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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에서 10·27법난을 맞다 - 그러시다가 제주도로 가셨어요? 10·27법난을 맞으시고요? 그걸 봉암사에서 맞았지요. - 그 얘기를 좀 해주시지요. 봉암사에 도범 스님이 주지였던 1980년에 제가 갔어요. 봉암사에 있었는데 어느 날 저녁은 군인들이 몰려들었다고 해요. 수좌들이 나가서 봉암사만은 군화발로 법당 못 들어온다고 굉장히 강경하게 막았지요. 어느 놈이든 들어오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해서 군인들이 봉암사에는 못 들어왔어요. 그래 가지고 봉암사는 아무 것도 못 가지고 가고 결국 그냥 돌아갔지요. 뒷날 보니까 서울에서 빨리 올라오라고 한다 해요. 그래서 봉암사에 대중공사가 붙었지요. 나는 “가지 말자. 서울이라는 데가 우리 수좌들이 견뎌낼 수 있는 그런 풍토가 아니다. 가지 말자” 했는데 나머지 대중들은 “봉암사에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으니까 일단 서울 사정이라도 알아 봐야지 않느냐” 해서 탄성 스님, 고우 스님, 적명 스님, 무여 스님, 휴암 스님이 다 올라갔지요. 그 후에 아예 수좌들이 총무원을 접수하여 개혁을 하게 되었지요. 나는 너무 속상해서 봉암사 위에 백련암이라고 있어요. 거기로 가버렸지요. 혼자 가서 날마다 나무를 해서 수북히 쌓아 놓고 장작을 하면서 살았어요. 한달 반 만인가 어느 스님이 와서 “스님! 관음사 주지로 발령났습니다” 해요. 그 길로 서울로 올라갔지요. 차라리 중앙에서 울력하더라도 할 거니까, 관음사는 안 된다고 연령도 미달이고 안 된다고 생떼를 썼지요. 했더니 며칠 있으니까 당시 정화중흥회의 상임위원장(총무원장)을 맡고 있던 탄성 스님이 오라고 해서 가니 적명 스님이랑 고우 스님이랑 같이 계시면서 “관음사가 꽤 많은 돈이 압수를 당했고, 또 수석이 많았는데 그걸 다 압수를 당해서 스님이 가야만 한다”, “신도들이 원하는 게 스님이니 잠깐만 갔다 오라”고 그래서 결국 내려갔지요. 어른들께서 하시는 말씀이라 하는 수 없이 임명장 받아서 내려가니까 바로 국회의원 선거예요. 그 때 정치권력에 당한 수모도 있고 해서 오기가 생겼어요. 마침 강보성씨라고 나중에 농수산부 장관도 한 이가 찾아 와서 자기가 불자이니 밀어 달라고 해서 확인해 보니 내외가 독실해요. 그래서 그분을 밀어 당선이 되었어요. - 관음사 주지는 언제까지 하신 거예요? 6개월 했어요. - 왜 6개월만 하셨어요? 가자마자 그 일을 해놓으니까 청년들이 좋아해서 몇몇이 제주도 전체에 불교유치원이 없다고 유치원을 하자고 하대요. 그래서 유치원을 세웠지요. 그런데 나중에 누가 주차장 만든다고 유치원을 없앴다던데 기가 막힌 일이죠. 그런데 하루는 봉암사에서 수좌들 몇이 왔어요. 오랜만에 만나서 돌아다니는데 역시 수좌들의 세계가 좋구나 싶은 생각이 나요. 얼마 후 은사 스님이 법회를 청하니까 오셨어요. 본사 주지 은사 스님인 일타 큰스님 오셨다고 강보성 씨도 오고, 도지사도 오고, 신도들이 많이 동참했어요. 그런데 은사 스님이 법문을 하시면서 “종단에 공부 유망주인줄 알았더니 야망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본사 주지 이런 거나 한다”고 내놓고 말씀하셨어요. 그건 그래도 기분만 나빴는데 하루는 유치원 아이 중에 하나가 다쳤어요. 새벽에 일어나서 108배를 하는데 그 애 어머니가 기억이 안 나요. 돈 많고 나한테 잘 해주는 아이 부모는 기억나는데 그 아이 어머니는 기억이 안나요. ‘우리 스님 말씀이 맞구나. 이건 수행이 아니라 내가 완전히 뭐가 되어가고 있구나, 중도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주지직을 다른 분에게 위임했다가 안 되어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 사표를 내고 6개월 만에 나왔지요. 