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부 장원(운문 산문)
간격의 의미
3학년 5반
박성빈
간격의 의미
동짓밤 할머니들은
수많은 알을 낳았다는데
찹쌀 반죽은 할머니의 손바닥에서
궁글리다 새알이 되었다는데
귀신을 쫓는다는 팥죽 속 새알
액운을 물린다는 그 말을 믿고
인정을 나누며 그렇게 역병과 싸웠다는데
2019 해넘이는
빙하처럼 차가왔고
화산처럼 두려웠다.
벌써 이태*
봄 오는 길목에서도
마음은 시린 잿빛
진달래 분홍빛 여전히 곱고
텃밭에 상추 오이 무던히도 자랐지만
색깔을 잃어버린 그림 같았다.
밤이 밤을 물고 가는 깊은 밤
서로 손을 잡아도 안 되고
토닥토닥 껴안을 수는 더욱 없었다.
마스크로 입을 가린 우리에게
간격의 의미는 사랑이고 배려였다.
혼자는 외로움이 아니고
함께는 인정이 아닌
희한한 밤의 시간을 건너고 있지만
손을 잡지 못해도 위로했고
어루만지지 못해도 응원했다.
그러다 보면 이 밤도
어느 봄 언저리에서 물러나리라
고운 나비 날개 타고 새봄은 또 오리라.
착한 이웃들
토닥토닥 껴안는 사랑
팬데믹으로 온 세상에 퍼지리라.
*두 해
산문
정윤희
새로운 일상
쟤 이제 자기 엄마한테 보내라.
늦은 밤, 할머니와 아빠가 통화하는 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나는 컵을 들고 벽 뒤에 서 있었다. 아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할머니만 하소연을 할 뿐이었다. 엄마한테 못 보낼 건 또 뭐냐고, 네가 키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점점 더 늙어 가는데 자라는 놈을 어떻게 감당하냐고. 저건 내 얘기구나. 나는 조용히 식탁에 컵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기 전 베란다를 보았다. 할머니가 키우는 화초들이 창문 아래에 죽 놓여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분갈이를 해야 한다고 따로 빼놓은 몬스테라와 산세베리아가 눈에 들어왔다. 분갈이를 하는 이유에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다. 식물이 자라며 뿌리가 엉키거나 흙의 영양분이 부족해서, 혹은 더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라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할머니 방을 바라보았다. 15년 키워줬으면 됐잖아. 나도 더 이상은 못 키우겠다. 문득 할머니가 나도 저 화분들처럼 분갈이를 하려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못 키우겠다는 말은, 내가 할머니의 영양분을 다 먹어버렸다는 뜻일까.
한 달 만에 아빠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의 얼굴은 그새 더 피로가 쌓여 눈가가 어두웠다. 일이 많이 힘든가. 할머니는 내게 커다란 캐리어를 주며 짐을 싸라고 했다. 수학여행을 가게 되면 쓰려고 사놓았던 캐리어였는데 이런 식으로 사용하게 될 줄이야. 캐리어에는 옷을 담고 가방에는 책들을 담았다. 내가 방을 나올 때 즈음 할머니는 분갈이를 해야겠다며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화분들을 하나씩 안으로 들여왔다. 데려다주고 올게요. 그제야 고개를 든 할머니는 모종삽을 내려놓고 일어나 베란다에 놓인 화초들 속에서 동그란 모양의 선인장 화분 하나를 꺼내왔다. 할머니는 부엌에서 검은 봉지를 꺼내 화분을 담고는 내게 넘겨주었다. 네 엄마 주든지 네가 키우던지 아님 버리든지 해라. 할머니 집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엄마의 흔적이었다. 더 있어봤자 네 아비만 힘드니까 어서 가. 애초에 네 엄마를 집에 들이는 게 아니었어. 할머니가 뒤를 돌았다. 남은 정까지 모두 내가 먹어버린 건지, 할머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모종삽을 흙 속에 쑤욱 박으며 분갈이를 시작했다.
