게 ‟잘 들어라. 오늘부터 너희는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무렵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던 그의 어머니는 거의 매일 충주남부교회에 가서 철야기도를 하셨는데, 푸념조로 ‟주님, 저 삼남매를 키우기가 정말 너무 힘들어요.”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들리는 음성이 ‟왜 네가 키워?”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그럼 어떻게 해요?”하고 물었더니, ‟나한테 맡겨.” 그러시더랍니다. 그래서 ‟알았어요. 이제부터 내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 자식입니다.”하고 자녀들에게 ‟너희는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어머니는 그날 ‟너희는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선포하신 후 자녀들을 하나님의 자식으로 키우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어머니로부터 ‟너희는 내 자식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식이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자녀들은 다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덕주 교수의 경우,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골수염으로 다리를 자를 뻔 했고, 고등학교 3학년 때 폐결핵 3기로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그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버스 기사들을 지휘하는 사람이 부러워 생활기록부 ‛장래희망직업’칸에 ‛배차주임’이라고 썼습니다. 배차주임이 되면 마음대로 버스를 타고 다닐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배차주임을 꿈꾸던 가난한 시골 소년을 신학교 교수가 되게 하여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며 북한도 세 번이나 다녀오게 하셨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학자로서 크게 활약하고 있는 이덕주 교수, 그는 어머니의 포기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연결되는 고리를 만든 셈이라며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하신 어머니의 위대한 포기 선언은 내 인생의 방향과 내용을 바꾼 가장 결정적인 한마디였다. 그래서 나도 지금, 밖에 나가 살고 있는 두 아이에게 어머니의 그 말씀을 적용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아멘!
잠언22:4,6에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기독교 교육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재물과 영광과 생명의 복을 보상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복을 받고 번성하게 하시며 항상 복을 누리게 (신5:24)하시는 것인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자식들을 내 자식으로 키우지 말고 하나님의 자식으로 키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손 대대로 평생토록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과 허락 대로 복을 받고 번성하며 항상 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소천 하셨을 때 각 국 외교관 등이 우리 정동제일교회에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후 남아공 대사 힐튼 씨가 우리 목회자들을 대사관저로 초대해 주었습니다. 대화중에 그는 대한민국의 경이적인 발전의 비결은 바로 ‛Investment of People’에 있음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는 투자가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이 가능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발전된 대한민국 이면에는 성도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은총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 교육의 중요성이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치라고 명하신 것을 가르치고 배우며, 가르치고 배운 대로 지키고 행하는 것은 교사들과 자녀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도리와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허락은 자기 백성이 복을 받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가르치라고 명하신 대로 가르치고 배우며 행함으로써 인간의 도리와 본분을 다하며 하나님의 약속과 허락 대로 복을 받으시기를 우리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자녀가 잘 되는 길
신 6:1-9, 눅 2:41-52 / 임방환 목사(성산교회)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자녀가 잘 되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내 아이는 최고로 키우고 싶다!”는 마음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부모들의 한결같은 꿈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것일까요?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는 자녀 교육이 유대인들의 자녀 교육입니다. 그들의 자녀 교육은 그들이 어느 곳에 살든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민족이 되게 했습니다. 유대인의 인구는 전 세계 약 천 오백만 명인데 노벨 수상자 가운데 1/3이 유대인이고, 미국 재벌의 23%가 유대인이고, 뉴욕 중고등학교 교사 중 50%, 미국 법조계 70만 변호사들 중 14만 명(20%)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미국 상하의원 전체 535명 중 35명이 유대인이고, 미국 대학 교수 중 25-35%,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 및 주요 책임자 90%, 하버드, UCLA 의대 및 법대 교수의 50%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공산주의 창시자 칼 막스, 심리학의 대가 프로이드, 화가 샤갈,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세계적 지휘자 번스타인, 국제외교가 키신저, 영화감독 스필버그, 스트렙토마이신의 발명가 젤만 왁스만 등도 유대인입니다. 뉴욕타임스 발행인 설즈버거 주니어, 억만장자 소로스도 유대인입니다. 유태인이 미국 인구로 볼 때 3%로도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월가의 돈줄을 잡고 있습니다. 세계 저널리즘의 핵심에 있는「뉴욕 타임스」「워싱턴 포스트」를 비롯, 텔레비전의 NBC·CBS·ABC 3대 네트워크가 유대계입니다. 미국의 원자력 개발은 유대인 독점하고 있고 NASA 과학자의 과반이 유대인입니다. 맨해튼 빌딩 주인의 40%, 전 미국 변호사의 20%, 뉴욕 의사의 과반이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2000여 년 동안 나라를 잃고 갖은 학대와 고통을 당한 유대인들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나왔을까요? 그들이 그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독특한 교육원리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독특한 교육원리란 구약 성경에 근거를 둔 신앙 교육으로 유대인의 교육 핵심은 오늘 본문 신명기 6장을 근거로 한 쉐마 교육입니다. 쉐마, 이스라엘 (들으라, 이스라엘) 정통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자녀들과 함께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 암송을 합니다. 오늘 이 말씀에 자녀가 잘되는 길이 있습니다. 자녀가 잘되려면,
1. 부모는 자녀의 영혼이 잘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들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그 영혼이 잘 되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자녀의 영혼이 잘 되려면 예수님을 잘 믿는 아이가 되도록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우게 하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바로 알고 믿어 주님을 사랑하는 자녀가 되게 해야 합니다. 또한 따뜻한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려면 부모들은 그 자식이 자기의 자식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임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자녀가 주님 안에서 영혼이 잘 될 때 예수님 어린 시절의 모습처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사랑스런 자가 됩니다. 눅 2:52에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없이 구원이 없고, 구원 없는 형통은 영혼이 잘 된 모습이 안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이 가진 편견을 깨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일이 일어나면 그들의 형통은 금상첨화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단의 괴수라고 생각했던 바리새인 사울이 다메섹에서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난이후 이름을 바울이라 개명하고 세상 영화 대신 주님의 증인으로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이 되어 온갖 고난을 당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아무리 세상에서 고난 가운데 있어도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늘 소망을 가진 자는 영혼이 잘 된 자입니다.
오래 전 한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소년이 열세 살 때 혈우병을 앓아서 수술을 받는 중 수혈이 잘못되어서 이 소년이 후천성 면역결핍증 즉 AIDS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병원의 실수로 그는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모나 형제, 특히 실수한 의사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밝은 웃음을 보였고, 모두에게 웃으면서 감사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방송매체를 통해 전해지게 되어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 소년이 다니던 교회와 주변 교회들이 이 천사와 같은 아이의 쾌유를 위해 기도하게 되었고, 특히 지방 도지사까지 병실로 찾아와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5년을 더 살다가 18세에 이 소년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나는 아무것도 너에게 해준 것이 없구나. 무능한 아빠를 용서해다오.”
아들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많은 선물을 아빠로부터 받았습니다. 그 중 가장 귀한 선물은 아버지께서 제게 천국열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해 주시고, 말씀을 통하여 영생을 얻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모가 아이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주어서 인내로 소망 가운데에서 고난 중에서도 기쁨을 누리게 하는 힘을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들의 영혼이 잘 되기를 소망합니다.
2. 부모는 자녀가 건강한 도덕관을 가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구약 본문 신6:1에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명령, 규례, 법도는 항상 정직하고 의로운 길로 인도합니다. 본문에서 유대인에게 명령으로 부과된 두 가지 의무인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 했는데, 여기 규례는 도덕법을 말하고, 법도는 사회 규범을 말합니다. 모든 각 개인은 하나같이 반드시 이 두 가지를 연구하고 지켜 행하여 거룩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온 유대 공동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속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고상한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의 말씀처럼 집에서, 길 갈 때 어디서든 말씀을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면 그 말씀이 자녀를 바른 길로 가게 만듭니다. 이것은 교육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바른 행동은 반복된 교육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비장한 각오로 이 말씀을 명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는 다른 민족의 세속 문화 없이 자신들만 모인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제사만 드리며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겼습니다. 먹는 것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만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방인과 섞여 살아야 하기 때문에 온갖 우상과 세속 문화가 그들을 유혹할 것을 모세는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 농사나 목축을 하며 생업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당시의 세속 문화 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화려하고 매혹적인 세속문화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비해 아이들이 여러 가지 많은 교육의 짐을 지고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경쟁 사회가 되어 내가 앞서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경쟁의 대상이 되어 상대방 보다 앞서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 사회는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사회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정치가 부패하므로 부정과 불의가 우리 사회에 넘쳐 나게 되었고, 우리의 국제적 신용도가 점점 더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사람, 건강한 도덕관이 없이 세상적인 가치관에 우선을 두고 살면서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삶을 산다 해도 그것이 우리를 복되게 하지 못합니다. 몇 년 전 경기도 분당구 서현동 모아파트 213동에서 아들이 할머니와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군입대를 앞두고 저녁 늦게 술 먹고 왔습니다. 아버지가 2시간이나 야단쳐 할머니와 아버지를 살해하고 65평 아파트에 불을 놓았습니다.
아버지는 경기고와 서울대, 스탠퍼드 대학 등 일류 코스를 밟은 교수입니다. 친인척 가운데 5명의 교수가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동생들을 데리고 미국에 갔습니다. 아들은 삼수하여 아버지가 만족하지 못하는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1년여 동안 손수 아들을 검정고시 학원에 데려다 줄 정도로 정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일류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업을 가지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학문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딤후3:16-17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했습니다.
자녀들이 하나님 말씀위에 바로 서서 바른 삶을 살게 되면 신약 본문 52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게 됩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셨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흠 잡을 데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셨다는 것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어려서도 부모에게 순종하여 받드셨습니다. 도덕 교육이란 인간관계 교육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적인 교육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육이라면 도덕 교육이란 인간 관계를 바로 하는 교육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 말씀에 기초하여 바른 도덕관을 가지고 가정과 사회와 민족을 세워가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부모는 자녀가 사랑의 사람으로 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구약 본문 신6:5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했습니다. 이것이 쉐마 교육의 핵심입니다. 우리와 자녀가 잘 되려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랑합니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애정의 중심(지정의)입니다. 성품은 영혼을 말합니다. 힘은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말합니다. 전인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주님만 사랑합니다. 이 찬양이 우리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보다 더 큰 신앙 교육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정성을 다하는 모습, 기도 하는 모습,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모습, 말씀대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의 신앙이 자라게 됩니다. 이처럼 온 가족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정이 되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참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 자녀들도 부모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느낄 때 감동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일평생 변하지 않고 사랑해야 할 대상은 우리 하나님이시고,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와 함께 하시고 경험 속에서 친밀한 관계를 맺으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주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상에서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내가 잘 되고자 남을 짓밟고, 모함하고, 험담하여 깎아 내리는 사람이 되지 않고 오히려 세워주고, 높여 주고, 희생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세 가지 요소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하면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가장 소중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요소입니다. 아프리카의 한 고아원에서 어린이들이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원인은 고아원에서는 아이들을 먹이고 재울 뿐, 가정에서의 따뜻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의사들의 처방은 간단했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안아 주고 입을 맞추어 주고 사랑을 표현해 줄 것.” 그렇게 시작한지 얼마가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건강을 되찾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가족치료 전문가 버지니아 사티어는 “하루에 네 번 안아 주면 겨우 생존하고, 여덟 번 안아 주면 그럭저럭 살아가고, 열두 번은 안아 주어야 잘 살아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임상의학자 빌 존슨 박사는 “가출 소녀의 90%가 접촉 결핍증에 걸려 있다”고 했습니다. 심리학에서 피부는 겉으로 드러난 ‘뇌’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접촉의 사랑을 손을 내밀어 실천하셨습니다. 손을 내밀어 병자를 어루만져 주셨고,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셨고, 어린이를 품에 안아 주시며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더러운 발도 손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을 더 많이 안아주고 사랑을 표현해 주는 성도들이 됩시다. 아이들은 사랑을 먹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자녀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정리.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자녀가 잘 되는 길”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조상은 우리의 복에 관여하는가?
신 6:1~3, 20~25 / 김경진 목사(소망교회)
< 조상은 후손의 복과 어떤 관계를 가집니까? >
지난주 22일, 연합뉴스에 올라온 기사 중에 이런 제목이 있었습니다. “1만8천 신들이 자리 비운 사이 제주는 이사 전쟁.” 종종 올라오는 기사이자 제주도에 가보신 분들은 짐작 가는 내용일 것입니다. 제주도에는 전통적으로 신구간(新舊間)이라 불리는 특별한 기간이 있다고 합니다. 올해 2020년은 1월 25일부터 2월 1일까지가 그 기간이라고 합니다.
신구간(新舊間)은 ‘신구세관교승기간(新舊歲官交承期間)’의 줄임말로, 제주를 대표하는 오래된 풍습이라고 합니다. 이 풍습에 따르면, 제주에는 많은 신이 있습니다. 약 1만8천 신들이 있다고 합니다. 생명의 신인 ‘삼승할망’, 사랑과 농경의 신인 ‘자청비’, 농경의 여신 ‘백주또’, 대문을 지키는 ‘문전신’, 장독대의 장맛을 좋게 만드는 ‘철륭신’, 집안 지킴이인 ‘성주신’ 등 수많은 신이 집을 지키며 만물을 다스린다고 믿습니다.
신구간이란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신들이 임무를 교대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는 기간이라고 전해집니다. 하늘에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한 해 동안 일어난 일을 보고한 뒤 새로운 임무를 받고 돌아오는데, 그 사이 즉 신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이사하거나 집을 고치면 동티(신의 성냄으로 인한 재앙)가 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 재앙을 경험하지 않는다고 믿어 이 기간에 많은 사람이 이사를 한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신구간에 너무 많이 이사해서 이사 비용이 두 배에서 세 배까지 올랐다고도 합니다. 최근에는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가능하면 이 기간에 이사하려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합니다.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있어서 그 원인이 무엇일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원인이 자신에게 없다면, 과연 어디서 그 원인이 비롯되었는지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와 같은 생각과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어떤 힘을 의지하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미래를 바꿔보려고 여러 시도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던 중에 자료를 찾아보다 오래전 방영된 한 방송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제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조상의 음덕은 과연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 제목을 보고 오늘 설교 제목을 정한 게 아니었는데, 혹시 ‘이 제목을 보고 설교 제목을 정했나?’ 하고 오해하실 정도로 비슷한 제목이었기 때문입니다. SBS의 <백만 불 미스터리>라는 프로그램에서 2004년 5월 31일에 방영된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방송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방송 기사가 적힌 글을 읽으면서 어떤 방송이었을지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방송의 기본 전제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조상의 묘지가 과연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명당, 명당 하는데, 그 명당이 과연 자손의 번창에 관련되는가?’ 하는 주제입니다. ‘죽어서 땅으로 돌아간 선조들, 조상들의 넋이 과연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만약 영향을 미친다면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전문가들을 통해 풀어보려 한 내용이었습니다. 다소 용두사미 같았지만, 흥미로운 내용이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먼저 종로에 사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고 매번 실패해서 아버지의 묘를 파보았더니, 그만 물이 쏟아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장을 했는데 마음이 편해졌다는 내용이 이어졌습니다. 이후 그분의 사업이 잘 되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땅의 기운이 찾아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등장했고, 전자파 같은 기운을 분석하는 사람들도 동원되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런 인터뷰가 실린 것도 보았습니다. 풍수지리학을 연구하는 분의 이야기였습니다. “조상의 무덤이 좋은 땅에 모셔졌더라도 그 후손이 모두 똑같이 명당의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 땅이 아무리 좋은 땅이라 해도 모든 자손이 다 같은 복을 받는 건 아니라는 말이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받을 복도 달라진다는 뜻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조상을 명당에 모셨다 해서 모두가 복을 받는 게 아니라 후손들 각자가 복을 받을 만해야 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 기독교 신앙은 효를 강조하며 자손의 축복에도 관심을 기울입니다. >
우리는 지금 설 명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설날이 되면 제사를 드리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제사를 드리지 않지만, 우리 민족 문화가 그 전통을 지켜 왔습니다. 조상님을 돌아보는 것이 우리 민족에게는 매우 당연시된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 논란의 대상이 되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가톨릭교회가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 조상 제사를 거부했습니다. 가톨릭교회 신자 중 많은 사람이 희생 및 순교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조상 숭배와 제사를 수용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전통문화와 연결하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 개신교회는 여전히 조상 제사를 반대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생활을 하는 분들 가운데 전통문화와 관련해 많은 어려움과 불편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옛날에도 이런 상황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가 조상 제사를 거부하는 현상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논하는 글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됩니다. 그중 한 사람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천지도덕을 말살하는 극단은 현재 서방(兌=西) 사람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저들은 다만 아버지만 찾고 어머니의 은혜는 모르며 망령된 사탄의 말을 하고 있음이라. 세상에 어찌 하늘은 있는데 땅은 없고, 아버지만 있고 어머니가 없는 이치가 있겠는가! 서양사람들은 하늘 아버지만 높이면서 땅의 어머니는 몰라보니 장래 인류가 모두 금수로 돌아갈 징조라. 조상에게 제사도 지내주지 않으며 마귀라고 칭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들을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으리요.”
당시 기독교인들이 이런 모습으로 비쳤던 것 같습니다. 조상 제사를 거부하는 모습이 마치 짐승과 마귀와 같다는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많은 이가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이런 비판을 해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기독교가 조상을 마귀라고 부르거나 사탄이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조상을 폄하하거나 적대하거나 사랑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늘 부모 공경을 가르쳐 왔고, 조상에 대해서도 바른 태도를 견지해 오고 있습니다. 교회나 성경이 조상을 멀리하라고 전한 적도 없습니다.
단, 기독교가 조상 제사 행위를 거절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조상 제사가 가진 몇 가지 전제 가운데 기독교인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있는 까닭입니다. 우선 제사 의례의 배후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조상과 자손, 남편과 아내 등의 천륜(天倫) 관계는 죽음과 동시에 완전히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천륜의 관계는 죽은 다음에 신명이 되어서 계속된다. 후손이 조상님을 잘 모시는 만큼 조상들도 천상에서 늘 자손들을 보살피시고 자손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아마 어른들을 통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내용일 것입니다. 우선 조상과 자손의 천륜 관계는 죽어서도 계속된다는 생각이 우리의 전통문화 가운데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상을 기독교인들이 거절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살펴봐도 조상들과 죽은 조상들, 남겨진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내용은 보기 힘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의 자손, 야곱의 자손에 관한 이야기를 성경은 끊임없이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품에 안겼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이름은 여전하며, 이삭과 야곱의 이름 역시 여전합니다. 성경은 돌아가신 선조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다음에 이어지는 전제가 기독교인들로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바로 ‘조상님을 잘 모시면 조상님이 천상에서 자손들을 잘 돌봐주신다.’라는 내용입니다. 물론 조상님께서 하늘나라에 계신다면 아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을 것이고, 아뢸 수 있다면 우리 조상들이 당연히 자녀들과 후손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조상님을 잘 모시면 조상님이 천상에서 복을 내려줄 것이라’고 믿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전통적으로 유교권에 있는 우리 민족은 조상님을 잘 모시면, 조상님의 음덕을 입어 자손들이 잘 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반대로 잘 모시지 못하면, 도리어 재앙을 만날 수 있다는 전제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상의 음덕을 입는 방법에도 몇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묏자리를 잘 쓰는 것, 제사를 잘 드리는 것 등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통해 조상들로부터 은혜를 입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이 부분을 수용하기 어려워했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성경과 대치되기 때문입니다. 조상의 음덕으로 후손이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조상님의 음덕을 통해 후손의 운명을 바뀔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성경이 전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묏자리를 바꾸면 조상님이 은혜를 베풀어 준다든지, 제사를 잘 드리면 조상님이 우리의 삶을 바꿔줄 수 있다는 전제는 기독교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입니다.
조상님을 무시하거나 마귀나 사탄으로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복이 어디서 비롯되는가? 인간의 행복과 축복이 어떤 통로를 통해 전달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기독교인이 가진 명확한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물음에 대해 기독교인은 정확한 답변을 가지고 있습니다.
