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당시 사회상 및 일대기 요약 ] 1500년 중반 유림의 세력이 동서로 양분되기 전에는 동인의 시조로 불리는 이황(1501~1570)이나 조식(1501~1572) 서인의 시조로 불리는 이이(1536~1584)나 성혼(1535~1598) 간에 서로 제자를 교류시켜 서로간의 이론상 장단을 논하고 토론하는 일이 많았다. 서로의 장점을 말해주고 단점을 논하며, 그것을 보충하는 일이 꾸준히 이루어지면서 주자학의 주자는 중국사람이지만 최고 주자학의 완성자는 조선인으로 중국의 학자들도 인정하였다.
한 세대 뒤의 인물들인 이산해,윤두수,정철의 대가 시작되면서 스승의 이름을 팔아 당을 짓고 서로 잘 만나지 않고 만나면 서로 잡아먹지못해 안달하고 싸우니 조선의 성리학 발전이 크게 별질되었다.(임진왜란 전후)
[ 사색당파 = 붕당정치는 처음에 동인(東人) ·서인(西人)으로 분열한 데서 비롯하여, 뒤에 동인이 남인(南人) ·북인(北人)으로 갈라지고, 서인은 다시 노론(老論) ·소론(少論)으로 분열되었다. 북인은 광해군이 쫓겨나면서 몰락하였고, 남인은 숙종 때의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세력을 잃었다. 소론은 영조 초기 이후부터 세력이 약해졌으며, 노론이 비교적 오래 정권을 유지하였으나, 영조와 정조의 당론탕평책(黨論蕩平策)에 의하여 이전처럼 크게 득세하지는 못하였다. ]
김면은 동서 양당으로 나뉘기전 황소를 타고다니던 깐깐쟁이(철저한 자기절제와 절대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음) 조식의 밑에서 글을 배웠고, 김면의 공부가 정진되자 조식은 이황의 문하에 집어 넣어 더 배우게 하였다.
명종때 김면의 학식이 알려지면서 효렴에 천거되어 저절로 참봉이 되었는데 과거가 아닌 천거는 음서와 같은 것인지라 조선 문인의 창피꺼리 이므로 스스로 사퇴하였다. (음서=고려·조선 시대 부(父)나 조부(祖父)가 관직생활을 했거나 국가에 공훈을 세웠을 경우에 그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특별히 서용하는 제도)
선조때 다시 천거되어 공조 좌랑에 임명되었지만 이때는 관직에 뜻이 없어 상소사퇴를 내고 관직에 나가지 않으니 임금도 뜻을 받들어 다시 부르지 않았다.
임진년에 이르러 임진왜란(1592.4.13~1598.11.19) 터지자 만석군이던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았으며, 이로인해 집안은 거덜이 나서 거지꼴이 되었다. (초기 의병수는 2000명으로, 집안에 부리던 종 700명에 모집한 종 1300명이었다)
5월에 융복을 만들어 입고, 다음해 3월까지 숨질때까지 벗질 않았으니 온 몸은 땀띄에 짓무른 상태였다.
싸움에 임할 때는 대장으로서 몸을 아끼질 않고 선두에 나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토산을 지을때도 몸소 흙을 퍼서 나르니 병사들이 따르되 안쓰러워 했다. -. 김면장군 주요 전과 => 1592.06.06 : 무계에서 일본군 100명을 죽임 => 1592.07.10 : 우척현 일본군 격퇴 => 1592.08.03 : 거창 일본군 패주 => 1592.08.21 : 금산(영규대사),경주성(경상좌병사 박진)이 패전하며 성주성에서 퇴각하여 2차 성주전투 준비(의병장 김면) => 1592.9.10~11: 2차 성주성 전투에서 일본군 격파 => 1592.12.7~14 : 3차 성주성 전투에서 승리 -. 임진왜란 전투시 명장 .주요 의병대장 : 곽재우 ( 1552 ~ 1617 ) : 김 면 ( 1541 ~ 1593 ) : 영규대사 ( ???? ~ 1592 / 밀양박) : 장사진 ( ???? ~ 1592 ) .주요 관군 : 권율 (도원수/절재사 1537~ 1599 ) : 김명원 (도원수 1534 ~ 1602 ) : 김시민 (진주목사 1554 ~ 1592 ) : 원호 (여주목사 1533 ~ 1592 ) : 윤두수 (좌의정 1533 ~ 1601 ) : 이순신 ( 3군통제사 1545 ~ 1598 )
먹는것은 의병 모두가 다 먹은 것을 확인하고 먹고 잠도 일이 다 끝나고 모두 잠 든 것을 확인하고 누웠으며 일어날때도 가장 먼저 일어나니 사람의 몸으로 탈이 안날수가 없었다.
1593년 3월 과로로 쓰러진후 다시 일어나질 못하고 숨을 거두니 그날이 음력 3월 11일이다. 숨진 곳은 금릉군 하리의 군 막사 안이었는데 장군의 유언은 "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적이 아직 앞에 있으니 나의 죽음이 적의 사기를 높일까 두렵구나!!!"
그리고 붓을 들어 시를 한줄 적었다. "지금까지 나라가 있는줄 알았지만, 내 몸이 있는 줄은 진정코 몰랐구나"
자= 지해(志海) 호= 송암(松庵) / 저서=송암실기 / 제향=고령 도암사 / 병조판서, 이조판서에 추증
[ 유적지 ] 소재지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 16 (경상북도 기념물 제76호)
[義兵大將(의병대장) 松庵 金沔(송암 김면) 유적지 전경]
조선 선조 재위(1567∼1608) 때의 의병장이면서 학자였던 김면(1541∼1593)을 모신 유적지이다.
