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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택하신 민족
신 7:1-11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3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5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11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신 7:1-11 / [타락의 예방] 여러분은 이제 곧 요단강을 건너가서 여러분의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직접 여러분을 그 땅으로 인도해 주시고 여러분 앞에서 많은 민족들을 쫓아내실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일곱 족속으로서 여러분보다 인구도 더 많고 힘도 더 강한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입니다. 2)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여러분의 손에 넘겨주어 그들을 쳐죽이게 하시면, 여러분은 그들과 어떤 평화 조약도 체결하지 말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무조건 그들을 전멸시키십시오. 3)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도 그들과 혼인을 맺으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처녀가 그곳의 총각들과 결혼을 해서도 안되고 이스라엘의 총각이 그곳의 처녀와 결혼을 해서도 안 됩니다. 4) 그렇지 않으면 그 며느리들이 여러분의 아들을 유혹하여 여호와를 버리고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분노를 폭발하시어 순식간에 여러분을 전멸시키실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이 할 일은 이것뿐입니다. 그들의 제단들을 허물고 그들이 섬기는 돌기둥의 우상들을 깨뜨리고 나무 기둥을 깍아 만든 그들의 아세라 여신상들을 찍고 그들의 신상들을 모두 불에 태워 버리십시오. 6)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소속된 거룩한 백성입니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만을 선택하여 주님의 소중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7) 그러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좋아하시고 여러분을 선택하신 것은 여러분이 모든 민족들보다 수가 더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가장 수가 적은 민족입니다. 8) 오직 주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약속을 지키려고 여러분을 선택하셨습니다. 오직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주께서 여러분이 종살이하던 땅에서 여러분을 데리고 나오시고 강한 팔을 뻗어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여러분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시요. 언제까지나 계약을 지키시는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모두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대에 이르도록 변함없이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0)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 벌을 내려 멸하십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지체하지 않고 현장에서 바로 그 본인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11) 그러므로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는 주님의 명령과 계명과 규정들을 그대로 모두 지켜 행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민으로 택하신 것은 그들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작고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약한 자를 택하여 세상의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고자 함입니다(고전 1:26-31).
차지할 땅에 들이시고(1-5) 본문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400년이 넘도록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신다고 재차 강조하십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들은 아세라 목상 등 조각한 우상을 섬기는 백성으로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신들을 섬기도록 유혹하는 족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보다도 숫자도 많고 힘이 센 족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쫒아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때 그들을 인간적인 생각으로 불쌍히 여기거나 그들과 혼인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2). 그들의 우상과 제단을 깨드리고 불사르라고 했습니다(5).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방의 우상들과 절대로 타협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에 대하여 유죄(有罪)을 내리신 하나님의 선고(宣告)에 의해서 악한 국가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엄중히 집행해야 할 거룩한 사명도 있습니다.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6-1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선민, 택하신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이유가 다른 나라 민족보다 인구가 많거나 강한 나라이기 때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7). 다른 민족보다 더 거룩한 삶을 살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선민이 되었다고 합니다(8). 이제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언약을 이행하고 인애를 베풀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9).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선민 곧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죄와 허물이 많아도 분명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라고 했습니다(벧전 2:9). 이처럼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의 선민이 된 것을 날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충성을 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1:20)
적용: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선민이 된 것을 믿나요? 믿어진다면 당장 나가서 이 사실을 간증하길 바랍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 분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버리신, 잃은 양을 찾는 사랑의 목자입니다. 그분의 다리는 긁힌 자국투성이입니다. 발에도 상처가 나서 피부가 벗겨질 정도입니다. 그분의 눈은 붉게 충혈 되었습니다. 그분은 절벽을 기어오르고 들판을 가로지릅니다. 동굴 속까지 헤매고 다닙니다. 두 손으로 손나팔을 만들어 골짜기를 향해 큰 소리로 외칩니다. 골짜기에서 메아리쳐오는 이름은 바로 당신의 이름입니다.
< 설 교 >
영원히 안전한 성벽
신 7:9-11 / 김홍도 목사
여러 해 전에 불란서에서 “마지막 방어선”이란 벽을 쌓고 그 이름을 “마지노선”(Maginof Line)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제1차세계대전 직후 독일군의 침공이 두려워 구축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일 강한 최신식의 무기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방어선을 결코 넘지 못한다”고 장담했지만 그것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영국이 싱가포르에 거액의 돈을 들여서 방어벽을 쌓고 바다를 향해 무기를 설치해 놓고 절대로 싱가포르는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지만 일본군이 몰래 들어와서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만든 방어선은 다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사탄의 맹공격 앞에 안전한 곳이란 절대로 없습니다.
어떤 이는 돈의 성벽 뒤에는 안전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돈이 아무리 많아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1929년에 어떤 사람이 은행에 많은 돈을 맡겨 놓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안전하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은행들도 문을 닫고 그 사람도 망했고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안전한 것이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런데 절대 안전한 곳이 꼭 한 곳 있습니다. 우리가 그 분을 의지하는 한 결코 우리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어떤 원수도 우리를 정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그의 말씀이 신실하심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반드시 완성하시고 말며 하나님은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1. 하나님은 창조에 있어서 신실하신 분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9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에 있어서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해와 달과 수억만 개의 별들을 하늘에 두셨지만 그것들은 자리를 이탈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것들이 서로 충돌한다면 하늘과 땅에 큰 충격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붙들고 계시며 완전하게 운영하고 계십니다. 모든 계절은 완전한 질서를 따라 오지, 겨울이 와야 할 때 여름이 오거나 가을 대신 봄이 오거나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지 절대로 팥을 거두지 않습니다. 만일 두 가지 화학물질을 결합시키면 언제나 같은 결과가 나오지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땅에서 금을 캐면 금이 나오지 그 금이 은이나 동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에 있어서 완전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이 법칙을 어기면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물질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세계에서 그 도덕적 법칙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것을 행하라 하면 반드시 그 결과를 거두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법칙을 어기면 자신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이가 있지만 십계명은 영원히 변함이 없고, 그 계명을 범하면 자신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여러분, 만일 십계명을 바꾸어서 “살인하지 말라”를 “살인해도 괜찮다”고 한다든지, “도적질하지 말라”를 “도적질해도 괜찮다”고 한다든지, “간음하지 말라”를 “간음해도 상관없다”라고 바꾸어 놓는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무질서하고 엉망진창이 되겠습니까? 이 십계명이 이 세상 모든 법의 기초가 된 것이며 영원히 변함없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주의 기원을 말할 때 불신자의 입장에서 가장 유력한 학설이 “대폭발”(Bing Bang)에 의해서 우주가 생겨났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빅뱅을 일으킨 물질은 어디서 났으며 또 어떻게 대폭발로 질서정연하고 정교한 우주가 생겨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쇠붙이들을 통에다 넣고 수 만 년 흔들어댔더니 이런 시계도 생겨나고 컴퓨터도 생겨났다는 것과 같은 억지 주장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지구가 태양과 조금만 더 가까이에서 회전하면 우리는 타죽게 되고 조금만 멀리서 회전한다면 우리는 얼어죽지 생명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구는 타원형이면서 23.5도 기울어진 채 24시간에 한 바퀴씩 자전하는데 이것도 10도만 기울기가 틀리면 덥거나 추워져서 우리가 살 수 없습니다. 이런 정교하고 섬세한 질서가 저절로 우연히 생겨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정교한 지혜와 설계로 창조하시고 운영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기독교 과학자 헨리 쉐퍼 박사는 스티븐 호킹(Steven Hawking) 박사보다 더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분이며 다섯 번이나 노벨 물리학상에 추천되었던 분인데, 쉐퍼 박사는 천체물리학은 창조주의 “정교한 조종”(fine tuning)에 관한 학문이라고 했고 우주야말로 하나님의 존재를 확고히 증명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예수님은 본디 하나님이시고 과거의 낡은 질서 가운데서 새로운 질서를 만드신 분이며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세상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은 변함이 없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2. 하나님은 인간을 부르심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9절에 “너희를 불러(calling)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faithful, 신실하심)”라고 하셨습니다. 이 “부르심”에는 두 인격이 있어야 하는데 “부르시는 분”과 “부름을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부르심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늘과 땅에서 엄청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흑암에서 빛으로 불러내시고 억압에서 자유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사망에서 소망으로 부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으로 부르십니다. 요한복음 1장 9절에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팔레스타인 지방을 다니시며 사람들을 부르신 것같이 오늘날도 성령을 통해서 온세상에서 사람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복음의 말씀 전파를 통해서 부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나 자기 영혼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살던 사람도 어느날 교회에 들렀다가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확신을 주시고 죄를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어리석어 보이는 복음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리석어 보이는 복음으로 사람을 지명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하여 한 개인을 부르시고 한 가정을 부르시고 한 민족을 부르십니다. 또 교회를 통하여 복음을 듣게 하셔서 사람을 부르십니다.
때로는 슬픔을 통해서 부르십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내세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살던 사람이라도 슬픔이 찾아올 때 하나님을 찾고 또다른 세계와 영원한 생명을 찾게 됩니다. 또는 하나님이 어머니의 기도와 사랑을 통하여 부르시기도 합니다. 어떤 젊은이는 집을 떠나 방탕하며 죄악에 빠졌다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알고 보니 그의 어머니가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을 불러 구원을 받게 하십니다. 어떤 때는 찬송 소리로, 어떤 때는 양심을 통해서, 어떤 때는 성경을 읽다가 구원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일을 봉사하다가 믿음의 확신을 얻고 구원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3.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에도 신실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거나 죄의 유혹을 받을 때에 때로는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끝장났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faithful, 신실하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유혹이나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일은 없고 시험을 당하고 유혹을 받아도 피할 길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빌딩마다 화재 날 때를 대비해서 나갈 수 있는 비상구를 준비하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을 받아도 피할 수 있는 길을 예비해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리를 건너다보면 표지판에 “몇 톤 이상은 건너지 못함”이란 글자를 보게 됩니다. 그 다리가 견딜 수 있는 무게 이상은 못 들어오게 하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를 아시기 때문에 사탄이 우리가견딜 수 없는 시험이나 고난의 짐은 가져오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4.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에도 신실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 회개, 자백했는데도 “정말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을까?” 하고 의심하기 쉽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faithful, 신실하심)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 불완전함을 알고 계십니다. 범죄할 때도 있고 실수할 때도 있고 시행착오를 일으킬 때도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범죄했을 때 치료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자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다보면 죄에서 돌아서게 됩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심에 있어서 신실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잘못하고 죄지을 때가 있지만 감사한 것은 위대하신 용서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용서에 있어서 신실하신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는데 신실하신 분입니다
사람은 약속을 안 지킬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열왕기상 8장 56절에 “여호와를 찬송할찌로다 저가 무릇 허하신 대로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그 종 모세를 빙자하여 무릇 허하신 그 선한 말씀이 하나도 이루지 않음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을 꼭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약속하시고 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애굽에 있을 때 나타나셔서 약속을 하셨는데 많은 세월이 지나서 솔로몬 왕 때에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깨닫고 솔로몬왕이 이를 찬송한 것입니다. 노아 홍수가 지난 후에 하나님은 무지개를 세워서 약속하시기를 “내가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후 수천 년이 지나도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지 않았습니다. 무지개를 볼 때 하나님은 신실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약속과 축복을 주실 뿐아니라 징벌(punishment)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나를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지면 너희를 이방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고 타락할 때 바벨론으로 잡혀갔고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었습니다. 그제서야 그 백성은 울며 탄식하며 슬퍼했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지고 범죄하면 벌을 주겠다고 하신 대로 벌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똑같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7분의 1을 거룩히 구별해 바치고 물질의 10분의 1을 거룩히 구별해 바치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아까운 생각을 버리고, 실천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온전히 믿고 순종을 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기적과 축복을 체험한 사람들이 수천 명도 넘을 것입니다. 약속을 믿고 꾸준히 하나님의 약속대로 살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체험할 수 있는데 순종을 안 하거나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축복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라기 3장 10절에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며 나를 시험해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를 꼭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6. 하나님은 대예언의 사건에 대해서 신실하신 분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에 예언하기를 “주님은 어느날 큰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더불어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때에 그리스도 안에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때에 살아 있던 크리리스찬들은 공중으로 휴거 되어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이 주시는 상을 받기 위해 심판대 앞에 서게 되고 큰 기쁨과 더없는 행복을 누리는 어린양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후에 예수님과 함께 지구로 돌아와서 천 년 동안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게 됩니다. 그 천 년이 찬 후에 구원받지 못한 악한 자들이 둘째 부활을 얻어 죄의 심판을 받고 죄지은 만큼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하늘과 새땅의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져서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영원히 누리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죄악과 질병과 전쟁의 불구덩이 속에 살며 슬퍼하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만 오면 이런 악한 것들이 우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그리고 그를 의지하면 영원히 안전합니다.
오스트리아의 한 사람이 부자가 되려는 큰 꿈을 안고 미국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사업해서 돈을 많이 벌어서 오스트리아로 돈을 부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내와 아이들과 딸은 행복했습니다. 몇 개월 후에 그만 그의 아내가 죽었습니다. 두 아이만 외롭게 남았습니다. 그 이웃사람이 어린 두 아이를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증기선 선장이 그 아이들을 돌보았습니다. 친구들을 뉴욕에서 만나 그 아이들을 기차에 태웠습니다. 그 어린 소년은 피곤하고 집 생각이 나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누나되는 어린 소녀가 두 팔로 감싸 안으며 말하기를 “울지마, 동생아. 오늘이 마지막 밤이란다. 아침이 오면 아빠를 만나게 된단다” 하고 위로했습니다.
여러분, 외롭습니까? 세상이 너무 슬프고 괴롭습니까? 친구가 실망시켰습니까? 눈을 들어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아침이 되면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영원한 안식이 찾아옵니다.
