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상옥은 수빈이와 함께 무
슨 일을 하다가 현식이나 현식이 부모님의 눈에 뜨이게 되면 무
슨 불량한 짓이라도 하다가 들킨 것처럼 당황하여 얼굴이 붉어지
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건 수빈이 쪽에서 더욱 심했
다. 더욱이 별 일도 없었는데 괜히 토라져 며칠씩 말을 하지 않는
다든가, 며칠이고 얼굴을 마주 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해진 것이
다 어느덧 서로 수치심을 갖는 나이가 된 것일까.
'상옥아, 요즘 저애 왜 저러니? 전에는 안 하던 짓을 하니 말이
야. 하여간에 계집애들 속을 통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혹시 네
가 아는 거 뭐 없니?"
현식이는 상옥의 얼굴을 뻔히 쳐다보며 '너는 뭔가 좀 알
고 있지' 하는 표정이다.
"야. 임마, 너 나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뭐 그래?"
"아, 아냐. 혹시 나 모르는 일을 네가 알고 있지 않나 해
서
"야, 어떻게 네가 모르는 일을 내가 알 수가 있어 임마. 원, 별
싱거운 놈 다 보겠네 이거 ."
상옥은 현식이의 말에 시치미를 뚝 뗐지만 내심으로는 짚이는
가가 있었다. 그건 현식이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누구나 한번씩은 거쳐야 된다는 사랑의 열병을 앓는 사춘기 ,
아름다운 단어이긴 하지만 그 시기에 처한 사람이 받는 고통이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아무튼 그들에게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찾
아오고 있었다 첫째, 공부가 싫어졌고, 그토록 왕성하던 식욕도
잃어버렸고, 세상만사가 귀찮아져 버린 것이다. 우리 인간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으며 나는 무엇 때문에 이 고생
을 해 가며 공부를 해야 하는가. 생각은 생각을 낳고 질문은 질문
을 낳고 시작도 끝도 없는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파고들다
보면 과연 나머지 인생을 살아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도
대체가 뒤죽박죽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성이 그리워질 때가 많
았다. 그 어디에 아름다운 대화라도 나누어 줄 상대는 없을까?
막연한 기대감에 무작정 거리를 쏘다니기도 수십 번,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그런 행운은 찾을 수가 없었다.
두터운 겉옷에 가린 여자의 알몸은 대관절 어떻게 생겼을까?
앞가슴이 볼록하게 솟아나와 있는 여학생의 얼굴을 마주 대하면
괜히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마저 콩콩 뛰었다. 마주 대하는 저 여
학생의 가슴도 어머니의 가슴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것일까. 머릿
속 한켠에서 그런 생각이 불쑥불쑥 머리를 어지럽혔다.
아마도 상옥은 그때쯤 첫 몽정을 경험한 것 같다. 황홀하기 그
지 없는 한순간이 지나면 끈적끈적하고 불결한 팬티, 여지없이 낯
뜨거운 죄의식(?)이 다가오곤 하였다.
상옥은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수빈이를 이성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성임에 틀림이 없었고 예쁜 것도 사실이었지만 몇 년
동안을 더불어 함께 자란 탓인지 신비스럽거나 베일에 싸인 존재
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귀엽고 예쁜 누이동생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그 무렵 상옥과 현식이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5여고 학생들과
알게 되었다. 그들은 같은 학년인 그 여학생들과 자연스럽게 어울
려 다니게 되었다.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여학생들과 만나
빵집 아니면 음악 감상실, 주말이면 산과 바다로 정신없이 싸돌아
다녔다.
중이 염불에는 정신이 없고 잿밥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고, 상옥
과 현식이가 바로 그짝이었다. 해야 할 공부는 뒷전이고 여학생들
과 어울려 다니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으니 학교 성적이 바닥
을 향하여 곤두박질 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상옥과 현식
이가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될 무렵 드디어 예견되었던 사고가 터
지고 말았다 결국 현식이 아버지가 그들을 안방으로 호출한 것이
다
'내가 웬만하면 말을 허지 않으려 혔는디, 느그덜 허'는 양을 보
자 허니 너무 심헌 것 같아서 한 마디 혀야 쓰겄다. 느덜 지금이
어느 땐디 가시내들이나 만나 히히덕거리고 싸돌아 다니냐? 느그
덜헌티는 인생 일대의 대사가 코앞에 닥쳐 있는디 그렇게 허송
세월을 해서야 되겄냐 이 말이여. 상옥아, 현식아. 뭐시던 다 때
가 있는 법이여 지금 느덜은 죽자사자 공부만 혀야 허는 때라 이
말이시, 그런디 해야 혀는 공부는 뒷전에 두고 가시내 뒤꽁무니만
쫄쫄 따라다니면 대학은 그냥 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냐? 어디 말
좀 혀 봐라."