그러니까 관음사 주지는 그저 한번 거쳤을 뿐이죠. - 그리고 어디로 가셨습니까? 지리산 칠불암 선원으로 가서 3년 결사를 했지요. 그 때 통광 스님이 불사를 할 때예요. 위에 선방은 조그마한 양철집인데, 그 양철집에서 살았지요. 우리나라 수좌들이 남한 오대산, 설악산, 지리산을 평하기를 오대산은 워낙 흙이 많고 덕이 많고 약초가 많고 산나물이 많이 나서 불보살산이라고 해요. 적멸보궁도 있고 동대, 서대, 남대, 북대 오대가 있을 정도로 워낙 풍요로운 불보살산이라고 하지요. 지리산도 그렇게 풍요로워요. 지리산은 워낙 웅장해서 마치 제불보살산 같다고 하거든요. 그 지리산의 웅장함이 좋고 그 때는 칠불 선원이 양철집이고 보잘 것 없었지만 통광 스님이 워낙 밑에서 신심있게 기도하면서 불사하는 게 좋아서 3년 결사를 했어요. 그 때 축서사 무여 스님, 송광사 유나 현묵 스님이 같이 사셨습니다. 제주도 남국선원 창건 이야기 - 제주도 남국선원 창건한 인연을 좀 들려주십시오. 송광사에서 3년 결사를 할 때인데 내 사형 스님께서 지금 제주시 남국사가 그린벨트에 묶인 줄 모르고 불사를 시작했다가 워낙 문제가 많으니까 당신이 떠나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절 신도님이 나를 데리러 송광사로 온 거예요. 나는 결사 중이라 못 간다고 하니까 결사 끝날 때까지 자기는 기다리겠다고 해요. 결사가 끝나고 문경 대승사에 가 있으니까 거기에 또 왔어요. 해제하고 가 보니까, 남국사는 터가 아니에요. 이런 저런 인연으로 지금 터에 남국선원을 지은 거지요. 한번은 내가 수도암에서인가 결사라는 말을 안 붙이고 3년을 살았는데 거기를 제주 불심행보살이라고 남국선원 창건주가 와서 “스님, 남국선원에 선방 하나 지읍시다” 해요. 그래서 나는 업이 많아서 생각이 없다고 했는데 성철 스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어요. “니, 고향 제주도지?” “예.” “제주도에 절이 없지?” “스님! 100개가 넘습니다.” “무슨 소리냐? 선방도 없는 게 절이냐? 앞으로 물으면 절 없다고 해!” 그런 말씀이 생각이 나도 나는 못한다 했어요. 그 다음에 가 보니까 그 보살님이 도장하고 주민등록증을 달라고 해요. 내 이름으로 돈을 한 달에 천만원씩 적금을 했는데 그게 7억원이 되어 다른 스님을 모시고 불사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이에 실명제가 되어 “스님 도장하고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안 됩니다” 해요. 내 이름으로 된 통장에 7억원이 들어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에 성철 스님 생각이 나면서 ‘할 걸 그랬나, 1년만 고생하면 제주도에 선방을 지을 수 있는데……’ 그런 생각이 났어요. 7억원이면 아무 걱정 안 하고 하나 지을 수 있는데 싶었던 거예요. 그런데 얼마 후에 그 신도님이 왔길래 도장들 달라고 하니까, “다른 스님 모시려니까 도저히 안 되어 못 찾았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그러지 말고 합시다. 나 도장 주고 후회했소” 그러니까 좋아해요. 그래서 1991년도에 수도암 3년 결사를 끝나고 가서 남국선원을 짓기 시작해서 1994년도 개원했으니까 지금 딱 10년이 됐네요. - 그 신도님 참 대단하시네요. 그런 시주 인연이 오늘 제주도 유일 선방, 그것도 무문관을 지으셨네요. 그 분이 남국선원 명실 공히 창건주예요. 강불심행이라고 제주도 분이에요. 재산이 그리 많은 분이 아닌데 신심으로 하셔요. 지금 70대 중반이지요. 그러니까 돈 7억원에 넘어가서 지은 게 남국선원이에요. 그런데 해놓고 나서 수좌들이 무문관에서 몇 년씩 안 나오고 잘 지내니까 잘 지었다 싶기도 해요. 