천대와 영생
신명기 7:9-11 요한복음 5:24-29 / 김삼환 목사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가 된 사 람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잠시 살지만 그러 나 영원히 사는 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땅에서도, 이 땅 을 떠나서도 늘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이 땅을 살고 늘 주님을 바라 보며, 위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앞에 있는 유익보다는 멀리 있는 천국을 얻 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어떤 어려움이 올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 영원한 약속을 믿으며 하 루하루를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멀리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위를 바라봅니다.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위에 계시기 때문 인 것입니다. 하루살이와 개미가 만나서 개미가 저녁에 말했습니다. ‘야, 내일 만나자.’ 그러니까 하루 살이가 내일이 어디 있냐고, 내일이 뭐냐고 했습니다. 하루살이의 생각으로는 내일이 도무지 이해가 될 수 없지만 개미의 입장에서 보면 내일은 확실히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천국과 영생이 없 고, 구원과 하나님이 없는 것 같지만 하루살이 인생으로 볼 때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 로 믿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눈으로 보면 천국은 하늘에 있고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 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선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구원이요, 영생인 것입니다. 성경에 말하기를 ‘구원은, 영생은 하 나님이 그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미국 대사관에 가면 비자를 얻으려 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의 주변에서도 벌벌 떠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 유, 이번에 안 되면 안 되는데 하고 모두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비자를 못 받습니다. 그 러나 대사관 창구에서 도장이 바로 찍힙니다. yes냐 no냐, 되냐 안 되냐 하는 것은 그 자리에서 당장 찍어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5년, 어떤 분은 10년, 어떤 분은 잠깐 다녀오는 비자를 찍어주는 것입 니다. 미국 가는 것이 중요한 가 봅니다. 제가 존경하는, 저를 가르쳐주신 총장님도 미국 가셔서 지금 5년째 꼼짝하지 않고 미국 시민권을 얻 으려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면 ‘야! 세상에 저렇게 훌륭한 분, 저렇게 공부 많이 하시고 국내 에서 잘 사실 수 있는 분이 5년 동안 가만히 기다리는 것을 보면 미국 시민이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 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 시민권은 기다려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공로나 노 력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창구에서 우리를 위하여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 께서 우리에게 도장을 찍어 주시면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 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갖고 있습니다. 비자를 내 몸에 갖고 있 듯이, 여권을 내 몸에 항상 갖고 다니듯이, 시민권을 내 몸에 품고 다니듯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 민권을 내 영혼에 ‘너는 구원함을 얻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다’라고 하는 확실한 주님이 주신 이 싸인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멀리 보지 않습 니다. 앞에 있는 유익 앞에 있는 것에, 순간적인 기쁨, 쾌락, 순간적인 감정에 모두 치우쳐 살아가는 것을 많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늘의 시민권, 천국의 시민권, 하나님이 주시는 천대에 이르 는 축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신문에 그런 것이 났습니다. 어떤 청년이 대학을 졸업하고 아무 리 노력해도 취직이 안 됩니다. 그래서 개 먹이는 집에 노력해서 그것도 겨우 취직이 됐습니다. 그런 데 개 주인이 나는 며칠 있다가 어디 출장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회를 잡았습니다. ‘오, 기회가 오는 구나.’ 그래서 그날 아침에 출장 간 다음에 이 청년은 바로 보신탕집에 연락해서 개 열 다섯 마리를 이 백 만원에 팔아 버렸습니다. 이 개는 보신탕에 가는 그런 개가 아닙니다. 보신탕에 가는 개는 그런 개가 따로 있습니다. 이거... 저... 거... 그렇게 기르는 그런 개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 개는 그 런 개가 아닙니다. 주인이 와보니까 사람도 없고 개가 열다섯 마리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칠천만 원 이라고 합니다. 열다섯 마리에 칠천만원 되는 것은 엄청나게 비싼 것입니다. 그렇게 보니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경찰에 신고해서 청년도 붙들리고 개도 보신탕집에서 찾았습니다. 왜 그러냐? 보신 탕 주인도 압니다. 자기 집에 잡는 그 개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상당히 비싼 개를 알고 놔뒀는데 마 침 다 찾았다는 것을 우리가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 청년이 공부 많 이 하고, 인터넷도 잘하고, 컴퓨터도 잘 돌리고, 대학 나왔지만 이 사람은 앞에만 보는 것입니다. 지 금 이 다음에 붙들린다는 생각을 안 합니다. 도망치면 그만이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사람뿐입니까? 오늘 이 땅에 앞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일 어떻게 되는 것은 괜찮습니다. 무사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일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밤새도록 도박하고, 밤새도록 술 먹고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행한 대로 당하는 것입니다. 믿음으 로 사는 사람은 믿음대로 될 것이고, 불의하게 살면 불의한 대로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결혼해서 아기를 차에 싣고 아침에 가서 아기를 차에 그대로 놔두고 PC방에 들어가서 종일 두 내외가 두 부부가 뭔 방인지 피시하다가 나오니까 그만 아기가 죽어버렸습니다. 질식해 죽어 버린 것입니다. 요즘 애들 어머니라고 하는 어머니들이 애만도 못합니다. 뭐, 그냥 오빠, 오빠 그러고 돌아다니다가 결혼해서 무슨 어머니로서의 그 책임과 사명감을 갖겠습니까? 없습니다. 차라리 병아리를 기르라고 그래 보십시오. 닭은 얼마나 병아리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데 요즘 아이를 버리고 그냥 장난감 같이 버립니다. 이번 국정조사에도 나왔습니다. 국정 감사에 여러분, 1년에 완전히 버려지는 고아로 만 완전히 두 부부가 다 버려서 집 없이 살아가는 아이가 1000명이 생겨난다는 것을 들어보셨을 것입 니다. 무슨 책임이 있습니까? 무슨 미래가 있습니까? 전혀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고 움직이는 현대인들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멀리보고 삽니다. 위를 보고 삽니다. 하나님을 보고 삽니다. 하나님을 믿고 삽니다. 영원한 축복, 영생을 얻기 위하여 살아가는 것 입니다. 내 말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천대에 은혜를 주신다는 약속,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 미암아 주시는 영생을 얻어 나와 함께 영원히 낙원에 이르고 구원에 이르리라는 주의 약속을 믿고 살 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우 리는 영육의 삶에 흔들림 없이 다 같은 은혜와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위를 바라보고 살아야 아래 도 잘 삽니다. 멀리 바라보고 살아야 가까운 것도 잘 삽니다. 영혼이 구원함을 얻고 영생을 얻어야 육 신의 삶에도 천대에 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육적으로 순간의 쾌락과 기쁨과 만족을 위하여 죄악의 길을 걸어가면 결단코 하나님 앞에 용서함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시고 우리의 행하 는 대로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벧전1:24에 보면 ‘모든 육체는 풀과 같이 그 모든 영광이 풀에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 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풀은 마릅니다. 풀은 영광입니다. 모든 인간의 육체인 것입니다. 육체를 자랑하지 마십시오. 풀입니다. 어떤 건강, 아름다움도 풀같이 사라집니다. 인간의 영광, 천하에 없는 물질의 영광이나 쾌락, 권력의 영광이 꽃과 같다는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의 말씀, 주님의 나라, 영생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 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은 지붕 위에 풀과 같다고 시편 129편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붕 위에 풀이 오래 살아야 뭐 기와집에 풀이 몇 년 살겠습니까? 커 봤자 입니다. 제 아무리 잘 나봤자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나님이 없는 사람, 불의와 죄악의 길을 살아가는 사람은 시편 1편 말씀과 같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잠시 잠깐 이후에는 없어지리라 고 시편 37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없어집니다. 떨어집니다. 육체는 쇠합니다. 사라지는 것입니 다. 영생, 믿음,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원한 줄로 믿습니다. 중국에도 역사가 우리보다 배나 긴 이런 엄청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긴 역사가 없습니다. 권력은 다 짧습니다. 진나라가 15년입니다. 위나라 220년에서 265년까지 45년에 그 강대국도 무너졌 습니다. 촉나라 42년입니다. 오나라 58년에 끝났습니다. 우리나라를 쳐들어왔던 수나라도 37년 만에 그 나라가 끝났습니다. 송나라, 제나라, 다 잠깐입니다. 어느 나라, 영광이라도 잠깐입니다. 중국 공산 주의가 중국에 언제 들어왔는지 여러분 모르시지요? 1949년에 들어갔습니다. 방지일 목사님이 50년 지나 거기서 나오셨습니다. 중국에 선교사들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949년에 공산주의가 들어와서 전 중국을 공산주의로 통일했습니다. 100년 정도 갈 줄 알았습니다, 1949년에, 48년에 다 망했습니다. 인민일보에 공산당 기관지에서 마르크스를 모두 비판해 떨어져 나갔습니다.
러시아 혁명 일어난 1918년이 얼마 안 됩니다. 그러다가 거기도 칠, 팔십 년 만에 이 스탈린 동상을 모 스크바에서 자기들이 끌고 갔습니다. 어느 권력, 어느 영광 오래가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공산주의 가 300년이라도 갈 줄 알았지 않습니까? 300년이 뭡니까? 중국 다 통일했는데도 40년 밖에 못 갔습니 다. 여러분, 이 세상에 어떤 영광 어디에 있어도 오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위에 하나님이 계 시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복을 내려 주셔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천년을 갑니다. 하 나님의 나라 교회는 이 천년동안 군대가 없어도 교회가 지켜지고, 재벌이 없어도 정부가 지원을 안 해 줘도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지는 것은 주님이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토록 축복 받는다는 말씀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영광, 어떤 줄에서도 그 영광, 풀에 꽃과 같이 떨어 지지만 믿음의 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께서 보호하십니다. 다윗의 자손이 영원 히 복 받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영원히 복 받듯이 끝까지 믿음으로만 살면 이 세상 어디에 가도 하나님 의 축복이 변함없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축복하십니다. 천대에 복을 내려주기를 원하시 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주시려고 교회를 세우시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 은 하나님께 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고 경외하며 살다가 이 땅을 떠나서 천국가야 할 줄 믿습니다. 의사이십니까? 천하에 없는 유명 의사일지라도 내 위에 온 인류의 저주와 질병, 생명 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돈이 있습니까? 내 기업이 큽니까? 이 기업 위에 온 우주의 기업을 관리하시는 전체 모든 기업을 관리하시는 참 부유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권력이 있습니까? 내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모두 내 마음대로 한다고 해서 내 세 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느부갓네살, 바벨론에 벨사살의 권력이 하나님의 뜻에 합 당하지 않을 때는 모두 버리셨습니다.
자기는 자자손손 누리려고 만반에 준비하지만 다 뜻대로 되는 권력을 하나도 본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 그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 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하신 왕의 왕, 통치자이시며 인간은 하나님께 속한 줄로 믿습니 다. 어떤 분들은 제사를 조상에게 지내는 것이 효도인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유교는 제사로 바로 이 해하는데 공자 선생님은 영생, 천국, 무슨 죽은 분에게 제사를 지내라는 말을 한 마디도 한 일이 없습 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오면서 샤머니즘과 접촉되어 제사로 발전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혼은 위로 가고 백은 아래로 간다고 해서 제사 날 돌아가신 날 혼백이 만난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면 혼백 을 대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 땅을 떠나면 하나님께 속하여 이 땅에 돌아다니지 않습니 다. 사람이 항상 돌아다니는 그런 혼이 돌아다니는 피조물인줄 아십니까? 하나님께로 가면 한 곳으 로 가게 되어져 있습니다. 하늘 아니면 지옥입니다. 영생 아니면 멸망입니다. 그렇게 가게 되어있는 것이지 전부 다 잠자리 같이 돌아다니는 줄 아십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사 지낼 때 저 도 뒤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모두 이렇게 잡수시라고 밥숟가락도 떠 놓고 국도 이러고 술도 받아서 이 렇게 잡수라고 그러지만 저는 뒤에 제사 안 지내고 이렇게 보면 먹는 것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뭐 어디 와서 잡수십니까? 공연히 그러는 것입니다. 공연히 그러는 것 그러면 와서 그 제사에 참여하 는 분은 조상이냐? 조상이 아닙니다. 땅에는 사람은 없고 악한 영들이 많기 때문에 악한 영이 와서 거 기에 참여할 뿐입니다. 악한 영은, 귀신은 나무에 빌면 나무에 있고, 돌에 빌면 돌에 오게 되어져 있습 니다. 어디든지 빌면 귀신은 오게 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제사 많이 지내는 종가 댁이 다 통- 통- 통- 통- 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귀신을 섬기기 때문에 그 집안이 망합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안동 김씨 종가 댁입니다. 우리 외할아버지가 무엇이라고 그랬는지 아십니까? 마 지막 유언을 내게 하셨습니다. 조상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그러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30번 이나 1년 간 제사를 지내는데, 밥도 먹을 것 안 주는데 무슨 놈의 귀신이 잡수면 먹을 거라도 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할렐루야! 귀신 섬기는 나라가 이 땅 위에 밥 먹는 민족이 없습니다. 다 거지같이 살 아가는데 어디를 섬깁니까?
우리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만 세세토록, 오늘 성가대 처럼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주님의 이름 주님의 나라 주님을 영원히 찬양하는 것 때문에 여러분 이 귀하고 그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여러분이 복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연산군은 우리나라에 임금님 이었습니다. 착하고 신실한 분이 권력을 가진 다음에는 얼마나 난폭하고 궁중을 온통 음탕한 궁중으 로 만들어서 안 하는 짓이 없이 매일 연락하고 주색잡기로 지냅니다. 성격은 강팍해서 무슨 이렇게 좋 은 소리로 정부기구가 다 올리게 된, 그런 기구 성균관 같은 것도 다 패쇄 시킵니다. 다 그런 것, 바른 말 하는 것은 다 패쇄 시키고 바른말 하면 다 죽이고 나중에는 어려서부터 가르쳐준 스승이 그 바른 말 한다고 해서 화살을 쏴서 바로 거기서 옆구리에 화살을 쏩니다. 그래서 이 신하가 그러지 않습니 까? 늙은 이 신하는 백번 죽어도 아깝지 않으나 다만 임금께서 오래 이 보좌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 한 이 됩니다. 그러니까 또 화살을 또 쏘고, 그래도 한이 안 차 가지고 있던 칼로 배를 갈라서 창자를 손 으로 꺼내지 않습니까? 여러분, 연산군이, 하나님 없는 사람, 앞만 보는 사람은 자기밖에 못 보는 것 입니다. 교만합니다. 강팍합니다. 그 분이 12년 밖에 더 못살았습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두 려워하고 겸손한 분이 오래 되고, 권력이 있고, 돈이 있다고 해서 나 혼자 잘났다는 사람은 어디서든 지 하나님이 심판하는 줄 역사 속에서 무수히 보지 않았습니까? 마귀에게 속한 사람은 천국도, 영생도 없습니다. 땅에 축복도 없습니다. 오직 그날, 그날 정욕을 좇아 살 뿐입니다. 앞에 있는 것을 따라 살 뿐인 것입니다. 앞에 있는 이익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길 은 성경에 있는 대로 롯의 길과 같습니다.
마침내 소돔성에서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열두 형제 와 같습니다. 후회하는 것입니다. 발람 선지자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도 명예와 권력, 물 질과 세상이주는 부귀 영광에 눈이 어두워 교회와 성전을 떠나고 하나님 백성을 떠나서 발람은 나중 에 선지자이지 만 사자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 앞에 택한 백성을 데리고 가서 성전 예루살렘까지 올라가면 예배가 너무 멀기 때문에 벧엘에 다가 단을 쌓아 가까이에서 예배드리게 쉽 게 하나님을 믿게 하다가 하나님께 버림 받았습니다. 예배는 쉽게 못 드립니다. 쉽게 사는 사람은 예 수 못 믿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하여 환란, 핍박, 어려움 이기고 믿으려고 해야 각오하고 믿어야 잘 믿 지 천국 가고 만대에 복을 받는 것이지 적당하게 쉽게 믿는 사람은 절대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여러 분, 군에 다녀오신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군에는 늘 행군하지 않습니까?