상옥과 현식이는 그저 꿀 먹은 벙어리 모양 목을 길게 늘어 빼
고 있었다. 사실 입이 열 개라도 무슨 할말이 있었으랴.
'어찌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냐: 아. 헐 말이 있으면 혀
봐"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용서하여 주십
시오. 아버님 "
"그려, 느덜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빈다면 용서해야제,
옛말에도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 했는디 워쩌겄냐, 허지만도
이왕 말이 난 것잉게 느덜헌티 한 마디 헐 야기가 있다 상옥은
어려서 한학을 하였다 허니께 잘 알 것이다. 상옥아, 너 권
학문주자학(戮學脚朱子學)이라는 것을 알고 있제?"
아무래도 오늘의 정신교육은 길어질 것 같다. 현식의 아버지가
난데 없는 권 학문주자학을 들고 나오며 상옥에게 묻는 것이다
"예. 알고는 있습니다만
"오! 그러야, 그럼 오늘은 상옥에게 한문 공부 한 번 혀 보자
잉, 현식이 너는 건넌방에 건너가 수빈이를 불러오너라."
일이 점점 이상하게 풀려 가고 있었다. 수빈이를 부르러 나가는
현식이 눈초리가 묘하게 찌그러지며 상옥을 흘겨보았다 속으로
상옥을 원망하고 있는 것이 뻔했다. 새끼, 모르는 척 찌그러져 있
으면 간단하게 끝날 것을 괜히 아는 척해 가지고 일을 크게 만들
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나가는 현식의
표정을 보니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후 들어오는 수빈
이의 표정 또한 아닌 밤중에 홍두깨냐 하는 떫은 표정이다
"자, 이제 모두 모였으니 상옥 군의 권 학문주자학에 대
혀서 들어 보도록 허겄다. "
"예. 제가 아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勿滑今 不學而有來
(물위금일불학이유내일)이니 ,
오늘 배우지 않아도 내일이 있다고 이르지 말며,
勿滑學而有來今年不年
(물위 학이유내금년불년)이 라!
금년에 배우지 않아도 내년이 있다고 이르지 말라.
日 月 適矣歲不我延
(일월서의세불아연)이니 ,
날과 달은 가도 해는 나와 함께 늦어지지 않으니,
鳴呼老矣是誰之延
(명호노의시수지연)이라.
슬프다 하여서 후회한들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던가.
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이로학난성 )이니 ,
소년은 告기 쉽고 배움은 이루기 어려우니,
寸光陰不經
(일촌광음불가경 )이 라.
일초의 시간인들 가볍게 여기지 말라.
未覺池塘春草夢
(미각지 당춘초몽)이나,
연못가의 봄풀은 꿈을 깨지 못하니
牆前悟葉已秋聲
(장전오엽기추성)이라.
뜰앞에 오동잎은 이미 가을소리를 전하는구나, 라는 것입니다. "
얘기를 마친 상옥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거의 10여 년 동안 덮어두고 생각지도, 거들떠보지도 아니했던
것을 새삼스레 기억해 내려 하니 진땀이 안 날 수 없었다.
"그려! 그려! 아주 잘 혔다. 지금까지 상옥이 한 말이 권학문
주자학이라는 아주 훌륭한 성현의 말씀이시다. 한 마디로 요약허
자면, '젊을 적에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늙어 후회헌다:
말인 것이여. 이 좋은 말씀을 가슴에 새겨 두어야 쓸 것이다. 그
런디 보다 중요한 것은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이말이제. 그러니께 앞으로는 일분 일초를 헛되게 소일허지
말고 열심히 공부혀서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매진허기 바란다. 알
겄냐?"
예 명심하겠습니다. "
그들은 거의 2시간 여의 정신교육을 받고서야 안방에서 물러나
와 현식이의 방에 모였다. 먼저 현식이가 시비를 걸었다.
"야. 상옥아 너, 학교 그만두고 계룡산 들어가면 출세길 열릴
거다. "
"새끼. 뭐가 불만이냐. 감정 있으면 말해 임마, 시부렁거
리지 말고."
