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철의 음악은 처절한 자기극복의 울림이자 가족, 친구, 사회에 바치는따뜻한 사랑의 연가이다. 견디기 힘든 고통에서도 언제나 그를 완강하게지탱시켜준 것은 음악과 종교였다. 73년부터 명동 카톨릭여학생기숙사내의'해바라기'의 리더를 맡았다. 초기 해바라기는 노래로 의식화운동을 했던70년대의 또 다른 청년저항문화의 산실이었다. 늘 맑은 노래에 심취된 젊은 관객들로 북적거리자 군사정부는 사퇴압력을 가하며 정보원들을 상주시켰다. 그는 정보원들에게 목탁으로 머리를 얻어맞으며 협박을 받았다. 성당과 가족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한 김의철은 75년 이정선에게 진행을 넘기며 물러났다. 80년 4월 결혼과 함께 서양음악의 근본을 알기 위해 독일과 미국으로 떠났다. 세계적 기타리스트들에게 음악을 사사 받고 연주력을인정받아 뉴욕에서 기타교수로 재직했다.
얼마 전 독일의 한 일간지에 그가 소개되었다. '나치가 600명의 저능아를살해한 것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열리는 추모회에 전 세계 장례 곡들 중한국의 김의철 곡이 선곡되어 91년부터 10년 간 빠짐없이 불리어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80년대 민주화항쟁 당시. 작곡자의 이름과 얼굴이 베일에가려진 채 '군중의 함성'과 '이 땅의 축복 위하여' 두 곡이 운동권 학생을중심으로 널리 불리어졌다. 바로 김의철이 작곡한 노래들이었다.
그는 92년에 미국 LA에서 제작한 2집 <그 산하>와 93년엔 3집 <연가집>을발표했지만 홍보조차 못해보고 사장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 음반들도 금년상반기에 재발매될 계획이다.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영구 귀국한 후 양희은의 음악감독으로만 활동하던 그는 작년 7월 뜻 있는 포크 팬, 포크가수들과 함께 청개구리 포크 공연을 부활시켜 꺼져가던 포크음악의 불씨를되살리고 있다. 상업적인 노래만이 양산되고 있는 우리가요계에 김의철 같은 대중음악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금년1월 평화방송TV는 김의철 특집방송을 5일간에 걸쳐 방영한데 이어 2월에는중앙일보에 '공연기획자로 뛰는 왕년의 저항가수 김의철'이라는 제하의 전면기사를 게재되었다. 30년 만에 발매되는 데뷔음반을 포함지하에 숨겨져있던 그의 음반들이 줄지어 발매를 될 예정이라는 소식이다. 뒤늦게라도대중과 철저하게 격리되었던 그의 음악이 재평가를 받는 분위기가 조성됨은 반갑기만 하다.
박찬응
음반 콜렉터들 사이에 100만원을 호가하는 김의철의 데뷔 음반에는 한 여가수가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노래한 '섬아이', '평화로운 강물' 등 두 곡이 수록돼 있다. 가요 사상 유래가 없는 '창법 미숙'이라는 이유로 금지명찰을 단 여성 포크 가수의 노래다. 노래의 주인공은 당시 서강대 영문과여대생이었던 박찬응.
금지의 멍에로 이름조차 생소한 그녀의 노래는 단 한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처절하게 가슴속을 파고드는 강력한 소리의 이미지에 충격을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놀라움을 안겨주는 어둡고괴상한 창법의 이 노래가 유신 정권 하에서 금지곡 리스트에 올랐던 것은당연했으리라.
하지만 독특한 그녀의 허스키 창법은 한국 가요 사상 가장 처절하고 슬픈울림으로 포크 마니아들은 받아 들인다. 가히 한국 포크의 컬트로 여길 만큼 철저하게 숨겨진 명곡이다. 그래서인가, 이름조차 생소한 포크 가수 박찬응의 노래는 포크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양희은의 '아침 이슬', 현경과영애의 '아름다운 사람', 한대수의 '바람과 나'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해,'가장 좋아하는 70년대 포크가요 순위' 6위에 당당하게 올라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녀의 진가는 포크 가수에서 판소리 대가로 변신해 현재는 미국오하이오 주립대 한국학 교수가 되어 한국의 소리와 얼을 세계에 알리고있는 특이한 이력의 소리꾼이라는 점에서 빛을 발한다.
박찬응은 1951년 11월 14일 영문학도로 해군사관학교 통역 장교일에 종사해 한국 외국어대 대학원장을 역임한 부친 박규서씨와, 모시적삼에 쪽을끼고 살만큼 전통적인 삶을 고집했던 모친 김기순씨 사이의 1남 4녀 중 막내로 경남 진해에서 태어났다.
서양적 냄새가 강했던 진보적인 부친과 한국적 향내가 물씬 풍겼던 모친으로 인해 그녀의 가정 분위기는 진보와 보수가 묘하게 공존했다. 특이한가풍 속에서 성장한 그녀의 집안에는 사실 음악과 연관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전통 민요를 즐겨 들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수심가’, ‘회심곡’ 등을 듣고 자란 덕에, 제법 구성진 가락으로 민요를 불러 부모님과 주위의 귀여움을 받았다.