오늘 박노숙 장로님도 군단 장 출신입니다. 군단장입니다. 군에는 장군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병장도 장군입니다. 병장도 장은 장입니다. 아무리 별을 많이 달아도 당회장을 계급 가지고 보면 안 됩니다. 잘 알겠습니까? 네? 나는 하나님이 주신 별이 있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합니다. 군에 이제 가면 주로 행군을 많이 합니다. 완 전 무장하고 이제 항상 가는데 막 철모 쓰고 총도 들고 다 넣어 짊어지고 가면 너무너무 무겁습니다. 행군할 때 보통 20㎏, 뭐 이렇게 행군하면 어떻게 합니까? 신발이 중요합니다. 운동화와 비슷한 것이 주어집니다. 통일화라는 것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가볍습니다. 참 쉽고 편합니다. 무겁다고 해서 그 신 발을 신으면 5km는 편하지만 10km이내에 발이 다 부르틉니다. 군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가죽으 로 됐는데 여기까지 오는 것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그것 신으면 20km 너끈하게 다녀옵니다. 여러분, 인생, 가정, 삶을 점점, 점점 인스턴트식으로 쉽게 살면 인생은 다 부르트는 것입니다. 멀리 못갑니 다. 쉽게 행복, 멀리 못갑니다. 쉽게 예수 믿는 것 절대로 멀리 가지 못합니다. 목회 쉽게 하면 안 됩니 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쉬운 목회를 개발하는데 쉬운 목회는 없습니다. 십자가 짊어지고 울고 눈물 흘리고 무릎 꿇고 금식하고 주를 섬겨야 승리하는 것이지 천국가고 영생을 얻는 것이지 여러분, 교인 은 쉬운 것 개발하면 안 됩니다. 진리를 따라 영생을 좇아 아브라함의 길, 이삭의 길, 야곱의 길을 걸 어가야 영생을 얻고 승리하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앞에 있는 때 에 따라 어떤 유혹, 시험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항상 믿음으로 사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저에게는 친구 한 분,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이 있습니다. 저를 형님처럼 생각하고 이번 추석에 도 와서 또 세배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아, 세배는 설에만 하는 것이다. 아주 저에게 딱 붙이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와서 보고한다고 이야기하고 상담하고 기도해 달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군에서 헌병 대위로 있었습니다. 20년 전에 헌병 대위 그 때 헌병은, 대위 되면 중대장 집이 몇 채나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짭짤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 그런데도 먹을 게 없어서 헌병 대위가 양 식이 없어 권사님께 언제나 쌀 빌리러 다녔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일조와 감사헌금, 교회 생활 하 니까 한 푼도 남는 것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여유가 전혀 없더랍니다. 가정 식구 사는데 전혀, 너무 어 려워 가지고 그렇게 살았다고 합니다. 자기는 시내로 다녀도 전부 단속하니까 술집에서도 아가씨들 이 좋아 그러는데 자기만 가면 다 바보 취급하더랍니다. 어디가도 바보, 사병들도 자기 밑에 있는 사 람도 바보라 생각하더랍니다. 영생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 잠깐 보면 바보입니다. 그런 데 카터 대통령이 오셨는데 경호 책임자를 자기한테 맡기더랍니다. 얼마나 청와대에 모든 일에 많은 사람이 너무너무 많은데 하나님이 자기를 높여 주시더랍니다.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자기가 문을 열 면 들어가고 나중에 카터가 싸인해서 미국 오라고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미국 가서 카터를 만났습니 다. 여러분,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지금 훌륭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 양구 포천에서 그냥 적당 하게 짭잘하게 살았더라면 지금 끝나는 것입니다. 거기서 무슨 끝나는 거지 믿음으로 멀리 바라보고 많은 사람이 가는 길로 안 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쉽게 사는 길로, 쉽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주 는 대로 먹지도 않습니다. 오라는 대로 가지도 않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삽니다. 헌병 중대장이 무슨 진짜 헌 병이구나!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야 새 병이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영생을 얻는 사람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땅만 바라보 면 안 됩니다. 땅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오래가는 것이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핸드폰 수명도 1년 5개월이라고 합니다. 새 것이 나온답니 다. 수많은 전자제품이 3년이면 끝납니다. 다 바뀐답니다. 자동차 5년, 6년이면 다 끝납니다. 새 자동 차 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모든 것 다 바뀝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고 바뀌 지 아니하는 것, 하나님 나라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이 모세와 다윗같이, 베드로와 사도 바 울과 같이 천국을 바라보고 영생을 얻기 위해 살면 땅에서도 잘되고, 천대에 복을 내려 주시고, 이 땅 을 떠나서 천국 갈 줄 믿습니다. 무슨 일을 만날지라도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며칠 전에 아세아 연합신학대학 회의를 하는데 이영덕 장로님, 국무총리 하셨잖습니 까? 그 아들 이영길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다녀가셨습니다. 서울의대 나와서 미국 가서 의학박사학 위 받아 신학교로 돌아갔습니다. 목회 지금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영생을 얻는 길로 가 야되겠다는 것입니다. 서울의대 나와서 박사학위 받고 병원 개업해서 잘 살면 잠깐은 잘 살지만 천국 에 영생 얻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총리 출신에 뭐 좋은 영광 누릴 길이 많이 있지만 그러 나 그건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풀에 꽃과 같다는 것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는 것입니다. 영생 은 예수님만이 주십니다.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면 하나님 이 금생과 내생에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른 분에게 이야기 들었는데 신혼 여행도 호텔 에 안 가고 어디 멀리 안 가고 교회에서 하룻밤을 지났답니다. 여러분, 정말 어떻게 살아야 바로 사는 것입니까? 오늘 모두 그렇게 앞만 보고 현실에 맞춰 사는 사람이, 행복이 얼마나 갑니까? 영광이 얼마 나 갑니까? 그 기쁨이 얼마나 갑니까? 그 행복이 얼마나 갑니까? 하나님을 좇아서 믿음으로 살아가 는 성도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도 와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결혼을 너무 많이 안 한답니다. 또, 왜? 안 하느냐? 결혼 해서 공연히 부인 먹여 살리려고 평생 고생하는 것보다는 나 혼자 먹고 잘 살자, 애를 또 안 낳는다고 합니다. 왜 안 낳느냐? 원인이 하나입니다. 그것 어떻게 공부 교육비 많이 들어가고 그 기르는 것 힘 들어서 못하겠답니다. 교육비 그것 때문에 못 낳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낳는 이유가 첫째 그것이 고, 결혼 안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 말이 맞습니까? 여러분, 부 인 내가 먹여 살립니까? 하나님이 복 주셔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같이 사는 것이지 부인이 오히려 복을 받아 얼마나 더 잘 될 텐데 아이를 내가 기르는 겁니까? 우리 아이들 내가 공부시킨 것입니까? 저는 우리 아이들을 제가 공부시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시켜 주셨습니다. 제가 기르지 않았습니 다. 하나님이 길러 주셨습니다. 명성교회 목회 제가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십니다. 여러분이 사 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살려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하루가 기쁜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홍해를 만났습니다. 자기 들이 건넜습니까? 하나님이 건너게 하셨습니다. 목마를 때 자기들이 물을 찾아 자기들이 물을 해결 했습니까? 하나님이 생수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하나님이 기르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 시고 여러분의 노후 여러분의 인생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내가 하는 것 아닙니다. 여 러분, 자녀를 내가 기르십니까? 정말 내가 잘 기를 수 있습니까? ♪오이 밭에 오이가 길쭉 길쭉 보기 좋게 열렸네 잘도 열렸네 저 혼자서 컸을까? 아니 아니야 하나님이 하나님이 길러 주셨지 나뭇가지 매미가 맴맴맴맴 듣기 좋은 노래를 잘도 부른다 저 혼자서 배웠나 아니 아니야 하나님이 하나님이 배 워 주셨지♪ 우리의 모든 앞날, 여러분의 앞날을 천대에 복을 주실 분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여러 분의 영생의 길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적으나 택하심을 받은 백성
신 7:6-15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말씀이 들어있는 신명기 7장 전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서 복된 삶을 누리기 위하여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 몇 가지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자의식을 확실히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은 놀랍고 특별한 은혜 아래 있는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잘나고 뛰어나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일방적인 선택과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또 하나님을 믿고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잘난 것이 없는 족속이기 때문에 모든 성공과 풍요로움과 행복의 원인을 오직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사랑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하는 데에 쓰임받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본문 6-8절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한 것입니다.
둘째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이 두려워할 만한 상대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다 물리쳐주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에 혼자 들어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시고 들어가게 하시며 비록 그 땅에 거하는 족속들이 이스라엘보다 많고 힘이 세다 할지라도 그들을 다 쫓아내심으로써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7:1-2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라" 했습니다. 17-18절에서는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라" 했습니다. 또 21절에서는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이 복 받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본문 9-15절의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 하사 너희가 아는 애굽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걸리게 하실 것이라."
넷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게 만들고 하나님을 잊게 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고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망하게 할 모든 것들, 특히 우상과 우상을 숭배하는 족속들을 없이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을 지키는 데에 있어서는 단호하고 가차 없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5절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했습니다. 16절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넘겨주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했습니다. 24-26절에서는 "그들의 왕들을 네 손에 넘기시리니 너는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라 너를 당할 자가 없이 네가 마침내 그들을 진멸하리라 너는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네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올무에 걸릴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비단 옛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인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말씀입니다. 특히 옛 이스라엘과 비슷한 지정학적 여건 속에 있는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옛 이스라엘에게 살게 하신 가나안 땅에는 그들보다 더 많고 힘이 센 족속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족속들보다 더 크고 강한 애굽, 앗수르, 바벨론 같은 나라들에 늘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자리 잡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으면 이웃열강들에 의해 없어질 수밖에 없는 나라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가까이는 중국, 일본, 러시아, 조금 멀리는 미국 같은 나라들에 의해 영토와 주권을 침략 당하거나 간섭 받아왔습니다. 오늘날 남북의 같은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주변 4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즈음은 느닷없이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불순한 시도를 노골적으로 감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문제에 신경 쓰고 있는 새를 틈타 일본은 또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주변 4개국의 군사력과 경제력 혹은 경제적 잠재력은 우리가 상대조차 하기 힘든 것입니다. 특히 요즈음은 이 주변 4개국과의 관계가 어느 것 하나 편하고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두려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사는 길을 지시하신다고 믿습니다. 그 사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거룩한 삶에로 부르심을 받은 백성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비록 주변의 어느 나라보다도 우리나라에 복음이 늦게 들어왔지만 그 어느 나라보다도 기독교가 빠르고 강하게 자리 잡고 성장했다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하신 뜻 가운데서 택하셨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정말 놀랍고 특별한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나고 뛰어나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하신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딱 맞는 말씀입니다. 잘난 것이 없는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성공과 풍요로움과 행복의 원인을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에 쓰임받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았다는 역사적 사명을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만 하면 그 어떤 두려워할 만한 상대들이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다 물리쳐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친히 쫓아내시며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차지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혹시 우리의 심중에 우리 주변나라들이 우리보다 수도 많고 힘도 세니 우리가 어찌 그들을 당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일제의 압제와 공산화의 위기에서 우리를 구해주신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신7:21)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진정 크고 두려운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계시면 우리 앞에는 어떤 열강도 두려울 바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 민족이 복 받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9절에서 "그런즉 너는 알라" 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시며 번성하게 하시고 우리의 자손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 땅의 모든 소산과 수획을 풍성하게 하시고 우리의 재산이 증식되게 하시며 또 모든 질병을 우리에게서 멀리 하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복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인데 스스로 행복해지겠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 같이 어리석고 불쌍한 일은 없습니다.
넷째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게 만들고 하나님을 잊게 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특히 온갖 형태의 우상을 철저하고 단호하게 우리의 마음에서 없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모든 것과의 일체의 타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는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네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올무에 걸릴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신7:25-26)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것들을 우리 삶과 마음 속에 끌어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멀리할 뿐 아니라 심히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서 진멸 당해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진멸시키지 않으면 그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진멸 당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조금이라도 좋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없애시려는 것과 적당히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유혹거리가 너무나 많은 오늘날 우리 사회입니다. 이 유혹을 떨쳐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 택하심을 받은 백성이며 거룩한 백성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백성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는 백성, 그래서 복된 백성, 그리고 적으나 두려울 것이 없는 강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의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다"는 이 말씀을 가슴 속 깊이 새기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하나님의 선택
신 7:6-15 / 피종진 목사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누구 누구 다 불러 주셨는데, 혼자만 불러주지 않고 소외당했다면 가슴이 아플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 중에서 여러분 이름을 선택해서 좋은 위치에 옮겨준다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하나님께서 좋은 위치에 불러주신 자가 된다면 그 분은 이 땅에서 어떤 자리보다도 안전하고 귀한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행전 26:17,18에 보면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서 선택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우리를 이렇게 선택하셨을까요?
첫째, 기업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택하셨습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6절) 기업은 자기의 소유입니다. 자기 생명이요, 재산이요, 자기 삶 전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24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업이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내용이 얼마나 심오한지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당신의 가장 큰 농사가 뭐냐고 물으면 부모는 자녀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서양사람들은 자기 아내라고 하기도 하고, 자기 남편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자기가 가장 사랑하고 관심이 많은 그것이 바로 자기 기업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가장 관심을 기울여주시고, 가장 귀한 사랑으로 입혀준 자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자기 기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그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이 가장 귀하고 사랑의 대상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었을 때 '내가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는 항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복된 삶을 살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 15:17에는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되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기업의 산에 안전하게 정착케 하여 축복하여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인 것입니다.
또 시편 16:5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업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을 자기 기업으로 삼은 사람은 항상 하나님이 그 잔의 소득이 되고, 그 분깃을 다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나의 모든 것은 다 주의 것입니다.' 하고 늘 고백하는 신앙을 가져야 됩니다.
