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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종에 대한 경고
신 6:10-25
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12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14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15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16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와 규례를 삼가 지키며
18-19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그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겠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니라
20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 하거든
21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22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의 온 집에 베푸시고
23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24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25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신 6:10-25 / [여호와만을 섬겨라]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대로 여러분에게 주신 땅으로 이제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기서 여러분이 직접 짓지 않은 크고 아름다운 성읍들을 차지하고 11) 여러분이 직접 수고하지 않고 얻은 재산이 가득 찬 집들과 여러분이 파지 않고 남들이 이미 파놓은 우물들과 여러분이 직접 만들지 않은 포도원과 올리브 동산들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거기서 배불리 먹고 평안히 살게 되거든, 12) 여러분이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여러분을 해방시켜 데리고 나오신 여호와를 잊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13)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그분만을 섬기며 그분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십시오. 14) 여러분은 주위에 있는 다른 백성들의 신들을 따라 다니지 말고 그 가운데에서 어떤 신도 섬기지 마십시오. 15) 여러분 가운데에 계시는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어서 다른 신 섬기는 것을 조금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온전히 주께 충성하지 않으면 주께서 분노를 폭발하시어 여러분을 세상에서 멸절시켜 버리실 것입니다. 16) 여러분은 다시는 맛사에서 주님의 인내심을 시험한 것처럼 주님을 시험하지 마십시오. 17)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언과 계명들을 확실하게 지키고 18) 주께서 옳고 선하게 보시는 일들을 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이 복을 받아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좋은 땅으로 들어가 그것을 차지하게 됩니다. 19) 그때에는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이 그 땅에서 모든 원수들을 몰아낼 것입니다. 20) [하나님의 일들을 전하여라] 훗날 여러분의 자녀들이 묻기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무엇 때문에 이런 증거와 계명과 규정들을 주셨습니까?' 하면 21) 여러분은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우리는 애굽에서 바로를 섬기는 노예로 살았는데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22) 여호와께서 엄청난 이적들을 행하시어 바로와 그의 온 집안과 모든 애굽 사람들에게 무서운 재앙을 내리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23) 그러나 주께서 우리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이 땅으로 데려다가 이미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이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 24)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계명을 지키고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명령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날처럼 언제까지나 복을 받으며 살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25)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이 모든 계명을 우리가 그대로 지켜 행하면 그것이 우리의 의로움이 될 것이다.'
본문은 앞장에서 언급한 축복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불순종하면 징계를 하신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십니다(히 12:5-11).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10-19) 모세는 쉐마를 잘 지켜 행하면 너희가 건축하지 아니한 큰 성읍을 얻고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에서 살고, 심지도 아니한 포도원을 차지하게 되어 배불리 먹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10-11). 그런 축복을 받을 때에 조심하여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12). 무엇보다도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상을 섬기면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지면에서 멸절(滅絶)시켜버리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또한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고 했는데, 맛사 사건은 광야를 지나가던 중 물이 부족하자 불평하며 모세와 아론을 대적한 사건입니다(출 17:1-7).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는 기적을 보여 주시고 그곳의 이름을 맛사 혹은 므리바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맛사는 유혹, 시험이란 뜻이고, 므리바는 투쟁 또는 싸움이란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거든(20-25) 훗날 너희 자녀들이 여호와의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를 왜 철저히 지켜야 하는지를 물을 것이니 그때 꼭 이렇게 대답하라는 말씀입니다. 우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누가 우리에게 주었느냐고 물으면 옛적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우리를 구원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오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라고 했습니다(21). 아울러 24절에 명령과 규례를 주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임을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의로움”은 히브리어로 ‘쩨다카’입니다(25). 유태인들은 이 단어를 자선(慈善)이라는 용어로 사용합니다. 이는 자선은 공의의 차원에서 해야 할 의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태인들은 이 단어를 번영으로도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잘 지키면 번창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통을 신약에까지 이어져 야고보 사도는 다음같이 기록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적용: 당신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을 의심하며 시험한 적이 있나요? 당신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증거와 규례와 법도를 가르치고 있나요?
“나는 정말로 중요하게 여기는 일에 실패하는 걸 두려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하찮은 일에 성공하는 걸 더 두려워한다.”(Bob Goff) 실패는 과정의 일부입니다. 실패해도 괜찮은 게 아니라 괜찮은 것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은 실패를 끝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겐 삼진 아웃 따위는 없습니다. 우리는 먼지를 툭툭 털고 다시 담장을 향해 방망이를 휘두를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실패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전광판은 늘 노 스트라이크, 노 볼입니다.
< 설 교 >
가나안에서 살려면
신 6:10-15 / 이백민 목사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40년간 광야생활을 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기대와 준비입니다. 잘못된 기대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기초한 기대가 아니라 각자가 원하는 기대, 욕심에서 나온 기대입니다. 그들은 철저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했으나 광야의 열악한 환경에 대한 불만과 자신들의 연약함에서 오는 두려움으로 그들 스스로 광야에서 힘든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잘못된 기대는 하나님 보다 그들이 앞서 가는 오류를 낳았고 준비되지 않은 삶은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하였습니다.
흔히 광야를 이 세상에, 가나안을 천국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광야를 불신의 삶을 사는 삶으로 가나안을 믿음의 삶을 사는 성도들의 삶에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종 목적지이기도 했지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가나안 땅이 그들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는 성도들에게도 같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약속의 땅, 가나안 – Canaan, the Promised Land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야 할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신 6: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면서 대부분이 했던 잘못된 기대는 가나안 땅으로 쉽게 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대감은 그들이 출발하자마자 홍해 앞에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쉽게 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믿음이 없으면 첫 출발부터 힘들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자 했던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먼 선조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대부분은 그 약속된 땅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고전 10: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유는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준비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믿음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불신앙은 어떤 삶을 살게하였습니까?
(고전 10: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고전 10: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 10: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고전 10: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고전 10: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러한 모든 사건들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후세에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함입니다.
(고전 10: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이 준비된 자들에게 유효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준비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2. 전투의 장, 가나안 - Canaan, the battlefield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가나안 땅을 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라고 거저 주어졌습니까? 그들은 들어가자 말자 약속의 땅을 얻기 위해 전투를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그들이 차지할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신앙과 불순종은 약속된 땅을 차지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첫 번째 전투를 벌였던 여리고 성은 순종함으로 그들이 큰 전투를 치르지 않았는데도 그들 보다 강한 성을 쉽게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 연약한 성,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어도 그들만의 힘으로도 차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아이성에서 그들은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성도들이 불신앙으로 살았을 때가 광야라고 한다면,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삶을 가나안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은 살기 좋은 곳이었지만 믿음과 순종으로 전투하며 차지 할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성도가 되었다고 천국이 우리에게 바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나안과 같은 이 세상에서 열심히 영적 전투를 벌여야 합니다.