충주 석종사 중창 이야기 - 내친 김에 석종사 불사 인연도 들려주시지요. 석종사 불사 인연은 길어요. 내 맏상좌가 있는데 아버님이 이북에서 와서 친척이 아무도 없고 어머님이 아들, 딸 8남매를 낳았지만 다 죽고 자기 하나밖에 없어요. 그런데 어머님이 교통사고가 났는데 아무도 간병할 사람이 없어서 참 곤란한 상황이였어요. 그 때 내가 무슨 마음에서인지 맏상좌 보고 “니가 공부해서 사십 전에 견성하면 내가 너희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했더니 자기가 사십 전에 견성하겠다고 해요. 그 때는 봉암사에 살던 때인데, 남국선원 불사도 안했을 때라 어디 갈 곳도 없어요. 참 곤혹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어요. 어떤 하얀 옷을 입은 스님이 내 뒤에서 나왔는지 내 몸에서 나왔는지 앞에 딱 서더니 “아이고, 중 노릇이 시원찮으니 전생에 살았던 데도 모르는구만!” “예? 그게 어딘데요?” “죽장사도 몰라?” 그러면서 탑이 보이고 절이 보이는데 이 절이에요. “저기가 어디예요?” “중원 땅 살던 것을 잊어버렸어?” 꼭 도반이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래요. “어떻게 찾아가는데요?” “인연 따라서 아침에 떠나봐.” 그래서 아침에 봉암사를 떠났어요. 걸어서 가는데 버스가 와서 손을 들었는데 충주 가는 버스예요. 그래서 충주에 가서 내리니까 산천초목 부동산이 있더라고요. 거기에 가서 탑이 있고 이러한 데가 있느냐고 하니까 그 사람 얘기가 3년 전에 이미 나온 게 있는데 아직 안 팔리고 있다는 거예요. 가 보니까 조그마한 옛 탑이 있는 폐사지인데 내가 살던 데라는 게 확 드러나요. 세상에 내가 이 터를 몰랐구나, 조그마한 탑이 고려시대 거라고 해요. 그래서 보니까 내가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주인을 만나 우여곡절 끝에 샀지요. 사고는 상좌 어머니를 모시고 단둘이 살기가 안 되어서 비구든 비구니든 아들, 딸 하나 밖에 없는데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갈 데 없는 노인들을 모셔다가 내가 보림(保任)하는 셈치고 여기에서 한바탕 살겠다고 해서 모인 분이 다섯 분이에요. 그런데 할머니들이 외로워 하길래 부모 없는 아이들을 학교공부를 시키는 게 좋겠다 싶어서 다섯 명을 모아서 같이 살기 시작했어요. 그 때는 오두막으로 시작해서 한 800평이었어요. 그렇게 살다가 불사를 하려고 해도 공원지역에 묶여서 못했어요. 3년 전에야 풀려서 그 때부터 이렇게 시작을 해서 지금은 10만평으로 늘렸지요. 남국선원 무문관 조성 이야기 - 다 복이고 법력이십니다. 제주도 남국선원 선방을 하실 때 처음부터 무문관을 생각을 하신 건가요? 그건 내가 옛날 천축사 무문관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어려서 안 된다고 못 들어갔거든요. 아예 상대도 안 해줘요. 어거지 쓰다가 혼만 났거든요. 내가 어디 들어가려고 해서 못 들어간 게 처음이에요. 그래서 ‘두고 봐라. 내가 언젠가는 한다.’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무문관을 했지요. 무문관을 만들고 직접 1년을 살아 봤지요. - 지금은 방에 몇 분이 계신지요? 방이 7개예요. 언제든지 7명이에요. 한번 들어가면 1년은 지나도록 하고 있어요. 그래도 너무 밀리니까 그 옆에 있는 간이시설 방도 같이 해서 여덟 분도 되고 아홉 분이 되는 거지 방은 7개예요. 1층이 무문관이고 2층은 대중 선방이지요. - 무문관 들어가려는 분이 몇 년 치 밀려 있다고요? 지금도 6년치가 밀려 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1년 만에 나와 줘야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데 지금도 어느 스님은 4년째 되도록 안 나와요. 