둘째, 복 주시고 번성케 하시려고 택하셨습니다.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케 하시리니"(13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고 번성케 하시려고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예비해두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비해두신 그 복을 우리가 누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①자녀가 잘되는 복입니다.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13절) 어떤 분은 자녀가 돈을 많이 벌게 하기 위해서, 어떤 분은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기 위해서, 어떤 분은 자녀의 건강을 위해서 애씁니다. 이 모든 것이 다 귀하지만 더 귀한 것은 예수님을 똑바로 만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 속에 뜨거운 신앙을 심어주어야 됩니다. ②토지 소산의 복입니다.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케 하시리니(13절)" 토지 소산을 풍성케 하여주시는 복입니다. ③각종 질병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시고 지켜주시는 복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 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라"(15절)
셋째,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려고 택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 20:26에 보면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반드시 인간 중보자인 거룩한 제사장과 희생제물을 통해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더 이상 인간 중보자나 제물이 필요없이 모든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한 성도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짐으로 말미암아(마 27:51)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의지하면 누구나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10:19,20).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인 제사장의 복을 주셨습니다.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우리 한국 민족을 세계 속에 반드시 심어서 마지막 21세기의 종말시대는 우리 한국의 시대가 올 줄로 믿습니다. 지금 세계의 대다수 신학교는 학생수가 줄어서 운영하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우리 한국의 신학교는 1년의 졸업생이 11,000여명 가까이 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계 각 나라에 선교사로 파송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선교사들이 가는 곳마다 선교에 성공하고 있습니다. 외국인들이 실패한 곳에도 한국인들이 정착하면 그곳에 원주민 신학교도 세우고 한국인들을 통해서 주의 종들을 그곳에서 양성해서 복음이 널리 전파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의 특권을 가지고 북한은 물론 전 세계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야 합니다.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한없는 역사를 나타내주고 계십니다. 사무엘하 6:11에 보면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있었을 때 그 가정에 큰 복이 임했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소유하고 사십시오. 하나님이 축복해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하나님의 보좌에서 응답해주십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십시오. 천군 천사가 여러분과 동행하고 화답해주실 줄 믿습니다.
넷째,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을 전파하게 하기 위해서 택하셨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 3:17)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입에 말씀을 두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말씀을 담아주신 것은 선포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입을 벌려 복음의 나팔을 힘차게 불어야 합니다. 만일 예수 믿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벙어리 개(사 56:10)와 같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전해보세요. 그 순간에 성령이 역사해주십니다. 말씀을 소리쳐 외쳐보세요.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함께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노력해보세요. 병든 육체도 건강하게 하셔서 사용하십니다. 낮고 천한 자는 높여서라도 사용하십니다.
지금 이 땅에 긴급한 일들이 많이 있지만 말씀을 전파하는 일보다 더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 세계가 정치를 잘못해서 혼란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정치를 잘해도 어두움의 영들과 사탄의 권세는 이 땅에 인간의 정치, 도덕과 지성을 초월해서 강퍅하게 역사합니다. 아무리 좋은 위치에, 가문의 지위, 명예와 학문을 다 가져도 사탄이 그 마음속에 들어가면 악한 사람이 되어집니다. 혈기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집니다. 치고 받고 욕하는 사람이 되어집니다. 오늘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실 때 여러분 입에서 권능이 나타나서 말대로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주시고, 기도한대로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여주시고, 영혼을 구원하려고 하면 환경도 만들어주시고 여건도 조건도 그리고 자격도 갖추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목적 중에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땅끝까지 복음 전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기업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복 주시고 번성케 하시려고,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을 전파하게 하기 위해서 택하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여주신 목적을 잘 깨달아 항상 감사하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는 성도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애굽을 통하여 본 광복절의 의미
출 7:6-11 / 박병욱 목사
일본의 35년 간의 식민지 통치 밑에서 해방된 지 내일로 60주년이 됩니다. 광복절은 우리가 일본의 식민 통치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기념하는 날이지만, 해방 이후 60년이 지난 오늘까지 친일세력의 잔존과 그 문화의 찌꺼기들이 그대로 우리 생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그 기쁨을 반감시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출애급 후 광야 40년을 통해 4백년의 노예의 근성과 잔재(殘滓)들을 털어 버리고 새로운 땅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럼에도 그 쓴뿌리는 깊어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계속 다시 살아나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흔들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일제 35년 간 우리 속에 뿌려진 독소들을 각 분야에서 청산하고 회개하는 작업들을 전혀 하지 않았기에 광복절은 이름만의 광복이지 여전히 우리 속에 어둠은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복절 60주년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 번 광복절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새겨 보고 미래 역사의 방향을 올바로 설정해야 하겠습니다.
광복절의 올바른 뜻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출애급의 역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출애급을 기념하는 유월절과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광복절이 여러 가지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두 절기가 갖는 공통점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광복절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신 역사계시가 무엇인지를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출애급의 진정한 목적
우리는 이스라엘의 출애급 사건을 말할 때 4백년 간의 노예생활에서의 해방이라고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출애급은 '해방'이라는 정치적 의미만 갖는 사건은 아닙니다. 노예라는 억압된 상황에서 그 고통을 못 이겨 울부짖었던 히브리인들의 신음과 탄식 소리를 하느님께서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셨지만, 단순히 저들이 당하는 억압과 고통에서 저들을 풀어주시는 데만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저들이 억눌렸던 인권을 회복하고 독립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게 하기 위하여 저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것일까요? 그런 의도도 전혀 포함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이 출애급의 진정한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출애급 해방은 이스라엘이 4백년 동안 누려보지 못한 정치·경제·사회적 자유와 독립을 가져왔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리고 싶은 안정과 평화, 정의와 사랑, 번영과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출애급을 이와 같이 정치 사회적 해방으로만 이해한다면 출애급의 보다 큰 목적을 놓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고난 받는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야훼 하느님 자신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시기 위하여 저들을 이집트에서 탈출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완전한 구원, 진정한 자유, 완전한 평화, 아름다운 인간의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출애급기 9장 1절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노예인 히브리인들에게 자유가 필요한 것은 바로 하느님을 예배하고 섬기며 그와의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모세의 요구가 바로에게는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핑계로 들렸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히브리인들은 출애급 후 시내산에 머물면서 야훼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고 야훼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셨다는 계약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십계명과 율법을 주셔서 계약 백성으로 하느님을 어떻게 예배하고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자기를 섬기게 하시므로 그들의 삶을 차원 높은 영적인 삶을 향해 자라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급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단순히 억압으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데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 하느님 안에서 영적 존재로 성장하도록 이끈 사건입니다.
미래 구원의 모형인 시내산 계약
이 시내산 계약은, 원래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가졌던 관계를 회복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하느님을 떠나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하면서 창조주 하느님을 떠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의 사슬에 얽매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집트 노예생활은 바로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된 인간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로의 억압에서 자유하게 하시어 시내산에서 자기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사건은 바로 모든 인간을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겠다는 미래 구원의 모형입니다.
오늘 읽어 드린 로마서 8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16절 이하에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느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시어 그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하느님의 자녀와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좀더 기다려야 하는 고통이 남아 있습니다. 8장 21절에 보면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급에서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우리를 마침내 "하느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데서 그 정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출애급은 단순한 정치적 해방에 머물지 않고, 결국은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 이르게 하며 거기서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내산 계약을 따라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 되는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험한 광야생활의 불편과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거룩한 백성 되기보다는 차라리 이집트의 노예생활로 돌아가기를 희망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은총인가를 저들은 깨닫지 못한 채 당장의 육체의 편안함과 만족만을 바랐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이스라엘의 욕망을 광야 생활을 통하여 바꾸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예배하며,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교육하셨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졌던 가치관을 바꾸어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를 예배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삶의 중심 가치임을 깨우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해방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인 출애급의 큰 뜻을 통하여 오늘 우리의 해방절인 광복절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면, 광복절을 단순하게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정치적 해방으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일본의 통치로부터는 벗어났으나 남북으로 분단되어 큰 전쟁을 치르므로 어쩌면 더 큰 이념의 족쇄(足鎖)에 묶여버렸고,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독립국가이면서도 막상 온전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한 채 그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된 국내 정치의 혼란과 정변(政變)으로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려보지 못하였습니다. 빛을 찾았다는 뜻에서 광복절이라고 이름하였지만, 아직도 이 땅을 덮고 있는 어둠 때문에 우리는 제대로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해방을 정치적 사건으로만 인식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해방을 정치적 사건 이외의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가 깃든 역사로 볼만한 뚜렷한 근거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내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 사건 같은 분명하게 보이는 계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해방이 갑자기 온 것은 분명한 하느님의 은혜의 역사라는 인식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일찍이 이 해방은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말하면서 "아무도 모른 것은 아무도 꾸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꾸미지 않고 온 것은 하늘의 선물이다. 이것은 하늘에서 직접 민중에게 준 해방이다. 아무도 여기 공로를 주장할 중간적인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을까? 그 까닭의 하나는 진정한 민중의 해방이 되기 위하여서다. 그담 또 하나는 민중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하기 위하여서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온 해방은 하느님의 선물이요, 그것은 우리로 하느님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방을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를 어디로 이끌려고 하시는지를 생각하고 그 뜻을 따르기를 힘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우리는 해방 후 이제까지 먹고사는 문제에만 매달려 오느라 문화적, 정신적인 가치 추구는 외면해 왔습니다. <한겨레>신문 8월 10일자에 실린 도정일 교수의 글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는데 우리가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할 내용입니다.
문화는 삶을 인도하는 의미·가치·목적의 궁극적 공급자다. 한 사회가 어떤 문화를 만들고 어떤 문화적 가치를 강조하는가가 그 사회의 성격과 정체성, 품질과 수준을 크게 좌우한다.
이 관점에서, 광복 60년이 되도록 한국인이 공유할 '좋은 사회'의 그림을 그리지 못한 것은 우리의 큰 문화적 실패다. ……생명·자유·평화·안전·인권은 다수가 동의하고 고유할 근본적 가치이며, 창조성·다양성·공정성·관용·배려·환경·공존도 그런 가치이다. 이런 본질적인 문화적 가치들을 추구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 민주주의이고 경제적 수단이 번영이며 사회적 수단이 정의다.
그런데 지금, 어떤 광적인 가치전도 현상 하나가 우리를 물구나무 세우고 있다. 이른바 '경제적 가치'라는 것이 사회의 근본 가치들을 납치하는 현상이 그것이다. …경제적 가치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그런데 그 도구적 가치를 되레 목적 가치로 삼아 다른 더 중요한 가치들을 시궁창에 내던지는 것이 경제제일주의 논리이고 시장근본주의 논리다. 정치·언론·교육 등 공적 영역들조차도 시장근본주의의 시녀가 되기 위해 새벽부터 줄 서기 바쁘다. 시장은 지금 민주주의와 시민적 권리에 대한 거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 이는 정치독재나 진배없는 위험한 사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정말 중요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 되는 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먹고사는 경제 가치만을 조차 바알 숭배에 빠졌던 것처럼, 우리도 진정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문화적 정신적 가치들은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수단과 도구여야 할 경제제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삼아 거기에 '올인'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해방'이란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경제성장이라는 바알 숭배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바알 숭배 때문에 하느님의 채찍을 맞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빌론에 포로 되어 70년 동안 고난을 당하였음을 기억하고, 우리도 더 늦기 전에 경제제일주의 망령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세계 전역의 모든 사람들에게 '풍요로움과 평화와 진보'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자본주의 세계화 경제의 주창자들과 신봉자들의 믿음이 갈수록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는 사실을 재빨리 간파하고 지금이야말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하는 해방의 참된 뜻을 찾아 그 뜻을 세우는데 우리의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60년 전 하느님이 주신 선물인 해방이 진정한 광복이 되려면 우리 속에 있는 어두움을 모두 몰아내고,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드려야 할 것입니다. 경제가 발전하여 잘 살기만 하면 다른 것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망상은 마귀가 우리 속에 심어준 멸망의 독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시므로 돌로 빵을 만들라고 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던 것처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회복하여 맘몬 우상 앞에 모든 것을 내어 던지므로 오늘 속속들이 썩어버린 우리 사회의 비참한 몰골을 치료해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광복절 60주년을 맞이하면서도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행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해방이 진정한 감사와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걸어왔던 넓은 길에서 돌이켜 좁은 길로 나아가면서 생명의 역사, 빛의 역사를 이룩해 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해방 60주년을 맞이하면서 먼저 우리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회개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찾으면서 하느님 나라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에도 참으시며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이 이 민족과 여러분 가정 위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택하신 이유
신 7:6-11 / 홍문수 목사
교우 여러분들께서 기도해 주셔서 아프리카 선교 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떠날 때는 솔직히 마음에 부담이 없지 않았습니다. 보통 아프리카 하면 얼른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죠. 아프리카에 간다고 결정하니까 그런 생각들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너무 먼 곳이란 생각입니다. 장시간 비행기를 갈아타고 가야 되고, 현지에서는 사막이나 밀림을 지나가야 하고 ... 또 하나는, 불편하고 위험한 곳이란 생각입니다. 견디기 힘든 기후, 그리고 각종 풍토병과 전염병 등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염려 등 ...