(마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전투를 벌여야 했다면 성도들은 악한 영적 존재와 전투를 벌여야 합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엡 6: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나는 가나안 같은 이 세상에서 어떤 싸움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3. 조심하여 – Be Careful!
본문 말씀에서는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조심해야 할 것들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 6:12)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전 보다 풍족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할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모든 정탐꾼들이 인정하였던 것처럼 광야와 비교되지 않는 좋은 땅으로 온갖 과실들과 농작물들 가축들이 풍성하였습니다. 그리고, 발전된 건축물들과 물건들 무기들도 있었습니다.
(신 6: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신 6: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경고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지 얼마되지 않아 하나님을 잊고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럴 때 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다시 찾게 하였습니다. 이런 사건들이 되풀이 되는 역사가 사사기에 기록된 역사입니다.
(삿 2: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하나님을 잊어버리자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바알과 아스다롯 같은 가나안 신들을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신 6: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삿 2: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삿 2: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당연히, 가나안의 잔인하고 음란한 종교의식을 따랐고 그들의 타락한 문화와 행위들을 본 받았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였던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처럼 살지 않고 가나안 사람들처럼 살았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미 이런 일에 대하여 경고하였지만 그들이 하나님도 하나님의 말씀도 잊어버렸기에 가나안 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 신들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섬겼습니다.
(수 23:7)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 중에 들어 가지 말라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들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
이러한 사건들이 우리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과 말씀을 기억하는 조심스러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신 예수님을 항상 기억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골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히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최선은 때론 외롭다
신 6:10-15 / 채규현 목사
한창 더운 때니까 추울 때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날이 추워지면서 점점 초가을이 되고 겨울이 될 때, 아침마다 걱정이 됩니다. “무엇을 입고 나갈까?” “과연 오늘은 드디어 새로 무스탕을 입을 수 있을까, 없을까?” 이 고민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날이 추워도 아직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스탕을 입을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덜덜 떨고 다니면서도 안 입고 다닙니다. 자기 혼자만 무스탕을 입었다고 칩시다. 그건 싫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것 같으니까. 과연 오늘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입었을까 그걸 굉장히 고민합니다. 처음 입을 때 말입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 겨울에도 두꺼운 쟈켓과 반팔이 공존합니다. 누가 뭘 입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별나게 한국에서는 남이 좀 튀게 입으면 괜히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얘기하고 뭐 하고 그러니까, 그게 싫어서 “과연 오늘은 대체로 무엇을 입을까?” 고민합니다. 아침에 날씨를 보고, 시내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모양을 TV에서 보기를 원합니다. 오랜만에 처음 해보는 일이라든가, 이렇게 안 입었을 때 처음 입어본다거나 이런 일을 할 때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굉장히 많이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이 옷 입는 일에 끝나면 문제가 아닙니다. 옷이야 입었다 벗으면 되고, 하루 좀 창피하고 말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다른 모든 생활양식까지, “남들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 문제를 지나치게 신경을 쓰다 보면, 남들처럼 하다보면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약속하신 최고의 삶, 최선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유학생활 하던 중에 경영대학원에 같이 다니던 인도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편도 그 학교 교수였고 해서, 저희 부부와 그 부부가 아주 친했습니다. 그 집도 우리가 함께 가고 우리 집도 오고 해서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 여자분이 영국에서 살았을 때의 경험을 잠깐 이야기했습니다(인도 사람들이 제일 많이 가는 데가 영국 아니면 미국입니다). 이 여자 분이 인도에서 어려운 삶을 살다가 영국에 가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그리고 꿈에 그리던 직장에도 취직을 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직장의 동료 한 사람이 와서 “너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 안 된다.” 하는 겁니다. “아니, 나는 지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다시 되물었더니, 그 동료가 하는 말이 “너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일까지 다 많아진다.” 이러는 겁니다. 같은 노동조합인데, 일정하게 어느 정도만 하고 더 이상은 안 하는 겁니다. 편하게 지내고, 혹시 일이 더 많아지면 한 사람 더 채용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인도에서 온 여자가 자기들의 하는 일 두 배 이상을 해 내니까 전체적으로 이상해지는 거죠. “너도 우리와 똑같이 일을 해라. 안 그러면 너를 이 자리에 못 있게 하겠다.” 이렇게 경고를 하는 겁니다. 이럴 때 이제 문제가 됩니다. 나름대로 나는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을 하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최고의 삶을 살길 원합니다. 최고의 선을 이루길 원합니다. 가장 높은 도덕률대로 살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길 원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단 말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그 사람들이 다수입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이 당연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다보면, 최선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여러분은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받고,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합니까? 이럴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신 6장)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가기 전에, 그 가나안 땅을 주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내가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는데, 이 선물은 그야말로 거저 주는 것이다. 너희가 힘을 써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10절 후반부부터 보니까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지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이 모든 것으로 복을 주실 때에”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옛날에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특징이 지금도 우리 하나님의 품성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면에서 보면,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것을 거저 주십니다. 가장 그들에게 축복의 상징이 되는 가나안 땅을 거저 주시고, 그 안의 성읍, 그들이 짓지 아니한 성읍을 거저 주시고, 그들이 만들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으로 그들의 집에 채워주시고, 그들이 심지 아니한 과수원을 거저 주시고, 이렇게 모든 것을 거저 주셔서 축복하시고 가장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삶으로 주시길 원하십니다. 가장 귀한 것으로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이 세상 사람들과 공유하는 귀한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공기라든가 물이라든가 정말 귀한 것은 우리가 돈으로 살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거저 주지 않으시면 우리가 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생명조차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덧붙여서 하나님께서는 믿는 백성들에게 귀한 것으로 더하여 주십니다. 진정한 생명의 의미를, 진정한 소망의 의미를, 하나님이 주시는 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천국과 안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것을 주실 때에 거저 주십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힘써서 캐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저 주신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거저 주시기 때문에 나오는 문제가 있습니다. 무책임해지고 무분별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을 경고하는 말씀이 신명기 6장 말씀인 것입니다. 무책임해지고 무분별해진다는 말입니다. 거저 받을 때, 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귀한 것인 줄 모를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거저 받은 것이니까요.