< 기독교 신앙은 조상의 ‘삶’이 후손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믿습니다. >
저는 오늘 여러분과 이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과연 조상은 자손의 삶과 행복에 관여할 수 있습니까? 조상 덕분에 후손들이 행복해지거나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Yes.”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니면 “No.”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많은 분이 “No!”라고 대답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Yes.”라고 대답하는 게 적절한 듯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대답, 곧 성경의 대답은 “Yes.”입니다. 조상이 후손의 삶에 연관돼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민수기 14:18)
분명하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죄악이 언제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까? 삼사대까지 이른다고 말씀합니다. 또 다른 본문도 살펴보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창세기 28:3~4)
이 말씀에는 축복과 관련된 내용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축복을 이삭이 받고, 이삭에게 주셨던 축복을 그의 자손이 누리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두 말씀만 봐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조상은 분명 후손의 불행과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이삭이 그랬으며, 야곱이 그러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전통과 기독교적 관점 사이에 별 차이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차이일까요? 한 가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은 조상이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는 시점을 ‘죽음 이후’라고 봅니다. 조상이 혼령이 된 후 신적인 능력을 갖는다고 믿어 왔습니다. 즉 조상이 죽은 뒤에 인간 이상의 능력을 얻게 되고, 그 힘으로 후손을 돌볼 수 있다고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생각은 다릅니다. 조상은 신이 아닙니다. 그저 인간일 뿐입니다. 인간으로 살다 인간으로 죽었습니다. 때문에 죽은 뒤에도 살았을 때와 달라질 수 없습니다. 인간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도 없습니다. 혼령이 되었다 해도 인간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흙은 흙이고, 흙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죽어서도 인간일 뿐입니다. 죽어서 그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그들에게 신적인 능력이 부여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들에게 신적인 능력이 부여되었다고 믿으며 그들을 섬긴다면, 그래서 조상님으로부터 능력을 얻으려고 한다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꼴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그토록 가족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제사를 드리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조상이 신적인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저 효의 표현이자 가족 사랑의 모습이고, 조상에 대한 존경의 표시라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효를 전수하는 방식이라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상을 통해 복을 받으려고 시도하게 된다면, 또 조상의 신적인 능력을 인정하게 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나 다름없습니다.
< 오늘 내 삶을 통한 복이 후손의 축복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기독교가 주장하는 복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성경이 전하는 조상에서 후손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복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조상이 죽은 후가 아니라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이 현실 가운데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따라 후손에게 미치는 영향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죽은 조상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조상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또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지가 후손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에게는 죽은 조상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조상이 문제입니다. 살아 있는 내가 후손에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살아 있는 우리의 태도와 의지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어떤 조상으로 살아가야 후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줄 수 있을까요? 바로 이 문제를 고민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당대에도 그는 하나님의 복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복과 하나님의 약속을 후손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또 이삭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빌었고, 그 복을 자녀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야곱도 그랬습니다. 요셉도 그랬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약속했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자손들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전통적인 사고와 기독교의 관점은 많이 다릅니다. 전통적인 세계관은 우리 자신이 받을 복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내가 받을 복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조상을 달래서라도 내가 복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묏자리를 바꿔서라도 내가 복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현실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죽은 조상을 이용해서 복을 누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조상의 모습은 다릅니다. 내가 받을 축복은 이 땅에 사는 내가 만들어 가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내 생각, 내 행위를 통해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고 전합니다. 또 하나, 하나님과의 대면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내가 받을 복을 자손들에게 넘겨주는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 자손이 언젠가 이 복을 받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지나친 해석일지 모르겠지만, 내 자손이 스스로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이어 누릴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기에, 이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복을 그대로 이어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삭을 통해, 야곱을 통해, 여전히 하나님의 축복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 믿음의 조상이 되어 신앙의 유산을 전수합시다. >
오늘 본문은 모세를 통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신명기 6:23)
어떤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까? 우리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하신 것,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 이삭에게 약속하셨던 것, 바로 그것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인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며, 믿음의 조상이 그 일들을 이어받았기에 가능했다고 말입니다.
또 오늘 본문은 ‘이제 후손인 우리가 어떻게 자녀들에게 복을 전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그 답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라는 것입니다.
“선조들의 믿음을 통해 너희가 여기까지 왔다. 가나안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선조들의 은혜로 너희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살아가는 모든 삶은 너희의 책임이 된다. 너희 자손에게 복을 내려주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율례와 계명을 지켜라.” 주님께서는 그렇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가족의 멸시를 받으면서도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조상을 달래서 복을 받는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을 살고 하나님을 높여 드려야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 자손에게도 그 복이 이어질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손이 진정 행복하게 되기를, 복을 누리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해 왔던 것입니다.
오늘의 현장을 보면, 안타깝게도 그와 같은 신앙의 지혜와 확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디서 복이 오는지, 어디서 구원이 오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흔들리면 우리가 복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손도 복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여러분에게 요청하십니다. 선조들을 바라보면서 복 받기를 원하기보다 네가 믿음의 선조가 되라고, 복을 나눠 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라고 말입니다. 언젠가 후손들이 나의 믿음, 우리의 믿음 때문에 기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길 바란다고, 그와 같은 믿음의 조상이 되어 보라고 요청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이 음성에, 이 요청에 응답하는 오늘 우리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신앙의 추억
신 6:1-3 / 상동교회
한 주 평안하시었습니까? 생각해보면 힘들기는 해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지난 주간 우리 교회는 보리 추수를 감사하는 7월 첫 째 주간을 맞아 새벽기도시간에 보리에 얽힌 말씀을 묵상하며 감사의 주간을 보내었습니다.
신명기서에 나오는 보리의 이야기, 룻기서에 나오는 룻과 보아스의 보리 이야기, 엘리사와 예수님의 보리 떡 표적이야기 등을 묵상하며 한 주간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보리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매년 7월 첫 주가 되면 어려운 시절을 생각하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도시 교회이기 때문에 맥추감사주일을 공식적으로는 지키지 않지만, 맥추절을 보내면서 감사를 드렸던 신앙심만은 지켜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맥추감사주일을 드리실 분들은 보릿고개를 추억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맥추감사헌금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추억의 곡식 보리]
우리들에게 보리는 가난을 회상하는 추억의 곡식입니다. 그래서 생긴 말이 보릿고개입니다.
사전은 보릿고개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이전에,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의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아서 농가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비유적으로 이르던 말. 음력 3, 4월에 해당한다.”
보릿고개는 이른 바 가장 배가 고팠던 봄의 가난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너나없이 가난했던 우리 조상들은 보리 이삭이 패기를 기다렸습니다. 보리는 지독한 가난으로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먹고 살다가 얼굴이 누렇게 뜨던 부황증에 걸린 사람들이 겨우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절박한 구명줄 같은 곡식이었습니다. 맥추감사주일은 바로 이 보리를 추수한 후에 드렸던 감사절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보리는 생명을 살리는 곡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추억하는 보리]
보리는 하나님을 추억하는 가나안의 양식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리를 먹으면서 하나님을 추억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추억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추억했고, 하나님의 약속을 추억했습니다.
왜냐하면 보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약속의 곡식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8장은 보리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의 일곱 가지 식물가운데 하나라고 전합니다.
<신8:7~8>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가나안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입니다. 애굽을 떠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 수 있는 약속의 땅입니다. 그 약속의 땅에 하나님이 준비한 일곱 가지 축복의 양식이 있습니다.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나무, 그리고 꿀입니다. 이 일곱 가지 양식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의 양식입니다. 보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의 축복의 곡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곱 가지 양식 가운데 밀은 부유한 자들의 양식이었고 보리는 가난한 자들의 양식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밀로 만든 빵을 먹던 식생활 방식의 차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주식은 쌀이지만 팔레스타인의 주식은 밀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리는 밀과 함께 먹는 곡식이지만 밀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곡식이었습니다. 가격을 비교하면 보리가 밀에 비해 싼 곡식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리는 밀의 반값이었습니다.(왕하7:1) 그리고 한 데나리온에 밀은 한 되밖에 못 사지만, 보리는 석 되를 살 수 있습니다.(계6:6)
가난한 자들의 양식인 보리를 가지고 하나님은 많은 표적을 보여주시었습니다. 엘리사는 보리떡 이십 개로 100명을 먹였고(왕하 4:42~44),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셨으며(요6:10~13), 보리떡 일곱 개로 4천명을 먹이셨습니다(마15:36~38, 여기서 떡은 보리 떡). 그런가하면 예수님의 조상인 다윗의 증조할아버지 보아스는 보리 이삭을 주우러 온 룻을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룻기 2:15~17) 보리를 매개로 하나님의 은총이 베풀어지고 하나님의 능력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졌습니다.
이처럼 보리는 가나안에 준비된 약속의 곡식이었는데 하나님은 어려운 시절을 지난 후에 풍요로운 시절이 오더라도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먹고 살만할 때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신8:16~20> 11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20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
[기억은 추억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기억할 수 있는 길 중의 하나가 추억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추억>을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추억은 가장 선명한 기억을 유지하게 합니다. 신명기서 6장은 어른들에게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추억을 어린이들에게 심어주라고 말씀합니다.
<신명기6:1~3> 1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2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3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지난 주말에 청년부원들이 대천에 가서 수련회를 했습니다. 교회의 여름은 성경학교와 수련회를 통하여 <신앙의 추억>을 심는 계절입니다. 이 번 주 토요일 저녁에는 유아 유치부 아이들에게 담임목사의 안수를 받게 합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에게 데려 왔습니다.(삼상1장) 그리고 성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였습니다. 사무엘을 키운 한나에게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성전에서 제사장의 축복을 받게 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리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엘리는 자녀 교육을 실패하고 기도하던 한나에게 술취했는냐고 핀잔을 준 부정적인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나는 자기 아들 사무엘을 엘리에게 데리고 와서 축복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무엘은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무엘은 성장하여 사사가 된 후에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았습니다. 또 이새의 집에 가서 막내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았습니다.(삼상16:11~13) 사무엘 자신이 좋은 추억을 가지고 성장하였고 자신이 사사가 된 후에 다윗에게 좋은 추억을 심어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가정교육은 이미 교육학자들 사이에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추억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추억하는 것은 <어려운 시절>을 지날 때 함께 하신 하나님, 가장 힘들고 가난하고 곤경에 처했을 때 축복하신 하나님을 잊지 않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아이들을 이 여름에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좋은 추억을 갖게 하시기 바랍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식과 갈릴레오 식의 추억]
좋은 추억을 경험하기 위해서 <관계형성>을 잘 해야 합니다. “아웃라이어”라는 책을 쓴 경영저술가 말콤 글래드웰은 성공하려는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돌은 왜 떨어질까요?” 아리스토텔레스 식은 돌에 중력이 있기 때문에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갈릴레오 식은 돌과 상황의 관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친절한 것은 친절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친절한 상황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말콤 글래드웰은 <생각의 지도>라는 책을 쓴 사회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 교수와 함께 <문화적 상황>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한국 독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깁니다.
“노벨상의 업적을 만들어 낼 천재를 무작정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런 아웃 라리어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문화적 유산과 기회를 제공할 것을 주문합니다.”
말콤 글래드웰에 따르면 진정한 아웃라이어는 개인이 아니라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여름에 개설하는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는 하나님의 자녀를 키워가는 거룩한 문화입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신앙의 추억>을 심어주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추억은 좋은 관계형성을 갖도록 도와줍니다. 만물의 기본 법칙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올 여름에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심어주시기 바랍니다.
[누가 옳을까요?]
지난 주 한국 사회의 이슈 가운데 하나는 헌법 1조1항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리고 법과 원칙과 정의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누가 옳을까요?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저는 누가 옳은지 보다 두 사람의 배경을 생각했습니다. 대통령의 딸인 대통령과 판사의 아들인 새누리당의 유승민 의원이 벌이는 헌법 1조의 논쟁 배후에는 두 사람의 <추억>이 있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관계 속의 추억>들로 인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합니다. 대통령의 추억이 낳은 단어는 <배신>입니다. 그리고 유승민의 추억이 낳은 단어는 <가치>입니다. 배신의 폐혜를 말하는 대통령 앞에 가치를 말하는 유승민 의원의 선언은 두 사람의 추억이 만들어낸 삶의 언어가 있고 생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추억이 삶을 결정하고 추억이 단어를 결정합니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사람들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좋은 추억만 있었다면.....?”하고 아쉬운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히틀러는 어린 시절 유태인과 좋지 못한 추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훗날 유대인학살이라는 광기를 부립니다. 그러나 가난했지만 링컨에게는 통나무집에서의 추억이 그를 노예를 해방시키는 좋은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존경하는 지도자 가운데 넬슨만델라는 남아공의 감리교회 신학교 학생이었습니다. 만델라가 배운 정의는 복수의 정의가 아니라 용서의 정의였습니다. 진실을 바탕으로 화해를 실천한 만델라를 사람들은 귀하게 여겼습니다. 교회가 심어준 추억들이 한 사람을 통하여 사회를 바꾸었습니다. 진정한 정의는 복수가 아니라 용서에 있습니다.
[좋은 추억이 좋은 미래를 만듭니다]
좋은 추억을 가진 사람들이 좋은 미래를 만듭니다.
여름성경학교는 좋은 추억을 심어주는 <신앙의 추억 만들기 모임>입니다.
제가 뉴저지의 트리니티 감리교회 여름성경학교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탄자니아의 세렝게티라는 초원을 주제로 삼아 성경을 가르치는데 선생님과 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초원을 만들고 성경의 이야기를 역할극으로 만들던 모습들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윗은 목동으로 일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던 신앙의 추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는 왕이었으면서도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라도 좋겠다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시84:10> 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이번 여름 성경학교와 여름 수련회에 아이들을 많이 보내주셔서 좋은 추억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또 8월 첫 주에 있는 전교인 수련회에 모두 다 참석하셔서 좋은 추억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네 아들과 네 손자들에게
신명기 6:1-9 / 황유석 목사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나와 내 자녀들과 내 후손들에게’ 계속 이어지기를 축복한다. 신앙의 대를 이어가는 우리 성도들의 가정과 집안이 되기를 바란다. ‘나와 내 자녀와 내 후손들이’ 평생에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과 집안 되기를 바란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에게 받은 은혜가 아들에게는 두 배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라고, 아들의 아들에게는 또 두 배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란다. 어떤 집안은 아버지 때에는 100만큼의 복을 받았는데 아들 때에는 50으로 줄었다가, 아들의 아들 대에는 10으로 줄었다가 그 다음에는 하나님에게 받은 복이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들도 있다. 그것이 경제적인 것일 수도 있고, 집안의 품격일수도 있고, 집안의 신앙일수도 있다. 후대로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좋아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오늘 우리 집을 비롯해서 우리 성도들의 가정, 집안을 축복한다. ‘자녀 대에는 모든 것에 두 배의 축복이 있을지어다.’
신앙도, 믿음도, 재정도,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것도, 하나님에게 쓰임 받는 것도, 하나님에게 은혜 받는 것도 나보다 내 자녀의 때에 갑절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란다.
나는 내 자녀를 비롯해서 우리 성도들의 자녀들 모두가 잘 살기를 바란다.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평안하게 살기를 바란다. 평탄하게 살기를 바란다.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게 살기를 바란다. 꾸러 다니지 않고 꾸어주는 인생 살기를 바란다. 활짝 웃으며 살기를 바란다. 얼굴 피고 살기를 바란다. ‘사는 은혜’가 나를 비롯한 우리 성도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의 자녀들에게 임하기를 바란다. 더 구체적으로는 앞에 형용사를 부치면 된다. ‘잘, 행복하게, 평안하게, 평탄하게 사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란다.
나는 우리 성도들의 담임목사로서 우리 성도들의 자녀들이 복 받았으면 참 좋겠다. 내 자녀들이 복 받았다는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복을 받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지키심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평강이 항상 우리 자녀들에게 있기를 축복한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들을 다 담아서 ‘복’이란 단어로 표현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우리 성도들이, 우리 성도들의 자녀들이 복을 받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 성도들이, 그리고 우리 성도들의 자녀들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우리 성도들이, 그리고 우리 성도들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사는 날이 길기를 바란다. 장수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오래 살기를 바란다. 나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신 좋은 땅에서, 좋은 일들을 많이 보면서,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란다. 우리 성도들과 성도들의 자녀들에게 좋은 날들이, 아름다운 날들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우리 성도들의 자녀들이 여러 분야에서 크게 번성하기를 바란다. 우리 성도들의 자녀들 중에서 ‘인물’이 나오기를 바란다. 대한민국이 주목하는 인물, 세계가 주목하는 인물이 나오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우리의 성도들의 자녀들을 크게 번성케 해 주시기를 바란다. 오만명을 먹여 살리는 우리 자녀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 ‘소원’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축복하신 말씀이다.
<1절> ‘이는’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앞의 말씀과 연결된 본문이다. <5:32~33, 6:3>에 지금까지 내가 성도들과 성도들의 자녀들을 축복한 내용이 다 들어있다.
<33절>에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면 살 것이다. 사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잘, 행복하게, 형통하게, 평탄하게, 여유있게’ 살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자로 하여금 살아나게 하는 힘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계속 살려면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계속 살기 위해서는 계속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 영혼이 살고, 말씀대로 행할 때에 우리 눈빛이 살아있다.
‘얼굴이 살아있다.’ 어떤 얼굴을 보고 ‘살아있다’고 말하나? 생기가 있고, 의욕이 있고, 밝은 얼굴 표정을 살아있는 얼굴 표정이라고 말한다. 우리 성도들의 얼굴이 항상 살아서 생기 있고, 생동감 있고, 의욕이 넘치는 밝은 얼굴이기를 축복한다.
‘얼굴’은 영혼의 모양이다. 영혼이 살아나면 얼굴이 살아난다. 얼굴 색깔이 희고 까만 것과 얼굴이 밝고 어두운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얼굴이 하야면 얼굴이 밝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얼굴이 까마면 얼굴이 어두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얼굴이 흰 것과 까만 것과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얼굴은 하얀색인데 얼굴이 어두운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얼굴은 까만데 밝은 사람이 있다. 사람들을 만나보면 얼굴이 하얘지고 싶은 소원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다. 베트남에 가니깐 오토바이 타는 사람들이 얼굴 전체를 가리고, 손목까지 덮은 옷을 입고 다닌다. 어떻게든 하얗고 싶어서.., 우리나라에서 그러고 다니면 복면 강도라고 소리칠지도 모른다. 가끔 우리나라도 등산가는 분들 그렇게 다니는 분들 있다. 순간 얼굴 보고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그뿐 아니라 얼굴 하얘지고 싶어서 어린 학생들이 얼굴이 뭔가 바르고 다니는걸 본다. 제발 학생들은 바르지 말고, 제발 발라야 할 분들이 좀 발랐으면 좋겠다. 어떻든 얼굴이 하얗다고 얼굴이 밝은건 아니고, 얼굴이 까맣다고 얼굴이 어두운건 아니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사람의 마음을 무장 해제시키는 얼굴은 하얀 얼굴이 아니라 ‘밝은 얼굴’이다.
웃는 얼굴은 어려운 일도 쉽게 만들고, 화난 얼굴은 쉬운 일도 어렵게 만든다. 웃는 얼굴은 바라지 않는 것도 얻게 되고, 화난 얼굴은 달라고 해도 얻기 힘들다. 신앙생활을 정말 잘 했다면 당신의 얼굴이 ‘지옥에서 출장 나온 사람’ 같진 않을 것이다. 그 얼굴 갖고도 천국은 갈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주님이 알아볼지 모르겠다. 하도 얼굴이 많이 망가져서.., 낙하산과 얼굴의 공통점은 둘 다 펴져야 산다는 것이다.
나는 목회가 참 좋다. 특히 설교하는 시간에는 ‘거룩한 떨림’이 있다. 굉장히 긴장되지만 굉장히 기대되는 시간이다. 왜나하면 처음에 예배를 시작할 때에 성도들의 얼굴은 굳어 있다. 그런데 예배가 진행되면서, 설교가 진행되면서 성도들의 얼굴이 서서히 눈 녹듯이 평안해지고, 나중에 설교가 끝나고 축도하고 밖에 나올 때 보면 얼굴에 꽃이 피어 있는걸 본다.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얼굴 표정을 하고 있는 분들은 우리교회 예배 끝나고 나가는 분들을 보면 거기에 계시다. 그때 성도님들 얼굴 표정 하나하나를 보면 정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설교하면서 예배드리는 분들을 보면 정말 ‘10인 10색’이다.
1. 설교시간에 멀거니 강단을 응시하는 멀대파.(눈은 목사님, 생각은 멀리 출장 중)
2. 주보에 밑줄 긋고 교정까지 보는 꼼꼼파.
3. 졸면서 끄덕끄덕 콤마를 찍는 아멘파.
4.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는 안절부절파.
5. 옆 사람과 글로 대화하는 청각장애파.
6. 예배 후에 있을 회의만을 생각하는 회의 염려파.
7. 설교시간에만 성경읽기로 시간 때우는 나홀로파.
8. 찬송 부를 때 입만 벙긋대는 붕어파.
9. 기도시간의 틈을 노려 묵상(?)에 잠기는 기회주의파.(어휴, 어제 못잔 잠 보충해야지)
10. 누가 왔나, 안 왔나 두리번거리며 인원 체크하는 경비파.(주로 각 기관의 회장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세)
무엇이 사람의 얼굴을 그렇게 아름답게 만드나?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얼굴을 그렇게 만든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우리가 잘 살도록 역사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할 때에 ‘사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5:33>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1) 살 것이요, (2) 복을 얻을 것이다 ~ (3) 너희의 날이 길리라.’ (4) <6:3>에는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네가지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기만 하면 이 네가지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만 제대로 물려주면,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제대로 가르쳐 주기만 하면, 내 자녀들이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내 자녀들을 살게 할 것이요, 복되게 할 것이요, 좋은 날을 길게 할 것이요, 크게 번성하게 만들 것이다.