한번 들어가면 그렇게 안 나오니까 자꾸 밀려요. 그래서 요새는 내가 인심도 잃어요. 안 나오려는 사람을 나와라 할 수도 없고, 들어가려는 사람은 왜 자기는 안 넣어주느냐고 그러고 아주 난처할 때가 있어요. 그래도 공부 때문에 그러니 얼마나 좋아요. - 한번 들어가면 약정한 대로 내보내는 게 아니고 더 있고 싶다고 하면……. 더 있고 싶은 사람은 더 있고, 1년이 되기 3일전에 얘기해 주지요. 그런데 자기는 안나가겠다고 하고 문을 다시 잠그면 또 1년이고, 그러다 보니 뒤에 밀리고 밀리고 해서 들어가서 1년 만에 나와 주는 사람이 30%가 안 돼요. - 굉장히 좋은 모양이네요. 좋다고 해요. 그래도 나는 만족하지 못해요. 여기는 무문관과 대중선원을 겸해서 섞어서 혼합하는 형태로 하려고 생각을 하는데 언젠가 다시 한번 하게 되면 바꿀 생각이에요. 그런데 수좌들은 좋다고 그래요. 나중에 석종사에 만약 무문관을 한다면 조그마하게 원두막처럼 해서 한 사람씩 주고는 밥은 못 갖다 준다, 밥 먹으러 왔다가 말을 하거나 그릇을 깨뜨린 사람은 나가고 밥만 먹고 들어가고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을 구상하고 있어요. 남국선원 무문관 수좌 방광 이야기 - 남국선원 무문관에서 방광한 수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직접 목격하셨다고 하던데 그 이야기를 좀 들려 주십시오. 남의 방광 얘기 들어서 뭐하게요. 자기 방광이 나와야지……. 벌써 여러 해 전이지요. 나는 2층 방을 쓰고 행자 하나가 아래 사무실 1층을 썼어요. 창문이 선방쪽으로 나 있어요. 하루는 9시 반인가 10시 되었는데 바깥이 환해 오더라고요. 문을 열었더니 선방 앞 무문관에서 불기둥이 세 곳에서 올라와서 뱅뱅 돌아요. 기분이 이상해요. 내려가서 신도들을 깨울까 하다가 성철 스님이 “남의 방광이나 쫓아다니는 새끼 자기 방광을 못 찾고 ……. ” 하시던 말이 생각나서 남의 방광 찾아다녀서 뭐 하겠나 하고 문을 닫았지요. 그 때 그 행자가 문을 열어본 거예요. 행자가 못 견디지요. 쫓아가서 보살님들 빨리 나오라고 해서 나오니까 무문관에서 불길이 올라와서 뱅뱅 도니까 엉엉 울고 절을 땅바닥에 하고 ……. - 불기둥이 올라와서 그 위에서 휙휙 돌고 있어요? 살살 도는데 뭉게뭉게 도는 것이 안개가 피어나는 것처럼 멈춰 버렸어요. 희한해요. - 그 방광한 수좌는 어찌 됐습니까? 그 수좌가 얼마 후에 자기는 다 마쳤다고 쪽지가 나왔어요. 내가 문 열고 들어가서 “다 마친 소식을 일러 보라” 하니까, “여여하고 여여한데 뭘 이르라고 하느냐?”고 해요. 내가 안 됐지만 귀싸대기를 올리면서 “여여하다는 놈 따로 있고, 여여한 경계가 따로 있는데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느냐? 여여한 경계는 그만두고 여여한 놈이나 내놓아 보라”고 하니까 “다만 모를 뿐이다”고 얘기해요. 거기에 속았어요. 서옹 스님께 가라고 했는데 서옹 스님께 갔는데도 똑같은 대답을 했다고 해요. 서옹 스님이 “이 사람아, 여여한 게 따로 있으면 어떻게 해 여여하다는 놈이 따로 있고 여여한 것이 있으면 이미 주객이 나뉘어 있지 않은가?” 하셨데요. 그래서 이 사람이 거기에서 다시 들어온다고 연락이 왔길래 들어와 봐야 되지 않고, 또 방에 이미 다른 사람이 들어가 버려 아무리 말해도 안 나와요. 그래서 지리산 쪽으로 갔지요. 선원 운영에서 어려움과 개선 방향 - 스님께서는 전국 선원장회의 대표를 맡으셨던 것으로 압니다. 선원을 운영하시는 입장에서 현재 종단 선원에 문제가 있다면 어떤 것이며, 혹 개선 방안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지난 해까지 전국 선원장 스님들이 친목 등을 위해서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국선원수좌회와 중복되는 점도 있고 해서 단일화하기로 하여 지금은 수좌회로 통합되었죠. 