高陽府院君 金南得(고양부원근 김남득)선생의 8세손이며 慶源府使 金世文(경원부사 김세문)선생의 아들로 이조 중종 36년(1541)에 태어났다.
[義兵大將(의병대장) 松庵 金沔(송암 김면) 유적지 2]
寒岡 鄭逑(한강 정구)선생과 가까이 지내며 退溪 李滉(퇴계 이황)선생의 문하에서 性理學(성리학)을 연마하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후에 孝廉(효렴)으로 천거되어 參奉(참봉)으로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다시 遺逸(유일)로 천거되어 工曹佐郎(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퇴하였다.
[道巖書院(도암서당)]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령과 거창에서 의병을 모아 적을 물리친 공으로 합천 군수가 되고, 의병대장의 칭호를 받았다. 선조26년(1593)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충청, 전라도 의병과 함께 적을 격퇴시킬 준비를 하다가 과로로 병에 걸려 자신의 죽음을 발표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義兵大將(의병대장) 松庵 金沔(송암 김면) 유적지 3]
왕이 장군의 죽음을 슬퍼하여 병조판서에 명하였고 선조40년(1607)에 다시 선무공신에 기록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선생의 저서로는 常平錄日記(상평록일기), 三綱略(삼강략) 2권, 心遺誌(심유지) 3권, 易理誌(역리지) 3권, 奉先儀(봉선의) 2권, 律禮誌(율례지) 2권, 그리고 시문집 등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후 鄭仁弘(정인홍)이 수사관으로 있으면서 모두 거두어 들여 아깝게도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송암실기 3권'이 남아있다한다.
[義兵大將(의병대장) 松庵 金沔(송암 김면) 유적지 4]
관련 유적으로는 그의 생애를 적은 신도비와 도암서당, 도암사당 등이 있다. 道巖書堂(도암서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의 木造瓦家(목조와가) 맞배지붕이다.
神道祠(신도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木造瓦家(목조와가) 맞배지붕으로 1667년에 창건된 것을 大院君(대원군) 서원철폐시 훼철되었다가 1978년 다시 건립한 것이다.
[장군의 묘로 오르는 길]
당시 의병들이 관의 통제를 받지 않고 專斷(전단)하니 장군이 말하길 "관의 절제를 받아야 하며 오직 義(의)에 돌아갈 뿐이다."라며 당시 가장 유명한 의병대장 郭再祐(곽재우)의 전단을 충고하였다 한다. 후에 곽재우가 장군을 만나고 난 후 말하길 "영남을 보존할 분은 이 분 뿐이다."라며 그의 인품에 탄복하였다한다.
[松庵 金沔(송암 김면) 묘]
선조가 그의 장한 공적을 듣고 勤王(근왕)토록 명령하자 의병과 백성들이 통곡하기를 "金將軍(김장군)을 잃으면 영남일대는 보존하기 어려우리라"하니,
당시 監司 金誠一(감사 김성일)이 狀啓(장계)를 올려 유임을 청하니 왕도 허락하고, 1593년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하니 충청, 전라의 의병과 함께 금산, 개령에 進駐(진주)하면서 선산의 적을 칠 준비를 마쳤으나 쌓인 피로로 병사하니 장성의 三軍(삼군)이 눈물을 삼키고 감사 김성일은 "장성이 무너지도다. 국사가 틀렸도다."라고 탄식하였다 한다.
[松庵 金沔(송암 김면) 묘]
장군의 무덤 앞에는 묘비와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 2기와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묘에서 내려다 본 유적지 전경]
성주성 공략의 선봉에 섰던 의병장 김면은 의병군을 일으킨 뒤 大戰 10餘合(대전 10여합)에 30여 차례나 적을 물리치고 여러 달 동안 衣甲(의갑)을 풀지 않았으며, 싸움으로 인하여 만석군의 가산을 모두 탕진하여 처자가 거창 부근에서 떠돌아다니며 문전걸식을 하였는데도 한번도 찾지 않고 오로지 국사에만 전념하였다한다.
그러나 끝내는 전장의 과로로 병을 얻어 1593년 3월11일 금릉군 하리의 한 병영 막사에서 숨을 거두셨다.
[묘 뒤에서 안산을 바라보며...]
숨을 거두시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시에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대장부의 기개와 숨은 회한같은 것이 아픔으로 전해져 왔다. 只知有國(지지알국) 지금까지 나라 있는 줄은 알았지만, 不知有身(부지유신) 이 한 몸 있는 줄은 몰랐네.
이렇게 나라를 위하는 충정은 나라만 위하느라 자신의 몸과 가족은 미쳐 돌아볼 줄 몰랐다는 회한의 말씀을 듣는이로 하여금 가슴 저미게도 하지만...
선생의 위대한 행보는 한 줄기 서늘한 광명처럼 우리들의 앞길과 앞으로의 위대한 조국의 광영에 환한 빛으로 길이길이 빛나시리라.
[神道碑(신도비)]
그 후 현종7년(1667) 地方士林(지방사림)이 고령읍에 추모사당을 건립하였고, 정조13년(1789)에 현 위치로 옮기면서 神道碑(신도비)를 건립하여 그의 높은 충절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있다.
神道碑(신도비)문은 蔡濟恭(채제공)이 찬하였다. 선생은 고령군 쌍림면에 있는 道巖書院(도암서원)에서 향사하고 있다
<임진왜란> 1. 시기 : 1592년~1598년 2. 원인 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통일 2) 정명가도(=명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조선에게 길을 열어달라는 요구) 3. 명장 1) 육지에서의 전쟁
2) 바다에서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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