<7절>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우리 성도들이 자녀들에게 신앙을 부지런히 가르쳐서 유산으로 남겨주기를 바란다.
유태인들이 아기를 목욕 시킬 때 기도문이 있다.
1. 머리를 감기면서 “하나님, 아이의 머리 속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가득 차게 하옵소서.”
2. 얼굴을 씻어주면서 “아이가 얼굴은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의 소망을 갖고 자라게 하소서.”
3. 입안을 씻어주면서 “이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복음의 말이 되게 하소서.”
4. 손을 닦아주면서 “이 아이의 손은 기도하는 손이요, 사람을 칭찬하는 손이 되게 하소서.”
5. 가슴을 닦아주면서 “이 아이가 5대양 6대주를 가슴에 품고 살게 하소서.”
6. 배를 씻어주면서 “아이의 몸 속의 모든 기관, 오장육부를 튼튼하고 강건하게 하소서.”
7. 성기를 씻어주면서 “결혼하는 날까지 순결을 지켜,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축복의 자녀를 준비하게 하소서.”
8. 다리를 씻겨주면서 “부지런한 다리가 되어서 온 나라와 민족에 복음을 증거할 전도자의 걸음으로 인도하소서.”
9. 엉덩이를 씻어주면서 “교만한 자리에 앉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이 원하는 자리에 앉게 하옵소서.”
10. 등허리를 씻어주면서 “보이는 부모를 의지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소서.”
미국의 한 신학교 교수가 믿는가정과 믿지 않는 가정을 조사연구한 것을 발표햤다. 두 사람을 200년동안 역추적했다. 첫번째 가정은 맥스 죽스라는 무신론자가 불신 아내와 결혼하여 자녀 560명을 낳았는데, 그 중 310명이 거지, 150명이 범죄자가 되었다. 두 번째 가정은 조나단 애드워드라는 신실한 가정으로 1394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 13명이 대학 총장, 65명이 교수, 3명이 상원의원, 3명이 주지사, 30명이 판사, 56명이 외과의사, 1명이 의과대학학장, 75명이 군대 장관, 3명이 대도시 시장등 모두 형통하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로 배우고, 아는 사람에게는 ‘삶으로, 행동’으로 배운다. 모르는 사람에게 사랑을 배울 때는 그 사람이 사랑을 얼마나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말하는가? 가 중요하지만 아는 사람에게는 논리적인 말로 사랑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사랑을 해야’ 사랑을 배울 수 있다. 아는 사람은 사랑을 행동으로 하는 사람이 사랑을 말하면 그가 말하는 사랑을 믿고 따라오지만, 본인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잘 설명을 하면 상대방은 절대 그 사람이 말하는 논리적인 사랑에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부모로서 자녀를 가르쳐야 한다.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부모 자식간에는 서로를 너무 잘 안다. 자녀들은 부모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자녀들은 부모님이 지난 일주일을 어떻게 살았는지 너무 잘 안다. 집에서 엄마가 아빠에게 어떻게 사는지, 또 아빠가 엄마에게 어떻게 하는지 다 안다. 이렇게 부모의 삶을 다 아는 자식들을 가르치는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르는 사람은 말로 가르치면 되지만 아는 사람은 행동으로, 삶으로만 가르칠 수 있다.
부모가 믿음과 삶이 하나가 되지 못할때에 자녀들은 신앙생활에 회의를 느낀다. 특히 주일이나 교회 수련회 기간에 다른 곳으로 관광 여행을 떠나는 부모를 볼 때, 또한 부모가 예배 시간이면 몇 번씩 시계를 들여다보며 예배가 빨리 끝나기를 기다릴 때 자녀는 실망한다. 또한 목회자의 실수나 교회 행정의 불합리성을 습관적으로 계속 탓하는 부모, 또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헌금이나 십일조를 내는 부모의 위선적인 모습을 대할 때도 자녀들은 실망할 것이다.
성경은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반대로 ‘거짓말하는 자는 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의 가르침은 ‘정직하면 흥할 것이고, 거짓말 하면 망할 것이다.’ 성경은 자녀에게 ‘이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부모가 이 말씀에 순종해서 자녀에게 이 말씀을 가르친다. ‘아들아, 딸아 정직해야 한다. 거짓말 하면 안된다’라고 가르쳤다. 부모는 자녀를 이렇게 가르칠 수 있지만, 자녀는 부모가 가르치는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부모가 평소에 어떻게 사는지가 생각날 것이다. 아빠, 엄마는 거짓말하는 것이 일상 생활화 되어 있으면서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 가르친다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고 거짓말하는 자의 장막은 망한다. 너 정직해야 해’라고 자녀에게 가르친다면, 부모의 가르침은 자녀에게 아무 효과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반발심만 일으킬 것이다. 아빠는 정직하지 않으면서 자녀에게 정직을 가르친다면 자녀의 마음에는 물음표가 생길 것이다. ‘그런데 아빠는? 그런데 엄마는?’
나보다 내 자녀가 모든 것들(신앙도, 경제적인 것도, 인간관계도..)이 갑절로 좋아지기 위해서는 자녀들이 부모님이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 교육은 교회가 시킨다고 생각하지만 틀렸다. 신앙 교육은 가정에서, 부모님이 시키는 것이다. 부모님이 가르쳐 주는 신앙 교육이 자녀에게 유산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물으신다. ‘자녀가 정말 잘 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먼저 부모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내가 잘된 것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내가 받은 복이 많아야 한다. 내가 체험한 복이 많아야 한다. 나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신 복이 많기를 바란다. 하나님에게 받은 복이 많기를 바란다. 하나님에게 복 받은 체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간증이 많기를 바란다.
“내가 인간적으로는 말도 안되는데 참았더니 하나님이 내 삶을 이렇게 인도하셨습니다. 내가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지만 용서했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때 200만원 뇌물을 거절했다니 하나님이 이번 비리 사건에서 나를 구출해주셨습니다.”
이런 간증이 우리 성도들의 삶에 넘치기를 축복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정직을 말로 가르치기보다 삶으로 정직하게 사는걸 보여주면 자녀는 부모가 보여준 정직한 삶 그대로 살 것이다. 자녀의 눈에 ‘부모님이 하나님 말씀대로 정직하게 살았더니 이런 복을 받으셨다’는걸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자녀는 정직하게 살게 되는 것이다.
자녀에게 정직을 가르치기 위해 내가 먼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내가 산만큼 자녀에게 흘러간다. 내가 순종한만큼, 내가 행동한만큼 자녀에게 흘러간다.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믿음을 ‘큰 믿음’이라고 한다.
나는 우리 성도들이 ‘체험이 많은 신앙생활’을 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위기를 모면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하나님이 보호해주셨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모든 것을 안전하게 해 주셨다.’ 이런 것들이 계속 쌓이다 보면 무슨 일을 만나도 강하고 담대하게 모든 일들을 주관할 수 있게 된다.
이제부터 아주 중요한 것을 물을 것이다. 답은 ‘하나님의 말씀대로’이다.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하나? 하나님 말씀대로, 돈을 어떻게 써야 하나? 하나님 말씀대로, 결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 말씀대로, 연애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 말씀대로, 자녀 어떻게 키우나? 하나님 말씀대로, 직장생활 어떻게 하나? 하나님 말씀대로, 남편에게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 말씀대로, 아내에게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 말씀대로, 부모님에게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 말씀대로, 사회생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 말씀대로, 내가 속한 공동체의 지도자에게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 말씀대로 해야 한다.
이 세상에 성경보다 완전하고 온전한 책은 없다. 성경은 수천년 동안 기록된 책이지만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확한 현실적인 수많은 문제에 대해서 정답을 제시하고 있다. 가장 잘 사는 비결이 무엇일까?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비결이다. 복된 인생을 사는 비결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된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잠깐 행복한 것이 아니라 평생 행복할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된다. 지금의 평안한 삶을 평생 유지시키는 비결은 무엇일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된다. 어떻게 말하면 될까? 하나님 말씀대로, 생각 어떻게 하면 될까? 하나님 말씀대로, 친구를 어떻게 사귀면 되나? 하나님 말씀대로 하면 된다. 하나님 말씀대로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만큼 내 아들, 딸에게 복으로 흘러갈 것이다. 솔로몬은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은 것을 전부 열매로 거둔다. 그런걸 보면 몇대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장 부럽다. 첫대로 예수믿는것이 신앙의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느낌이라면 몇 대가 예수믿는것은 잘닦인 고속도로를 달리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선조들이 믿음으로 산 것이 자녀에게, 손자, 손녀에게로 복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럼으로 가문이, 집안이 대를 이어가면서 갑절의 복, 또 갑절의 복을 받으면서 흥왕하는 역사가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 성도들이, 또 우리 성도들의 자녀들이 잘되고, 복되고, 좋은 날이 길고, 크게 번성하는 복이 있기를 축복한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칠 말씀
신명기 6:1-9 / 이영기 목사
성경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장에 보면, 당시 실로 성전의 제사장이었던 엘리의 가문이 멸망당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저들이 먼저 건져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 하였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집인 회막 문에서 수종을 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제사장 아들들에게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가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 하니라.” 이런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상 2:29,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나의 처소에서 나에게 바치라고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멸시 하느냐? 어찌하여 너는 나보다 네 자식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이 나에게 바친 모든 제물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을 골라다가, 스스로 살찌도록 하느냐?” 엘리제사장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과 예물을 멸시 했다는 겁니다. 제대로 드리지 않았거나, 드렸어도 마음에 없는 제물이나 예물이었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그 아들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 했는데도 책망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는데도 조용히 타이르는 정도로 그쳤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상 2:30b, “이제는 내가 나를 존중하는 사람들만 존중하고, 나를 경멸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게 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존중하십니다. 하나님을 경멸하는 사람은,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수치를 당하게 하십니다. 결국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은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 앉았다가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뒤로 넘어져서 죽었습니다.
‘맹모삼천’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들의 공부하는 환경을 만들고자 세 번 이사했다는 겁니다. 결국 학교 주변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학교 주변은 어떻습니까? 어려서부터 볼 것 안 볼 것 다 보고 자랍니다. 인터넷은 말 할 것도 없고, 길가에 붙어 있는 영화 포스터만 보아도 야한 그림, 야한 글이 있어 늘 오고가며 봅니다. TV만 켜면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성공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제대로 된 사회는, 근거리에 있는 사람이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곳에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시편 127:3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자식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태 안에 들어 있는 열매는 주님이 주신 상급이다.” 하였습니다. 자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보다 “선물”이라는 말에 더 중요성과 의미를 둡니다. 선물이라는 말의 일반적 개념은 누군가가 나에게 거저 주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선물은 날 위한 겁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하는 겁니다. 신약성경에 ‘은사’라고 나옵니다. 그 말은 곧 선물이라는 겁니다. 값없이 거저 주는 겁니다. 그러나 그 은사는 내 마음대로 하라고 주신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쓰라고 주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서의 자식 또한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위해 양육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자녀들은 내 소유가 아닙니다. 그들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왔지만 우리가 만들어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9:13-15, “그때에 사람들이 예수께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서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랐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주시고 거기에서 떠나셨다.” 아마도 지금 같이 예배하고 있는데 혹시라도 아이들이 와서 뛰어다니거나 떠들거나 한다면 꾸짖을 수 있지요. 당연히 그리해야겠지요. 그러나 당시 상황을 짐작하건데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으니까요. 그럼에도 제자들이 꾸짖은 것은 아이들이 뭘 알겠느냐는 겁니다. 아직은 어려서 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는 의도가 깔려있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록 아이들이지만 그들을 어른과 같이 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 교회에 몇 명이 모입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100명이 모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럴 때, 그 100명은 어디까지 입니까? 어른 예배에 참석하는 숫자입니까? 아니면, 어린이 예배에 참석하는 어린이를 포함한 숫자입니까? 예수님의 계산은, 그 어린이도 ‘하나’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어린아이도 생명이 있고, 영혼이 있음을 말씀하신 겁니다. 이렇게 넓은 관점에서 어린이나 자녀를 이해한다면, 다시 말해 그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내 아이든 남의 아이든, 교회 나오든 안 나오든, 다 하나님의 자녀요, 우리의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아주 오래 전, 한 아버지가 가출한 아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 아들은 폰팅으로 알게 된 여자 중학생 3명과 같이 가출했다는 겁니다. 다행히 그날 그 아들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의 아버지는 여자 아이들 3명도 찾아야 한다며, 그들이 머물렀다고 하는, 집짓는 공사장에 그 늦은 시간에 찾아갔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서 잃은 자를 찾으시는 주님을 봅니다. 내 자식만 소중하게 여기는 현대의 부모들을 향해, 어느 자식이든 소중하다고 꾸짖는 소리를 듣습니다.우선, 부모들이 생각해야 하는 건, 내 자녀가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임을 기억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자녀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내 손에 들고 있는 이것이 그냥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라고 여기면, 그것은 별 거 아닙니다. 언제라도 내던져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손에 들고 있는 이것이 다이아몬드라고 여기면 그럴 수 없습니다. 아주 소중하게 다룰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는 그냥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해서, 그러니까 당연히 그렇게 태어난 것 같지만, 여러분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의 자녀입니다. 자녀는 우리가 마음대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셔서 여러분의 가정에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27:3은,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 “자식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우리 자녀를 귀하게 여겨야 하며,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아이들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양육하려면, 부모가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살아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어느 훈장선생님이 아이들을 모아 놓고 한문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 훈장선생님은 발음이 좀 이상했답니다. 글자 하나를 짚으면서 아이들에게 따라하도록 했습니다. “바담 풍” 그러자 아이들도 “바담 풍” 하는 겁니다. 훈장선생님이 들으니 발음이 이상한 겁니다. 그래서 다시 큰 소리로 “바담 풍”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도 “바담 풍”하고 큰 소리로 따라합니다. 훈장선생님이 말합니다. “나는 바담 풍 하더라도 너희들은 바담 풍 해라.” 우리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지금 그러고 있다는 겁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자녀들에게 온전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겠습니까? 어른인 우리도 잘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실수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우리의 생각이 언제나 옳은 것만은 아니잖습니까? 그러나 이걸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 아이들은 그것을 보고 배우고 자란다는 겁니다. 자기도 모르게 부모의 삶을 닮는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경상도에서 나서, 경상도에서 자란 아이는 영락없이 경상도 말을 합니다. 전라도에서 태어나 전라도에서 자란 아이는 영락없이 전라도 말을 합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밥상머리 교육’이 있습니다. 그들은 토요일이 안식일이라,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흩어졌던 가족들이 금요일 저녁만 되면 모두 가정으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함께 합니다. 식탁에는 하얀 식탁보를 깝니다. 촛불을 켜고, 시작 찬송을 부릅니다. 가족들이 서로 축복합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전해줄 동전을 모읍니다. 포도주를 마시고, 밥을 먹습니다. 후식을 먹으며 토론과 대화를 나눕니다. 이들은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이런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부모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아이들을 축복합니다.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감사하고, 부모님께 감사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돌봅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준비합니다. 이것은 어려서부터 시작됩니다. 잠언 22:6에 보면, “마땅히 걸어야 할 그 길을 아이에게 가르쳐라. 그러면 늙었어도 그 길을 떠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상을 보면, 엘가나의 아내 한나가 아이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합니다. 한나는 그 아이를 양육하며 젖떼기기까지 기다리다가, 젖을 뗀 후 그를 데리고 실로의 성전으로 갑니다. 외경 마카베오상 7:27에 보면, “나는 너를 아홉 달 동안 뱃속에 품었고, 너에게 삼년 동안 젖을 먹였으며, 지금 내 나이에 이르기까지 너를 기르고 교육하며 보살펴 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한나는 사무엘을 삼년 동안 품고 가르쳤다는 겁니다. 우리도 그리 말합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그런데 실상은 그 세 살까지의 교육이 없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것이 무얼 알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 아이는 이미 자기 나름대로의 인격적 형태를 갖추어 갑니다. 그리고 세 살이 넘으면, 그것을 바꿀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교육학자들은, “아이가 TV에 눈 돌리기 전에 교육을 마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제 밥상머리 교육을 시도해 보십시오. 일주일 중 토요일 저녁에 온 가족이 모여서 함께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고 하나님께 감사해 보십시오. 이웃을 돕고자 작은 동전이라도 모아 보십시오. 특히 자녀가 어릴수록 그 교육의 효과는 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6:1, “이것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가르치라고 나에게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입니다. 당신들은 건너가서 차지 할 땅에서 이것을 지키십시오.” “건너가서 차지 할 땅에서 이것을 지키십시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고 긴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곧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약속의 땅에서 살 때에, 그들이 지켜야할 명령과 규례와 법도 그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어른들의 마음에 새겨야 하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쳐야 할 말씀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벗어나지 않고 성심껏 지키면, 그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 모든 길만을 따라가면, 그들이 차지할 땅에서 풍성한 복을 얻게 하고, 오래오래 잘 살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잘되게 하고, 크게 번성하게 하실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이 말씀을 어른들은 마음에 새기라는 겁니다. 이 말씀을 어린아이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겁니다.
신명기 6:10-15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당신들에게 주기로 약속하신 그 땅에 당신들을 이끌어 들이실 것입니다. 거기에는 당신들이 세우지 않은 크고 아름다운 성읍들이 있고, 당신들이 채우지 않았지만 온갖 좋은 것으로 가득찬 집이 있고, 당신들이 파지 않았지만 아미 파놓은 우물이 있고, 당신들이 심지 않았지만 이미 가꾸어 놓은 포도원과 올리브 밭이 있으니, 당신들은 거기에서 마음껏 먹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될 때에 당신들은 이집트 종살이 하던 집에서 당신들을 이끌어 내신 주님을 잊지 않도록 주의 하십시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만 맹세 하십시오. 당신들은, 당신들 가까이에 있는 백성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에, 그 어떤 신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 가운데 계시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분노하시면, 당신들은 땅 위에서 멸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겁니다.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겁니다. 우상숭배, 말하자면 다른 신들이라는 것이, 꼭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 놓은 형상만을 이야기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돈이다.”하면 돈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내 기업이다”하면 기업이 우상입니다. 엘리 제사장 같이 “하나님보다 내 자식이다.”하며 그 자식이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 우상을 버리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라고 해도, 사람들 생각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조차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곤 우상을 섬깁니다. 그래서 그런 일, 곧 우상을 섬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신 겁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시기도 하시며, 스올로 내려가게도 하시고 거기서 다시 돌아오게도 하신다. 주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고, 낮추시기도 하시고, 높이시기도 하십니다.”(삼상 2:6-7) 그렇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그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당신들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존중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사랑 하십니다.신명기 11:13-14, “당신들이,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명하는 그의 명령들을 확실히 듣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면, 주님께서 당신들 땅에 가을비와 봄비를 철따라 내려 주셔서, 당신들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거두게 하실 것이며, 들에는 당신들의 가축이 먹을 풀을 자라게 하여 주실 것이며, 그리하여 당신들은 배불리 먹고 살 것입니다.” 22-24a절, “당신들이, 내가 당신들에게 명한 이 모든 명령을 정성껏 지키며,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을 따르며, 그에게 충성하면 주님께서 이 모든 민족을 당신들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당신들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차지할 것입니다. 당신들의 발바닥이 닿는 곳은 어디든지 다 당신들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복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분명히 새기십시오. 그리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십시오. 사람을 죽이시기도 하시고 살리시기도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지옥에 내려가게도 하시고 거기서 다시 돌아오게도 하시는 분 또한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고, 낮추시기도 하시고, 높이시기도 하시는 분 역시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을 존중하며, 그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를 존중하며 사랑하며 복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녀를 위해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성적입니까? 건강입니까?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는 철학자입니다. 그에게 여섯 번째로 태어난 죄렌 키에르케고르는 철학에 소질을 타고 태어나,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깊은 생각에 잡기고, 우수에 잠기고, 가끔 엉뚱한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몹시 걱정하며 아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죄렌이 어떤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이 되게 해 주소서.” 그 아들은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잘 양육하십시오. 무엇보다 여러분이 신앙과 삶의 본이 되시고, 무엇보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가르치십시오.