제가 10여 년 전에 중국에 가서 “처소 교회”의 목회자들을 교육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가서 보니까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제일 좋은 성경책은 다 가지고 있고, 성경책도 천차만별 아닙니까? 몇 천원 짜리 성경에서부터 5, 6만원 되는 성경책도 있지 않습니까? 이 분들이 가진 성경책은 전부 5, 6만원 짜리들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걸 살려면 큰맘 먹고 5, 6만원 되는 성경책을 사야 되는 그런 성경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보니까 이 성경책의 귀한 면을 모릅니다. 왜냐면 거저 받았으니까요. 한국에서 가는 분들이 가기만 하면 좋은 성경책들을 골라서 그들에게 다 가져다 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분들은 목회자니까, 여러 성경책들이 오면 그 중에서 보아서 제일 좋은 것으로 가지니까 그 때 모인 사람들 보면 제일 좋은 것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그게 얼마나 귀한 것인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습니다. “당신들, 수업료 내라.”고. 물론 그 당시 그 사람들은 엄청나게 가난했고, 수업하는 데까지 그 사람들이 모일 때 올 차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교단체에서 차비를 다 대주고 그랬는데, 거기서 잘 한 것이 먹을 것은 전부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오면서 쌀을 한 짐씩 지고 와서 그것으로 먹고 지내게 했습니다. 그것은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수업료 낼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와서 오히려 자기들에게 퍼주고 갈 줄 알았던 겁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안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수업료 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멀뚱하게 쳐다보는 겁니다. “아니, 제가 여러분을 가르치니까 여러분은 제게 수업료를 내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이 듣고 있는 이 강의는 너무나 귀중한 것이란 걸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수업료 내십시오.” 했습니다. 조금 후에 분위기 파악을 하고, 나중에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수업료를 모아서 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떠나오기 전에, 제가 가지고 간 여러 가지 문방용구, 학용품들을 많이 주었습니다. 주고 나서도 제가 이야기한 것은, 절대로 이것들을 성도들에게 거저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다못해 성경 읽기 대회를 해서 상으로 주고 그럴지언정 절대로 거저 주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귀한 줄을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처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절대로 이 사람들에게 성경책을 거저 주지 말고 반드시 팔라고 그랬습니다. 한국에서는 거저 공짜로 올 경우가 많지만 성도들에게 줄 때는 다만 얼마라도 받고 팔라고 그랬어요. 그래야 그 사람들이 성경책을 귀중히 여기니까요. 여러분이 전도하는 분들에게도 다른 것은 거저 해도 성경책은 거저 주지 마십시오. 귀하게 여길 줄을 알아야 되니까, 얼마나 귀한 말씀인 줄 알아야 되니까요. 자기 돈으로 산 것은 귀하게 여기거든요. 거저 주면 안 됩니다. 그렇게 거저 받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는 면 때문에, 저는 교회에서 성경공부 할 때도 수업료 내라고 했습니다. 제가 갖는 것은 아니고, 수업료를 내고 성경공부를 하게끔 했습니다. 그리고 출석 체크하고, 빠지면 결석 분명히 체크하고, 몇 번 이상 빠지면 그 과목 이수 못하게 학교 식으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성경공부가 잘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적으로 서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저 주는 것일망정 뭔가 값을 붙여서 이게 귀하다는 것을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거저 주시는 것은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 대 인간이 하는 대로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거저 주시는 것에 대한 귀함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데, 자칫 잘못하면 거저 받았기 때문에 무분별해지고 그것의 귀함을 모르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하나님이 주시는 건강입니다. 건강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의사가 치료한다고 수술하고 약을 주지만, 결국 자체로 그 약을 받아들이고 수술했을 때 아물게 하는 그 능력은 하나님이 내 몸에 주시지 않으면 절대 치료될 수 없는 것입니다. 건강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의 귀함을 내가 건강할 때는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입니다. 엄마가 부엌에서 일을 하다 손을 다쳤습니다. 그래서 밥을 못해주게 되었고, 갑자기 온 집안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전부 밥 못 먹을 줄 알고 말입니다. 그런데 비로소 엄마가 집안의 일을 못하니까 “아, 엄마가 있으니까 엄마가 정말 귀하구나.” 하는 것을 느꼈음과 동시에 이제 온 식구들이 나서서 엄마가 다 해줬던 일을 같이 나눠서 하는 것입니다. 이제 밥은 누가 앉혀놓고, 반찬은 누가 준비하고, 설거지는 누가 하고, 각자 방은 각자 자기가 치우고. 예전에는 엄마가 다 치워줬고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엄마가 아프고 나서는 각자 다 알아서 자기 방을 치우게 되니까 나중에는 엄마가 아파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니까, 귀한 걸 아니까 말입니다. 꼭, 없어지고 나서야 귀한 걸 압니다. 어리석은 인간이, 있을 때에는 그것에 대한 감사를 모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이 엄청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저 받았기 때문에 귀함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내 삶 속에서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산다는 영적 기준, 도덕적 기준이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전부 거저 주셨는데 그것을 누릴 때에는, 처음의 1세대들은 압니다. 가나안 땅 밖에서 유랑하는 민족으로 살 때와 가나안 땅 안에서 드디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땅이라고 느끼고 그 안에서 살 때의 차이를 1세들은 압니다. 그런데 2세, 3세, 처음부터 그 가나안 땅을 누리던 그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함을 점점 잃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집 안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 믿기 전 생활과 예수님 믿기 후 생활이 무엇인지 압니다. 이 사람들을 믿음의 1세대라고 합시다. 물론 믿음의 1세대들도 나름대로 경건 생활하지 않을 땐, 다시 옛 죄악의 잘못된 습관으로 빠질 우려가 많이 있지만 처음부터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계속 믿음 안에서만 살았던 2세대, 3세대들도 같은 위험성이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했던 그 위험성과 똑같은 위험성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그 믿음의 가정의 여러 분위기 속에서 계속 자라납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항상 처음부터 그냥 있는 줄 알고, 도대체 안 믿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만큼 잘못되고 안 믿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만큼 안식에서 멀어져있는 괴로운 삶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영적인 면에 무뎌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처한 이 믿음 생활이 얼마만큼 귀하고 좋은 것인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결혼 적령기가 되어서 안 믿는 남자가 나타났을 때, 안 믿는 여자가 나타났을 때, 넘어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들의 삶과 안 믿는 사람들의 삶의 그 큰 차이를 미쳐 모르거든요. 집 안에서의 생활 습관을 예로 들어봅니다.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고 언제나 집에 일찍 들어오는 아버지의 고마움을 잘 모릅니다. 남자들은 다 그런 줄 압니다. 그러다가 안 믿는 남자도 그런 줄 알고 시집가 보면, 천만예요, 엄청나게 다른 생활에 직면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언제나 집안에서 어머니가 믿음대로 생활하고 기도하고 그런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활하다가 안 믿는 여자를 만나서 결혼해 보면, 전혀 믿음과 관계없이 생활하는 그 습관에 직면하게 될 때, “아차, 이것이 아니구나.” 