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분담
김정자
지난해 연말의 금융대란 이후 우리 나라의 혼란은 생각보다
심각한 지경이다.
서울 지하철 대합실의 실정, 서울역 대합실의 광경, 각
지방의 실업자들의 허덕이는 모습, 그들의 굶주림...
비단, 국내뿐만이 아닌 고통의 분담은 멀리 해외동포들의
생활 또한 비참한 실정이었다.
IMF 시작부터 내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까지 고국의 식구를
처음만난다는 하소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국의 관광객
에만 의존해야 했던 그들의 생계가 흔들린 지 거의 반년이 다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뉴질랜드 남섬에 도착하자 우리 일행 7명을 돕기 위하여
비행장에서 만남이 시작되었다. 내가 만난 K교포는 36세,
고향은 부산이며 건실한 청년이었다.
남섬에서 3박4일을 그와 함께 보내기엔 너무도 기대치가
모자란 기분이 들었을 만큼 인상이며 차림새가 관광안내원이
아닌 버스 기사 제복을 입은 약간은 초라한 순수기사일 뿐인
것 같았다.
처음 만난 인상으로 보아 남섬을 곳곳을 누비는 이동의
선봉잡이의 2중 역할을 하기엔 너무도 힘들 것 같았다.
그는 우리를 흡족한 안내 및 즐거운 관광을 부탁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의 거동을 바라 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루를 보내고 이튿날 그는 여전히 그 제복 차림으로
우리들의 호텔에 나타났다. 경상도의 짙은 사투리는 이국의
감각까지 잃을 만큼이나 고국의 냄새까지 풍겼다.
중형버스에 오른 우리들의 식구들은 한국버스의 운전석
반대쪽에 앉아 운전을 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마치 방송국에 출연하는 가수처럼 머리 위에 쓴
이어폰모양의 마이크를 착용하였다. 기사 및 안내원의 완벽한
1인 2역의 모습이었다. “자! 어머님, 아버님들의 남섬의
3박4일의 2일째 접어드는 날입니다. 저 혼자 책임지는 모습이
좀 마음에 안드시는 줄 잘 알고 있습니다. 허지만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나는 그에 대한 미심쩍은 기대감속에 박수로
그와의 여정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나는
그에게 반하게 되었다.
일반이민으로 6년전에 뉴질랜드 남섬에 아내와 단둘이
안착하였단다. 지금은 두 딸과 함께 4식구가 되어 있었다.
그는 부산에서 관광업을 경영하던 부친께서 불황속에
파산의 지경에 이르렀을 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갈
형편이 못되었지만 부산대학에 입학을 해놓고 모 관광회사의
기사로 입사하여 다른 사람보다 두배로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 후 자기의 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해군에 입대하여
높은 별자리 장성을 모시게 되었으며 군복무 제대 당시에
상관께서의 마지막 말 “이보게! 김군 작은 나라에 연연하지
말고 눈을 크게 뜨고 세계를 바라보게!”
그는 일반이민을 제대 즉시 서둘러 뉴질랜드에 무작정
도착하여 역시 관광회사에 취직을 하여 이민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동양인의 푸대접은 그곳도 예외가 아니었단다.
뉴질랜드의 복지제도는 학생은 학생수당 보조비, 실업인은
실업수당 보조비로 아주 적지 않은 금액을 받는 나라이다.
은행의 문턱은 우리 나라같이 높은 것이 아니라 신용만
있으면 보증인없이 과감하게 도와주는 곳이란다
우리일행은 점점 그의 마이크속의 말소리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우리를 태우고 다니는 그 버스는 그가
경영하는 동양인으로는 뉴질랜드 남섬에서 오로지 청일점
사장인 K사장이었음을 알고 우리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뉴질랜드의 정부에서는 그의 착실함을 놓치지 않고 신용을
담보로 관광회사를 차리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이다.
그곳에서 처음 관광업을 시작했을 때 그곳 사람들의
기사들에게 수없이 당한 수모는 말할 수 없이 심했으나
대형버스가 10대, 우리가 타고 있는 중형버스가 3대, 그곳
자국민이 위탁하여 운영하는 대형버스가 10대란다.
몇 년동안 한국에서의 관광객이 몰리면서 호황을 누리게
되었고 이민 5년만에 나름대로의 작은 집도 마련하게 되었다.
