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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신 7:12-26
12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13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
14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15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 하사 너희가 아는 애굽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걸리게 하실 것이라
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넘겨주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17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
18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1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본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그와 같이 행하실 것이요
2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또 왕벌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여 숨은 자를 멸하시리니
21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2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
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기시고 그들을 크게 혼란하게 하여 마침내 진멸하시고
24 그들의 왕들을 네 손에 넘기시리니 너는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라 너를 당할 자가 없이 네가 마침내 그들을 진멸하리라
25 너는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네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올무에 걸릴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26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신 7:12-26 /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 여러분이 이 규정을 모두 듣고 그대로 지켜 행하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계약을 그대로 지키시어 여러분을 변함없이 사랑하실 것입니다. 13) 주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면,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 번성하게 하셔서 여러분의 후손들이 많아질 것이며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여러분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땅에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같은 토지의 소산도 풍성하게 하시며 소떼와 양떼도 많은 새끼를 낳게 하실 것입니다. 14) 여러분은 다른 민족들보다 더 많은 복을 받을 것이며 여러분 가운데에서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사람도 없고 새끼를 낳지 못하는 짐승도 없을 것입니다. 15) 여호와께서는 여러분에게서 모든 질병을 물리쳐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애굽에서 잘 알게 된 그 무서운 질병들을 여러분에게는 내리지 않으시고 여러분을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리실 것입니다. 16) 특별히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넘겨 주신 족속들을 모두 전멸시켜 버리십시오. 그들을 조금도 불쌍하게 여기지 말고 그들의 신들을 섬기지도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올가미가 되어 여러분을 파멸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17) [원주민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혹시 여러분은 `저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하고 많은데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쫓아낼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며 걱정할지 모르겠습니다. 18) 그러나 그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단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모든 애굽 사람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권능을 나타내셨던가를 생각하십시오. 19)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실 때에 얼마나 무서운 재앙들을 애굽 사람들에게 내렸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놀라운 이적들은 여러분이 직접 눈으로 본 것입니다. 주께서 강한 손으로 치시며 팔을 뻗치시며 여러분을 해방시켜 주시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제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저 가나안 땅의 모든 족속들에게 그와 똑같이 놀라운 이적들을 행하실 것입니다. 20) 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무서운 공포심을 일으키셔서 여러분을 피해 숨어서 살아 남은 사람들까지도 죽이실 것입니다. 21) 그토록 강하고 무서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가나안 백성 앞에서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22)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여러분 앞에서 그 족속들을 조금씩 쫓아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들을 단번에 없애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을 단번에 진멸시켜서 넓은 땅을 묵혀 두면 사나운 들짐승들이 번성하여 오히려 여러분에게 해를 끼칠 것입니다. 23)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땅의 족속들을 여러분의 손에 넘겨 주시고 그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떨다가 멸망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24) 주께서 그 땅의 왕들도 여러분의 손에 넘겨 주시면 여러분이 그들의 이름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것입니다. 어떤 왕도 여러분을 당해 내지 못하고 마침내 모두 여러분에게 멸망할 것입니다. 25) 그들이 섬기던 신상들은 모두 불질러 태우십시오. 그 신상에 입힌 은이나 금을 벗겨가질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 그런 것들을 미워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런 금이나 은을 탐하였다가는 재앙을 당할 것입니다. 26) 특별히 그 더러운 우상을 여러분의 집에 들여놓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그런 우상을 섬기면 여러분도 그들과 똑같이 멸망할 것입니다. 우상은 완전히 없애야 할 것이니 여러분은 그것을 철저히 미워하고 더럽게 여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에 들어가면 모든 토착민들을 진멸하고 그 후에 모든 법도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12-15) 하나님의 명령이 과격할지라도 절대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 가나안에 정착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12). 제일 먼저 주시는 복은 생육과 번성입니다(1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생육과 번성의 축복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잘 듣고 지켰기 때문입니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창 26:4-5) 다음은 건강의 복입니다. 아무리 많은 자손과 짐승이 있을지라도 건강하지 않으면 축복이 아닙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에게는 애굽의 악질(전염병)에 걸리게 하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16-26) 하나님은 가나안 민족을 두려워하지 말고 과거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2번씩이나 강조하셨습니다(18-19).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할수록 믿음이 깊어지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반면에 은혜를 망각할수록 믿음과 열정은 식어집니다. 따라서 성경 곳곳에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당부를 했습니다(딤후 2:8). 이어서 본문은 너희를 공격하는 세력들에게 왕벌(말벌)을 보내어 진멸할 것이니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21). 본문의 왕벌은 가나안 족속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초연적인 현상으로 가나안 정복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모든 도우심을 말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마침내 가나안 땅을 정복합니다. 정복 후에는 반드시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올무가 될 수 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가증이 여기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법도에 순종하여 자녀를 많이 낳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당신과 가정 그리고 우리 민족이 우상 숭배를 배척하고 하나님만 믿도록 기도합시다.