신호등 불이 바뀌는 걸 기다리는 동안 아빠는 선인장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나를 향해 대뜸 입을 열었다. 그거, 모양이 유독 동그랗게 생겼지? 만월 선인장이라는 거야. 네 엄마랑 데이트할 때 식물원에 갔었는데, 선인장에 핀 꽃이 얼마나 예뻤는지. 꼭 네 엄마 같았어. 그 얘기들이 마냥 행복한 추억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내가 3살 때 엄마는 더 큰 곳에서 뿌리를 뻗어보고 싶다며 스스로 분갈이를 했다. 집안일이나 하라는 할머니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떠났다. 몇 년 후에 반드시 날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하지만 얼굴을 보러 오기는커녕 10년이 넘도록 연락 한 번 없는 게 지금의 현실이었다. 바보 같은 아빠는 그런 엄마를 이해한다며 자그마치 15년 동안 연락을 기다린 셈이었다. 아마 그저께 엄마와 연락이 닿은 모양이었다. 결국 아빠도 할머니에게 져서 날 보내는 거겠지. 새로운 일상이 기대되지 않아? 아빠는 계속 실없는 말들을 했다. 아빠보다는 엄마가 나을 거야. 집도 엄마 집이 더 크고,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주겠대. 택배기사인 아빠보다 잘나가는 플로리스트인 엄마가…….
아빠 차가 멈춘 곳은 간판에 ‘만월’이라고 적힌 꽃집 앞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문은 닫혀있었다. 아빠가 뒷좌석에서 캐리어를 꺼내주었다. 연락 자주 해라. 아빠는 마지막으로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아빠 차가 떠날 때까지 검은 봉지를 꾹 쥐었다. 30분이 지나도 꽃집 앞으로는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나는 근처를 돌아다니다 어느 공원 벤츠에 주저앉았다. 지금쯤 할머니는 분갈이를 끝냈을까. 아빠는 날 내려주고 어디로 갔을까. 아빠가 엄마는 나랑 똑 닮았다던데. 많은 생각들을 거치다 나도 모르게 선인장 가시에 손이 닿았다. 따끔거리는 통증에 손을 떼자 손가락에 작은 가시들이 얇게 박혀 있었다.
뭐가 새로운 일상이라는 거야. 별로 아픈 것도 아닌데 자꾸만 눈과 코가 시큰거렸다. 뭐든 할 게 없을까 싶어 데이터를 켜고 인터넷 검색창에 ‘분갈이’를 검색했다. 먼저 식물을 화분에서 빼낸다. 그리고 썩거나 긴 뿌리들을 정리한다. 얽혀있는 뿌리들까지 모두 정리하고 나면 영양분이 가득한 흙이 담긴 더 큰 화분에 넣는다. 하지만 아빠와 할머니는 모르고 있었다. 선인장은 뿌리를 정리해도 괜찮을지 몰라도 난 선인장이 아니다. 15년 동안 깊게 내리고 뻗은 뿌리를 어떻게 하루 만에 모두 정리하고 새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겠어. 영양분이 다 떨어진 흙이라도 다 털어 내거나 뿌리를 잘라내 버리면 식물은 분갈이 몸살에 걸려버린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의도였다고 해도. 선인장 위로 참아왔던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나는 몸살에 걸린 거다.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연락처를 저장하지 않았지만 느낌적으로 엄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울음을 삼키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처음으로 엄마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응. 나 도착했어. 손가락에 박힌 가시를 빼내고 캐리어 손잡이를 쥐었다. 꽃집 근처에 다다르자 불빛이 켜진 꽃집 안에서 녹색 앞치마를 두른 긴 머리의 여자가 나를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밖으로 나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말없이 엄마의 얼굴을 바라봤다. 정말 나와 닮은 얼굴이었다. 엄마가 어색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새로운 일상을 선택한 엄마는 행복했을까? 나는 인사도 없이 검은 봉지 속에서 만월 선인장을 꺼내 엄마에게 주었다. 할머니가 엄마 갖다주래. 선인장을 받은 엄마는 묘하게 씁쓸함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나는 할머니와 아빠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아직 적응하고 싶지 않았다. 영양분이 떨어진 흙 속에 잘라낸 뿌리들이 그대로 있던 나날들을 떠올리며 좀 더 몸살을 겪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