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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탈출 34,4ㄱㄷ-6.8-9
제2독서 : 2코린 13,11-13
복 음 : 요한 3,16-18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느님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복음말씀을 인용하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이 말씀은 모든 믿는 이들이 가슴에 품어야 할 성경구절입니다. 한 번 같이 읽어볼까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십니다.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 구원을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사랑자체이신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우리를 이웃과 하나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이 시간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계신다는 계시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사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간략하게 표현한다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빚어 만드시는 분이시고
아들은 만드시는 분의 손이시며 성령은 빚어 만든 흙덩이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는 분입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곧 생명을 주신 모든 것의 근원이시고 목표이시며 시작이요, 마침이십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위해 아들을 넘겨주신 분입니다.
아들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우리의 눈높이를 맞춰서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시며 존경과 순명을 가르치신 분입니다.
죄인의 대변자요, 억압 받고 소외 받는 이들의 변호자이십니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원자 이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성령은 생명의 숨을 넣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머물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고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 주시며
또한 능력을 주시고 열정을 주시며 우리를 대신해서 탄식해 주시고 새로움을 더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각기 역할이 구별되면서도 삼위일체로 한 분이십니다.
불은 하나이지만 열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고,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필요하기도합니다.
길가의 간판의 불같이 보이게 하는 불도 있습니다. 불은 하나지만 역할은 다릅니다.
꽃을 예로 들어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꽃의 모양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향기를 그리고 색깔로 사랑을 받게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하나이지만 생각하는 지혜도 있고,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는 의지가 있으며 실천한 것을 보면서 좋다, 나쁘다 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듯 각기 역할이 구별됩니다.
삼위일체신비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받아들여집니다.
루카 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잉태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탄생과정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고
결실을 이루시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루가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 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3,21-22) 라고 적혀 있습니다.
세례 때도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18-20)고 하시며
아버지의 모든 권한을 받아 아버지와 하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16,14)하시며 역시 아버지와 하나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요한 16,13.14).하셨는데
요한 17,17에 보면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이하에서는
“한 처음에 말씀이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고 아들과 성령께서도 하나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무한히 모든 것을 주시는 사랑을,
아들은 무한히 수용하는 사랑을
성령께서는 무한히 자신을 남에게 연결하고 전달하는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C.S 루이스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살아 움직이신다.”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기도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으로,
성자는 기도를 도우시며 중재하시는 분으로,
성부는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해 주시는 분으로서 우리의 영적 생명 안에 활동하신다.”고 말하였습니다.
부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신비가 사랑 안에서 확인되고 체험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흔히 부부간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표현합니다.
일심동체가 되었다는 것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한 마음이 되고 한 마음이 되면 두 몸은 이미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한마음, 한 몸을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가난해도 풍요로울 수 있고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더욱 의지하고 더욱 일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힘들면 힘이 들수록 더 큰 사랑이 요구됨을 압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은 사랑하는 이들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높은 지위에 있어도 외롭고 쓸쓸하게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어느 것으로도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능력이고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도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곳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게 되고 믿음이 더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많이 행하게 되고 주님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혹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사랑으로 하나가 되신 하느님의 신비를 생각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세상을 향합니다. 모든 이를 향합니다.
재능이 있고 성공한 사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 죄인들을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리고 너무나(이런 식으로) 사랑한 하느님 이십니다.
십자가에 목숨을 내 놓기까지,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표현되기 전까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외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보냈다는 큰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3,17-18).
여기서 우리는 사랑과 심판의 역설을 봅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을 보면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하는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3,19-20).
결국 심판하는 자는 하느님이나 예수님이 아니라 빛을 거부한 인간자신입니다.
이 말은 빛이신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그 순간부터 계속 어둠 속에 머물게 된다는 말이고
그것은 그 사람이 자초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이 모세의 손에 높이 들린 구리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믿음은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하는 사람은 새로 태어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고 맙니다.
믿음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살리시는 분입니다. 구세주이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모세의 손에 들린 구리 뱀을 본 사람은 살았듯이
십자가에 높이 들린 예수님을 보고 그분의 명을 그대로 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 어떤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하루 세끼 밥을 꼭 챙겨준답니다.
