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축구 역사 그 자체,
한국축구의 대부 '김용식'
필자는 한국축구의 대부 “故 김용식”선생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한국축구를 논할 때 김용식을 절대 빼면 안될 정도로
김용식 감독은 제목처럼 정말 한국축구의 대부였다.
김용식은 1910년 7월 25일 “대한제국”시절 경성,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김용식의 부모는 둘다 기독교인이었고 목사인 아버지 “故 김익두”목사는
아들이 커서 목사가 되길 바랬다.
그렇게 아들이 순수 공부만 하면서 자라길 바랬고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많은것들을 시켜봤다.
그런도중 김용식은 “스케이트”에 입문하게되고
그렇게 계속 본인의 재능찾기에 몰두하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김용식은 “축구”로 배우는 종목을 전향하게된다.
하체쪽에 훈련을 굉장히 많이 해줘야하는 스케이트였기에
자연스럽게 축구를 알게된것이다.
이제부터가 한국축구 대부의 시작이라고 볼수있다.
김용식은 경성 경신 중학교를 거쳐 경성 경신 고등 보통학교로 갔고
경성 보성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 후 경성 축구단에 입단하게된다.
선수시절 공격수와 미드필더를 오갔던 김용식은 경성에서 “전 일본 선수권 대회”우승을 경험하고
당시 “일제 강점기”였던 1936년 조선 최초로 일본 대표에 발탁되
1936 IOC 서독 베를린 올림픽 대표팀의 일원이 됬다.
그렇게 일본 대표팀에 소집된 후 김용식은 대표팀 일원들과 올림픽 기간에 맞춰
서독 “베를린”행 배를 탔고 올림픽 무대에 입성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배를 타고 가던중 김용식은 배 갑판에서 우연히 줏은 책을 접하게 되고
거기서 “축구는 체력이 아니라 기술이다.”라는 문구를 읽게된다.
김용식은 순간 깨닫고 그 책으로 인해 새로운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게되고
서독 베를린에 도착해 조선 최초로 국가 대항전 무대를 누비게 된다.
올림픽 무대에서 일본대표로 참가한 김용식은 8강에서 탈락하게 되지만
조선을 대표해 최초로 국가 대항전 무대를 섰다는것에 이의를 두며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훗날 김용식은 베를린행 배에서 주었던 책을 감명깊게 읽고나서
자시만의 목표를 세우게된다.
바로 “1만일 훈련”인데 실제로 김용식은
“1936.11.15 ~ 1979.1.15”까지 장장 43년간의 대장정을 거쳐
자신만의 프로젝트인 1만일 훈련을 완료했다.
만 26세부터 69세까지 김용식의 축구 열정은 절대 죽지 않음을 보여줬다.
김용식의 이 프로젝트는 21세기인 현재까지 후배 축구인들에게 귀감이 되면서
한국 축구의 표본이 되고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48 IOC 영국 런던 올림픽의 시즌이 다가왔고
김용식이 이번에는 선수겸 코치로 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올림픽이 다가왔고 대표팀과 함께 영국 런던으로 향했다.
특별했던건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되고 독립 후
“대한민국” 태극기를 유니폼 가슴에 달고
나간 최초의 국가 대항전이었다.
김용식은 선수겸 코치로 또 한번의 역사를 세우게된다.
첫 경기부터 토너먼트이긴 했지만
첫 경기 멕시코전에서 5-3으로 승리하고
대한민국은 최초 국가 대항전에서
8강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게된다.
비록 8강전에서 스웨덴에게 0-12 엄청난 완패를 하게되지만
8강이라는 값진 성과를 거두고 한국에 들어오게된다.
그 후 1952년 김용식은 오랜 선수생활 끝에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곧 대한민국 대표팀의 감독으로 취임하게된다.
김용식은 선수들을 선발해 1954 FIFA 스위스 월드컵을 준비했고
월드컵 처녀출전을 위해 또 한번의 여정에 돌입했다.