내가 남섬을 관광하는 동안 멋있게 생긴 뉴질랜드 기사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나는 간간이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한파는 제일 먼저 그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IMF이후 6개월이 넘도록 한국의 관광객은 우리가 처음이라니
그 동안 그곳의 관광버스 회사 및 한국식당, 기념품상회등
교민의 타격은 짐작 할 수 있지 않은가?
버스 23대를 수개월 세워놓게 되니 회사의 식구들의 고통은
말할 수가 없었단다.
결국 자국민의 위탁한 버스 먼저 자기의 사재를 털어
보상하였고 자기 회사버스도 우리가 탄 버스가 마지막으로
매각을 끝낸다는 실정을 듣고는 눈시울이 뜨거워 질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밤을 지내던 날 하소연은 우리들의 심금을 울렸고
자기버스안에서의 마지막의 목소리는 흐느낌으로 들렸다.
눈물어린 목소리에는 고국을 그리는 짙은 향수가 나의
가슴을 울렸고 끝내 우리들 일행은 눈물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부탁을 하였다. “지금 퀸스타운에는 소문이
쫙 났습니다. 고국에서 7명의 관광객이 왔다는 소문입니다.
교민이 하는 식당, 선물가게들이 자기들의 가게방문을
기다리고 있으니 인사만이라도 나누고 떠나주시면 저의
입장이 좀 나을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그러기로 하였다.
정상가격의 70% 80% 세일 가격으로 처분하고 그들은
다른 삶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교민의 모습은 비참
그대로였다.-
정상가격 보다 아주 저렴한 값으로 꿀 몇 병씩을 사들고는
그들과의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호텔로 돌아오는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K사장은 정말 고마웠고 자기 체면이
섰다며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현했다.
이제 그와 그리고 우리 교민들은 어쩔 수 없이 당분간(?)
다른 살길을 찾는다고 한다. 내가 생각컨데 고국의 형편이
지금보다는 나아질 때까지 그 나라의 실업인의 수당 및 그
외의 잡수입으로 살아나갈 것이라고 예상한다. 내가 떠난
다음날엔 내가 탔던 마지막의 버스를 그 나라 사람에게
떠나보내고........
내가 그곳 관광을 마치고 호텔을 떠나던 날 무거운
옷가방들을 K사장은 제쳐놓고 그 나라 운전기사들이 거들어
옮겨주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뉴질랜드의 국민들은 너무도 커다란 타격을 받고 있는 우리
나라의 이민국민인 K사장에게 안타까운 마음과 신뢰감이
완벽하게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같은 국민으로서의
우정어린 모습이 내가슴에 찡하게 남았다.
부디 청백하고 진실된 바탕의 생활속에 결코 무너짐이 없이
씩씩하게 살아 남아 뉴질랜드에서의 한국 민간외교관으로서
본연의 역할분담을 변함없이 해 주기만을 멀리서 기원하고
싶을 뿐이다.
1998
첫댓글 나라의 이민국민인 K사장에게 안타까운 마음과 신뢰감이
완벽하게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같은 국민으로서의
우정어린 모습이 내가슴에 찡하게 남았다.
부디 청백하고 진실된 바탕의 생활속에 결코 무너짐이 없이
씩씩하게 살아 남아 뉴질랜드에서의 한국 민간외교관으로서
본연의 역할분담을 변함없이 해 주기만을 멀리서 기원하고
싶을 뿐이다.
뉴질랜드의 국민들은 너무도 커다란 타격을 받고 있는 우리나라의 이민국민인 K사장에게 안타까운 마음과 신뢰감이 완벽하게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같은 국민으로서의 우정어린 모습이 내가슴에 찡하게 남았다.
부디 청백하고 진실된 바탕의 생활속에 결코 무너짐이 없이 씩씩하게 살아 남아 뉴질랜드에서의 한국 민간외교관으로서 본연의 역할분담을 변함없이 해 주기만을 멀리서 기원하고 싶을 뿐이다.
김춘자 선생님. 오명옥선생님.
너무도 오래전 숙제였던 원고를 읽으니 저도 그때의 비참했던 우리 교민의 울부짖음의
기억이 다시생각은 나지만, 너무도 부끄러운 글인데 읽어 주셨으니 참 감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