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행위의 주체가 누구냐?
첫째, 행위의 주체에 따라서 다르게 익는다.
다시 말해서 그 행위를 누가 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주먹으로 툭 친 행위 자체가 과보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동료를 아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격려를 위해 쳤느냐, 증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미운 마음을 담아 쳤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즉 누가 쳤느냐에 따라서 과보는 달라진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한 여인을 사랑하는 두 남자가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 있어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사랑 표현은 감미롭고 행복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지만, 미워하는 다른 이의 적극적인 사랑 표현은 괴롭고 고통스럽기까지 할 수 있다. 동일한 행위에도 한 남자는 키스를 받을 것이지만, 다른 한 남자는 뺨을 맞게 될 것이다.
또한 행위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 행위를 했느냐에 따라서도 과보는 달라진다. 군생활을 하면서 마음 속으로 ‘군인은 사람을 죽여야 하는 자인데 내가 이런 군생활을 해도 될까?’라는 마음을 가지며 불안해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군인은 사람을 살리고 평화를 지키는 자’라는 의도를 가지고 자랑스럽게 군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다. 이 둘의 과보는 같을 수가 없다.
똑같이 식당을 운영하지만 그 의도가 ‘좋은 음식으로 사람들에게 공양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사람과 ‘싼 식자재를 쓰더라도 보다 이익을 많이 남기겠다’는 의도를 가진 사람의 과보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의식의 차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깨달음을 얻은 큰 스승과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이 똑같은 진리를 전달했을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주는 영향력은 다를 것이다.
똑같은 말과 표현을 했을지라도 자신이 존경하는 스승의 말은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남기지만, 평소 삶이 그다지 믿음직하지 못했던 사람이 준 가르침은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한다.
부처님, 깨달음을 얻은 큰 스님들이 하는 행위와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 하는 행위에는 이처럼 큰 차이가 있다. 깨달음을 얻은 자가 생명을 죽였다면, 심지어 그것은 살생의 과보가 아니라 생명을 도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중생이 생명을 죽였다면 그것이 작은 미물이라 할지라도 곧장 살생의 과보를 맺게 될 것이다.
처음 출가한 이는 계율을 지켜야 하지만, 깨닫고 나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저절로 삶 자체가 계율이 된다고 한다. 초심자는 작은 잘못도 계율을 어긴 것이지만, 깨달은 스님들은 계율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살지만 계율이 저절로 갖춰진다.
깨달은 사람이 이와 같다면, 우리는 어떨까? 사실 깨달은 ‘자’는 없다. 참된 깨달음은 ‘나’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깨달은 자가 아니라, 매 순간의 깨어있는 행위가 바로 깨달음이다. 깨닫지 못한 우리들 또한 어떤 의식으로 했느냐에 따라 과보가 다르게 익어간다. 깨어있는 마음으로 행할 때와 분별망상에 찌든 마음으로 할 때의 결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자녀의 행동을 보고 화를 낼 때, 화에 사로잡힌 채 화를 내는 것과 스스로 화에 사로잡히지 않았지만 깨어있는 마음과 방편으로 화를 내 주어야 할 필요성에 의해 화를 내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전자는 아이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후자는 아이에게 교훈을 남길 것이다.
이처럼 행위를 행한 자에 따라, 혹은 행위자의 깨어있음에 따라 그 행위는 전혀 다른 과보를 가져온다. 겉보기에 똑같은 행위일지라도 그것이 성스러운 행위가 될 수도 있고, 속된 행위가 될 수도 있다.
글쓴이: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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