실제로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부담이 생겼습니다. 동행하는 한국불어권선교회 본부로부터 검역소에 가서 황열병 예방 주사 맞으라, 장티푸스 예방 주사 맞으라, 말라리아 예방약 먹으라, ... 등의 안내를 받으며 번거롭기도 하고 부담도 됐습니다. 하지만 선교 센타 문제도 있고, 무엇보다 아프리카 오지에 선교사를 파송해 놓고 가보지 못해서 늘 마음에 거렸던터라 마치 밀린 숙제를 하는 심정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선교지를 둘러보면서 그런 생각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생각보다 가까운 땅이고, 우리가 자주 가 봐야 할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순간 순간 큰 감격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감격’이라는 말보다 차라리 ‘흥분’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그만큼 큰 감격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렇게도 표현해 봅니다. “그동안 제가 가보았던 어떤 선교지 방문보다도, 성지 순례보다도 더 큰 은혜를 받았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감히 추천하고 싶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많은 분들이 아프리카 선교 여행에 참가하시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본문 성경 말씀과 더불어 아프리카 선교지에서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광야 40년을 보내고 가나안 땅에 거의 당도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이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의 말을 합니다. 그는 늘 말씀을 전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한 마음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것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유언하는 심정으로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 우리를 택하신 이유 : 사랑(무조건적인 선택)
모세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를 언급합니다. 6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백성 즉 성민(聖民)임을 상기시킵니다. 세상에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있는데, 그 중에서 특별히 구별해서 이스라엘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면 왜 그러셨는가? 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7절 보면 거기에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무슨 특별한 장점이나 잘난 점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다른 민족이나 나라와 비교할 때 이스라엘은 내세울 것도 없고,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못난 민족이요 약소 민족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을 택하셨는가?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주지시키려는 게 바로 이겁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8절 보면,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이 사랑해서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 ... )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속량’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파다’인데, 돈을 지불하고 산다는 뜻입니다.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값(贖錢)을 치루고 자기 소유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출애굽 하던 날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장자 죽음의 재앙으로 집집마다 장자가 죽게 되었는데,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바른 집은 안전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장자가 구원받고 출애굽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유월절(Passover)의 기원입니다.(출12:7, 13 참조)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 값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에수님이 우리를 위해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유월절 양으로 불렀습니다.(고전5:7) 이 십자개 대속의 복음을 믿음으로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구요? 믿음으로! 그렇습니다.(요1:12) 그런데 이 믿음은 나에게서 스스로 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해보고 믿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전에 나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내가 믿고 구원받은 겁니다. 이게 신앙의 신비요, 하나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엡1:4~5 보면 우리를 창세 전에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행 13:48 보면 바울이 선교 여행 다닐 때 한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햇더나 많은 사람들이 믿고 구원을 받았는데 이를 가리켜 뭐라고 표형했나요?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작정되었다는 것은 예정 선택된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나 자신을 생각해 보면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특별한 게 없는데 왜 택하여 하나님 백성 되게 하셨는지 정말 모를 일입니다. 그저 사랑하기 때문이란 말밖에 할 게 없습니다. 또 왜 사랑하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없습니다. 또 육신적으로 왜 나를 축복하시는지 정말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이번 선교 여행 중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는데 나를 한국 땅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배고픔과 가난, 무지, 질병, ..)을 보면서 ... 이런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내가 아프리카에 태아났더라면 ... ? 솔직히 말씀드리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경유지로 프랑스 빠리에 들렀는데, 그곳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그곳 사람들은 겉 보기에 풍요롭고, 화려하고, 세련되고 ... 하지만 내가 프랑스에 태어났었더라면 ... ? 생각해 보면 역시 끔찍한 일입니다. 영적으로 봐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 나라는 오늘날 신앙 생활하기 너무 어려운 곳입니다. 과거 조상들은 예수를 믿었지만, 그리고 그 덕분에 지금 물질적으로, 문화적으로 잘 살고 있지만 현재의 영적 상태는 그야말로 황폐화된 모습 그 자체입니다. 무신론자들이 거의 대부분이고, 모슬렘들이 득실거리고, 기독교 인구는 1%도 안 되는데다 그 중에서도 복음적인 신자는 극소수이고 ... 그런 땅에 태어났었다면 과연 내가 예수 믿고 이렇게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할까? 상상해 보면 부정적입니다. 프랑스인 목사님을 만나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으로부터 들은 영적 상황은 참담했습니다. 이제는 선교 대상 국가가 된 모습입니다. 은근히 한국교회가 도와주면 좋겠다는 뜻으로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프랑스의 영혼들을 깨우려고 매년 40일간 기도 행사를 갖는다고 하는데, 마치 발버동치는 것처럼 보여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제 눈에는 차라리 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들이 더 행복해 보였습니다. 거지 나사로와 지옥 간 부자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눅16:19~31) 꼭 같습니다. 지옥 간 부자보다 천국 간 거지 나사로가 더 낫습니다. 실제로 프랑스가 우울증 환자수에 있어 유럽에서도 1위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영혼들에게 주어지는 사필귀정입니다. 그에 비하면 차드의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적으로는 흙집에 살고, 하루에 한 끼 혹은 잘해야 두 끼 먹고 살지만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모릅니다. 몸을 흔들면서 기쁨으로 찬송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종합해서 생각해 보면 한국이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모릅니다. 더 좋은 나라를 찾아 이민 가는 분들도 있지만 제 생각에 한국처럼 살기 좋은 나라도 드물다고 생각됩니다. 이만하면 물질적으로도 풍요롭고, 신앙 생활하기 좋고 ...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많은 나라 중에서 이 한국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많고 많은 사람 가운데 나를 선택해서 천국 백성 삼아주셨는가 ... ? 내가 잘 나서 ... ? 내가 착해서 ... ? 내가 큰 공로를 세워서 ... ?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인간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 "(찬송가 410장)
[2]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의 사랑에 응답하는 삶 : 감사와 순종, 그리고 헌신
그러면 이처럼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들 ... 과연 우리는 그 사랑에 어떻게 응답하며 살아야 마땅할까요? 9절~11절. 특히 11절을 보면 ... “그런즉 너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그랬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라는 겁니다. 본문은 포괄적인 내용으로 언급하는데, 성견 전체에 흐르는 말씀으로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감으로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건강은 감사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치 않으면 이미 신앙이 병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은혜를 소멸하고 결국은 인생을 실패하고 맙니다.(잠16:18)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오직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15:10)임을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예배가 살아있는 예배가 되고, 찬송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살아 있는 찬송이 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 영혼이 넘치는 은혜로 충만해집니다.
미국의 부흥전도자 D. L. 무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겸손은 은혜를 많이 받으며, 또 은혜를 잘 지키게 해주기도 한다.” 정말 은혜는 물과 같습니다. 물이 낮은 데로 흐르듯이 은혜는 겸손한 마음에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 은혜에 감사함으로 더욱 더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②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감으로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 인생이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인생의 지도를 주셨습니다. 그게 곧 성경 말씀입니다. 지도를 보지 않고 길을 찾아가려는 사람은 바보 멍청이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세속의 흐름에 휩쓸려사는 사람은 멍청한 인생입니다. 그 인생이 복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책임 이전에 특권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거듭 거듭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신7:12~15 말씀을 보십시오. 축복의 약속입니다. 특히 14절을 보면 ...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우승하여 ... ”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풍성한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뜻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③ 하나님의 사명에 헌신하며 살아감으로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만 혼자 누리고 잘 살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 세계를 내려다 보십니다. 그리고 세계 인류, 모든 사람들을 살펴보십시다. 마치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부모는 모든 자식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믿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사랑을 나누라! 그리고 복음을 전하라! 아브라함으 선택하신 이유도 바로 이겁니다. 창12:2~3 보면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요 모든 민족에게 복을 나누어줄 사람으로 택함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민에게 복의 통로 역할을 감당하라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방의 빛으로 삼으셨다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행13:47) 그런데 이스라엘은 왜곡된 선민주의에 빠져서 이방인 무시하다 오히려 이방인에게 박해 받는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서구의 여러 나라들도 실패했습니다. 물론 과거 서구 선교사들의 업적도 많습니다. 우리 한국 민족도 그들로부터 복음을 받았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잊지 말고 고맙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구미 여러 나라들이 약소국을 식민 지배하고 수탈하며 복음을 전해주는 대신 복음의 문을 막은 사례가 많습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자신들의 신앙까지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예수 믿던 조상들 덕에 잘 살아가지만 신앙의 각성이 이뤄지지 않으면 미래가 보장될까? 생각해 봅니다. 남의 나라 나쁘게 말하는 것 같아서 안됐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도 교훈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란 법이 없습니다. 개인도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부자, 오늘의 강대국이 내일의 부자, 내일의 강대국이 계속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보장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신 축복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명(사랑으로 나누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하는 일)을 감당하면 좋지만, 만일 이를 무시하면 미래 보장이 없습니다.
빠리에 머물 때의 잠시 몽 마르트르를 방문했습니다. 몽 마르트르는 흔히 낭만적인 의미로 생각하는데 본래 ‘순교자의 산’이란 뜻입니다. 순교자를 기념하여 교회당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아동하는 중 도심 한 가운데 현란한 장식으로 가득한 음란의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적 도덕적 현주소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빠리 시장이 동성애자라고 합니다. 그것도 문제인데 더 큰 문제는 빠리 사람들이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또 우리도 신문에서 본 건데, 지난 해 여름 젊은이들은 다 바깡스를 떠난 사이 혹서가 몰아닥쳐 독거 노인들이 수만 명 죽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영구차가 부족해서 트럭으로 날라다 장례를 치룰 정도였다고 합니다. 1등 문명국가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분명한 하나님의 메시지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죽어가고 있고 ... 정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도 안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 목적을 잊으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 한국교회, 한국 민족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강의 기적, 한국 교회의 기적을 주신 겁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서구의 전철을 밟게 됩니다. 이번 선교 여행을 통해 하나님의 그런 기대를 더 확실하게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 한국 선교사들이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자랑스러웠습니다.
특히 양승훈 선교사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제가 방문했던 그 어느 선교지보다 역동적으로 움직였습니다. 가는 데마다 복음의 감격이 넘쳤습니다. 이미 6교회가 세워졌는데,
이번에 새로운 교회 설립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모슬렘 지역의 마을에 세워진지라 더욱 의미가 깊었습니다. 오지 중의 오지 ... 과거에는 선교사들의 무덤이라 불리던 서부 아프리카 ... 그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땅 차드 ... 젊은 선교사가 짧은 기간 중에 놀라운 열매 맺었던 것입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스러웠습니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렸을까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 왔습니다. 그리고 모인 교인 숫자가 많은 사실보다 더 귀한 것은 현지 교인들이 순수하고 열정적인 신앙을 고스란이 간직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번에 마침 10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3개월 교육 바은 후 시험을 치룬 결과 12명 중 2명을 떨어뜨렸다는 겁니다.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사역자들(전도사들)도 얼마나 잘하는지 제가 반할 정도였습니다. 사역자가 많아지고 교회가 더 개척되기 위해 신학교게 세워져야 할 시점이 왔고, 때를 맞춰 하나님이 선교 센타 건축을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개개인도, 교회도 이런 일에 더욱 충성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쁨을 주십니다. 그리고 더 크게 축복하실 겁니다. 그리고 하늘의 영광을 주실 겁니다. 우리가 미래를 염려하고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데 해답은 바로 이겁니다. 선교지향적으로 살면, 사명에 촛점을 맞춰 살면 우리 미래를 보장됩니다. 복된 생애가 될 겁니다. 빛나는 영광의 생애가 될 겁니다. 이번에 그 증거를 재확인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양 선교사의 선교 사역에 결정적인 협력자로 이시우 집사님 가정이 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익히 들었지만 정말 귀한 분입니다. 차드에 들어가 17년째 사진관을 경영하시는 분입니다. 평신도지만 선교 사역을 위해 많이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그랬습니다. 집사님 가정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가정이라고 ... 실제로 그분의 집 응접실에 예배실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차드 한인교회라고 해서 교인수가 좀 되는 줄 알았더니, 그 가족들과 선교사들, 그리고 사업차 오신 두어 분이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주일예배, 삼일예배, 금요기도회 꼬박꼬박 모입니다. 주일에도 선교사들이 현지인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또 모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살아있는 선교지가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지 사역자들을 만나 대화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중 대표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교사님들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그 집사님에게도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때 그분을 가리켜 ‘숨은 선교사’(Missionnaire Caché)라고 말입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한인교회 예산이 1년에 천만원이라고 하는데 그게 거의 그분의 헌금입니다. 그 헌금을 가지고 선교사 지원하고, 교회 땅 사주고 .... 그런 일을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 속으로 게산을 해봤습니다. 얼마나 수입이 많기에 그 만큼 헌금하실까? 그 가난한 나라에서 그렇게 많은 돈을 버는게 믿기지 많을 정도입니다. 선교를 위해 헌신하면 하나님이 육신의 삶도 책임져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3교회를 방문했는데 그곳에도 교인들에 제법 모이고 초등학생들도 꽤 모인다고 합니다. 그 교회당 건물 이야기를 해 주는데 수년 전 하늘 나라 가신 여집사님의 헌금으로 마련된 것입니다. 몇 년간 부었던 적금 탔다며 1천만원을 헌금하셨는데, 그게 기초 자금이 되어서 교회 부지를 구입하고 골조를 세웠답니다. 모자라는 것은 한인교회에서, 그리고 공사는 교인들의 노력 봉사로 이뤄졌다고 합니다. 중요한 교훈이었습니다. 사람은 다 갑니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은 계속 남아서 하나님의 사명을 이룹니다. 그 모든 게 하늘에서 영광으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두고 ... 그 이전에 다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서! 그럴 때 우리의 인생을 영원히 빛나는 영광의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그 사랑에 응답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응답하시렵니까? 곰곰이 생각하시고 결단하셔서 남은 생애 정말 기쁘고 복되고 영광스런 인생런 인생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너의 가치를 인정하라
신명기 7: 6-11 / 정언용 목사
이번 월드컵 기간 중에 시청 앞에서는 50만에 가까운 응원 인파가 한꺼번에 몰렸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이번 길거리 응원에 빼놓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대-한민국]이었습니다. [대-한민국] 하면서 힘찬 소리가 들리면 [짠짠 짠 짠짠]해야 합니다. [짠짠 짠 짠짠] 은 농악의 가장 기본적인 박자라고 합니다. 우리는 서양음악에만 익숙해져서 사실은 우리의 박자에 대한 감각을 많이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짠짠 짠 짠짠]의 박자를 잘 못맞추는 사람은 40대 이상의 아줌마 아저씨들이라고 합니다. 우리 한번 실력발휘 해볼까요? 우리 월드컵을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대한민국]-- - --
그런데 시청 앞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다 보니까 급하게 임시 화장실이 설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잠깐 볼일을 보면 되는데 여성들은 복잡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성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에는 늘 사람들이 긴 줄을 서야 했습니다. 할수없이 남자 화장실을 여성 화장실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남자 화장실을 여성 화장실로 개방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남성들이 화장실 문 앞에 참으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나와야지요! 오래걸리는 겁니다. 급하기는 한데! 그래서 다급하게 화장실 문을 노크 했습니다. {똑똑 똑 똑똑] 그랬더니 안에서 여성의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한민국]하더랍니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이익을 얻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 서로가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인정받게 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인정받는다고 하는 것은 매우 기쁜일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계에 인정받았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입니다. 특히 우리는 새로운 응원문화를 통해서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의 귀중함을 인정하고 인정받는 귀중한 효과를 얻은 것입니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10-20대의 청년들이었습니다. 그 동안에는 이 청년 세대들을 어른들은 매우 미심쩍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컴퓨터 세대들의 개인주의를 우려했었습니다. 공동체 의식이 매우 약하다는 평을 해오기도 했습니다. 공동체 의식이 없으니 애국심이 있겠느냐? 그들이 과연 사회에 대한 연대 의식을 갖을 수 있느냐? 하는 평가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10-20대들은 비록 전후 세대로서 경제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자유스럽게 성장한 세대이긴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기성세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자유스럽고, 표현력이 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공동체 의식 또한 대단해서 앞으로 이 사회를 이끌어 나갈 미래의 주역들임을 확인했습니다.
저는 우리집 아이들이 거리응원을 나가기 위해서 굉가리를 들고,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집을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386세대였던 나의 옛모습을 생각했습니다. 87년 6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길거리로 나가서 독재에 대항했던 그 젊은이들의 함성을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정치적인 이슈요 지금은 스포츠가 이슈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으로 볼 때에는 모두 애국심을 바탕으로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관중과 응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에 작은 감동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모두 애국하는 마음은 모두 같은 모습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번 월드컵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아주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민족은 처음 월드컵이 시작될 때만 해도 별로 큰 관심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평가전에서 부터 한국축구가 내용상 매우 달라졌다고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에 따라 처음에는 소수의 붉은 악마가 응원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흥미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진행되면서 히딩크라는 외국인 감독과 선수들, 그리고 붉은 악마들과 나중에는 온 국민들이 혼연일체가 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선물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우리는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 여러가지 면에서 매우 많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이렇게 큰 선물을 주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세계에 드러내시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의 가치를 세계 만방에 인정해주시는 것일까요?
