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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2)
신 6:1-9
1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2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3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 6:1-9 / [율법의 근본인 하나님 사랑]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도록 내게 부탁하신 그 명령과 계명과 규정들을 내가 이제 전하겠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이제 요단강을 건너가서 차지하고 살 땅에서 지켜 행해야 할 법입니다. 2)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명령하는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모두 지키십시오.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또 손자들이 언제나 주님을 경외하며 살면 주께서 여러분에게 길이길이 복을 누리며 살게 하실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주님의 명령을 듣고 그대로 지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일이 그대로 이루어져서 여러분이 복을 받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4)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ㄱ) `우리의 하나님은 여호와요, 여호와는 한분뿐이십니다.' (ㄱ. `여호와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여호와뿐이십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원문에서 첫 단어와 마지막 단어가 대문자로 되어 있고 `증거'`증언'이라는 뜻을 나타내어 이 말씀을 언제나 증거하라는 것으로 보인다) 5) 그러므로 마음을 다 쏟고 정성을 다 기울이고 힘을 다 바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십시오. 6)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명하는 주님의 말씀을 항상 마음에 품고 사십시오. 7) 자녀들에게 이 말씀을 분명히 가르쳐 주십시오. 여러분이 집에서 자녀와 함께 앉아 있을 때나 함께 여행을 할 때나 잠자리에 누울 때나 잠에서 일어날 때에 항상 이 말씀을 자녀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8) 여러분은 이것을 손목에 매달고 다니며 항상 기억하고 두 눈 사이에 붙여 표를 삼으십시오. 9) 또 여러분의 집 문기둥과 성문에도 모두 이 말씀을 써놓으십시오.
< 설 교 >
쉐마’(שָׁמַע;들으라)
신 6:4-9 / 김중곤 목사
오늘 본문 말씀은 모든 유대인들이 매일 아침, 저녁마다 낭송하는‘쉐마’(שָׁמַע;들으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은 ‘유대인의 성공 법칙’이라는‘김형태’박사님(한남대학교 14-15대 총장)의 칼럼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은 히브리어로‘레브’인데 이는‘감정’(感情)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이고, ‘목숨’은 히브리어로‘네페쉬’인데 이는‘영혼’(意志)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이며,‘힘’은 히브리어로‘메호데’인데 이는‘생각’(知性)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知, 情, 意’(全人格; one's whole personality)는 인간의 세 가지 심적 요소인‘지성’(知性; 지식, 지혜, 인지, 인식, 분별, 이해, 성찰, 등), ‘감정’(感情; 감정, 사랑, 히노애락, 열정, 애정, 애착, 배려, 등), ‘의지’(意志; 뜻, 의지, 결정, 선택, 비젼, 꿈, 노력, 성실, 실천, 행함, 등)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知, 情, 意’로 최선을 다하면 신앙뿐 아니라 스포츠, 예술, 학문 등 어느 분야에서든지 최고 일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런 전인적 노력을 지속적으로 행하게 될 때, 전인적 자기계발(자아실현)과 사회봉사(리더십)을 완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 1889-1977)이 무명 시절 철공소에서 일할 때 일입니다. 어느 날 바쁜 사장이 그에게 빵을 좀 사 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사장은 채플린이 사다 준 빵 봉지를 열었는데 봉지 안에는 빵과 와인 한 병이 들어있었습니다.
사장은 채플린에게 시키지도 않은 와인까지 사 온 이유를 물었습니다. 채플린의 대답은 “사장님은 언제나 일이 끝나면 와인을 한 잔씩 드셨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마침 와인이 떨어진 것 같아 제가 와인까지 사 왔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에 감동을 받은 사장은 채플린의 일당을 올려주었고, 그를 대하는 태도도 완전히 달라졌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마음을 다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나이가 들면 몸은 약해지고 둔해집니다. 기억력도 떨어집니다. 그러나 인간의 뇌 기능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IQ의 절대 수치는 떨어지지만, 인간의 뇌 기능에는 피크타임이 없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다만 연령대에 따라 뇌의 특정 능력이 더 좋은 기능을 보일 뿐이라는 분석입니다. 평균적으로 18~19세에 생각을 빠르게 했고, 단기기억력이 가장 좋을 때는 25세, 사람들의 감정 상태를 잘 파악하는 능력은 40~50대에 가장 좋았다고 합니다. 더 나이가 들면 전반적인 지식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사물을 이해하는 결정적 지능(Crystalized intelligence)은 60~70대가되기까지 절정인 시간이 따로 없었다고 합니다. 뇌 인지기능은 나이에 따라 어떤 면은 감소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향상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열정과 의욕이 떨어집니다. 육체적 힘도 쇠약해지고 호기심도 점차 낮아져서 새로운 것을 배우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일부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도 계속 배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70세에도 젊은이들과 토론을 하고 새로운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고, 괴테는 80대의 나이에‘파우스트’2부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60세가 되어서야 철이 들었다고 하였고,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 전성기는 60세부터 75세 사이였다고 밝혔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뇌는 더 기능이 향상되거나 유지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1998년 미국 솔크 연구소의 ‘프레드 게이지’교수 연구팀은 성인의 뇌의 특정 부분에서 수는 적지만 계속해서 새로운 신경세포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습니다. 이전까지는 나이가 들수록 뇌의 신경세포가 감소한다고 생각했으나, 운동을 꾸준히 하면 ‘해마’(뇌의 일부분으로 장기적인 기억과 공간개념, 감정적인 행동을 조절하는 역할) 부위에서 새로운 신경세포가 생겨날 뿐 아니라 늙은 신경세포 간에 새로운 연결망이 만들어지고, 뇌로 가는 혈류량을 증가시켜 뇌 세포에 더 많은 영양과 산소를 공급함으로써 뇌 기능이 향상되는 것으로 연구팀은 보고하고 있습니다.
‘들으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쉐마’(שמע)는 신6:4-5절 말씀을 통칭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의 신앙교육을 대표하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집 대문 옆에‘메주자’(히: מזוזה, Mezuzah)라는 작은 상자에 이‘쉐마’의 말씀을 적어 보관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쉐마’사상은 유대인들이 수천 년 동안 디아스포라라는 유랑 생활 속에서 목숨보다 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쉐마’교육의 특징은 첫째,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신6:4),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과, 둘째,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는 전 인격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일하신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신6:4-5절의 말씀이‘쉐마의 핵심 신앙’이라고 한다면, 신6:6-9절 말씀은 ‘쉐마의 실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유대인 가정에서는 아기 때에는 매일 베개머리 신앙을, 아이가 성장해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축복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때 사용하는 성경 말씀이 민6:24-26절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신앙은 심고 계승하는 것입니다. 신앙 계승의 주체는 부모이지만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말을 물가로 데려갈 수 있어도 물을 먹일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 세대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부모 세대가 할 일은 자녀를 신앙의 냇가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복음의 생수를 마시는 것은 자녀의 문제입니다. 문제는 부모가 자녀를 신앙의 물가까지 데려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쉐마 신앙’은 들음으로 시작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할 일은 신앙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자녀가 성장하였다면 첫째는 부모가 먼저 신앙 가운데 굳건히 서 있는 것이고, 둘째는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힘은 위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이고, 자녀의 영이 잘 되는 복입니다. 그럴 때 범사가 잘 되는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돈을 잘 벌고 출세하는 자녀가 아니라, 성공 가운데 자신이 길을 잃어버린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찾는 자녀가 되는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믿음의 부모로부터 믿음의 자녀들이 세워집니다. 부모가 되었다는 것은 거룩한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이며, 자녀들과 후손에게 존경을 받아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사는 우리에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우리 자녀 손들과 이웃에게 하나님을 알고 믿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며 다음 세대를 살아가도록 양육하고 전수하는 부모가 되면 우리 가정과 자녀들의 믿음이 회복될 것입니다.
세상을 탓하기에는 세상이 너무도 빨리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또한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우리의 가정이 믿음 안에 든든히 서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 6:4-9
제목: 닛다와 쉐마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지금 미국에서 살고있는 유대인들의 숫자는 전체 미국 인구의 2%쯤 됩니다. 그런데 미국 최상위 부자 40명 가운데 22명이 유대인입니다. 그 40대 부자 중 다 상위 그룹에 유대인들이 랭크되어 있습니다. 최고 부자가 빌 게이츠인데, 작년 말 현재 560억 불 입니다. 조지 소로스는 투자의 귀재요 지존인데, 작년 현금 연봉이 7억 5백 불입니다. 지금 우리 시세로는 1조가 넘습니다. 세계 제일의 고액 연봉자입니다.
히틀러에게 600만이나 유대인이 살해당했는데, 그때 독일 전체 유대인 인구가 6%였는데 독일 전체 유통 마르크의 28%를 유대인들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기세가 무서웠고 두려웠는데, 이런 기본적인 정서를 악용해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색출해 살해한 겁니다. 유대인들의 돈에 대한 감각은 대단합니다. 노벨상이 1901년에 제정되어 지금까지 수상자가 300명이 넘는데, 작년 말 현재 유대인들은 105명이 받아서 35% 정도 됩니다. 노벨 경제학상은 65%, 의학상은 30%, 물리학상은 22%를 유대인들이 상을 받았습니다.
어쨌든 각 분야에 유대인들이 지존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물질계의 지존은 칼 막스입니다. 정신과학계의 지존은 지그문트 프로이드, 자연과학계의 지존은 아인슈타인인데, 이들 모두 유대인입니다. 원자폭탄을 만든 사람은 오펜하이머인데 유대인입니다. 발명왕 에디슨도, 갈릴레오도 다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세계를 좌지우지했습니다. 정유업계의 지존 록펠러도 유대인입니다. 나폴레옹 시대부터 지금까지 유럽 금융계의 지배자 로스 차일드 가문도 유대인입니다. 심지어 미국 영화산업도 유대인이 장악했습니다.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 7개 중 여섯 개가 유대인들 것입니다. 콜롬비아, 유니버셜, MGM, 20세기 폭스, 워너브러더스 이 모두 유대인들 것입니다. 챨리 채플린도 유대인입니다. 마릴린 몬로도 유대인, 엘비스 프레슬리도 유대인입니다. 스필버그 감독, 우디 알렌 감독, 폴 뉴먼, 저스틴 호프만 다 유대인입니다. 해리슨 포드도 유대인입니다. 맥도날드, 스타벅스, 코카콜라도 미국의 자본주의 상징이긴 하지만 골수 시온주의자들의 기업입니다. 미국 대학교수의 25%, 상하의원 20%, 월가 금융전문가 35%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에 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져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1980년대에 시작된 유네스코의 닛다 프로젝트입니다. 유대인들의 임신법과 유대인들의 우수성의 함수관계를 연구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닛다는 월경이란 말의 히브리말입니다.
그런데 탈무드에서 유대인들의 전통적 임신법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면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수 천 년 동안 닛다에 의해 임신하고 태교를 했습니다. 여자들이 생리가 시작되면 금욕을 시작하고, 생리가 끝난 후 7일까지 금욕합니다. 그런 다음에 성관계를 갖습니다. 랍비가 이렇게 지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임신법입니다. 가장 난자가 신선하고, 정자가 활동력이 왕성할 때 수정되는 겁니다. 니크베 라는 우유 목욕을 한 후에 부부관계를 갖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의 상태가 양호할 때 임신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닛다 임신법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닛다 교육은 랍비를 통해 회당에서 교육됩니다. 임신된 후에도 일개 가정 단위가 아니라 민족 단위에서 태교를 합니다. 랍비들이 임산부 앞에서 시편을 읽고 신명기를 읽습니다. 그래서 남편보다 랍비들의 관심이 더 지대하다고 합니다. 이게 유대인 민족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겁니다. 이걸 연구하는 프로젝트가 벌써 30년이 되었습니다. 음식도 다 구분하고 가립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는 돌이 지나면, 닛다 후 쉐마 교육에 들어갑니다. 쉐마는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넓게는 신명기 전체가 쉐마이고, 핵심은 오늘 본문입니다. 쉐마는 들으라는 말입니다.
쉐마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원초적 신앙고백이고 그들의 가장 유수한 신앙교육의 근간입니다. 5절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게 쉐마의 핵심입니다. 문제는 이 쉐마를 어떻게 하라구요? 어떻게 실천하라고 했습니까? 마음에 새기라고 했습니다. 6절입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마음은 심장이란 말입니다. 새긴다는 말은 대단히 강한 표현인데, 십계명을 돌비에 새기듯 심장에 정과 끌로 새기라는 겁니다. 이것은 극단한 표현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우리가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받들어야 할 준엄한 계명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머리가 아니라 귀가 아니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여러분, 메모지에 기록했다고 안심하지 마시고 늘 박동하는 내 심장에 새기십시오. 그래야 비로소 그 말씀이 내 삶의 만나가 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7절입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후손에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쉐마를 전수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가장 큰 사명이고 도리인데, 사실 이 첫 번째 명령보다 더 어려운 과제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파란 많은 역사를 살면서도 저렇게 기적처럼 나라를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은 자녀교육, 쉐마교육에 실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마 식민지까지 소급하면 나라 없이 떠돈지 2500년이 넘습니다. 한 때 일어났다 사라진 종족이나 민족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설로 남아야 할 유대민족인데, 나라를 재건하고 불과 400만이 조금 넘는 인구가 경제든, 군사든, 과학기술이든 세계 최고의 나라를 이룩했습니다. 그게 다 나라를 잃고 전 세계를 떠돌아 다니면서도 목숨처럼 닛다를 태교로 삼고, 쉐마를 교육의 핵심으로 삼아온 그들의 교육 정신 덕분입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하나님 사랑을 교육하십시오. 유대인 자녀들은 누구나 돌만 지나면 침대 머리맡에서 부모가 읽어주는 쉐마를 듣고 잡니다. 베갯머리 교육은 부모의 가장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닉슨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인 키신저 장관도 유대인인데, 그의 자서전을 보면 어릴 때 받은 쉐마 교육이 길게 언급됩니다. 그때는 그렇게 힘들고 고리타분했는데, 성장하고 보니 그게 자기의 인격과 지혜를 만들고, 세계관과 우주관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자녀들에게 쉐마 교육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가르치십시오. 어떻게 가르치라고 했습니까? 언제 어디서나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자녀도 유대인들의 자녀도 복되고 성공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쉐마를 생활화하라고 합니다. 8-9절입니다. “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온 가족이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라고 합니다. 온몸으로 쉐마를 구현하라는 겁니다. 문설주에도 기록해 놓고, 양피지에 써서 문옆 벽감에 붙여 넣고 들어가며 나가며 입을 맞춥니다. 벤허 영화를 보면 벤허가 사지에서 돌아와 흉가가 된 자기 집에 들어서며 대문 우측 벽감에 있는 쉐마를 꺼내 입을 맞춥니다.
쉐마가 내게 축복이 되려면 실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말씀은 염불이 아닙니다. 쉐마는 그리스도인들의 실천강령입니다. 자녀들에게 나가서 기죽지 말라고 하지 마시고, 유대인 부모처럼 쉐마 교육을 하십시오. 그렇게 지도해야 합니다.
10절 이하는 이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허락된 복입니다. “[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부디 자녀들에게 쉐마를 가르치십시오. 그래서 여기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 후손에게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가족-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라
(신 6:4-9, 막 1:9-11, 행 16:25-34) / 인명진 목사
가족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놀란 사실은 가족이라는 개념이 정착된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가족을 이루고 살았는데 가족이라는 개념이 생긴 역사가 오래 되지 않았다고 하면 동의하지 않을 분도 꽤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 역시 ‘가족의 역사’라는 책을 읽기 전에는 가족의 개념이 자리 잡은 지 오래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정착하게 된 것은 기독교 역사와 연관이 있습니다. 서구 역사에서 가족은 개신교가 탄생했던 종교개혁과 함께 탄생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가톨릭교회는 지금도 성직자 독신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신부님들도 결혼하지 않고, 수녀님들도 평생 독신으로 삽니다.
그래서 서구 문명사적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가족이라는 개념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구체화 되었다고 말합니다.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 신부였던 루터는 수녀 출신이었던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함으로써 성직자의 독신주의가 깨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가족이라는 개념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루터 이전의 가족과 루터 이후의 가족은 사제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는 것을 넘어서서 “사랑”이라는 새로운 감정이 관계에 개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루터 이전의 가족은 사랑의 공동체이기보다는 후손을 낳고 가문을 유지시키는 일종의 종족 보전을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가족보다는 가문이 우선시 되었고, 여성은 연애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후손을 낳아주는 생물학적 도구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성은 인생의 동반자인 아내가 아니라 자식을 낳아주는 어머니로만 이해되었습니다. 이슬람과 인도의 문화권은 아직까지도 여성을 이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가족의 개혁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부터 여성은 처음으로 연애와 사랑의 대상이 되었고, 가족은 함께 사랑을 이루며 인생을 살아가는 삶의 동반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가 쓴 한류현상을 문화적으로 접근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배우 배용준, 욘사마와 한국의 아이돌 가수들이 일본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를 문화적으로 접근한 것입니다. 한 일본학자의 글은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일본은 1866년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시작하기 이전에는 가족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일본 여성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종족보전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막부끼리 전쟁을 하다가 한쪽이 지게 되면 그 막부에 소속되어 있던 사무라이들이 모두 할복자살을 선택했습니다. 그때, 사무라이들은 자기 아내에게 자결을 요구하거나, 자기 손으로 아내와 가족을 모두 죽였습니다. 가문의 명예가 가족의 의미보다 더 중요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미국에 의해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개신교가 일본에 처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가족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했고, 그때부터 일본 문학에 사랑과 연애가 작품의 주제로 다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결단의 찬송으로 부를 559장에 얽힌 이야기만 들어도 우리나라에 들어온 복음이 가족을 재해석했고, 건강한 가족을 만들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3절 가사 중에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 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전해지던 시기에 여자들은 비록 남편이라도 한상에 앉아서 밥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엌에서 먹든지 아니면 여자와 아이들이 따로 상을 차려서 먹든지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개똥이 엄마가 예수 믿는 옆집을 가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이 한상에 둘러서 밥을 먹기 위해 경건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개똥이 엄마의 눈에는 비친 이 모습은 한 마디로 충격이었습니다. 지금부터 120년 전의 세계관으로 볼 때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이 한상에 둘러서 먹는 것 자체가 천국으로 보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를 찬송은 이 고백을 담아놓은 것입니다.
그전까지 여자들은 자식을 낳아주고 종족의 보전하는 수단이거나 종처럼 일하는 사람이었지 한 남자의 사랑의 대상으로, 연애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자녀들도 독립된 인격체로 여기지 않고 아버지의 소유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가족의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특히 여자들과 아이들이 가족 구성원으로 재해석되었습니다. 상하관계가 사랑의 관계로 재해석 되었습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독립된 인격으로 재해석 되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복음이 가족을 재발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으로 올라가서 예수님의 가족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의 가족은 어떤 관계였을까요? 예수님이 이해하는 가족의 개념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은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장남이었던 예수님과 아버지 요셉과의 관계는 어땠을까요? 성경에는 아버지 요셉의 이름이 총 14번 나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아기 예수 탄생과 관련해서 아버지 요셉의 이름이 등장하고 그 이후로는 요셉의 이름 자체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셉과 마리아의 결혼은 파경으로 끝날 뻔했습니다. 약혼녀였던 마리아가 자신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았는데 갑자기 임신을 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하지만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당장 파혼하지 않고 자신과 상관없이 임신한 약혼녀를 돌보아주는 의로운 사람,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결혼 후 가장이 된 요셉은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가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피난을 갔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이후로는 아버지 요셉이 그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유대인 가족은 아버지가 중심이 되는 구조입니다. 한국의 엄격한 가부장 제도만큼이나 유대인들에게 아버지의 역할은 대단했습니다. 그것이 이름에서부터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 원래 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지칭할 때 누구의 아들 아무개라 부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배척당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예수의 고향 사람들이 나사렛 회당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예수님의 고향에서 살고 있던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의 어머니, 형제들, 누이들을 모두 열거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아버지 요셉의 이름이 빠져 있습니다. 이름만 빠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관습으로 상상할 수 없는 표현으로 예수님의 가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아들 예수’라고 말해야 하는데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고 말합니다. 신구약성경을 통틀어서 어머니의 아들 누구라고 말하는 것은 이 부분이 유일합니다.
예수님의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아버지 요셉의 이름이 예수님의 가족 명단에서 사라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마지막 순간을 지킨 사람은 어머니 마리아뿐이었습니다. 비록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두 가지를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어릴 때 아버지 요셉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추측은 아버지 요셉이 가족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자기 자식이 아닌 예수님을 장남으로 키우던 요셉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그의 가족 울타리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없이 자랐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예수께서 아버지에 대한 크나큰 상실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버지 요셉이 가족을 일찍 떠났다면 그 상실감은 아마 대단했을 것입니다. 남의 집에 숟가락 개수까지 다 아는 좁은 나사렛 동네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아버지 없는 사람으로, 아니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이런 비난과 상실감에서 자라났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30년의 세월을 건너뛰고 공생애를 시작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향 나사렛을 떠나 요단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장면입니다. 그는 고향을 떠나왔지만 아버지 없는 사람,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트라우마를 안고 요단강에 몸을 담그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로 그때 하늘이 열리고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아마 예수님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하늘의 음성이 차라리 “너는 내가 보낸 메시아이다.” 했다면 충격이 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늘에서 들리는 이 음성을 듣고,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어린 시절 이후부터 아버지 없는 사람으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으로 살아왔던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들려주신 그 음성,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이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가슴 깊은 곳에 남아있던 응어리를 한꺼번에 씻을 수 있었던 말씀 아닐까요? 육신의 아버지의 사랑보다 더 큰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전율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십자가 죽음까지 이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큰 사랑은 하나님 사랑이었습니다. 이 하나님 사랑이 부모의 사랑도, 가족의 사랑도 뛰어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초적인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가장 큰 사랑은 무엇입니까? 가족 간의 사랑일까요? 아버지의 사랑입니까? 어머니의 사랑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입니까?
저는 마가복음 1장에 나오는 이 장면을 묵상할 때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떨렸을 것이라고 상상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몸을 일으켰을 때 하늘에서 들렸던 그 음성은 확신에 찬 선포가 아니라 절규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신음소리였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만들어야 하는 아버지의 가슴 아픈 사랑이 절규처럼 들리는 신음소리였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죽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가 돌아가시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부모에게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자식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더 큰 사랑을 품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그 큰 사랑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요단강가에 서 있는 아들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사랑은 단연코 없습니다. 이 큰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작은 사랑, 가족 간의 사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원초적인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작은 사랑이 변질되었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모든 사랑을 제자리에 있게 하는 중심축입니다. 하나님 사랑이라는 중심을 잃어버리면 가족 간의 사랑도 아내와 남편과의 사랑과 변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정은 지금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사랑이 가득 하십니까? 아니면 가족 사이에 미움이 있고, 결손이 있고, 모자람이 있고, 소외가 있습니까?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 메말랐고, 형제간의 다툼이 서로를 서먹하게 만들고, 부부간에 서로 무관심하고 냉담하십니까? 가장 큰 사랑을 먼저 회복하십시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 사랑이 가족 간의 사랑도 재해석하게 만들고 가족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이웃까지 사랑하게 만들어줍니다.
앙드레 뷔르기에르가 쓴 ‘가족의 역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프랑스 사람이 써서 그런지 조금 어려운 책입니다. 하지만 선사시대부터 시작해서 수메르와 바빌로니아를 지나 그리스와 로마의 가족, 그리고 히브리인들의 가족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은 가족도 힘 있는 사람에 의해 지배를 받았고,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복종의 관계로 변질되었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가족제도를 만들었고, 인간이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장 순전해야 할 가족도 인간의 욕심에 의해 희생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세계에서 가족은 인간이 출발점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선언합니다. 사람이 가족이라는 제도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가족제도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출발점이 사람이라는 것과 출발점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그 출발점인 가족은 힘 있는 사람에 의해 복종되는 관계이지만 하나님이 그 출발점인 가족은 사랑과 섬김의 관계입니다.
어떤 학자는 예언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앞으로 남편보다 경제력이 뛰어난 힘 있는 여성에 의해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남성들이 많은 시달림을 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가정에서 아내의 폭력에 시달리는 남성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여성의 경제능력과 비례해서 올라갑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물리적 힘이 강한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에 시달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관계에서 한번 약자가 되면 그 관계는 지속됩니다. 관계의 약자와 강자는 남성 여성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여성이 관계적 강자이면 여성도 폭력을 서슴지 않습니다. 여자들은 주로 바가지나 후라이팬으로 남자의 머리를 때린다고 합니다. 아내로부터 후라이팬에 머리를 맞았다는 남성이 어디 하소연 할 데도 없고 여성의 전화에 상담을 요청하였습니다. 가족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그 관계는 사람에 의해 변질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가정의 중심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가족 사랑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결혼하는 신혼부부에게 꼭 당부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부부관계는 그대 그리고 나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의 부부관계는 하나님, 그대 그리고 나의 관계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계는 두 사람 사이에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에 계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이기 때문에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결코 가족이 건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모든 사랑을 제자리에 있게 만드는 원심력과 같습니다.
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족이기주의 함정입니다. 사랑의 범위를 자기 가족만으로 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담을 쌓습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을 보십시오. 가족으로 시작했지만 가족을 뛰어넘는 이야기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한 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을 하자 큰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 문이 열렸습니다.
다른 죄수들은 다 도망갔는데 바울과 실라만 감옥에 남았습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죄수가 다 도망간 것을 깨닫고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바울과 실라는 우리가 여기 있노라 하면서 간수를 안심시킵니다. 놀란 간수는 죄수인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습니까?” 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역전 되었습니다. 누가 죄수이고, 누가 간수입니까? 상황이 완전히 역전 된 것입니다.
이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선포했습니다. 간수의 가족 전체가 그 밤에 세례를 받았고, 바로 그 간수의 집에서 빌립보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빌립보교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에 세워진 모든 교회들이 자기 집을 교회로 내놓아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를 통해 가족 이기주의 뛰어넘는 형제자매 공동체가 탄생한 것입니다. 집에서 시작했지만 가족을 뛰어넘었습니다.
한마디로 “거듭난 가족”, “가족의 거듭남”입니다. 그것은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 가족의 사회화, 사회의 가족화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가족이기주의를 넘어선 진정한 가족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말합니다. 가정과 같은 사회에서 가족과 같은 이웃과 함께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집단을 꼽으라 한다면 가족일 것입니다. 자기 가족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가족의 경계를 뛰어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가장 큰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랑은 무엇입니까? 가족 간의 사랑일까요? 아버지의 사랑일까요? 어머니의 사랑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크신 사랑입니까? 우리는 가장 큰 사랑 안에서 가족의 관계를 재해석하여 사랑으로 섬기는 가족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또한 이 사랑이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가족을 사랑으로 묶어줍니다. 또한 이 사랑은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약자를 향한 사랑으로 번져나가게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우리의 가족도, 우리의 이웃도 행복한 하나님의 가족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 가족과 이웃이 함께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베갯머리 밥상머리
신 6:4-9 / 박봉수 목사(상도중앙교회)
일전에 자녀교육에 대해 특강을 요청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젊은 엄마들부터 나이 많은 여자 분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제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엉뚱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에게 자녀는 무엇인가?, 자녀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여러 분들이 저마다 다양한 답을 주셨습니다. 그 중에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답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비장한 표정으로 답을 하셨습니다. “자식이요? 원수지요! 그것도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긴 원수지요” 이분이 그렇게 답한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청상과부로 아들 하나를 키웠답니다. 그렇게 배우지도 못하고 가진 것 없이 나이 30에 두 살짜리 아들을 남겨두고 남편이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로 억척같이 살았답니다. 다행히 아들이 총명해서 공부를 잘했답니다. 제대로 과외나 학원도 보내지 못했지만 힘닿는 대로 뒷바라지를 했는데 늘 1등을 했답니다.