4살 때 서울 청운동으로 이사를 왔다. 포크가수 양병집은 그녀의 청운초등학교 동창. 박찬응은 개구쟁이처럼 뛰어 놀기를 좋아했던 쾌활한 성격이었다.
박찬응은 어려서부터 유행가보다는 전통 민요를 유독 좋아했다. 책임감이강했던 그녀는 교내 합창반원으로 활약했지만 비범한 편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는 어린아이의 소리로 동요를 불렀기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한국가락이 아닌 서양노래를 배워야 했던 중ㆍ고교 6년 간의 음악 시간은 고통이었다. 그녀의 목청은 특이했다.
박찬응은 "기본 창법이 달라 정말 괴로웠다. 친구들은 다 서양식 가성이나오는데 이상하게 나 혼자만은 나오지 않았다. 늘 목이 쉬어 있어, 친구들의 놀림감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국악을 해야 하는 목소리임을 아무도 몰랐다. 경기여중에 진학하면서 팝송을 접했다. 중3때 서오능으로 소풍을 가 당시 유행하던 폴 앵커와 카니 프란시스의 노래를 멋들어지게 불러 인기를 모으면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제법 인기가 높았다.
당시 그녀는 오빠가 조립해 만든 전축을 통해 스탠더드 팝과 롤링 스톤즈의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명석했던 박찬응은 명문 경기여고에 진학하면서세상을 보는 눈이 점차 생겨나며 활달하던 성격이 다소 내성적으로 변해갔다..
1969년 서강대 영문과에 진학했다. 영어 연극반에 참여하며 뮤지컬과 연극에 빠져들었다. 미국 미시간대 연극학 박사인 이원복과 연출가 김성만, 이향우등은 당시 드라마센터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기들. 연극에 정신을 빼앗긴 그녀는 학업 쪽으로 정진하기를 바랬던 가족들에겐 미운 오리 새끼로변해갔다.
당시 전 세계는 월남전에 반대하는 반전의 젊은 기운이 드셌던 히피 문화 시대였다. 암울하고 보수적이었던 70년대 시대 상황 속에서 활동적이고튀는 여자 박찬응의 이미지는 '정상이 아닌 년'이라는 유교적 편견으로 일그러졌다. 고무신을 신고 다니고 한복을 뚝뚝 짤라 개량하여 입고 담배를피는 모습은 가족과 사회 양쪽 모두로부터 이상한 여자로 취급당했다.
순수한 영혼으로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였던 한국의 짚시 박찬응은 단지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감당하기 힘든 따가운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대학 2학년 때 경기여고 1년 후배 양희은이 대학 후배로 들어오면서 노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서강대페스티발 때 대학친구 박경애와사이몬&가펑클의 노래로 축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사랑하는 어머님이 병으로 돌아가시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막내로 자란 그녀는 의지할 곳이 없는 현실에 심적 고통이 컸다. 이때부터 음유시인 레너드코헨의 음악이 가슴에 들어 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현실의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더욱 연극에 몰두하며 위안을 찾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번역사로 일하던 중, 서유석에게 팝송 몇 곡을 번안해 줘기타가 생겼다. 이때부터 밥 딜런, 존 바에즈, 멜라니 사프카의 노래를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갑자기 콘서트를 열고 싶어 졌다. 기타를 잘 친다는 연세대 박두호를 찾아 '내쉬빌'로 찾아갔다. 단박에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연대 유공과 뒤 잔디밭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장안의 멋쟁이들이 다 모여든 이날 야외 콘서트에서 뒤늦게 한국 포크의 대부로 떠오르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김의철과의 숙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1973년 봄, 연세대 교정 잔디밭에서 열린 박찬응, 박두호의 콘서트 무대. 우연하게 신촌에 갔던 김의철은 공연 소식을 듣고 그곳을 찾았다. 레오나드 코헨의 '조노박'을 허스키 보컬로 이야기하듯 토해내는 여대생 포크가수가 있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허스키였다.
1971년 고2 여름 방학 때 강원도 북평의 추암 바닷가에서 작곡했던 '섬아이'의 주인공과 딱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바로 내가 찾던 목소리를 찾았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고 그는 기억한다. 공연 후 명동 내쉬빌 음악감상실로 가는 박찬응의 뒤를 무작정 따라오는 부리부리한 눈의 소년같은남자가 있었다.
박찬응은 “서울서 내려 온 도시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해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가 잠이 든 외로운 섬소년의 꿈을 이뤄주고 싶어 만들었다’는 자작곡 '섬 아이'를 들려 주던 김의철로부터 '섬소년이 돼 달라'는 청을 받았다"며 당시 그녀는 “외국 곡을 능가하는 우리 곡이 있다면 부르겠다”며 포크송 작곡가들에게 늘 쓴 소리를 늘어 놓던 차였다.