처음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붉은 악마에 대한 논쟁에 휘말려서 월드컵이 가져올 큰 파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왜 하필이면 [붉은 악마]냐? 하는 논쟁에 빠져들었습니다.
붉은 악마라는 응원단은 우리가 처음 고안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오래전에 유럽의 벨기에 라는 나라에서 시작한 것이 그 모델입니다. 벨기에는 유럽 땅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 가운데 속합니다. 땅덩어리가 아주 작습니다. 그런데 이 벨기에가 축구경기를 하면 늘 유럽의 강한 국가들에게 번번히 패했습니다. 그래서 벨기에 국민들이 생각하기를 아주 악바리 같은 응원단을 만들어서 우리도 한번 유럽의 다른 강호들을 꺽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그들은 [붉은 악마]라는 응원단을 조직해서 유럽의 강호들과 끝까지 싸웠습니다. 여기에서 부터 붉은 악마 응원단이 생긴 것입니다. 결국 벨기에는 그때를 기점으로 해서 유럽의 강국으로 떠올랐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유럽의 모든 브레인들이 이 벨기에 출신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 응원단도 여러가지 논의 끝에 벨기에에서 했던 붉은 악마 응원단의 모양을 본떠서 [붉은 악마]가 탄생한 것입니다. 붉은 악마라고 하는 말에 어떤 영적 의미를 담아서 그렇게 지은 것이 아니라 그저 조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천사가 어떻게 악바리 처럼 싸웁니까? 싸우는데는 그저 악마가 최고 아닙니까? 우리가 흔히 남편이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저 마귀같은 인간! 어쩜 저래!]하고 손가락질 합니다. 그 말에는 조크가 들어있는 것 아닙니까? [웬수같은 인간]이라고 해서 진짜 원수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붉은 악마]라고 하는 말에는 어떤 영적 의미를 담기 보다는 그저 조크일 뿐입니다. 우리 민족이 작고 보잘 것 없는 민족이지만 악착같이 악바리처럼 싸워서 이번 대회에 좋은 성적을 거두어보자는 그런 의도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 일각에서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해서 붉은 옷을 입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악마가 된 것처럼 생각했던 것은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이런 미심쩍은 마음으로 시작했던 우리 기독교인들은 월드컵이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하나님의 역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에 와서 한국선수들을 보고 느낀 것이 세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한국의 선수들은 돈을 위주로 뛰지 않더라! 하는 점입니다. 유럽의 선수들은 모두 자신들의 몸값을 위해서 뜁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 선수들은 약3-4억의 돈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프랑스의 [지단]은 일년에 구단으로 부터 받는 몸값만 자그마치 800억 이상을 받습니다. 우리 선수 23명 전부가 받는 돈보다 몇배가 되는 돈을 혼자 받습니다. 우리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선수들은 그야말로 돈을 거의 받지 않고 뛰었다고 할수 있지요?
그러면 우리 선수들은 무엇 때문에 뛰느냐? 한국 선수들은 [애국심을 가지고 뛰더라] 이것에 히딩크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젊은 청년 선수들에게 히딩크는 감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히딩크가 놀란 것은 선수들 중에 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많으냐? 23명의 선수들 중에서 무려 11명의 선수들이 기독교인들인데 이들이 모두 한결같이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경기가 끝나면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외국의 선수들을 보셨습니까? 우리 선수들은 한 명이 기도할 때도 있지만 여러 명이 동시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은 정말 우리 크리스쳔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선수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신앙을 갖아야 겠다고 느낀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월드컵 기간 중에 우리 선수들의 가족들 중에는 계속 금식기도를 하는 기도 후원그룹이 있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안정환 선수의 부인과 그 가족들은 많은 시간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송종국 선수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선수의 가족들이 모두 함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월드컵 대회위원장을 맡은 정몽준 회장이 소망교회 집사입니다. 패널티 킥을 찰때에도 관중석에 앉아 있던 많은 관중들은 기도했다고 합니다. 기도, 끊없는 기도의 행진 속에서 이번 월드컵이 진행된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행진이 있었으니까 우리가 4강에가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폴란드와 포르투칼과 이탈리아와 싸울때마다 상대방이 찬 볼이 왜 골퍼스틀 맞고 튕겨나옵니까? 이상하잖아요! 서너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중동 고등학교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축구볼을 찼을 때 골퍼스트를 맞고 나오는 확률이 얼마쯤 되는지! 17개 정도 차니까 그중에 하나가 골퍼스트를 맞췄습니다. 그것도 일부러 골퍼스를 맞추려고 하니까 그 중에 하나가 맞은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기도하는 힘이었습니다. 골퍼스트를 맞고 취어나오는 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한 것입니다. 세상에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요. 역사인 것입니다.
어제 터어키와 3,4위전을 하면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결승까지 가면 너무 교만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4위에 머물도록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터어키와의 경기에서도 그렇게 풀리지를 않았는데 마지막 2분을 남겨두고 송종국이 중거리 슛을 한 볼이 골인이 되었습니다. 송종국은 푸른 잔듸 앞에 꿇어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정말로 멋진 분이시다. 우리 태극전사들의 마무리를 기도로 마무리 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 기도하는 장면은 아마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감동을 느끼며 보았을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같은 하나님의 역사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경기였습니다. 졌어도 기뻤습니다.
붉은 악마 응원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처음에는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이 붉은 악마라는 이름 하에 붉은 티셔츠를 입으면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경기가 진행되면서 이제는 붉은 악마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전 민족적인 힘으로 결집되기 시작했습니다. 1966년에 북한이 월드컵에서 8강에 진출했던 것을 기억하도록 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표현의 응원 글귀를 통해서 우리는 통일에 대한 꿈과 미래에 대한 꿈을 잉태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약에 사단이 이러한 게임에 개입했다면 월드컵은 혼란스런 일들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쓰레기를 줍고, 질서를 존중하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부둥켜 안고 콧물과 눈물과 기쁨과 아쉬움이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모습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강한 역사를 보았습니다.
응원을 할때 손가락의 표시는 이것을 잘 나타내줍니다. 한손에는 [사랑 love) 또 한손은 [승리 Victory)를 나타내는 모양으로 응원했습니다. 처음에는 붉은 색이 생소하게 느껴졌습니다. 공산주의, 파업, 투쟁, 싸움, 혁명을 나타냈던 고정관념들이 깨지면서 점차 빨간 색은 정열, 사랑, 환희, 기쁨을 표현하는 색으로 친숙하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번 월드컵 행사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큰 은혜요 선물이라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 아시아의 축을 한국으로 옮기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처럼 마치 촛대를 한국으로 옮겨놓는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동안에는 일본과 중국에 그 힘이 실려 있는 것 같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한국에 그 촛대를 옮겨 놓으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본과 똑같이 월드컵의 주최국인데 일본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한국은 세계에서 인지도가 놀랍게 커졌습니다. 일본은 감히 따라올 수 없을 만큼 한국은 여러가지 면에서 큰 성과를 거둔 것입니다.
세계 속에서의 한국의 위치가 달라진 것입니다. 똑같이 주최를 했는데도 왜 일본은 별 성과가 없었습니까? 그것은 신앙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 동안 우리 한국민족이 나라와 국가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습니까? 비록 교회가 요즘 좀 고전하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 한국교회는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피눈물 나는 기도의 행진을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일본은 우상국가입니다. 그들은 침략국가 입니다. 제국주의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에게 고통을 준 나라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민족은 어떻습니까? 우리 민족은 960번이 넘는 외적의 침입을 받으면서도 단일민족으로 5000년의 역사를 이끌어온 민족입니다. 지구상에서 마땅히 없어져야 했을 그런 국가입니다. 왜 그러냐구요! 수없는 민족들이 모두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5000년이 넘은 역사 속에서도 우리를 지켜 주셨고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를 남겨 두셨고 또 이 민족에게 복음을 주셔서 복음 속에서 살게 하시는 축복을 주셨고, 또 마지막 말세까지 남겨 두셨다가 이렇게 갑자기 세계에 우리민족의 이름을 드높이시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생각할 때 한가지 아쉬움은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번도 다른 민족을 이기고 지배해 본 역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가 총칼을 들고 침략전쟁을 벌이자는 말은 아닙니다. 고려 초기에 왕건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북벌 정책도 포기되었습니다. 고려 말기에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장수들의 북벌론을 내세워 중국을 치려고 했지만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의 군사들에 의해서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한발자욱도 이 반도의 대륙을 넘어서지 못하고 줄곧 우리는 앉아서 무참하게 짓밟힌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마치 우리 나라의 역사는 갈보의 역사와 같다고 햇습니다. 짓밟혔다는 말입니다. 당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월드컵은 사실 총성이 없는 전쟁입니다. 이기고 지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기고 지는 것에 따라서 국민적 사기가 좌우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따른 부대적인 효과는 천문학적인 숫자에 이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세계의 4강에 올려 놓으셨습니다. 우리 민족은 그 동안 한번도 무력으로 남을 침공하지 않고 살아온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은 고난의 역사 속에서 평화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민족입니다. 평화의 귀중함을 알고 있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당했던 것을 아시고 그 보답으로, 우리 민족의 삶의 방식에 맞게 스포츠를 통해서 총성없는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이 고난 받은 날수대로 계산하여 우리 민족을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그 동안의 고난이 값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무력을 좋아하는 민족은 무력으로 망합니다. 그러나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한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우리들 처럼 축복해 주시는 구나! 하는 것을 깨닫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국민족의 가치를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를 깊이 받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네덜란드에 있던 히딩크 감독을 통해서 이런 일을 행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히딩크라는 인물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배우고 깨달아야할 많은 점들을 시사해 주었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이스라엘 민족이 스스로 깨닫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방민족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십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을 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치시도록 하신 것입니다. 바벨론으로 하여금 몽둥이가 되어 이스라엘을 치도록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방민족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온통 형식적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히딩크를 통해서 우리는 영광을 이루었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히딩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이 깨우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이제 히딩크와 선수들을 통해서 울려퍼지는 메세지를 들어야 합니다. 히딩크의 지도력은 가히 놀라웠습니다. 모든 인맥과 학연을 끊어버리고 능력위주로 선수들을 선발한 일, 선수들과 동고동락을 함께 하는 피나는 훈련,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다는 정확한 판단, 적재 적소에 맞는 선수를 배치하는 용병술, 앞을 내다보는 예견력, 패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소신, 모든 사람이 좋아할 수 있는 행동과 말, 책임성 있는 말과 행동, 모두가 우리에게 귀감이었습니다.
이러한 히딩크의 모습과 지도력은 많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회개하고 깨우쳐야 합니다. 특히 가장 부담을 많이 안은 사람들은 정치인들일 것입니다. 물론 열심히 노력은 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 정치인들은 이제 회개하고 깨달아서 새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온 국민들의 함성이 점점 더 커졌던 것은 국민들을 답답하게 만드는 정치현실에 대한 불만의 소리로 들어야 합니다. 이제는 이렇게 뭉쳐진 힘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 모릅니다. 옛날처럼 계속 싸움만하는 정쟁을 일삼는다면 이제 국민은 개혁의 길을 스스로 선택할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이번 10-20대들의 줄기찬 응원과 함성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드러낸 것이라고 봅니다. 10-20대들의 외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도 존재한다][나의 가치도 인정해달라]는 것을 드러낸 함성으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의 교육의 방향은 모두가 성적 위주였습니다. 대학 입학을 위주로 하는 교육 정책이었습니다. 한 반에서 25명 정도만 대학에 진학하게 되는데 우리의 교육정책은 25%를 위한 교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5:75의 교육을 시켜온 것입니다. 75%가 소외되는 교육!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75%의 학생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교교사들도 다르다고 합니다. 25%에 대해서는 [밥먹었니! 공부하느라 힘들지!] 그러나 75%의 학생들은 [공부도 못하는 놈들이 쓰레기 같은 놈들!] 요즘 학생들은 그러면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그래 나는 쓰레기다. 쓰레기 맛좀 볼래! 하고 덤빈다고 합니다. [그래 나는 쓰레기인데 언제 분리수거할래! 화요일이야 목요일이야!} 10-20대의 함성이 어느때보다도 높은 것은 이렇게 현실에 짖눌려서 생활하던 신세대들의 자기 목소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들을 인정해달라는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어쨓든 하나님께서는 월드컵을 통해서 우리의 가치와 존재 의미를 높여주셨습니다. 오늘 신명기 7장에서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성민으로 불러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을 세계 여러 민족 중에서 선택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세계의 어느 민족보다도 힘이 없고 숫자도 적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힘이 있으면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어떤 일을 이루었다고 할 것입니다. 숫자가 많은 민족이면 자신의 힘으로 어떤 일을 이루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힘도 없고, 숫자도 없고,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힘이 있는 민족이나 잘난 민족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보잘것 없고 연약한 민족을 택하셨습니다.
세계 여러나라가 있지만 우리 한국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비슷하게 고난의 역사를 경험한 민족입니다. 무엇보다도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민족을 선택해 주셨습니다. 복음 가운데 사는 민족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적은 민족이지만 이제는 세계에 8000명의 선교사를 보내고 있는 선교대국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수출하는 국가인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번 월드컵에서 하나님께서 보잘 것 없는 우리 민족의 이름을 세계 만민이 알도록 하셨을까요! 우리 민족인 단순히 잘먹고 잘사는 국가로 축복해 주시기 위한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분명히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 할 수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세계에서도 보잘 것 없게 적은 민족이지만 우리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당장 외국에 있는 선교사들은 아주 힘이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온 선교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고 모두가 한국에서 온 선교사를 인정해준다고 합니다. 백인과 흑인의 중간에 있는 황인종 한국인, 흰 화장품을 조금 바르면 백인들에게 선교할 수 있고, 검은 화장품을 조금 바르면 흑인들에게 선교할 수 있는 민족, 그 특유의 끈기와 성실함으로 오천년의 역사를 지니면 살아온 단일민족 한국, 120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많은 선교 현장을 누비면서 복음을 전해온 민족,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신화 하나를 창조했습니다. 이제 이 모든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가치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너는 귀한 존재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다. 그러기에 내가 이 시대에 너희를 불러 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비록 작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신 민족이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교회와 민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불쌍히 여기지도 긍휼히 여기지도 말라
신명기 7:1-16 / 김민호 목사
신년 주일을 시작으로 한 달 내내 ‘긍휼’에 대해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긍휼에 대한 대미를 장식하는 말씀으로, 이전의 이야기와는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하나님 내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한 해동안 입에 달고 살자 라고 수십 번 강조를 드렸는데, 오늘은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긍휼히 여기지도 말라”는 제목의 말씀입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죽기 전에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3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의 히브리어 책 이름은 ‘말씀들(히-데바림)’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성경책 이름을 지을 때는 맨 처음 시작되는 단어로 짓기 때문에 큰 의미부여는 없을 듯 합니다.