"그래 임마 너 잘났어, 뭐가 어째 임마 뭐, 계전오엽기추
성이라 뜰앞에 오동잎은 이미 가을소리를 전해, 오냐 너 잘났
어 임마. 가을 귀뚜라미 소리는 어디 가고 오동잎만 가을소리를
전하니 임마. 그래! 많이 즐기라구 오동및 소리 이 짜샤. 쓸데없
이 아는 척해 가지고 사람 생고생시키잖아."
"현식 오빠, 왜 그래! 옳은 말만 하던데 오빠들 맨날 그
렇게 농땡이치다가 한 번 되게 혼날 줄 알았다고. 어이,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뚫린 것 같아 속이 다 시원하다. 오빠 나 가요."
그들 모두가 똑같이 꾸지람을 들었지만 수빈이는 현식이나 상
옥과는 달리 생글거리며 빈정대는 게 이런 날이 있으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은 표정이었다. 수빈이는 상옥과 현식이를
놀려 주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야, 상옥아. 아무래도 수빈이가 이상하지 않니? 아무래도 수빈
이 농간이 분명한 것 같아, 아니면 저 애가 저럴 수가 없는 거야"
"이제 잊어버려. 모두가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거니까."
사랑에 빠지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바보들만이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하지만
그 낡아빠진 규칙들을 모두
깨뜨리려 내가 갑니다.
사랑은 매우 쉬운 것
사랑이 싹틀 때
상옥과 현식이는 그후로도 몇 번이나 똑같은 일로 하여 현
식 아버지의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상옥과
현식이가 갖은 수단을 다하고 완벽하게 계획을 세워 실행을 하였
는데도 그들이 데이트하고 들어온 날이면 어김없이 현식이 아버
지가 그들을 호출한다는 점이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건데 이것은 수빈이의 농간임에 틀림없
었다.
"야, 현식아, 우리가 맨날 치도곤을 당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
라 생각하니?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수빈이가 의심스럽단 말이
야."
"내 생각도 그렇긴 한데 근거가 있어야지. 그렇다고 아버
지께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정보원의 꼬리가 잡히고 말았다. 수업을
마치고 예의 5여고 여학생들과 정신없이 싸돌아다니다 집으로 돌
아온 상옥과 현식이 그날의 즐거웠던 순간들을 누가 엿들을 새라
소곤대며 키득거리고 있는데 수빈이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흥! 뭐가 그렇게 즐거워 미친놈들마냥 히히덕거리니?"
수빈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방문을 열어 젖히며 냅다 소리
를 질렀다.
"야! 유수빈, 너 지금 뭐라고 했니? 뭐, 미친놈들?"
현식이 발끈하여 일어섰다
'그래. 미친놈들이라 했다. 왜, 내가 뭐 말 잘못한 거 있니?"
"아니! 얘가 오늘 왜 이러나! 너 오늘 뭐 못 먹을 것 먹은 거
아니 니?"
"나 오늘 잘못 먹은 거 하나도 없는데 너희들 하는 꼬라
지를 보니까 하도 한심해서 그런다. "
'그으래! 그래 우리가 뭐가 그렇게 한심해 보이는데 "
수빈이 한심하다는 듯이 현식이와 상옥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래, 뭐가 그렇게 한심한 것인지 너희들 석두가 알기나 하겠
니 ?"
"야 수빈이 너 계속 반말로 지껄이는데 말 조심해 알았어?"
"반말! 반말 좋아 하시네 겨우 한 살 차이에
상옥과 현식이 너무나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엄동에 물 맞은
꼴이 되어 수빈이의 하는 양을 멍청히 바라볼 뿐이었다.
"느덜이 원채 돌머리라서 똥인지 된장인지 꼭 맛을 봐야 아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내가 이야기해 주지. 야! 김상옥, 유현식. 너
희들 입시가 얼마나 남았니? 앞으로 150일도 안 남았다. 그거 알
기나 하고 있는 거니? 느네들 조금 전에 히히덕대며 수군덕거리
던 소리 내가 다 들었는데 느덜 고따위로 해서는 대학은 벌써 물
건너 간 거야. 그래도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니? "
정말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토록 다정하고 이해심
많던 수빈이가 무슨 연유에서 인지 갑자기 발톱 세운 무서운 암코
양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너 정말 그런 식으로 비겁하게 놀 거니? 오빠들 이야기 엿듣
기나 하고, 옳아! 이제 보니까 아버지께 고자질한 게 모두 네가
한짓이구나 그렇지?"
'그래! 모두 내가 고자질했다 어쩔래?"
