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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예술혼에 매몰된 음악세계
김의철의 음악은 처절한 자기극복의 울림이자 가족, 친구, 사회에 바치는 따뜻한 사랑의 연가이다. 견디기 힘든 고통에서도 언제나 그를 완강하게 지탱시켜준 것은 음악과 종교였다. 카톨릭 신자인 김의철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73년부터 명동성당뒤에 위치한 카톨릭여학생기숙사내의 '해바라기' 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대중들이 기억하는 이정선, 한영애, 이주호, 김영미의 4인조 혼성포크그룹 <해바라기>는 사실 오리지널 멤버가 아니었다. 이주호, 한영애 등은 해바라기 골수 관객출신들. 1기멤버들은 한국의 피터, 폴&메리라 불리었던 강성학, 장상태, 배화순이었다. 외국곡만을 부르자 관심이 지대했던 꼴레드 모아 프랑스 수녀는 한국음악이 없음에 실망했다. 이에 김의철이 진행을 자청하며 우리음악이 불리어졌다. 김민기, 현경과영애, 양병집, 정태춘, 이광조 등은 이 당시 노래운동에 동참했던 쟁쟁했던 멤버들. 해바라기는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청개구리와는 달리 노래로 의식화운동을 했던 또 다른 청년저항 문화의 산실이었다. 늘 정의감 넘치고 맑은 노래에 심취된 젊은 관객들로 북적거리자 유신정부는 리더 김의철에게 사퇴압력을 가하며 정보원들을 해바라기에 늘 상주시켰다. 성당에 피해를 준다고 생각한 김의철은 75년 이정선에게 진행을 넘기며 물러났다. 보성고시절 작곡해둔 맑고 순수한 노래들로 대중들과 수줍은 대면을 꿈꾸던 73년 무렵. 유신정권의 색안경에 비친 명동 해바라기 노래운동의 주인공 김의철의 노래들은 너무도 어둡고 저항기운이 드세 검열통과가 불가능했다. 음반발표가 어려워지자 조바심이 난 것은 본인보다 성음레코드 나 사장. 주옥같은 멜로디가 아까워 문제되는 노래제목을 주인도 모르게 바꾸어 음반을 만들어냈다. 뒤늦게 자신의 첫 독집음반 <김의철 노래모음>출시소식을 듣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자신의 음악이 변질된 사실에 참을 수없는 분노와 음악적 좌절에 치를 떨어야 했다. '다시는 음반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판금조치까지 내려 귀하디 귀한 이 음반은 김의철과 대중들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이자 연결고리임은 어찌하랴. 총 10곡이 수록된 독집 1면 첫곡 '마지막 교정'은 모든 포크가수들이 감탄해 마지 않았던 김의철의 대표곡. 졸업식날 방송실 친구가 노래를 하나 부르라하여 즉흥적으로 제목도 없이 만들어 불렀던 노래이다. 부모도 찾아오지않고 기타만을 치는 자신을 이해해준 박종렬 고3 담임선생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불렀던 학창시절의 추억과 아픔을 담고있는 명곡이다.