그녀는 음악밖에 모르던 김의철과 그가 작곡한 '섬아이'에 홀딱 빠져 버렸다. 이후 매일 그의 집을 찾아가 노래 연습을 하며 어울렸다. 김의철은박찬응을 위해 '평화로운 강물'을 하나 더 지어 주었다.
김의철의 음악성을 진작에 알아 본 성음 나사장은 '최연소 작곡가의 음반이 될 것'이라며 “녹음 해 두자”는 제의를 해왔다. 이에 가슴이 두근거렸던 김의철은 박찬응, 이정선, 김영배 등 음악 동료들에게 코러스와 세션을 부탁했다.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녹음에 들어가는 날 박찬응은 감기가심하게 걸려 노래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에 녹음 날짜 변경을 요구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간신히 '섬아이' 녹음을 마치고 '평화로운 강물' 녹음에 들어갔다. 결국 2절 후렴 '강물을 벗삼아' 대목에서 '강을 새'로 잘못 불러 재빨리 바꿨지만 '생물을벗삼아'로 녹음이 되었다. 이에 재녹음을 청했지만 더 이상의 기회는 없었다. 녹음은 단 한번에 끝났다. 이에 김의철은 실망감을 보이는 박찬응에게 “감기가 걸려 오히려 느낌이더 좋았다”고 위로했지만 그녀는 “더 잘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 가시질 않았다.
1년 뒤 기독교 방송 김진성 PD로부터 “음반이 나왔는데 두 곡이 모두 창법 미숙으로 금지가 되었다”는 말을 듣자 기가 막히고 자존심이 상했다.'노래가 뭐 이러냐. 고약한 목소리는 갖다 버려라'는 말을 들은 그녀는 "당시 정치적인 탄압에 이력이 나 있었기 때문에 “감기가 들어서 그랬나보다” 하고 무시해 버렸다"고 덤덤하게 말한다.
하지만 박찬응의 재질을 뒤늦게 깨달은 성음 나사장은 "”양병집과 함께조인트 음반을 내보자”고 제의해 왔다. 하지만 금지 조치로 자존심이 상했고 연예인 가수가 될 생각이 없던 그녀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다. "암울했던 70년대는 에너지가 강했던 사람들에겐 괴로운 시절이었다. “여자로서 엉뚱한 손가락질까지 받았던 내겐 더욱 힘들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했다기 보다는 인생과 예술, 특히 음악과 연극에 취해 내 멋대로 살았다”.
1974년 여름, 친구 박경애가 '함께 국악을 배우자'고 해 창덕궁 앞 '김소희 학원'에가 김경희씨로부터 소리를 한달 간 공부했다. 이때부터 소리의싹이 트며 자신의 목소리가 한국의 '소리 목'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반년후인 75년 1월 하와이대로 유학을 떠났지만 소리에 대한 갈증은 증폭되었다. 결국 76년 정권진 선생에게 소리 강습을 받기 시작하면서 방학 때마다귀국을 했다.
그러다 소리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79년 완전 귀국을 했다. 그녀는 “금지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프로 포크 가수로 나섰을 지도 모른다. 사실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판소리로 빠졌을 수도 있다”고 털어 놓았다. 서울에머무는 동안 결혼해 아이 둘을 낳았지만 84년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남편을잃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85년부터 서울 아카데미 외국인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나 재혼했다. 89년 미국으로 다시 건너 가 하와이대에서 한국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 95년부터 지금까지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한국학 교수로 재직하며 판소리를 통해 한국의 얼을 세계에 알려오고 있다.
2003년 1월 '미국 이민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이주민들의 애환과 문화,역사를 다룬 '1903년 박흥보는 하와이로 갔다'라는 그녀의 창작 판소리는행사에 참석한 세계 저명 인사들의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최근 인터넷 포크 사이트 바람새 공연에 초청되어 30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를 포크 팬들은 열광적인 박수로 환영했다. 오랜 기간을 판소리 연구에 헌신해 온 그녀는 단 2곡뿐인 자신의 노래를 기억해 주는 팬들의 정성에 감동, 창을 섞어 한층 업 그레이드된 노래 솜씨를 뽐냈다.
포크 가수에서 판소리 대가로 변신한 박찬응은 '앞으로 김의철과 함께 기타 소리극을 만들고 싶다. 판소리가 요모양 요소리여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고 싶다. 포크건 판소리건 장르에 구애 받지 않고 늘 새로운소리를 찾아 공부할 것”이라며 자신의 자유분방한 예술관을 드러냈다.
미국에서 건너 온 히피 한대수조차도 외계인으로 취급당하던 70년대 초반, 자유로운 영혼과 예술혼의 날갯짓에 목말랐던 박찬응은 한대수를 능가하는 숨겨진 토종 여성 히피였다. 단 2곡을 세상에 남겼을 뿐이건만, 이제그녀의 노래는 30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뒤늦게 포크 팬들에 의해 재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