수빈이는 자기 할 말을 다하자 방문을 부서져라 닫고는 횡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가히 안하무인이었다. 상옥과 현식이는 닭
쫓던 개꼴이 되어 서로의 얼굴을 멋쩍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가 현식이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상옥이 곁으로 다가앉으며 물었
다.
"야, 상옥아! 수빈이가, 수빈이가 너를 좋아하고 있는 거 아닐
까?"
"뭐야? 수빈이가 나를 그러니까 네 말은 수빈이가 나를 짝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냐?"
"그야 알 수 없는 일이지 !"
"미친놈! 야 임마, 말 같은 소리를 해라 임마"
"아니야, 뭔가 냄새가 풍겨. 뭔가 있다구. 옛말에도 있지,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 그렇지 않고서야 저럴 수 없는 거잔아."
"현식아! 너야 말로 뭐 잘못 먹은 거 있니' 아니면 실성
을 했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잠이나 자라, 임마
야."
상옥은 현식이 말에 겉으론 태연한 척 그렇게 내뱉었지만 내심
으로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끼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
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상옥이 서울에 처음 상경하여
수빈이를 마주했던 순간의 설레임 어쩌면 상옥은 수빈에게 향한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야. 그런데 네 얼굴이 웨 갑자기 빨개지니?"
"뭐야? 내 얼굴이 빨개졌다구? 임마, 방이 더우니까 그런 거
지."
"새끼, 웃기고 있네. 내내 시원하던 방이 뭣 때문에 갑자
기 더워지냐? 임마"
상옥은 현식이와 한참 동안이나 입씨름을 벌이고 나서 잠자리
에 들었지만 잠은 오지 않고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찬바람이 쌩쌩 도는 것처럼 토라져 있는 수빈이의 화난 얼굴이
떠올랐다. 정말 수빈이가 나를 좋아하고 있단 말인가? 수빈이가
나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설마 그럴 리가그런데 지
금의 나는 수빈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그냥 동생
귀여운 여동생으로? 정말로 내가 수빈이를 이성으로서가 아
니고 동생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일까? 상옥은 그런 생각만 하다
가 한밤을 꼬박 새웠다.
"상옥아, 너의 결혼을 축하한다. "
"재욱아, 임마 너 지금 뭐라고 했니? 뭐, 결혼을 축하해? 누가
결혼을 하는데?"
"어라, 이놈 보게. 세상에 제놈 장가 가는 것도 모르는 멍
청한 신랑이 다 있네 "
"뭐야? 내가 결혼을? 그것도 오늘? 내가 누구랑 결혼을 하는
데"
'너 임마, 정말 누구와 결혼하는 것도 모르니?"
'그래 임마! 난 아무것도 모른다구, 그러니까 속 시원히 말 좀
해다오. 내가 누구와 결혼을 하는지 "
'정말 사람 환장하겠네, 이거 !"
"웃기지 말아, 이 새끼야. 사람 환장하는 거는 네놈이 아
니고 나란 말이야 "
"야! 너희들 이리 좀 와 봐라."
상옥과 티격태격하던 재욱이 자기로서는 도저히 대책이 없다는
듯이 멀리에 서 있는 친구들을 부른다. 재욱이 친구들을 불러 모
으자 여러 명의 친구들이 상옥 주위로 몰려든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주위에 몰려든 친구들이 상옥의 차림새를 보고는 아연실색이다
"아니 ! 이놈이 정말 야, 임마 네 꼴이 이게 뭐냐? 깡
통만 안 들었지 영락없는 거지꼴이 아니야. 이놈아, 시간 없어.
빨리 옷 갈아입으라구."
"야, 내가 결혼하는 거 정말이니? 내가 장가 가는 거 사실이냐
구?"
영문을 알 수 없는 상옥이 멍청한 눈빛으로 친구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 임마! 엉뚱한 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옷 갈아입고 식장으
로 가라구."
"이거 정말 사람 미치게 만드네 야, 너희들 지금 내가 귀
신에게 홀리고 있는 거니? 아니면 네놈들이 미치고 있는 거니?
아니 그래 좋다 네놈들 말대로 내가 오늘 결혼을 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분명히 신부가 있어야 할 텐데 나의 신부는 도대체 누
구란 말이니?"
"얘가 정말 사람 미치게 만드네 이거 누구긴 누구야 임마, 수
빈, 유수빈이 네 마누라 되는 거지 이놈아."