백코러스는 양병집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탄탄한 가창력으로 노래를 부르던 '김추자'(댄스가수 김추자와는 동명이인)였다. '잘가오'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외로움에 힘겨워하는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눈물나도록 애틋한 노래. 문제의 2면 첫곡 '저하늘에 구름 따라'는 원제목이'불행아!'였다. 대중들로부터 김의철을 격리시킨 곡이건만 양희은 등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불리워지며 가장 친숙하게 기억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연인'은 험하게 자란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번민하는 셋째누나에게 바친 동생의 안타까움이 배여 있는 곡. 장본인인 김의혜가 직접 연주하여 들려준 클라리넷연주는 처연하기만 하다. '우리의 꽃'은 땅을 울리는 혼의 소리로 무궁화꽃의 사시사철에 대한 느낌을 전한 김의철식 애국가요. 서정적 멜로디속에 숨겨진 저항의식을 읊조리듯 들려주는 중저음은 감탄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주목할 노래는 명문 경기여고,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미국 오하이오대학 교수로 재직중인 박찬응이 소름끼치도록 섬뜩한 목소리로 들려준 '섬아이'와 '평화로운 강물'. 문학박사의 노래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밑바닥 인생의 애환이 서린 듯 거칠고 투박하게 사람의 가슴을 후벼파는 처연한 그의 노래는 '창법미숙'이란 미명아래 금지명찰을 달았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70년대 유신군사정권의 횡포인가! '군중의 함성','이별가'같은 저항곡들의 발표는 김의철을 음악적으로 질식시킬만큼 감시가 뒤따랐다. 좌절의 세월을 보내던중 77년 지금의 아내를 만나 안정을 찾으며 79년 서양음악의 근본을 알기위해 독일과 미국으로 떠났다. 세계적 기타리스트들에게 음악을 사사받은 김의철은 80년대 초반부터는 뉴욕에서도 연주력을 인정 받으며 AMERICAN INSTITUTE OF GUITAR에서 기타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얼마전 독일의 한 일간지에 소개된 김의철. '나치가 600명의 저능아를 살해한 것을 기리기위해 해마다 열리는 추모회에 전세계 장례곡들 중 한국의 김의철곡이 선곡되어 91년부터 10년간 빠짐없이 불리어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클래식 작곡에도 열심인 그가 꿈꾸는 음악은 아름답고 품격있는 우리가곡의 맛을 풍기는 클래식 포크이다. 미발표CD들은 미국 LA에서 열악한 녹음환경속에 온가족이 참여하여 제작한 <그산하.김의철-킹,92년>과 <김의철 2 연가집-킹,KSC3208,93년>. 성악의 대중화에 앞장선 한양대 교수였던 양경숙이 노래하고 김의철이 직접 클래식기타통을 울려주는 광음으로 연주한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치는 곡들이었다. 양경숙의 클래식한 보컬은 대중들의 인기에 아부하는 소리의 차원을 넘어 혼을 담은 김의철의 곡에 힘찬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기계적 조작이 없이 동시녹음으로 제작된 이 순수한 음반은 전세계적 으로 유래가 없는 독특한 클래식포크의 진수를 들려주었다. 상업적 목적의 노래만이 양산되고 있는 척박한 우리가요계에 김의철 같은 대중음악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글 출처: 인터넷 여기저기
1973년 경 '포크' 진영이 양극화되었다는 점은 여러 번 지적된 바 있다. 일부는 대중매체를 통해 새로운 대중연예(이 말은 결코 '나쁜' 뜻이 아니다!)로 정착해 가고 있었고, 다른 일부는 '언더그라운드'를 고집하고 있었다. '언더그라운드'라는 말이 당시에 사용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TV 쇼나 생음악 살롱 등 주류 음악인들의 무대를 거부하는 지향을 가진 '아웃사이더'형의 인물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명동의 무대를 예로 들어보면 오비스 캐빈과 쉘부르 등이 이미 스타가 된 포크 가수들의 무대였다면 내쉬빌과 디쉐네 등은 이들 '언더그라운드 포크'의 무대였다. 이런 현상은 단지 음악인들의 '마음'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연주하는 사운드에서도 드러난다. 대중매체를 통해 자주 등장한 포크가 '일렉트릭'해지고 '리드믹'해졌던 반면, 언더그라운드 포크는 '통기타 순수주의'를 고수하면서 서정성과 '메시지'를 중시했다. 김의철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비타협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와 비슷한 인맥을 형성했던 오세은과 이정선이 통기타 중심의 음악을 선보이면서도 이런저런 음악적 실험을 시도한 반면, 김의철은 마치 목숨을 걸듯 기타의 플러킹(plucking)에 승부를 건다. 통기타의 리듬 스트러밍(strummimg)은 "마지막 교정"의 후렴구에서만 잠깐 나올 뿐이고, 하나의 코드(화음)에 속하는 음들이 동시에 나오는 일도 그리 많지 않다. 