그 당시에는 아시아 지역에 축구를 하는 국가가 몇 안됬다.
독립 해방후에 대한민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이 전부였다.
스위스 월드컵 참가국중 아시아 지역에 배당된 티켓은 총 1장이었고
대한민국과 일본 중국 총 3개국이 월드컵 티켓을 놓고 싸워야했다.
하지만 1900년대 20세기 초반 아시아를 단독으로 호령했던
중국이 기권을했고 티켓전쟁은 한-일이라는 2파전 양상으로 전개됬다.
경기 규칙은 홈&원정 1,2차전을 펼친 후 전적을 따져 가장 높은 전적을
가진 팀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게 됬다.
그렇게 FIFA에서는 홈&어웨이를 배정했고
날짜까지 전달을 한 후였다.
1차전이 대한민국 서울에서 개최됬어야했는데
당시 “故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반일감정 전후복구”로 인해
일본 대표팀의 입국 불가능 명령을 내렸다.
그랬기 때문에 1,2차전 모두 일본에서 치러야했다.
김용식은 대표팀 선수단을 이끌고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갔고
“우리 선수들이 일본 땅에서 이기지 못하고 돌아온다면, 현해탄 앞바다에 몸을 던지겠다.”
라는 각오를 다지며 필승 의지를 다졌다.
그 후 1954년 3월 7일 일본 도쿄에서 1차전이 벌어졌다.
대표팀은 전반에 먼저 선제골을 내주게된다.
하지만 내리 5골을 꽂아넣으며 대 역전극을 펼쳐 시원한 승리를 하게된다.
그리고 일주일 뒤 펼쳐진 2차전에서는 2-2 무승부를 거두며 1승1무 7득점 3실점을
기록하며 아시아 최초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엄청난 위업을 달성한다.
선수들이 만들어낸 결과지만 김용식의 공도 엄청났다.
선수들에게 계속 동기부여를 심어줬고 “선 수비 후 역습”이라는 선수들이
가장 잘할수있는 전술로 Focus를 맞췄다.
이렇게 김용식은 최초의 역사들을 두루 만들어갔다.
시간이 흘러 스위스월드컵의 시즌이 다가왔고
대한민국은 첫 대회부터 엄청난 상대들과 조를 이루게됬다.
당시 우승국 “서독”, 당대 최강이자 역대 최고의 팀중 하나인 “헝가리”
유럽의 복병 “터키”와 한 조가 된것이다.
김용식은 선수들과 월드컵 준비에 계속 전념했고 열중했다.
하지만 당시 열악한 협회 사정 때문에 같은조의 상대국들의 분석은 전혀 할수없었다.
대회가 개막하자 대표팀은 비행기조차 없어
미군의 공수기를 빌려타는 상황까지 이르게됬고
64시간동안 장거리 비행을 했다.
결국 첫경기 헝가리전이 열리기 22시간전에 도착했다.
숙소예약도 안해놔서 스위스 축구 협회의 도움으로 겨우 작은 호텔에 투숙하게 된다.
정말 열악했다. 선수들의 피로는 계속쌓였고 지칠때로 지쳤다.
잠깐의 휴식과 수면을 취한후 바로 경기장에 가야했다.
하필 첫 경기 상대도 세계 최강 헝가리다.
그래도 김용식은 선수들을 모으며
“절대적 공세를 취하지말고 수비에 치중하다가 기회가나면 역고을 펴라,
강력한 투지와 기본 기술이 완성되어야하고 명철한 두뇌늘 가지고 있어야한다.“
라고 자신의 철학과 전략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하지만 장시간 비행, 공수기 최악의 여건등
피로로 지친 대표팀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결과는 0-9 완패였다.
스코어가 두배로 벌어질수도있었지만
당시 애제자 골키퍼 “故 홍덕영”의 선방으로
그나마 9실점이였다고 한다.