하고 느낄 때, 때는 늦습니다. 영적인 기준에 대한 불감증,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 기준에 대한 불감증이 점점 우리에게 있게 되어서, 어려서부터 믿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특히 개인적으로 신앙적 체험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면의 하나님 은혜를 받기 전에는 이것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불감증, 도덕적 불감증에 걸리면,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그것보다는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것, 세상 사람들의 가는 길에 더 맞추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있게 되는 그 귀한 축복들이 무엇인지를 미쳐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삶에 더 달콤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따라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에 절대로 속지 마십시오. 앞으로 주 5일제가 되면서 점점 레저 문화가 강해집니다. 레저 문화도 보다 크리스천 안에서, 믿음의 공동체(christian community) 안에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레저 문화가 우리 교회에서도 새로 개발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하나님이 주신 모든 천지만물을 즐긴다 해도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즐기는 법을 우리가 함께 교회 안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칫 잘못하면 믿지 않는 길로 따라갑니다. 그냥 갈 수밖에 없게 되요. 왜냐하면 그들이 하는 일이 더 좋게 느껴지지만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지금 사회가 점점 모든 면에서 하향평준화로 조정되는 것 같습니다. 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왕따가 됩니다. 직장에서 다른 사람보다 탁월하게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동료들에게서 괴로움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자꾸 그런 가운데 여러분은 과연 어떠한 기준으로 최선의 삶을 살겠느냐 이겁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 여러분의 사업장에서, 여러분의 공부하는 장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과연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모든 것을 거저 받은 특권층인 여러분이 이 세상 사람들과 어떻게 다르게 사냐는 겁니다. 수많은 세상 사람들이 가는 그 길대로 여러분도 그 길을 가길 원합니까? 아니면 튀더라도, 오히려 핍박을 당하고 왕따를 당하더라도, 과연 하나님이 주시는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해서 내가 최선을 다할 것인가 그것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나라만 해도 믿음생활 하는 것이 일본에 비해 훨씬 쉽습니다. 일본 같은 경우는 왕따라는 것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심합니다. 이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웃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왜 그 사람들이 끊임없이 집 밖을 깨끗하게 치우는 줄 아십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치우는데 자기는 안 치우면 자기만 왕따됩니다.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며 치우는 것입니다. 처음에 일본 가서 보면 굉장히 깨끗합니다. 작은 시골에 가면 정말 종이 한 장 없이 깨끗합니다. 그래서 여기 정말 살기 좋은 나라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천만예요. 그 안을 들여다봐야 해요. 그 공동체에서 깊이 누르는 것에서 조금이라도 비켜 나가면 안 됩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굉장히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조금이라도 튀면 안 되는 강력한 그런 사회에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튀는 일입니다. 특히 학생들은, 모든 학교의 과외 일들이 전부 주일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이 되면 교회에 와야 합니다. 그 일에 다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왕따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환경에서도 예수님을 믿습니다. 학생들이 주일에 교회 와서 앉아있습니다. 그보다는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우리는 크리스천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 2절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본받는다는 것은 복사판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 사람들이 하는 일을 내가 그대로 본떠서 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동양식이나 그들의 습관이나 그들이 즐기는 것, 그들이 하는 것 그대로 다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뭔가 달라야 됩니다. 어떻게 다르냐,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이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결단을 새로 다진다는 것입니다. 원래 모든 믿는 백성들에게 하는 말이니까,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는 다 계십니다. 예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외부의 환경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돌려서 그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것, 그것이 세대를 본받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그래, 이제는 마음을 다잡고 마음 속의 예수님의 소리를 따라서 내가 행동하겠다.” 하는 그 결단을 말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면 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올챙이가 개구리 된다는 이야깁니다. 새롭게 바뀐다는 말입니다. 이 세대와는 이제부터 다르게 생활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수많은 오리들 틈에서 내가 백조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백조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과 어려움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 보일 때 다시 한 번 여러분의 마음 속으로 되뇌어 보십시오. “당신들은 오리, 나는 백조” 세상 사람들은 수많은 오리 떼와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소수이지만 백조입니다. 그러면 백조처럼 살아야 됩니다. 왜 백조가 오리 궁둥이를 쫓아다닙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위해서, 여러분의 그러한 최선의 삶을 위해서, 여러분의 삶이 창공을 나는 독수리같이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한 최선의 삶을 선물하셨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땅만 보고 사나 하는 겁니다. 왜 참새처럼 사나, 왜 오리처럼 사나 이겁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롬 12:2)”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다르게 살다보면,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여러분은 별난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자기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지 않는 친구들이 여러분에게 뭐라고 합니까? “분명히 너는 우리와는 좀 다르구나” 이렇게 얘기합니까? 아니면 전혀 부담 없이 같이 어울리고 있습니까?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친구들과 전혀 부담 없이 같이 어울리고 있다면 여러분은 오리 쫓아다니는 백조들입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왜 그렇게 사시길 원하십니까? 백조는 백조답게 살아야 합니다. 독수리는 독수리답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독수리이며 백조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피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말입니다. 바로 그 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인식하고 살아야만 합니다.