어느덧 아들이 커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대학에 입학을 했답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뒷바라지를 했답니다. 공부를 잘해서 미국에서도 제일 좋다는 대학에 박사과정에 입학해서 유학을 했답니다. 집을 줄여서 힘껏 유학 뒷바라지를 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청천벽력과 같은 편지 한 통이 날라 왔답니다. 자기가 학교에서 백인 아가씨와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때가 되면 한국에 와서 인사시켜드리겠다는 것이 전부였답니다. 그리고 5년이 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니 중고등학교 때도 아들은 못 배우고 가난한 엄마를 부끄러워해서 친구들에게나 선생님에게 소개해 본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한 번도 자기는 아들 학교에 가본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혼하면서도 결혼식에 오라는 말도 없고 누구와 결혼하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연락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이분은 평생 아들이 잘 되기만을 위해 억척같이 살아왔는데 결국 아들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기가 막히더랍니다. 그래서 자식을 원수라고 생각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여자분이 흐뭇한 표정으로 답을 하셨습니다. “자녀는 선물이지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보내주신 선물이지요” 이분도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분은 정말 남부럽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신랑감을 만나서 결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선남선녀가 만나서 가정을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딸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정신지체장애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놀랍고 부끄러워서 울기도 많이 울었답니다. 선남선녀인 자기들에게 이런 아이가 태어난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원망하고 아이가 너무도 밉고 원망스럽더랍니다. 그리고는 너무도 힘든 시간을 보냈답니다.
그러던 중에 부부가 말씀을 듣다가 크게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기 부부에게 이 아이를 보내주셨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기 두 사람이 감당할만하다고 여겨주셔서 이 아이를 맡겨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바꾸게 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아이를 사랑으로 잘 양육해 보자고 다짐했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아이가 비록 정신지체로 누구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그 성품이 천사처럼 곱고 예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이 힘을 다해서 이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았습니다.
감사하게도 이 아이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래서 정신지체 3등급까지 나아지더랍니다. 학교도 가게 되고, 심지어 정신지체장애인을 받아주는 대학도 가게 되었답니다. 어느 날 이 아이가 학교 숙제로 편지를 보냈는데 “엄마 아빠 정말 고마워요! 나를 딸로 사랑해 줘서 고마워요”라고 썼더랍니다. 그날 부부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 없이 울었답니다.
이분은 이 아이 때문에 자기들이 너무도 큰 복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우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어서 믿음으로 살다보니 믿음의 복을 받게 됐답니다. 그리고 부부는 함께하지 않을 수 없어서 협력하다보니 정말 부부가 깊이 사랑하고 존중하게 됐답니다. 그리고 딸이 아름답게 자라는 것을 보면서 행복을 느끼게 됐답니다. 그래서 자식을 선물이라고 생각하게 됐답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은 누구에게는 원수도 되고, 또 누구에게는 선물도 됩니다. 그 차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원래 아이가 원수로 태어나고 또 원래 선물로 태어나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아이를 원수로 만들거나 선물로 만드는 것은 다 부모 자신입니다. 부모가 어떻게 자녀를 양육하느냐에 따라 아이는 원수도 될 수 있고, 또 선물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저들을 저 우상숭배가 창궐하고 있는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잘 양육하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녀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양육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저들에게 신앙의 대잇기를 잘하여 앞으로도 계속 자손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자녀들은 사명입니다. 선물이거나 원수이기 이전에 우리에게 자녀들은 사명입니다.
그러면 자녀 양육의 사명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요? 본문 7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씀에 순종해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오랜 세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오면서 나름대로 독특한 교육방법들을 발전시켜왔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베갯머리 교육’과 ‘밥상머리 교육’입니다. 이 방법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베갯머리 교육
이스라엘 백성은 자녀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양육해 가는 비법 가운데 하나로 소위 ‘베갯머리 교육’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방법은 그야말로 잠자리 베갯머리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입니다. 주로 엄마가 담당했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잠들기 전 잠자리를 찾습니다. 먼저 창문은 잘 닫혔는지, 아이가 잠옷은 잘 입었는지, 그리고 이불은 잘 덮었는지 잠자리를 살핍니다.
잠자리를 살핀 뒤 아이의 베갯머리에 앉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하루를 돌아보게 합니다. 좋았던 일들을 칭찬해 줍니다. 그리고 마음 아팠던 일들에 대해서는 위로해 줍니다. 엄마에게 야단맞아서 속상했던 마음은 풀어줍니다. 그래서 평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게 해 줍니다.
이제 아이에게 성경말씀을 읽어줍니다. 약 15분 정도 말씀을 읽어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중심으로 대화를 시작합니다. 그 말씀에 대한 아이의 느낌과 생각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기초로 꿈을 꾸게 합니다. 그래서 아이는 잠을 자면서 말씀에 기초해서 자기의 미래를 상상하게 되고 하나님과 함께 펼쳐가게 될 자기의 내일의 꿈을 꾸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아이를 위해 기도해 줍니다. 그리고 입을 맞추고, ‘사랑한다 잘 자라’ 인사를 나누고, 방을 나옵니다.
이 베갯머리 교육의 장점은 이런 것들입니다. 우선 믿음의 아이들로 자라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마음속에 믿음의 씨앗이 뿌려집니다. 아이들이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품속에서 잠자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아이들이 믿음의 아이들로 자라게 됩니다.
다음으로 성품이 아름답게 자라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평안한 마음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매일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깊이 느끼며 잠을 청하게 됩니다. 그 성품이 모난 곳이 없고 거친 곳이 없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갖춰가게 됩니다.
그리고 좋은 습관을 갖게 됩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잠자는 습관을 갖게 됩니다. 책 읽는 습관을 갖게 됩니다.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습관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건강하고 능력 있는 아이로 자라가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하고 있습니까? ‘공부! 공부!’하며 조급한 마음에 신앙은 뒷전으로 미뤄놓고 학업에만 몰두하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앙도 잃어버리고 성품도 일그러지게 됩니다. 이것이야 말로 아이를 망치는 길입니다.
독일의 괴테는 역사상 최고의 천재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정치가에 과학자에 시인에 작가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던 사람입니다. 특히 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베스트셀러에서 [파우스트]라는 대작에 이르기까지 걸작을 쏟아놓아 대문호라는 찬사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노년에 괴테는 오늘의 자기를 있게 해준 근원으로 어린 시절 자기 어머니의 ‘베갯머리교육’을 꼽았습니다. 괴테의 어머니 카트리나는 원래 별로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이었습니다. 겨우 독일어를 깨우쳐서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카트리나는 매일 저녁 전래 동화 한편씩을 아들 괴테에게 들려주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마지막 결말 부분은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괴테에게 마지막 부분을 완성해 보라고 했습니다. 괴테는 자기 나름대로 상상하고 추리하며 이야기를 완성시켜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괴테는 문학적 상상력을 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괴테는 오늘의 자기가 있게 된 결정적인 비결로 자기 어머니의 이 베갯머리 교육을 꼽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베갯머리 교육은 아이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키워낼 뿐 아니라 위대한 인물로 자라나게 해 줍니다. 세상에서도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자라게 해주는 든든한 기초를 만들어주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본받아 실천할 필요가 있는 교육입니다.
밥상머리 교육
이스라엘 백성이 자녀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양육하면서 발전시킨 또 하나의 교육 방법이 ‘밥상머리 교육’입니다. 이 방법은 그야말로 밥상 즉 식탁에서 이루어는 교육입니다.
유대인의 밥상머리 교육은 안식일 만찬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안식일 하루 이틀 전부터 음식을 준비합니다. 마치 손님을 식사 초대하듯 음식 장만을 합니다. 이 때 가족들이 함께 장도보고 음식도 준비합니다. 안식일 오전 회당 예배를 드리고 와서 저녁 만찬에 온 식구가 다 함께 자리에 앉습니다.
이 때 아버지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식사가 시작됩니다. 아버지는 기도를 마치고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주면서 축복합니다. 천천히 식사를 나누면서 한 주 동안 있었던 일들을 나눕니다. 서로 궁금한 것은 묻고 답하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축복하며 대화의 꽃을 피웁니다. 특히 자기의 고민을 이야기하며 조언을 구합니다. 서로 나름대로 생각을 나누며 함께 고민을 풀어갑니다. 이 때 화를 내거나 야단치거나 비판하는 일은 삼갑니다.
대화하며 식사가 끝이 나면 디저트를 먹으면서 말씀공부를 합니다. 아버지가 그날의 말씀을 읽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해 자녀들에게 묻습니다. 자녀들은 답하면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함께 말씀을 나누면서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갑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은 필수로 가족들이 밥상머리에 모였고, 또한 할 수 있는 대로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떤 집은 안식일 이외에 하루나 이틀 더, 열심인 집은 매일 저녁을 식탁에 모여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 밥상머리 교육의 장점은 이런 것들입니다. 우선 가정 안에 하나님께서 임마누엘하신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운 가정이시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가정이라는 점을 깊이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가정이 주 안에서 하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 식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면서 사랑 안에 하나라는 사실을 깊이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문제를 말씀 안에서 풀어갈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갖가지 문제를 만날 때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해주고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여 문제를 풀어갈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찬 559장은 가정을 주제로 하는 찬송가 가운데 대표적인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분들이 작사 작곡하여 더 친근합니다. 이 곡의 3절 가사가 이렇습니다.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 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온 식구가 식탁에 둘러 앉아 함께 먹고 마시며 말씀을 나누고 기도를 드릴 때 여기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임마누엘의 역사가 나타나는 가정이 곧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이런 천국을 맛보며 자랄 때 하나님의 자녀로 잘 자라게 됩니다. 우리 자녀들이 이런 천국 안에서 성장할 때 이 세상을 천국으로 바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밥상머리 교유을 실천해 갈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어린이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어린이들에 대해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그 어린이들이 내 마음에 들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어린이들이 나를 기쁘게 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셨기 때문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비록 그 어린이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때로는 나를 실망시킨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셨기 때문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이 어린이들에 대한 우리의 사명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 어린이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키워야 한다는 사명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단지 성공하고 출세하는 사람으로 키울 것이 아니고, 장차 내 노후를 책임져줄 사람으로 키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 소중하게 쓰임 받을 사람으로 키워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의 가치관이 바뀌어야 하겠습니다. 삼상 16: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우리가 자녀를 교육할 때 외모에 더 가치를 둘 것인가 아니면 중심에 더 가치를 둘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대부분의 부모들은 외모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자녀를 교육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학벌, 재능, 스펙 같은 것에 우선적인 관심을 가지고 자녀를 교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심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자녀를 교육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서로 사랑하고, 올바른 성품을 갖는 것에 우선적인 관심을 가지고 교육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교육방법입니다. 베갯머리 교육과 밥상머리 교육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여건에 맞게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녀들을 잘 교육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축복입니다.
부지런히 가르치라
신 6:4-9 / 김상복 목사
우리에게는 많은 선생님들이 계십니다. 학교 선생님들을 통해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두루 지식을 배웁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께도 배우는 것이 많지요. 지금 제가 암송하는 성경구절 대부분이 교회학교에서 배운 것들입니다. 매주 한 구절씩 암송을 하고 종종 성경암송대회를 하면서 대표적인 장들을 하나씩 외웠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영어로 성경구절들을 외웠는데 지금 제가 영어로 설교를 할때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다 선생님들의 도전과 격려 때문에 암송한 것들입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좋은 선생님입니다. 우리는 책을 통해 그들이 연구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얻습니다. 자연도 우리의 선생님입니다. 솔로몬도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해서 지혜서 잠언을 썼습니다. 작은 개미 한 마리를 관찰해도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과학은 자연을 연구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을 자세히 연구해보면 그 속에 엄청난 지식과 지혜가 들어있는 것을 봅니다. 거기서 어떤 원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적용하고 사용하는 것이 과학이요, 기술입니다.
성경도 큰 선생님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죄와 선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와 수천 년간의 수많은 사건과 사람들의 예속에 삶의 보화들이 들어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선생님이십니다. 제가 부모 없이 10대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것도 이 성경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이 부모 역할을 대신 해주고도 남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에게는 또 위대한 스승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와 성경, 예배, 성령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하나님 이외에 이 땅에서 가장 위대한 선생님을 말하라면 바로 부모님일 것입니다. 부모님은 20~30년 동안 자녀들에게 인생의 모든 것, 실천적 지식뿐 아니라 지혜와 삶의 방법과 목적을 가르쳐주십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인데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몸소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 시대 부모님들이 많은 자녀들을 키우셨는데, 요즘은 한둘 키우기도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요. 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 젊은 엄마를 만나 “요새 아이들 잘 크고 있죠?”라고 물었더니 그 엄마가 얼굴색이 변하면서 “목사님, 아이들 키우는 것이 무서워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이들을 잘 키우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 지,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답니다. 다른 엄마들을 보면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에 아이 키우기가 무섭다는 것이지요. 그 엄마의 마음에 상당히 무거운 짐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 분과 오래 대화를 나누고 위로하고 기도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엄마의 두려움을 제거해주시고 지혜와 은총을 주셔서 자신감을 회복하고 하나님과 함께 아이들을 키울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아멘!”한 후에 눈을 뜨고 보니 이 엄마가 얼마나 울었는지 눈에 눈물이 넘쳤어요.
사실 우리 대부분이 오랜 세월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도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지, 가정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릅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서 대학 교수가 된 여자 분이 있는데, 직장 다니면서 아이가 잘 크는지 종종 묻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 엄마도 “목사님, 불안합니다”라고 해요. 전 세계의 좋은 아기 교육 프로그램이 우리나라에 다 들어와 있고, 자기는 어느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다른 엄마들은 알아서 잘 하고 있더래요.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지만 엄마 역할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없고 불안한 것입니다.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없고 처음 하는 일이니 젊은 엄마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위에는 아이들을 위협하는 나쁜 친구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우리 아이들을 망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3절에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라고 했습니다. 친구가 나쁘면 우리 아이들을 망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생활에서 미숙한 아이들끼리 늘 같이 있으니까 서로 나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아이들이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성숙한 역할모델이 필요합니다. 성숙한 부모님, 성숙한 학교 선생님, 성숙한 교회학교 선생님, 또 좋은 책들, 좋은 환경 이런 것들이 아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또래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이상하게도 혼자서는 괜찮던 아이가 친구 두세 명과 어울리면 문제를 일으킵니다. 아마 여러분도 자식들 때문에 깜짝 놀란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우리 아이가 이런 생각과 행동을 할까 놀란 적이 있습니다. 친구들의 영향입니다. 나쁜 친구는 나쁜 습관을 만드는 위험이 있습니다.
연예계나 TV, 영화도 나쁜 영향을 얼마든지 끼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나쁜 것을 보려면 나쁜 곳에 몰래 가야 했지만 요즘은 집에서 인터넷 버튼 하나만 누르면 전 세계의 온갖 것을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전문가들은 컴퓨터를 아이들 방에 두지 말고 거실에 두라고 제안합니다. 저는 지난 주에 열린 ‘변혁한국 세미나’에서 어느 인터넷 전문가가 발표하는 내용을 듣고 보면서 무척 놀랐습니다. 초등학생들이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는 모습을 녹화해서 보여주었는데 아이들이 게임을 하면서 뭐라고 계속 중얼거려요. 남자아이, 여자아이를 막론하고 모두 험한 욕들을 계속 하면서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총으로 상대방을 쐈는데 안 죽으면 자기가 지면 욕하고…. 우리나라는 게임을 만들어 전 세계에 수출하는 게임 왕국 아닙니까? 우리 아이들이 이런 게임을 통해서 나쁜 습관이 생기고 인격이 망가집니다.
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일은 뉴스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재미가 없으니까요. 나쁜 사건도 아주 고약해야 뉴스거리가 됩니다. 제가 국회에서 열린 공개 토론문화 변혁에 관한 세미나에서 새롭게 배운 것이 있습니다. 토론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국회가 토론을 잘 해서 국민에게 유익한 것을 법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국회의원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국회가 1년에 1500~2000건의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그 중의 97%는 여야가 의논하고 합의해서 잘 통과시킨다고 합니다. 나머지 2~3%가 여야의 의견이 맞지 않는데, 잘 의논해서 법안을 무난하게 통과시킬 때는 기자들이 안 나타나다가 그 2~3% 때문에 소리 지르고 다툴 때 어디서 왔는지 카메라를 들고 모두 나타난답니다. 그것을 대서특필해서 국회의원들은 늘 싸움만 하는 싸움꾼으로 만드니 얼굴이 뜨거워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사실을 미처 몰랐거든요. 97%에 대해서는 잘 한다는 것이니 고마운 일입니다. 언론에서 나쁜 일들을 계속 보도하면 국민들의 마음이 어두워지고, 정신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자라는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칩니다. 어릴 때 본 것 들은 것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분위기를 나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언론도 변해야 합니다.
후손들을 잘 키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면 우선 부모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수학, 영어, 지리 등의 지식은 가르치지만 내 자녀의 인격을 키워줄 수는 없습니다. 인생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며, 우리의 사명이 무엇이며, 어떤 가치관을 심어줄것인지, 어떻게 하면 좋은 인격을 형성할 수 있는가는 부모의 책임입니다.
성경본문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을 가르치라고 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부모가 가르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의 선이며 그것은 부모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순종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엡6:2)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종종 자녀가 부모를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가 자녀에게 순종하는 일이 있습니다. 혹시 아이들이 부모를 싫어하게 될까봐 아이들의 마음에 맞추느라고 아이들에게 순종하며 사는 부모들이 제법 보입니다. 하지만 순종과 공경은 자녀들의 몫입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 진리로 아이들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물론 당장은 아이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분 나빠 하고 반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20~30년 후에 그 아이들이 부모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부모에게 고마워 할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신앙생활을 잘 하시는 훌륭한 분이 계십니다. 너무 감동적이어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그 분의 아버지는 장로님, 어머님은 권사님이셨는데 아버지가 너무 엄격하셔서 한 번도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고 합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수십 년을 낭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대학 시절에 밤에 자다가 깨서보면 항상 어머니가 엎드려서 자기 이름을 부르며 눈물로 기도하시더랍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자기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시던 그 어머니의 모습이 그 분을 다시 주님께로 돌아오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들을 감화시킨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성품’이란 지정의(知情意),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말하며 ‘힘’이란 열정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신앙의 본이 아이들 교육의 첫째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가능합니다. 왜 가능한가? 사도행전 2장 17절에, 말세가 되면 악은 악대로 성하지만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라고 하십니다. 성령이 우리 자녀들에게도 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 말씀대로 살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또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하나님이 주시는 미래를 바라보고 꿈을 꾸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비전을 품는 젊은이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이와 같기를 원합니다.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나이가 든 사람들도 자기 자신을 위한 꿈, 자녀들을 위한 꿈, 교회를 위한 꿈, 사회와 세계를 위한 꿈을 꾸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세에 비록 악이 성하지만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변화를 주시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희망이 있고 기대가 있고 기도가 있기를 원합니다.
조금 전에 우리는 잠시 동영상을 감상했습니다. 두 살짜리 여자 아이가 영어로 주기도문을 탁월하게 노래하는 모습이었지요. 다른 하나는 같은 또래의 남자 아이가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윗옷을 벗고 어른 흉내를 내면서 기타를 치며 이상한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그렇게 노래하도록 누가 가르쳤을까요? 부모입니다. 재미는 있으나 감동은 없었습니다. 두 유형의 부모가 여기 있습니다. 한 부모는 그저 재미를 위해서 아이를 가르치고, 다른 부모는 하나님의 말씀과 찬양을 가르치고 죄의 용서를 가르치고 유혹에 빠지면 안 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함을 가르칩니다. 부모가 먼저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득 채워야 이것이 가능합니다. 자기 속에 들어있는 것만이 밖으로 나옵니다. 없는 것이 어떻게 나올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섬기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제가 가끔 여러분의 집에 가 보면 성경말씀이 적힌 액자를 걸어놓은 것을 봅니다. 아이들이 매일 그 앞에 서서 그것을 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 20년, 30년 동안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오며가며 그 말씀을 봅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말씀이 아이들의 영혼을 살립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부모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과 헌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결국 부모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이 성숙한 삶을 가르칠 때 그들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성숙해 질것이고 삶의 의미와 목적과 방법을 배워서 하나님 나라에 귀하게 쓰임 받고 이 사회와 민족을 위해 가치 있는 공헌을 하는 지도자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잠언 22장에 보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6절)고 합니다. 아이들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싫어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20년 후에는 여러분에게 감사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어려서 심어놓은 그 진리, 그 하나님, 그 사랑, 그 지혜가 자녀의 평생을 이끌어가는 축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젠가 여러분과 저에게 질문하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내가 너를 부모로 만들어주었고 자식들과 손자와 손녀를 주었는데 너는 과연 어떤 부모였느냐?” 내가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그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순종하며 살면서 내 자손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도록 훈련했는지 물으실 것입니다. “주님, 제가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내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려고 애썼습니다. 하나님은 제 마음을 아십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칭찬받는 부모가 되기를 원합니다.
요구자의 요구에 집중하라
신 6;4-9 / 강문호 목사
사형수가 왕에게 간청하였습니다.
<한번만 살려 주시면 왕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겠습니다.>
왕은 정말 자기 말에 충성을 다 하는지 실험하여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물을 담은 컾이 있다. 이 컾을 손바닥에 받쳐 들어라. 그리고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오면 살려 주겠다. 물만 보고 돌아 오거라.> 사형수는 어차피 죽을 몸입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조금만 흔들려도 물이 흘러내릴 정도로 가득 채웠습니다. 물 한 방울이 생명입니다. 그는 물 컾을 두 손에 받쳐 들고 마을을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참 후에 왕에게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폐하! 돌아 왔습니다.>
<정말 돌아 왔느냐?>
<네.>
<그러면 동네 우물에서 여자들 몇 명이 빨래 하고 있었느냐?>
<모릅니다.>
<나무 그늘에 할아버지들이 앉아서 무엇을 하더냐?>
<모릅니다.>
<누구 집 마당에 아이들이 가장 많이 뛰놀더냐?>
<모릅니다.> <이 놈아! 안 돌아 왔구나?>
<폐하! 틀림없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도 모르느냐?>
<폐하! 물 한 방울이 내 생명이기에 나는 물만 보았습니다.>
왕은 그를 살려주었습니다. 요구자의 요구에 집중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구자의 요구를 잘 요리하여야 합니다.
아랫사람은 윗 사람의 요구를 잘 요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요구를 잘 알고 요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가장 큰 요구는 무엇일가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4-9)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신가요?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어떻게 사랑하기를 원하고 계신 것일 가요?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생명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녀 노소 불문하고 이 말씀을 모두 암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죽에 이 말씀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마에 붙입니다. 테피린이라고 합니다. 팔목에도 붙입니다. 그리고 대문이나 드나드는 문 앞에 입높이에 메주자라는 상자를 붙여 놓습니다. 그 안에 이 말씀을 넣어 둡니다. 그리고 문으로 드나들 때마다 입을 맞추고 살아 갑니다.
호텔방문 앞에도 이 말씀이 들어있는 메주자가 붙여있습니다. 호텔방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입을 맞춥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요구입니다. 그 요구에 우리는 집중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요구자의 요구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1. 마음을 다 하는 <마음 사랑>
2. 성품을 다 하는 <성품 사랑>
3. 힘을 다 하는 <힘 사랑>을 하나님은 요구하고 계십니다.
1. 마음 사랑
<마음을 다 하고....>
마음은 내 마음대로 방향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인천가고 싶다면 인천으로 가게 됩니다. 부산 가려고 마음먹으면 부산으로 가게 됩니다. 마음이 방향입니다. 마음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나님은 요구하고 계십니다.
<무릇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진 민족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민족 축복의 비결은 민족 전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국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영국 왕 킹제임스는 성경을 일반 사람들이 알기 쉽게 번역하여 보급하였습니다. 이 성경이 그 유명한 King James Version입니다. 그리고 온 세계에 예수를 전하며 복음을 전하고 싶고 성경을 전하고 싶어서 세계를 점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라를 점령하면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성경을 보급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나라를 점령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나왔습니다.
<영국 땅에는 해가 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마음을 가지고 애쓰는 나라를 마음껏 밀어 주십니다.
덴막도 마찬가지입니다.
덴막 민족은 본래 바이킹족입니다. 바이킹족은 해적입니다. 바다에 진을 치고 있다가 지나가는 배로 다가가서 배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바다에 던져 버리고 배에 있는 물건들을 노략질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유럽에 다니는 상선들은 바이킹 족, 데막 해적들을 가장 무서워하였습니다. 잔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이킹 해적이 고드족을 점령하였습니다. 고드족은 로마를 멸망시킨 강적이었습니다. 고드족을 점령하고 여자들을 데려다가 하녀로 심부름을 시키고, 첩으로 데리고 살았습니다. 품속에 있는 여자들을 통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고귀한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해적생활을 청산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마음을 가졌습니다. 정직하게 살며 열심히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일등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룬드비 목사님이 덴막을 부흥시킨 위대한 정치가가 되었습니다. 그룬드비 목사님은 덴막을 부흥시키는 정치가가 되어 3가지 표어를 실천하였습니다.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이웃 사랑>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요구자의 요구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마음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사랑하여 주히고 보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 하여 사랑하는 기업도 축복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지금 제일 진하게 체험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서울랜드가 성막으로 예수님을 전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서울랜드 입장료가 15,000원입니다. 성막을 보러 왔다고 하고 주보를 가지고 가면 4,000원입니다. 7월 12일 개장하였습니다. 한 달 남짓 넘었습니다. 3만 명이 넘었습니다. 한 사람이 10,000원은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3억원 수입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니까 하나님이 보기 좋게 축복하시고 계십니다. 다음으로 <성전> 계획에 들어 갔습니다. 내가 시작하면 시작입니다. 성전을 <재림 예수님>으로 풀면서 전시회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성막보다 재료가 더 많습니다. 더 잘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잡히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요구자의 요구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2. 성품 사랑
<성품을 다 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품을 다 하여 사랑>하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성품을 다 하여 사랑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가요? 성품은 의도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품은 몸에 밴 성질입니다. 고칠 수 없는 천성입니다. 누구 말 대로 예수님이 오셔도 고칠 수 없는 천성입니다. 몸에 밴 성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억지가 아닙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그네가 지나가는 데 흙에서 향기가 진하게 풍겼습니다. 나그네는 흙을 한 줌 집어 봇짐속에 넣었습니다. 여기로 가도, 저기로 가도 나그네 몸에서 향기가 풍겼습니다. 너무나 진하고 좋았습니다.
