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장지산 용암사의 일주문.
일주문 앞에서면 바로 대웅보전이 보입니다.
대웅보전.
용암사는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에 위치한다.
고양시 벽제관에서 광탄으로 가다 혜음령 고개를 넘으면 국가보물 제 93호인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있는 곳이다. 언제부터 이 곳에 가람이 형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전설에 의하면 고려 제13대 선종(1083~1094) 때 용미리 마애이불상을 조성한 배경과 절의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어 약 900여년 전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만들어진 11세기를 창건연대로 잡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그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전란에 의하여 한동안 절이 소실되었고 근대에 들어1930년대 절이 재창건 되었으며,
1935년 4월 대웅전 3칸을 재건하였다. 당시 장단군에 있던 장신환대사가 주지로 부임하여 절을 지켰는데
한 때 혜음사, 대승사로 불리던 사명을 현재의 사명인 용암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1954년10월에 이승만대통령,함부통령,미대사 등 각계인사가 참석 칠층석탑 및 동자상 제막식을 거행 했다.
대웅보전 앞 뜰에는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1군단을 방문 후 참모들과 이 곳을 다녀 가며
구국통일, 국태민안을 새긴 석등을 세웠다. -안내문 중에서-
봉덕사 종을 본 따서 만든 범종(높이 187cm, 직경 115cm.)을 안치한 범종각.
대웅보전 앞마당에는 19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주한 석등이 있다.
대웅전 좌측에 있는 산신각 옆에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시주한 7층 석탑.
산신각.
산신각 좌측벽에 그려 있는 아름다운 꽃그림.
산신각에서 본 마애이불상.
산신각 내부.
마애이불상들이 모셔 있다.
산신각에서 대웅전으로 가는 길.
대웅보전 내부 모습.
불단의 모습.
불단 중앙에는 석가모니불과 함께 좌우에 보현과 문수보살을 모셨다. 탱화에는 비로자나불이 주불이다.
하얀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보살과 청색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보살.
화려한 의상을 입은 석가모니불.
대웅보전에 있는 벽화.
대웅보전 편액. 협시불이 부처가 아님에도 대웅보전이란 편액을 걸었다.
대웅보전에서 본 풍경.
석불입상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계단 길에는 작은 석불입상들을 배치해 놓았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는데......
용미리 석불입상에 얽힌 전설.
보물 제93호로 지정된 이곳 용미리 석불입상에는 불상 조성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고려시대 중기 13대 선종(재위 1083~1094)은 자식이 없어 셋째 부인인 원신궁주 이씨까지 맞이했으나
여전히 아이가 생기질 않았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의 꿈속에 어느 날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오. 배가 매우 고프니 먹을 것을 주시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꿈에서 깬 궁주는 이 내용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곧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 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리도록 하였더니
그 해에 원신궁주에게 태기가 있었고, 왕자인 한산후(漢山侯)가 탄생했다고 전해진다. -안내문 내용-
산신각.
마애이불입상의 웅장한 모습이다.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坡州 龍尾里 磨崖二佛立像) / 보물 제93호 / 1963년 1월21일 지정, 고려시대.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한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불성(佛性)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오른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
지방민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이라 한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설화가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 -안내문 내용-
석불을 한바퀴 돌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