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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천 중구를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바위솔
2019년 12월 3일 (화) 촬영.
옛 화신백화점 터에 세워진 종로타워입니다.
종로타워 옆에 있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 열리고 기획전을 보려고 이 곳에 왔습니다.
종로타워 옆에는 새로 지은 26층의 쎈트로폴리스 빌딩이 있는데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건물을 지을 때 나온 1천여점의 유물들을 전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시관입니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 개관 1주년을 맞아 첫 기획전으로 "의금부 금오계첩"을 열고 있습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에 있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으로 내려 갔습니다.
기획전 포스터입니다. 내년인 2020년 2월 23일까지 전시한다고 하네요.
전시를 열며.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도심 정비사업에서 출토된 도시유적을 원위치에 전면보존한 현장 박물관입니다.
전시관 개관 1주년을 맞아 첫 기획전 "의금부 금오계첩"을 개최합니다.
전시관 길 건너편 견평방(堅平坊)에 자리잡은 조선시대 최고의 사법기관이었던 의금부의 기능과 활동,
의금부도사들이 신입 관료의 신고식인 면신례 과정에서 계첩을 제작해 동료들과 나누어 가졌던 모습과
각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금오계첩>을 모아 전시에 담아냈습니다.
이번 전시가 <금오계첩>이라는 기록물을 통해 의금부와 관료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합니다.
서울역사박물관장 송인호
의금부와 견평방.
견평방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있던 한성부 중부 8방의 하나로
의금부, 전의감 및 순화궁을 비롯한 여러 관아들과 궁가들이 위치한 도성내 중심부에 해당하는 곳이었어요.
또한 운종가는 견평방을 아우른 한양의 대표적인 상점가로 중심에는 종루가 있었고,
의금부 맞은편에는 전옥서가 위치하였고, 의금부 뒤편으로는 금부후동으로 불리는 동네가 자리잡았습니다.
조선 초기부터 의금부가 이 터에 자리잡은 후 같은 자리를 지켜왔으며,
근대에 들어 한성재판소,대심원을 거쳐 일제강점기에는 종로경찰서,
해방 후에는 신신백화점과 SC제일은행 등으로 사용되며 오랜 장소성을 유지해왔습니다.
견평방과 의금부 터./ <조선경성도>, 19세기 중반.
전의감 : 조선시대 궁중에 쓰이는 의약을 조제하고 약재를 재배하던 관아
수진궁 : 조선시대 봉작을 받기 전에 죽은 대군, 왕자와 출가하기 전에 죽은 공주, 옹주를 제사지내던 사당.
순화궁 : 조선시대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의 사당.
종 루 : 조선시대 도성을 여닫고 인정과 파루를 알리는 종을 달았던 누각
전옥서 : 조선시대 감옥과 죄수에 관한 일을 맡은 관아
의금부의 역할과 활동.
1414년부터 1894년까지 약 480년에 걸쳐 운영된 의금부는 국왕 직속의 특별사법기관으로
왕명을 받아 죄인을 심문하고 처벌하는 관아였습니다. 심문부터 형틀 적용, 형벌 집행에 이르기까지
모두 왕의 명령을 받아 시행하여 왕부(王府)라고 불렸으며,
왕의 교지(조서,詔書)를 받아 죄인을 가둔다해서 의금부의 옥을 조옥(詔獄)이라고 했습니다.
형조가 일반 잡범에 대한 치죄(治罪)를 담당한 반면
의금부는 주로 양반관료의 범죄를 취급하는 양반재판소 역할을 하여
왕권의 확립과 강화에 기여하고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반역 및 강상(綱常)에 관련된 사건을 추국하여 왕권을 위협하는 반대파를 제거하는 정치재판소 역할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금부는 각종 미해결된 사건이나 중대 사건의 최종판결기관 역할을 맡았습니다.
군사기관에서 사법기관으로.
의금부는 고려 말 치안 유지를 위해 원(元)이 설치했던 순마소(巡馬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순마소는 충렬왕 때 순군만호부, 공민왕 때 사평순위부, 우왕 때 다시 순군만호부로 개편을 거듭하면서
포도(捕盜), 금란(禁亂)의 치안 유지와 친위군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선이 개국한 뒤 명칭이 의용순금사로 달라졌으나 여전히 병조에 소속하여 왕권 확립에 기여하였고,
태종 때 왕권이 안정되자 의금부로 개편되어 사법전담기관으로 독립하였습니다.
죄인을 추국하라.
의금부는 <경국대전>에 왕명을 받들어 추국(推鞠)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대역죄나 강상죄 등 중범죄를 다루었으며, 의정부나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이 함께 참여하는
삼성추국(三省推鞠)을 주관하였습니다. 아울러 양반관료층의 범죄를 다루었습니다.
이와 달리 형조는 일반 양인들의 범죄를 주로 관장하였으며,
포도청은 도성 내외의 도적 체포와 치안 유지, 야간 순찰 등의 업무를 주관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 기능.
의금부 (종1품아문) - 왕명을 받들어 추국에 관한 일을 관장.