나그네는 여인숙에 개나리 봇짐을 풀어 놓고 그 흙을 한 줌 올려놓고 물어 봅니다.
<향기나는 흙아! 너는 인도의 사향이냐? 바그다드의 순향이냐?>
흙이 말합니다.
<나는 흙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향기가 나니?>
흙이 대답하였습니다.
<내 위에는 향내나는 백합꽃이 피여 있었지요.>
그렇습니다.
그 흙은 아예 향으로 젖어 있었습니다. 영원히 닦을 수 없는 향으로 염색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성품이 아예 하나님 사랑으로 염색되어져 있어서 누가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성품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몸에 배도록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이한 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책>하면 <성경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에게 <책 가지고 오시오>라고 말할 때 <무슨 책이요?>라고 물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책이라면 성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집>이라면 하나님의 집 성전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라>라면 이스라엘 나라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분>이라면 하나님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날>이라고 하면 안식일을 말합니다.
기본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에는 휴지가 날라 다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라는 글자가 쓰여진 휴지가 날라다니면서 더럽혀지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강대상에는 인쇄된 성경을 가지고 올라 갈 수가 없습니다. 꼭 손으로 쓴 성경만 가지고 올라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베끼다가 하나님이라는 글자가 나오면 목욕을 하고 새 붓을 가지고 써야 합니다. 감히 하나님이라는 글자를 목욕도 하지 않은 더러운 몸이나 다른 글자를 쓴 붓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본적으로 무척 사랑합니다.
이것이 성품을 다 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품을 다 하여 사랑하여 주시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요구자의 요구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마음을 다 한 사랑보다 성품을 다 한 사랑이 더 차원높은 사랑입니다. 의도적인 사랑이 아니라 완전히 젖어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재혼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어린 자식을 하나 데리고 재혼하였는 데 공교롭게도 자기 아들과 같은 동갑 아들이 재혼한 남자에게도 있었습니다. 쌍둥이처럼 둘을 길렀습니다. 재혼한 부부는 두 아들을 같이 데리고 한 방에서 잤습니다. 재혼한 여인은 지혜로웠습니다. 데리고 온 자기 아들보다 남자의 아들을 더욱 사랑하였습니다. 먹을 것도 먼저 주고 많이 주었습니다. 옷도 더 잘 해주고 더 잘 빨아 주었습니다.
무엇이 든지 더 잘 해주었습니다. 가정을 평화롭게 이끌어 가는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잠을 잘 때 남자의 아들은 더 따뜻한 곳에 누워자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더 잘 해주는 데도 그 남자의 아들은 몸이 그저 그랬습니다. 그런데 데리고 온 아들은 건강하였습니다. 살도 포동포동 찌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몰래 더 먹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분이 잠자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원인을 찾아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밤에 잠자리에 누웠는 데 엄마의 사랑의 텔레파시가 멀리 떨어져 자는 아들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보이지 않게 사랑의 줄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 아들을 끼고 자는 것이 아니라 남자의 아들을 끼고 가는 데도 사랑의 텔레파시는 멀리 자는 아들에게 닿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여인은 남자의 아들은 마음의 사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들은 성품의 사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의 사랑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것이 성품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다 하고 성품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 주시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요구자의 요구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3. 힘 사랑
<힘을 다 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다 하여 사랑하여 달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진실로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하나님을 힘을 다 하여 사랑하고 계십니까?
힘을 다 하십니까?
힘 사랑은 눈에 보이는 사랑입니다. 마음 사랑이나 성품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힘 사랑은 눈에 보입니다. 행동입니다. 열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힘 사랑일가요? 우리 교회 표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성도들을 행복하게.>
이것은 우리 교회 평생 표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몇 가지 면에서 힘써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면에서 하나님을 힘써 사랑하고 있습니다.
1. 선교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일 요구하시는 것은 영혼구원입니다. 특별히 지역 선교, 국내 선교는 물론 해외 선교까지 원하고 계십니다. 땅끝까지 복음이 증거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동안 파나이 섬에 230 개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10,000 성도가 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면류관이요 우리의 자랑입니다. 우리는 파나이섬 선교를 힘써 하고 있습니다. 감리교회중에는 가장 교회를 많이 건축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밖에 10,000명을 이루었으니 안에 10,000명을 주리라.>
앞으로도 더 힘써 선교하여야 합니다.
2. 전도 1225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되 힘을 다하여 사랑하여 달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길이 또 있습니다. 전도입니다. 금년에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194명이 늘었습니다.
요즈음은 출석인원이 매주 20명 정도씩 늘고 있습니다. 금년은 이제 4달 남았습니다. 4달 동안 두 번 전도 운동이 있을 것입니다.
한번은 10월 김 옥례 전도사님 부흥회를 앞두고 전도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100명을 전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12월 25일 성탄절을 앞두고 또 1225명 전도운동을 벌릴 것입니다. 작년에 780면 전도하고 2007년도를 마무리하였습니다.
금년에도 12월 25일에 1225명 영혼 구원 운동을 펼치면서 마무리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힘을 다 하여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3. 기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 달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힘을 다 하여 사랑하는 길이 또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대화한다는 말입니다. 대화없이 사랑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너무나 바빠 만날 틈이 없이 일하고 다니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무 세상만 보지 말고 나 좀 보자. 나와 조용히 만나 보자. 나와 이야기 좀 하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내 생활속에 기뻐하시는 분야가 하나 있습니다. 강대상에 올라가기 전에는 반드시 기도실을 통하여 올라가는 것을 그렇게 기뻐하십니다. 무슨 설교를 하든지 30분 전이면 기도실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마음을 정리하고 하나님과 영성을 교통한 후에올라가는 버릇이 습관화되었습니다. 미셀 코렐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설교하신 후에 그를 통하여 흐르는 영성입니다. 미셀 코렐은 미국에서 가장 은사운동에 거두였던 오스카 쿨만의 수제자입니다.
우리는 힘을 다 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요구자의 요구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4. 십일조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중에 하나가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을 행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의 열매가 십일조입니다. 소득의 십분의 일을 온전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열매입니다. 사랑의 표시입니다.
5, 주일 지키기
주일은 안식일로서 하나님의 날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안식하시면서 우리에게도 안식하면서 하나님은 예배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천지창조부터 요구사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식일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지난 주간 북경 올림픽이 끝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에는 모조리 출전하지 않았습니다. 금 메달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요구에 집중하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크게 축복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못 딴다 할 지라도 노벨상을 휩쓸고 있습니다. 모든 면에 선진국으로 세계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중국 수상이 세계 5대 정상을 초청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5대 정상에 들지 못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수상은 5대 정상에 들고 있습니다. 강원도보다 조금 큰 나라입니다. 500만 인구입니다. 그래서 5대 정상입니다. 그런데 거절하였습니다. 알고보니 안식일이 끼어 있었습니다. 수상의 말입니다.
<나는 5대 정상 회의보다 안식일에 예배가 더 중요합니다.> 중국에서 말했습니다.
<정상 회담중에 안식일이 한번 끼어 있는 데 예배드리도록 회당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거절하였습니다. 혼자서 예배드릴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요구게 집중하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요구자의 요구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스라엘아 들으라
신명기 6장 4~9절 / 정필도 목사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녀교육에 대한 열의가 대단해서 교육열이 세계 1위라고 합니다. 이렇게 자녀교육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자녀교육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목적과 가치관이 잘못되어 있고, 방향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교육이라고 하면 많은 지식만 넣어주면 되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식이 얼마나 많은가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머리가 좋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닌데, 덮어놓고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모여서 경쟁하는 수학경시대회에서 우리나라 학생들이 1등을 많이 합니다. 미국에 가서도 졸업할 때 대통령상을 받는 학생이 제일 많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전 세계가 존경하는 위대한 인물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집을 나설 때 한국의 부모들은 “얘야, 누구한테도 지면 안 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부모들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마라!”고 하고, 미국의 부모들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사람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남에게 항상 도움과 유익을 주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환영받고, 그 사람만 있으면 분위기도 좋아집니다. 둘째는 있으나 마나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남에게 관심이 없고, 자기 할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는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남에게 해를 끼쳐서 어디를 가든지 환영을 받지 못하고, 배척을 받습니다.
교육의 목적은 남에게 도움을 주고 유익을 주는 사람을 만드는 데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대학인 하버드에서는 학생들을 선발할 때 이 학생의 고등학교 점수가 얼마인가로 선발하지 않고, 이 학생이 무엇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를 보고 뽑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입생을 모집하면 어떤 학생은 382점, 어떤 학생은 150점, 이렇게 성적 차이가 커서 1학년 때는 고등학교와 비슷하게 기초부터 공부를 시킨다고 합니다. 이것은 공부를 잘하게 하는 것, 지식과 성적은 얼마든지 올릴 수 있지만, 미래에 그 학생이 세계와 민족을 위해서 얼마나 봉사하고 큰 일을 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외웠느냐, 얼마나 똑똑한가로 학생을 선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난번 하버드 대학신문에 이런 기사가 나왔습니다. 할렘 가에서 살아가는 어떤 여학생이 있는데, 그 학생은 부모가 이혼하고 재혼하여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너무 가난해서 길거리에서 잠을 자는 일도 많고, 학교에 가지 못해 가로등 밑에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버드 대학에 들어오고 싶어 지원했다고 합니다. 학교 성적은 엉망이지만 하버드에서는 이 학생을 신입생으로 받아주었습니다. 그것은 이 학생이 이런 가정환경에서, 이런 어려움과 가난을 이겨내는 것을 보니 세계를 향해서 큰 일을 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세기의 정치가요 위인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인기 절정일 때의 일입니다. 한 신문사에서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그를 가르친 선생님들을 조사해서 『위인을 만든 스승』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냈습니다. 처칠은 이 기사를 직접 읽고 나서 이런 메모를 신문사에 보냈다고 합니다. ‘귀 신문사의 조사에 치하를 보냅니다. 그러나 나의 가장 중요한 스승 한 분을 빠뜨렸습니다. 그분은 바로 나의 어머니입니다. 나는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많은 선생을 만났고 많은 교수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생들은 나에게 지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에게 사람됨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선생들은 자기 나름의 뜻이 있어서 교육을 하지만 어머니만은 진정으로 사랑으로 가르치신 최선의 교육자이십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됨’을 가르쳐주신 어머니가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었다는 것입니다.
미국 텍사스 주의 휴스턴 경찰국이 ‘못된 자녀를 만드는 10가지 비결’을 내놓았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① 아주 어려서부터 자녀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주어라. 그러면 그 아이는 온 세상 모든 것이 다 자기의 것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면서 자랄 것이다. ② 자녀가 나쁜 말을 할 때면 그냥 웃어넘겨라. 그러면 자기가 재치 있는 아이인 줄 알고 더욱 악한 말을 하게 될 것이다. ③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어떠한 교육이나 훈련을 시키지 말고 스스로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라. 그러면 고상함은 사라지고 동물적 본능만 강렬하게 나타날 것이다. ④ 잘못된 품행을 책망하지 말고 그냥 두라. 그러면 자동차를 훔치고 교도소에 갇혀서 사회의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⑤ 자녀가 정돈하지 않는 이불, 옷, 신발 등을 정리해 주어라. 그러면 자기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어 버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⑥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책, 그림 등 어떤 것이든 마음대로 보게 하라. 그러면 그 마음은 쓰레기통이 될 것이다. ⑦ 자녀들 앞에서 자주 싸워라. 그러면 다음에 그들의 가정이 깨져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 ⑧ 용돈은 달라고 하는 대로 얼마든지 주어라. 그러면 살아가는 동안 쉽게 부패하고 타락하는 길을 걷게 될 것이다. ⑨ 먹고 싶다는 것은 다 먹이고, 마시고 싶다는 것도 다 마시게 하라. 그리고 좋아하는 것은 무조건 다 해주어라. 그러면 한 번만 거절을 당해도 곧 낙심해서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⑩ 자녀가 교사나 경찰, 성직자의 의견과 대립할 때는 언제나 아이의 편이 되어 주어라. 그러면 건전한 사회가 모두 아이의 적이 될 것이다.
우리 한국의 부모 중에는 이와 같이 교육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너무 말 안 듣는 아이를 때렸다고, 학부모가 선생님을 때립니다. 그런 자식이 사람 노릇을 잘하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무조건 공부만 잘 시키면 성공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데, 그것이 실패의 원인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자녀교육의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해야 합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을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교육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녀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부만 잘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도 아이들을 교회에 나오게 하지 않고, 교회는 대학 들어간 다음에 가도 되니까 일류 대학만 가라고 하면서 학원에 보내 놓고 이 자리에 오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아이가 사람 노릇 잘하고, 하나님을 잘 믿을 것 같습니까? 이런 부모는 자식을 멸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축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자기 노력으로 성공하고 축복받는다고 하면 성공 못 하고 축복 못 받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절대주권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병원에서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집안 식구들과 의사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습니다. 이때 아들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그토록 열심히 가르쳐 주셨기에 서울대학 졸업반이 되었습니다. 다 아버지의 은혜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아들이 힘겹게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강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졌을 때 아버지가 건져 주셨지요? 그리고 4년 전 서울 대학 게시판에 제 이름이 붙었을 때 아버지, 어머니가 저를 얼싸안고 기뻐해 주셨고요. 모든 것이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아버지는 왜 저에게 죽음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왜 한 번도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모든 것이 두렵기만 합니다.”라 말하고 그 아들이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그저 일류 학교에만 가면 되는 줄 알고, 자녀를 그렇게 키우다 보니, 예수 믿는 부모라고 하면서도 자녀에게 한 번도 예수님에 대해서 얘기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자녀가 믿음 없이 살다가 갑자기 죽음을 당하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이런 부모가 주님 앞에 설 때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되겠습니까? 자기 자식을 지옥에 보낸 부모가 어떤 모습으로 서 있겠습니까?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 복음을 우리의 자녀에게 가르치는 것이 부모의 가장 큰 의무입니다.
자녀교육에 가장 성공하고 있는 나라는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은 미국 전 인구의 3%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대학교수 중의 30%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 세계의 노벨상 수상자 중의 24%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어떻게 이렇게 뛰어날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이들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주고 암송을 시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평생 유일하신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교육을 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정이 가장 중요한 신앙교육의 장소이고, 부모가 가장 훌륭한 신앙교육가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녀들을 교육할 때 제일 먼저 교육하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라고 시작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들으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쉐마”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쉐마 교육’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대문 밖에도 써 붙이고, 문설주와 기둥에도 써 붙이고, 이것을 읽고 외우게 한다고 합니다. 특히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올 때는 이것을 읽고 외울 뿐만 아니라 이 글이 쓰여 있는 기둥에 입을 맞춘다고 합니다. 본문 7절에 보면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누웠을 때는 저녁이고, 일어날 때는 아침입니다. 그래서 아침, 저녁 하루에 두 번씩 암송을 한다고 합니다.
이 쉐마의 내용을 보면 크게 셋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5절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 사람이 정말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너무너무 사랑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모습을 볼 때 그 믿음이 대단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5절 말씀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에게 모든 복을 주시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들어와도 복 받고 나가도 복 받고,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거룩하게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아낌없이 바치기를 즐거워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쉐마의 내용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게 되면 곧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11절에는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않으려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잠언 7장 1~3절에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계명을 간직하라 내 계명을 지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날마다 실천에 옮기고, 남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말씀을 항상 마음에 새기게 될 것입니다.
쉐마의 내용 세 번째는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본문 7절에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하였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남에게 가르칠 의무가 있습니다. 특별히 자기 자녀들에게 가르칠 의무가 있고, 그래서 신앙의 대를 이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 42절에 보면 사도들은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890년도에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성질이 아주 급했고, 어머니는 남편이 죽자 알코올 중독자인 숙모에게 아이를 맡기고 도망을 갔습니다. 이후에 그 아이는 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해서 군대에 들어갔고, 그 뒤 정치 활동을 하다가 1933년 44세의 나이에 독일의 절대 독재자인 총통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이 한 사람 때문에 전 세계가 전쟁에 휘말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으며, 자신도 56세에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1890년 같은 해에, 미국 텍사스 주 데니슨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는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흡족히 받고 자랐습니다. 부모는 신앙이 신실해서 아버지는 아이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가훈을 주었고, 가족이 모두 교회에서 적극적인 봉사를 했습니다. 이 아이는 하루하루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았습니다. 이 아이가 성장해서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합니다. 그의 이름은 아이젠하워로, 후에 미국 연합군 사령관이 됩니다. 1944년 6월 6일, 히틀러와 아이젠하워 두 명의 동갑내기는 전투에서 만났습니다. 11개월에 걸쳐 싸운 결과 히틀러는 지하 반공대피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반면 아이젠하워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62세에 대통령이 되어 78세까지 살다가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똑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 두 사람의 길이 왜 이렇게 다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가정인가’의 문제입니다. 한 가정에는 하나남의 말씀이 있었지만, 한 가정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말씀으로 양육을 받았지만, 한 사람은 말씀 없는 가정에서 제멋대로 자랐습니다. 그것이 두 사람의 길을 이렇게 다르게 만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라나고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제부터라도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내 하나님 여호아를 사랑하라
신명기 6:4-5 / 정필도 목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수많은 민족이 살고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축복받은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히 택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그들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을 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원하시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 비결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신명기 6장 6절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언제든지 말씀을 강론하고 행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끝까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아서 축복받은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사신 우상을 섬기다가 매를 많이 맞고, 고난을 당하다가 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면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계명을 지키지도 않고 사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잘 살고 강대한 나라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혼돈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사신 우상을 섬겨도 잘 살 수 있으며 강대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나라 사람들의 풍습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구약성경 열왕기상.하, 역대상.하를 보면 이스라엘 나라의 왕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유다 왕들까지도 하나님을 저버리고 사신 우상을 섬기다가 망한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어리석게 하나님을 저버리고 사신 우상을 섬기는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왜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되었을까요? 이렇게 쉽게 넘어지게 된 데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데 어떻게 믿음으로 살겠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릅니다. 우리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완전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라야 신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신자가 될 수도 없고 신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인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예 하나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둘째, 그들이 축복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계명을 지키면 복 받을 것을 생각하며 복을 받기 위해서 계명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없고 오직 축복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계명을 지키는 목적은 축복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목적도 축복받기 위해서였고, 십일조를 하는 목적도 축복받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인데 그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앙상태는 껍데기만 있고, 속은 텅 비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보십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없고 오직 축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신앙은 이기적이고 기복적으로 될 때 타락하게 됩니다.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신앙이 살고 생명이 있게 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신앙이 죽고 생명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신앙은 형식만 남게 되고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구약성경 신명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을 주시면서 이 계명대로 살때 하나님이 주실 복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신명기 5장 10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나를 사랑하고’를 놓치면 안 됩니다. 신명기 6장 5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했고, 신명기 7장 9절에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라고 했습니다. ‘그를 사랑하고’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신명기 30장 15~16절에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들은 이것을 놓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계명은 저절로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심지어는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고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비극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순간 신앙이 죽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가장 경건하게 산다고 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외식주의자였고,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1장 42절에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인데 그것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 42절에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라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들에게 없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그들을 알아줘도 하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 같다고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을 왜 기뻐하는지 아십니까? 믿음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믿음의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믿음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23절 하반절에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하는 것은 헛수고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없이 예배드린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것을 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헌금을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세가 다릅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하는 것은 좋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다른 마음으로 봉사하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헛수고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일이 되면 성경책을 들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분들이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구절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다는 말씀을 매우 좋아합니다. 또, 로마서 5장 7~8절의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는 말씀을 좋아합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 말씀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부족하고 죄가 많이 있어도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 중에도 신앙이 죽어 있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교회도 생명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인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가끔 나오지만, 세상에 나가면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맛 잃은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일만 되면 교회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지만, 직분도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봉사하려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저 편하게 예수 믿다가 천국에 가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서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려고 했고, 목숨을 걸고 거룩을 지켰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해서 복음 전하는 일에 충성을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많은 물질을 바쳤고,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타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 전하는 일에 목숨을 바칠 각오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의 어느 선교사님은 우리나라 최고의 의과대학을 졸업하시고 큰 병원의 원장님으로 일하셨는데, 명예와 부를 가지고 있던 이 분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서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마음이 불타올랐습니다. 그래서 병원장을 그만두고 자신의 달란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중국의 의료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중국의 한센병 환자를 위해 병원을 세우는 등 열심히 의료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 선교사님에게 “선교사님, 한국의 안정된 직업과 명예를 포기하고 중국의 선교사로 가셨는데 힘들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자 선교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알고 난 뒤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에서 편안하게 원장으로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합니다.”
여러분, 우리 수영로교회가 왜 이렇게 계속 부흥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에서 볼 수 없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성전을 지을 때, 헌금 작정을 하지 않아도 성전을 짓고도 남았습니다. 각자 자기의 믿음대로 자원해서 드리는 헌금으로 지었기 때문에 넘치고 남았습니다. 교육관도 이렇게 자원하는 예물로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헌금을 작정하지 않고 내버려두어도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져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다음세대를 세우라
신 6:4-9 / 박봉수 목사
인류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나라를 꼽으라면 역사학자들은 예외 없이 로마를 꼽습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까지 3개 대륙에 걸쳐 가장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고, 법이나 통치체제 그리고 도로와 사회기반이 잘 갖춰져 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필적할 적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1000여년을 지탱해오던 로마가 어느 시점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결국 멸망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의 오랜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이 로마제국의 멸망의 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양한 가설들이 소개되어왔습니다. 그 중에 가장 주목받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이 제기한 가설입니다. 바로 로마가 멸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인구감소’라는 것입니다.
로마가 제국이 되어 당시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로마인들은 안락한 삶에 취하기 시작합니다.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아서 육아하는 일을 꺼리게 되고, 쾌락에 빠져듭니다. 다음세대를 세우는 일을 등한히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점차 노동력이 줄어들게 되었고, 노예들로 이를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군대에 나갈 사람이 줄어들자 당시 야만족이었던 게르만족을 용병으로 고용했습니다.
그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국가가 강력하게 출산정책을 썼습니다. 결혼을 의무화하고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을 법으로 금했습니다. 그리고 38세 이상 독신자들에게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게다가 3자녀 이상의 가정에 큰 혜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출산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제국내의 로마인의 비율이 현격하게 줄어들게 되었고, 결국 야만인이었던 게르만족에게 정복당하게 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나라가 이런 전철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작년에 출판돼서 주목을 받은 책이 한 권이 있습니다. 책 제목이 섬뜩합니다. 전영수라는 분이 쓴 [한국이 소멸한다]라는 책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가 다음세대를 세우지 못해서 소멸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분은 우리나라가 이대로 간다면 머지않아 나라에 큰 위기가 닥칠 것이고,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통계청 발표를 보면 상황이 심각합니다. 금년 2020년이 하나의 변곡점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금년 한 해 예상되는 출생아는 약 30만9천명이고, 사망자는 31만 4천명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사망자 수가 출생아의 수를 넘어서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금년 2020년이 우리나라의 인구의 자연감소가 시작되는 해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런 인구절벽은 앞으로 더욱 가파르게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금년이 1955년에서 1963년에 태어난 베이비부머세대가 65세 노년이 되기 시작하는 해입니다. 앞으로 노년세대가 급증하게 될 것이고, 출산율은 점점 더 떨어져서 노령화가 가속될 것입니다. 결국 각종 경고가 말해주듯 나라가 소멸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 같아서 보통 걱정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상황은 이것보다 더 심각합니다. 대표적으로 우리교단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영아부에서 고등부까지 다음세대의 교세 변동을 보면 571,919명에서 370,891명으로 35%정도가 감소했습니다. 이 시기 인구변화를 보면 1190만에서 950만으로 20%가 감소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다음세대가 지난 10년 동안 20%가 감소했는데, 교회의 다음세대는 35%가 감소한 것입니다. 무려 15%나 빠르게 감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현재 추세로 시뮬레이션해 보면 이렇습니다. 30년 뒤인 2050년에 21세 이하의 연령층은 총인구가 1485만 명에서 932만 명으로 오늘과 비교해서 37%가 감소할 것입니다. 이에 비해 21세 이하 교인은 318만 명에서 111만 명으로 무려 65%가 감소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30년 뒤에 교회 내의 21세 이하의 교인은 무려 2/3가 줄어들 것입니다.
요사이 저는 30년 뒤의 한국교회의 미래를 상상해 봅니다. 우선 대부분의 교회가 노인들만 남게 될 것입니다. 교회학교가 있는 교회가 열 교회 중에 두 세 개 정도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교회당이 텅 빈 채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주변에서 문 닫는 교회들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될 것이고, 교회 건물이 팔려서 다른 용도로 쓰이는 교회도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앞으로 살아생전에 보지 말았으면 하는 장면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추세로 간다면 반드시 보게 될 장면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으로도 여전히 오늘처럼 좋은 교회로 든든히 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 까요? 답은 분명합니다. 다음세대를 세우는 일을 잘하는 것입니다. 교회학교가 감소하지 않게 지켜내고, 가정의 자녀들을 믿음으로 잘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다음세대를 믿음의 세대로 세워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위기의식을 가지라
먼저 위기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세대를 제대로 믿음의 세대로 세우지 못하면 자칫 우리교회의 미래가 없다는 위기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시대를 끝으로 우리 교회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신명기는 모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세 편의 설교를 모아놓은 책입니다. 어느덧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지 40년이 지났습니다. 출애굽 당시 모세가 이끌던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이제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대인 젊은 세대들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앞두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저들에게 유언처럼 말씀을 전합니다.