아침은 인디안 밥으로, 점심은 사또밥으로, 저녁은 고래밥으로 챙겨 준답니다.**
사랑의 방법은 다양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방법으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제 강의를 마치고 사제관으로 돌아오기 위해 답동성당의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제 등 뒤로도 자매님 몇 분 역시 이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중 한 분이 저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들립니다.
“저 앞에 가시는 신부님, 유명한 신부인데....”
이 말에 다른 자매님께서 “빠다킹 신부님이시잖아.”
그러자 그 옆에 계신 자매님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무슨 소리야! 저 신부님은 조명연 마태오 신부야.”
그래서 제가 뒤를 돌아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유명한 신부, 조명연 마태오 신부입니다. 그리고 인터넷 상으로는 빠다킹 신부입니다.”
그렇게 유명한 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분들이 말씀하신 ‘유명한 신부’, ‘조명연 마태오 신부’, ‘빠다킹 신부’는 서로 다른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이 분들이 말씀하신 세 인물은 모두 같은 한 명인 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단지 이름만 다를 뿐이고, 어디서 활동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이름이 불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의 실체(實體) 안에 세 위격(位格)으로서 존재하는 하느님의 신비를 보여주는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앞서 서로 다른 세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한 명인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한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잘 이해하기 힘든 개념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구원을 위한 성부 성자 성령의 완벽한 일치와 사랑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은 따로 분리되어 활동하지 않고 하나를 이루어 서로에게 힘을 북돋워주면서 ‘인간구원’을 위한 활동을 잠시도 멈추지 않으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하느님도 이렇게 하나의 일치를 이루시는데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는 지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출신 학교가 다르다는 이유 등등으로 하나가 되기를 거부했던 많은 모습들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구분을 두려고 했을 때,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할 수 있었던 것도 분리되어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묵상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일치의 삶을 사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겉모습만을 보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마음을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하나 되어 하느님 나라에 더욱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창녀와 세리가 되어야 하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오래 전에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차이나타운에는 삼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은 목재가구와 나무십자가를 만들어 동생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습니다.
여동생은 집안일을 열심히 돌보았지만, 남동생은 도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동생이 도박을 하다가 돈을 모두 잃었는데, 그 도박판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형은 간신히 동생을 다치지 않게 빼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자신이 도박 빚을 많이 져서 당장 갚지 않으면 자신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은 하는 수 없이 동생에게 자신의 통장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그 돈으로 다시 도박을 했고 이번에는 운 좋게 많은 돈을 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깡패들이 따라붙었고 그들과 싸우다가 살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고 밖에는 신고를 받고 온 경찰들이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피커로 자수하라고 외쳤습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자수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동생을 돌려세운 형은
동생의 피 묻은 옷을 입고 자신의 옷을 동생에게 입혀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던 나무 십자가를 동생의 손에 쥐어주고는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형은 경찰의 정지명령에도 계속 달렸고, 결국 경찰들이 쏜 총에 쓰러지고 맙니다.
경찰은 죽은 것이 동생이 아니고 형임을 알았지만, 이미 형이 죗값을 대신 치렀기에 동생을 사면해줍니다.
그 후 동생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고, 형 대신 나무 십자가를 만드는 일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볼품없었지만 차차 형이 만들던 것과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완전하게 조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형의 묘소에 자신이 만든 것, 형이 만들었던 것, 두 십자가를 꽂아두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십자가에는 이렇게 형에게 보내는 성경구절을 적어놓았다고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사가 요한은 삼위일체에 대해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조금 더 단순하게 써 보겠습니다.
1.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다.
2. 사랑하면 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모든 것, 당신 외아드님을 주셨다.
3. 외아드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아 죽으셨다.
4. 그래서 믿는 이들은 외아드님 안에서 더 이상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위의 이야기에서 형이 동생을 대신해 동생의 옷을 입고
동생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었기 때문에
동생이 더 이상 그 죄의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처럼,
예수님도 당신 깨끗한 옷을 우리에게 입혀주시고
당신은 우리 죄를 입고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 즉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니코데모와의 대화의 뒷부분입니다.