신명기의 영어 책 이름은 ‘듀터라너미(Deuteronomy)’라는 단어인데, 되풀이 하다, 반복하다, 한자로는 다시 재(再)의 뜻이 있는 듀터(Deuter)라는 말과, 규범, 법칙을 뜻하는 노미(nomy)라는 말이 합쳐져서 튜터라너미가 되었습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른바 하나님이 들려주신 말씀 중에서 핵심이 되는 말씀을 거듭해서, 되풀이 해서, 다시 한번 강조한 소위 ‘엑기스’만을 들려준 내용이 신명기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유언처럼 신명기 말씀을 되풀이하여 강조하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의 자자손손 후손들이 이 말씀을 늘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 지켜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만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중요한 말씀이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중요하지 않은 성경책이 없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도 신앙생활 하시는데는 신명기의 내용들이 많은 도전이 되고 능력이 되고 다시 돌이키는 기회의 말씀이 되리라고 봅니다. 자주 접하시면 많은 유익을 받으실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내자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가시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라고 하면, 어떤 땅이라고 들어보셨고, 어떤 땅이라고 생각하고 계신가요? 가나안 땅이 어떤 땅인지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신명기 11장을 읽어보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제가 간단하게 설명 드립니다. 신명기 11장에서 가나안 땅과 애굽 땅을 이렇게 비교합니다. 애굽 땅은 곡식을 심고 발로 물길을 내어 물을 댈 정도로 수량이 풍부한 땅이었습니다. 사시사철 강수량이 풍부해서 땅 자체가 옥토였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은 비를 흡수하는 땅이라고 기록되었는데, 반드시 적정하게 비가 내려 땅에 스며들어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대부분 가물어 있는 척박한 땅이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은 하나님이 정월 초부터 연말 까지 계속 돌보아 주시는 땅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만을 사랑하면, 늦은비와 이른비를 내려 주셔서 기름진 것을 먹고 배부를 것이다. 그러나 미혹에 빠져 다른 신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나면 하늘의 문을 닫아버려 비가 내리지 않고 땅이 소산을 내지 않을 것이며 계속 불순종을 거듭하면 그 아름 다운 땅에서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젖과 굴이 흐르는 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해 나가야만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제대로 순종해야 소산을 거둘 수 있는 땅이고, 오직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만을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땅입니다.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복지라고 불리우는 것이 바로 이런 땅을 말합니다. 순종과 사랑 없이는 젖과 꿀이 흐르지 않는 것이 바로 가나안 땅 이었습니다.
땅의 의미는 이제 아셨을 것이고, 그러면 ‘가나안’ 이라는 지명은 성경에 나오는 사람의 이름인 것은 아시죠? 혹시 가나안이 어디서 등장했는지, 누구인지 아십니까? 노아의 벗은 몸을 보고 옷을 덮어주지 않았던 ‘함’이라는 아들이 있었죠. 이 함의 아들이 가나안입니다. 곧 가나안은 노아의 손자인데, 노아는 이 술취한 사건이 있은 후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라고 손자를 저주하게 됩니다.
가나안은 무려 11명의 아들을 두었고, 이 가나안의 후손들이 팔레스타인 전 지역에 퍼져 살게 되었습니다. 1절을 읽어 드립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아멘.
여기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일곱 족속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이 전부 노아의 손자 가나안의 후손들입니다. 신명기와 여호수아에서는 가나안 일곱 족속의 이름이 자주 등장합니다. 여호수아가 이 일곱족속과 전쟁을 하여서 그들을 몰아내고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현재 시대에는 이 가나안 일곱 족속을 빗대어, “우리 마음속에 어두운 일곱 영을 몰아내자, 내 삶을 짓누르는 어둠의 일곱 산을 정복하자, 일곱 족속 쫓아내기 컨퍼런스, 일곱 영의 저주와 축복 세미나...” 별의별 이상한 구호와 모임들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불 건전한 단체에서 성령 집회를 빙자해서 연약한 자들을 끌어들이려고 외치는 구호들입니다.
1절에서 이 일곱 족속을 누가 쫓아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은 일곱 족속이 너희보다 힘이 세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는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인도하시고, 그 땅에 들어가게 하시고, 쫏아내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이 있고, 내가 친히 앞서 가서 싸우리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가나안 정복을 이루실 권능과 권세가 있습니다.
이런 저런 모임 쫓아다니고, 구호를 외친다고 해서 영적으로 성장하고 영적인 큰 유익을 얻는 것처럼 호도하는 모임에는 절대로 참석하서는 안 됩니다. 육적 싸움도, 영적 싸움도 다 하나님이 이기시도록 온전히 맡겨 드리는 것, 이것이 가장 완벽한 승리의 필수 요건입니다. 그러한 절대적인 순종을 배우게 하시려고 광야 40년을 보내게 하신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두 손 놓고 구경만 하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할 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4절을 읽어 드립니다.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3.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5.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아멘
“그 때에 너희는 그들(가나안 일곱 족속)을 진멸할 것이라”, 진멸하다는 말씀은 전멸시킨다는 뜻입니다. 진멸한다는 히브리어는 ‘헤렘’ 이라는 단어인데, 철저하게 파괴하다, 남김 없이 박멸하다, 쪼개고 갈라내다, 등등 전부 무시무시한 뜻으로 쓰입니다. 특히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전부 몰살시키라는 명령이 많이 내려졌습니다.
이 ‘헤렘법’의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이냐 하면, 사람을 진멸하라고 명령 하셨으면 하나도 남김 없이 남녀 노소를 구분하고 생명이 있는 인간들은 전부 죽여야 합니다. 가축까지 진멸하라고 명령 하셨으면 성 안에 있는 모든 생물은 전부 죽여야 했습니다. 만약 진멸하라는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으면, 무서운 징계와 심판이 내려집니다.
민수기 20장 16절에서는,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고 하셨고, 여호수아 8장 26절에서는, “아이(성의) 주민들을 진멸하여 바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다 죽이라는 명령을 따르는 것이 순종하는 것이라니, 저도 이런 구절 처음 읽을 때는 생각의 공황 상태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자비하신 사랑의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는 인간들을 어린아이까지 전부 죽이라는 이 무서운 명령을 내리셨다는 것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할 때, 남녀노소 전부 다 죽이는 하나님이 무슨 사랑의 하나님이냐, 하나님은 무자비한 전쟁광일 뿐이다. 이렇게 잔인한 신을 믿는 기독교인들 역시 제 정신이 아니다 등등 공격을 가합니다.
이 헤렘법에 대해서 성경 학자들도 난감해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잔인하고 무자비한 진멸 명령을 하셨을 까요? 2절에서 진멸하라는 말씀 뒤에는, 가나안 땅 사람들과는 어떤 언약(약속이나 계약)도 맺지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혼인도 맺지 말라는 말씀이 있고, 4절에서는, 그들과 결혼하며 함께 살게 되면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 당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과의 어떤 관계의 여지도 주지 않고 철저하게 끊어내고자 하신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그들을 살려 주고 그들과 살다보면 사이가 좋아지면 자연스럽게 그들이 섬기는 여러 우상 신들에 대해서 알게되고, 거부감이 없어지게 되고, 알게 모르게 점점 빠져들게 될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멀리하고, 떠나고, 배반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될만한 부정적인 요소는 근본부터, 뿌리부터 잘라내고 뽑아내려고 하신 겁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될것이라고 예상 된다고 해서, 그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전부 몰살하라는 명령을 내릴 필요가 있었을까요? 좋은게 좋은 거라고 무슨 대책을 주시면 안 되었을까요? 이런 이성적인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자신의 머리로 이해하고 판단하려는 시도는 매우 교만한 태도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사야 55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생각과 뜻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는 사실을 늘 인정하고 앞세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과정은 점점 하나님의 뜻과 생각에 나의 사고와 이성을 굴복시켜 가는 과정이어야만 합니다. 이성적인 생각, 인본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신본주의적인 사고로 전환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참 다운 삶의 모습을 표현할 때 다음의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① 신의 거룩하신 성품에 참여하려고 변화 되어가는 ‘되어짐(Being)’의 모습
②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확신과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 가는 ‘머무름(in christ)’의 모습,
③ 항상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거룩과 경건으로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 앞에 (라틴어-coram Deo)’ 두려움으로 서 있는 모습,
Being, in christ, coram Deo, 이 세가지의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언제나 일관성이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만 합니다.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 우리에게 은혜로, 선물로 주어졌다고 해도 계속해서 비가 내려주지 않으면 그 땅은 쓸모 없는 땅이 됩니다. 구원의 은혜가 귀에 들리고 마음 속에서 꿈틀댄다고 해도 계속해서 회개하며 죄와 처절하게 싸우지 않으면 거룩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미 다 얻었다는 교만함에 빠지면 천국문에 넉넉히 들어 갈 수 있는 굳건한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 갈 수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약속을 이루어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복 내려 주시는 감격의 순간이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진짜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시작의 순간일 뿐입니다. 광야 40년의 생활 보다 이제부터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6~10절까지 가나안 일곱 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신 이유들을 하나씩 설명하고 있습니다.
6절에, 하나님의 성민, 즉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7절에,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어서 보호 받아야만 하기 때문에,
8절에, 다만 그들을 사랑하시고, 약속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9절에,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천대 까지 보응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10절에, 하나님의 자녀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당장에 보응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모든 이유들이 백성중심, 민족 중심, 자녀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온전한 믿음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호 받으며 살아갈 환경을 만들어 줄 수만 있다면 그 주변의 모든 불행의 씨앗들을 원천적으로 끊어내시는 과감하고 냉정한 결단들을 거침없이 행하실 겁니다. 사람을 진멸하는 정도를 뛰어넘어 태양계를 삭제하고, 우주를 삭제하면서까지 사랑하는 자녀들의 영혼이 안전해 질 수 있다면, 내 자녀들이 평안하게 살아 갈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 선택을 주저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강단이 있음을 몸소 실천하신 사건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인간의 몸으로 우리에게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 하신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우리를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무엇이든 결정을 못하겠습니까? 우리는 진멸이라는 것을 이해 할 때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시고, 그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대단히 불합리하고 무자비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으나, 선하고 선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선택이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연약하고 보호 받아야 하는 나 때문에, 우리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겁니다.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내가 멸망 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도록 평안의 자리를 마련해 주시기 위함 이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을 진멸 하시면서 까지 허락하신 땅이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을 진멸하지 않게 되면 그 결과는 우상 숭배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배반하고, 보란 듯이 십계명의 제 1계명을 무참히 어기며 살아가다가 무참히 멸망하고야 말았습니다.
모세가 신명기에서 유언을 남기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전해 주었던, 되풀이 되는 말씀들을 그 후손들은 하나도 기억하지도 않았고, 하나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완전하게 진멸하지 못하면 이스라엘 백서들의 올무가 될 것을 엄히 경고 하셨지만 지키지 못햇습니다. 결과적으로 불순종과 패망의 역사가 있게 될 줄을 훤히 다 아시면서도 하나님은 진멸의 명령까지 내리시면서 끝가지 약속을 지키시려고 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씁쓸할 뿐입니다.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는 ‘여측이심 (如廁二心)’ 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은 가볍고 간사하여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있을 때는 허리를 굽히고 웃음을 지어 보이며 살랑살랑 하다가도, 자기 만족을 채우고 이득이 없다고 생각하면 눈길조차 주지 않고 냉정하게 자리를 떠나 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 여측지심의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 늘 살펴야합니다. 진멸하라는 명령에 거부감을 보이기 전에, 자신이 진멸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올바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11절의 말씀과 같이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아멘. 이렇게 하면 됩니다. 이 말씀을 두 글자로 압축하면 ‘청종’, 듣고 따르는 것에 힘쓰는 것, 이것이 신명기의 말씀이요, 모세의 유언이요,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결코 잊지말아야 할 절대 순종의 법칙입니다. 말씀을 지켜 행하면 복은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12~14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자가 받는 복의 내용들이 나옵니다.
12절에,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지켜 주시고 인애를 베풀어 주신다.
13절에, 사랑하시고, 번성하게 하시고, 후손에게 은혜를 주시고, 풍요롭게 하신다.
14절에, 어느 만민(백성) 보다 훨씬 더한 복을 받을 것이다.
15절에, 질병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이 질병에 걸리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이 정도로 말씀 하셨지만,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자에게는 만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이 그야 말로 헤아릴 수 없는 복을 누리는 은혜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 복중의 최고의 복은,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여 주시는 복,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영생복락의 참 안식을 누리는 복을 열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 이런 복의 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하고 있고, 또 그렇게 살아갈 수 잇는 충분한 기회가 제공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복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려면 이 말씀을 반드시 듣고 실천해야만 합니다. 우리 다같이 16절 말씀을 큰 소리로 읽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넘겨주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아멘.
“긍휼히 여기지 말라”는 말씀을 주목 하십시오. 긍휼히 여기라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분명히 긍휼히 여기지 말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멸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긍휼히 여기지 말고 진멸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죽고 죽이는 끔찍한 경우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도 긍휼히 여기지 말아야 할 것들, 진멸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음란함, 술, 도박, 향락, 허영, 교만, 시기, 정죄, 거짓.....이런 것들은 분명히 진멸해야 할 죄의 목록들입니다. 하지만 더 시급한 최고, 최대의 진멸대상은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불순종’입니다.
말씀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아니하고, 말씀을 들었어도 하나도 실행하지 아니하고, 사람들 앞에서는 말씀을 잘 지키고 있는 것처럼 포장하고, 말씀을 지켜 행함은 전혀 없으면서 입으로만 온갖 가식과 위선으로 살아가고, 말씀으로 행함의 열매는 없으면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앞장 서는 것, 이런 모습들이 불순종의 전형적인 행태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말씀 하셨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의 불순종을 향하여 긍휼히 여기지 말고 즉시 진멸하라는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진멸의 명령을 따라 불순종의 행태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고 즉시 끊어내고, 뽑아내면 영혼의 평안이 보장 됩니다.