그 내용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우선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들을 인도해 오셨는지를 회상하며 받은바 은혜를 기억하게 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 즉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재확인하며 이 말씀을 반드시 지킬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 번째에 해당하는 내용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신명기 전체의 요절이면서 신명기를 통해서 모세가 가장 강조하고자 한 말씀입니다. 이름하여 ‘쉐마’의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다음세대를 믿음의 세대로 세우는 일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명기를 깊이 있게 읽으면서 한 가지 주목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할 두려운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이주해 오기 전부터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해 간 뒤 4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 땅에 일곱 족속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면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몰아내느냐 쫓겨나느냐, 죽느냐 사느냐의 생명을 건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들에게 유언처럼 전하는 말씀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다음세대를 믿음의 세대로 세우는 일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지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전쟁 중에 자기들이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을지, 전쟁 중에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죽을지 모를 다급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전쟁을 어떻게 치르라 라든지, 용기를 주거나 격려하는 말씀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도대체 모세는 왜 이 상황에서 다음세대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것일까요? 우선 믿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또 인도하시기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출애굽하여 광야생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인도하셔서 요단 동편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그 자체가 기적이었고, 앞으로도 이런 기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진정한 염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염려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 출애굽 3세들이 가나안의 이방문화에 영향을 받고, 세속주의 물결에 휩쓸려서 믿음을 잃어버릴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세대 이야기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믿음의 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해 어떤 염려를 가지고 있을까요?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렇게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염려하고 있지 않을까요? 과연 자녀들이 이 악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켜낼 수 있을까,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이런 염려를 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모세처럼 해야 합니다. 자녀들의 인생을 하나님께 다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결코 망하게 하시거나 낙오자가 되게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우리 자녀들이 계속 믿음의 사람으로 살도록 하고, 또 믿음의 길을 올곧게 걷도록 하는 것입니다. 행여라도 세상에서 성공한 뒤에 믿음을 잃어버리는 일이 생길까 염려해야 합니다. 자칫 인생길에서 때로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 믿음을 잃어버리는 일이 생길까 염려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보내주신 다음세대 자녀들을 믿음으로 잘 양육해야 합니다. 행여라도 저들 가운데 사탄의 미혹에 넘어져 믿음을 잃어버리는 일이 생길까를 염려해야 합니다. 행여라도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으로 떠나버리는 영혼이 생길까를 염려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가르치라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는 출애굽 2세대에게 위기감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자녀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말씀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우선 4-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야 할 말씀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한 분이신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6-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먼저 부모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긴 뒤에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다음세대를 믿음의 세대로 세우려고 할 때 구체적으로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교육의 핵심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말씀일까요? 히 4:1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영혼을 살릴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선 눅 5:5를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베드로가 고기를 잡지 못해 조업을 끝내고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 말씀을 믿고 다시 그물을 던지겠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베드로를 움직이게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마 26:75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뒤에 닭이 울 때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회고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베드로를 돌아서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살아있고 활력이 있습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을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만듭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다음세대를 말씀의 사람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다음세대를 말씀의 사람으로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우선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듣게 하고 배우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최근 뇌과학이 밝혀내고 있는 새로운 내용들 중에 주목할 것이 듣기의 중요성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듣는 세상의 소리가 아이들의 뇌를 자극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 어떤 소리를 듣느냐가 아이의 인지 발달과 감성 발달에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태어나서 엄마나 가족들로부터 듣는 이야기들이 아이들의 뇌 발달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담긴 소중한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아이의 인격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말씀을 들려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말씀을 들려주고, 태어나 자라면서 말씀을 가르쳐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자녀들이 살아가는 교육환경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한 주 168시간 동안 세상의 이야기를 주로 듣습니다. SNS나 유튜브와 같은 미디어를 통해서, 그리고 학교수업을 통해서 하나님과 무관한 세상정보와 지식에 노출되어있습니다. 단지 1시간 교회학교에 와서 말씀을 듣습니다. 1/168의 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신앙을 지켜갈 수 있을까요?
우리 부모들이 나서야 합니다. 집에서 부지런히 말씀을 듣게 해주어야 합니다. 가정예배, 베갯머리교육, 밥상머리교육, 자녀와 대화 등으로 말씀을 듣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1/168을 넘어서서 10/168 이상의 상황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은 이렇게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설주에 메주자라는 것을 달아놓아서 자녀들이 집에서 나갈 때 말씀을 읽고 나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손과 머리에 테필린이라는 것을 부착하게 해서 어디에 있든지 말씀을 읽을 수 있게 했습니다. 부모들이 말씀교육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 근자에 총회 사역을 함께 하면서 만나게 된 장로님 한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중고등부연합회 회장을 지내실 정도로 다음세대 신앙교육에 헌신하는 분이십니다. 이분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자녀들 신앙교육을 위해 과외를 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분 주장이 왜 영어나 수학 공부를 위해서 과외를 시키면서 신앙교육을 위해서는 과외를 시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자녀들 신앙교육을 위해 돈 들여 전문가를 모셔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녀들과 우리 다음세대의 신앙교육을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저들을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나라를 꼽으라면 역사학자들은 예외 없이 로마를 꼽습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까지 3개 대륙에 걸쳐 가장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고, 법이나 통치체제 그리고 도로와 사회기반이 잘 갖춰져 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필적할 적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1000여년을 지탱해오던 로마가 어느 시점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결국 멸망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의 오랜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이 로마제국의 멸망의 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양한 가설들이 소개되어왔습니다. 그 중에 가장 주목받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이 제기한 가설입니다. 바로 로마가 멸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인구감소’라는 것입니다.
로마가 제국이 되어 당시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로마인들은 안락한 삶에 취하기 시작합니다.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아서 육아하는 일을 꺼리게 되고, 쾌락에 빠져듭니다. 다음세대를 세우는 일을 등한히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점차 노동력이 줄어들게 되었고, 노예들로 이를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군대에 나갈 사람이 줄어들자 당시 야만족이었던 게르만족을 용병으로 고용했습니다.
그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국가가 강력하게 출산정책을 썼습니다. 결혼을 의무화하고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을 법으로 금했습니다. 그리고 38세 이상 독신자들에게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게다가 3자녀 이상의 가정에 큰 혜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출산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제국내의 로마인의 비율이 현격하게 줄어들게 되었고, 결국 야만인이었던 게르만족에게 정복당하게 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나라가 이런 전철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작년에 출판돼서 주목을 받은 책이 한 권이 있습니다. 책 제목이 섬뜩합니다. 전영수라는 분이 쓴 [한국이 소멸한다]라는 책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가 다음세대를 세우지 못해서 소멸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분은 우리나라가 이대로 간다면 머지않아 나라에 큰 위기가 닥칠 것이고,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통계청 발표를 보면 상황이 심각합니다. 금년 2020년이 하나의 변곡점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금년 한 해 예상되는 출생아는 약 30만9천명이고, 사망자는 31만 4천명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사망자 수가 출생아의 수를 넘어서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금년 2020년이 우리나라의 인구의 자연감소가 시작되는 해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사랑하는 것
신명기 6:4~5 / 이용호 목사
하나님을 신학적으로 알려줄 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편재하신 하나님, 불변하시는 하나님 등으로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알려주시기를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그 분의 본성이 사랑이시고, 그 분의 나라가 사랑의 나라요, 그 분이 하시는 일이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은 불신자들을 향하여서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그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1.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신명기10:12, 11:1절에도 반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고, 여호수아도 유언과 같은 명령을 내릴 때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수23:11)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구약 최고의 명령이고 십계명 1부터 4계명까지의 명령입니다.
예수님께 한 율법사가 찾아와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마22:36)”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절)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전체를 의미한 것입니다.
즉 구약의 모든 말씀이 강조하고 명령하는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나의 힘이요 행복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20:6, 신명기5:10, 신명기7:9절에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 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라고 거듭 강조하셨고, 다윗은 시편18:1절에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8:28절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6:24절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끼리 서로 사랑해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옛날 유행가 에도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아무리 못생긴 여자라도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 내면과 삶에 얼마나 놀라운 변화와 복이 오겠습니까.
2.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마지못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불쌍해서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속에서 나온 내 자식이니 기뻐하며 무조건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계속하여 배신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습3:17)
유부남 유부녀들이 바람이 나면 눈이 맞았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가면 자식도 보이지 않고 이성의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이스라엘이 세상에 눈이 멀어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할 때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제물을 가지고 오는데 눈이 먼 것과 저는 것과 병든 것을 가지고 와서 드렸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돈을 더 사랑했고 세상 향락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에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사랑하고, 간음한 것입니다.
호세아서는 이 사랑을 호세아와 고멜 가정을 통하여 실물교수하시면서 보여 주셨습니다.
호세아6:3절과 6절에서 하나님은 종교행위나 제물보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로마서5:8절에서는 죄인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프랑스 서민 아파트 불이나 4층에 살던 한 가족이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이미 불길이 복도를 타고 올라왔고, 매캐한 유독성 연기가 스며들어와 내려갈 수도 없었고 올라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소방차가 아직 도착도 하기전이라 아버지는 울고 있는 삼남매를 안심시킨 후 한 2미터 정도 떨어진 건너 편 아파트로 몸을 날려 창문 살을 잡고 매달려 자기 몸을 다리로 삼아 두려워하는 삼남매를 격려하며 자기 몸을 타고 건너편 아파트로 건너가게 하였습니다. 세 살 난 아들이 건너간 것을 확인하고 아버지는 힘이 진하여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여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입니다. 이런 숭고한 사랑은 얼마든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4:9,10절에는“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고 하셨고,
요한일서4:19절에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제 손자 노아를 사랑하는 그 사랑은 짝사랑입니다.
안식월 한 달 간 그 아이와 함께 보내며 뽀뽀해주고, 귀저기 채워주고, 밥 먹여주고 안아주고, 재워주고, 심지어 목욕도 같이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고국에 돌아와 페이스타임으로 영상통화를 하는데 노아를 목매어 불러도 본체만체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아이가 몰라주어도, 알아주지 않아도 혼자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핏줄이고 내 형상이기 때문에 본능에서 사랑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모든 것을 희생하며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를 끝까지 짝사랑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사랑 강 같이 온 땅에 흐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경험할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알지 못하고 마음을 닫고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이 사랑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3.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김준곤목사님의 칼럼에 기재된 그 분의 고백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나는 그의 사랑의 노예가 되었다. 내 의식과 예수 의식을 분간 못할 정도로/ 바울의 말을 빌리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나를 통해 자기 삶을 살고 있다. 나는 광신자도 신비주의자도 아니다. 나는 사상이나 자기 암시에 붙잡힌 사람이 아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다윗과 베드로와 바울을 붙잡고 인도하시던 사상/ 가장 강렬한 인격이신 예수에게 사랑을 받고 열애하고 있다. 열 번 죽어도 아쉬운 마음뿐이다.”
사랑을 하되 온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참 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고 독생자를 제물로 달라고 해 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온 마음을 다 드려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성경에 최초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분입니다.
이분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였든지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때로는 밤새워 기도하였고, 법궤 앞에서 춤을 추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다윗을 지극히 사랑하신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모든 선지자들이나 택하신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마음을 달라는 것입니다.
예배도 헌금도 기도도 찬양도 마음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에 가 있으면 그것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해 돌아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행위를 보면 믿음이 있고, 대단히 종교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마음이 세상을 사랑하였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했고, 재물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은 그들을 저주하셨고 그들을 떠나 비록 창기요 세리요 죄인들이요 천한 신분의 사람들이었지만 자신들을 용납해 주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그들을 가까이 하시고 사랑해주셨던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는 대단한 교회였습니다. 아볼로 디모데 사도요한 크리소스톰 등 쟁쟁한 분들이 목회한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는 자랑할 것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주님도 인정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2:2~3절에 보면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좋은 것들을 가진 에베소교회였지만 책망 하십니다. 계속하여 2:4,5절에 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라고 하였습니다.
터키에 갔을 때 에베소교회가 있던 자리에 가보니 돌무더기뿐이었고 아시아 일대에 유명했던 그 교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랑을 버리면 이렇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1)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나고 싶습니다. 밤새워 소곤소곤 이야기해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어떤 가정에 딸이 한 남자를 알게 되어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 사실을 아버지가 알고 집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방문과 창문에 못질을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연약한 몸으로 어떻게 못을 뽑았는지 창문을 뜯어내고 남자에게로 가고 말았습니다. 이십년 넘게 힘들게 공부시켜 키워놓았더니 하루아침에 만난 놈에게로 가버리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한탄하지만 사랑에 눈이 멀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을 만나러 예배당에 나올 것입니다. 예배가 지루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찬양하는 즐겁고 행복할 것입니다.
2)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좋은 것을 주고 싶고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교회 집사님이 어느 날 목걸이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아들을 추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들이 어머니 목걸이를 사귀는 여자에게 주었습니다. 집사님은 그자식이 그렇게 서운하고 괘씸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십년 넘게 키운 아들인데 배신감에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몸도 마음도 다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헌금하는 것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 드리고 물질 드리고 봉사를 드려도 늘 아쉬운 마음뿐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독자도 드렸습니다.
3)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알리고 싶을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애인이나 배우자에게 자랑스러운 일이 있으면 널리 주변에 알리고 싶을 것입니다.
노인들이 자기 손자 자랑하려면 2만원을 내고 자랑해야 된다고 합니다.
남들이 보아주지 않아도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스마트폰에 담긴 손자 자랑하고 싶어 근질근질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우리들이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뿐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4)사랑한다면 사랑에 대한 반응이 일어나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에게 목회자사모신문이란 것이 배달되어 오는데 지난 주 기사에 보니 목회자부인들에게 이혼을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였는데 많은 분들이 이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성경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제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가끔 생각이 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을 나에게 갚을 수 없단다. 그러나 너희가 결혼하여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에게 갚을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과연 그런 것 같습니다.
제 딸들이 나에게 갚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식들에게 갚아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들이 주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은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들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우리 주변에 병든 자, 소외당한 자, 가난한 자, 환란당한 자, 무시당하는 자, 연약한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의와 평강과 희락을 주시고 이 땅에서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온 맘 다해 주님사랑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문제는 이런 인구절벽은 앞으로 더욱 가파르게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금년이 1955년에서 1963년에 태어난 베이비부머세대가 65세 노년이 되기 시작하는 해입니다. 앞으로 노년세대가 급증하게 될 것이고, 출산율은 점점 더 떨어져서 노령화가 가속될 것입니다. 결국 각종 경고가 말해주듯 나라가 소멸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 같아서 보통 걱정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상황은 이것보다 더 심각합니다. 대표적으로 우리교단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영아부에서 고등부까지 다음세대의 교세 변동을 보면 571,919명에서 370,891명으로 35%정도가 감소했습니다. 이 시기 인구변화를 보면 1190만에서 950만으로 20%가 감소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다음세대가 지난 10년 동안 20%가 감소했는데, 교회의 다음세대는 35%가 감소한 것입니다. 무려 15%나 빠르게 감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현재 추세로 시뮬레이션해 보면 이렇습니다. 30년 뒤인 2050년에 21세 이하의 연령층은 총인구가 1485만 명에서 932만 명으로 오늘과 비교해서 37%가 감소할 것입니다. 이에 비해 21세 이하 교인은 318만 명에서 111만 명으로 무려 65%가 감소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30년 뒤에 교회 내의 21세 이하의 교인은 무려 2/3가 줄어들 것입니다.
요사이 저는 30년 뒤의 한국교회의 미래를 상상해 봅니다. 우선 대부분의 교회가 노인들만 남게 될 것입니다. 교회학교가 있는 교회가 열 교회 중에 두 세 개 정도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교회당이 텅 빈 채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주변에서 문 닫는 교회들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될 것이고, 교회 건물이 팔려서 다른 용도로 쓰이는 교회도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앞으로 살아생전에 보지 말았으면 하는 장면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추세로 간다면 반드시 보게 될 장면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으로도 여전히 오늘처럼 좋은 교회로 든든히 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 까요? 답은 분명합니다. 다음세대를 세우는 일을 잘하는 것입니다. 교회학교가 감소하지 않게 지켜내고, 가정의 자녀들을 믿음으로 잘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다음세대를 믿음의 세대로 세워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위기의식을 가지라
먼저 위기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세대를 제대로 믿음의 세대로 세우지 못하면 자칫 우리교회의 미래가 없다는 위기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시대를 끝으로 우리 교회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신명기는 모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세 편의 설교를 모아놓은 책입니다. 어느덧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지 40년이 지났습니다. 출애굽 당시 모세가 이끌던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이제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대인 젊은 세대들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앞두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저들에게 유언처럼 말씀을 전합니다.
그 내용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우선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들을 인도해 오셨는지를 회상하며 받은바 은혜를 기억하게 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 즉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재확인하며 이 말씀을 반드시 지킬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 번째에 해당하는 내용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신명기 전체의 요절이면서 신명기를 통해서 모세가 가장 강조하고자 한 말씀입니다. 이름하여 ‘쉐마’의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다음세대를 믿음의 세대로 세우는 일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명기를 깊이 있게 읽으면서 한 가지 주목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할 두려운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이주해 오기 전부터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해 간 뒤 4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 땅에 일곱 족속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면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몰아내느냐 쫓겨나느냐, 죽느냐 사느냐의 생명을 건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들에게 유언처럼 전하는 말씀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다음세대를 믿음의 세대로 세우는 일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지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전쟁 중에 자기들이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을지, 전쟁 중에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죽을지 모를 다급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전쟁을 어떻게 치르라 라든지, 용기를 주거나 격려하는 말씀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도대체 모세는 왜 이 상황에서 다음세대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것일까요? 우선 믿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또 인도하시기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출애굽하여 광야생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인도하셔서 요단 동편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그 자체가 기적이었고, 앞으로도 이런 기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진정한 염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염려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 출애굽 3세들이 가나안의 이방문화에 영향을 받고, 세속주의 물결에 휩쓸려서 믿음을 잃어버릴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세대 이야기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믿음의 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해 어떤 염려를 가지고 있을까요?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렇게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염려하고 있지 않을까요? 과연 자녀들이 이 악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켜낼 수 있을까,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이런 염려를 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모세처럼 해야 합니다. 자녀들의 인생을 하나님께 다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결코 망하게 하시거나 낙오자가 되게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우리 자녀들이 계속 믿음의 사람으로 살도록 하고, 또 믿음의 길을 올곧게 걷도록 하는 것입니다. 행여라도 세상에서 성공한 뒤에 믿음을 잃어버리는 일이 생길까 염려해야 합니다. 자칫 인생길에서 때로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 믿음을 잃어버리는 일이 생길까 염려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보내주신 다음세대 자녀들을 믿음으로 잘 양육해야 합니다. 행여라도 저들 가운데 사탄의 미혹에 넘어져 믿음을 잃어버리는 일이 생길까를 염려해야 합니다. 행여라도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으로 떠나버리는 영혼이 생길까를 염려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가르치라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는 출애굽 2세대에게 위기감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자녀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말씀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우선 4-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야 할 말씀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한 분이신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6-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먼저 부모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긴 뒤에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다음세대를 믿음의 세대로 세우려고 할 때 구체적으로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교육의 핵심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말씀일까요? 히 4:1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영혼을 살릴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선 눅 5:5를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베드로가 고기를 잡지 못해 조업을 끝내고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 말씀을 믿고 다시 그물을 던지겠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베드로를 움직이게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마 26:75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뒤에 닭이 울 때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회고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베드로를 돌아서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살아있고 활력이 있습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을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만듭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다음세대를 말씀의 사람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다음세대를 말씀의 사람으로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우선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듣게 하고 배우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최근 뇌과학이 밝혀내고 있는 새로운 내용들 중에 주목할 것이 듣기의 중요성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듣는 세상의 소리가 아이들의 뇌를 자극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 어떤 소리를 듣느냐가 아이의 인지 발달과 감성 발달에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태어나서 엄마나 가족들로부터 듣는 이야기들이 아이들의 뇌 발달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담긴 소중한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아이의 인격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말씀을 들려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말씀을 들려주고, 태어나 자라면서 말씀을 가르쳐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자녀들이 살아가는 교육환경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한 주 168시간 동안 세상의 이야기를 주로 듣습니다. SNS나 유튜브와 같은 미디어를 통해서, 그리고 학교수업을 통해서 하나님과 무관한 세상정보와 지식에 노출되어있습니다. 단지 1시간 교회학교에 와서 말씀을 듣습니다. 1/168의 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신앙을 지켜갈 수 있을까요?
우리 부모들이 나서야 합니다. 집에서 부지런히 말씀을 듣게 해주어야 합니다. 가정예배, 베갯머리교육, 밥상머리교육, 자녀와 대화 등으로 말씀을 듣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1/168을 넘어서서 10/168 이상의 상황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은 이렇게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설주에 메주자라는 것을 달아놓아서 자녀들이 집에서 나갈 때 말씀을 읽고 나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손과 머리에 테필린이라는 것을 부착하게 해서 어디에 있든지 말씀을 읽을 수 있게 했습니다. 부모들이 말씀교육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근자에 총회 사역을 함께 하면서 만나게 된 장로님 한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중고등부연합회 회장을 지내실 정도로 다음세대 신앙교육에 헌신하는 분이십니다. 이분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자녀들 신앙교육을 위해 과외를 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분 주장이 왜 영어나 수학 공부를 위해서 과외를 시키면서 신앙교육을 위해서는 과외를 시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자녀들 신앙교육을 위해 돈 들여 전문가를 모셔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녀들과 우리 다음세대의 신앙교육을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저들을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가장 큰 계명
신 6:4-9 딤후 1:3-5 / 이정익 목사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하나님
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
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5월 가정의 달입니다. 5월을 12달 중에 꽃이라고 부릅니다. 첫 주일은 어린이 주일이고 둘째주일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가정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구약성경의 중심은 신명기서 입니다. 신명기 속에는 각종 하나님의 명령과 부탁하신 규례 그리고 주어진 법들이 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의 신명기서만 읽어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신명기 4장에서 6장까지 보면 지켜야 할 규례들을 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4장에서는 우상을 만들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고 5장에서는 십계명을 주시며 지키라고 하였고 6장에서는 규례와 법도를 반포하고 이를 지키라고 강조하십니다. 특히 오늘 읽은 본문 6장 1~9절은 규례와 법도입니다. 특히 여기에서 강조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규례를 너와 아들들과 손자들에게 가르치라, 네 가족들이 이 규례와 법도를 지키게 하라, 그리하면 네 날이 장구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가정신학을 보게 됩니다. 유대인의 교육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가를 보게 됩니다. 여기서 몇 가지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여기서 부모는 단순히 양육자만이 아닙니다.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가르침을 위하여 부모에게 강력하게 할 일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네가 가르침의 중심이 되라”입니다. 2절을 보면 “이 규례와 법도와 율례를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네 날이 장구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냥 가르침이 아닙니다. 아주 강하게 가르치라고 당부합니다. 부모는 가르치는 자이며 전달자입니다. 이 가르침에 네가 중심이 되라고 당부합니다. 가르치되 독재적 책임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유대인 아버지가 아이를 가르치다가 때려 죽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아버지에게 그 권한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의 교육입니다. 문제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주일날 아이들 손을 잡고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날은 예배하는 날이다”라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각인시켜 주어야 합니다. 이것만이라도 분명하게 해 주면 아이들에게 할 일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 시기를 놓치면 그 후 아이들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2절에서 “이 율례와 법도와 규례를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에게 가르치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또 “역사를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나는 누구인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무엇인지를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때로 이 정체성 교육이 필요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인지, 고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알고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이다.” 이것을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입니다. 뉴욕광장에 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자유 복장을 하고 가족들이 모여 휴식을 즐겼습니다. 그때 검은 옷과 검은 모자를 쓴 아이들이 몰려 왔습니다. 이스라엘의 아이들입니다. 정통 바리새인 교육을 받는 아이들이 그 복장 그대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조금도 불편해 하지 않고 여름 더위를 상관하지 않고 인솔자의 인솔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존중하고 유지하는 힘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유대인들이 소수민족임에도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나라 부모들이 자식 교육을 위하여 쏟아 붓는 열정은 대단합니다. 유대인을 능가하는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어머니들이 파출부로 청소부로 나서서 돈을 벌어 과외비를 충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해외로 나가고 아버지 혼자 남아 기러기 아빠로 여러 해 동안 기약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부모들이 어디 있습니까. 세계 사람들이 이해를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슨 교육을 위해서 그러는가가 문제입니다. 무슨 목적을 위한 교육을 하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신명기에서 강조하는 교육은 1등하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수직적인 교육을 위한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 너와 하나님, 우리와 하나님을 위한 교육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교육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우리와 초점이 다릅니다. 길이 다르고 목적이 다르고 뜻이 다릅니다. 이것이 부모에게 당부하는 내용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 입니다. 이것이 부모에게 주어진 명령이고 당부입니다.
자녀에게
두 번째 당부는 자녀들에게 입니다. 자녀는 교육의 대상입니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6장에서 이 가르침의 방법을 말씀합니다. 그냥 가르침이 아니고 “마음에 새기고 문설주에 붙여놓고 손목에 매고 이마에 붙여놓고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이든지 누워있을 때이든지”입니다. 왜 이렇게 강하게 가르치라고 하십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신명기서는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써진 책입니다. 왜 그때 기록되었습니까.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출애굽 한 것이 40여년 가까워 옵니다. 그동안 1세대들은 거의 다 죽었습니다. 이제 2세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2세대들 즉 광야에서 태어난 2세들은 출애굽 과정, 홍해 건넘을 모릅니다. 모름은 단순히 모름만이 아닙니다. 그것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면 내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 우리들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왜 애급을 떠나 가나안에 왔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 아무 것도 모르는 새 세대들에게 새로 교육할 필요성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신명기에서 세 번 설교합니다. 설교에서 강조한 말이 “너희 자녀들에게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들으라”로 시작하여 말씀합니다. “들으라”(신 4:·1, 5:1, 6:4, 9:2) 이것이 쉐마입니다.
쉐마(Shema)라는 말은 “이스라엘아 들으라....”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 신명기 6장4~9절 말씀입니다. 여기 보면 “들으라”로 시작합니다.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너희 부모들은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입니다. 이것이 쉐마입니다. 가장 좋은 교육 시기는 아이들이 입 뗄 때, 말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그때 입 떼기 전에 매일 읽어주고 암송하고 헌신을 결단하게 하여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교육을 유대인들 보다 더 잘하는 나라가 북한입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이 아닌 어버이 수령을 하나님으로 가르칩니다. 이것이 무서운 교육입니다. 이 교육이 아이들이 입이 열리기 시작하자마자 가르치는 교육입니다. 북한에서는 성경말씀 그대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가르치고 집에 앉았을 때에도 길을 갈 때에도 문설주에 매달고 손목에 매고 어버이 수령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의 이념교육이 무서운 것입니다.
교육 내용
그러면 무엇을 가르칠 것입니까. 그 내용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출애굽과 광야생활 속에서 자신이 체험하였던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역사를 가르치는 일입니다. 애급에서 탈출할 때 기적같이 출발하였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 기적이 일어나서 건너게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40년간 먹고 살아온 모습, 만나, 메추라기, 구름기둥, 불기둥, 반석에서 흐르는 생수 이것들을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해 주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책임은 신앙유산을 물려주는 일입니다. 부모는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인도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자녀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면 그때 부모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 교육이 가깝게는 가정을 든든히 하는 교육이고 나아가 국가를 든든히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든든하게 하는 교육입니다.