선원은 우리 종단의 종지종풍의 산실로서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하안거, 동안거를 정기적으로 전국 90여 개 선원에서 2천여 명이 넘는 수좌들이 대중생활을 하면서 정진한다는 것은 한국불교의 자랑입니다. 이런 전통은 세계에 내놓을 자랑거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하겠지요. 다른 한편으로 문제도 있습니다. 법으로 볼 때 방장, 조실 스님께서 상당 법문이나 소참 법문을 자주 하시고 면담을 통해 수행자의 발심을 촉발시켜 주는 역할이 점점 미미해지고 있는 문제가 있지요. 또한 차담, 해제비 등등에 신경쓰는 풍토도 문제입니다. 선원장 스님들이 모이면 이런 문제를 염려하고 토론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전국 선원 공동청규를 제정하자는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 석종사 선방이 완공되면 나름대로 선원 운영을 새롭게 해 보려합니다. 선방에는 차담실을 없애고 차담은 밑의 공양간에서만 하도록 할 생각입니다. 또 수좌가 공부 중에 몸이 아프다거나 치과에 갈 경우 일체의 비용을 사중에서 책임을 지도록 해서 해제비 등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공부만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갈 생각입니다. <간화선 수행지침서>와 관련하여 - 스님께서는 간화선 수행지침서 편찬위원장을 맡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이 불사와 관련해서 말씀을 좀 해주십시오. 전국 선원 수좌회와 선원장 스님들이 협의하여 간화선 수행지침서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선배 스님들께서 젊고 추진력이 있다고 해서 맡으라 하셨습니다. 실무는 교육원 불학연구소가 맡고 있는데 아마도 내년 초까지는 지침서가 나올 것 같습니다. 작년부터 논의를 시작해서 올 여름에는 여기 석종사에서 그 무더위에도 1박2일 동안 두 차례나 토론을 하여 대략적인 윤곽은 잡았습니다. 제가 출가해서 스님들이 모여서 그처럼 열성적으로 자료를 보고 토론하여 내용을 정리해 가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침 7시부터 시작해서 밤 12시 넘어까지 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이 불사를 반대했습니다. <육조단경> <서장> <선요> 등 조사어록에 다 나와 있는데 뭘 또 만드느냐는 그런 생각을 했는데, 요즘 제3수행법이나 달라이라마, 틱낫한 스님들의 법문집이 세상 사람들에게 많이 보급되는 반면에 우리 조사어록은 한문투로 되어 있어 너무 어렵게 받아들이는 문제가 있어 생각을 바꿨습니다. 돌아보면 고려시대에 10여 개 종파가 융성하다가 조선시대 선교양종으로 다시 종단이 해체당한 시대에도 면면히 간화선은 이어져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수행 전통 중에서도 간화선은 불교를 가장 빛나게 하였고, 가장 핵심적인 수행법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산중 선원에서는 간화선이 주류인데 일반에는 너무 어렵게들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선원장 스님들이 의논하여 현대적인 결집을 하듯이 간화선을 체계적으로 알리는 불사를 해보자 하여 지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것이 많겠지만 현대인을 위하여 그렇게 체계를 잡아 내놓고 자꾸 보완해 나가면 간화선을 널리 알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 지난 해와 올해 여러 방장, 조실 스님들께서 서로 약속한 듯이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제 수행자를 제접하고 지도하는 몫은 선원장급 스님들에게로 넘어 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한 말씀해주십시오. 