그 후 터키와의 0-7패를 기록하며
아시아 최초 사상 첫 월드컵 출전은
2전2패 0득점 16실점이라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마지막 서독과는
당시 대회 규정으로 이미 탈락 확정 후라 치루지않았다.
당시 김용식 감독은 선수들에게 이런말을 남겼다고 한다.
“다 져도 좋다. 한골만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 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이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하지 않겠나”
비록 골 기록은 못했지만 고난과 역경속에 겨우 월드컵을 치루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우리 선수들의 투혼이 있었기에
지금의 한국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용식은 이후에도 계속 대한민국 축구를 위해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움직였다.
1951년엔 대한민국 최초로 FIFA 국제 심판 자격증을 취득했고,
1960년엔 조국에서 열린 AFC 대한민국 아시안컵에서
이스라엘을 누르고 2회 연속 우승을을 이뤄냈다.
그 후에는 “대한 축구 협회”부회장으로 선임되며
“FIFA 총회”가 열리면 늘 KFA 대표로 참석해
한국 축구를 알리고 영어로도 연설을 하며 누구보다 앞장서
축구 외교 기초 마련에 큰 공헌을 했다.
1980년엔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팀인 “할렐루야”의 감독을 맡으며
대한민국 프로팀 1호 감독이 되기도 했다.
그 외에 여러팀을 맡으며 한국프로축구 발전에도 기여했고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한국축구의 산증인이고
대한민국 축구역사 그 자체였다.
이 후 평생을 축구에 바쳐온 김용식은 노환으로
행정가로서도 은퇴를하고
자택에서 요양을 선택했고 휴식을 갖게된다.
그 후 김용식은 1985년 3월 8일 생을 마감하게 된다.
모든 대한민국의 축구인들은 한국축구 대부의 죽음을 애도했고
최초의 전설이자 영웅을 존경어린 마음으로 떠나보냈다.
세상을 떠난후 1985년 “대한 체육 협회”에서는 김용식에게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여했다.
2004년
FIFA에서는 설립 100주년 기념으로
한국과 아시아 축구에 많은 역사들을 세운
김용식의 공로를 인정해 100주년 기념인물에 선정했고,
2005년엔 대한축구협회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명예의 전당”에도
첫 번째로 헌액된다.
지금까지 “한국축구의 대부 故김용식 선생”에 대해 적어봤는데,
왜 그가 지금까지 한국 축구역사에 회자되고 귀감이 되고있는지
새삼 다시 느낀다.
그는 두 말할것 없이 대한민국 축구 역사 그 자체고
과연 한국축구의 대부다.
김용식의 이러한 공로들과 업적들이 있어
지금의 한국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국축구의 영원한 전설이자 영웅
그리고 '대부'이다.
그리고 필자는 개인적으로
故 김용식 선생이,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이자
행정가라고 생각한다.
김용식 (대한민국)
1910.7.25 ~ 1985.3.8 , 대한제국 경성 황해도 신천
-국가대표-
1948 IOC 영국 런던 올림픽, 대한민국 (플레잉 코치) (대한민국 최초 국가 대항전 참가)
1954 FIFA 스위스 월드컵, 대한민국 (아시아 최초 월드컵 본선 참가)
1960 AFC 대한민국 아시안컵, 대한민국 (우승)
-클럽-
서울 축구단
교통부 축구단
조선 전업 축구단
육군 축구단
1968 양지 축구단
1980 할렐루야 (대한민국 최초 프로팀 감독)
첫댓글 훌륭한글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다행이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 ^^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다행입니다 ~
선구자들이 계셔서 지금의 한국축가 있는 것이겠죠.
숙연해지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먼저 길을 열고 만든 사람이 있기에
후세들이 그 길을 지나가는 것이죠.
도움이 되셨다면 다행이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김용식'선생님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팀은 승리했지만,
승리의 팀 이름은 '일본'이었죠..
그 당시 '손기정'옹만큼
가슴 아픈 역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