다음은 “가나안에 들어가면 우상숭배를 절대로 하지 말 것을 가르치는 일(신 7:5, 12:2-3, 16:21-22)”입니다. 이 백성들이 애급에서 430년을 살았습니다. 애급은 우상의 나라입니다. 애급을 여행해 보면 박물관의 유물은 100% 우상들입니다. 43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이 그 우상들을 섬기는 풍조 속에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가나안을 고집하셨는가 하면 그 찌든 우상을 씻어내고 하나님만 예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장 가나안에 들어가면 처음 만나는 사람이 이방인 가나안 사람일 것입니다. 새 땅에서 생존과 적응이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의 가장 손쉬운 방법이 원주민과 타협하고 농사짓는 법을 배울 것이고 그들의 우상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일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순식간에 그들의 삶을 배우고 그 문화에 동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우상숭배 하는 풍습을 그대로 본 받아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강조하기를 “우상숭배 하지 말고 통혼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즉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7장3-4절을 보면 혼혈결혼 금지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함으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까 함이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결혼할 때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좋지 않은 태도입니다. 옛날에는 양반 상놈을 가렸습니다. 오늘은 얼마나 사느냐 못 사느냐를 따집니다. 우리는 좀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너무 차별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오늘 결혼식 때 예물 때문에 너무 잡음이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문제까지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혼인에는 혼인이 주가 되어야 합니다. 혼수가 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혼수는 한번 사람들 앞에서 폼 잡는 것뿐입니다. 상대편에게 본때 한번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그것 별 것 아닙니다. “우리가문이 어떤 집안인데” 그것은 남들이 알아주어야지 자기들 스스로 우리가문 따지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그런데 결혼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한 가지 조심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불신앙인과의 결혼하는 일입니다. 본문은 통혼으로 신앙을 더럽히지 말라고 합니다. 즉 이방인에게 딸을 주지 말고 이방인의 며느리를 맞아들이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것은 고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정통성 때문이고 신앙의 중심과 순결이 허물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아주 좋은 신앙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주 좋은 믿음의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100%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신앙인이 될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솔로몬이 그래서 망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처음에 얼마나 신선했습니까. 왕이 되자마자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일천 번의 번제를 드렸다는 뜻도 있겠지만 그 말은 오직 하나님 중심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신명기를 통해서 두 가 지 신성한 율례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과 또 하나는 아내를 많이 두어 마음을 미혹하게 하지 말 것(신17:16~17)입니다. 그리하면 네 날이 장구하리라고 약속(20)하셨습니다.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뜻은 왕이 하나님 보다 군마를 의지할 위험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뜻은 아내를 많이 두면 이방인의 아내까지 둘 염려가 있으니 그러면 결국 우상이나 여인들 때문에 마음이 뺏기고 우상 숭배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왕상 10장을 보면 솔로몬이 왕이 되자마자 애급으로부터 병거 천 400대를 수입합니다. 잘 훈련된 마병 만 2천명과 말을 수입(왕상 10:26)합니다. 또 왕상 11장을 보면 애굽왕 바로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고 모압, 암몬, 에돔, 시돈, 헷 여인들을 수입(1)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은 여인이 후궁이 700명이고 첩이 300명(3)입니다. 그 여인들이 오면서 몸만 왔겠습니까. 모두 자기들의 토속 신과 우상을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11장2절을 보면 솔로몬이 그 여인들을 사랑하였더라고(2) 하였습니다. 그 말은 솔로몬이 그 여인들이 가지고 온 우상들의 신당을 지어주었다(7)는 말입니다. 그리고 3절을 보면 그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고 하였고 4절을 보면 솔로몬이 나이가 많을 때에 그 여인들이 솔로몬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다(4)고 하였습니다. 이 같은 모습에 우려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돌려보시려고 꿈에 두 번이나 나타나 경고하셨고(9) 명령하셨으나 솔로몬이 듣지 아니하였다(10)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직전에 있는 백성들에게 당부하신 것입니다. “가나안에 가거든 이방 여인을 며느리로 맞아들이지 말고 딸을 이방인에게 주지 말라.” 즉 이방인과 통혼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세상은 내 순수한 신앙과 내 영적 삶을 유지하기가 힘든 시대입니다. 오늘 믿음이 좋은 처녀와 청년들이 어느 날 조건이 아주 좋은 청년과 사귀게 됩니다. 조건이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이교집안의 청년입니다. 가정이 아주 강한 이교집안입니다. 놓기가 아깝습니다. 이 경우 대부분은 타협합니다. “결혼해서 전도하면 되지.” 이것이 타협이고 함정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부모는 아이를 낳아 놓는 것으로 다가 아닙니다. 잘 입히고 잘 먹임도 다가 아닙니다. 오늘 이 세상은 이교도의 풍조로 가득 차 있는 세상입니다. 사탄 문화와 이방 문화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세속주의 한복판에서 우리 자녀들이 숨 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답게 오직 신앙인으로 살아가기가 힘든 세상입니다. 어느 초등 6학년 아이가 스마트 폰으로 카톡을 합니다. 자기 방을 만들어 놓고 사귈 사람을 모집합니다. 초등 6년생이 대학생 오빠를 만나 데이트 중이라고 합니다. 참 무서운 세상입니다. 이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생인데 벌써 세상에 깊숙이 빠져 어른 흉내를 내면 이 아이는 미래에 얼마나 많은 갈등과 방황을 할 것입니까. 왜 이 부모들은 이 아이에게 스마트 폰을 사 주는 것입니까.
오늘 이 세상은 세속과 교회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사라진 세상입니다. 세속적인 일과 하나님 일에 구분이 어려워졌습니다. 하나님 말씀 보다 돈이나 명예의 힘이 더 크게 느껴지는 때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신앙교육이 어려운 때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십시다. 무엇이 정말 진정한 선이고 뜻인지 분별하십시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복을 받고 뜨거운 하나님의 성원을 힘입고 살아가십시다. 그것이 오늘 우리들의 가정을 든든히 세워가는 길이고 그것이 우리의 영적 상태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길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신 6: 4-9 / 임덕순 목사
옛날에는 설날이 되면 자손 된 사람은 부모와 조상을 생각하고, 부모 된 사람은 자식을 위해서 설빔을 준비하고 세뱃돈을 준비했다가 세배를 받고는 세뱃돈과 덕스러운 말을 해주는 미풍이 있었습니다.
요즈음 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해서 기울이는 노력을 보면 더욱 가상합니다.
자기 자식에게 최고 좋은 것을 먹이고, 기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 버릇없이 자라는 것을 감수하고, 좋다는 공부는 다 시키려고 별별 수고를 다 합니다.
태어날 때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하려고 이제는 출산방법까지 연구하여 수중분만을 하는 사람도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 아이를 잉태하게하시고 뱃속에서 아이의 핏줄이 깔리고 뼈가 자라고 머릿속에 뇌가 자리를 잡고 심장이 만들어지게 하신 하나님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 아이의 장래가 사실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신앙생활과 자녀교육을 점검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바르게 신앙생활 했고 잘 가르쳐왔을까요?
미국이나 유럽 등 서양 사람들의 자녀 교육 방법을 다 알지 못하지만 내가 들은 바로는, 부잣집 아들도 학자금을 부모가 대주지 않고 제가 융자받아서 공부하고 제가 나중에 취직해서 갚는다고 합니다. 자녀에게 학비를 대 주어서 쉽게 공부하게 하는 것보다는 자립의지를 심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공중도덕을 철저하게 가르칩니다. 식당이나 공공장소에서 도덕과 질서를 지키게 하여 다른 사람과 바른 관계를 갖게 하는 일이 학교 공부를 잘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잠 22:6에 보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어릴 때 교육이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쉐마” 라는 히브리말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샬롬’ 이라는 말 다음으로 자주 사용하고, 아주 귀히 여기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아,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러니 꼭 명심하거라.”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라고 주목시킨 뒤에 가르치는 내용들이 세가지입니다.
첫째, 누구를 섬길 것인가를 명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하나님만 유일하게 섬길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우리가 섬길 대상이 없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만 우리의 생명을 만들어 주신 분이고,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고 주관하시는 분이기에 그분과 비교할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신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많습니다. 무당들은 별의 별 것들을 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토지신 용왕신 방죽의 물귀신, 등 신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사람들은 그 신이 노할까봐서 손이 없는 날을 잡아서 몰래 이사 가고 몰래 결혼식을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그런 신들은 고무신만도 못한 신이고 피해야 할 깡패 신이지 사람이 섬길 신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비인격적이고 깡패 같은 신이 아니라 세상을 만드시고 그것을 섬세히 유지시키시며,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하면서까지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거룩하고 자비하신 오직 한 분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라는 말씀이 유일신 사상의 근원인데, 유일신이란 신이 하나라는 의미보다는 비교할 신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다른 신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영적인 존재는 많고 많습니다.
고전 8:5에 보면,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 쫓고 미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그런 권능을 주셨습니다. 천사도 사단도 영적인 존재들이며, 그것들을 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가 더 무한합니다.
불당의 목각 부처상은 신은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그것이 복을 주는 신인 것처럼 오해하도록 눈을 가리고, 무지한 마음을 심어서 우매한 사람들의 경배를 받고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고 우매한 삶을 살게 하는 존재가 사단입니다. 그는 물질이 아니라 영물이요 신입니다. 그런 신은 악신이며, 섬길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유일하시다는 말은 신적인 존재가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신 같은 신, 인간의 섬김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실 참으로 위대하고 거룩하며 영광스러운 신은 하나님뿐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 배후에 악한 신이 도사리고 있어서 조종을 합니다.
태국의 불교는 사람을 게으르게 하고 무책임하게 하며, 얻어먹으면서도 “내가 너에게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니 내게 감사하며 시주하라”고 가르쳐서 우매하고 발전이 없는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남미의 캐톨릭은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지역의 수호신으로 전락시켜서 백성들을 우매무지하게 만들었습니다.
중동의 모슬렘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맹종하는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슴에 폭탄을 안고 상대를 죽이려고 자폭하는 일을 서슴없이 합니다.
무당은 귀신의 능력을 힘입어 작두도 타고 점도 치는 것이며,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에서 보듯이 성모 마리아 상의 눈에서 피눈물이 난다는 등의 이상한 현상들은 신적인 존재가 세상에서 활동한다는 흔적들입니다.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신천지 등 말도 안 되는 이단에게 몰려가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단의 배후에는 악한 신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닌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조상에게 예를 다하자고 시작한 차례라는 부모제사였는데, 죽은 사람을 신이 된 것처럼 인식하게 하고, 종교형태로 제사하게 만드는 배후에는 사탄의 역사가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조상제사 지성으로 하는 가정을 잘 살펴보면 후손들이 귀신들려서 미치고 정신병을 앓는 가정이 그렇게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를 괴롭히고 건강하고 바른 삶을 방해하는 신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섬기는 신은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수를 다 헤아릴 수 없고,
인도인들에게 신이 많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중국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면 즉시 믿겠다고 대답한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정말 믿으려면 과거에 믿던 신을 버려야 한다고 하면 그렇게는 못하고 예수님을 한분 더 섬기겠다고 한답니다.
하나님은 그런 신앙태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괴롭히는 저급한 귀신과 동급의 신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명을 지으시고 사람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을 사람을 괴롭히는 귀신과 동격으로 보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해야 합니다.
사 37:16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명심할 것은 세상에 인간이 섬길 신은 하나님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그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지를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전심을 기울여서 믿으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귀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궂을 하기 전에 목욕재개를 하며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런 마음이라도 드리고 있습니까? 예배 시간에 부정 탈까 봐서 몸조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정성스런 마음으로 자신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다하고, 다하고, 다하라고, 다하라는 말씀이 반복되는데, 이 말은 조금만 하라, 일부만 드리라는 말이 아니라, “다 드려라,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다. 드리고 나서 남는 것이 없게 하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물질을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물질의 얼마가 주님의 것입니까? 십분의 일을 드리면 됩니까? 성경에 십분의 일은 내게 돌리라 하셨고,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주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 하였으니, 1/10이 하나님의 것입니까? 십일조를 하면 다 하는 것일까요? 1/10은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 9/10은 내 것이라는 말씀일까요?
10/10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것은 본래 하나도 없었습니다. 내 발가벗은 몸도 주님이 주신 것이고, 이 발가벗은 몸이 태어나서 서 있는 이 땅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그때 둘렀던 포대기와 기저귀, 그때 나를 씻어준 대야에 담겨있던 물, 그리고 그 대야를 만든 쇠, 그리고 나를 낳아준 부모님,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다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일 뿐입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자 같이 자랑하느냐?”
다하고, 다하고, 다하라는 말씀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상에서 출발합니다. 물질의 1/10을 드렸다고 잘한 것이 아니라, 전부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전부를 다 드리고 나면 어떻게 삽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모르실까요?
우선 내가 가진 것 전부가 하나님 주신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 전부를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을 위해서 쓰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일들이 무엇입니까? 내게 주신 자녀를 먹여 살리는 일도 하나님의 것이므로 자식을 먹여 살리는 일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드리는 것이 됩니다. 그들을 가르치는 데 쓰는 것도 하나님의 일에 쓰는 것이고, 가난한 이웃에게 구제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에 쓰는 것이고, 하나님의 교회에 헌금 하는 것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나라를 위해서 정해진 세금을 내는 것도 하나님의 일에 쓰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한 몸으로 주신 아내의 옷을 사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닐까요? 이웃이 배가 고파서 굶주리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음식을 사 주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닐까요? 이웃 학생이 공부는 잘 하는데, 그의 부모가 그를 가르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럴 때, 학비를 돕는 일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제는 국가가 가난하지 않은 학생에게도 학비를 대준다니까 장학금이 필요없는 시대가 왔지만, 그런 일도 하나님의 일이 된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듣지도 못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짐승처럼 무지하게 살다가 죽어가는 이웃나라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자기 혼자서 하면, 자칫하면 자기자랑에 빠지고 맙니다.
그리고 기분이 내킬 때나 남들이 칭찬할 때는 잘 하지만, 누가 나를 칭찬하지 않거나 내가 드린 돈으로 혜택을 입은 사람과 사이가 나빠지거나 기분 언짢으면 멈춰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귀한 일을 개인적으로 하지 않고 교회를 통해서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십일조를 드리고 선교헌금을 드리고 장학헌금을 드리면 교회가 그것을 모아서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쓰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박을 하는데 돈을 쓰거나, 술 마시고 방탕 하는 데 돈을 쓴다거나 필요 이상으로 사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너무나 비싼 음식만을 골라 사먹으며 먹는데 돈을 필요 이상으로 쓰는 것, 너무 비싼 옷을 사 입는 사치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이것은 아니다.’ 라고 누가 구분해 주지 않더라도 신앙이 있고 양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분별력을 이미 다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모두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위해서 쓰시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을 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나 선교헌금을 했다 해서 하나님께 드릴 것은 다 드렸으니까 이제는 남은 십분의 구는 내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생각하고, 사치하고 방탕하는 데 쓴다면,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나 갖는 생각이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고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 생각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성실하게 살아가고 작은 삶에도 자부심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아는 남편은 빈둥빈둥 놀면서 아내에게 가족부양을 떠넘길 리 없고, 자기 몸이 힘 든다고 일하기 싫어할 리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당연히 성실하게 살게 되어있고, 경건하게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노회 식구들하고 속리산에 갔는데 거기 절간에 대단히 큰 부처상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 앞에서 합장하고 기도하며 돈을 바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가서 얼마를 내는가 보았더니 천 원짜리 한 장을 내고 합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부처는 사람에게 천원어치도 도움을 준 적이 없으면서 천 원짜리 한 장이라도 받으면 감사한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그런 자세로 물질을 바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 됩니다. 물질과 생명과 환경 전부를 주신 하나님께 전부를 드리는 성실한 청지기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밖에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삶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날인 주일이 다른 날과는 전혀 다른 날이라고 인식하고 그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마음을 다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불신자들의 입에서 아무렇게나 취급당하는 것에 의분을 느끼면서, 그분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구별되게 사는 삶이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닐까요?
신 10: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는 것이라”
오늘 교회에 올라온 분 중에 혹시 “주일 날 교회에 갔다 오지 않으면 장사도 잘 안되고 마음도 찜찜해서 한번은 갔다 와야 해” 하는 마음을 가진 분이 있다면, 그 신앙은 아주 유치한 신앙입니다. 아직도 미신을 섬기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앙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교회 온 분이라면 이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으로 자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네 마음에 새기고”
우리는 마음속에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마음에 말씀을 새기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신앙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사는 것이 새로운 신앙생활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는 체험을 하고 또 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 하나님을 자녀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언제 기회가 되면 가르쳐야지 하다가 기회를 놓칩니다. 초등학생 때나 중학생 때는 이해를 잘 못할 것 같아서 가르치지 않았고, 고등학생 때는 너무 공부에 지쳐 있어서 가르칠 새가 없었고, 대입시험에 지장을 줄까봐서 기회를 보았고,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면 그때 가르쳐야지, 하는 사이에 자녀의 마음은 철저한 불신앙으로 굳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릴 때부터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자녀에게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주일학교에 열심히 챙겨 보내시기 바랍니다. 가정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부모가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 다녀와서 집사님 장로님 목사님 흉보고, 교회 욕하는 사람은 자녀 신앙을 망치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엄마가 어린 아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가다가 엄마가 방귀를 뀌고는 소리가 커서 미안하니까 5살 난 아들에게 하는 말이, “얘야, 너 배아프냐?” 그러자 아들이 하는 말, “엄마, 내가 배아프면 엄마가 방귀 뀌는 거야?”
그 아이가 커서 8살이 되었을 때, 차장이 아이도 돈 내야 한다고 하니까 “아니 7살짜리에게도 돈을 받아요?” 그러자 아이가, “아냐 나 8살이잖아” 라고 했답니다. 신앙인답게 사는 삶으로 신앙교육을 해야 합니다.
때와 장소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자녀에게 신앙교육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신앙을 전수하여 주십시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①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인도인들, 영국인들은 손목에 실오라기 매고 다니던데, 그것은 불교인의 부적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성경을 적은 띠를 손목에 매고 다니던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②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두 눈과 코 사이에 성경구절을 적은 작은 함을 매달아서 그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 중심생활을 하는 상징을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자대로 손목에 달고 미간에 붙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들의 중심에 새기도록 하라는 말씀이었는데 이스라엘이 문자대로 해석해서 손목에 매고 이마에 매달게 한 결과, 형식화 되었고 정신은 놓치고 말았으며, 그것이 이방인들에게 부적이 되고 만 것입니다.
③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개문만복래 입춘대길 건양다경 봄에 대문과 벽에 써 붙이는 글귀들도 수천 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이 먼저 한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 구절을 아이들이 보고 외우도록 대문과 벽에 써 붙이게 하였는데, 그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말씀을 작은 종이에 깨알같이 써서 도르르 말아서 작은 상자에 담아 문설주에 달아놓습니다. 그것을 메주자 라고 부르는데, 사람이 들어오고 나오고 할 때 거기에 손을 얹고 축원하는 풍습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에 새기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미신 같은 풍습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정신은 간과하고 겉으로만 따라 했기 때문이고, 자기는 행하지 않으면서 자녀에게만 말로만 가르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는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자녀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녀된 입장에서 나를 사랑하시는 분께서 유언으로 남기신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고 이 말씀을 지키려고 온 힘을 기울입시다. 그래야 우리 삶이 복을 받습니다.
1) 하나님만을 섬깁시다. 그분만 우리를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참신이십니다.
2)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우리의 전체를 바쳐서 하나님을 섬깁시다.
3) 어떻게 하든지 자식에게도 이 신앙을 정확하게 전수합시다.
이 세 가지가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한가람 성도님들 가정마다 이 말씀을 명심하고 실천하고 가르치는 가정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소원은 자녀를 잘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 6:4-9, 잠 22:6 / 이윤재 목사
만일 여러분에게 가장 큰 소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이 갖는 가장 큰 소원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부부끼리 사랑하고 물질적으로 안정되고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것, 그것이 모든 사람이 꿈꾸는 소박하지만 소중한 소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필수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 있습니다. 자녀교육입니다. 자녀를 잘 가르치고 싶은 소원, 이 소원 역시 자녀를 가진 부모들의 공통된 소원입니다. 가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교육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 것이 매스컴이 보도됩니다. 그럴 때마다 생각합니다. “한국교육이 그렇게 훌륭한가? 한국교육에서 무엇을 배울 것이 있는가?” 그러다가 생각한 것은 한국의 교육열입니다. 오바마가 배워야 한다고 말한 한국교육은 아마도 한국부모들의 뜨거운 교육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말 한국처럼 자녀교육에 열정적인 나라가 있을까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2012년 전국 가족보건 및 복지실태조사”에 따르면 부모가 자녀 한 명을 낳아 대학을 졸업시킬 때까지 드는 비용이 총 3억 896만원이랍니다. 월평균 120만원 정도로 9년 전에 비해 56.8%가 증가했습니다. 가장 많이 증가한 세대는 만 3살에서 5살까지 유아가 70.7%, 0세에서 2살까지 영아가 69.9%로 가장 많이 증가했습니다. 사교육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2010년 한국교육개발원이 낸 자료를 보면 만 3세부터 취학 전 자녀 2527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했는 데 무려 99.8%의 미취학 자녀들이 사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대학에 가기 위해 중고등학교 때만 영어, 수학 과외를 받는 정도였는 데 지금은 초등학생, 심지어 취학전의 아이까지도 무려 99.8%가 사교육을 받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렇게 돈을 많이 들여 교육시키면 아이들이 더 행복하고 건강합니까? 결과는 반대입니다. 한림대학교 홍현주 교수팀이 연구한 보고에 따르면 하루 네 시간 이상 사교육을 받은 아이들의 30%가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우울증은성인이 되어도 그대로 이러진다고 합니다. 어떤 분의 말이 지금 한국에서 가장 잘되는 병원이 두 가지랍니다. 성형외과와 소아정신과입니다. 30년 전에는 이름조차 없었던 소아정신과에 아이들이 넘쳐납니다. 그래서 미술치료, 음악치료, 독서치료, 놀이치료, 언어치료등 온갖 치료로 아이들을 치료합니다. 그렇게 돈을 많이 들여 공부시켜 우울증 생기고, 또 돈들여 치료하고 있으니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합니까?
자녀들의 조기교육으로 “기러기 아빠”, “오리 아빠”가 생긴 것은 옛날이고, 요즘은 “매니저 맘”, “헬리콥터맘”이 생겼습니다. 엄마가 아예 아이 공부 매니저로 나서서 “매니저 맘”이고, 얼마나 바쁜지 헬리콥터처럼 날아다닌다 해서 “헬리콥터 맘”입니다. 그렇게 많이 투자하고 그렇게 많이 가르쳐도 우울증 생기고, 성적 떨어졌다고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우수수 뛰어내리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혹시 우리가 자녀들을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자녀교육이 중요한데도 왜 부모들은 안 가르치고 밖에서만 가르칩니까? 그래서 어떤 교육학자가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자녀교육은 외주 하청형 자녀교육이다”. 다 남의 손에 맡겨 돈주고 키운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하는 일은 밥주고 재워주는 것 밖에 없습니다.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자녀를 가르쳐야 합니까?
저는 신명기를 읽으며 해답을 찾았습니다. 신6:4-9절입니다. 함께 읽을까요? 신6:4-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 여러분도 이 말씀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우리의 요3:16절처럼 소중한 신앙과 삶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소중한 것은 아니라 우리에게도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자녀 교육에 관하여 세 가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첫째 누가 가르칠 것인가? 둘째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그리고 셋째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입니다.
누가 가르칠 것인가?
교육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가르치느냐입니다. 교재도 중요하고 시설도 중요하지만 교육은 역시 교사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누가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어떤 분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쳐야죠”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녀를 교회에 맡기면서 ”교회에서 말씀으로 가르쳐야죠“ 말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학교도 가르치고 교회도 가르쳐야 합니다. 학교는 지식을, 교회는 신앙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가정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50:3,000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50은 자녀가 교회에 있는 시간이고 3,000은 가정에 있는 시간입니다. 교회다니는 아이가 교회학교에서 배우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휴가나 방학을 빼고 거의 개근한다고 해도 일년에 50시간입니다. 교회 많이 나오는 것 같아도 일년에 50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정에서는 엄청난 시간을 보냅니다. 그것이 3,000시간입니다. 그래서 50:3,000 원칙입니다. 매주 교회나오는 시간이 1시간이 아니라 2시간이라고 해도 1년에 100시간입니다. 그러면 100:3,000입니다. 어떻습니까? 일년에 50시간에서 100시간 보내는 교회에서 교육을 많이 받겠습니까? 3,000시간 보내는 가정에서 교육을 많이 받겠습니까? 당연히 가정입니다.
이 말은 교회는 자녀교육의 책임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는 마땅히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가 늘 기억할 말씀이 있습니다. 잠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다같이 ”마땅히“. 교회는 마땅히 자녀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여기서 ”아이“는 유아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직 부모의 슬하에 모든 자녀를 말합니다. 나이가 40이라도 부모밑에 있으면 여전히 가르쳐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자녀교육이 주로 가정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신자의 자녀교육은 100% 학교나 학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믿는 가정의 경우는 자녀를 주일날 교회는 보내지만 안 믿는 가정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평일에 학교에서 학원에서 교육받는 것은 같습니다. 그나마 믿는 가정에서 주일날 자녀를 교회 보내지 않으면 안 믿는 가정과 똑같습니다. 교육 내용이나 가치가 불신자와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부모가 교회 집사, 장로라는 것만 차이가 있습니다. 가정은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돈대주는 곳, 그리고 가끔 잔소리하고 구박하는 정도, 그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할 것이며". 오늘 말씀은 자녀교육의 주체가 부모라고 말합니다. “네 자녀에게”.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부모에게 자녀교육을 명령합니다. 거기에 학교 선생님도, 과외교사도, 심지어 교회도 없습니다. 내용을 보면 전적으로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집에 앉았을 때”. 집에 앉는다는 말은 식탁에 앉았다는 말입니다. 식사 시간이 곧 교육시간입니다. “길을 갈 때에”, 밖에 나가 길을 걸을 때도 심지어 교육 시간입니다. “누었을 때”, 취침 시간입니다. 누었는 데 어떻게 교육합니까? 소위 베겟머리 교육입니다. 팔베개하며 도란 도란 이야기하고 책을 읽어주며 교육합니다. “일어날 때에든지”, 아침입니다. 가정에서 교육은 아침부터 시작됩니다. 물론 아버지가 칠판놓고 강의하지는 않습니다. 어머니가 성경강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어나는 순간부터 자녀는 보고 배웁니다. 교육이 없는 시간은 딱 하나입니다. 잠자는 시간입니다. 잠자는 시간 빼놓고 모든 시간이 교육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육에 가정은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학교에, 학원에 맡깁니다. 믿는 사람은 주일마다 교회 맡기지만 그것도 일년에 50시간, 100시간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자녀교육은 누가 합니까? 비신자는 말할 것 없고 신자인 여러분은 오로지 교회에만 맡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교회에 맡겼으면 그것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데 자녀가 교회 안 나올 때 권면합니까? 혹시 여러분의 자녀를 가르치는 교회학교 선생님 이름은 아십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예배드리는 교실에 한번 가보셨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세상의 행복을 위하여 교회와 가정을 두 기관을 같이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자녀교육을 위한 동반자입니다. 서로의 장점을 살려 시너지를 내야 합니다. 자녀를 교회에 맡겼으니 됐다고 생각하는 부모나 부모없이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회는 어느 쪽도 성공적인 교육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둘이 같이 가야 합니다. 서로가 필요합니다. 교회가 필요한 것을 가정이 돕고 가정이 필요한 것을 교회가 도와야 합니다. 교회와 가정이 함께 가는 교육이 되기 위해 우리는 몇 가지 원칙을 전제해야 합니다.
1. 자녀는 하나님에게 소중한 존재다.
2. 자녀는 하나님과의 관계안에서 자라야 온전하게 자랄 수 있다.
3. 부모만큼 자녀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없다.
4. 교회만큼 부모에게 영향을 미칠 것은 없다.