우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아주 머리가 좋은 총명한 파리가 있었습니다. 그 파리가 다니는데 그 옆에 큰 거미가 반짝반짝 빛나는 거미줄을 아름답게 쳐놓고 “파리야 여기로 놀러와라, 여기 와서 앉아라.” 합니다. 파리가 “거긴 안 앉습니다. 내가 왜 거기 가서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갑니까?” 하며 안 앉아요. 그런데 그렇게 가다가 아래를 보니까 수많은 파리들이 춤을 추는 곳이 있어요. "야, 저긴 우리 파리들이 전부 기분 좋게 춤추는 곳이구나. 저기를 가야지.“ 하고 계속 내려가서 막 앉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옆에 벌이 지나가다가 ”거기가면 너 죽어. 그건 끈끈이야.“ 하고 말합니다. 그 때 파리가 말하기를 ”무슨 소리냐? 나 말고도 수많은 파리가 다 저기 앉아있고 다 좋아서 춤추고 있는데 당신 무슨 소리냐?“ 하고 거기에 홀라당 앉아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앉는 길, 누구나 다 가는 길, 그러니까 안전한 것 같이 느껴집니다. 나도 거기 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세상 사람들이 가는 그 길은 죽음의 길이라는 말입니다. 그 길은 절대로 여러분에게 축복의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거저 받는 수많은 축복들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 축복을 누리고 받는 방법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계속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에 변화를 받아 새롭게 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그 수많은 축복들이, 특별히 안식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핍박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이상하게 볼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왕따로 여길지라도, 별난 사람이라고 완전히 제쳐놓고 취급할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부디 오리처럼, 참새처럼 살지 마십시오. 백조처럼, 독수리처럼 사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니까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최고의 삶을 주시길 원하시니까요. 바로 그 삶 속에, 충만히 하나님의 천국을 누리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일을 하라
신 6:16-25 / 한 대근 목사
“옳은 일을 하라”는 성경학교의 주제는 하나님이 주신 시대적 요청입니다. 이 시대의 모습은 한 마디로 노아의 때와 같습니다. 음란 유흥 사치 향락의 물결, 술 취함과 방탕함, 불의와 불법이 가득합니다. 특별히 인터넷의 확장과 함께 죄악의 수위는 더욱 높아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주제는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이 함께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악하고 패역한 세상을 올바르게 살기 위해 어떤 마음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하나님 말씀 중심의 절대 가치관을 품어야 합니다.
가치관이란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틀입니다. 생각이나 행동을 규정하고 판단하는 기준이며, 잣대입니다. 우리가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의 절대적인 기준이 필요한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기준으로 정하고 삽니다. 세상에서는 옳고 그름이 돈이나 권세에 의해서 또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에 의해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인간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죄성을 자극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절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적 가치관은 바로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을 통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의 이중성과 모순을 통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 축복일 때뿐만이 아니라 손해가 될 때에도 변함없이 진리라고 믿고 적용해야 합니다.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분별력은 영적인 지혜요 능력입니다. 지식이 자동차라면 지혜는 운전입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도 운전을 잘못하면, 사고가 나고 다치게 됩니다. 지혜는 운전을 잘하는 것입니다. 지식을 가지고 잘못되게 살면 사기꾼이 되고 도적이 되고 강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사회가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옳게 따르는 분별력이 없기에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와 분별력은 어디에서 옵니까?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두려움으로 섬긴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 면전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올바른 삶을 사는 가장 간단한 비결은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들 심지어 마음속의 모든 생각까지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선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보상을 믿는 것입니다.
악하고 패역한 세상에서 올바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정직하게 살면 손해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직하게 사는 자에게 분명한 축복을 약속해주셨습니다(18,2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함으로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정직하게 살려고 하다보면 처음에는 손해가 되는 것 같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것은 사탄이 우리에게 불어넣어 준 착각과 환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유혹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하게 살면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정직하고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손해를 보는 세상을 만들어 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축복하셔서 모든 사람들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옳은 일을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감으로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 유익이 되며, 우리의 어린 자녀들에게는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모델로 세워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신앙의 의무와 본질과 유익
신 6:10-25 / 피영민 목사
신명기 6장은 ‘쉐마’로 유명한 장입니다. 6장 4절 말씀이 ‘들으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 단어 ‘쉐마’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어순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들으라 이스라엘아’라는 어순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쉐마의 핵심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대충하지 말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진력을 다해서, 힘이 다 빠지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는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이 진리를 가르치라”(신 6:7)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은 가정에서의 신앙교육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며, 눈만 들면 말씀이 보이도록 해야 합니다. 손목과 미간에도 말씀을 붙이고, 문설주와 바깥문에도 말씀을 붙여서 자녀들이 눈만 들면 말씀이 보이도록 하라고 명령합니다.
왜 신명기 6장이 이처럼 자녀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할까요? 바로 모세가 미래를 내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부르게 잘 먹고 잘 살게 되겠지만, 자녀들이 반드시 신앙문제에 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우리가 왜 신앙을 가져야 됩니까? 우리가 왜 율례와 규례를 지켜야 됩니까?” 그래서 이를 대비하여 철저하게 신앙교육을 시킬 것을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신명기 6장 10-12절에 그 땅의 특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누리는 물질적인 부요와 축복은 그들의 노력과 헌신의 보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물건으로 가득한 건축하지 않은 집이요, 파지 아니한 우물이며 심지 아니한 포도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셨기 때문에 거저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거저 얻은 행복과 부요를 누리게 되면 제일 먼저 신앙문제에 시비를 걸고 나오게 될 것을 모세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명기 6장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자녀들의 두 가지 현상
하나님께서 노력하지도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는 백성이 이 세상에 적어도 하나는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땅에서 의식주는 하나님께서 모두 책임을 지실 것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방나라들이 이스라엘을 보면서 ‘저 백성들은 참된 지식이 있는 백성이라’고 고백하게 되고, 하나님 여호와를 향한 갈증을 일으켜서 결국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가나안 땅에서 의식주를 거저 주시는 근본 목적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면 이스라엘은 이사야서 60장 3절의 말씀대로 ‘열방에 빛’이 되고, 열왕은 비취는 광명으로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공짜로 부요와 축복을 누리면서 대를 거듭하면, 그 자손들에게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 현상은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켜서 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물질에 대한 탐욕이 더욱 커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신명기 6장 16절에서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맛사 사건’은 출애굽기 17장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직후에 물 없는 곳에 이르자 모세에게 불평을 하고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할 셈이냐!”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어서 반석을 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모세가 순종하여 반석을 치자 반석에서 물이 나와서 백성들이 물을 마시고 해갈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 장소를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의미로 ‘맛사’, 혹은 ‘하나님과 다투었다’는 의미로 ‘므리바’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모세는 이 사건을 예로 들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그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의식주 문제를 가지고 염려하여 하나님과 다투거나 시험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하신 것과 규례를 삼가 지키라”(신 6:17)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보다도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바르게 지켜 살고 있는지를 먼저 염려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의식주 문제를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의식주 문제를 걱정하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 살고자 하지만, 그것은 참된 인생의 목적이 아니며 채워져도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의식주 문제를 먼저 신경쓰지 말고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켜 바르게 살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서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 현상은 자손들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증거와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뇨?”(20절) 이 질문은 문자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의 문자적인 의미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부모들보다는 자식들이 공부를 더 잘하고 지식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아무런 불편 없이 잘 먹고 잘 살면 됐지 신앙이 왜 필요하며,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켜야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질문인 것입니다.