사실 자녀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교육입니다.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교육이 강조되었고, 이것은 부모교육에 대한 중요성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를 교육시키는 것이 다시 강조되었습니다. 그 후에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사회가 급속이 변화되었습니다. 이때에 자녀교육에 대한 부모의 책임은 가정 밖에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육이라고 하면 학교에서만 가르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교육에 대한 부모의 학습기회가 줄어들었습니다. 이제는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학원을 찾아내는 겁니다. 그리고 운전을 해주면서까지 좋은 학원 몇 개를 다니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녀의 주위를 뱅뱅 맴도는 겁니다. 이런 엄마를 ‘헬리콥터 맘’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가정이 다양한 형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자녀를 가르치는 자녀교육보다도, 부모를 가르치는 부모교육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교육이 중요해졌습니다. 부모가 올바른 기독교인상과 부모상을 수립하고 기독교 부모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에 대한 교육적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가정을 하나님의 나라로 세워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를 양육하려고 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또 하나 문제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는 건 많은 데 제대로 활용하지 못합니다. 배운 것 많은 데 제대로의 삶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계속 강조되는 것이 인성교육입니다. 됨됨이의 교육입니다. 우선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적어도 나 아닌 다름 사람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웬만한 교육학자들은 다 압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르칠 수 없습니다. 학부모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빨리 진도가 나가야 합니다. 뒤쳐지면 안 됩니다. 빨리 끝장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됨됨이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둘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머리로 배우는 공부가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는 교육이어야 합니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이런 교육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들은 단계적으로 자랍니다. 그러나 그 단계는 단절된 단계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앞에서 습득한 경험과 지식은 반드시 다음과 연결됩니다. ‘이 더하기 삼 은 오다’라는 것은 계속 사용되는 겁니다. 어느 날 알고 있다가 어느 날 잃어버리는 것 아닙니다. 그것은 평생 우리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교육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이론적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행동하는 겁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겁니다. 남이 넘어지면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여러분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여러분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 또 여러분들은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이십시오.” 그렇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존중하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존중하십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에게 풍성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비결
신 6:1-9 / 김명혁 목사
사실 믿음도 귀중하고 예배도 귀중하고 기도도 귀중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변화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보다 귀중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선행과 섬김의 착한 삶이 너무너무 귀중하다는 말씀을 오래 전에 하셨는데,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선행과 섬김의 착한 삶을 무시하는 믿음과 예배와 기도는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1,15-17). 성부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선행과 섬김의 착한 삶이 부족한 기도와 금식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계속해서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선행과 섬김의 착한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기도와 금식이라는 좀 이상한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6-9).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선행과 섬김의 착한 삶이 바로 성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기도와 금식이라는 좀 이상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신약 시대에 와서도 기도와 함께 많은 구제와 선행에 전력하는 착한 삶을 아주 귀중하게 여기시고 축복하신다는 말씀을 계속해서 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많은 구제와 선행을 보시고 아주 귀중하게 여기시면서 천사를 그에게 보내어 그를 축복하신 일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습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행 10:1-5). 백성을 많이 구제하는 선행과 섬김의 착한 삶을 하나님께서 아주 귀중하게 보셨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도 기도와 예배를 아주 귀중하게 보시면서도 구제와 선행이 부족한 기도와 예배는 귀중하게 보시지 않으신다는 좀 이상한 말씀을 아주 분명하게 그리고 아주 길게 하셨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31-46). 착한 행실을 너무 예찬하는 좀 지나친 인본주의적인 또는 자유주의적인 말씀 같다는 생각을 하게도 됩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으면 죄 사함과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간다고 생각을 하는데, 지극히 작은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펴는 착한 사람들이 천국에 가는 축복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 좀 지나친 말씀 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의 말씀과 성자 예수님의 말씀이 잘못된 말씀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믿음도 귀중하고 예배도 귀중하고 기도도 귀중하지만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선행과 섬김의 착한 삶이 너무너무 귀중하다는 말씀을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똑 같이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들이 올바른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 경외와 하나님 사랑이 기본적으로 본질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경외와 하나님 사랑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신 6:1-9). 하나님 경외와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삶이 너무너무 귀중하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성경주석자이신 박윤선 목사님은 신명기 6장 주석에서 “사랑”의 귀중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습니다. “사람은 그 사랑하는 대상에 따라서 그 인격이 결정된다.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의 종이 되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세상의 종이 되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종이 되어 멸망을 자취한다. 사랑은 마땅히 무한히 좋으신 하나님을 사랑해야 된다.” 사랑의 귀중성을 지적하신 말씀인데 무한히 좋으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인격과 삶이 새롭게 변화된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신 구약 성경은 하나님 믿음과 하나님 경외와 함께 하나님 사랑이 가장 귀중하다고 강조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찌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잠 3:7,8).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시 31:23). 성자 예수님께서도 믿음을 강조하셨지만 사랑을 더욱 더 강조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과 서로 사랑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1 5:1,2). 사도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모두 귀중하지만 제일 귀중한 것은 사랑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우리 죄인들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고 사랑할 때 우리 죄인들의 삶과 운명이 변화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죄인들의 성격과 기질이 변화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죄인들의 살과 피와 세포가 변화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착함과 선행의 삶을 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사울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부드럽게 자기를 부르시는 성자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래서 울면서 회개하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고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의 삶과 운명은 완전하게 바뀌어지고 말았습니다. 온유 겸손한 사람이 되었고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 되었고 모두를 사랑하고 섬기는 사랑과 섬김의 사람이 되었고 자기 자신의 삶과 생명을 모두 제물로 드리는 드림과 순교의 삶을 살다가 죽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의 사랑과 헌신의 고백을 인용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7,18).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 28:30,31).
이제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인 이기풍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의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비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이기풍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평양의 유명한 깡패 두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경외하고 사랑하게 되므로 그의 인생이 변화되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평양의 대표적인 깡패 두목이었던 이기풍이 평양에 와서 전도하던 마포 삼열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서 턱을 부서뜨렸습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피 투성이가 되어 길 모퉁이에 쓸어졌습니다. 이기풍이 28세 되던 1893년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마포 삼열 선교사가 건축하던 장대현교회당을 깡패들을 동원해서 때려 부스고 온통 수라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죄인중의 죄인인 이기풍이 의기양양했지만 양심 한 구석에 찔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잠을 자는데 꿈에서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복음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그는 너무 놀라서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러나 즉시 항복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앞에 이상한 옷 차림을 한 서양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평양 거리의 마포 삼열 선교사와 비슷한 모습의 서양 사람이었습니다. 원산에서 선교하고 있던 스왈렌 선교사였습니다. 그가 이기풍을 보자마자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우뢰 소리와 같았습니다. 결국 이기풍은 스왈렌 선교사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29세 되던 해인 1894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즉시 마포삼열 선교사를 찾아가서 그 앞에 무릎을 꿇어 백배 사죄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잃었던 한 마리 양이 돌아온 것을 바라보며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후부터 이기풍은 평양 시내를 누비며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깡패 두목이 전도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평양 온 성안을 발칵 뒤집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권서 활동과 선교사를 돕는 일을 하면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예수님을 전하기에는 너무 무식하다는 것을 깨닫고 1903년에는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전도자와 목회자로서의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한국교회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던 해인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이기풍은 한국교회의 최초의 7인 목사들 중의 한 사람으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노회 셋째 날인 9월 19일 길선주 목사의 사회로 열린 노회가 선교사들의 헌신적 노력에 보답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한 사람 파송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를 했습니다. 그 당시 제주도는 풍속이나 언어가 다른 외국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 때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 선교사로 가기로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자신도 흑암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돌 팔매질을 당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기풍 목사와 윤함애 사모는 1908년에 제주도를 향해 평양을 떠났습니다. 아기를 등에 업고 개나리 봇짐을 머리에 얹고 평양성을 떠나 인천항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보고 울지 않는 여전도회 회원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제주도를 향하던 배가 난파하여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으나 이기풍 목사는 간신히 헤엄을 쳐서 추자도에 상륙했습니다. 그 이후 13년 동안의 제주도 복음화 사역은 수 많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고통스러웠고 미신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고통스러웠습니다. 잠잘 곳도 얻지 못했고 먹을 것도 얻지 못해 때로는 산 기슭에 때로는 바닷가에 때로는 마구간에 쓸어져 기운이 없어 정신을 잃기도 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산 속 동굴 안 구렁이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소녀를 구하기 위해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구렁이를 때려 눕힌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이기풍 목사와 사모가 금식하고 기도하므로 미치광이를 고친 일도 있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13년 동안의 제주도 사역은 가난과 고난을 무릅쓰고 모두를 사랑으로 끌어 안는 사랑과 섬김의 사역이었습니다. 결국 제주도에서 사탄 마귀의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비추게 했습니다. 30여 개의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1934년에는 제주도 독노회를 조직하게 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성공적인 제주도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님의 기도와 사랑의 수고가 있었던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기도의 여인이었고 사랑과 섬김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약 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 떼들로 낮에는 나병 환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나환자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나환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은 제주도의 어두운 밤 하늘을 밝힌 두 개의 새벽 별들이었습니다.
그 다음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에 대한 긴 이야기를 아주 간단하게 줄여서 하려고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그의 인생이 변화되어 완전히 새로운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손양원 목사님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에서 손종일씨와 김은수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손양원은 믿음의 유산을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았습니다. 손종일씨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 가족들을 전도하여 예수님을 믿게 한 후에는 매일 아침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드렸고 집에서는 가정예배를 드렸고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철저하게 했습니다. 손종일씨는 장로로 김은순씨는 집사로 칠원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후에 그의 세 아들은 모두 목사가 되었습니다. 큰 아들이었던 손양원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따라 새벽 기도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힘썼습니다. 손양원은 11살 때 칠원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일본인 교장은 매일 일본 왕을 향하여 절하는 동방요배를 하고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방요배를 거절했습니다. 어느 날 손양원은 동방요배 거부로 교장으로부터 뺨을 맞고 코피를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아버지 손종일 장로는 이렇게 기도하며 아들을 격려했습니다. “주님, 이 부족한 것의 미천한 아들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쇠는 두드릴수록 강해진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더 큰 일에 사용하시기 위해 제 아들을 더 큰 망치로, 더 강한 힘으로 두드려 주십시오.” 손양원은 아버지의 기도를 들으면서 하나님을 바로 믿고 섬기기 위해서 라면 그까짓 학교 안 다녀도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손양원은 동방요배 거부는 물론 주일성수를 위해 주일날 학교에 가는 것을 거부하므로 학교에서 벌을 받곤 했습니다. 손양원은 22살 때인 1924년 19살의 정양순양과 결혼을 했고 칠원교회의 집사로 교회 봉사를 열심히 했습니다. 1926년 3월에는 진주에 있는 경남 성경학교에 입학하였는데 3년 동안 경남 성경학교에 다니면서 주기철 목사님에게서 순교신앙을 배웠습니다. 손양원 전도사는 1935년 4월 33세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39년 7월에 졸업했습니다. 졸업하자마자 경상도 사람으로서 전라도 여수에 있는 나병원 교회인 애양원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정성을 쏟으며 애양원 교회에서 나환자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1940년 9월 25일 수요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손양원 전도사를 연행해 갔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손양원 전도사는 일경들에 의해 체포되어 여수 경찰서, 광주 형무소, 경성 구치소, 청주 구치소 등에서 8. 15 해방까지 5년 간의 옥고를 치르며 갖은 고문을 다 당했으나 주님을 향한 일편 단심의 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어 이틀 뒤인 17일 청주교도소에서 손양원 전도사가 석방되어 애양원 교회로 돌아왔을 때 1 천 여명의 나병환자들이 뛰어나와 손양원 전도사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부터 5년 뒤인 1950년 9월 28일 손양원 목사님은 공산군들에게 끌려가며 갖은 고초를 당하다가 여수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을 당하므로 결국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갔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죽도록 충성하며 믿음을 지킨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이 고난과 순교의 길로 걸어가시는데 아주 큰 위로와 기도와 격려의 손길을 편 사람이 정양순 사모님이었다는 고백을 손양원 목사님 나중에 하셨습니다.
둘째로 손양원 목사님은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믿음은 나환자 사랑과 원수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손양원 전도사는 1945년 8월 해방 후 다시 애양원 교회로 돌아와 그의 남은 생애를 애양원 나환자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에게 모든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부었습니다. 출옥 후인 1946년 3월에야 비로서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한 번은 박옥선이란 여 환자가 발 밑에 난 종기 때문에 다리를 절단해야 할 만큼 심각하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입으로 악취 나는 피고름을 빨아 주었습니다. 나병의 환부에는 사람의 침이 좋은 약이 된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나환자들에게 모든 사랑과 정성을 다 쏟아 부은 한국의 프랜시스였습니다. 그의 딸 동희양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들을 너무나 사랑했다. 아버지는 분명 우리 남매의 아버지인데 내가 볼 땐 나환자들의 아버지인 것만 같아 보였다. 아버지는 병든 육신일지언정 저 바깥의 표리부동한 자들보다 몇 배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들이라 하며 그들의 정신적 상처를 아물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다음과 같은 아버지의 노래도 그런 심정의 한 표현이다.”“주여 애양원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 같은 사랑을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나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보다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만약 저들이 나를 싫어하여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들을 참으로 사랑하여 종말까지 싫어 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 하오나 인위적 사랑, 인간적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주를 위하여 이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보다는 더 사랑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내가 또한 세상의 무슨 명예심으로 사랑하거나 말세의 무슨 상급을 위하여 사랑하는 욕망적 사랑도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용에서 되는 사랑으로서 이 불쌍한 영육들만을 위한 단순한 사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의 남은 생이 몇 해 일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몸과 맘 주께 맡긴 그대로 이 애양원을 위하여 충심으로 사랑케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의 극치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나타나 보였습니다. 사랑하던 믿음의 두 아들 동인군과 동신군이 공산 폭도들에게 붙잡혀 10월 21일 순천 경찰서 뒷 마당에서 총살을 당했습니다. 예수를 부인하라고 했지만 오히려 예수를 증거하다가 총살을 당해 순교했습니다. 10월 25일 반란군에 의해 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손 목사 내외는 엄청난 충격에 쌓여 비통해 했습니다. 반란 사건이 진압되고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손양원 목사님은 밤을 새워 통곡하고 기도하고 교회를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결국 손양원 목사님의 마음에는 커다란 사랑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를 살려야 한다. 그를 용서해야 한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두 아들을 잃은 비통함이 그렇게 컸었는데도 불구하고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총살한 그 좌익 학생을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양원 목사님은 계엄 사령관에게 딸을 보내어 그를 사면할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를 양자로 삼아 교육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안 가겠다고 반항하며 대드는 딸 동희양을 설득하여 용서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했습니다. 딸은 자기 의지에 반해 아버지의 하나님 절대 신앙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딸은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국군 심문자에게 그대로 전하므로 처형되기 10여분 전에 원수를 살려냈습니다. 딸 동희양은 취조 군인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아버지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아버지가 두 오빠를 죽인 자를 잡았거든 매 한 대도 때리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 하셨어요. 그를 구해 아들 삼겠다고요. 성경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기 때문이래요.” 딸은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말을 토해 놓고는 책상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동희양의 말이 끝나고 동희양이 울음을 터뜨리자 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은 듯했습니다. 취조를 하던 군인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위대하시다” 하고 감탄의 소리를 토해 냈습니다. 안재선까지도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딸 손동희 권사는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이 광경이야말로 오늘까지 내 눈 앞에 잊혀지지 않는 역사적인 장면의 한 토막이었다.” 사랑의 원자탄이 떨어진 장면이었습니다. 안재선은 살아났습니다. 안재선은 석방이 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그를 자기의 양 아들로 삼아 부산 고려 성경 고등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는 결혼하여 4남매를 두었는데 장남은 대한신학교에 다녔고 나중에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셋째로 손양원 목사님은 소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삶은 천국과 종말신앙에 의해 지배된 소망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가슴과 의지와 시선은 세상이나 세상의 안일에 매이지 않았고 오직 천국과 내세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 세상의 재물이나 평안이나 명예에는 티끌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을 애처로 삼고 고난을 선생으로” 삼으며 천국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옥중 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손수 지은 “주님 고대가”를 불렀습니다. 이 가사를 보면 그가 얼마나 간절히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주님 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 옵소서.”
딸 손동희 권사는 손양원 목사님의 천국 신앙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뿐, 현세의 안락과 풍요를 약속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가끔 안수 기도를 해 달라고 찾아오는 병자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특별히 병 고침을 위한 안수기도를 한 적이 없다. ‘나는 영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육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병들면 어떻습니까? 병신이면 또 어떻습니까? 잠간인 나그네 세상에서 병신으로 살다가 천국 가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다구요.’ 이런 말로 병자를 돌려보낼 뿐이다. 나병환자들과 평생을 같이 보내며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았지만, 그들의 병든 상태를 나쁘다거나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지 않았다.”
손양원 목사님은 결국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2주일간 온갖 수모를 다 당하시고 9월 28일 밤 11시쯤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여 48세에 순교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총 개머리 판으로 입을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면서 하늘 나라로 가셨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그리고 사모하던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의 순교 소식을 접한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의 시신 앞에서 지난 밤에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서 비통해 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 당신 소원대로 됐군요. 평소 주기철 목사님을 그렇게도 부러워했는데 ....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생 동안 주의 일을 하게 하시고, 손양원 목사가 소원하던 순교를 허락해 주신 은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마지막까지 나환자들의 친구로 살다가 1977년 11월 26일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는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가 운명하기 전 가슴에 꼬깃꼬깃 간직했던 돈을 꺼내어 딸에게 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돈을 밀양교회에 전해 주어라.” 밀양교회는 건축 중에 있던 나환자 교회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남편의 무덤과 합장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은 순교적 믿음을 지닌 믿음의 사람들이었고 생명을 다 바쳐 나환자들과 원수를 사랑한 사랑의 성자들이었으며 천국을 바라보며 산 소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삶이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 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믿음도 귀중하고 예배도 귀중하고 기도도 귀중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변화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보다 귀중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일인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선행과 섬김의 착한 삶이 너무너무 귀중하다는 말씀을 오래 전에 하셨는데,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선행과 섬김의 착한 삶을 무시하는 믿음과 예배와 기도는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한국교회의 신앙의 선배님들 중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변화된 새로운 삶을 즉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게 되신 이기풍 목사님 부부와 손양원 목사님 부부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들도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변화된 새로운 삶을 즉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게 하시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주를 경외하는 성도가 됩시다
신명기 6:1-9 / 황의봉 목사
우리 교회 표어는 “처음 신앙을 회복합시다”로 정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하셨습니다. 이정도면 100점 신자인 것 같은데 주님은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라고 하시면서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하셨습니다. 이어서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 잘 해 온 것들을 주님은 다 알고 계시고 또 칭찬을 하십니다. 그렇지만 처음 신앙 처음 사랑을 잊어버렸다면 이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은 이윤을 남기는 사업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눈에 보이는 업적을 남기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바로 맺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바로 해결되고 나서 나타나는 다른 모든 일들이 비로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맨 먼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과연 주님을 경외하고 있는가”하는 점입니다. 그러면 주를 경외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1. 주를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쉐마’라고 부르는 신명기 6장4절 이하를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모드 하나님 말씀을 지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과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하는 복종은 우리에게 큰 부담과 고통을 안겨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종을 하기에 앞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바로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5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깊이 사모하면서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삶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고 분명하게 바꾸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마음에 들어와야 하며, 마음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말씀이 삶의 한 부분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셨습니다. 여기 ‘먼저’라는 말씀에 유의 하십시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차례가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도, 필요한 것을 구할 때도 먼저 구할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인 주기도에도 이런 뜻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아버지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필요한 양식이나 죄용서 시험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병든 사람이면 누구나 이 병을 고쳐주시고 건강하게 살도록 해 달락 기도합니다. 그런데 왜 건강 구합니까? 건강해야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지요. 그러므로 먼저 건강하여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왜 사업이 잘 되고 돈을 잘 벌게 해 달라고 구합니까? 가난하여 가진 재물이 없으면 하고 싶은 일을 맘대로 할 수 없습니다. 봉사를 하려고 해도 돈이 필요하고 전도를 하려고 해도 대접하면서 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복을 받아 주님 위해 쓰고, 주님께 봉사하기 위해 구하시기 바랍니다. 왜 학생이 좋은 학교에 진학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까? 학문을 잘 배워 주님께 쓰임받기 위해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보다도 주님께서 필요로 하는 것, 주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먼저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를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드릴 때도 먼저 드립니다. 아들 며느리가 맛있는 것을 사다가 실컷 먹고 나서 남으니까 부모님 드리는 것이 공경하는 자세입니까? 아니면 먼저 부모님 드리고 나서 자기가 먹는 게 공경하는 것입니까? 하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일헌금을 드릴 때도 헌금시간에 부랴부랴 지갑을 열어 쓰던 돈 중에서 꺼내 드리는 것 보다는 교회 오기 전에 미리 깨끗한 돈을 준비하여 성경책 속에 넣어 두었다가 드리는 게 정성입니다. 십일조를 드려도 월급을 타면 맨 먼저 하나님 몫으로 따로 구별해 놓은 것이 주를 경외하는 사람의 자세인 줄 압니다.