니코데모는 구원에 관한 원리에 대해 알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십니다.
도대체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은 아벨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로 잠깐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카인은 아벨을 죽여 그 피가 땅에 스며들게 합니다.
그 피가 스며든 땅에서 카인은 더 이상 살 수 없게 됩니다.
그 피가 하느님께 정의를 부르짖기 때문입니다.
그 피를 흘리게 한 자가 그 땅에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자기 가족을 죽인 자와 한 집에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이 정의로운 분이시기에 땅에 그 피를 흘리게 한 카인을 쫓아내십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어둠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빛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피가 땅에 스며들었습니다. 그 피가 하느님께 정의를 부르짖었습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기에 그 피가 스며든 땅에서,
즉 이미 정의가 이룩된 땅에서 정의롭지 못함, 즉 죄를 몰아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피로 우리를 적시면 우리 안에 그분이 살게 되어
하느님이 보시기에 우리에게 정의가 치러진 사람이 되는 것이고
우리를 정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의(義)’ 자체이신데, 그분의 의가 우리 안에 스며들어 불의를 몰아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스며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죄로 상징되는 구리뱀을 장대에 높이 단 것처럼
당신도 죄인으로 높이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피가 땅을 적시기 위해서는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멸시받는 죄인으로 높이 올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난다는 의미는 바로 그분의 피가 우리 안에 들어오셔 이제는 우리가 아니라
그분이 우리 안에서 사시게 되어 그분의 정의만이 하느님께 드러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난자가 영원히 사는 방법은 정자를 받아들임으로써입니다.
정자는 제 주인을 떠나 난자를 향합니다. 난자는 정자를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열어젖힙니다.
정자는 난자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주인을 떠남으로써 죽음을 감수한 것입니다.
주인 안에 있으면 살 수 있지만 주인을 떠나 죽으면
난자 안으로 들어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찾고 두드리고 구해서 얻은 바로 그 성령님으로 우리가 구원되기를 원한다면,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의 피를 흘려 다른 이에게 자신의 생명을 넣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리스도께 “저에게 고통과 멸시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멸시당하여 높이 들어 올려지는 고통을 당하셨듯이,
요한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처럼 멸시받고 죽는 것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누군가에게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넣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뜻, 자기비허의 계명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뱀입니다.
자아입니다. 교만이라고도 하고 마귀라고도 합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의심하고 불순종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교만이 있는 이들의 밭에는 아무리 씨가 떨어져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따라서 교만한 이들에게 삼위일체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말고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거룩한 것은 성령님이고, 진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쥐가 말씀을 듣고 성체를 영한다고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그런 쥐에게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고 하는 바로 그 위에 이런 내용이 앞서나옵니다.
“남을 판단하지 마라.”
우리 자신의 눈에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의 눈의 티를 빼주겠냐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 아들,
즉 진주를 주셨는데 이 세상 사람들은 개요 돼지였다는 것입니다.
그 개요 돼지인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남을 판단하는 이들이란 것입니다.
그들의 교만이 믿지 못하게 합니다. 믿지 않는 것이 곧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받아들여야 그분이 내 안에 사시게 되는데 받아들이지 못하면 삼위일체는 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내가 먼저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대로 해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율법을 철저히 지켜온 바리사이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죄만 짓고 온 세리가 의인으로 인정받고 갑니다.
의인은 자신을 높이는 이가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세리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상대를 판단하는데 바리사이가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의가 세상에 오셔도 그 의가 그 안에 들어갈 수 없기에 ‘의화(義化)’ 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로마 8,9-10)
그러나 그분의 의로움을 내 안에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가 개요 돼지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개요 돼지임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어둠을 사랑하는 이들이고 이미 자신들은 눈이 보인다고 착각하는 이들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하고 대답하셨다.”(요한 9,41)
예수님은 우리에게 눈이 되어주시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어둠을 좋아하는 이들은 빛이 자신 안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나의 힘이 아니라, 율법을 잘 지키고 착한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의’로써만이 내가 ‘의화’ 될 수 있음을 믿는 세리와 창녀와 같은 이가 되지 않으면
그분이 내 안에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짜 개와 돼지들은 자신들이 정의롭게 잘 살기 때문에 개와 돼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들이 개요 돼지라고 고백하는 이에게 당신 성령을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고 말하였다.”(마태 15,27)
그렇습니다. 이 이방인 여인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만이 믿음이 있는 여인이기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의화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마귀는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딸의 병이 고쳐지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행위인데 그 믿음이 있는 이들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가장 비천하고 고통 받는 죄인이 되었듯이,
우리 또한 만인 앞에서 그렇게 고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받기 위해 주는 행위인 것입니다.