5. 자녀교육을 위해 가정과 교회가 협력할 때 그 효과는 극대화된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는 교회와 가정이 연계된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 자녀들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이번 가을에 준비해서 빠르면 연말부터 이렇게 했으면 합니다. 우선 교회학교 학부모모임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모여 주십시오. 가족과 함께 하는 체험의 기회를 늘리려고 합니다. 많이 참여해 주십시오. 자녀교육은 부모교육입니다. 부모가 잘 배워야 자녀들도 잘 배웁니다. 그래서 부모학교가 필요합니다. 헌아식, 세례, 생일, 성경학교, 여름봉사, 여행, 졸업식등 자녀들이 교회안에서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지나갈 때마다 함께 해 주십시오. 부모와 함께 하는 정기적인 예배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매주 교회에서 자녀들이 무슨 설교를 듣고 분반공부시간에는 무슨 주제로 토론하는지 교육 자료를 부모와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주제로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제 비전은 간단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교회에서 부모없이 혼자 자라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배운 것을 가정에서 실천하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배운 성경적 가치가 가정과 학교에서의 세상적 가치와 유리되지 않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녀들이 가정, 교회, 세상, 어디에 있으나 하나님안에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쓰임을 받고 승리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부모와 교회는 자녀교육의 아름다운 동역자입니다.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교육을 배워야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우리의 교육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미국 교육부장관도 여러 차례 한국 교육을 칭찬했지만 그것도 교육열일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에는 열정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세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표를 보실까요?
교육=열정(자세) + 시스템(방법) + 가치(목적)
교육에는 열정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루어내는 방법과 그것이 지향하는 교육적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한국학생이 미국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는 비율은 전 입학생의 1%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들어가서 중도에 그만 두는 율이 44%입니다. 10명이 입학했다면 4명 이상이 그만 둡니다. 왜 그럴까요? 교육의 열정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육 방법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이 “듣고 외우고 시험 보는” 방식으로 공부해서 학교에 들어갔으나 그 방법이 계속 통하지 않으니까 학교를 그만 두는 것입니다. 우리 교육에 없는 것이 세 가지입니다. 체험이 없고 자기성찰이 없고 토론이 없습니다. 그냥 머리에 집어 넣기만 합니다. 오늘 말씀은 여기에 대해서무엇이라고 말할까요? 다시 읽을까요? 신6:4-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
1) 마음에 새기고
자, 우선 7절부터 순서를 보면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했습니다. 가장 첫 번째가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새기는 것”입니다. 새긴다는 말은 “못을 박는다”는 말입니다. 칼이나 정을 가지고 “나무나 돌에 조각하는 것”입니다. 단지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 시험보기 위해 밤새워 달달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의 “마음”은 “레브”, “심장”입니다. 교육은 하나님의 말씀을 심장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누구의 심장에 새기느냐입니다. 가르치는 대상의 심장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교사의 심장에 새깁니다. 교사가 누구입니까? 부모입니다.
언제나 목회는 목사고 교육은 교사입니다. 교사인 내가 먼저 확신할 수 없으면 남도 확신시킬 수 없습니다. 잠6:21입니다.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 속에 새긴 것만 내것입니다. 시119:11절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이 “마음이 둔 것”이 새기는 것입니다. 새긴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네 가지가 이어집니다. 가르치고, 강론하고, 기호를 삼으며, 기록하는 것입니다.
2) 가르치고
교육의 방식이 크게 넷입니다. “가르치라”. 이 말을 히브리어로 “샤난”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찌르다. 뾰쪽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칼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히4:12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을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교육은 강의가 아닙니다. 영혼에 대한 예리한 수술입니다. 그래서 아픕니다. 아파야 치료가 됩니다. 교육의 목적은 곧 삶의 변화입니다. 듣기 위해 듣는 것이 아닙니다. 칼로 찌르듯 가르치려면 상대방을 알아야 합니다. 개인적이고 맞춤형이어야 합니다. 이래서 이스라엘에서 발전한 것이 토론식 교육입니다. 이스라엘의 학교는 모두 토론식으로 진행됩니다. 수업시간이 조용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말하면 서로 마주보고 토론합니다(사진1). 개인 책상은 서로 마주보도록 되어 있고 전체 책상은 앞을 향하여 반원형으로 놓여 있습니다. 책이 앞에 있지만 책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이야기합니다. 이 토론식 교육을 “하브루타 방식”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역사공부를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런 순서로 진행합니다.
1. 먼저 책을 소리 내서 읽는다.
2. 내용에 대한 자기 생각을 정한다.
3.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말한다.
4. 서로 질문과 답변을 오가며 토론하고 논쟁한다.
5.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다시 이야기한다.
6. 결론은 하나가 아니라 항상 여러 가지다.
여러분은 열두 살 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성전에 올라가 박사들과 토론하는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눅2:46입니다.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우리 같으면 “말하기도 하시며 가르치기도 하시니”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셨다고 말합니다. 듣는 것만이 교육이 아닙니다. 유대인 하브루타 교육의 장점은 서로 다른 견해, 다른 관점, 다른 시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창의성이란 다르지만 새롭게 생각하는 능력입니다.
3) 강론하라
가르쳤으면 강론해야 합니다. 강론은 우리 말 “강의”와 다릅니다. 이것은 “다바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처럼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민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이야기하고 싶어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유대인 교육의 핵심은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태교때부터 시작됩니다. 유대인 태교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엄마가 앉아 수를 놓으면서 뱃속의 아이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치 옆에 아가 있는 것처럼 도란 도란 이야기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배셋머리에 뉘이고 이야기합니다. 아이가 자라면 밥상머리에서 이야기합니다.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안식일식탁에 앉아 두 가지 주제로 이야기합니다. 먼저 성경을 주제로 이야기합니다. 유대인은 매일 읽어야 하는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은 일년에 한번, 탈무드는 7년에 한번 정도 읽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가 끝나면 일상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마 아타 호셉?“.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입니다. 같은 주제에 대하여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누가, 형이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강론“입니다. ”강의“가 아닙니다.
4) 표를 하라
그리고 표를 하는 데 두 가지 표가 있습니다. 손에 붙이는 표와 이마에 붙이는 표입니다. 손은 13세부터 남자가 왼쪽 팔에 하나님의 말씀을 감는 것입니다. 손목에서 팔꿈치 까지 7번 감습니다. 그리고 그 손을 심장에 대고 다닙니다(사진2). 이마에 붙이는 기호는 눈과 이마 사이에 붙입니다(사진3). 몸에만 붙이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는 집에도 붙입니다. 모든 가정의 화장실을 제외하고 대문에서 방문까지 모든 문의 오른쪽에 눈 높이만큼 붙입니다(사진4). 작은 상자 모양으로 뚜껑을 열면 신6:4절의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을 집을 나가고 들어갈 때 만집니다.
5) 기록하라.
그리고 마지막에 기록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의 이 교육방식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새기라 가르치라 강론하라 표를 하라 기록하라
(마음) (토론) (이야기) (눈) (성찰)
어떻습니까? 조금 다르지 않습니까? 다만 외우기만 하는 우리의 교육과는 다르지 않습니다. 이 작은 차이가 유대인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교회와 가정이 배워야 할 교육방식이 이 교육입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교회와 가정이 자녀를 교육할 때 기억할 또 한 가지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입니다. 2011년 11월, 세상을 놀라게 한 패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어머니를 살해하고 시신과 함께 8개월을 살다가 검거된 사건입니다. 왜 이 아이는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까? 어머니가 끊임없이 1등만을 요구해서 아이가 폭발한 것입니다.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엄마는 아들이 공부를 못한다고 3일 동안 잠도 재우지 않고 골프채로 때려 아이의 바지에 피가 발견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우리의 부모들은 자녀의 학업에만 집착하는 것입니까?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가 지식뿐입니까? 감정도 있고 성품도 있고 영성도 있는 데 왜 우리는 성적 하나에만 목숨거는 것입니까? 그렇게 했어도 노벨상 하나밖에 타지 못했지 않습니까? 문제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입니다.
다시 신명기로 돌아가 봅시다. 신6:4-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기에 명확하게 우리가 가르쳐야 할 교육의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아”. 결국 교육은 하나님 문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관점이 교육의 기초입니다. 결국 모든 문제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인 여호아시니”. 여기서 하나라는 것은 하나, 둘, 셋의 숫자개념보다 큽니다. 여기서 하나는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존재의 근원입니다. 모든 것의 통일입니다. 모든 것을 합친 전체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all in one, 하나안에 있는 모든 것이요, one in all, 모든 것안에 있는 하나입니다. 그 하나님을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연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정신, 혼입니다. 성품은 영입니다. 힘은 육입니다. 영과 혼과 육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됩니다. 하나님 사랑하면 됩니다. 모든 것이 여기서 결판납니다.
가끔 하나님은 모르는 데 공부를 잘 해서 유명한 인물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그럴싸 했지만 그런 사람들의 불행한 내면, 가정, 운명을 쓴 책이 있습니다. “무신론의 심리학”(사진5)입니다. 이 책은 겉으로 볼때는 역사에 발자취를 남겼으나 무신론자였던 니체, 프로이트, 러셀, 장 폴 샤르트르, 데이비드 홈, 카뮈, 쇼펜하우어, 홉스, 볼테르, 스탈린, 히틀러, 모택동, 칼 마르크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무신론자가 되어 어떻게 살다 죽었는가를 추적한 책인데 대부분 자살하거나 불행하게 죽었고 혹시 제 명에 죽었어도 어떻게 그 후손중에 정신병, 우울증, 사회적 낙오자들이 생겼는가를 추적한 책입니다. 역사가 남긴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 잘 믿은 사람은 고난도 많았지만 반드시 성공했고 사람들에게 존경받았고 그 자신도 행복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뿐 아니라 가정, 학교에서 이 하나님중심의 교육을 시켜야 하는 데 요즘 공교육의 탈선으로 대안학교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안학교중에는 좋은 학교가 많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새로운 대안학교를 만드는 것이 새로운 교육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는 교육이 새로운 교육이다“. 그래서 저는 대안학교보다 원안학교라는 말을 쓰고 싶습니다. 학교를 대신한 다른 학교가 대안학교라면 본래 성경이 추구한 학교를 교회와 가정을 통해 벌여 나가고 그 영향으로 학교도, 세상도 바꿔 나가는 것, 그것이 원안학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가 성경을 기반으로 하는 원안학교의 기초를 닦도록 힘을 모읍시다. 교회학교 교육에 관심 가져 주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좋은 교사로 지원해 주십시오. 가을에 있을 교육연구 소그룹팀에도 참여해 주십시오. 또한 가정이 자녀의 신앙교육의 센터가 되게 합시다. 교회와 가정이 하나되어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잘 키우는 것, 그것이 우리의 꿈이요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자녀에게
신 6:7-8 / 강성찬 목사
임금으로부터 거대한 자기의 석상을 세우라는 지시를 받은 석공이 있었습니다. 그로서는 일생일대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날부터 엄청난 고민에 사로잡혔습니다. 오늘날 같은 대형 기중기가 없던 시절입니다. 엄청난 크기의 입상을 세우려면 몇 개 부분으로 나누어 조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조립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밤낮없이 고민하던 석공의 발길이 어느 날 바닷가를 찾았습니다. 적당한 자살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무심한 어린이 몇이 자기 곁에서 모래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무심코 그들을 바라보던 석공은 순간 벼락을 맞은 것 같은 감동에 사로잡혀 한달음에 석상을 세울 현장에다 석상의 밑부분을 세운 다음 석공은 그것을 완전히 흙으로 덮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마치 신라시대 왕릉과도 같이 둥글게 구릉을 이룬 곳 정상에서 또 다시 석상의 몸통 부분을 조각했고 그것을 파묻혀 있는 다리 윗부분과 연결했습니다. 그리곤 다시 전과 같은 요령으로 흙으로 파묻어 버렸습니다. 다음, 같은 방식으로 석상의 두부를 조각하여 몸체 위에 조립한 그는 지금까지 덮어두었던 흙을 모두 치워버렸습니다. 그렇게 하니 거기 우람한 임금의 석상이 제 모습을 드러었습니다. 석공은 해변가 코흘리개 어린이들에게서 배워 마침내 이 거대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어린이에게 배운 석공-인터넷 정보)
사랑과 정열의 시인 하이네는 가끔 집에서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초청 받은 손님들은 모두 어린이들이었습니다. 그의 집에는 항상 수십 명의 어린이들이 와글거렸습니다. 한 친구가 하이네에게 물었습니다."여보게 자네에게는 아이가 없지 않은가. 도대체 저 아이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저렇게 떠드는 어린이들 틈에서 어떻게 시를 쓰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하이네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습니다."우리 마을의 꼬마들일세. 어린이들의 깔깔대는 웃음과 가식 없는 얼굴을 봐야 시상이 떠오른다네. 그래서 가끔 어린이들을 초청해 파티를 연다네." 하이네는 어린이들의 밝은 표정에서 시상을 얻어 명작을 남겼다합니다.
오늘 성경은 자녀들의 인격을 인정하고 가르치고 강론 할 것을 말씀합니다. '부지런히 가르치다'(솨난)의 본래 뜻은 '찌르다', '뾰족하게 하다'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생명력 있는하나님의 말씀(히 4:12)으로 자녀들의 마음과 영혼을 예리하게 찌르듯 감동시키고 교훈하라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까요
잘 기억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김삼환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이 속한 교단에 목사님 한 분이 연세 많은 90 넘으신 목사님이 한분 계시는데 또 80 넘으신 목사님하고 두분이 만나셨어요. 대화를 하시는 거예요. 여보, 당신 입원 했다지. 그래 입원했어. 그래 좀 어때? 괜찮아. 그러고 좀 이야기하시다가 정확하게 10분 이내로 또 한번 묻는 거예요. 자네 입원했다지. 그래 입원했어. 어떻게 됐어? 퇴원했어 괜찮아. 그러고 죽 이야 기하시다가 또 10분되면 또 그 이야기해요. 자네 입원했다지. 옆에서 들어보니까 계속 일곱 번 여덟 번 반복하더랍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 합니다. 10분전에 한 이야기를 잊어버리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연세가 많으면 다 잊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 먹은 걸 잊어버리고, 자기가 집에서 나온 걸 잊어버리고, 조금 전에 들은 이야기를 금방 잊어버리는 등 다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80, 70, 60 되어서 접했던 것은 다 잊으시고, 20대, 10대에 있었던 일은 골목골목 돌 하나 있는 것까지 다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도 안 잊어버린답니다. 모든 이야기의 내용, 언제 이야기만 하느냐? 할 때 어렸을 때 이야기만 한다는 겁니다. 연세 많아서 한 일은 금방 잊어버린답니다. 이는 과학적으로 뇌 세포가 나이든 기억을 담고 있는 곳부터 죽어가기 때문이라 합니다.
자녀에게 가르치라 합니다. 자녀들은 잘 기억할 수 있는 세대입니다.
잘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탁월성이 여러 면에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에 변호사는 70만 명입니다. 그 중에 14만명이 유대인입니다. 미국 400대 재벌 중에 24% 약 100명이 유대인입니다. 더 압축하여 40명 재벌을 뽑으니 24명이 유대인입니다. 뉴욕 교사의 60%가 유대인입니다. 유명 대학 총장의 90% 유대인입니다. 더구나 노벨상을 받은 300여 명 중에 유대인이 93명입니다. 정말 탁월한 민족입니다. 세계 최고의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심리학의 천재 프로이드, 소아마비 백신을 발명한 의학의 천재 조나 삭, DNA 발견한 천재 아더 코른베르그, 그리고 DNA 합성에 성공한 천재 솔로몬 쉬피겔는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세계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아브라함 마이클슨도 유대인입니다. TV발명자 데이비드 사노프도 유대인입니다. 정치가 키신저, 세계 최대의 영화감독 스필버그도 유대인입니다. 미술의 천재 샤갈도 유대인입니다. 심지어 모세, 바울 그리고 예수님까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은 교육의 천재입니다. 세계 인구 중에 4명을 붙잡으면 한 명이 중국입니다. 100명 잡으면 한 명이 한국입니다. 500명을 모아야 유대인이 한 명입니다. 다시 말해 봅니다. 1000명을 모으면 그 중에 250명이 중국인입니다. 한국인이 10명입니다. 유대인은 두 명입니다. 그런데 1000명을 움직이는 것은 유대인입니다. 오늘 날 유대인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아버지는 자녀에게 율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토라, 탈무드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13살에 율법 시험에 합격시켜야 유대인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율법시험에 합격하면 성년식을 회당에서 하는 데 3시간가량 걸립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성년이 된 아들이 강대상으로 나옵니다. 랍비는 두루마리 성경을 꺼내 할아버지에게 줍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아들에게 줍니다. 이 때 아버지는 펑펑 웁니다. <내가 자식을 낳아 할 일을 이제 다 했다. 하나님이 나를 저주하지 않으신다> 이 때 두루마리 성경을 떨어뜨리면, 성경이 떨어지는 것을 본 이들은 모두 3일 금식하여야 합니다. 조심조심 받아서 들고 아들이 강대상을 내려와서 한 바퀴 돕니다. 회중은 다 일어나서 성년이 된 아들이 지나갈 때 토라에 손을 대고 자기 입에 댑니다. 그리고 율법시험에 합격한 아들을 격려하여 줍니다. 아들인 경우에는 바르 마츠바, 딸인 경우에는 바르 미트바라고 합니다. <율법의 아들> <율법의 딸>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강론하며 가르쳐야 합니다. 강론할 것이라는 자신 및 자신의 가족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듭 주지시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일상 삶과 사고 가운데서 늘 말씀에 유의하며, 또한 이를 준수하는 생활에 힘쓰도록 노력해야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하여 부모를 닮기 원하는 자녀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위로, 격려, 불안정의 해소를 위해 직접적인 사랑의 훈계를 해야 합니다. 자녀들의 죄, 위험, 절망적인 결과 등에 대한 경고를 주저하지 말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서 행복의 유일한 길이란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임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자리에 앉았을 때, 자리를 옮겨 걸을 때, 그리고 서로 만나 얼굴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토론하며 전달하고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본을 보이면서 가르쳐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의 삶 속에서 표현되어져서 그 사람의 미간과 손목의 표지가 되는 동시에 가정생활에도 중심이 되어짐으로 집의 현관과 바깥문에 나타나도록 하며 본을 보입니다(8, 9절).
1911년 일제는 「총독암살날조작극」을 꾸미고 대한민국 독립 인사들을 대거 체포했습니다. 이것이「105인사건」입니다. 이때 민족지도자인 남강 이승훈선생도 일경에 체포되어 5년간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제는「민족정신」만큼은 수감시킬 수 없었습니다. 남강은 감옥에서 더욱 투철한 신앙인, 독립투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성경을 세번 통독하고 기도와 사랑실천에 힘썼습니다. 후에 남강의 비석에 사람들은 이런 말을 새겼습니다. 『일생을 남을 위해 살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사람』
인격을 존중하며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이와 같은 자 들이라』고 말씀하시며 아이들을 다 자기에게 오게 하고 어린이들을 자기가 친히 안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해 주시면서 다 복을 빌어주시고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너희들이 하나님 나라 받들기를 이 어린이들과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느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린이에 대한 이런 태도, 또한 이와 같은 교훈이 세계 역사를 통해 준 영향은 심히 큰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어린이들에게 이런 태도를 취하셨고 또 어린이를 중심으로 하는 귀한 교훈을 주셨음으로 어린이들이 이 세상에 있어서 사회적 지위와 법률적 권리 등 이런 모든 방면에 큰 영향을 준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여러 나라, 여러 사회, 여러 문명 가운데서 어린이들에 대한 태도를 찾아보면 매우 유감스러운 것이 많습니다. 옛날 5천년 전 애굽의 문명은 각 방면에 발전했던 것을 보며 찬탄해 마지않는 점이 많습니다. 그렇지마는 그 사회에서 어린이를 어떻게 했는가는 출애굽기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애굽 어린이들은 잘 대했겠지만 그들의 종노릇하는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은 여자를 낳으면 그냥 살려두었지만 남자를 낳으면 곧 나일 강에 던지라는 법령을 내린 일도 있습니다. 애굽을 문명한 사회라고 하였지만 어린이의 지위가 이런 지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무었을 가르쳐야 할까요
하나님을 바로 섬기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젼 목사님에게 젊은 신학생 한 명이 찾아와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도 낙망하신 일이 있습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놀라운 답변을 했습니다.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은 낙망해 본 적이 없네. 나는 그 동안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내 삶에 적용하고 있었지. 그 원리란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네. 나는 하루에 15분도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나간 일이 없네. 그때 이래로 나는 낙망을 모르고 살아왔어." 크신 하나님을 항상 바라보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내 주위의 사람들이 어떠한 비판을 가하여도, 조롱하여 비웃어도 우리는 크게 외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늘 하나님을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처럼 핍박과 반대와 조롱을 당하신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분은 그러한 문제들을 끌어안고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이 가셔야만 했던 십자가 그 길을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가실 뿐 모든 비웃음과 고난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기도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워 감독의 어렸을 때 일입니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에게서 어떤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하는데 그의 친구가 와서 데리고 나갔기 때문에 이 일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날 밤에 워의 아버지는 "프랭크야 아까 시킨 일은 다했니?" 라고 물었습니다. 워는 서슴치않고 "네. 다 했습니다." 라고 거짓말로 대답했다. 아버지는 벌써 거짓말인 줄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음에 워는 심히 마음이 불안하여 하룻밤을 무겁게 보냈습니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자식의 거짓말에 가슴아파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는 어린 워에게 "나는 어제 한잠도 잘 수 없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워가 "왜 주무시지 못했어요?" 하고 묻자 "나는 밤새도록 너를 위해 기도했단다." 라고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어린 아들의 마음을 화살처럼 찔렀습니다. 워는 자기의 죄를 깨닫고 아버지와 하나님께 사유함을 빌었습니다. 워는 후에 감독이 되었는데 때마침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기도를 얼마나 감사해야할지 모르겠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불량한 자녀가 있을 때 무엇보다 할 것은 자녀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생각에 넘칠 것입니다. (빌 4:6,7)(자녀를 위한 기도-예화 뱅크)
강림교회 최영순 집사님 간증입니다. 그는 지금 76세입니다. 남편이 부산에서 큰 버스 운송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났습니다. 그는 빈털털어리가 되어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 왔습니다. 그 곳에서 살기 챙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제력을 상실한 그는 날마다 밤마다 술로 살았습니다. 끝내 알콜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가출하고 말았습니다. 최 집사님은 혼자서 5 남매를 길렀습니다. 첫째 아들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의사가 되었습니다. 첫째 딸은 목사 사모가 되어 목회 사역에 충성하고 있습니다. 둘째 딸은 대기업의 상무가 되었습니다. 막내 딸은 미국 유학 가서 샌프란시스코의 한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다섯 남매가 다 성공하고 잘 되었습니다. 남부럽지 않은 사람들로 당당하게 살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집사님에게 물었습니다. <혼자 힘으로 어떻게 자녀들을 다 성공시켰습니까?> 최 집사님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나는 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날마다 새벽에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기도하였지요.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맡아주셔서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저녁에 아이들이 들어오면 붙들고 하나하나 붙들고 이렇게 기도하였지요.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옵소서’ 내가 아이들을 위하여 한 것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들을 길러주셨습니다>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정성을 다 하여 섬기게 하는 것이 최고의 교육임을 증명하여 주었습니다.
교회 출석을 잘 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 초청을 받아 그 교회에 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서 아무리 찾아도 초청받은 교회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마침 복덕방이 있길래 그 앞에 차를 세워놓고 물어보았답니다. 그랬더니, 그 복덕방 할아버지가 친절하게 가르쳐 줘서 그 교회를 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시간이 되서 그 복덕방을 찾아 가서 감사인사를 했습니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친절하신지 너무 고마워서 인사를 하려고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예수는 믿으시지요?" 물었더니, "아니요, 나는 예수님 믿지 않습니다." "아니, 왜요? 예수님 믿으면 복을 받아 잘 살게 되고, 죽어서는 천당을 가게 되는데 왜 그렇게 좋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제가 천당 가는 길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랬더니, 이 할아버지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교회 가는 길도 모르면서 어떻게 천당 가는 길은 가르쳐 준다는 말입니까?" 천당은 교회의 완성된 상태라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내세 천당은 교회 생활 잘 하는 것과 이어집니다. 교회 나왔다고 다 천당가느냐 하는 것은 따로 살펴 볼 일입니다만 교회 가는 것을 잊어버리고 천당 가는 것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구원 받았으면 예배하는 것 알고, 하나님 앞에 십일조 생활할 줄 알고, 교회에 일이 있을 때 앞장서서 일을 해야 하는데, 이모든 일의 기본은 교회 출석을 잘 하는데 있습니다.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신앙 교육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워 주는데, 후일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특별히 권면한 점이기도 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합니다.
가르치는 책임은 학교나 교회, 사회보다도 가정에 있습니다. 가정 이외의 교육 기관들이 아무리 많은 교육적 역할을 수행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가정'만큼 중요한 교육 기관을 세우신 적이 없습니다. 어린이 주일을 지키며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되 어린 시절이 가르침의 가장 좋은 기회요 잘되는 길이요 성경의 가르침임을 바로알고 가르치며 강론하며 삶의 본을 보이며 인격을 인정하며 가르치며 하나님 섬김과 기도 생활과 교회 출석을 잘 하도록 가르치는 모두가 됩시다.
이렇게 교육하자
신 6:6-9 / 엄기호 목사
인간만큼 제대로 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존재는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났다고 해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요, 가정이라는 사회 속에서부터 부모의 극진한 보살핌과 가르침을 받고, 학교와 사회 경험을 통해 배우고 익혀,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사업은 기초가 튼튼해야 성공하고, 나무는 어릴 때 바르게 자라야 하고, 건물은 지을 때 땅을 깊이 파서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를 튼튼히 해야 훌륭한 건물이 될 수 있듯이 인간은 어린 시절에 어떻게 가르치고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좌우됩니다. 특히 어려서부터 받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교육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40년의 기나긴 광야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가 동편에 서서 제2세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가르치고 있는 모습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과 법도를, 새로운 세대 사람들에게 다시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나요?
요게벳처럼 교육하자
모세는 430년 동안, 온갖 학대와 고난을 당하며, 애굽의 노예로 살아가던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킨 위대한 지도자입니다(출 12:40~). 그는 율법을 받은 자요, 성막을 지은 자요, 하나님과 대면한 자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더 좋아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히 11:24).
이런 모세를 요게벳은, 소망을 가지고 키웠습니다. 애굽의 왕 바로는 식민지 정책의 하나로 이스라엘 백성이 낳은 모든 남자아이들을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게벳이 잉태하여 남자아이를 출산했는데, 성경은, 요게벳이 그 아이의 준수함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놓고 숨을 죽이면서 길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잘난 점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소질과 가능성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남자아이들은 모두 죽여야 했던 환경이었지만, 요게벳은 아이의 장래에 대한 큰 소망을 가지고 모세를 키웠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의 소질과 가능성을 보고 개발해주어야 합니다. 현재 눈으로 보았을 때는 내 자녀가 형편이 없고 장래성이 없는 것 같아도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발견하여 소망을 가지고 교육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소망의 싹이 잘 자라도록 바람직한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요게벳은 아들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로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안팎으로 역청과 나무진을 칠한 후에 아이를 거기에 담아 목욕하는 바로 왕의 공주 옆으로 가게 했습니다. 요게벳은 아기를 살리기 위해 생명을 걸었고, 지혜롭게 처신을 했으며, 아기의 장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주의 깊게 애를 썼습니다.