주를 경외하는 사람은 시간도 하나님께 먼저 드립니다. 2022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망년회다 술 먹고 춤을 추고 화투하고 하면서 새해를 맞이하지만 성도들은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고 새해 첫 주일을 이렇게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새해를 맞이하니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이것이 주를 경외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이라 하여 일주일동안 잘 지내다가 마지막 날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일성수를 합니다. 안식일은 일주일의 마지막 날이고 주일은 일주일의 첫날입니다. 이렇게 일주일 중 첫날을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주일성수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루 중에는 첫 시간인 이른 새벽에 성전에 나와 예배하고 기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사는 성도의 하루가 복된 하루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주를 경외하는 사람은 무엇이나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 일을 먼저하고 하나님께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2. 주를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1절과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뿐 아니라 우리 아들과 손자들이 평생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러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 왕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사울은 왕으로 피택을 받은 후 이레를 기다리라는(삼하 10:8) 말씀을 들었으나 블레셋 3만 군대가 몰려오자 몇 시간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13:8-9). 하나님은 또 사울에게 아말렉을 치고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까지 모든 사람을 진멸하고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고 하셨습니다(삼하 15:3).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다는 핑계로 가장 좋은 소들과 어린양들과 모든 좋은 것들은 진멸시키지 않고 끌어왔던 것입니다(15:9). 이를 안 사무엘은 사울에게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15:9) 선언하였습니다. 결국 사울 왕은 길보아 전투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31:3-6).
또 예레미야 42장에 보면 요하난과 여사냐 등이 바벨론 왕에 세운 총독 그다랴를 죽이고 느브갓네살 왕의 보복이 두려워 애굽으로 피난하려고 하다가 예레미야에게 도망해야 하는지 여부를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열흘 만에 응답받은 예레미야가 애굽에 가지 말라(렘 12:10-17)는 하나님의 응답을 전했을 때 그들은 무어라 했습니까?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는 애굽에서 살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너를 부추겨서 우리를 대적하여 갈대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죽이며 바벨론으로 붙잡아가게 하려 함이라”(렘 43:1-3). 때로는 내 생각이 더 좋은 방법인 것 같아 보일 때도 있습니다. 나의 생각이 더 합리적인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이니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이 말씀을 순종하기가 힘들고 어려워도 맡긴 자에게는 능력을 더하실 줄 믿고 말씀에 순종하고 직무에 순종하는 것이 경외하는 자세입니다.
3. 주는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는데서 부터 출발합니다. 어느 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헤롯 당원들을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참되시니 거짓말하지 않으실 줄 압니다” 하고 전제한 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옳지 않은 일입니까?”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만약 바치라하면 반 민족 반 애국자가 되고 바치지 말라하면 반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대답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입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야합니다. 이것은 국민의 의무입니다. 국방, 교육, 근로의 의무와 함께 국민은 납세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의무입니다. 재물 중에는 십일조와 첫 열매가 하나님의 것이요(레 27:26,30) 이레 중에는 주일 하루가 하나님의 것이요(출 20:9-11) 우리가 사는 집들 중에는 성전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것과 내 것을 구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구별하지 않고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살면 더 복되겠으나 불행히 모두 내 것으로 알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는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과 내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27장을 좀 더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께 아주 바친 물건은 사람이건 기업이건 생축이건 밭이건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한 것이라고 했습니다(27:28). 그러므로 다시 팔지도 못하고 이것으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도 없다 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서 하나님께 구별한 것을 임의로 변경했던 사람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는 하나님의 것을 거룩히 구별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한 농부는 암소가 새끼를 낳는데 난산이었습니다. 그 농부는 안타깝게 기도하였는데 다행히 암소는 새끼를 무사히 나았습니다. 그것도 새끼 두 마리 쌍둥이를 낳은 것입니다. 농부는 너무 기뻐서 아내와 가족에게 달려와 가장 좋은 암소가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한 마리는 붉고 한 마리는 흰 송아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송아지 두 마리를 같이 잘 길러서 때가 되면 그중 한 마리를 팔아서 주님께 헌금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농부의 아내는 그가 주께 바치겠다고 하는 송아지가 어떤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일에는 신경 쓰지 말아요. 우리는 두 마리를 같이 길렀다가 때가 되면 우리가 말한 대로 합시다.” 그 후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남편이 매우 거북한 얼굴로 들어왔습니다. “난 당신에게 나쁜 소식을 전해야 하겠소.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어요.” “나는 사실 언제나 흰 놈은 주님 것이라고 생각하고 길렀는데 그만 그 흰 놈이 죽었어요.” 우리의 삶에서 언제나 죽는 것은 주님의 송아지입니다. 돈이 없어 곤란을 겪게 될 때 우리들이 삭감하는 첫 번째 항목은 하나님께 바칠 헌금이요. 시간이 부족할 때 맨 처음 깎이는 것도 주님께 기도드리는 시간이요. 주일 예배드리는 시간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평안가족 여러분, 새해는 우리가 가졌던 처음 신앙을 회복합시다. 무엇보다도, 새해에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복된 한해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일 낮 예배 뿐 아니라 오후예배 수요예배시간은 하나님께 드릴 시간임을 기억합시다. 이것이 주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멈추지 말고 앞으로
신 6:1-14 / 박조준 목사
지난 주말에 전주에 가서 집회를 하고 어제 밤에 돌아왔습니다. 몸은 좀 피곤하지만 제 마음 은 감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가 어려움을 당할 때 전국 각지에 계시는 성도들이 저를 위 해서 너무 간절히 기도해 주시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회만 주시면 어디든지 한 번씩은 가서 인사라도 드리며 그 큰사랑의 빚을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 싶은 것이 저의 심정 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성도들이 모이는 곳에는 어디나 피곤하고 지쳐 보이는데 첫 시간 보다 나중에 끝날 때는 놀랍게 변하는 모습을 보는 일입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라고 믿 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모세가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던 구약 성경의 이 야기를 읽었습니다. 이 얘기에는 참으로 기막히고 관련 깊은 비유가 많이 있습니다. 약속의 땅 에 들어가는 데에 네 가지 매우 절실한 위험이 있고, 그 위험은 수 천년 전의 일이면서도 오늘 도 우리에게 같은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의 광야 생 활을 지나서 가나안 국경까지 왔습니다. 하나님께 얼마나 순종하느냐 하는 것이 시험받는 단계 에 이르렀습니다. 모세는 자기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백성들의 장래를 염려했고, 일단 작 별 인사를 하며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함께 가지 않을 작정이었기 때문 에 모세의 어조는 단호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 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 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 효가 심히 번성하리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러분,이 말씀을 들으시면 무엇을 느끼십니까? 모세는 그의 영혼을 다 쏟아 붓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살게 될 때 그는 함께 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열렬히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고, 그를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섬길 것을 당부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데 도사리고 있는 네 가지 위험 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보다 지도자를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가 얼마나 분명하게 백성들의 관심을 자기에게서부터 하나님께로 돌리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모세는 약속된 땅 가나안을 차지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애굽에서 가나안 국경으로 인도하기까지 모세는 너무너무 중요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중요성은 점점 감소 되고 있었습니다. 얼마 안있어서 모세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질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 님은 그곳에 계시며 이들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은 이들 곁을 떠나지 않으실 것입 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죽을 때에도 하나님의 것은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지도 자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돕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형성해 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 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우리가 약해질 때 지도자들이 우리를 격려해 주고, 우리가 넘어질 때 힘을 북돋아 준 때문이라고 말해도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도자가 아무리 뛰어나고, 안목이 넓고, 모범적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전체 계획에 없어서는 안될 중심 인물은 아닙니다. 그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보다 더 크게 지도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지도자 를 존경하는 것은 좋지만 애정과 관심의 중심이 되어 버리면 하나님의 의도가 방해를 받습니 다. 가령 축구팀의 경우를 보세요. 우승을 거두고 선수간에 사기를 돋궈 주는 것은 팀웍입니다.
특출한 선수가 있는 팀은 그 선수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존중하지만, 우승을 얻는 것은 다양 한 기술로 이루어진 하나의 팀이 하는 것이지 한 사람의 힘만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는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지속적이고 의미 있는 깊은 관계를 다져 나가기 위해서는 이 시점에서 바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 엘 사람들은 이 일을 잘해냈습니다. 만일에 이스라엘 백성이 여기에서 초점을 잃었다면 모세가 손을 뗐을 때 여호수아가 그 임무를 이행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였던 모세는 백성들의 충성을 자기에게서 하나님께 돌림으로 여호수아의 일을 덜 어 주었습니다. 지도자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자칫 잘못하면 그 지도자를 하나님보다 우위에 두기가 쉽습니다. 이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기보다는 세속적인 권력의 자리나 직위에 역점을 두게 되기 때문에 일체감을 형성하는 데 큰 방해가 됩니다. 한 목자 안에 있는 양 떼가 되도록 단결을 조성시켜 주는 것이 바로 주님의 힘입니다. 그러나 지 도자가 더 돋보이는 막강한 자리를 차지하면 이 집단은 연합되기보다는 분산이 되고 말 것입니 다. 그렇게 볼 때 모세는 너무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집중되 어 있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주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둘째, 궁극적인 목표보다는 눈앞의 편익에 시선을 두는 일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가운데 모 세의 지혜로운 충고를 들어보세요.
본문 6∼10절입니다. 오늘날 내가 네가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 호로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해이한 상태로 주저앉아서 앞날의 일은 될 대로 되겠지 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이 그래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군사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그래서는 안되며 그럴 수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근면함과 부지런함과 건전한 가정 생활 그리고 솔직하고 아주 자연스러운 의사 소통이 쓰여져 있습니다. 이런 것이 주가 되지 아 니하고는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이 세상이 험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돕고, 서로 밀어 주고, 붙들어 주고, 서로를 아껴 주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가만히 보면 가나안 땅 에 들어갔다고 해서 이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약속의 땅에 정착하면서부터 가르치고, 이야기하고, 묶어 주고, 힘써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궁극적으로 목표보다는 눈앞의 편익에 초점을 두고 그저 편안하게 살려고 했다면 얼마나 쉬웠겠습니까? 더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지냈기 때문에 그 몸이나 정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이 사실을 미리 아셨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출발하지 않으면 저희는 혼란에 빠질 것이고 목표도 흐려지고 말 것입니다. 갑자기 폭발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썩어들어 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가정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아직도 그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까? 바쁘고 피곤해서 편리함과 타협하고 대치하지는 않았습 니까? 그러기가 너무 쉽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초대교회같은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목표가 흐려지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상처받은 심령을 가지고 오는 사 람이 정말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공한 사람보다는 실패한 사람, 이 긴 사람보다는 진 사람이 와서 새로워지고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 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상처 입은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이 마음의 치료를 받고 용기를 얻도 록 도와줄 열의가 있습니까? 우리의 목표가 흐려지면 안됩니다. 셋째,규모가 힘의 크기라고 생각하는 일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의 규모는 방대했습니다. 장정만 60만이고, 아녀자를 합치면 2백만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저희들에게 조 심하라 고 외쳤습니다. 그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에 다 왔습니다. 미래의 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옥한 땅, 넉넉한 물, 풍성한 과실나무와 포도밭, 저희들이 살게 될 훌륭한 집, 이 모든 것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 이하를 보세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 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 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 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말라 했습니다. 10절의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성읍 이란 말과 11절의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 라는 말과 12절에 있 는 너는 조심하여… 여호와를 잊지 말고 라는 말씀을 우리가 읽습니다. 이처럼 소가 많고 모든 성읍과 집이 다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힘의 보장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 2장 에 보면 6절과 7절 그리고 9절에 세 번씩이나 강하고 담대하라 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다시 말 해서 이들의 힘은 그 숫자나 재물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나 재물이 넉넉하다고 뽐내고 잘난 척하게 되면 악한 기운이 이 나라를 화공 약품처럼 부식하여 들어갈 것입니다. 가나안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방의 잡혼이라는 풍속 속에, 우상 숭배 속에, 여러 다른 형태 의 신앙의 변형 속에 특성을 잃어버린다면 이스라엘은 다 된 사람일 것입니다. 규모를 지나치 게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우리 모두가 주의해야 할 문제입니다. 자녀가 많다고 해서 한 가족의 힘이 강한 것이 아닙니다. 공장 건물이 많고 종업원이 많다고 해서 회사가 크다고 할 수는 없 습니다.
규모와 힘이 동의어는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이 많이 모이고, 재정이 넉넉하다고 해서 힘이 있는 것은 아닙 니다. 큰 교회는 힘이 강하지 못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크다고 해서 저절로 강해지는 것 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서로 힘을 합하여 가면을 벗어버리고 진실과 진실이 입맞출 때 교회는 힘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힘있는 교회가 되었고, 세상이 두려워하는 교회, 세상을 뒤집어엎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재벌이 있어서도 아니고, 권력자가 있어서도 아 니고,학자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서로의 힘을 모을 때 세상에 영향을 주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힘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1887년 봄 장님이요, 귀머거리인 동물 같은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서 알라바마주 터스컴비아 에 스무살짜리 가정교사가 도착했습니다. 그 가정 교사는 애니 설리반이었습니다. 학생은 헬렌 켈러였습니다. 이 둘은 나중에 존경받는 우정 관계를 맺었습니다.7살인 헬렌켈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짐승의 소리만을 지껄이는 야생마 같았습니다. 분노에 찬 아이는 식탁 위의 그릇들을 잡아 낚아채고, 집어 던져 버리며, 자신도 방바닥에 나뒹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 애를 천 치라고 말했습니다. 가정교사 설리반을 몇 주일 동안 헬렌켈러의 작은 손바닥에 글씨를 썼지만 그것이 하나도 의식 속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5월 5일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60년 이 지난 후에 그날의 일을 헬렌켈러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우물가에서였습니다. 나는 펌프의 물이 나오는 통을 잡고 있었습니다. 설리반을 펌프질을 하고 있었고 물이 내 손위에 쏟 아질때 내 다른 손에다가 설리반은 물 이라는 글자를 썼습니다.
갑자기 이해가 되었습니다. 병 을 앓고 난 후 처음 느끼는 기쁨에 사로잡혀 나는 항상 설리반의 손을 더듬어 찾고는 손에 닿 는 무슨 물건이든지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습니다. 의미의 섬광이 잇따라 손에서 손으로 흐르고 기적처럼 애정이 탄생했습니다. 우물가에서부터 두 사람은 헬렌 과 선생님 을 서로 부 르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애니 설리반은 헬렌이 천재임과 무한한 사고와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10살 됐 을 무렵 그녀는 불란서 말로 프랑스의 한 유명한 인사에게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얼마 안있어 헬렌은 5개 국어를 통달했고 선생이 생각도 못한 재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앤 설리반 의 헌신에 변화가 생겼습니까? 아닙니다. 헬렌의 친구요, 격려자로 만족하며 헬렌이 위대한 사 람이 되게 해주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친구가 성장할 여지를 주었습니다. 설리반의 전적 헌 신은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넷째, 내일을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영광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 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보세요. 우 리의 힘과 용기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말씀하여 주십니다.새로운 사령관 여호수아는 고 개를 돌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여호수아서 1장 11절에 진중에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예비하라 삼일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얻게 하시는 땅을 얻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했습니다. 멈추지 말고 허락 하신 땅을 얻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입니다.
과거의 포근하고 따스한 영광에 머물러 있지 말고 새로운 각오로 미래를 맞으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던 때를 생각하고 홍해를 건너던 때를 회상하며, 마음 평안히 한 가하게 기념비를 세우고 역사를 담은 성지를 짓는 데 시간을 보내서는 안되었습니다. 허리를 졸라매고 허락하신 땅 가나안을 점령하는 데 도전해 나아가야 했습니다. 어려움이 많아도 낙심 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힘을 다해 앞으로 전진해야 했습니다. 일할 것이 아직도 많이 있는데 현 상 유지를 위해 안일하게 앉아있다면 이것은 치명적인 일입니다.
그런 교회나 개인은 신선하고 창의적이고 활력있는 교회나 개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전진 아니면 퇴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앞에는 허락하신 약속의 땅이 펼쳐져 있습니다. 멈추지 말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래야 교회가 살고 개인이 살고 나라가 삽니다.
계속 전진합시다
신명기 6:1-15 / 박조준 목사
그 동안 여러분께서 기도해주셔서 두 주간 동안 미국 시애틀에서 모인 목회자 수련회와 샌디에고에서 모인 연합성회를 은혜 중에 마치고 무사히 돌아오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미국 목회자 수련회가 이번이 네 번째인데, 세계지도력개발원(GCLI)에서 주관하는 세미나가 아주 좋다는 소문이 퍼져서, 이번 시애틀 세미나에는 옆의 도시 타고마와 오레곤주의 포트랜드, 그리고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목사님들이 오셨습니다. 개회는 호텔에서 했지만, 너무 여러분이 참석하셨기 때문에, 이웃 연합교회를 빌려서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샌디에고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미항이요 기후가 좋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미국에서도 은퇴하신 분들이 많이 가시는 좋은 곳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지역 교역자들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연합성회가 샌디에고 교민 역사상 가장 잘 모이고 은혜 받은 성회가 되었다는 현지인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더구나 이번에 제가 떠나 있는 동안 우리 한국에서는 세계 60억 인구의 잔치인 월드컵이 열리고, 더구나 우리의 간절한 기대였던 16강뿐 아니라 8강 아니, 4강에 진출하게 된 것은 우리로서는 흥분되는 일이요, 민족적인 사기가 앙양되는 자랑스러운 계기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이 좋은 분위기가 계속 이대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한다면 하는 민족입니다. 그렇게 수백만 명의 시민이 거리를 메웠지만 안전사고 하나 나지 않고, 사람들이 다녀간 자리의 뒤처리까지 잘해서 한국 사람이 훌륭하다는 사실을 세계인에게 보여주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 한국 민족은 대단한 민족입니다. 자랑스러운 국민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서 가나안으로 향하던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주시기로 약속한 땅에 들어가는 데 위험이 있었습니다. 이 위험은 물론 수천 년 전 이스라엘 민족이 직면한 것이지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같은 위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의 광야생활을 지나서 가나안 국경까지 왔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얼마나 순종하느냐 하는 시험의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모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보다 그의 백성들의 장래를 염려했습니다. 모세는 이제 약속의 땅에는 들어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것을 육감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조가 단호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 이하를 보세요.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 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모세는 그의 백성을 위하여 그의 영혼을 다 쏟아 붓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살게 될 때 그는 함께 하지 않을 것을 알고,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길 것을 당부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데 도사리고 있는 네 가지 위험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을 향해 계속 전진하는 데 방해가 되는 첫 번째 위험은 하나님보다 지도자를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가나안 국경으로 인도하기까지 모세는 없어서 안될 중요한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얼마 안 있어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앞에서 사라질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을 자기에게서부터 하나님께로 돌리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그들을 떠나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지켜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곁을 결코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죽을 때에도 하나님의 것은 아무것도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도자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돕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형성해 나아가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약해질 때 지도자가 우리를 격려해줍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 힘을 북돋아줍니다. 우리가 방황할 때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도자가 아무리 뛰어나고, 안목이 넓고, 모든 방면에 모범적이고, 정열을 가지고 지도한다 하더라도 하나님보다 앞설 인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보다 지도자를 더 크게 사랑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우리가 지도자를 존경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애정과 관심의 중심이 되어버리면 하나님의 의도가 방해를 받습니다.
이 지구상 60억의 잔치인 월드컵이 우리 나라에서 개최되고 있고, 이제 그 종반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축구는 세계인의 경기가 되었습니다. 가령 축구팀의 경우를 보세요. 2002 월드컵에서 우리 대표팀이 기대 이상으로 선전해서 8강이 아니라 4강에 오르게 된 데는 우선 히딩크 감독의 용병술을 꼽는데, 그것은 어느 주전 선수에 모든 기대를 건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술의 팀웍을 강조한 것 아닙니까? 각자의 특성과 장기를 살려서 투입한 것이 주효한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기는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지속적이고 의미 있는 깊은 관계를 다져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 바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일을 잘 해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여기에서 초점을 잃었다면 모세가 손을 뗐을 때 그의 대를 이어 여호수아가 지도자의 임무를 수행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였던 모세는 백성들의 충성을 자기에게서 하나님께 돌림으로 여호수아의 일을 덜어주었습니다.
지도자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6절에 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지도자를 하나님보다 위에 두면 이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전에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따랐습니까? 사람들 중에는 그가 바로 기다리는 메시야라고 생각하고 그를 따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때 세례 요한은 분명히 자신의 신분을 밝혔습니다. "나는 메시야가 아니다. 그분은 내 뒤에 오신다.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합당치 못할 자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위대한 점입니다.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도 그 앞에 엎디어 절하는 사람을 보고 붙들어 일으키면서 "나는 신이 아니요. 당신들과 같은 사람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잘못된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기보다는 세속적인 권력의 자리나 직위에 역점을 두기 때문에 일체감을 형성하는 데 큰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한 목자 안에 있는 양떼가 되도록 단결을 조성시켜주는 것이 바로 주님의 힘입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더 돋보이는 막강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이 집단은 연합되기보다는 분산되고 맙니다.