형 조 (정2품아문) - 법률 상헌(죄를 밝혀 의논함) 사송(민사 소송), 노예에 관한 정사를 관장.
포도청 (군 영 아문) - 도적과 간사한 소인을 체포하고 경을 나누어 야간에 순찰하는 임무를 관장.
사헌부 (종2품아문) - 현행의 정치를 논평하고 모든 관원을 감찰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억울한 일을 밝히며
허위의 언동을 금하는 등의 사무를 관장.
나장복과 모자 / 나장복-라이프치히그라시민속사박물관 소장. 모자-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나장의 근무복과 머리에 썼던 모자인 흑건입니다.
나장은 조선시대 중앙 아전으로 나졸이라고도 하며, 죄인을 문초할 때 매를 때리거나 죄인을 체포, 압송하는
일 등을 맡았습니다. 대개 깔때기라는 모자를 쓰는데, 뒤쪽에는 알도라는 원형의 금동판이 달려 있습니다.
근무복은 반소매이며, 양 옆이 완전히 트여 세 자락으로 더그레, 호의, 혹은 까치둥거리라고 하였습니다.
금부도사와 나장.
의금부는 종1품아문으로 판사(判事,판의금부사)를 비롯한 4명의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郎廳), 서리(書吏),
나장(羅將) 등으로 구성됩니다.
낭청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또는 금오랑(金吾郞)으로 불렸으며, 정원은 10명으로 의금부의 운영을
주관하였습니다.
이밖에 온갖 잡무를 처리하는 서리(18~20명), 죄인을 체포하고 압송하는 나장(40~232명)이 있었으며
여기에 형률 적용을 위한 율관(律官) 1인과 죄인의 구호를 위한 월령의(月令醫)1인이 있었습니다.
구수영 패찰 / 15~16세기 / 한성백제박물관.
1502년(연산군 8) 의금부판사를 지낸 구수영(1456~1523)의 패찰입니다.
구수영의 가옥은 공평동 유적(전시관)의 북동쪽에 위치하는데 패찰은 인근 청진동 유적에서 발견됐습니다.
재질은 석회질 계통의 석재로 추정되며 전면에 " . . . 臣具壽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위를 금으로 칠하였습니다.
금오계첩, 金吾契帖 / 1762년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소.
1762년(영조 38) 11월에 제작된 금오계첩입니다.
좌목에 기록(좌측에서 두번째)된 심환지(1730~1802)는 조선후기 정조대 노론 벽파를 대표하는 문신으로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지냈습니다. 심환지는 1762년 8월 소과에 급제하여
의금부도사를 제수받아 근무하였고, 1769년(영조 45)에도 의금부도사를 지냈습니다.
의금부 구성원, 義禁府 構成員
의금부 관아 전체 모습.
대청에서 도사들의 계회 모습.
좌목, 계회에 참석한 의금부도사 10명의 명단.
품계, 성명, 자, 출생연도, 과거사항, 본관, 제작시기 등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과거사항란이 비어있는 사람들(3명)은 음보로 관직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제작시기는 제일 좌측 칸 1799년
금오계첩의 구성 / 1799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크기 323 * 224cm. / 표지와 그림, 좌목으로 구성.
<금오계첩>의 제작배경 "면신일분첩" 규정.
의금부의 규정집인 <금오헌록>에는 "면신일(免新日)에 첩(帖)을 나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어서 "이것은 옛 규례이니 반드시 첩을 나눈(分帖) 뒤에 참여를 허락할 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기에서 "면신일에 첩을 나눈다"는 것은 면신일에 맞추어 <금오계첩>을 준비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면신례 때 신임도사는 도사의 수에 맞추어 <금오계첩> 10본을 만들어 선배 도사들과 하나씩 나누어
가졌습니다. <금오계첩>은 면신례 날에 준비해야 할 필수 지참물이었습니다.
"면신일분첩(免新日分帖)"이라는 이 한 줄의 규정때문에 19세기 말까지 수많은 <금오계첩>이 만들어
졌습니다. <금오계첩>은 의금부에 함께 근무했음을 기록한 일종의 기념물입니다.
17세기 : 계첩의 등장과 표현의 단순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관료사회의 면신례와 계회도의 제작은 이전처럼 활발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의금부는 예외였습니다. 면신례가 변함없이 지켜졌고 <금오계첩>도 꾸준히 제작되었습니다.
이전과 다는 점은 족자로 된 계회도가 첩으로 형식을 바꾼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전란 이후의 약화된 재정 사정이 반영된 것이며, 제작비용의 절감과 보관의 편의성을 고려한
결과입니다. 17세기 <금오계첩>은 의금부의 청사와 모임 장면이 매우 거칠고 간략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1697년 작 <금오제회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의 도사들은 이름을 기록한 좌목은 중요시 여겼지만, 그림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것 같습니다.
18세기에 들어서면 의금부 청사의 단순한 형태감은 차츰 구체화되어 일정한 전형을 이루게 됩니다.
1791년 /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소장.
1886년 /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소장.
<금오계첩>의 변천
<금오계첩>은 의금부의 청사와 함께 도사들의 모임장면을 작게 그리는 것이 기본 형식입니다.