유다와 타마르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타마르 주인으로부터 유산상속을 거부당합니다.
그의 남편이 죽었고 그 동생들도 그녀에게 상속하기를 원치 않아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정자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을 오나니즘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정자를 땅에 흘려버리는 행위와 같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정자를 준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 생명까지 포함하는 모든 것을 준다는 뜻입니다.
타마르가 주인의 씨를 얻는 길은 창녀가 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는 창녀로 변장하고는 시아버지 유다와 정을 통하고 그 징표로 인장, 줄, 지팡이를 받았습니다.
인장, 줄, 지팡이는 모두 성령님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나중에 자신의 며느리가 창녀 짓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며느리를 죽이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알고는 자신보다 더 며느리가 정의롭다고 칭찬합니다.
그 아들이 바로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순결한 창녀라고 합니다.
창녀가 되어야만 순결한 것이고 그래야만 그 안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그 성령을 주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교만한 사람이 되어
내 안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게 됩니다.
그분이 내 안에 살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가 가장 멸시받는 모습으로 세상에서 들어 올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고통과 멸시를 통해 우리 피가 이웃에게 뿌려지고
그러면 그들은 우리 피를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내세우려고 하지 말고 우리 이웃들의 피 묻은 죄를 짊어지고 고통과 멸시를 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됩시다.
그것이 내 안에 삼위일체를 실현시키는 자기를 버리고 매일 십자가를 지는 삶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신비가로 사십시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체험적 고백입니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하늘과 땅에 가득 찬 그 영광!' 미사 중
'거룩하시도다.'의 대목에 나오는 고백처럼 온 누리 가득한 영광과 사랑의 하느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그분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감격에 넘쳐 고백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입니다.
만물위에 계신 성부 하느님, 만물을 꿰뚫어 계시는 성자 하느님,
만물 안에 계신 성령 하느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온 누리에 가득한 하느님의 사랑이요 모두의 눈높이에서 체험할 수 있는 하느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이런 삼위일체 사랑의 하느님을 체험하며 사랑의 신비가로 살라고 불림 받는 우리들입니다.
사랑은 개방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모두의 눈높이에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모두에게 활짝 자기를 개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은 공동체적입니다.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을 체험하라고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공동체 하느님입니다.
오늘은 미사 통상문의 시작 예식의 기도문의 순서에 따라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묵상 나눔입니다.
첫째, 사랑을 베푸시는 성부,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늘 체험하며 살라고 어디서나 눈 들면 하늘입니다.
위로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계시기에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위로 하늘을 떠나 살 수 없는 우리들처럼, 하느님의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위의 하늘에서 은총의 비를, 사랑의 햇빛을 내려 주시면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위로 하늘 사랑을, 하느님의 사랑을 숨 쉬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모세가 체험한 사랑의 하느님이 바로 그러합니다.
시나이 산 높이에서 구름에 내려오신 사랑의 하늘 님을 체험한 모세입니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시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탈출34,6).
주님께서 모세 앞을 지나가며 자신을 선포하며 계시하십니다.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신 하느님,
바로 이게 우리 성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정의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체험하여 닮을수록 우리 역시 자비하고 너그러운, 자애와 진실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우리의 필생과제요 이런 사람이 되라고 세상에 태어난 우리들입니다.
아침성무일도 중 아름다운 성부 찬미가입니다.