또 요게벳은 모세를 신앙의 뿌리가 튼튼하도록 교육했습니다. 어머니의 지혜있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세는 바로 왕의 공주에 의해 양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세계 최대의 나라에서 최강의 부와 지식을 자랑하는 왕궁에서 온갖 영달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관심은 고역 중에 있는 자기 민족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유모였던, 그의 생모 요게벳에게서 야웨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동족에 대한 사랑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유산만큼 위대한 유산은 없습니다. 경건한 부모 밑에서 악한 자녀가 나올 수 없고, 문제있는 비행 청소년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가정에서 더욱 신앙으로 자녀들을 가르쳐 신앙의 뿌리가 튼튼하도록 키워야 합니다.
왕궁교육과 광야교육을 겸하여 키워야 합니다. 모세는, 왕궁교육을 통해 당대 최고의 교양과 기술과 학술과 전문지식을 모두 배웠고, 이에 그는 말과 행사가 아주 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광야교육도 받았습니다. 물이나 식량은커녕, 강렬한 햇빛을 피할만한 나무그늘도 없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학교교육이나 전문기술을 모두 배워서 세상을 앞서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식의 습득을 위해, 배우고 갈고 닦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생활에서 실천을 할 때 고난이라는 체험을 통과해야만 덕이 쌓여짐도 알게 해야 합니다. 고난은 위대한 스승입니다. 결국 모세는 40년의 왕궁교육을 통하여 300만 명이나 되는 백성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저력을 길렀고, 그 후 40년 간의 광야교육이라는 고난의 학교를 통하여 온유와 겸손, 사랑과 관용, 그리고 인내를 갖춘 참 지도자로 다듬어졌던 것입니다.
유니게처럼 교육하자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 사랑하는 아들(딤후 1:2), 우리의 형제(살전 3:2), 마음을 같이 한 자(빌 2:20), 동역자(롬 16:21), 그리스도 예수의 종(빌 1:1), θ의 사람(딤전 6:11) 등으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디모데는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요?
바로, 어머니 유니게의 삶을 통해 영향을 받았습니다.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는 교회봉사에 앞장섰고 교역자 섬김에 본을 보여주었고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즉, 아들 디모데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자녀를 잘 기르려면 먼저 우리들이 생활에서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이가 선한 일이나 말을 배우기 전에, 싸움을 배우고 욕을 배우는 것은 부모의 잘못입니다. 자녀들을 대할 때 먼저 이해하고, 먼저 생각하고, 먼저 용납함으로 좋은 모범을 끼쳐야합니다. 항상 인격적으로 대하고, 사랑과 관심과 존경하는 태도를 보여주십시오. 그래야 우리의 아이들이 영적으로 잘 자랍니다.
또 유니게는 디모데가 어릴 때부터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디모데는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항상 성경을 배웠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전수받았습니다. 성경교육의 효과는 어릴 때 배울수록 크게 나타납니다. 가장 중요한 교육, 가장 영향력 있고 끝까지 이루어지는 교육은 가정교육입니다. 가정교육만큼 위대하고 큰 힘은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데 중점을 두기 바랍니다. 교회 기둥들로 신앙훈련을 시키고 믿음의 씨앗을 심어주고 생명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감화시키기 바랍니다. 어릴 때의 습관은 자기 평생의 행복과 관계가 있고 영원한 생명과도 관계가 됩니다. 기도하는 습관, 전도하는 습관, 교회에 출석하는 습관, 봉사하는 습관, 헌금하는 습관 등등, 좋은 신앙의 습관이 길러지도록 합시다.
현대 가정교육에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경건’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식화된 예배가 아니라, 말씀 묵상한 것을 서로 이야기하고, 기도제목을 내놓고 함께 기도하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자녀중심의 가정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아침에 못 드리면 저녁에라도 반드시 가정예배를 드립시다. 그 예배시간이 복 받는 시간이고, 가정교육의 시간이고, 가족의 만남과 교제의 시간입니다다. 당장 오늘 저녁부터라도 가정예배를 시작합시다.
한나처럼 교육하자
사무엘은 이스라엘 민족을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우상숭배로부터 건져내어 야웨 하나님의 신앙을 확립하였고,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빼앗겼던 땅을 도로 찾아 나라를 바로 세웠으며, 사울과 다윗을 연이어 왕으로 세워 새시대를 열어갔던 하나님의 큰 종이요 사사였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또 한 명의 위대한 지도자를 사무엘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의 기도로 잉태되고 기도로 출생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나는 남편 엘가나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당시, 실로에 있던 하나님의 집에 제물을 가지고 가서 제사를 드리고 거기 머물며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낳는 해산의 고통 외에도 그 이전에 자녀를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위해 태어나기 전에도 기도했으며, 태어난 후에도 기도했고, 하나님께 드린 후에도 기도했습니다. 그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적 지도자로,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또 한나는 사무엘을 성전에 맡겼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약속 한대로 사무엘이 젖을 때자마자 하나님께 바치고 성전에서 자라게 했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세상의 것을 알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알고, 세상의 것에 접하기 전에, 하나님의 집에서 엘리 제사장을 도우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를 배웠습니다. 거룩히 구별된 사람으로 자라서, 그의 헌신과 거룩한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셨고, 하나님의 권위로 일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적 지도자로,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이름과 인품이 온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가에 대해 알아보면서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어머니들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내일의 우리 교회를 이끌어가고, 내일의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이끌어가고, 내일의 세계를 이끌어갈 귀중한 새싹이요, 보배들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과 같이,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와 같이,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와 같이 자녀들을 교육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 성령님 중심, 예배 중심의 자녀가 되게 합시다. 부모에게는 자랑거리가 되고, 교회의 지도자요, 이 나라의 큰 기둥이 되게 하고 세계 역사에 길이 빛나는 리더자로 교육합시다. 평생 동안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는 모든 자녀들로 교육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물려줄 유산이 있습니까?
신 6:4-9 / 안효관 목사
20살이 채 되지 않는 미성년자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부자는 ‘선박왕’이라고 불리우는 오나시스의 외손녀라고 합니다. 올해로 만 20세가 된 그녀는 지난 2003년 18살 생일 때에 외할아버지로부터 10억 달러를 유산으로 물려받았습니다. 우리 돈으로 하면 1조원을 상속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돈을 유산으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가 갖고 노는 인형에게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크리스찬 디올)가 직접 만든 옷을 입힌다고 합니다. 그녀가 1년 동안 쓰는 용돈만 해도 1백억 원이라고 하니까 그럴만도 하겠지요.
그런 일이 외국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3월에 발표한 것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20살이 되지 않는 미성년자가 가진 땅이 전국적으로 5400만평이라고 합니다. 서울 여의도 면적의 21배입니다. 그 중에 10살도 안된 아이들이 가진 땅은 여의도 면적의 5배나 된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2살도 채 되지 않는 아이의 명의로 된 땅도 제법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물려줄 유산을 얼마나 준비하셨습니까? 선박왕 오나시스가 외손녀에게 유산으로 준 것같이 한 1조원쯤 모아두셨습니까? 아니면 커다란 땅 덩어리 하나 장만해 놓으셨습니까?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일년에 용돈으로 백억 원씩 쓰는 사람이나 자신의 이름으로 수만 평의 땅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부모 잘 만나서 인생이 활짝 펴진 사람입니까? 그들이 정말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성공적으로 산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어제 신문에 보니까, 8년 전에 아들에게 4억 6천만 원을 유산으로 물려준 아버지가 그 돈을 다시 돌려달라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8년 전에 4억을 줄 때는 아들이 연리 5%로 계산해서 매달 용돈을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어느 해 설날인가 10만원을 한 번 받은 것 외에는 8년 동안 아무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큰 아들이라는 자가 아버지와 식사 한번 같이 하지 않을 정도로 아버지를 돌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8년 전에 준 돈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아버지가, 그리고 4억 6천만 원을 유산으로 받은 그 아들이 과연 인생을 잘 산 것이고 행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행복을 물려주거나 인생의 성공을 물려주는 것이 아님을 잘 알면서도 어리석게도 우리 인간은 그렇게 뭔가 큰 재산을 물려줘야 될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정말 자식에게 물려줄 것이 재산이 아니라고 가르쳐줍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해서 우리가 우리 후손들에게,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계승할 믿음의 후손들인 우리 교회 어린아이들에게 과연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흔히 ‘쉐마’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때 가장 먼저 읽혀 주고 암송시키는 말씀입니다. 율법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할 여러 가지 구체적인 명령들이 나오는데 약 600여 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말씀이 쉐마라고 불리는 오늘의 말씀입니다. 이 쉐마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아이들에게 이 세상에 돈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돈이라고 하는 거대한 맘몬이 인생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오늘 우리 시대에 정말 이 쉐마의 정신을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신명기 28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기 위해서는’ 오늘 읽은 쉐마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그런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르헨티나의 전직 대통령에게 물었습니다. “왜 미국과 카나다와 같은 북 아메리카는 번영을 누리고 부유한 나라가 되었는데, 이 남아메리카는 빈곤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까?” 그러자 그 전직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황금을 찾아 이 남아메리카로 왔지만, 북 아메리카의 조상들은 신앙을 찾아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장 정직하게 정곡을 찌르는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는 나라,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는 가정,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는 자녀들은 분명 성경에 기록된 하늘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신앙이라는 아름다운 유산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습니까? 먼저는 부모와 우리 어른들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쉐마는 우리에게 아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리고 이어서 6절에서도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라고 말씀합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르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자녀들에게 말씀을 따라 살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르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바른 신앙에 서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신앙의 유산이 자녀들에게 전수될 수 있습니다.
부모가 믿음을 따라 바르게 살지 않고서 자녀들에게 믿음으로 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말로는 가르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게 효과가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있어서 최초의 스승이자 최고의 스승은 부모님입니다.
부모가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이라고 못 박고서 철저하게 주일 성수하면 자녀들도 철저하게 주일을 지키게 됩니다. 부모님이 먼저 교회에서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할 때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교회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이구나’ 생각하고 봉사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짧은 목회생활을 하면서 발견한 것이 하나 있다면, 새로운 신자들은 자기를 전도한 사람의 수준에서 신앙생활하려 하고, 자녀들은 부모의 신앙을 그대로 닮는다는 것입니다. 전도 받은 사람은 전도한 사람이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면 ‘아 신앙생활은 저렇게 하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도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전도 받은 사람도 ‘신앙생활은 저렇게 적당하게 해도 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꾼의 자녀들이 교회에 기둥처럼 성장합니다. 그들은 교회 생활을 하다가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도 봉사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습니다. 자기의 부모님에게서 그렇게 보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들에게 이런 신앙적인 모습을 보여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열심히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 손주들이 그런 모습에 감동이 됩니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나중에 커가면서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날 때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할머니의 그 기도하시던 모습 때문에 힘을 얻고 용기를 얻게 됩니다.
두 번째로, 우리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기 위해서는 가정을 늘 신앙적인 분위기로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7절과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집에 앉았을 때든지 누웠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화초 하나를 기르더라도 햇빛이 잘 들고 통풍이 잘 되는 좋은 환경에서 자라야 소담한 꽃봉우리를 피워내는 법입니다. 하물며 백지와 같이 순수하고 깨끗한 영혼들이 자라는데 있어서 좋은 환경이 필요하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들 맹자를 좋은 환경에서 교육시키기 위해서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좋은 환경이 좋은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진리입니다.
신앙을 물려주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이 좋은 신앙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정에 좋은 신앙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가정은 어떻습니까? 우리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신앙을 전수해 줄 수 있는 좋은 신앙적인 분위기가 되어 있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 전쟁에 패배했던 나라 가운데 하나가 이탈리아입니다. 2차 대전 바로 직후에 이탈리아 시칠리 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섬에 산 하나를 가운데에 두고 두 개의 고아원이 있었습니다. 한 곳은 연합군과 결연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시설도 좋았고, 영양가 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는 고아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고아원은 집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비바람을 가릴 수 없을 정도였고, 후원하는 단체나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분유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시설이 형편없는 그런 고아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시설이 좋고 좋은 음식을 먹였던 고아원의 어린이들의 사망률이 시설이 나쁜 쪽의 고아원보다 60%이상 더 높았습니다. 사람들은 의아해 했습니다. 좋은 시설에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이는데 왜 사망률이 더 높은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 이야기가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밝혀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전쟁 중에 세 아들을 잃고 실성한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여기저기를 방황하다가 시설이 나쁜 쪽의 고아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 고아원에 수용된 아이들을 모두 자기 자식으로 착각하고는, 마치 자기 자식을 돌보는 것처럼 번갈아가며 안아도 주고, 업어도 주고, 넘어지면 가서 일으켜 주고···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돌보는 것처럼 그렇게 돌보고 있었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수년간 그런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비록 시설은 좋지 않고 좋은 음식은 먹지 못했지만 그 아이들은 자기 어머니도 아닌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망률이 적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 아이들은 죽음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랑을 먹고 자란 아이가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용서받고 자란 아이가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 있고 용서도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험하지만 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아이들이 되기를 원한다면 믿음을 먹고 자라나야 합니다. 신앙적인 분위기는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말씀에 익숙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집에 있으면 어느 때에든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곳을 가든지 그곳은 말씀과 접할 수 있는 곳이 된다면 아이들은 부모님들이 바르게 신앙생활해야 한다고 말로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 분위기 때문에 그들은 말씀과 늘 가까이 하게 되고, 말씀을 따라 사는 아이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정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가정에 들어오면 예수님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그런 가정을 꾸려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신앙적인 분위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고, 그저 공부만 강조하는 가정의 분위기는 아닙니까? 공부 잘하기만을 바라고 공부하라고 닦달하면서도 정작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에는 뒷전이라면, 어떻게 우리 아이들이 신앙적으로 바른 믿음을 갖고 성장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앙교육은 교회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보다 가정에서 먼저 가르쳐야 합니다. 가정에서 부모님들이 모범이 되어야 하고, 신앙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줄 때 아이들은 신앙을 삶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전주남성교회 모든 믿음의 가정들에는 항상 찬송이 울려 퍼지고, 기도와 감사가 넘쳐나고, 날마다 예수님의 은혜를 기뻐하며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그런 아름다운 신앙의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찬송하는 즐거움을 배워가고 기도하는 삶을 배워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부모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자람으로 이웃을 사랑할 줄 아이들이 되고, 가정에서 용서받고 가치를 인정받는 그런 따스함을 가슴 깊이에서 느낌으로 세상을 향내 나게 만드는 좋은 아이들로 자라갈 수 있도록 좋은 신앙적인 분위기가 넘치는 가정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우리의 삶으로, 그리고 가정의 분위기로 자연스럽게 신앙의 아름다운 유산을 물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분명하게 신앙의 가르침이 우리 가정에 있어야 한다고 오늘 본문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신앙적인 가르침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7절에 보면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였고, 또 “어느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22:6절에서도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부모님들에게는 아이들을 바르게 양육하고 보호하는 책임뿐만 아니라 교육해야 하는 책임도 있습니다.
내 아이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께 고마운 인사를 하는 것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마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상일 것입니다. 선생님께 고마움을 표현해서 아이들에게도 고마운 분들에게는 고맙다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 주어야지요! 그런데 왜 그것이 나쁘다고 그럽니까? 그것은 우리 어른들이 그 고맙다는 감사의 정성을 악용해서 잘못된 교육을 낳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제대로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못하게 되는 현실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르쳐야 할 것은 분명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쳐야 하고, 감사한 것은 감사한 일이라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할 것이라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오래 전에 학원을 경영하시다가 학원을 그만 두시고 음식점을 개업하신 분을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에게 왜 학원을 그만두셨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대답이 오늘 우리들의 잘못된 자녀교육의 한 단면을 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떤 학생이 학원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을 나무랬습니다. 그래도 담배를 끊지 못하자 그 부모님과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로 학원에 와서 상담을 하는 대부분의 학부모님들이 하시는 말씀은 ‘내 아들은 결코 그런 짓을 할 아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괜히 착한 아이를 불량한 학생으로 본다고 화를 내면서 아이들을 다시는 학원에 보내지 않습니다. 자기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한다고 인정하고 ‘관심 가져주고 잘 지도해 줘서 고맙다’고 고맙게 여기는 부모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학원을 제대로 운영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렇다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아이들을 신앙양심상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차라리 학원을 그만하자’ 그래서 정리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잘못된 교육을 하고 있는 부모님들의 모습입니다. 그저 공부만 잘하면 되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잘못이 용서되는 그런 풍토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며칠 전 중간고사를 보던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부정행위를 한다고 꾸지람을 듣고는 학교 건물 5층으로 올라가 투신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간고사를 망쳐서 스트레스를 받던 도중 선생님께 꾸중을 들으니까 죽음을 선택하고 만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누가 그 학생을 죽게 만들었습니까? 성적을 강요하는 사회와 어른들이 그렇게 만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열심히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은 괜찮은지 아십니까? 어떤 교회에서는 장로님이 고등부 주일 예배를 없애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대학입시가 눈앞에 있는데 고등부 예배를 따로 드리지 말고, 어른들과 함께 예배드린 후에 예배 끝나면 바로 집에 가서 공부하거나 학원에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교육은 대학에 들어간 후에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분들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 안에서도 신앙교육의 자리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바르게 자라가도록 날마다 신앙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말씀으로 교육시키는 유대인들에게서 세계를 주름잡는 석학들이 많이 나왔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1800년대 영국은 산업화의 영향으로 경제적으로 다소 부유해지긴 했지만, 사회는 극도로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도시 빈민에 대한 문제가 아주 심각했을 때, 교회에서 주일학교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주일마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신앙교육을 시켰습니다. 이런 혼란에 빠진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신앙교육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영국이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어쩌면 둘째 문제입니다.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인간 사회에서 인륜이 파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우리나라를 살릴 수 있습니까? 공부 잘하는 아이를 많이 만들어내면 됩니까? 먼저 우리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앙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민족에게 미래가 있습니다. 옳은 것은 옳다고 가르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는 신앙적이고 양심적인 교육이 자리를 잡고 가치를 인정받아야 합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보다 양심적인 - 인성을 쌓는 아이가 훌륭한 아이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풍토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일을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와 가정에 맡겨주셨습니다. 여러분,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천재 한 사람이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천재론’을 주장했습니다. 천재 한 명이 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바른 믿음으로 양육 받은 믿음의 사람 하나가 나라를 살릴 수 있습니다. 썩은 사회에 생명을 공급하는 축복의 샘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살릴 그 한 명이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서 우리를 통해 지금 양육 받고 있습니다.
부지런히 가르쳐라
신 6:4-9 / 황광민 목사
미국에서 1950년대에 아이를 많이 낳았습니다. 그때 태어난 사람들을 베이비 부머(Baby Boomer)라고 합니다. 그들은 수십 년 동안 교회를 등지고 살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캘리포니아 대학의 종교학 루프박사(Wade Roof)는 교회로 돌아온 1800만 베이비 부머들의 3분의 2가 어린 자녀를 둔 부모였다는 것을 지적하며 아이들에 대한 종교교육의 절실한 필요성이 교회로 돌아온 이유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뉴저지의 일간 신문 Records지의 조사에 의해 사실로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Records지는 북부 뉴저지 사람들을 대상으로 "미국인의 종교실태"를 조사했는데 많은 아이들이 교회로 몰려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갑자기 재미있게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젊은 부모들이 극성스러울 정도로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교회에 데리고 다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54%, 약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33%이며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한 이는 3%뿐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에 관하여 시카고 대학의 종교심리학 교수 브라우닝 박사(Donald Browning)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미국의 가정들은 바람직하지 못한 문화의 위협을 받고 있다. 파도처럼 덮치는 이 악한 문화로부터 아이들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부모들의 현실이다. 지금 부모들은 이 악한 문화와 대항하여 함께 싸울 동지를 찾고 있다. 마약과 자유분방한 섹스와 폭력 등의 거대한 악에서 학교는 더 이상 아이들을 돌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부모들은 다시 교회를 찾게 되었다." 학교교육의 한계와 교회교육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입니다.
부지런히 가르치라
오늘 봉독한 본문은 일명 "셰마"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셰마"는 "들으라"는 말인데 본문은 "들으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문에 이 "셰마"의 표식을 붙여 놓고 들어가며 나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 중심 말씀은 본문 45절의 말씀 "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봉독한 말씀 7절을 보면 이것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따라 유대인들은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녀가 말을 할 수 있게 되면 기도문을 가르치고 축복의 말씀으로 기억하게 합니다. 아이들이 자라가면서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성경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게 되면 칭찬과 격려를 해줍니다. 또 아이가 자라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탈무드를 읽히는데 그때 부모는 반드시 꿀을 책장에 발라 핥게 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꿀처럼 달다는 인식을 갖게 합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신앙교육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며칠 전에 아주 비극적인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중학교 3학년 학생이 70대 노인을 걷어차서 10m나 되는 계단에서 굴러 중태에 빠지게 한 사건입니다. 그 노인은 지하철에서 경로석에 앉아 있는 학생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야단을 친 것 같았습니다. 노인에게도 훈계하는 지혜가 필요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70대 노인을 걷어차서 계단에서 구르게 되고 중태에 빠졌다가 끝내 숨지게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청소년들이 흔들리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심각한 위기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어쩔 수 없는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여기서 더욱 절실하게 신앙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 교육의 필요성을 얼마나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자녀교육에 무엇을 우선하고 있습니까? 신앙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너무 지식 교육에 치중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 키가 자라 가며 지혜가 있었으며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사랑스러워 갔다고 하였습니다(누가복음 2장). 키만 자라는 것이 성장이 아닙니다. 물론 지혜도 필요합니다. 지식교육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훌륭한 인물로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지성교육에 밀려 신앙교육은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시절이 아주 중요한데 학교의 지식교육에 모든 시간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신앙교육을 원해도 부모들이 허락하지를 않습니다. 때가 되면 할 것이라고 느긋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청소년기의 신앙교육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종교심리학자 스펜서 박사의 조사에 의하면 20세 이전에 입교한 수가 전체 기독교인의 절반을 넘습니다. 1천명의 입교자 중 548명이 20세 이전에, 337명이 20대에, 96명이 30대에, 15명이 40대에, 그리고 겨우 4명이 50대에 기독교 인이 되었습니다. 청소년기의 신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보고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지런히 가르칩시다. 자녀의 신앙교육에 최선을 다합시다.
유일신앙 - 교육의 기초
그러면 무엇을 먼저 가르칠 것인가? 기독교 교육의 기초는 유일 신앙입니다. 무엇보다 이 유일 신앙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이시니라." 기독교 교육은 여기서 시작해야 합니다. 신앙교육은 단순히 인성교육이 아닙니다. 유교식 윤리 교육이 아닙니다. 감리교회 교육의 약점은 인성교육에 편중된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가르치면서도 윤리교육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교회학교에서는 하나님을 바로 알도록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가 섬기는 여호와는 유일신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을 떠나서는 우상숭배가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8장 5∼6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세상에서 말하는 신들은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미신들입니다. 오직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특성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종교는 다 같지 않습니다. 사랑을 가르치고 자비를 가르치고 인자를 가르친다고 같지 않습니다. 어떤 종교든지 윤리적인 차원은 있습니다. 어떤 종교든지 휴머니즘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종교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대 기독교학 교수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북한의 주체사상에도 휴머니즘이 있다고 하면서 대화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깡패한테도 휴머니즘은 있다고 대꾸했었습니다. 세상에 휴머니즘이 없는 종교가 어디 있겠습니까? 윤리 없는 사상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다 똑같은 종교가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유일하신 하나님은 특별한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본문의 5절의 말씀처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섬겨야 합니다. 이 말씀은 너무나 중요하여 마음에 새기라고 하였습니다.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잠자러 갈 때나 일어날 때나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문설주에 붙여 들어가며 나가며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특별해야 합니다.
제가 이 설교를 정리하고 있을 때 파키스탄 사람 알렉산더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11시 비행기로 파키스탄 감독이 떠난다고 소식을 알려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주일날 11시에 출국하는가? 주일 11시에 세계 모든 교회가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아닙니까?" 그는 비행기 스케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계속해서 퍼부었습니다. "화요일도 있고 목요일에도 비행기가 있지 않습니까? 좀더 서둘러 일찍 가든지 늦춰서 화요일에 가야지 주일 오전 11시가 무엇입니까? 우리 한국 성도들은 이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랬더니 알렉산더가 그것은 한국식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이것은 한국식이 아니고 기독교식이고 성서식" 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전화가 다시 왔습니다. 알렉산더와 파키스탄 감독이 의논을 했는데 주일 오전 11시에 출국하는 것을 취소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몰라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그는 제가 한 말이 성서적이요, 옳은 말이라고 하면서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며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좀 더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왕 하나님을 섬기려면 특별한 마음으로 섬기십시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하신 분입니다. 적당히 어물어물 섬길 분이 아닙니다. 아주 특별한 마음을 갖고 그분의 말씀을 철저히 따르는 섬김 이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신앙 교육의 기초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배우는 사람도 말씀을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 잘 가르쳐야 합니다. 즉 기독교 신앙교육이 머리로 하는 지식교육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봉사가 좋다는 것을 알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봉사정신이 마음에 새겨지지 않으면 봉사할 수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머리로만 배우면 힘이 없습니다.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길 때 원수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에 새겨질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토마스(D. Thoma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식은 큰 힘이 된다. 큰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사용할 줄 알면 큰 힘을 갖게 된다. 또한 경건은 지식보다 더 큰 힘이 있다. 경건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전능자의 팔을 움직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다. 그리고 지식과 결합한 경건은 피조물의 가장 강력한 능력을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새겨져 경건이 될 때 큰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머리에 머무르게 하면 안됩니다. 그것이 마음에 새겨져서 경건의 뿌리가 되게 해야 합니다.
기독교에 대한 수많은 공격 중에 믿음과 신학을 구분하려는 것보다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믿음을 신학과 분리시킬 때 믿음의 가치는 무엇이며 또한 신학의 가치는 무엇인가요?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믿음은 감정적인 것이고 신학은 이성적 학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믿음이나 신학이 영적인 지식이 없어도 존립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머리로만 하는 신학에 무슨 생명이 있겠습니까? 신학 없는 믿음이 미신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처럼 믿음 없는 신학은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신학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에 새겨질 때 생명이 있습니다.
말씀을 삶속에 심어라
이제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 심으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7∼9절의 말씀을 보면 말씀을 생활 가까이 두라고 하십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7절). 교회 와서 설교 한번 듣고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적인 신학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매일의 삶을 신학적으로, 또는 성서적으로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본문 8∼9절에는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나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가까이에 두고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논리적 철학의 대상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요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철학적 훈련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말씀으로 삶에 가까이 있게 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삶에 뿌리를 내리게 해야 합니다. 신앙 따로, 생활 따로 이런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있다는 그것은 생명 없는 공리 공론이 될 뿐입니다.