제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5년간 미국 루이지애나에서 목회할 때, 교회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성가대도 열심히 했을 뿐만 아니라 페인트칠하기, 카펫 갈기, 잔디 깎기 등 궂은일도 마다 않고 열심히 봉사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만큼은 싫어하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5년간 목회하는 동안 그 분이 영접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결국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분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자식들 잘 되고 형제 평안하고, 가정 평안하면 그걸로 됐지 예수님을 왜 영접해야 합니까? 교회야 이 사회의 중요한 기관이니까 내가 와서 교회 잘 되도록 봉사하는 것이지 나에게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따라서 살라고 말씀하지 마세요.”
전도하기 제일 어려운 사람은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어서 예수님을 왜 믿어야 되는지 근본 이유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 자녀의 세대들도 오늘날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아버지. 왜 꼭 교회에 나가야 합니까? 일요일에는 집에서 쉬어야지 왜 교회에 가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야 합니까? 왜 아까운 돈을 떼어서 십일조를 교회에 드려야 합니까? 왜 예수님만 믿어야 합니까? 왜 목사님들은 부처도 있고, 모하메드도 있고, 갖가지 종교가 많은데 예수님만 믿어야 천국 간다는 편협한 사상을 전합니까?”
2. 신앙을 가져야 할 의무
이와 같은 자녀들의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오늘 그 대답을 모세로부터 배우고자 합니다. 모세는 이 질문에 두 가지로 대답을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하신 것과 규례를 삼가 지키라”(17절),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24절) 그리고 “우리가 그 명하신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25절)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왜 우리가 전도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행 10:42) 왜 졸더라도 주일이 되면 예배에 나와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전 예배에 나와서 졸고 계시는 분들도 존경스럽습니다. 졸더라도 예배에 나오시기 때문입니다. 졸아도 귀는 열려서 말씀은 다 들립니다. 그래서 설교는 다 들으십니다. 졸더라도 예배에 출석해야 하는 이유 역시 동일합니다. 왜 그 아까운 십일조를 교회에 내야 합니까? 역시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돈을 얼마나 귀하게 여깁니까?
어느 구두쇠가 400냥이 들어있는 돈가방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돈가방을 찾아주는 사람에게는 100냥을 주겠다고 공고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어떤 청년이 그 돈가방을 찾아서 구두쇠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구두쇠가 돈가방을 확인해보니 400냥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돈가방을 확인한 구두쇠는 갑자기 100냥을 주기가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청년에게 “이 사람아! 내가 원래 이 가방에 500냥을 담아두었는데 400냥 밖에 안 남은 것을 보니까 자네가 100냥을 먼저 떼어 간 모양이구만. 그러니 이제 가보게나”라고 말하고 자기 집으로 들어 가버렸습니다.
구두쇠의 얌체 같은 행동에 약이 오른 이 청년은 자신의 억울함을 원님에게 아뢰었습니다. 그래서 원님이 두 사람을 모두 불러 관아에 앉혀놓고 묻습니다. “이보시오 부자 양반. 당신이 가방을 잃어버린 것이 맞소?” 그러자 구두쇠가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그 가방 안에는 500냥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얼마가 들어있소?” 원님의 질문에 구두쇠는 “저 총각이 백 냥을 가져가서 400냥이 남았습니다.”
구두쇠의 대답을 들은 원님은 “이보시오 부자 양반. 저 총각은 100냥을 가져간 적이 없다고 하는데 그 가방에 400냥 밖에 안 들어 있는 것을 보니 그 가방은 당신의 가방이 아닌 것이 틀림없소. 그러니 그 가방은 저 총각에게 되돌려 주시오”라고 판결했다는 옛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가지고만 있어도 남 주기 싫은 것이 돈입니다.
이처럼 아깝고 귀한 돈을 왜 교회에 아낌없이 내놓아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결정해야 할 내용이 하나님이 내게 명령권을 가진 분이시냐, 그렇지 않느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명령권을 가지고 계신다고 확신하신다면 신앙을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우리가 신앙을 가져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두 번째 대답은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 온 집에 베푸시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21-23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자녀들이 “왜 우리가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까?”라고 질문할 때, 부모는 “만약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애굽의 노예가 되어서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행복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마귀와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귀가 시키는 대로 술도 먹고, 담배도 피고, 바람도 피면서 죄 가운데서 살아갔을 것입니다. 마귀의 종으로 살면 현세에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내세에는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마귀에게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해야 합니다.
3. 신앙의 본질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모세는 두 가지 동사를 통해 신앙의 본질을 정의합니다. 첫째로 24절에 나타난 ‘경외하라’는 동사입니다. ‘경외하라’는 말은 다른 말로 두려워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문제는 지난 주일에 다뤘습니다. 우리가 왜 죄를 회개해야 합니까? 죄에 대해서 영원한 형벌을 주시는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기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편들어 주시는 중보자 예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 외면당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는 삶을 사는 것이 두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함부로 악을 행해서는 안 됩니까? 악에 대해서 속히 징벌을 주시는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잠언 8장 1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본질은 첫째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요사이에 우리 대한민국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하다 보면 기독교 안티사이트들이 아주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안티 사이트의 주 내용이 목사들의 허물을 골라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목사가 수십만 명이 넘는데 그 가운데서 실수한 목사 몇몇을 드러내서 모든 목사들이 악한 사람들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바람직한 행동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로마서 3장 1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목사를 욕하고 교회를 비판하는 자신들은 정작 의롭게 살지 않으면서 대책 없이 남을 비판하는 것은 불의한 행동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을 나타내는 두 번째 동사는 25절에 있는 ‘지키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행하라(do)’는 의미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경외하고 지키고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는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지켜서 행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드는 명령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명령을 행해야 하고, 부주의하게 성의없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삼가 주의 깊게 정성을 다해 행해야 하며,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합니다.
4. 신앙의 유익
우리가 신앙의 본질을 강조할 때, 우리 자녀들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며 무슨 유익이 있는지를 물을 것입니다. 그 때에 부모는 두 가지 유익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첫째로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25절)이기 때문입니다. 이 ‘의로움’은 다른 번역에서 ‘보상’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신앙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보상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미래지향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반드시 신앙의 보상을 주십니다. 아까운 한 시간을 내서 예배 드렸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보상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도, 하나님을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바친 봉사도 하나님께서 모두 보상해 주십니다.