사랑과 공의는 공존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입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는데 공의는 잘못을 벌하는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람과 죄인을 동등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의로운 행위를 사랑하시지만 그릇된 행위는 미워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상 죄를 대신 지신 아들이라도 죽이실 만큼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죄인을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희생시킬 만큼 죄인인 우리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표입니다.
< 설 교 >
주를 간절히 의지하라
신 7:13-19 / 이영택 목사(동해명성교회)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모든 성도들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고 간절히 찾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사 50: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우상은 어떤 종류든 사람을 구원하지도 돕지도 못합니다.
(사 57:13)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들에게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 바람에 날려 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렘 17: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렘 17:8)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청종하며 의지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신 3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어떤 여인이 시력을 잃어 맹인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어디를 가도 남편이 꼭 손을 잡고 안내해 주어야 했다. 하루는 남편이 그녀를 데리고 공원에 나갔다. 두 사람은 바위 위에 앉았다. 그 때 여인은 남편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 눈동자에 당신 모습이 비치나요?" 비록 시력은 잃었지만 여인의 눈동자에는 남편의 모습이 비쳐지고 있었다. "그럼"이라고 대답해주자,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회복될 수 있어요." 시력이 없어도 그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비친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여러분 곁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습니다.
시력이 있든 없든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눈동자에 비쳐 지고 있습니다.
누군가 곁에 있을 때, 우린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히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시며 동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곁에는 영원히 주님이 지켜주시고 계십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사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1. 하나님의 축복의 선포
13)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 14)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15)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 하사 너희가 아는 애굽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걸리게 하실 것이라
흥함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되 번성하게 하십니다.
번성은 흥하는 일입니다.
뻗어나가는 입니다.
형통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자손에게 복을 주십니다.
곡식의 풍요를 주십니다.
질병을 멀리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미워하는 자에게 주는 축복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시 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시 127: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2. 올무가 되는 일을 금하라
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넘겨주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올무는 덫과 같은 것입니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에 치는 그물과 같고 짐승을 잡기 위해 치는 올가미와 같습니다.
스스로 올가미 뒤집어쓰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스스로 올가미를 뒤집어쓰는 어리석은 자가 어디에 있겠냐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올가미를 스스로 뒤집어쓰는 것이 인간입니다. 동물들만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걸리게 만드는 올가미가 되는 것들이 널려 있는 곳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넘겨주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나안땅에서 얼마만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주를 경외하고 행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광야 생활을 경험한 세대들은 그다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광야 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어떻게 받아드리며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광야 세대들처럼 행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이 철저한 교육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랍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광야생활을 살아온 부모만이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대한 실상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받은 성도는 은혜의 하나님을 가르치게 됩니다.
성령받아 변화된 성도는 성령의 하나님을 가르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을 받는 성도는 하나님의 축복받은 것을 가르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훌륭한 믿음의 아들로 키운 것은 자신이 만난 하나님의 대한 것을 잘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이삭 역시 야곱을 그리 가르친 것이고 야곱 역시 요셉을 그리 가르친 것입니다.
믿음이 훌륭한 부모만이 자녀를 훌륭한 믿음의 자녀로 키우게 됩니다.
이삭은 믿음의 훌륭한 아버지 아브라함이 있었고 야곱은 믿음의 훌륭한 아버지 이삭이 있었고 애굽에서 수 없는 고통과 환난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요셉 뒤에는 믿음의 훌륭한 아버지 야곱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성도가 걸려들 수 있는 올무가 너무도 많이 널려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보는 것도 듣는 것도 걷는 것도 조심해야 할 세상입니다.
신앙적으로 이단 사이비집단들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불평이 가득할 때 교묘하게 파고들어 교회를 떠나 이단에 매수됩니다.
외롭다고 생각할 때 매우 친한 벗처럼 접근해서 교회를 떠나 이단에 붙들립니다.