만물의 창조주며 능하신 성부,
당신의 생명이며 당신 모상에 우리를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믿음과 당신 은총 얻게 하소서,
둘째, 은총을 내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눈으로 확인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성부 아버지께 이르는 구원 은총의 통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성자 예수그리스도 하나뿐입니다.
바로 오늘 요한복음이 가르쳐주는 진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한3,16).
영원한 생명의 구원 은총을 내리시는 성자 예수님이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생생한 체험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요한3,17).
하느님 구원 은총에로 활짝 열려 있는 하늘 문이자, 하늘 길이신 성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 구원과 심판은 순전히 우리의 믿음에 달렸음을 봅니다.
하느님이 내리신 심판이 아니라 성자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사람들 스스로 자초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아침성무일도 중 아름다운 성자 찬미가입니다.
영원한 빛의 반사 아들이시여, 우리를 당신 형제 되게 하시니
줄기인 당신 품에 항상 안기어, 언제나 푸른 가지 되게 하소서.
셋째,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이십니다.
성부를 향해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성령께서 각 개인에게 나누어 주시는 은총의 선물들은 성부께서 말씀이신 성자를 통하여 주시는 선물입니다.
친교와 일치를 이루시며 끊임없이 우리를 정화하시고 성화하시는 성령 하느님이십니다.
성령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중에 온갖 일을 하십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음도 순전히 성령 하느님의 도움 덕분입니다.
하여 위로자 성령, 치유자 성령, 보호자 성령이라 고백합니다.
바로 다음 바오로의 권고를 이뤄주시는 것도 성령의 은총입니다.
“형제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자신을 바로잡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2코린13,11).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겸손히 성령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내 자리를 비워드려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 혼자 내 힘으로 하려하기에 그리도 힘든 것입니다. 바로 이게 교만입니다.
역시 아침성무일도 중 아름다운 성령 찬미가입니다.
불이요 사랑이신 위로자 성령, 힘 있고 부드러운 당신 빛으로
조물을 인자로이 다스리시니, 우리게 제 정신을 일으키소서.
참 좋으신 하느님이십니다.
모두의 눈높이에서 모두가 체험할 수 있도록
모두에게 삼위일체 사랑의 하느님으로 활짝 자신을 개방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문에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고백이 녹아 들어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완전히 우리 믿는 이들의 운명이자 사랑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2코린13,13).
마지막으로 성삼위 찬미가를 나눕니다.
감미론 손님이신 성삼위시여,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세세에 영원토록 찬미 바치고, 당신을 누리도록 하여주소서.
우리 모두 참 좋고도 짧은 기도문, 영광송과 성호경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하며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박병규 신부
시작기도
참된 진리의 성령이시여,
당신 안에서 느끼고 맛보는 진리의 가르침에 온전히 신뢰로 다가서게 하소서. 아멘.
세밀한 독서(Lectio)
사랑에 대한 응답은 믿음이고 그 열매는 생명이다.
사랑을 매몰차게 밀쳐내는 이의 자세는 불신이고 그 결과는 멸망이 되고 만다.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을 개인적 감정이나 기분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랑은 관계의 차원에서 고찰되어야 하는 게 바람직하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보내신 것이 사랑의 행위라면 그것은 세상을 향해있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을 드러내신 것은
그분의 사랑이 위대하다거나 경이롭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이 그 사랑 안에서 구원을 얻어 누리게 함이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 가치의 척도를 전적으로 세상에 내어맡긴 사랑이었다.
세상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하느님의 사랑은 길을 잃고 헤매고 만다.
흔히 생각하듯 하느님의 사랑은 저절로 전해져서 저절로 구원을 가져다주는 슈퍼맨의 영웅적 사랑이 아니다.
세상에 온전히 내어준 사랑이고 그래서 세상이 제멋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랑이다.
심지어 하느님 당신을 죽일 수도 있도록 내맡기는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이다.
사랑이 내 감정의 표출이라고 믿는다면 다른 이의 감정은 무시될 수 있고
다른 이의 구원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을 위험에 처한다.
사랑은 본디 이타적이어야 한다.
자기만을 위한 사랑은 대개 심판의 모습으로 드러나는데,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는 것,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과 같은 행위로 드러난다.