세월이 어느덧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큰스님들께서 저렇게 가시니 이제 60대와 50대 후반의 선원장급 스님들이 역할을 대신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성철 큰스님이나 서옹 큰스님 같은 분들도 50대에 방장, 조실을 맡으신 분들입니다. 성철 스님께서도 해인총림 방장에 취임하신 것이 오십여섯인가 그랬지요.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수행력, 법력의 문제이지요. 아무튼 시대가 요구하니까 잘 해나가야겠지요. 간화선이 왜 최상승이고, 세상에 어떤 도움이 됩니까? - 간화선을 실참하시고 지도하시는 분들께서는 “간화선이 최상승(最上乘)이다, 지름길이다”라고 한결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왜 그런지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 이해를 합니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역사학자 토인비가 이렇게 말했다지요. “불교가 서양에 전해진 것은 지금까지의 서양의 사상철학이 의식세계를 다루었지만, 불교사상은 의식세계, 생각의 한계를 넘어선 가르침이기 때문에 호응을 받을 것이다.” 선이란 생각의 세계를 초월해서 말길이 끊어진 세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언어문자나 논리를 넘어선 세계를 자기 마음에서 바로 깨치는 길을 일러주기 때문에 최상승이다, 지름길이다 말합니다. - 세상은 점점 더 혼란스럽고 혼탁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참선이 이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습니까? 한 말씀해 주십시오. 이 세상은 본래 혼탁한 것도 아니고 혼란하지도 않습니다. 혼탁한 것은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을 다 차지해도 만족할 줄 모른다고 합니다. 흔히 우리는 마음이 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잠재의식입니다. 그래서 잠재의식을 바로잡아야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지요. 우리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이 잠재의식의 세계가 있는데 이 잠재의식을 바로 해야 운명이 바뀝니다. 참선은 바로 이 잠재의식을 바로잡아 운명을 개척하는 길입니다. 모든 문제를 내 안의 문제로 보고 내 마음을 바로 해서 업력과 잠재의식을 바꿔 나가면 세상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끝> |
첫댓글 참선은 바로 이 잠재의식을 바로잡아 운명을 개척하는 길이다. 모든 문제를 내 안의 문제로 보고 내 마음을 바로 해서 업력과 잠재의식을 바꿔 나가면 세상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연두님! 감사합니다..._()()()_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