리듬이 비교적 일정한 패턴으로 인식되는 곡은 쓰리 핑거 주법으로 연주하는 "마지막 교정", "저 하늘에 구름 따라", 그리고 컨트리 스타일의 "친구", 트레몰로 주법이 등장하는 "우리들의 꽃" 정도이다. 다른 곡들의 경우 리듬은 기타 아르페지오나 노래의 멜로디에 숨어 있을 뿐이다. 결과는 한 줄 한 줄 섬세하게 튕길 때마다 사색을 담은 기타 연주와 탁 트이지 않은 톤의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들이고, 그 느낌은 내향적이고 우울하고 때로는 염세적이다. 기타와 노래 외에 편성된 다른 음이라곤 백킹 코러스와 클라리넷 정도일 뿐이다. "섬아이"에서 베이스 기타가, "연인"에서 피아노가 등장하지만 이런 느낌을 확 바꿔 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를 연주한 인물들이 외부로부터 초빙된 직업적 음악인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조달된 가족이거나 동료라는 사실은 이 음반이 자급자족으로 녹음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참고로 클라리넷을 연주한 김의혜는 그의 셋째 누나이고, 베이스를 연주한 이정선과 객원 가수 박찬응은 그의 동료(혹은 선배)다. 수록곡 가운데 유일하게 자작곡이 아닌 "연인들의 자장가"의 원곡이 우디 거쓰리(Woody Guthrie)의 "Hobo's Lullaby"라는 점은 김의철의 음악적 지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이 음반의 화자의 정서(혹은 정체성)가 있다면 '고통받고 소외된 떠돌이'일 것이다. 떠돌이의 절망감은 객원 가수 박찬응의 그로테스크한 목소리를 빌린 단조의 곡 "섬아이"와 "평화로운 강물"에서 극한적으로 표현되는 듯하다. "섬아이"는 3박자 리듬 위에서 A-A-B'-A 형식이 두 절 반복되는 형식인데, 감기라도 걸려서 목이 잠긴 듯한 박찬응의 노래는 처절한 슬픔을 담고 있고 특히 클라리넷과 어우러질 때 슬픔은 더욱 증폭된다. 베이스 기타는 섬의 분위기를 표현하듯 슬며시 꿈틀댄다(참고로 이 곡을 이정선의 "섬아이"와 비교해서 들으면 여러 모로 흥미롭다. 아웃사이더들의 고독에 대한 상이한 표현방식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한편 "평화로운 강물"의 경우는 16마디 형식의 노래가 여섯 번 반복되는데 리듬이 세 박자와 네 박자가 교대되는 특이한 진행을 보인다. 기타 주법도 리듬의 변화에 따라 가변적으로 변화하는데, 유심히 들으면 이런 변화가 가사의 스토리텔링과 연관됨을 알 수 있다. 그 점에서 이 곡은 '아메리칸 포크'를 듣는 기분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전주와 간주에서 감화음(diminished chord)을 동반한 기타 주법은 '클래식 기타'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고통받고 소외된 정서는 증정본 표지에 그가 친필로 적은 "젊음은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재 되어 흙으로 변할 뿐이다"라는 문구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런 정서의 원인을 한국전쟁 때 월남해 온 김의철의 가족사, 그리고 사춘기 시절 부모 형제와 떨어져 지내야 했던 개인사로만 돌려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음반이 발매된 1974년(녹음은 1973년)이 '긴급조치의 시기'라는 시대사로만 설명을 대신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음반은 '판금'이라는 조치를 당했고 그 결과 김민기, 한대수, 양병집의 음반과 더불어 시장에서 사라진 뒤 컬트가 된 음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이유는 "섬아이"가 '창법 미숙'이라는 것이었다. '저속'이 아니라 '미숙'이라는 점에 유의하라. 그런데 3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 이 음반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앞에서 운을 띄웠지만 이 음반에 담긴 음악은 '연예'로부터 가장 거리가 먼 경우에 속한다. 김의철이 추구한 방향은 포크 음악이든, 클래식 음악이든 대중음악 '이전'의 서양 음악의 뿌리를 찾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의 이후의 경력은 이런 방향을 보여준다. 그 점에서 그는 한대수, 이정선, 조동진, 김민기, 오세은 등과도 상이해 보인다. 이를 '또 하나의 서양 콤플렉스'라고 매도하는 것은 부당하지만 그 결과가 '의미는 있지만 재미는 없는 음악'이라는 점은 조심스럽게 지적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 음반은 일부로부터는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가진 품격 있는 음악으로 숭앙 받고 있지만, 다른 일부로부터는 '그 시절 그 노래'이며 소문에 비해 흥미롭지 않은 음악이라는 상이한 평을 받고 있다. 아무렴 어떤가. 품격 있는 음악에 대한 수요는 언제든 존재하는 것이니까... 20021222 P.S. 1 P.S. 2 P.S. 3 text | 신현준 homey@orgio.net" target=_blank>homey@orgio.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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