그렇게 볼 때 모세는 정말 지도자로서의 훌륭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는 백성들에게 그들이 주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을 향해 계속 전진하는 데 방해가 되는 두 번째 위험은, 궁극적인 목표보다는 눈앞의 편익에 시선을 두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서 6절 이하를 보세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해이한 상태로 주저앉아서 '앞날의 일은 될 대로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살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근면함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부지런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건전한 가정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의사소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삶이 주가 되지 아니하고 이 험한 세상을 바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험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돕고, 서로 밀어주고, 서로 붙들어주고, 서로 아껴주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해서 이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정착하면서부터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이야기하고, 서로 묶어주는 일을 힘써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궁극적인 목표보다는 눈앞의 편익에 초점을 두고 그저 편안하게 살려고 했다면 얼마나 쉬웠겠습니까? 더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지냈기 때문에 그들의 몸과 마음은 모두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출발하지 않으면 저들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고 목표도 흐려지고 말 것입니다. 갑자기 폭발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썩어들어 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 가정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아직도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까? 바쁘고 피곤해서 편리함과 타협하고 대치하지는 않았습니까? 보통으로는 그러기가 쉽습니다. 사람들은 힘든 것보다는 쉽고 편한 것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된 교회입니다. 이 목표를 향해 지금까지 걸어오고 있습니다. 계속 이 목표를 향해서 전진해야 합니다. 상처받은 심령을 부둥켜안고 나오는 분들이 정말 치유 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실패한 사람이 나아와 승리의 확신을 얻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낙심한 심령이 나아와 새 소망을 가지게 되는 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갈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심령이 나아와 생명의 길을 찾게 되는 감격스러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힘없는 교회가 아니라 힘있는 교회, 능력 있는 교회, 성령이 충만한 교회, 세상을 뒤집어엎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목표를 향해 계속 전진합시다.
우리가 가나안 땅을 향해 계속 전진하는 데 방해가 되는 세 번째 위험은, 규모가 힘의 크기라고 생각하는 일입니다. 사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의 규모는 방대했습니다. 장정만 60만이고 아녀자를 합치면 적어도 200만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많은 숫자가 행진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조심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때의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 도달했습니다. 미래의 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옥한 땅이 있었습니다. 넉넉한 물이 보였습니다. 풍성한 열매가 맺은 과일나무, 포도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 민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0절 이하를 보세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고 했습니다.
10절의 '네가 건축하지 않은 성읍'이란 말과 11절의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라는 말, 그리고 12절에 있는 '너는 조심하여… 여호와를 잊지 말고'라는 말씀을 우리가 읽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물건이 많이 준비된 집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힘의 보장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 1장 6절과 7절, 그리고 9절에 보면 세 번씩이나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들의 힘이 그 숫자나 재물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방의 잡혼이라는 풍속에 빠지고, 우상을 숭배하고,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신앙의 변형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특성을 잃어버린다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존재 의미는 상실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조심하지 아니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조심하여… 여호와를 잊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저와 같이 세계지도력개발원 강사로 수고하시는 이필재 목사님은 이민교회 목회자로서 소위 성공하신 분 중에 한 분이십니다. 이 목사님이 20여 년 전 미국에 가실 때 1불은 고사하고 동전 한푼 없이 어느 권사님이 비행기표 사주어서 미국에 가시게 되었습니다. 비행장에 내리니까 전화를 해야 데리러 나오는 분이 있겠는데, 전화할 돈이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지금 제게 돈이 전혀 없어서 전화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전화할 수 있는 돈을 벌게 해주세요" 하고 눈을 떴더니, 어떤 아주머니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서 큰 짐을 가지고 움직이지 못해서 고생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분께 찾아가서 "저는 미국에 유학 오는 학생입니다. 지금 전화할 돈이 없는데, 제가 짐을 목적지까지 날라다 드리면 돈을 주시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아주머니가 그러라고 해서 짐을 운반해드렸더니 4불을 주시더래요. 그걸 받아 가지고 미국생활이 시작이 되었는데, 이제는 큰 교회를 담임한 목사로 부족함 없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20여 년 전 미국 갈 때 입었던 옷, 셔츠, 넥타이를 그대로 간수했다가 1년에 하루는 꼭 그 옷을 입으시면서 고생스럽게 시작한 미국 생활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넉넉한 환경 속에 지내다 보면 가난하던 때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이 많이 모이고 재정이 넉넉하다고 해서 꼭 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가 힘을 모으고, 가면을 벗어버리고 진실과 진실이 입을 맞출 때, 교회는 힘이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힘이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두려워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뒤집어엎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재벌이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권력자가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학자가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서로의 힘을 모을 때 세상에 영향을 주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도 힘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을 향해 계속 전진하는 데 방해가 되는 네 번째 위험은, 내일을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영광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의 힘과 용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는 고개를 돌려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말합니다. 여호수아 1장 11절에 보면 "진중에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예비하라 삼일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얻게 하시는 땅을 얻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멈추지 말고 허락하신 그 땅,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계속 전진하라는 명령입니다. 지난날의 포근하고 따뜻한 영광에 머물러 있지 말고 새로운 각오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날 때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던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허리를 졸라매고 허락하신 땅 가나안을 점령하는 데 도전해 나아가야만 했습니다. 물론 계속 전진하는 데는 어려움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전진해야만 했습니다.
일할 것이 아직도 많이 있는데 현상유지를 위해 안일하게 앉아 있다면, 이것은 치명적인 일입니다. 그런 사람, 그런 교회는 신선하고 창의적이고 활력 있는 사람이나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전진이 아니면 퇴보합니다.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2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좇아가노라."
사도 바울의 성공적이고 승리적인 삶의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갔습니다. 우리가 이 격변하는 세상에서 창조적으로 적응하면 승자가 되고, 적응하지 못하면 역사의 지각생이 되고 패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의 자랑스러운 우등생이 되고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초지일관의 정신과 시종여일한 태도로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승리는 쉬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우리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 옆에는 수많은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한없는 소망이 있습니다. 계속 전진합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을 다 차지하시기를 바랍니다.
가르치기 전 몇 가지 전제들
신 6:1-5 / 지태일 목사
오늘은 두 번째 말씀으로 교회에서나 가정에서의 가르치는 사역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디서나 잘 가르쳐야 하고 배우는 사람은 잘 배워야 합니다. 잘 배울 때 인생도 공부도 특기도 악기도 잘 다루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교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님니다. 신앙의 가르침도 잘 배워야 바른 신앙생활하게 되고 바른 신앙생활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은혜와 축복을 영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르치는 사역자들, 교역자나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있어서, 또한 가정에서는 부모로서 자녀에게 꼭, 절대적으로 가르치는 사역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어떻게 가르치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무엇을 가르치냐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여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은 4절과 5절에 나오는 쉐마(Shema: "들으라!"라는 뜻)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생명과 같이 아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가르쳐야 할 가장 근원적이고 원천적인 교육의 근본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생명과 같이 여기며 가르쳐야 합니다. 본문 6-9절까지의 쉐마 말씀은 다음 주일에 나누기로 하고, 오늘은 이 쉐마의 말씀을 가르치기 전 중요한 몇 가지 전제들의 말씀을 1-5절까지를 통하여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1) 1절을 보면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어디에 가서 횅해야 활 말씀입니까? 다름 아닌 요단강을 건너 들어 갈 약속의 땅 가나안을 말씀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스라엘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 살 사람들에게 주시는 귀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축복의 땅에서 복되게 살려면 바로 하나님의 말씀속에 있습니다. 말씀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바로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살게 될 모든 우리 성도들에게도 행하여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있든지 마지막 어려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갈 우리, 은혜와 축복을 받은 성도들은 그곳에서 행해야 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소유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냥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속에서 그 축복이 시작되고 소유되는 것입니다.
2) 다음의 2절의 말씀을 보면, "너만 지킬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나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말씀하십니다.
자녀 교육의 일차적 책임은 학교나 교회나 정부나 교육부에 있지 않고 부모에게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긴 책임이 무엇인지를 철저히 인식하고 출발합니다. 결국 내 자녀교육의 책임자는 ‘나’라는 인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육부가 어떻다, 학교가 어떻다, 선생님이 어떻다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자녀교육의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고 하십니다. 그 책임은 부모가 모범이 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들은 이 아침에 자녀교육에 대한 새로운 마음과 자세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모된 나에게서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다음이 아들이요 달이요 손자손녀입니다.
나는 부모로서, 교사로서 먼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비록 손해를 보면서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습니까? 자녀들은 20여년 동안 가정에서 부모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부모님은 저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순종하려 애쓰는구나.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강한 인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위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할 사람이 없고 천국에 가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성공적으로 행복하고 축복되게 사는 것은 아무나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자기 자신을 철저히 훈련해가는 그런 사람, 그런 가정, 그런 자녀들이 이 땅에서 번창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 열쇠는 바로 어머니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삶의 모습 속에서 자녀들이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서 목사님 내외를 초대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모처럼 모시는 목사님 내외를 위해 깨끗하게 집안 청소를 하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좋은 그릇과 잔을 꺼내어 식탁을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목사님이 식사기도를 막 시작하려는데 9살 난 딸아이가 그만 물 잔을 넘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식탁이 엉망이 되었지요. 그런데 옆에 있던 7살 남동생이 누나를 도와주려고 벌떡 일어서다가 자기 물마저 쏟았습니다. 어머니가 어쩔 줄 몰라서 아이들에게 화를 내려고 하자 상황이 심각한 것을 눈치 챈 아버지가 일부러 자기 잔을 쏟아버렸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도 자기 잔을 쏟았어요. 그걸 본 목사님 내외도 잔을 쏟아버렸습니다. 6개의 잔이 모두 쏟아졌으니 엉망이 되었지만 한 바탕 웃고 나니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버지의 지혜를 보고 아이들이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라난, 영적인 수준에서 성숙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 때 만약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딸의 뺨이라도 때렸다면 그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목사님 모시고 함께 하는 축복의 자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참 여유 있고 아름다운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3) 다음 2절 중반절을 보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라고 했습니다. 평생토록 해야 할 일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것,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가르쳐야 합니다.
전12:13절을 보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아버지 되신 하나님, 긍휼과 자비로 끝까지 참고 인내하시며 우리로 구원에 이르도록 역사 하시는 하나님,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되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야 할 것을 교훈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명령을 지킬 것입니다. 억지나 두려움이 아닌 사랑과 존경과 즐거움으로 주님이 내게 하신 말씀을 명령으로 지켜 그분께 영광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4) 2-3절을 보면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순종해야 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2절 중반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켜 행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말씀하심니다.
3절에서는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삼가라는 말씀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말씀을 준수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행할 때 받게 되는 복이 바로 “네 날이 장구해지고 복을 얻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번성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장구해진다는 말씀은 수명이 양적이기보다는 질적으로 평화롭고 행복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민족적으로도 흥왕할 것을 말씀합니다. 더 나아가 전 인류적으로 구속사적으로 영적 가나안, 새하늘과 새땅에서의 영생을 누립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축복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날이 장구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맏고 약속의 땅에서 번성하기를 축원합니다. 그 비결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데 있음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신앙인들의 삶이 증명합니다.
여기 2절에서 귀하게 보여지는 말씀은 바로, 그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 자체가 바로 축복입니다. 우리는 축복의 개념을 넓게 확대시켜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이루고, 알려지고, 성공하고, 건강하고 이 같은 축복도 축복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축복임(2절)을 가르쳐야 합니다.
무엇인가 이루고, 알려지는 것을 강조한 것은 유교 문화의 폐단입니다. 입신양명주의(立身揚名主義)라고 합니다. 지난 달 5.31 선거를 치르었습니다만 그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들만이 애국자요 훌륭한 것 아님니다. 당선자들만 축하를 받고 그 나머지는 쓸모없는 사람들입니까? 아님니다.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다가 떨어진 사람들에게도 박수와 격려를 보내야 합니다. 무조건 다 당선이 되어야 하고 출세하고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님니다. 이러한 출세지향적인 삶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던 조선시대에 과거시험에는 부정이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공산주의가 특히 목적 달성을 강조합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아무런 수단이든지, 사람의 생명조차도 파리목숨보다 못하게 여기고 죽입니다. 심지어는 어떤 폭력 혁명도 좋다고 합니다.
다음 주 12일부터인가요? 2006년 독일 월드컵이 시작됩니다만 모든 나라마다 보이지 않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경기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폭력까지도 동반되는 그런 경기입니다. 모든 나라 선수들이 16강에, 8강에, 4강에 드는 것, 이기려하고 이겨야 좋지요.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경기하는 과정도 중요합니다. 정정당당하게 페어플레이어 정신을 가지고 경기를 하고 공정한 결과에 대해 받아들이고 순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나라 선수들은 지고 돌아오면 언제 총 맞아 죽을런지 모른답니다. 자살골 하나를 먹은 그 국가대표 선수는 자기 나라에 돌아가 테러를 당하고 총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수들도 어떻게 반칙을 써서라도 이겨야 하고 이기려한다는 것입니다.
운동을 하든, 사업을 하든, 자녀든, 건강이든, 물질이든 꼭 잘되는 것만이 하나님 축복 아님니다. 말씀대로 살면서 일하고 공부하고 사업하고 직장다니고 하는 것,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그 자체가 복이요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는 것, 그 과정 자체가 축복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들은 에배하는 이 시간 우리는 축복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한 주간의 삶도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며 드려지는 예배 자체가 복입니다. 그 가운데 물질을 구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지혜를 가지고 얻었습니다. 하는 예물 진정한 축복입니다.
5) 4절을 보면, 쉐마: 이스라엘아 들으라: 자녀들은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부모님들은, 가르치는 사역자들은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 하나님은 한 분 뿐이시다는 것입니다. 4절에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이 말씀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니"가 원문에 가까운 번역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오직 주님만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십계명 가운데 제 1계명이고 십계명 가운데 십계명입니다.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다른 신을 섬기지도 말고 만들지도 말고 절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소한 일인 것 같지만 "하나님"이라는 말이 우리의 모국어인 한국어에 있는 것은 커다란 축복입니다. 유일신 사상을 이렇게 간단하고 명료하게 압축한 이름을 갖고 있는 나라는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많은 공박을 받습니다. "표준말이 아니고 특수한 종교용어이다", "문법적으로 틀렸다, 하나라는 수사(數詞)에 어떻게 님이라는 존칭어미를 붙일 수 있느냐?" 유일신 한분이신 하나님보다 범신론적으로 “하느님이라고 해야 한다". 여러 가지 주장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말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오직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내놓으시는 하나님, 이제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이 유일신 신앙을 부지런히 가르쳤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외우게 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 바알신을 비롯해서 많은 가나안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우상숭배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만을 섬기며 신앙공동체로서, 하나님의 택하신 나라와 거룩한 백성들로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도 바벨론의; 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포로생활은 하나뿐이라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갖고 자기를 포로로 잡아간 우월한 민족이 섬기는 신을 섬기게 하기에 딱 좋은 것이지만 그런 유혹을 이기게 해 주었습니다. 느브갓네살왕이 만든 신상앞에서, 뜨거운 풀무불 가운데서도 하나님만을 믿었습니다. 채소만을 먹으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사자굴에서도, 바벨론의 방백들이 다니엘을 시기모함하여 왕의 어인이 찍혀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만을 섬기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에 세 번씩 전에 행하던대로 하나님께만 기도하였습니다. 다니엘이나 세친구나 모두 승리하였습니다.
로마가 전 세계를 장악하고 통치하고 있을 때는 황제숭배를 강요당했지만 기독교 성도들은 그 무섭고도 잔인한 순교를 당해가면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섬김으로 이기게 해 주었고 나라없는 백성으로 2000여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도 자기들의 나라, 동족, 신앙, 문화를 잊지않았고 타국에 동화되지 않게 해 주었습니다.
만일에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니" 이 신앙이 없었더라면 이스라엘은 자금까지 존속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가들은 이스라엘은 조그만 나라이지만 유일신 사상과 예언자 정신으로 인류 정신문명사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일신 신앙으로 자신들의 신앙이나 나라와 민족 다 지키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바로 그 유일신 신앙이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 주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니" 이 사실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서 자녀들이 이것을 따르게 될 때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은 지켜주십니다. 간데마다 보호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유혹을 받지 않게 됩니다. 방황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 전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들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이시다" 이 사실을 부지런히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너는 그 하나님만 믿고 바라고 살아야 한다!" ♬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귀를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여 주만 바라볼찌라... 주만 바라 볼찌라.
월드컵 이야기 하나만 더 하지요. 다음 주부터 2006년 독일 월드컵이 시작됩니다. 각 나라마다 선수들마다 보통 일이 아님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님니다. 4년전 4강까지 올라갔던 나리입니다. 연일 우리 선수들의 소식이, 응원 열기가, 오늘 밤에는 마지막 평가전이 있습니다. 온 국민의 관심이 5.31 선거기간에도, 이제 복잡한 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이제 국민적 관심입니다. 토고는, 스위스는, 프랑스는 관심이 보통 아닙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런 내용보다 축구를 하는데 있어서 만일 축구 공이 하나가 아니고, 둘이라면, 아니 셋이고 넷이라면 그 경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경기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한 선수가 공을 따라 가고 있는데 다른 공이 앞지르면 따라가던 공을 버리고 그 공을 쫓아가야 하고 골키퍼는 어느 공을 방어해야할지 몰라 쩔쩔 매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를 든 것이지만 오늘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면 이런 모습이 엿보입니다. 공 여러 개 가지고 축구 경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따라 가다가 저것을 따라가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이 세상이 혼란스러운 이유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좇아가며 따라가야 할 공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의 운동장에서 우리 성도가 쫓아가야 할 공이 하나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행4:12말씀처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받을 만한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믿음으로 받는 줄 믿습니다. 여기 저기 몇 개의 공이 있으면 경기를 제대로 치를 수 없습니다. 타종교나 불교 유교 물질 명예 쾌락 권력.... 우리가 좇아야 할 공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날 종교다원주의 사상처럼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를 우리를 구원하실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 102장,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아멘. 믿습니까?
특별히 월드컵 별이라할까요? 절정은 결승전입니다. 누가 어느 나라가 결승에서 이길 것인가? 결승전이 벌어지면 전 세계 사람들의 40-50억의 사람들의 시선이 축구공 하나의 행방에 집중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전 세계의 이목을 하나로 집중시키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월드컵 결승의 축구 공 하나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90분 동안 선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보는 관중들 모두 다른 곳에 시선을 두지 않습니다.
응원도 좋고 중요하지만 응원보러 가는 것 아님니다. 모든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은 바로 작은 공 하나, 직경 30센치도 안되는 작은 공 하나에 전 세계의 모든 시선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월드컵의 묘미입니다. 그 공이 골대를 향하여 들어가느냐, 이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그 하나님께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 한 분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심이 선포되어지고 가르쳐져야 합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섭리하시고 거룩하시고 자비하신 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심을 먼저 내가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하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아름다워집니다. 장엄해집니다. 역동적인 삶이 됩니다. 이러한 놀라운 승리의 귀한 삶들이 연속적으로 역사하실줄 믿습니다. 아멘.
이것을 부지런히 가르치라
신 6:1-9 / 지태일 목사
우리가 자녀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유산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재산상의 유산을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얼마나 물려줄 수 있을까? 형제가 몇 명인데 누구는 얼마 누구는 얼마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벌써 계산을 다 끝낸 분들도 있을 것이고 혹 어떤 분들은 우리는 물려줄게 별로 없는데 하면서 걱정을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좀 있어서 나누어 줄것이나 아니면 좀 없어서 걱정하는 그런 것들보다 성경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 줄것을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것을 교훈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자들은 많고 매우 다양합니다. 교회의 목사나 주일학교 교사들이나 여러 부서에서 가르치는 지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가르치는 교사중에 최고의 교사는 누구냐? 무슨 교사과정을 이수하거나 전문직으로 가르치는 교사는 아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교사중 최고의 교사는 부모님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낳았을 뿐 아니라 함께 하는 시간도 가장 많고 그 누구도 좇아갈 수 없는 사랑을 가지고 눈물로 땀으로 가르치는 교사가 바로 부모입니다. 부모를 통하여 전해지고 가르쳐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 진정한 유산이 됩니다. 비록 현재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멀리 있다고 하여도,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할지라도 그들이 어릴 때에 부모로부터 배웠던 하나님의 말씀은 섬광과 같이 그들의 기억 속에 떠올라 결국은 그들을 올바른 믿음의 길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그렇다고 게으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을 어려서부터 가르치고 교훈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좀 어려우면 교회의 도움을, 주일학교 교사들의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휼륭한 하나님 말씀의 교사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일학교에 보내야 합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 찬송가 가사를 고백하고 쓴 사람은 바로 존 뉴톤이라는 목사님(John Newton, 1725-1807)입니다. 이 분이 목사님이 되기 전까지 20여년 동안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서 방황하고 죄 짓고 방탕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사람도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중해 연안에서 장사를 하던 한 상선의 선장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고는 11살 때부터 아버지의 배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불행했던 그의 어린 시절과 거친 선원 생활로 그의 삶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포학한 그의 성격과 부도덕한 그의 생활에 아버지도 손을 들고 그를 내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온갖 죄를 저지르며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던 뉴톤은 끝내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이 가망 없던 사람이 어쩌다가 우연히 구해 읽은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라는 책을 읽고 그의 삶은 급격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일찍이 어머니의 품에서 배웠던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유명한 존 뉴톤목사님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떠나 멀리 타락 방종할 때 밑바닥에 떨어져 방황하던 인생을 건져주신 하나님, 그렇게 절망적 인생이었던 자신이 어머니를 통하여 교훈해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 새로운 삶의 소망을 찾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절망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다시 일어설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인생의 방황을, 신앙의 방황을 끝낼 수 있습니까? 시시때때로 밀려오는 인생의 어려움, 시험속에서 굳건히 승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살리는 것도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도 그 심령에 불을 붙이는 역사도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은혜의 방편이 바로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어머니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는 나이 39세 때 목사가 되어 버킹범에서 16년을, 영국의 케임브리지에 있는 “올니(Olney)”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27년간, 죽을 때까지 목회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일반 교육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아이들은 공부 벌레가 되어야 하고 또 현실이 그렇게 공부하는 기계를 만들고 있기도 합니다. 늦은 저녁 시간에 오다보면 옆에 지나가거나 같이 서있는 일반학원이나 영어학원 버스 속에서 책을 보는 아이들 하나 둘, 거의 다 피곤해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측은하고 안스러 보입니다. 방과 후의 몇 곳의 학원과 과외 공부하느라고 또 예능교육한다고 보통 몇곳의 학원을 다니는 실정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의 과외비를 벌기 위하여 직장 생활을 하고 아이들 모르게 파출부가 되기도 하며 정도가 넘친 경우이지만 남의 것을 훔치다 붙들려 뉴스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가르쳐서 대학을 보내면 다 됩니까? 어떻습니까? 세상 교육이 어떠합니까? 오늘의 세상 교육은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 아니라 기능인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미 교육현장에서는 인간의 기본 윤리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고품질의 지식은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미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진 냉혈 동물화 되어가고 있다는데 깊은 우려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엊그제 청주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학부모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TV에 비춰진 모습은 오늘의 교육현장이 얼마나 일그러졌는가를 단면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학부모들의 고성이 반말로 오고가고 교장선생님도 무마하려고 내가 책임지고 사표를 내겠다고 하니 여선생님은 울면서 어쩔줄 몰라합니다.