둘째로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24절)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자녀들아! 지금의 생활을 계속 누리기를 원하느냐? 오늘날 같이 복을 누리되 항상 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지켜 행함,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살아라.” 이는 현세적인 축복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신앙에는 미래적인 보상과 현세적인 축복이 따릅니다.
결 론
오늘날 자녀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부모는 자녀를 감옥에 보내고서 마음 아파하고, 어떤 부모는 방탕하고 타락한 자녀들 때문에 고통 받으며, 어떤 부모는 부모의 명을 거역하고 신앙을 갖지 않는 자녀들 때문에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이 가슴 아픈 일이 없도록 자녀들에게 더욱 신앙을 강조해야 합니다. 자신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녀들에게는 교회에 나가든지 말든지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강조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공부는 열심히 하지만 대학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교회와 신앙생활을 멀리 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교회에서 멀어지면 세상과 벗하고 살면서 죄 짓는 인생, 망하는 인생을 향해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과 후손들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겨야 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켜서 사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합니다. 신앙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 것은 현세나 미래에나 결국은 망하는 길이기 때문에 두들겨 패서라도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1세대들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이루어도 노력해서 이루었던 세대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손들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심지 않은 것과 노력하지 않은 것을 거두는 세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왜 필요한지를 잘 모르는 세대입니다. 이와 같은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리모델링을 하는 이유도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곳에서 예배드릴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후손들이 이곳에서 예배드릴 것이기 때문에 좋은 환경을 마련해 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후손들이 잘 되는 길이며, 우리나라가 잘 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는 백성이 세상에 하나쯤은 있다. 세상에 복음을 선교하는 일에 목숨을 건 민족이 하나쯤은 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전 생애를 건 백성들이 하나쯤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합니다. 신앙의 의무와 본질과 유익을 우리 자손들에게 끊임없이 교육시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현세의 축복과 미래의 축복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직한 그리스도인
신 6:18-19 / 김동호 목사
지난 고난주간 동안 저는 미국 집회를 다녀왔습니다. 노스캐로라이나에 있는 그린스보로라는 작지만 아주 아름다운 도시에서 집회를 하였습니다. 집회 중 어느 집사님 가정에 초청을 받아 저녁 식사를 하였는데, 참으로 놀라왔던 일은 70이 넘으신 부모님을 중심으로 3남 1녀 4가정이 걸어서 몇 분 안 거리를 두고 한 동네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은 아버님과 함께 형제들이 자그마한 건축회사를 만들어 함께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식사를 함께 하면서 자연스럽게 간증을 듣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 형제분들은 주로 시의 관급공사를 맡아서 하고 있는데 시 정부의 신용을 얻어서 00 회사하면 검사도 하지 않고 준공을 줄만큼 되었다고 합니다. 미국은 건축 관계 검사가 까다로워서 검사를 마지막에 준공검사로 한번 하지 않고 매 단계마다 꼼꼼하게 검사를 하고, 그 검사를 거쳐야 다음 단계의 일이 진행되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나라에서 거의 검사도 받지 않고 준공을 받을 만큼 신용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 기뻤습니다. 예수 믿는 한국 사람이 미국 사람들로부터 그런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참 자랑스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신용은 우연히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초기에 시 정부 공사를 맡아 일을 한 후 검사를 받을 때 검사관으로부터 벽 속에 방음자재들을 규격대로 넣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질문을 받았을 때 그와 같은 자재들을 규격대로 잘 넣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때 적당히 거짓말을 하고 넘어갈까 하는 유혹이 많이 있었지만 정직하게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벽을 다시 다 뜯고 공사를 하는 바람에 많은 손해를 보게 되었답니다.
손해도 손해였지만 그와 같은 실수 때문에 다시는 공사를 수주 받지 못하지 않을까 염려를 많이 하였는데 놀랍게도 그 사건 이후로 시에서는 보다 많은 공사를 이 회사에 맡겨 주더라는 것입니다. 이 회사는 실수는 할 수 하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는 정직한 회사라는 신용을 그와 같은 사건을 통하여 얻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모든 면에서 정직하게 눈속임하지 아니하고, 뿐만 아니라 시간 약속까지도 어기지 아니하려고 때로는 밤샘 작업을 하면서까지 노력하였더니 이제는 검사도 하지 않고 준공을 받을 만큼의 신용을 얻은 회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회사 때문에 그린스보로 시 정부에서 건축 관계 일을 담당하는 공무원 사이에는 우리 한국사람 특히 한국 크리스천에 대한 이미지가 아주 좋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정직하고 성실하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무 기분이 좋고 자랑스러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정부에 훈장이라도 추천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를 아주 잘 믿는 공무원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공무원을 통하여 일을 부탁하게 된 어느 회사 사장이 테이블 밑으로 봉투를 전해 왔습니다. 그때 그 예수 믿는 공무원은 그 사장에게 봉투를 정중하게 돌려주며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고 합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라도 아마 이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봉투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일은 하자가 없는 일이니 제가 최선을 다해서 도와 드리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 이야기를 처음 약 7년 전 쯤에 미국과 프랑스 코스타에서 ‘거룩과 능력’이라는 제목으로 학생들에게 하였었습니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도전하였습니다.
<공부와 학위를 마치게 되거든 교수와 연구원만 하지 말고 , 몇 사람쯤은 공무원에 도전하라. 그리하여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 때, 그리고 앞의 상황과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위의 예수 믿는 공무원과 같이 우리도 대답을 하자> 그리고 학생들에게 연습을 시켰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라도 아마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봉투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일은 하자가 없는 일이니 제가 최선을 다해서 도와 드리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와 거의 똑같은 식의 이야기를 봉투를 가져 온 학부형에 어느 예수 잘 믿는 여 선생님이 하였다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도 참 정직한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그런 분들 때문에 교회와 나라가 그래도 이만큼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영락교회 안수집사님 중 저와 함께 고등부 일을 하던 집사님 한 분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친구 빚보증을 잘 못 섰습니다. 친구가 빚을 갚지 못하는 바람에 보증을 선 집사님에게 책임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보증 선 빚을 갚으라고 하는 채권자에게 그 집사님은 집을 팔아서라도 약속을 지키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너무도 순순히 이야기를 하는 집사님의 말이 믿어지지 않아 그 채권자는 ‘그것이 사실이냐? 정말 그렇게 해 줄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 집사님은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말하면 말 한대로 합니다>
그리고는 정말 집을 팔아 그 빚을 갚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변두리에 땅을 사서 다시 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변두리라고 하는 곳이 지금 한남대교 건너가자마자 보이는 리버사이드 호텔 바로 옆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곳이 서울 변두리였답니다. 저는 지금도 그 집사님이 저에게 해 주셨던 이야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집을 팔면 그 때 약속을 지키려고 팔았던 집 세 채 사고 조금 남습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중에 회사 임원으로 일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때문에 기업카드를 가지고 판공비를 쓰시는 분이십니다. 아주 여러 해 전에 기업카드를 가지고 공적인 일에만 사용하지 아니하고 사적으로도 사용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예수 믿는 사람으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일년 동안 사적으로 쓴 돈을 계산해 보니 대략 7천 만 원 정도가 되더랍니다. 힘들었지만 그 7천 만 원을 통장에 넣어 대표에게 드리면서 회사 판공비 중에 자신이 사적으로 쓴 것이 마음에 걸려 돌려 드린다고 이야기 하였답니다.