"뭐라구?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수빈이라 했니? 분명히 나의
신부가 쑤빈이라 했니? 분명히 유수빈이가 맞는 거니?"
상옥이 그의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채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저편 계단 쪽에서 백설보다 더 하얀 웨딩드레스에 화려하기 그지
없는 화관을 곱게 쓴 아름다운 신부가 두 손에는 한아름의 백합
을 들고 들러리의 도움을 받으며 상옥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아 저토록 아름다운 신부는 과연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천
상에서 하강한 선녀인들 저만큼 아름다울 수는 없으리라 정말 아
름다운 신부로다. 상옥은 넋이 나가 입을 벌린 채 자기 곁으로 다
가오는 신부를 바라보았다.
그 아름다운 신부가 가까이 다가오자 상옥의 눈이 튀어나오며
입이 하마처럼 벌어진다. '아니! 아니! 수빈이 아냐!'
신부 차림의 수빈이가 그의 앞에 왔을 때는 상옥은 이미 넋을
잃은 다음이었다.
"아니 상옥 오빠, 지금 뭐하고 있는 거예요? 옷차림은 그
게 뭐구요?"
'수빈아 네가 정말 수빈이니? 너, 정말 이쁘다. "
'그래요, 정말 수빈이에요. 싱거운 소리 그만 하시고 어서 준비
하세요. 시간이 없다구요."
상옥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자신의 얼굴을 꼬집어 보며 "이게
꿈이라면 깨지 말아다오'라고 중얼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한다.
"어서 예복 챙겨 입으시고 예식장으로 오세요."
"그렇지만 당장 어디 가서 예복을 구하니? 그냥 이대로 예식
올리면 안 될까?"
순간 예복 챙겨 입으라 재촉하던 수빈이가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은 상옥은 어떻게 하든 예복을 챙겨 입고 예식장
으로 가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상옥이 입을 수 있는 예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정말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던
가 친구들 틈새에 끼어 있던 재욱이 녀석이 새하얀 턱시도를 입
고 있었다. 제딴에는 친구의 결혼식 사회를 본답시고 제법 멋을
낸 것이었다. 상옥은 친구이자 처남이 된 현식이를 불러 전후사정
을 설명하고 재욱이의 턱시도를 벗겨 입기로 했다.
"야, 사회자, 나 좀 보자."
상옥과 현식은 재욱이를 불러 신랑 대기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야, 너희들 뭐하는 거야. 시간 없는데."
현식이가 다짜고짜 재욱이를 대기실 의자에 쓰러뜨리고 상의에
서부터 양말까지 모두 벗겨 상옥에게 던져주며 빨리 입으라 재촉
을 한다.
상옥은 현식이가 던져 준 재욱이 옷을 허겁지겁 주워 입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문도 모른 채 기습을 받아, 자신이 입었던 양복과 구두를 모
두 빼앗기고 대신 상옥의 허술한 의복으로 갈아입은 재욱이의 모
습은 조금 전까지는 말쑥하던 모습은 간 곳 없고 마치 털 빠진
수탉 꼴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상옥의 친구들이 배꼽이 빠져
라 웃는다.
'어휴, 좌우지간에 내 동생 수빈이의 앞날이 걱정이로구나!"
현식이의 능청을 뒤로 한 상옥이 서둘러 식장 안으로 달려가
보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수빈이, 아니 신부가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신부가, 수빈이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것이
다. 상옥이 놀라 둘러보니 그 넓은 식장 안에 하객이 단 한 사람
도 없었다. 상옥은 울부짖듯이 소리쳤다.
'수빈아 수빈아 내 색시 수빈아
으음
"어, 얼씨구. 놀구 있네. 야, 임마. 어서 일어나!"
현식이가 상옥의 엉덩이를 세차게 걷어찼다. 깜짝 놀란 상옥이
벌떡 일어나 보니 일장춘몽이다. 비록 꿈 속이기는 했지만 수빈이
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막을 내린 것이 어찌나 섭섭하고 분
하고 원통한지 상옥은 반쯤 죽여 놓고 싶은 고약한 심정이 되어
살기어린 눈초리로 현식이를 노려보았다.
"임마, 너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니?"
전에 없이 매서운 상옥의 표정을 본 현식이 움찔하여 상옥의
눈초리를 피하려 했다
첫댓글 보고 갑니다..........
잘봤습니다~
잘보고갑니다,
즐감
감사히 읽고 갑니다.
잼있어요~ 계속 이어서~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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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보았습니다.
감사
엄청 잼있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