하지만, 불순종의 행태들을 진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순종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기만하고 순종하기를 거역하는 자는 올무에 걸려 넘어져서 모든 삶이 곤고해지고 결국에는 패망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천국가는 그 날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지만, 사탄도 우리의 영혼을 빼앗는 그 순간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은 일곱 족속이 기승하고 있는 가나안 땅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임 당하는 살벌한 영적 전쟁의 한 복판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 하시면 긍휼히 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우리 모든 성도는 “내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는 기도를 드리실 때, 이 말씀도 한 쌍으로 꼭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1월 한달 동안 선포했던 ‘긍휼’을 잊지 마시고, 때마다 일마다 오직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구하셔서 가장 먼저 내 영혼의 안전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불순종의 행태들을 일체 긍휼이 여기지 않겠다는 남다른 각오와 결심으로 모두 다 진멸시켜서, 삶의 순간 순간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감동과 기쁨과 평안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신명기 강해 22
신 7:1-11 / 푸른교회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은 무인도 같은 대륙이 아니었습니다. 영국 청교도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갔을 때도 이미 거기에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나안도 마찬가집니다.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큰 7종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을 정복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민수기 13장을 보면 이스라엘도 일단 광야에서 탐색을 합니다. 정탐꾼을 먼저 보냅니다. 가나안 내부사정을 정탐합니다. 무려 40일간 가나안에 가서 정탐한 12명 가운데 10명이 보고하기를, 거기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더라고 합니다. 포도송이 하나를 장정 둘이서 옮겨야 할 만큼 그 땅이 비옥하더라고 합니다. 문제는 그 땅에 사는 여러 족속이 기골이 장대하고, 성읍도 크고 견고해서 현재 우리 힘으로는 어림도 없겠다고 보고합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 같다고 합니다. 가나안 정복을 이쯤에서 포기하는 게 옳을 것 같다고 보고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밤새 울고 불며 난리를 피웁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대대적인 소동을 벌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도 크게 진노하십니다. 10명의 정탐꾼을 급살하십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 살리십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보고를 합니다. 다 맞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올라가서 그들을 치자고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가나안을 치게 되었는데, 본문 1절 이하를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너희의 전력이나 너희의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힘센 7족속을 제압할 때 그들을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다 진멸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타협도 언약도 불쌍히 여기지도 혼인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여호수아 10, 11장을 보면 어린 아이들까지도 다 죽이라고 합니다. 우양이나 나귀 새끼까지도 다 진멸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여호수아 10, 11장은 참혹합니다. 여호수아가 진멸하되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는 말이 계속됩니다. 여호수아 10장 40절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그 온 땅 곧 산지와 네겝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호흡이 있는 모든 자는 다 진멸하여 바쳤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 그래서 우리는 의문을 갖습니다.
왜 하나님은 짐승 새끼까지 다 죽이라고 하셨을까? 왜 다 살육하라고 하셨을까요? 본문 4절 이하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신 이유가 나옵니다. “[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5]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가나안 원주민의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할까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원주민의 신은 많았습니다. 태양신 엘이 있었습니다. 역시 우상의 대표는 바알과 아세라입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이고, 아세라는 바알의 아내입니다. 생산의 신입니다. 따라서 바알과 아세라는 물질적 풍요와 쾌락을 원하는 본능과 가장 맞아떨어지는 신입니다. 바알은 돌로 만든 신이고, 아세라는 목상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주상을 깨뜨리라는 것은 돌로 만든 바알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알과 아세라 신은 예배행위가 음란합니다. 그 신전에서는 예배행위 자체가 음란행위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그들의 농사를 위해 제때 비가 오고 토지소산이 풍성하고, 가정에 건강한 자식을 생산하는 것은 다 바알과 아세라의 왕성한 성행위의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풍성한 소출이 있을 때는 바알과 아세라의 성행위가 활발할 때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전에서 바알과 아세라처럼 성행위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생겨난 게 신전 창기입니다. 신전 창기와 행음이 예배가 된 겁니다. 이런 원주민의 우상에 물들거나 빠질까봐 하나님이 그토록 철저히 다 멸절하라고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이런 명령대로 이스라엘이 정복과정에서 철저히 다 멸절했습니까? 겉으로는 다 멸절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결과를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두고두고 바알과 아세라 때문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고 심판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은 끝까지 바알과 아세라에 잡혀 살았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바알과 아세라가 하나님보다 훨씬 더 멋져 보인 겁니다. 그래서 끝까지 바알과 아세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는 유목민의 신, 광야의 신이고, 이제 우리가 정착했으니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게 맞다고 보았습니다. 농사 잘 짓고, 자식 잘 낳으면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정복한 이후 자기들에게 여호와보다 바알과 아세라가 더 적절한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형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막연합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형상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니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예배방법도 신전 창기와 함께 합법적으로 행음을 할 수 있었기에 오히려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극단하게 단속하셨음에도 끝까지 바알과 아세라를 포기하지 못했는데, 처음부터 하나님이 조금이라도 여유를 보였다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6절을 보시면, 너희야말로 여호와의 성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겁니까? 이스라엘이 잘 났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경건해서 택했습니까? 아닙니다. 이유가 있다면 단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종 되었던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구하셨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의 속량도 마찬가집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원인과 결과라는 도식으로는 도저히 우리의 선택과 구원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에는 원인이 없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랑하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크고 절대 배신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바알과 아세라가 미혹하더라도 하나님의 그 은혜를 절대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9절 이하입니다. “[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11]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우리가 잘 나고, 잘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만 섬기고 살면 천대까지 복을 누리고 산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배신하면 지체하지 않고 당장에 보응하겠다고 하십니다. 너무도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을 받고 속량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베푸시고 이루셨습니다. 까닭 없이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 이유 없는 구원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입니다. 바알이나 아세라 같은 우상이 아니라 신실한 하나님만 섬기고 그의 율법과 계명을 지킴으로 천대까지 은혜를 받고 살지언정 바알과 아세라 섬기며 불행하게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 민
신 7:1-11
성경은 항상 세상을 둘로 나누어서 보고 있습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세상의 멸망과 함께 사라져야 할 사람이고, 한 종류의 사람은 세상의 멸망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의 나라에서 영원히 존재할 사람입니다. 세상을 이렇게 둘로 나누어 놓고 사람들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백이면 백 모두가 후자의 사람되기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당신은 과연 하나님의 약속의 나라에서 영원히 존재할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자신을 쳐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세상을 둘로 나누어서 말하고 있고, 신자들 역시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에서는 이 구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을 볼 때는 세상이 둘로 나누어지는데, 정작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는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모르는 자들을 저주하고 아예 사람으로 인정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세상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무리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라고 저주를 퍼붓고 벌레 취급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얼굴에 어떤 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저주받은 사람같이 세상을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만도 아니고 열심히 일하고 웃으면서 잘 살아가는 것을 보고 성경이 그들을 구분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잊어버리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사회 생활을 하면서 이웃을 만나면서 과연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멸망 받을 사람으로 보여지고 있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경우에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 뒤에 드리워져 있는 멸망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단지 그 몸에 치렁치렁 걸치고 있는 세상의 것만 눈에 보이는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이마에라도 멸망 받을 자의 표가 찍혀져 있으면 그것을 볼 때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을 몰라서 멸망 받을 자다'는 생각을 가지겠지만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이상 그 점에 대해서는 순간순간 잊어버리고 살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 믿으나 안믿으나 다른 것이 하나 없고 마찬가지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덮어버리고 세상을 볼 때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사람을 보면서 '나와 별다를 바 없이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과 나를 비교할 때 나는 교회 다니고 저 사람은 절에 다니는 것 빼놓고는 전혀 다른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내가 과연 하나님의 백성, 즉 성민답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심사숙고 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는 분명히 차이점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점은 외모나 환경적인 조건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의 차이점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고방식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내가 과연 성민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려면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고, 내 하는 일들이 잘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정신으로 사느냐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성민의 모습은 누가 모방을 할 수 없습니다. 어느 회사에서 좋은 제품을 만들어서 인기가 있으면 금방 그것과 비슷한 것을 모방한 제품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법으로 똑같은 것을 만들지 못하도록 막고 있기에 망정이지 만약 법이 없었다면 똑같은 것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모방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좋은 부모, 좋은 스승, 좋은 회사까지도 모방해 냅니다.
'이러이러한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라고 하니까 좋은 부모 소리 듣기 위해서 시키는 대로 하려고 합니다. 금요일이 스승의 날이었지만, 이런 스승이 좋은 스승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좋은 스승이란 소리를 듣기 위해서 그대로 실천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방입니다. 원래 자기 모습을 스스로 자제하거나 감추고 다른 모습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모방입니다. 이 모방에는 종교적인 것도 한몫 끼고 있습니다. 즉 좋은 교회, 좋은 목사 등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특히 목사들이 좋은 목사 되기 위해서 얼마나 모방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본래의 자기 것을 감추고 좋은 목사라고 생각되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에 모든 힘을 쏟고 있습니다. 좋은 목사로 일컬음 받는 것이 자신의 자리를 굳게 세우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 목사가 좋은 교회 만들기 위해서 온갖 좋다는 것을 다 끌어들여서 좋은 교회 만들기 위해서 기를 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역시 좋은 교회 되어야 좋은 소문이 날 것이고 좋은 소문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란 모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역시 모방할 수 없습니다. 모방할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하고 어렵다기 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모방하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는 것이 신자의 모습이고 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모방을 하는 것도 자기에게 유익이 있을 때 합니다. 모방을 함으로서 오히려 손해가 온다면 아무도 모방을 하지 않습니다. 신자 됨이 바로 그렇습니다. 교회 됨이 바로 그렇습니다. 아무도 모방을 할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 신자의 모습이고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에게서 찾아봐야 할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좋은 성격을 찾는 것도 아니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복 받은 삶을 찾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신자됨의 증거를 찾으라고 한다면 결국 인격 좋고 돈많은 사람이 신자라고 일컬음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인격이 좋고 돈이 많은 사람과 어떻게 신자됨을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의 혼동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성민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그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 있는가를 점검하면서 결코 신자된 우리 자신을 세상 사람과 똑같이 보면서 살아가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뭔가 편치 못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 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라고 말씀을 보면 '아무리 하나님을 안믿는 이방인이지만 좀 너무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민족을 진멸하고, 진멸하면서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아라고 말씀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방인에게 이토록 잔인할 정도로 엄하시고 전혀 그들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우린 이 본문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엄청난 차별 대우를 볼 수 있습니다. 한쪽이 한쪽에 의해서 진멸을 당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잘되게 하고 이방인은 아예 남겨 놓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얘기들이 허황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의심도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는 허황된 이런 얘기들은 빼버리고 허황되지 않은 말을 해버립니다. 사람들에게 납득이 될 수 있고, 이해가 되고, 좋아할 만한 말만 골라서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교회에 나오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입니다.
앞서 말하기를 성경은 세상을 둘로 본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세상을 둘로 나눕니다. 진멸 당할 자와 진멸시키는 자입니다. 진멸 당할 자는 악한 족속이고, 진멸시키는 자는 의로운 족속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서로 그 어떤 연결점이나 타협점이 없습니다. 완전한 단절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라고 하고 그들과 혼인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혼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아름다운 꽃밭을 가꾸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꽃밭에 벌레가 들어와서 아름답게 가꾼 꽃을 상하게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그 벌레를 가만히 두겠습니까? 꽃밭을 지키기 위해서 벌레를 잡아서 없애버릴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마음이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명령도 우리를 위한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기 위한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를 복주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잘 지키면 복주고 못 지키면 벌주기 위한 명령이 아닙니다. 지금껏 교회 상식은 잘하고 못하고에 상벌이 달라지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잘해보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복이란 은혜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상벌 차원이 아닙니다. 5절의 명령도 그와 같습니다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명령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상을 싫어하시고 우상은 철저하게 짓밟으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우상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철저하게 무너뜨리십니까? 우상은 인간의 자기 사랑의 증거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신을 찾습니다. 자기를 지켜주고 보호해줄 능력자를 찾습니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곧 우상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신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신입니다.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며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신입니다. 다만 인간이 생각한대로 움직여 줘야 하고, 인간이 하자는 대로 따라와 주기를 바라는 신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이러한 우상을 깨뜨리고 찍고 불사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상이 아님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멸하고, 우상을 무너뜨리라는 것은 단지 가나안 민족을 벌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며 약속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분명히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에서는 결코 이방인과 같은 삶의 모습이 있어서는 안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멸망을 보고 어떤 것이 멸망의 모습인가를 마음에 새기라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진멸하면서 재미있어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즉 이방인을 진멸하면서 '내가 저들과 같이 산다면 나도 저들과 똑같은 결과를 당하게 될 것이다'는 것을 가슴깊이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을 깨뜨리고 찍고 불사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 채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세상을 진멸 당하고 불사름을 당할 멸망의 장소로 보지 않고 오히려 축복의 장소로 여기면서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성민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6,7절에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을 성민으로 택하심이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가장 수효가 적은 민족, 가장 힘이 약한 민족을 택하셔서 성민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과 하나님의 다른 점입니다. 우상은 적은 수효가 아니라 많은 수효를 기뻐합니다. 힘이 주어지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반대입니다. 수효가 적은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고 힘이 약한 것을 기뻐하는 분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하나님은 수가 많은 것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교회 부흥을 외치고 숫자를 늘이기 위해서 힘쓰는 것은 결국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임을 단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성민으로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자체에 선택할 만한 조건이 없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가장 적은 민족이었습니다. 힘이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성민으로 선택하셨습니다. 8절에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조상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성민으로 택하시고 바로의 손에서 끄집어 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스라엘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성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9절에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라고 합니다. 성민된 이스라엘이 해야 하는 일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대까지 하나님께서 인애를 베푸시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민은 자기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지 못했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셨음을 알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뭔가 남들처럼 많은 것을 남기지 못하고 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부끄러워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교회에서 남들처럼 하지 못한 것 때문에 자존심 상해하고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랑 받을 만한 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셔서 성민으로 택하셨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멸망의 모습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은 자기를 보고 자신이 한 것만큼 당당한 태도로 신을 찾고, 신이 자기를 사랑할 조건을 미리 갖추고 나오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밖에 있는 것이고, 그 때문에 진멸을 당해야 한 것입니다.
신자는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일을 하셨는가?'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만 보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성민의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은 자신만 크게 보이고 하나님은 크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민은 하나님이 언약을 이행하심으로 성민 되었음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신실하시다고 하는 것은 한번 하신 언약은 파기하지 않으시고 지키고야 마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이 이루고야 마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나를 성민 되게 하셨다는 것을 아는 자가 곧 성민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피흘림이 언약을 이루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민된 자는 오직 그리스도만 보이게 되고 그리스도만 자랑할 뿐입니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이루어진 과거의 사건을 주목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이런 성민의 모습을 누가 모방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사는 사람이 과연 세상의 크고 작은 것에 매여서 살아가겠습니까? 가장 적은 수의 민족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이방인과 똑같이 크고 많은 것을 좋아하면서 그것을 위해서 신을 찾고자 하겠습니까? 때문에 성민은 자기를 보지 않고 사는 자이며, 은혜로만 즐거워하는 자이며, 비록 작은데서라도 전혀 힘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성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애는 이런 성민에게서는 끊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들에게 과연 이런 성민의 모습이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로만 신자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성민이라고 떠들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민다운 모습이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결혼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눈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귀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방 사람이 더 좋아 보일 때 그들은 이방인과 혼인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것도 단지 결혼을 하지 않으면 무조건 성민 된다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조건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 귀하게 보이는 사람이 성민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