대표가 놀라면서 받기를 사양했답니다. 그리고 그 정도 일은 우리나라에서는 문화와 같은 것이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고 이야기 했답니다. 그래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니 할 수 없이 그 통장을 받았답니다. 그리고 다시 그 돈을 돌려주면서 그 돈으로 유학을 다녀오라고 하였답니다. 결국 그 집사님은 유학을 다녀오게 되었고 지금도 그 회사의 임원으로 잘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교인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이라는 것이 저는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 목사로서 다른 교회교인들만 가지고 설교를 하지 않고 우리 교회 교인 이야기를 하면서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저는 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이 이야기를 하면 또 빼놓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설렁탕 집을 하시는 우리 교회 집사님 이야기 말입니다. 설렁탕 한 그릇을 끓여도 예수님 대접하는 마음으로 끓인다는 말도 잊을 수 없지만, 그래서 모든 재료를 최고로만 구입하여 정성껏 설렁탕을 끓인다는 말도 잊을 수 없지만, 제가 늘 잊지 못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뼈를 공급하는 가게에서 실수를 하여 좋지 못한 재료가 왔을 때 그냥 눈속임하고 적당히 넘어가지 아니하고 가게 문을 닫으며 가에 문에 ‘오늘은 재료가 나빠서 장사 못 합니다’라고 써 붙여 놓았다는 이야기 아마 죽을 때까지 저는 잊지 못할 겁니다.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사촌 동생이 있습니다. 동생 회사를 한번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30대쯤으로 보이는 미국 직원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형! 저 친구 참 대단해. 사적인 용도로는 회사의 볼펜 한 자루, 종이 한 장도 안 써. 전화도 개인적인 전화는 회사 전화를 쓰지 않고 자기 핸드폰으로만 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사장이 이야기해도 자기는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다고 그냥 그렇게 고집을 부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해야만 하겠다고 속으로 깊이 다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사업을 하다가 부도로 진 빚을, 감옥생활도 하고 세상 말로 빚잔치도 다한 빚을, 채권자들도 받기를 거의 포기한 돈을 자신은 포기하지 아니하고 다시 사업을 하여 끝까지 그것을 갚는 장로님 두 분을 보았습니다. 두 분 다 다시 시작한 사업이 제법 되어 돈을 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빚을 갚는 데만 전력을 다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장로님 중 한 분이 한 이야기를 저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목사님, 빚 갚는 거 참 재미있습니다. 저 요즘 빚 갚는 재미로 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정직’만큼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거짓’ 하나만을 제거 할 수 있다면 세상은 그 자리에서 아름답게 될 것이고, 정말 그 자리에서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틀림없는 것은 천국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일 겁니다. 천국이 천국 되는 매우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는 정직입니다.
우리나라를 위하여, 아름다운 우리나라를 위하여, 살기 좋은 우리나라를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우리들이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우리나라를 정직한 나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로부터 그린스보로의 건축담당 공무원들로부터와 같이 한국 사람들은 정직하고 성실하다는 평을 받게 만드는 것입니다.
선진사회는 신용사회입니다. 선진사회에서는 신용이 생명입니다. 신용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후진 사회에서는 남을 잘 속이는 것이 요령이지만 선진사회에서는 정직하게 사는 것이 요령이라면 요령입니다. 우리나라가 정말 선진국으로 진입하려면 그 무엇보다도 ‘정직’을 훈련하고 연습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 동안 참으로 오랫동안 가난한 후진국이었습니다. 때문에 정직하면 오히려 손해를 보고, 바보가 되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적당히 요령을 피우고 거짓말을 해야만 살 수 있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아직도 그와 같은 면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더 이상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밤낮 우리는 후진국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나라의 생명이 정직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정직하면 바보 되고 손해를 보던 나라였고 아직도 그와 같은 면이 많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알면서도 용감하게 정직을 선택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직은 정직에 대한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감수해야 하기 면이 크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그래도 그만큼이나마 정직한 신용국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기독교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 때문이었습니다. 저들도 처음에는 우리와 다를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정직하면 바보 되고, 정직하면 손해를 보는 그런 나라와 사회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바보가 되기도 하고 손해를 보기도 하면서도 정직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저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그러나 결국 예수 믿는 사람들의 정직이 승리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회 전체를 정직해야만 살 수 있는 사회로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하여야 할 일이 바로 이와 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서구의 크리스천들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정직하려고 하였던 까닭은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저들도 세상을 보면 정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세상을 보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면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을 믿으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믿음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정직을 이야기하고 설교를 하면 많은 교인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이 세상을 몰라서 그래...>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교인들에게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분이 하나님을 몰라서 그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우리 교회만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한국교회와 나아가서는 세계교회 그리고 교회뿐만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섬기고 축복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와 같은 거창한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사실 그것은 그렇게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들이 정직한 삶을 위하여 노력하고 기도함으로 그것을 교회와 세상에서 실천하며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교회를 축복하고 나라를 축복하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하고 큰일은 아마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정직은 신용이고 신용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정직해야만 할 것입니다. 거짓의 원인을 캐보면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입으로 하나님을 부르지만 실제로는 세상만 보고, 세상만 신뢰하기 때문에 정직의 용기를 가지지 못하고 적당히 거짓을 행하며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사 네 대적을 몰수히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하신 아름다운 땅을 들어가서 얻으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리라> (신 6:18)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정직한 말과 삶에 도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의 증인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대로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복이 차고 넘쳐서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축복하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