부모가 할 일
신 6:4-9 / 이정익 목사
매년 5월은 가정을 생각해 보는 달입니다. 오늘이 5월 첫 주일 이니까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 주일이 되면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는 자녀양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부모의 역할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은 자녀교육이 참 힘든 시대입니다. 오늘은 부모역할이 아주 복잡한 시대입니다. 모두 아이를 하나 밖에 낳지 않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이 아이가 우상입니다. 이 아이들 때문에 요란합니다. 아이들이 걷자마자 학원으로 보내고 야단입니다. 너무 요란을 떱니다. 물론 잘 키우려는 마음 때문이겠지만 과연 무엇이 잘하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안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세상에는 자녀교육에 대한 좋은 방법론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유명한 교육학자들이 만들어낸 교육 방법론도 너무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학설들도 많습니다. 이론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그중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교육이론과 방법론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이 자녀교육의 헌장처럼 여기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 신 6:4-9까지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하나님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신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여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이 말씀을 유대인들은 “쉐마“ 라고 부릅니다. ”전통“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가정에는 집집마다 “쉐마”라는 상자를 보관합니다. 이 상자는 가죽으로 만든 상자인데 그 상자 속에 양피지로 만든 두루마리에 하나님의 교훈을 기록해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루마리를 아침저녁으로 꺼내 읽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백성들을 소집해 놓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읽어주었던 말씀입니다. 앞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영원히 자녀들을 가르치는 말씀으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때 하나의 전통으로 이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말씀을 전통, 쉐마라고 부르며 유대인들은 후손들을 가르쳤습니다. 여기 보면 세 가지 강조점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5절을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부모가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이 무엇인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모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좋은 신앙인 이 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교육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본 그대로 믿고 행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부모만한 교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링컨은 “하나님을 진실히 믿는 부모를 가졌다면 그는 부자다”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가장 좋은 교사라는 말입니다.
뉴욕 항구에 자유의 여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상은 프랑스 조각가 바르톧디(Bartholdi)가 조각한 것입니다. 바르톧디는 그 상을 조각할 때 여상의 얼굴을 자유, 사랑, 평화를 나타내는 여성상으로 조각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모습을 나타낼 만한 여성모델을 찾아 한동안 헤맸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얼굴을 찾지 못하게 되자 결국 자기 어머니의 얼굴을 새겨 넣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그는 진정한 자유와 사랑과 평화를 품은 여성상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교사입니까. 그리고 얼마나 좋은 교훈입니까.
그래서 링컨은 후에 어머니를 그리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기도소리가 오막살이 통나무 집 구석구석에 깔려 있는 것 같았다, 집안뿐 아니고 들에서 일할 때, 내가 성장한 후 가게에 나가 일할 때에도 어머니의 기도소리는 언제나 내 주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자녀들은 많은 유산이 없어도 후에 잘 살아갑니다. 훌륭한 집을 물려주지 않아도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물려주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좋은 신앙입니다. 그러면 그 정신의 유산이 자녀들의 앞날에 크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알아서 잘 살아가게 됩니다.
가끔 베다니의 나사로 가정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보면 이 삼남매가 참 의좋게 잘 살았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 자매들이 얼마나 슬퍼합니까. 그런데 그 이야기를 보면 부모 이야기가 없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두 누이가 어쩔 줄 모르며 슬퍼하는 모습을 할 때도 부모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부모는 없어도 3남매가 참 신앙 좋게 잘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 집을 쉼터로 오고 가고 들러서 친교했습니다. 그 3남매는 언제나 예수님을 반겼고 기다렸고 예수님이 즐겨 찾아오시는 가정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부모가 없어도 그만하면 훌륭한 삶 아닙니까. 그러면 그 부모는 누구였을까요. 아마도 그 3남매를 예수님과 연결시키 놓고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 부모는 별로 그 3남매에게 남겨준 것은 없습니다.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별로 유산도 남기지 못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럼에도 3남매가 의좋게 행복하게 언제나 예수님이 오고 가시는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는 예수님 활동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가정으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역할입니다.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목사는 1805년 독일의 전신인 프러시아 왕국 크로펜스테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세무원이던 아버지는 뮬러가 장차 목사가 되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려서부터 참 불량했습니다. 돈을 상습적으로 훔쳤고 술집을 드나들었고 방종한 삶을 살다가 형무소를 드나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를 따라 어느 가정의 신앙모임에 참석하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그 집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는 크게 감동을 받습니다. 프러시아 사람들은 선채로 기도하는 습성이 있어서 이 뮬러는 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그 감동은 변화로 이어지게 했고 저 사람들은 자신보다 학식이나 지성이 더 훌륭한데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에서 그는 상당히 놀랍니다.
후에 그는 술회하기를 그때 그 모습에서 새로운 기쁨이 영혼 가득히 내 안에서 샘솟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학교를 갑니다. 그리고 뮬러는 결국 목사가 되었고 18세기 프러시아의 영웅 고아의 아버지 프랑케의 전기를 읽으면서 자신도 고아의 아버지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죽을 때까지 15만 명의 아이들을 돌보는 사역을 하게 됩니다. 일생 동안 고아들을 돌보는데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고 64년 동안 모은 금액만 150만 파운드, 우리 돈으로 1조 5천억 원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한사람의 마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에는 누군가의 경건한 모습에서도 얼마든지 이 변화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교육은 방법이 전부가 아닙니다. 부모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만 보아도 그 부모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라기만 해도 자녀들은 후에 그대로 따라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가장 좋은 신앙교육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먼저 좋은 신앙의 부모가 되라”고 강조하십니다.
“이 말씀을 가르쳐라”
부모가 두 번째 할 일은 이 말씀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6-7절을 보면 “오늘 내가 네게 명하신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가르쳐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부모만한 교사가 없습니다. 부모는 가장 좋은 성경 교사입니다. 유니게는 자라나는 디모데에게 본문에 나와 있는 신명기의 전통을 숙지시켰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죠지 워싱턴은 “나의 최고의 교사는 어머니였으며 나의 아버지는 가장 존경스러운 하나님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슈바이처는 “나는 아버지 손을 잡고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는 동안 경건이라는 것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후에 슈바이처는 자신이 아프리카에 가게 된 동기도 그 경건의 힘때문이었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러면 이 부모가 이 신앙을 가르치는 일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웨슬레의 어머니 수잔나는 아이가 무려 19명이나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모두 신앙으로 잘 키워야 하겠다고 뜻을 세웠습니다. 그러면 가정교육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0가지 원칙을 세워놓고 교육했습니다.
1. 간식 없음. 2. 전원 8시 취침. 3. 개인의사 존중. 4. 전원 하나님께 기도. 5. 말을 배우면 가장 먼저 기도부터 훈련시킨다. 6. 예배시간에 절대엄숙. 7. 떼쓸 때는 들어주지 않음. 8. 잘못 고백하면 무조건 용서하고 안하면 반드시 벌을 준다. 9. 약속을 절대로 지키게 한다. 10. 부모의 채찍을 두렵게 여기게 하고 훈계를 고맙게 여기게 한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
이만한 교사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부모는 아주 책임 있는 교사입니다. 이렇게 가르치면 건강한 가정 될 것입니다. 가정이 건강하면 나라가 건강해지고 동시에 사회가 건강해 질 것입니다. 처칠은 “나라가 잘 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가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먼저 시작할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일어날 때든지, 앉았을 때에든지, ... 언제나 이 말씀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실천하라”
세 번째 부모가 할 일은 실천하는 일입니다. 8-9절을 보면 가르치는 일 뿐만 아니라 “너는 이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교육에서 가장 큰 맹점이 말만 앞서고 실천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거역하는 것도 언제나 부모들이 말만 앞서고 실천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혼자 앉아서 육아백과사전을 펼쳐 놓고 읽고 있습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깜짝 놀라 왜 그 책을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부모님들이 나를 교육원리를 따라서 양육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려고 읽고 있다고 대답하더라고 합니다. 오늘 아이들이 이렇게 징그러울 정도로 영악하고 무섭습니다.
부모의 신앙생활을 아이들은 보고 있습니다. 헌금생활, 봉사생활, 성수생활, 하나님 사랑하는 생활, 이웃사랑 하는 생활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부모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고 살피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살아간 모습 그대로 따라서 행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오늘 아이들이 무서운 것입니다. 부모가 이기적으로 살면 아이들도 본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에 이기적으로 살아갑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그대로 닮습니다. 부모가 술주정을 피우고 파괴하고 때리고 행패를 부리면 아이들은 자라면서 나는 절대로 저렇게 안하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렇지만 그 아이가 자라면 그대로 행하며 살아갑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본 그대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청소년 때에 아이들이 탈선하고 방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며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염려할 것 없습니다. 그 자녀들은 언젠가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Pepperdine 대학 교육학 교수인 Nick Stinnett 박사는 강한 가정의 비결 (Secrets of Strong Families)6가지 요소를 말했습니다. 하나는 헌신(Commitment)입니다. 즉 개인보다 가족, 이웃을 위해서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두 번째는 감사(Appreciation)입니다. 서로 고마움을 알고 서로 격려하며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세 번째는 교통(Communication)입니다. 가족간에 서로 대화하고 듣고 접촉하는 삶입니다. 얼마나 끈끈한 삶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네 번째는 동행(Spending Time Together)입니다. 이를테면 되도록이면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갖고 밖의 일에 시간을 많이 뺏기지 않도록 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정신건강(Spiritual Wellness)입니다. 낙관주의, 박애주의,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섯 번째는 극복기술(The Ability to Deal with Crises)입니다. 살아가다가 어려운 일에 봉착했을 때 그 위기를 변화와 발전의 기회로 극복하는 지혜와 능력을 말합니다. 이상은 건강하고 결속력 있는 가정을 이루기 위한 요소들이 만들어져야 함을 강조하는 요소들입니다.
오늘은 경제를 우선하는 시대입니다. 매사를 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아이들을 풍성하게 해 주려고 용돈을 많이 주는 것을 부모의 도리로 생각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비싼 메이커로만 입히고 신기고 먹이는 것을 부모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기죽지 않게 해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해 주는 것이 내 아이를 강하고 자신감 있게 자라게 해 주는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참 많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인간교육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들이 모두 허황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라는 동안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수고하고 돕고 헌신하고 협동하는 삶의 정서가 자리 잡지 못하고 그 기반이 약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라게 되면 그 아이의 마음속에는 가난해서 메이커를 입지 못하고 신지 못하는 아이들의 그 심정적 환경이나 삶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성장하게 되면 후에도 이웃과의 협동, 나눔 등의 삶은 거리가 먼 채 살아가게 됩니다.
이 같은 성공위주의 삶이나 출세우월 위주의 삶은 결국 오늘 사람들을 모두 병들게 하는 교육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삶 속에서 하나님은 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없는 인간교육은 자기위주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위주의 삶 속에 하나님이 있습니까 부모나 형제 그리고 이웃이 있습니까. 그래서 오늘의 교육이 병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이 말씀을 앉으나 서나 길을 갈 때나 무엇을 할 때나 이 말씀을 읽고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쉐마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가죽에 기록해서 상자 안에 보관하고 수시로 꺼내 읽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전통이고 쉐마입니다. 5월을 맞아 다시 한번 가정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정을 되새기고 생각하고 회복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하면
신명기 6:4-9 / 김필곤 목사
"내 아이는 최고로 키우고 싶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부모들의 한결같은 꿈인 것 같습니다. 이 순간에도 수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똑똑하고 건강하며, 창의력 넘치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아이를 가장 잘 기른다고 말들을 합니다. 유대인의 인구는 전세계 약 천 오백만 명인데 노벨 수상자의 1/3(86년까지 93/300)을 유대인이 받았다고 합니다. 미국 재벌의 23%가 유대인이고 뉴욕 중고등학교 교사 중 50%, 미국 법조계 70만 변호사들 중 14만명(20%)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미국 상하의원 전체 535명 중 35명이 유대인이고 미국 대학 교수 중 25-35%,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 및 주요 책임자 90%, 하버드, UCLA 의대 및 법대 교수의 50%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공산주의 창시자 칼 막스, 심리학의 대가 프로이드, 화가 샤갈,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세계적 지휘자 번스타인, 국제외교가 키신저, 영화감독 스필버그, 스트렙토 마이신의 발명가 젤만 왁스만, 페니실린 발명가 어네스트 B 체인 등도 유대인입니다. 뉴욕타임스 발행인 설즈버거 주니어, 억만장자 소로스도 유대인입니다. 유태인이 500명 이상 있는 나라가 세상에 70개국에 이르는데, 그 중 가장 많은 나라가 600 만 명이 사는 미국에 삽니다. 미국 인구로 볼 때 3%로도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월가의 돈줄을 잡고 있습니다. 세계 저널리즘의 핵심에 있는「뉴욕 타임스」「워싱턴 포스트」를 비롯, 텔레비전의 NBC·CBS·ABC 3대 네트워크가 유대계입니다. 미국의 원자력 개발은 유대인 독점하고 있고 NASA 과학자의 과반이 유대인입니다. 맨해튼 빌딩 주인의 40%, 전 미국 변호사의 20%, 뉴욕 의사의 과반이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2000여년 동안 갖은 학대와 고통을 당한 유대인들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나왔을까요?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자 젠센은 유대민족의 지적능력이 다른 민족에 비해 우수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흑인만 조금 지능이 떨어지고 그 외의 민족들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신앙이 바로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지력 심력 체력 중에 심력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적 부분에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자아 개념, 집중력, 고난에 대한 인내력 등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2000년 나라 없이 삶을 살면서도 어려서부터 13살까지 정의적 영역 감정과 의지의 영역을 높여 준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통한 의지력, 사명 분명해지고 가슴에 끓는 열정을 넣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그들이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독특한 교육원리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독특한 교육원리란 무엇일까요? 교육열보다는 그들의 교육은 구약 성경에 근거를 둔 신앙 교육에 있다고 합니다. 바로 유대인의 교육 핵심은 오늘 본문을 근거로 한 쉐마 교육입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자녀들과 함께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 암송을 합니다. 오늘 이 말씀에 자녀가 잘되는 길이 있습니다. 자녀가 잘되는 길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1.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겨야"합니다.(4, 6)
교육의 삼요소는 교사, 학생, 교재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잘 되려면 먼저 좋은 선생님을 만나야 합니다. 좋은 선생님 밑에서 좋은 제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자녀의 가장 좋은 선생님은 부모입니다. 좋은 부모가 되어야 그 밑에서 좋은 자녀가 나올 수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최초의 교사는 부모입니다. 가장 영향을 미치는 사람도 부모입니다. 아이들은 유전과 환경에 영향을 받습니다. 유전적 형질도 부모의 것을 받게 되는 것이고 환경도 부모가 만들어준 환경에 가장 영향을 받습니다. 맹모 삼천지교라는 말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어릴 때 무엇을 보고 어떤 것을 들으며 무엇을 느끼고 자라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천주교 신부 자비엘은 "7세난 어린이를 나에게 맡겨라. 그리하면 일생 천주교인이 되게 가르칠 수 있다."고 호언 장담했습니다. 예수교단(Jesuit)의 창시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ngatiusLoyola)는 "나에게 어린이를 그의 일생에 있어서 7년간만 맡겨라. 그러면 그 후에는누가 데려가든지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호박순은 돌려 놓은대로 올라가듯이 어릴 때 잡아준 방향을 참으로 중요합니다. 생후 4년 동안 인간의 뇌는 2/3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문호 도스토에프스키는 "좋은 기억, 특별히 어렸을 때의 가정생활에 있어서의 귀한 기억처럼 장래에 깊은 감화를 주는 것은 없다. 귀한 성스러운 기억은 최대의 교육이 된다. 그런 기억이 많은 사람은 최후까지 인생 길을 바로 걸을 수 있다. 그런 기억이 단 하나만 있어도 그는 그의 영혼을 기억할 수가 있다. 그 한 가지 기억이 그를 많은 죄악 가운데서 건질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아이들은 학교도 가기 전 부모의 품에 있을 때 지능이나 정서 습관등 대부분의 것들이 결정되어 진다고 합니다. 어떤 부모가 되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텔레비전 보는데, 신문 보는데는 2시간 이상 투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듣는데는 10분도 할애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이 부모를 통하여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자식들은 부모를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집사님께서 외국에 다녀오면서 양주를 사왔습니다. 아들이 보는 앞에서 양주를 먹었습니다. 늘 먹는 것은 아니지만 일년에 두서너 차례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여섯짜리 아들이 이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 주간 구역예배를 드렸습니다. 많은 집사님이 왔는데 이 아이가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빠는 술 안먹지?" 어머니는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래 아빠는 술을 안드신다." 그러자 많은 집사님들이 있는데서 "아빠는 양주 먹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멧세지를 집어 넣어 주면 그것이 언젠가는 싻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싫으면서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의 바이블로 200만부나 팔렸다는 "아이에게 행복을 주는 비결"이라는 책이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불행하게 하는 사람들,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어릴 때 이미 불행으로 자신을 몰고 가는 정보가 입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먼저 변해야 자녀가 변합니다.
공부 안하는 아들, 말썽 불이는 아들을 붙들어 놓고 아버지가 꾸짖었답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네 나이 땐 책만 읽었대 인마!" 그러자 아들이 하는 말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아버지 나이 땐 대통령 됐다는 건 모르세요?" 아이들은 그저 바보가 아닙니다. 부모가 무엇을 하는지 부모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유일한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지 물질의 신, 쾌락의 신을 섬기고 사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는 부모로부터 배웁니다. 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먼저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을 말씀합니 . 히리어 말씀은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야훼) 엘로헤이누 아도나이(야훼) 에하드"입니다. 우리 번역을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로 되어 있지만 원문은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들으라입니다. 쉐마입니다. "들어라 이스라엘이여, 야훼는 우리 하나님, 야훼는 한 분이시다"입니다. 들으라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자녀가 잘 되는 길은 여기서부터 출발되어야 합니다. 먼저 부모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6절에 보십시오. 마음에 새기라고 했습니다. 읽고 듣는 정도가 아닙니다. 묵상하고 암기하여 삶의 표준이 되게 하고 삶의 현장에 적용되는 말씀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새기라는 말씀입니까?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6)" 먼저 자녀를 가르치기 전에 부모가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2.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5).
바로 유대인이 다른 민족과 가장 다른 점입니다. 심력이 다릅니다. 영적인 부분이 다릅니다. 우리가 잘되고 자녀가 잘 되려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보다 더 큰 신앙 교육은 없습니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정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지식 교육을 위해 사교육비에 투자하는 돈이 일년에 29조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뛰어난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까? 사람이 진정 행복하게 사는 것은 지능보다 감성 지수가 더 중요하다고 말들 합니다. 사회에서의 성공을 위해서는‘지능지수(IQ)보다‘감성지수(EQ)’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IQ는 성공에 20%만 기여한다고 합니다. 요즈음 회사도 감성 지수가 풍부한 사람을 채용한다고 합니다. "숨겨진 힘 감성"이라는 책을 보면 충성스런 고객을 만드는 것은 감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업도 고객만족, 고객 감동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감성지수가 높은 사람은 타인의 감정을 읽을 줄 알고 돌발적인 충동을 절제할 줄 알고 분노를 삭일 줄 안다고 합니다. 사물을 긍정적으로 파악할 줄 알고 자신의 풍부한 감성을 상대방에게 표현할 줄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EQ가 높은 사람은 HQ(행복지수)가 높고 도덕지수(MQ)나 사회지수(SQ)가 높다는 것입니다. 감정지수의 핵심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도 뜨겁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 18:1)"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18:2)"
저는 새벽 기도하면 하나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늘 합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뭉끌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참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 자녀들도 부모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느낄 때 감동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일평생 변하지 않고 사랑해야 할 대상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5절에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경험 속에서 친밀한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입니다. 5절에 보니 이 하나님은 오직 하나인 여호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이스라엘 사람이 들을 때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직전 모압 평지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입니다. 한 세대를 지도하다 이제 인생 황혼기에 선 모세가 광야 생활을 마치면서 그들에게 신앙의 진수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당시 백성들은 전쟁과 유혹 그리고 새로운 정착 생활에 직면하여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의 지도력은 아직 검증되지 못했습니다. 새 세대의 백성들은 친히 홍해의 기적과 하나님의 갖가지 능력을 목도하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1:6-4:43에서 먼저 광야 생활 40년 역사를 상기시키고 4:44-5:33에서 십계명을 통하여 여호와를 섬기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바로 본문을 통하여 부모들이 자녀에게 어떻게 신앙을 전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1장에서 자세히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1장 30절을 보십시오. (1)우리를 앞서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출13:21, 23:23,28). (2)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신9:3, 31:3) (3)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31) (4) 우리의 행할 길을 지시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33).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사랑합니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애정의 중심(지정의)입니다. 성품은 영혼을 말합니다. 힘은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말합니다. 전인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주님만 사랑합니다. 이 찬양이 우리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 우리는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합니다(7-9)
우리 자녀들이 지식적으로 교육받는 것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없는 지식 교육은 사람을 고등 사기꾼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뛰어난 교육 방법은 하나님 말씀을 중심입니다. 교육의 장(場)이 가정입니다. 부모가 바로 신앙 교육자가 된 것입니다. 미국에서 종교 교육을 없애버리고 실용주의 교육을 시킨 결과 좋은 점도 있지만 폐단이 무엇입니까?
미국의 아이들이 매 8초마다 1명이 학교를 그만두고 중퇴하고 있으며, 매 26초마다 1명이 가출하고 있으며, 매 47초마다 한 명은 학대를 받고 있고, 매 67초마다 1명은 10대로서 아이를 낳고 있고, 매 7분마다 한 명은 마약관련으로 체포되고 있고, 매 36분마다 한 명은 총에 맞아 죽거나 부상을 입고 있으며, 매일 13만 5천명의 어린이들은 학교에 총을 가지고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무서운 에이즈 감염율이 청소년 3000명 당 한 명 꼴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것입니다.
지난 6월10일 오후 1시30분, 경기도 분당구 서현동 ㅇ아파트 213동에서 아들이 할머니와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군입대를 앞두고 저녁 늦게 술먹고 옮 아버지 2시간이나 야단쳐 할머니와 아버지를 살해하고 65평 아파트에 불을 놓았습니다. 아버지는 경기고와 서울대, 스탠퍼드 대학 등 일류 코스를 밟은 교수입니다. 친인척 가운데 교수가 5명의 교수가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동생들을 데리고 미국에 갔습니다. 아들은 삼수하여 아버지가 만족하지 못하는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1년여 동안 손수 아들을 검정고시 학원에 데려다 줄 정도로 정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살해 당하고 말았습니다.
기러기 아빠 서울의 모 대학 공대 교수인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15평짜리 아파트에 홀로 살아 갑니다. 2년째 이런 외기러기 생활을 하고 있다. 아내와 두 딸은 미국에 있다. 이제는 매일도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매달 600만원을 송금, 지난 여름방학 때 미국에 갔던 것이 화근이었다고 합니다. 아내 의 씀씀이가 너무 헤픈 데다 술 취한 채 밤늦게 들어오는 모습을 보니 속이 뒤집혔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낮에 아이들 태도가 공손하지 못 해 야단을 쳤는데 아내와 큰 소리로 싸웠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중학교 3학년인 큰 딸이 “그만하세요. 아빠는 지긋지긋해. 왜 만나기만 하면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예요”그 뒤 아내에게서는 매달 송금 잘 받았다는 의례적인 전화만 오고 아이들은 냉대를 하여 이제 가족들에게 버림받는 ‘펭귄 아빠’가 되지 않을까 불안하다는 글이었습니다.
건강한 가정의 특징을 연구하기 위하여 Dolores Curran(l983)은 500여명의 전문가들에게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그 전문가 집단에 포함된 사람들은 학교장, 교도교사, 일반교사, 교회목사, 교육담당 전도사, 소아과의사, 가정의사, 정신과의사, 사회사업가, 간호사, 가족상담및 가족치료사, 그리고 자원봉사단체 지도자 등이었습니다. 그들이 응답한 건강한 가정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공통된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생활하는 가정, 둘째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대화하는 기회를 자주 가지고, 자발적이고 진솔하게 대화하는 가정, 셋째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신뢰하고 인정하고 지지해 주는 가정, 넷째 가족 구성원들이 유모어 센스를 가지고 생활하고 함께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가질 줄 아는 가정, 다섯째 가족 구성원들에게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가정, 여섯째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점을 존중하고 개성을 인정해 주는 가정, 일곱째 가족 구성원들이 동일한 전통과 풍습을 공유하고 긴밀한 유대감을 유지하는 가정, 여덟째 가족 구성원들에게 이웃과 인류에 대한 봉사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가정, 아홉째 가족 구성원들이 저마다의 책임과 공동책임을 자각하고 감당하는 가정, 열째 가족 구성원들이 그들의 문제나 결점을 인정하고, 필요하면 도움을 청할 만큼 개방적인 가정 등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 교육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라는 말입니까? 6절에 보십시오. 내가 명하는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학교 교육, 지식 교육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혜의 근본인 성경 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7-9). 장소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누웠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이 말씀을 가르치라고 말씀합니다. 시장에서도 신앙 교육은 시킬 수 있습니다. 전철 안에서도 신앙 교육은 시킬 수 있습니다.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여 가르치라고 합니다. 반복하고, 강조하고, 연상시켜 피부에 닿도록, 삶에 자연스럽게 경험될 수 있도록 도저히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도록 가르치라고 말씀합니다. 가정 예배를 통해서, 교회 교육을 통해서, 예배를 통해서, 성경 읽기과 경건의 시간을 통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호4:6절 말씀에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했습니다. 여기서의 지식은 세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지식을 말합니다.".....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했습니다(호4:6). 즉,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존귀한 반열에 서지 못하고 높임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잠3:1-10절을 보십시오. 우리 자녀들을 진정 잘 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십시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라입니다.
33세에 백만 장자가 되었고 53세에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어 일주일 수입이 1백만 달러나 벌면서 한 시대 많은 영향력을 미친 록 펠러는 철저히 어머니로부터 신앙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유대인 어머니로부터 다음의 10가지 교훈을 철저하게 가르침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 하나님을 친아버지 이상으로 섬겨라. 친아버지가 생계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지만 더 중요한 공급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목사님과 좋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축복된 길이기 때문이다.
3. 주일예배는 본 교회에서 드려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 충성해야 하며 가능한 주일 예배 만큼은 본 교회에 참석하여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4. 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 이 말은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먼저 구별한 후 나머지를 가지고 필요하면 사용해야 함을 표현한 말이다.
5. 아무도 원수로 만들지 말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사람들이 거리를 두기 때문에 일마다 장애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6. 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하루를 시작하기 전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이 모든 일에 함께하여 주실 것을 온전히 믿는 기도가 필요하다.
7.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 알게 모르게 계속적으로 짓는 죄를 가능한 빨리 회개하여 죄로 인한 어려움과 고통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8. 아침에는 꼭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려는 시간이 필요하다.
9.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우라. 그리고 도와준 일에 대해 절대로 나팔을 불면 안된다.
10. 예배 시간에 항상 앞에 앉으라. 예배 드리고 말씀 듣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