이 행위가 그릇되었다는 게 아니라, 이 행위로 끝나버리는 위험에 대해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판단과 구별의 행위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사랑은 ‘믿음’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믿는 이에겐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 말도 진리가 될 수 있다.
그른 행위와 악한 행위 앞에서도 믿는 이들은 옳고 선한 행위로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얘기할 수 있는 법이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응답은 한마디면 충분하다.
‘믿습니다!’라는 전적인 봉헌의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
내 정신과 영혼의 밑바닥까지 믿음으로 가득 차면 우리 삶은 이미 영원하다.
그 어떤 상대적 가치도, 그 어떤 제한적 판단도 사라지게 되고, 그저 웃으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영원한 생명은 믿음 안에서 시작되고 완결된다.
내 목숨을 수십 년 더 연장하는 게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 아니라,
내 영혼의 자리에 하느님 사랑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통 큰 믿음이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자 마침의 자리다.
묵상(Meditatio)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경쟁체제, 유전무죄 무전유죄 ….
이는 사랑을 무너뜨리고 위험에 빠트리는 나쁜 말마디들이다.
돈의 노예가 되어 어떻게든 경쟁해서 쟁취하는 데 목숨을 건 싸움이 벌어지게 하는 말마디들이다.
함께 살아갈 세상, 인생의 참된 가치, 사람의 됨됨이와 같은 가치들에 무감각하게 만드는 말마디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경쟁체제,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여기고,
현실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타적’ 사랑을 배우자면서 성당에 다니고 있다.
현실을 바꾸는 것도 아주 현실적이다.
바꾸기 싫거나 바꾸는 데 무지하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타적 사랑을
나를 위한 이기적 사랑으로 탈바꿈시켜서 받아 누린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사랑해야 하고, 나는 그 사랑으로 내 인생의 평화를 누리고자 한다.’라는
속내를 들추어내기 싫어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한다는 명제 앞에 그냥 침묵하며 살아간다.
이런 현상은 참으로 비현실적이다.
현실에 단 한 번도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낸 적 없고, 실천한 적 없기 때문이다.
역사 안에 오셔서 지극히 현실적으로 사랑을 보여주시고 가신 예수님을
오늘날 우리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신화적 인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이시기에 가능한 사랑이었다고 하면서
우리는 오늘도 서로에게 돌을 던지며 나만 살아남기를 갈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도(Oratio)
살이 되시고 피가 되셨던 주님,
오늘도 저희를 위해 살이 되시고 피가 되소서.
그 살과 피로 저희의 사랑이 우리 이웃과 사회를 위해 더더욱 흘러넘치게 하소서. 아멘.
<야곱의 우물>
그저 믿으십시오.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3,17)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성부도 하느님이시고, 성자도 하느님이시고, 성령도 하느님이신데,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이것이 삼위일체 교리이지요.
이것을 모르는 신자는 없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이 쉽게 이해시키려고 애를 썼고 그럴듯한 그림을 그려 냈지만,
결국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결론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셈법이나 논리로는 맞아떨어지는 답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서와 교회의 체험을 통해서 얻어진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의 논리를 넘어서는 신비이고 ‘믿을 교리’인 것이지요.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뵌 적도 없고, 2천 년 전의 예수님을 뵌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에 대한 정확한 묘사도 불가능합니다.
부모님께서 나를 낳으셨다는 것을 믿듯이 그냥 믿으십시오.
성체를 예수님의 몸으로 굳게 믿듯이 그냥 믿으십시오.
교회의 유구한 역사를 보아서라도 믿으십시오.
언젠가 우리가 이 삶을 마감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그 때 비로소 이해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저 믿으십시오.
애초부터 이해 못할 것으로 정해진 것을 이해하려고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에 집중하십시오.
적어도 하느님께서는 완벽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만을 믿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원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닙니다.
신앙은 논리적일 수만도 없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시작하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성인들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삶은 바로 이러한 믿음 안에서 가능했음을
교회의 역사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릴 수 있었던 순교자들의 신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이 진실하고 아름답다 믿는다면,
그 삶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최선이 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