평소 여자 담임 교사가 학생들에게 점심을 빨리 먹도록 강요했다며 항의합니다. 식사 시간을 지키지 못한 학생에겐 벌을 주고 반성문도 쓰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헛구역질하고 해서 먼저는 담임 여교사의 집을 찾아가 항의하고 이어 다음 날에 다시 학교를 찾아와 선생님에게 사표를 내라고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학부모들의 과격한 성토에 한참을 울먹이던 여교사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결국 울면서 문제가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서 무릎을 꿇고 사과합니다.
담임 교사의 잘잘못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학부모들이 찾아가 사표를 종용하고 교사의 무릎을 꿇게 하는게 과연 잘하는 일인지. 서로가 있을 수 없는 일들을 서슴없이 쏟아냅니다. 그렇게까지 항의하고 비인격적으로 행동하던 학부모들이 다음 날에는 다시 사과문을 써 올리고 한다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히고 오늘의 부모님들이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는 것을 보면서 오늘의 학교 교육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어떻게 하면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우리 선생님들을 존경받는 자리로 올려드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 사회와 교유계, 학부모와 학생들과 선생님 자신들이 다시 한번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느 분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한글을 읽을 수 있다면 선생님 덕분 아님니까? 악보를 보고 찬양을 할 수 있다면 음악 선생님 덕분이고, 가계부를 정리할 수 있다면 수학 선생님 덕분이고, 영어를 한 마디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어 선생님 덕분입니다. 선생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기술이나 전문 지식을 갖고 직장 생활을 원만하게 하고 있다면 선생님들 덕분입니다. 제가 목사가 된 것도 신학교나 교회의 목사님들, 교수님들 덕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요 선생님들의 큰 수고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이런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많은 선생님들 중에 자녀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고 위대한 선생님은 바로 부모님입니다. 이 땅에는 부모님보다 더 훌륭한 선생님은 없습니다. 유대인은 부모가 최고의 선생이라는 것을 3,500년의 역사를 통해서 증명한 민족입니다.
노벨상 수상자 중 30%가 유대인이라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니다. 유대인 인구는 1천 5백만 정도, 서울시 인구보다 약간 많습니다. 땅은 현재 강원도만한 땅으로 우리 남한에 비하면 1/4정도도 안되는 그런 국토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4-5백만 정도 밖에 안됩니다. 나머지 유대인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인도 등 전 세계에 퍼져 살고 있습니다. 2,000년 동안이나 자기 나라도 없이 살아온 유대민족이 어떻게 그 많은 노벨상을 탈 수 있었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부모님의 자녀 신앙교육입니다. 유대인 부모의 자녀교육을 살펴보면,
첫째로, 유대인은 자녀들을 탁월한 지성을 가진 아이들로 키웁니다.
어릴 때부터 창의력과 비판력을 길러줍니다. 유대 어린이들이 토라를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책상을 가운데 놓고 마주 앉아서 성경을 읽으며 토론을 합니다. 랍비들도 큰 홀에 둘씩 마주 앉아 마치 싸움하듯 성경에 대해 자기의 해석을 주장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그 의견에 반박하고 또 자기주장을 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할 때까지 서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공부가 끝나면 서로 털고 일어나 같이 웃고 친구로 지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정확하게 이해시키기 위해 그런 적극적 공부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런 식의 교육이 가정에서 그대로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저녁 식사 후 가정예배 시간에 아버지가 아내와 자녀들을 앉혀 놓고 성경공부를 합니다.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해줍니다. 우리 같은 주입식 교육으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으로 갔어”라고 하지 않고, 자녀들에게 “아브라함이 어디서 태어났지?” “우르!”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뭐라고 멀씀 하셨지?”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요.” 그러면 “복의 근원이 뭐지?” 이런 식으로 도전하여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깨닫도록 훈련시킵니다. 이것은 자녀들이 성장해서 집을 나갈 때까지 계속되는 아버지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유대 아이들이 머리가 좋고 천재가 많은 것입니다.
둘째로, 유대인의 가족에는 영적인 경건성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장성하여 집을 떠날 때까지 부모의 기도를 들으며 자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아이를 하나님의 지혜와 판단력으로 가득 채워주옵소서. 이 아이가 하는 일마다 번창시켜 주옵소서. 리더십을 주셔서 많은 사람들을 돕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옵소서.” 모든 것을 말씀에 비추어 교육하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영적인 경건성이 없을 수 없습니다.
셋째로, 도덕적인 기초가 있습니다.
정직과 성실함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진실하게 살도록 자녀들을 훈련시킵니다. 십계명과 토라를 암송하며 자라는 그 아이들의 가슴에는 도덕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 이 하루도 진실하게 하소서 이 하루도 정직하게 하소서...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넷째로, 가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아버지는 아내를 칭찬하고 축복합니다. 자녀를 칭찬하고 축복합니다. 잠언 31: 28절에 보면 현숙하고 복된 아내는 남편의 칭찬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아내나 자식 자랑을 하면 뭐하고 하지요? 팔불출이라 하며 이상하게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내나 자식을 칭찬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칭찬하는, 칭찬받는 그런 성경적 문화로 바뀌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랑을 표현하게 합니다. 아버지가 예배를 인도하며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축복하고 사랑을 표현하며 기도합니다.
다섯째로, 세대차이가 가장 적습니다.
자녀와의 불화는 세대 차에서 오는 것이 많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나이든 어른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단한 불행입니다. 유대 사회에 세대차이가 적은 이유는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만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문화도 아니고 할머니의 문화도 아니고 아들, 딸의 문화도 아닌, 하나님의 문화 안에서 매일 만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보편적 문화와 가치와 제도와 신앙 안에서 모두 만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하는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3,500년 전에 만들어진 십계명에 오늘날보다 더 심오하고 현실적인 가치들이 들어있습니다.
여섯째로, 이혼율이 제일 낮은 민족입니다.
가정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적, 영적, 도덕적인 모든 성품들이 가정에서 형성됩니다. 그 가정의 원만한 모습 속에는 반드시 아버지가 있습니다. 나는 돈이나 벌어다 줄 테니 자식교육은 엄마가 책임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가정의 중심에 자리 잡고 가정을 영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이혼율은 50%를 육박하고 있습니다. 근래의 통계는 10쌍중 5쌍 이상이 이혼을 하고 있습니다. 부부가 살다가 사별외에는 갈라서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이혼이 다반사입니다. 이혼율이 세계 3위에서 2위로 뛰어올랐다고 합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가정이 그만큼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미국 이민자들의 자녀 가운데 25-34세의 미혼 여성이 타민족과 결혼하는 비율을 보면 한국이 미국내 여러 민족중 1위라고 합니다. 한국계가 71%, 일본은 68%, 필리핀 65%, 중국 56%, 베트남 33%라고 합니다.
왜 그러면 이렇게 많은 한국의 딸들, 이 미혼 여성들은 대부분 똑똑하고 수준 높은 미모와 학벌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한국 남자들과 결혼하려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집안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하는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에, 한국 남자와 결혼했다가는 어머니와 같은 지겨운 결혼생활을 하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스승의 주일에 우리 모두가 우리 사회나 가정을 놓고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유태인 부모들의 자녀교육을 보면서 부모보다 더 위대한 스승은 없습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교사는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 교육에 있어서 너무 중요한 존재입니다. 자녀에 대한 책임과 중요성은 부모에게 있음을 보여줍니다.
신명기6:1절을 보면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 바”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자녀 교육의 일차적 책임은 학교나 교회나 정부나 교육부에 있지 않고 부모에게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긴 책임이 무엇인지를 철저히 인식하고 출발합니다. 결국 내 자녀교육의 책임자는 ‘나’라는 인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육부가 어떻다, 학교가 어떻다, 선생님이 어떻다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자녀교육의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들은 이 아침에 자녀교육에 대한 새로운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 책임은 부모가 모범이 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신6:2-3).
제일 먼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살아야 될 사람은 “너” 자신입니다. 그 다음이 “네 아들”과 “네 손자”입니다. 순서가 있습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비록 손해를 보면서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습니까? 자녀들은 20여년 동안 가정에서 부모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부모님은 저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순종하려 애쓰는구나.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강한 인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위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할 사람이 없고 천국에 가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성공적으로 행복하고 축복되게 사는 것은 아무나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자기 자신을 철저히 훈련해가는 그 사람, 그 가정, 그 자녀들이 이 땅에서 번창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 열쇠는 바로 어머니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삶의 모습 속에서 자녀들이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서 목사님 내외를 초대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모처럼 모시는 목사님 내외를 위해 깨끗하게 집안 청소를 하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좋은 그릇과 잔을 꺼내어 식탁을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목사님이 식사기도를 막 시작하려는데 9살 난 딸아이가 그만 물 잔을 넘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식탁이 엉망이 되었지요. 그런데 옆에 있던 7살 남동생이 누나를 도와주려고 벌떡 일어서다가 자기 물마저 쏟았습니다. 어머니가 어쩔 줄 몰라서 아이들에게 화를 내려고 하자 상황이 심각한 것을 눈치 챈 아버지가 일부러 자기 잔을 쏟아버렸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도 자기 잔을 쏟았어요. 그걸 본 목사님 내외도 잔을 쏟아버렸습니다. 6개의 잔이 모두 쏟아졌으니 엉망이 되었지만 한 바탕 웃고 나니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버지의 지혜를 보고 아이들이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라난, 영적인 수준에서 성숙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 때 만약 아버지가 딸의 뺨이라도 때렸다면 그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참 여유 있고 아름다운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 먼저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목회자들이나 주일학교 교사들이나 기관에서 가르치는 사역자들을 존경하고 위로하고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b별히 자녀 교육의 교사중 교사는 부모입니다. 잘 가르치는 부모로서 우리의 본분을 다하는 아름다운 축복이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지런히 가르치라
신 6:1-9 / 김상복 목사
한국은 전통적으로 선비와 스승을 존경하는 좋은 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학자들과 선생님들을 높이 보고 있지요. 이번 새 정부도 많은 교수들을 임명해서 나라 일을 맡기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선생님들에 대한 존경심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많은 선생님들이 자부심을 잃고 있습니다. 저는 선생님들이 노조를 만들어서 자신을 노동자로 저하시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주먹을 흔들며 분노한 얼굴로 데모하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학부모와 학생들이 봐야 한다는 것은 사회가 많이 변하긴 했지만 대단히 마음 아픈 일입니다. 어느 교장선생님의 자살 사건은 이 문제를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시켰습니다. 이런 시기에 어떻게 하면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우리 선생님들을 존경받는 자리로 올려드리고, 사회와 학부모와 학생들과 선생님 자신들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이 한글을 읽을 수 있다면 선생님 덕분입니다. 악보를 보고 찬양을 할 수 있다면 음악 선생님 덕분이요, 가계부를 정리할 수 있다면 수학선생님 덕분이요, 영어를 한 마디라도 할 수 있다면 영어선생님 덕분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자동차 범퍼 스티커가 있어요. “이 범퍼 스티커를 읽을 수 있으면 선생님께 감사하십시오!” 아마 선생님의 자동차인 모양입니다. 여러분이 기술이나 전문지식을 갖고 직장생활을 원만하게 하고 있다면 선생님들 덕분입니다. 제가 목사가 된 것도 선생님들 덕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요 선생님들의 큰 수고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이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많은 선생님들 중에 가장 영향력 있고 위대한 선생님은 바로 부모님입니다. 이 땅에는 부모님보다 더 훌륭한 선생님은 없습니다. 유대인은 부모가 최고의 선생이라는 것을 3,500 년의 역사를 통해서 증명한 민족입니다. 노벨상 수상자 중 30%가 유대인이라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유대인 인구는 1천 5백만 정도, 서울시 인구보다 약간 많습니다.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4-5백만 정도 밖에 안됩니다. 나머지 유대인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인도 등 전 세계에 퍼져 살고 있습니다. 2,000년 동안이나 자기 나라도 없이 살아온 유대민족이 어떻게 그 많은 노벨상을 탈 수 있었을까요? 특별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유대인은 자녀들을 탁월한 지성을 가진 아이들로 키웁니다. 어릴 때부터 창의력과 비판력을 길러줍니다. 유대 어린이들이 토라를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책상을 가운데 놓고 마주 앉아서 성경을 읽으며 토론을 합니다. 랍비들도 큰 홀에 둘씩 마주 앉아 마치 싸움하듯 성경에 대해 자기의 해석을 주장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그 의견에 반박하고 또 자기주장을 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할 때까지 서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공부가 끝나면 서로 털고 일어나 같이 웃고 친구로 지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정확하게 이해시키기 위해 그런 적극적 공부방식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런 식의 교육이 가정에서 그대로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저녁 식사 후 가정예배 시간에 아버지가 아내와 자녀들을 앉혀 놓고 성경공부를 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으로 갔어” 라고 하지 않고, “아브라함이 어디서 태어났지?” “우르!” “하나님께서 그에게 뭐라고 하셨지?”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요.” “복의 근원이 뭐지?” 이런 식으로 도전하여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깨닫도록 훈련시킵니다. 이것은 자녀들이 성장해서 집을 나갈 때까지 계속되는 아버지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유대 아이들이 머리가 좋고 천재가 많은 것입니다.
둘째로, 유대인의 가족에는 영적인 경건성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장성하여 집을 떠날 때까지 부모의 기도를 들으며 자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아이를 하나님의 지혜와 판단력으로 가득 채워주옵소서. 이 아이가 하는 일마다 번창시켜 주옵소서. 리더십을 주셔서 많은 사람들을 돕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옵소서.” 모든 것을 말씀에 비추어 교육하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영적인 경건성이 없을 수 없습니다.
셋째로, 도덕적인 기초가 있습니다. 정직과 성실함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자녀들을 훈련시킵니다. 십계명과 토라를 암송하며 자라는 그 아이들의 가슴에는 도덕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넷째로, 가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아버지는 아내를 칭찬하고 축복합니다. 자녀를 칭찬하고 축복합니다. 잠언 31장에 복된 아내는 남편의 칭찬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아내나 자식 자랑을 하면 뭐하고 하지요? 팔불출이라 하며 바보 취급을 하지요. 성경은 아내나 자식을 칭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그런 문화는 성경적 문화로 바뀌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랑을 표현하게 합니다. 아버지가 예배를 인도하며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축복하고 사랑을 표현하며 기도합니다.
다섯째로, 세대차이가 가장 적습니다. 자녀와의 불화는 세대 차에서 오는 것이 많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나이든 어른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단한 불행입니다. 유대 사회에 세대차이가 적은 이유는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만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문화도 아니고 할머니의 문화도 아니고 아들, 딸의 문화도 아닌, 하나님의 문화 안에서 매일 만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보편적 문화와 가치와 제도와 신앙 안에서 모두 만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하는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3,500년 전에 만들어진 십계명에 오늘날보다 더 심오하고 현실적인 가치들이 들어있습니다.
여섯째로, 이혼율이 제일 낮은 민족입니다. 가정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적, 영적, 도덕적인 모든 성품들이 가정에서 형성됩니다. 그 가정의 원만한 모습 속에는 반드시 아버지가 있습니다. 나는 돈벌어다 줄 테니 자식교육은 엄마가 책임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가정의 중심에 자리 잡고 가정을 영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이혼율은 금년 상반기에 세계 3위에서 2위로 뛰어올랐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가정이 그만큼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미국 이민자들의 자녀 가운데 25-34세의 미혼 여성이 타민족과 결혼하는 비율을 보면 한국이 미국 내 여러 민족 중 1위입니다. 한국계가 71%, 일본은 68%, 필리핀 65%, 중국 56%, 베트남 33%입니다. 왜 이렇게 많은 한국의 딸들이 한국 남자들과 결혼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집안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하는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에, 한국 남자와 결혼했다가는 어머니와 같은 지겨운 결혼생활을 하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아직 약합니다. 이 미혼 여성들은 대부분 똑똑하고 수준 높은 미모와 학별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스승의 주일에 우리 모두가 우리 사회와 가정을 놓고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부모보다 더 위대한 스승은 없습니다.
자녀에 대한 책임은 결국 부모에게 있습니다.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 바”(신6:1)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자녀교육의 일차적 책임은 학교나 교회나 정부나 교육부에 있지 않고 부모에게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긴 책임이 무엇인지를 철저히 인식하고 출발합니다. 결국 내 자녀교육의 책임자는 ‘나’라는 인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육부가 어떻다, 선생님이 어떻다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자녀교육의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들은 이 아침에 자녀교육에 대한 새로운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 책임은 부모가 모범이 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신6:2-3). 제일 먼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살아야 될 사람은 “너” 자신입니다. 그 다음이 “네 아들”과 “네 손자”입니다. 순서가 있습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비록 손해를 보면서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습니까? 자녀들은 20여 년 동안 가정에서 부모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부모님은 저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순종하려 애쓰는구나.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강한 인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위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할 사람이 없고 천국에 가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성공적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무나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자기 자신을 철저히 훈련해가는 그 사람, 그 가정, 그 자녀들이 이 땅에서 번창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 열쇠는 바로 어머니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삶의 모습 속에서 자녀들이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서 목사님 내외를 초대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모처럼 모시는 목사님 내외를 위해 깨끗하게 집안 청소를 하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좋은 그릇과 잔을 꺼내어 식탁을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목사님이 식사기도를 막 시작하려는데 9살 난 딸아이가 그만 물 잔을 넘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식탁이 엉망이 되었지요. 그런데 옆에 있던 7살 남동생이 누나를 도와주려고 벌떡 일어서다가 자기 물마저 쏟았습니다. 어머니가 어쩔 줄 몰라서 아이들에게 화를 내려고 하자 상황이 심각한 것을 눈치 챈 아버지가 일부러 자기 잔을 쏟아버렸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도 자기 잔을 쏟았어요. 그걸 본 목사님 내외도 잔을 쏟아버렸습니다. 6개의 잔이 모두 쏟아졌으니 엉망이 되었지만 한 바탕 웃고 나니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버지의 지혜를 보고 아이들이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라난, 영적인 수준에서 성숙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 때 만약 아버지가 딸의 뺨이라도 때렸다면 그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참 여유 있고 아름다운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제가 37세에 워싱턴 신학대학에 교수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신입생 환영회가 있었는데 제가 기도를 맡았습니다. 주일 밤에 모든 신입생과 재학생, 교수, 학부모가 참석하여 행사를 시작했는데 저는 깜빡 잊고 참석을 못했습니다. 동양인 교수라고는 단 한 명인데 그 김상복 교수가 안 나타나서 기도순서가 빠진 것입니다. 백인들끼리는 티가 잘 안 날 수도 있지만 그 중에 끼어있는 황인은 금방 눈에 띄지요. 제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제 인생에 그런 일이 좀처럼 없었습니다. 다음날 ‘자, 이제 총장 얼굴을 어떻게 보나?’ 걱정을 하며 연구실에서 나오다가 좁은 복도에서 80세 되신 총장과 마주쳤습니다. “총장님, 어제 참석 못해서 너무 죄송합니다.” 저는 그 분이, “당신 그 자리에 안 나타나면 어떻게 해요? 당장 시말서 써요”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괜찮아요. 당신이 안 왔지만 우리끼리 재미있게 잘 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는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얼른 “고맙습니다” 하고 왔지요. 만약 총장이 “김 교수, 수업 마치고 내 방으로 오시오” 라고 했다면 제가 하루 종일 무거운 마음으로 지냈겠지요. 그 일은 1978년도의 일인데 저는 그 때 그 분에게 배운 교훈을 절대로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여유, 유머, 사람에 대한 배려. . . 시말서 열 장 쓴 것보다 더 큰 교훈이지요.