이러한 구성은 제작시기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보입니다.
17세기 후반기는 의금부의 청사가 간략히 그려졌으나
18세기 전반기는 사선방향의 투시가 적용되면서 보다 사실적인 경향을 띠었습니다.
18세기 후반기는 다시 청사를 평면적으로 표현하는 양식이 유행을 이루었습니다.
이후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채색이 짙어지고 그림이 도식화되는 특색을 보였습니다.
즉 <금오계첩>은 간략한 그림에서사실성이 강조되었다가 다시 형식화되는 패턴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한편,
기존의 청사 중심의 획일적인 그림에서 벗어나 산수화나 감상용 그림을 그려 넣는 사례도 등장하였습니다
임백현 면신첩 / 19세기 중,후반.
<금오계첩>과 면신례
<금오계첩>은 신임 도사가 치른 면신례와 관련이 있습니다. "신참을 면하게 하는 의식"이라는 뜻입니다.
신임 도사가 선배들을 대접하며 행한 일종의 신고식이자 통과의례였습니다.
면신례의 목적은 선후배 도사들 간 위계를 엄격히 하고 결속을 돈독히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가혹한 벌칙을 강요하여 고초를 겪게하는 폐단도 있었습니다.
면신례가 있을 때 신임 도사가 반드시 준비해야 할 것이 <금오계첩>입니다.
<금오계첩>은 그림 한 점과 명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림에는 의금부 청사를 그렸고, 그 한 부분에 도사들이 모임을 갖는 장면이 들어가 있습니다.
신임 도사는 인원수에 맞추어 10부의 <금오계첩>을 만들었습니다. 먼저 선배 도사들에게 하나씩 증정하고
자신도 하나를 가졌습니다. <금오계첩>은 만남의 사실을 기록한 기념물의 기능을 했습니다.
의금부를 거쳐간 수많은 도사들이 면신례를 행할 때마다 <금오계첩>을 준비 했습니다.
현재 여러 점의 <금오계첩>이 전하는 것은 면신례의 관행 때문이었습니다.
능성구씨 가옥과 이문.
공평동 유적의 이문안길 끝에는 구수영(1456~1524)의 집이 있었습니다.
구수영은 세종의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의 사위로 중종반정에 가담해 정국공신에 오른 인물입니다.
영응대군의 형인 세조가 구수영을 영응대군의 사윗감으로 정해주고 살 곳을 마련 해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종로 시전 뒷길에 위치한 능성구씨 가옥입니다.
가옥에서 종로 방향으로 연결된 길의 중간 지점에 지금의 공평동 유적이 있고
그 길을 따라 종로와 만나는 이문(里門)이 위치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문은 야간 통행자를 검문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세우는 것이었지만,
능성구씨 가옥은 인조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 때문에 가옥으로 들어가는 동네 입구에 이문을 세워
순라꾼도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엄격히 통제하였습니다.
능성구씨 가옥은 구수영의 종손인 구사안(구수영의 증손자)이 동생 구사맹에게 서쪽 일부를 떼어주고
집을 지어 살게 하면서 잠룡지가(潛龍之家)와 태화정가(太華亭家)로 나뉘었다.
인조는 왕이 되기 전 외할아버지인 구사맹의 집에서 자랐다. 태화정은 구사안의 손자 구인후가 만들었다.
능성구씨 가옥은 조선 후기에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의 순화궁이 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이완용의
소유로 넘어갔다. 이후 요릿집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이 인수해 명월관의 별관으로 사용 했는데,
이때 태화정이 있던 자리라하여 이름을 태화관으로 고쳤습니다.
1919년 3월 1일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이 이곳 태화관 2층 끝방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1921년에는 사회복지기관인 태화여자관이 설립되었고,
1982년 도시재개발계획으로 태화여자관이 철거된 후에 현재의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이 들어섰습니다.
민영환의 자결 터에 세워진 기념비.(1905년 11월 30일 새벽 6시경 자결한 청지기의 집 터)
태화관 터.
인사동에 대형 복합문화단지인 "안녕 인사동"이 문을 열었습니다.
안녕 인사동 내부를 구경해 봤습니다.
참 대단 했어요. 호텔도 있네요.
뮤지엄도 있고요.
안녕 인사동 내부를 둘러보는 "인사둘레길"
곳곳에 휴게실이 있어요.
인사동에 숨어 있던 한옥의 지붕들도 볼 수 있었답니다.
고양이 샵. 시간있어요. 놀러 오세용. ㅋㅋㅋ
천도교 교회당도 보입니다.
글스마스 분위기도 ㅎㅎㅎ
괜히 사고푼 물건들을 파는 곳이 많습니다. 아직 빈 상점도 있지만요.
와 ! 정말 잘 그렸어요.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요.
휴게실.
오르골 파는 곳. 정말 살뻔 했어요. 맘에 드는것이 많아서 ㅋㅋㅋ
안녕 인사동에서 봤던 한옥 골목길로....
날이 추워졌습니다. 찻집으로.... 밥값 * 찻값 마넌의 행복으로 마무리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