여러분, 교사나 부모뿐 아니라 모든 어른이 다 선생님입니다. 친부모뿐 아니라 기관의 기관장들, 교회의 어른들, 사회의 어른들이 다 선생님입니다. 부모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키고 살겠다고 하는 강력한 의지를 가슴속에 도장 새기듯이 새기고 각인 시키고 마음 판에 새기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 어른으로서, 선생으로서 다음 세대를 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도장 새기듯이 새기라 하였습니다. 둘째, 부모가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부모의 가장 큰 책임은 자녀를 잘 길러서 다음 세대가 우리 보다 더 낫게 만드는 것입니다. 셋째, 가정생활 중에 자나 깨나 움직일 때마다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교훈하고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집에다 하나님의 말씀을 써 붙여 놓으면서까지 부모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순종하며 산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도 집에 성경말씀을 붙여놓지요.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써놓고 그대로 실천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대로 모든 일을 기도로 처리하고 자식들을 그 기도에 동참시키는 모습을 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따라 부모의 입술에서 감사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자란 자녀들은 훗날 부모님이 안 계시더라도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가르쳐주신 그 교훈들을 느끼며 자기 자녀들을 똑 같이 키울 것입니다. 철저한 신앙교육은 우리와 우리 자손과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유대인들처럼 성공하는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입니다.
끝으로, 부모는 가장 좋은 선생님입니다. 부모와 교역자들과 교회학교 선생님들 모두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새롭게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가정의 영적 교육과 인격교육, 말씀 순종하는 일을 게을리 하고 살아왔다면 오늘 같은 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앞으로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 3대까지 철저하게 키우도록 노력하겠다는 새로운 헌신이 있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변하여 복된 가문이 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유일신앙
신 6:1-9 / 박지온 목사
우리가 상대방에게 사랑의 고백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을 할 때에 그 말 한마디에 따라서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하는 것하고, '당신도 사랑합니다!' 하는 것하고 여기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결정적인 순간에 고백을 해야 되잖아요. 그러면 '오직 당신 내가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결혼해 주십시오!' 이렇게 되어져야 됩니다. 그런데 '내가 당신도 사랑합니다!' 이렇게 하면, 자칫하면 뭐가 날아올 수 있습니다. 이 상당히 우리가 조심을 해야 되겠죠.
복음성가에도 보면 그런 가사가 있습니다. '너 어느 곳에 있던지 주만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그런데 이것을 바꾸어 가지고 '주도 바라볼찌라!' 그렇게 되어진다면 상당히 문제가 오겠죠. 딱 한마디 차이입니다. 한 단어차이! '주만, 주도!' 그런데 그 말 한마디에 따라서 우리에게 느껴지는 어떤 감동은 완전히 다를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신앙생활 속에서 얼마만큼 유일 신앙이 자리잡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또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러분들의 삶 속에 유일신앙이 얼마나 자리를 잡고 있느냐? 거기에 우리 자신들에 믿음의 분량이라고 볼 수가 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오직 복음!' 이것이 얼마나 되어 있느냐에 따라 가지고,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에게서 이러한 유일 신앙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오직 복음!' 이 사실이 되어져야 되는데, 어느 순간에 인가 세상이 지금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인가 자꾸만 우리의 욕심이나 우리의 정욕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유일 신앙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왜 갈등이 일어납니까? 저는 생각에 이러한 신앙의 갈등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되어지면 사실상 모든 갈등은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이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목사님, 먹고살아야 되고 돈도 필요한데 오직 그리스도 그래서 되겠습니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안되어서 그렇죠. 진짜로 제대로 복음이 되어지고, 오직 그리스도가 되어지면, 먹고사는 모든 문제는 채우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우리의 삶 속에 참 복음, 이 그리스도가 되어지면 먹고사는 모든 문제들은 붙여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오직 그리스도가 안되어지니까 자꾸만 갈등은 갈등대로, 또 세상 살아가는 것은 더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지금 신앙생활 자체가 힘들어지고 어렵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생각이 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설교를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했던 큰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뭐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질적으로 따라붙었던 것! 그게 뭐냐하면 불신앙입니다. 참 이스라엘 역사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이 완전히 망하는 그 순간까지, 그때까지 버리지 못했던 것이 뭐냐하면, 그게 그들의 불신앙입니다.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굶어서 망했습니까? 불신앙 하다가 망했습니까?' 그렇죠.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역사를 가만히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굶어서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만나로, 메추라기로, 생수로...
어떤 면에서 다른 곳에서 살 때보다 사실은 먹고사는 문제는 더 풍성하게 내려 줬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만나가 수두룩하게 앉아 있습니다. 본인이 게을러서 못 먹어서 그렇죠. 조금만 부지런하면 얼마든지 만나, 메추라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굶어서 죽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뭐죠? 불신앙 하다가, 그들이 40년 동안 철저하게 불신앙 하다가 망했죠. 절대로 굶어서 죽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어 줄 때에, 그 바로 왕이 이렇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저놈들이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서 저 광야 속에 들어가면, 거기는 먹을 것도 없고 제대로 살수 있는 곳도 없는데, 다 굶어죽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로의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나, 메추라기, 생수! 하나님께서 풍성 풍성하게 그들의 모든 삶을 그렇게 채워 주셨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불신앙입니다. 불신앙 하다가 그들이 완전히 망해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했습니까? 다른 이유가 아니고 불신앙과 더불어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뭐냐하면, 바로 이 우상숭배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 가장 큰 문제가 하나 닥쳐왔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이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됩니다. 두 가지 다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허용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이 두 가지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을 했습니다.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박수, 술객, 무당, 점쟁이를 한 명도 남김없이 다 진멸 해라! 절대로 살려두지 마라!' 여러분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사랑을 외치는 하나님께서 다 죽이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바로 그 이유는 그들을 살려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 그들이 섬겼던 우상의 세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어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섬겨야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우상에게 빠져갑니다. 그러니까 이미 그들이 망하는 그런 표적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너희들은 절대로 우상을 섬기지 마라!' 그래서 '박수, 술객, 점쟁이, 모든 무당을 한 명도 남김없이 다 죽여라!' 그게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사실 광야 40년은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광야는 더 이상 바라볼 것이 없습니다. 황량한 벌판이죠. 메말라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에 소망을 둘 수가 없습니다.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을 하면서 그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죠. 모든 우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알 신상을 위시해서, 몰록, 아스다롯, 아세라, 그리고 또 다곤 이러한 여러 잡다한 우상들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그 중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고민의 대상이 뭐냐하면, 바로 이 바알 신입니다. 다른 우상보다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밀접하게, 그러면서 가장 많이 섬겼던 우상이 뭐냐하면, 이 바알 신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 가나안 정착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역사가 완전히 망하는 그 날까지 바알 신은 함께 연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하면,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목생활을 했습니다. 양을 키우고, 소를 키우고 이렇게 돌아다니는 유목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정착을 하면서 사회 자체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무슨 사회로? 농경사회로! 농사를 짓는 농경사회로 완전히 이제 전환이 되어 졌습니다.
그런데 농경사회로 전환이 되면서 오는 문제가 뭐냐하면, 농사를 지으면 풍요를 기원합니다. '쌀이 잘되고, 또 보리가 잘되고...' 이런 풍성한 그런 곡식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 때문에 일어난 그들의 우상이 뭐냐하면 바로 바알 신입니다. 이 바알 신은 풍요, 풍성하게 하는 그런 신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민족들이 섬겼던 그 바알 신 있죠, 그 신을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그대로 받아 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바알과의 싸움에서 최고의 절정이 언제냐 하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아합 시대! 즉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했던 그 아합 시대 있죠. 그때에 이 바알 신이 극성스럽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왕궁 안에 바알 선지 생도를 키우는 그런 선지학교가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그때 당시 얼마나 우상이 난무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이 대목에 대해서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을 합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 상에 모여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언을 합니다.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너희들이 어느 때까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 끼여서 머뭇머뭇하겠느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느 때까지?' 여기서 '어느 때까지...'라는 이 말은 늘 그래왔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 딱 중간에 끼여 가지고, 때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또 어떤 때에는 바알 신을 섬기고, 그래서 싹 눈치를 보다가 어느 곳에 조금 유리하면 하나님께 붙었다가, 때로는 바알에게 붙었다가...
그래서 엘리야가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들이 언제까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 끼여서 머뭇머뭇 하겠느냐! 하나님을 택하던지 아니면 바알을 택하던지 둘 중에 하나를 결단해라!' 속된말로 '하나님도 좋고 바알도 좋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다리 걸쳐서 그렇게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민족 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민족 신으로 섬기고, 그리고 바알은 농사를 지었을 때에 풍요를 기원하는 그런 마음으로 그 신을 섬기고, 그래서 항상 둘 사이에 끼여서 이쪽 저쪽 눈치를 봤던 것이, 그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했던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불신앙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두 가지를 가만히 보시면 단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유일신앙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불신앙 했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이 안 되었다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우상을 숭배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다른 것을 바라 봤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말씀을 드리면, 그들에게 유일 사상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들의 실패가 찾아왔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양다리를 걸쳤다가 망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청년 유도고입니다. 바울이 말씀을 강론하는데 이 유도고가 어디에 올라갔느냐 하면 창문틀 있죠, 거기에 올라가 가지고 한 다리는 세상으로, 그리고 한 다리는 은혜 받는 장소로... 은혜 받는 장소이면 은혜 받는 장소고 아니면 아예 뭐 나가든지... 그 창문에 끼여 가지고 한 다리는 세상으로, 한 다리는 은혜 받는 장소로, 결국에는 꾸벅꾸벅 졸다가 떨어져서 죽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그게 유도고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이렇게 어정쩡하게 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세상을 향해서 나가다가, 그러다가 뭔가 좀 힘들고 어려워지면 또 하나님 찾다가... 그래서 '세상도 좋고, 하나님도 좋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뭔가 좀 깊이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과연 내 자신의 신앙에 본질이 어떤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습니까? 때로는 세상으로 나가지 않습니까? 때로는 뭔가 좀 잘못되면 그때서야 또 돌아오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 자신들이 약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신앙상태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세상으로 나가려고 하니까 뭔가 하나님께서 막 두들겨 팰 것 같고, 그래서 겁이 나서 제대로 못 가고, 그리고 교회 안에 있자니 뭔가 좀 답답하고, 그래서 세상도 좋고 하나님도 좋고... 지금 이런 모습으로, 어정쩡한 그런 모습으로 지금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이러한 우리 성도들을 향해서, 이런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모세가 중요한 선포를 합니다. 특별히 4절에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지금 모세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일신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뭐냐하면,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시니!' 이 메시지를 듣고 있는 대상들이 누구입니까? 지금 이스라엘 2세들이죠. 곧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해야 될 이스라엘 2세들에게 이 모세가 뭐라고 선언을 했느냐 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다!' 유일신앙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뭐라고 했느냐 하면, '들어라!' 이 '들어라!'하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쐬마'라고 합니다. '쐬마!' 이스라엘이여 들어라! 쐬마! 이 말은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고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너희들이 이 메시지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살아난다!' 그래서 '쐬마!' 들으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이 되어졌을 때에 살아났습니다. 유일신앙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을 때에 그들에게 엄청난 축복이 내렸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 유일 신앙이 되지 못했을 때에, 자꾸만 세상으로, 육신으로, 우상숭배로, 더 나아가서는 불신앙으로 빠져 갔다는 사실입니다.
이 신명기 서는 모세의 유언적인 설교입니다. 이제 모세는 더 이상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거든요.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그 가나안을 지금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후대들 있죠. 2세들입니다. 이 2세들에게 '너희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가르쳐 주겠다! 그 길이 뭐냐하면 유일신앙이다! 오직 하나님, 오직 복음! 이 사실이 되어질 때에 여기에 너희들이 살아나는 역사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 내용이 뭐냐하면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라!' 여러분 이것이 되어졌을 때에 이스라엘이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이 유일 사상이 되지 못했을 때에 그들에게 엄청난 고통이 밀려 왔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의 삶 속에 어느 정도 이 유일 신앙이 자리잡고 있습니까? 얼마나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오직 복음과 오직 그리스도가 되어질수록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 복음이 제대로 되지 못한 만큼 자꾸만 갈등은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어느 자리에 서 있습니까?' 오늘 이 사실이 반드시 확인이 되어져야 됩니다. 나중에 시간이 있으시면 여호수아서 24장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이 여호수아서 24장을 읽어보시면 이제 말년을 당한 이 여호수아가 모든 자기네들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자리로 불러모으는 그런 역사를 감행을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호수아와 더불어서 처음에 막 가나안땅을 점령해 나갈 때는 더 이상 다른 것을 바라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서로 정복을 해야 되고 그러니까, 그런 위기와 문제 속에서 전적으로 여호수아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문제가 왔습니까? 가나안 땅을 다 정복하고 어느 정도 평안하게 되었을 때에, 그때에 몰려 들어온 것이 뭐냐하면 우상입니다.
이 여호수아는 이제 세상을 떠나갈 시간이 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니까 불안하거든요. 왜냐하면 모든 주의 종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오직 복음, 오직 하나님! 이게 되어져야 되는데, 지금 그런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 몰록, 아스다롯, 아세라, 다곤, 여러 잡다한 이런 우상을 지금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두령들, 모든 대표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선언을 했습니까? '너희들이 아모리 사람이 섬기는 그들의 신들을 택하던지, 아니면 하나님을 택하든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결단해라! 그러나 나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노라!' 이게 여호수아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될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잡다한 모든 세상 우상에 빠져 가지고,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그런 어리석은 자리로 전락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고 떠나려고 하는 그런 여호수아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래서 '너희들이 아모리 사람들이 섬기는 신을 택하던지, 아니면 하나님을 택하던지 둘 중에 하나를 해라! 그러나 나와 내 가정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노라!' 그때 모든 백성들이 회개를 했습니다. '우리도 당신이 섬기는 그 하나님을 섬기겠나이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축복이 회복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보시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한번은 제가 시카고에 전도캠프를 갔을 때에 그때 어떤 청년 하나가 제게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왜 기독교는 기독교만 고집합니까? 너무 독선적이지 않습니까! 세상에 수많은 종교들이 있는데, 불교도 있고, 그리고 천주교도 있고, 이슬람교도 있고, 많은 종교들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기독교는 예수만 믿으라고 그렇게 고집을 합니까?' 그런 질문을 제가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전도현장에서 전도하시다가 이 질문을 받았을 때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은 심심치 않게 대두가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을 하시겠습니까? 한마디로 다른 길이 없습니다.
만일 길이 여러 갈래가 있다면 이쪽도 택할 수 있고 저쪽도 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길이 하나라면 그 길 외에는 없거든요. 다시 말하면 살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이 땅에 진리가 여러 가지가 된다면 사람들은 헤깔립니다. 어느 길을 따라가야 할는지 헤어깔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진리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오직 그리스도!
여러분 어느 정도 이 그리스도가 되어 있습니까? 이 그리스도가 된 만큼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다른 길이 없습니다. 지금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참 진리 되신 이 그리스도를 놓치고, 이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자꾸만 다른 잡다한 것들에, 심지어는 우상 숭배 속에 자꾸만 빠져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만이라도 제발 이 사실을 바로 깨닫고, 진짜로 우리 자신들을 유일사상 속에, 유일 신앙 속에 제대로만 세운다면 여기에 모든 축복이 회복이 되어지고, 또한 살아나는 이런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시면 변화산 상에서 베드로가 세분을 봤습니다. 예수님, 모세, 엘리야! 이 세분을 봤습니다. 특히 모세하고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흠모하는 최고의 존경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 변화 산상에서 예수님, 모세, 엘리야를 함께 봤거든요.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 여기에 초막 셋을 지읍시다. 하나는 주님을 위해서,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하나는 모세를 위해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그런데 조금 정신을 차려서 보니까 모세도 안보이고, 엘리야도 안 보이거든요. 나중에 여러분 성경에 확인해 보십시오. 거기 보시면 '엘리야도 떠나고, 모세도 떠나고, 오직 예수만 남았더라!' 그렇습니다. 엘리야가 아무리 좋고, 모세가 아무리 좋아도 우리의 주인은 아닙니다. 오직 저와 여러분들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이 얼마나 그리스도가 제대로 되어지느냐? 여기에 살아나는 축복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무엇 때문에 이 유일신앙이 무너지고 있습니까? 돈 때문에, 세상에 권력 때문에, 여러 가지 그런 화려한 명예 때문에, 지금 가만히 보십시오. 지금 성도들에게 제대로 유일신앙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물질과 명예와 권력, 모든 세상 것들 때문에, 이것 때문에 참 그리스도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갈등도 일어나고, 신앙생활 자체가 힘들고 어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여러분 대구에서 일어났던 U대회 사건 잘 아시죠. 저는 이 진행되는 상황을 보면서 한가지 참 어이없는 상황을 하나 봤습니다. 뭐냐하면 북한에서 응원단들이 많이 왔습니다. 아주 예쁜 여자들이 많이 왔습니다. 우리 대구의 남자들이 완전히 거기에 빠져 가지고 정신을 못 차리더라 구요. 그런데 이제 그들이 와서 숙소에 머물고 있는데, 그 숙소 앞에 플랜카드를 쭉 달아놨습니다. 내용이 뭐냐하면, '당신들이 온 것을 환영한다! 북한 선수단 환영!' 이래가지고 플랜 카드를 달아놓고, 그 플랜카드 바로 옆에 사진이 하나 걸려있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옛날에 김대중 대통령하고 김정일하고 같이 만나서 악수하는 장면 있죠. 그 그림이 플랜카드에 같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비가 많이 왔습니다. 자연적으로 그 플랜카드가 젖겠죠. 아무것도 모르고 아침에 일어난 그 북한 여자 응원단들이 그걸 바라보면서 질색을 하는 겁니다. '어쩌면 이럴 수 있느냐? 위대하신 우리 김정일 장군님이 비에 맞아 가지고, 이래서 지금 초춰하게 되었는데... 지금 남한 당국에서 뭘 하느냐?' 이래가지고 떼거리로 나와서 막 대모를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비 맞았는데...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 김정일 이가 비를 맞았다고 해 가지고, 그 플랜카드를 내려 가지고 손으로 딱고 입을 맞추고, 가슴에 앉고, 꼬이꼬이 접고, 그래가지고 들어가서 그 날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참 하여튼 히안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응원단에서 그들이 응원하는 것을 봤는데, 갑자기 김정일을 찬양하는 노래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수백 명의 응원단들이 그때부터 막 노래를 부르는데,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들을 줄줄 흘리면서, '위대하신 어버이 수령동지!' 이래가지고 '김정일 장군 만세!' 노래를 부르는데요, 여러분 누가 시켰다고 그렇게 하겠습니까? 엉엉 울면서 그렇게 찬양 아닌 찬양을 하더라 구요.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 주체사상! 한 사람을 저렇게 신격화하는 주체사상만 제대로 들어가도 저렇게 울고 떠는데, 과연 지금 내 속에 유일 신앙이 되어 있습니까? 오직 그리스도 이게 지금 내 삶 속에 되어 있습니까?' 저는 너무 충격적으로 그 사건을 받아 들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이 없이도 그들을 오직 김정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게 안되고 있습니다. 뭐 때문에 안 되느냐? 우리의 욕심 때문에,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우리의 명예 때문에, 내 자신의 이름 때문에, 항상 말은 복음이고 입은 복음인데, 우리의 중심이 오직 그리스도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유일신앙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이게 사는 길입니다. 초대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습니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적이 없느니라!' 이 유일 신앙이 제대로 들어갔을 때에 전 세계를 변화시키는 엄청난 역사들이 그 속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게 사는 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4절, 5절에 "(신 6:4)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아멘! '힘을 다하고, 모든 중심을 다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해라!' 왜? 그분은 하나이신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게 되기 위해서 6, 7, 8, 9절에 쭉 나와있습니다. '유일 신앙을 제대로 가지기 위해서 내가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세겨라!' 그렇죠. 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해라!' 더 나아가서는 '손목에 매라! 기호를 삼아라! 네 미간에 표로 붙여라! 심지어는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해라!' 뭐를요? '우리 하나님은 하나이신 하나님이다!' 유일신입니다.
오늘 이 유일 신앙으로 돌아갈 때에, 여기에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여러분들이 세상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저런 여러 어려운 일들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속에서도 여러분들이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을 붙잡아야 되지 않습니까! 다른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복음! 이 사실이 되어질 때에 여러분들의 모든 걸음걸음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언약의 말씀을 굳게 잡으시고 이번 한 주간도 승리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