어렵다고 생각 될 때 엄청나게 도와 줄 듯이 접근해서 교회를 떠나 이단에 빠지게 만듭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물질의 올무로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고 십일조 문제에 빠져 시험에 걸리게 합니다. 각종 스포츠 문화 쾌락의 올무에 걸려 주를 떠나게 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다양한 올무를 사탄이 펼쳐놓고 성도들의 영혼을 사냥질 하려고 합니다.
바울사도는 말씀합니다.
(엡 6: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고 하였습니다.
제자인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3. 자신의 실력을 믿지 말라
17)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 18)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1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본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그와 같이 행하실 것이요
사람들이 두려움을 갖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두려움이냐 아니면 담대함이냐 하는 것은 믿음에 달려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베드로가 풍랑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나도 걸어 주님께로 가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지 베드로는 바다를 걸어봅니다. 그러나 금세 물속에 빠져듭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나요?
(마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고 하셨습니다. (막 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간절히 주를 찾고 의지해야 합니다.
결 론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 30: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시 115:12)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시 115:13)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주를 찾고 찾으며 부르며 부르짖는 믿음의 간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주의 팔을 의지함이라
신 7:17-21 / 김광일 목사
2003년 3월말에 방송된‘인간극장’의 주인공인 이지선씨는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4학년이던 2000년 7월 여름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오빠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음주운전 하던 차와 정면 충돌한 것입니다. 차에 불이 나는 바람에 지선씨는 몸의 55%에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 의료진들은 가망 없다며 치료도 안 할 정도였습니다. 그 후 7개월간의 입원 후, 일본으로 건너가 받은 11차례의 수술 때문에 많이 회복되었지만 예쁘던 얼굴을 되찾지는 못했습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막힐 만큼 무서운 사고를 당했지만, 더 이상 지선씨는 사고에 얽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화상으로 손가락 절단수술을 했기 때문에 두 엄지손가락만 자유로운 상태에서 지선씨는 병원 침대에 앉아 글을 쓰고 인터넷의 홈페이지도 혼자 만들었습니다. 지선씨는 누구나가 예상하는 것처럼 불행하지도, 힘들어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건강하고 씩씩했습니다. 지선씨가 이토록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힘이었습니다. 지선씨는 사고 전까지 성가대 활동을 했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모두 진실한 성도들이었습니다. 기자가 "어차피 빼앗아 가실거면 왜 예쁜 얼굴을 주셨는지 하나님이 원망스럽지 않느냐”고 묻자 지선씨는 “20년 동안이나 예쁜 얼굴로 살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지선씨의 모습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을 의지하고 사는 모습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강하신 팔은 지선씨를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본문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담대히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곳에 있는 우상들을 훼파 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할 때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큰 권능을 다시 한번 기억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나안을 정복하여 들어갈 때 거기에 있는 족속들이 숫자가 많고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해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의 강한 팔이 바로의 군대들을 무력화시키시고 홍해에 수장시켰기 때문입니다. "네가 혹이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 하리마는, 그들을 두려워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목도한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펴신 팔이 지금 이시간에도 우리를 붙들고 계시다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은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팔은 영원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그 팔을 "영원하신 팔"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 아래 거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팔을 의지하는 삶 속에는,
첫째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함이 있습니다
미국 벨 에어라는 지역은 부자들이 사는 동네입니다. 수 백만불짜리 집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으며 태평양의 푸른 물을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확 트이는 곳입니다. 거기에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온갖 부와 명예를 갖고 살아온 부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근심과 염려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밤마다 수면제를 먹으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간방에 사는 흑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주말이 되면 친구들과 함께 모여 찬송을 부르며 춤을 추며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어느 주말에 대부호인 주인은 흑인들의 방을 노크했습니다. 즐겁게 파티를 벌리고 있는 하인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기쁘게 만듭니까? 당신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염려나 근심이 없습니까?" 그때 흑인 노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님,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즐겁습니다. 우리도 염려와 근심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근심한다고 해결되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근심과 염려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팔에 내어 맡기면 하나님이 좋은 걸로 해결해 주심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별로 많은 일도 하지 않는데 장안의 모든 걱정을 다 끌어안고 근심하며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삶의 자세는 아닙니다. 내가 염려한다고 되어질리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내어 맡기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모든 염려를 어떻게 하나님께 내어 맡깁니까?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위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어져 갑니다. 마찬가지로 염려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팔을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늘의 평안이 우리 안에 넘쳐 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팔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이 확신을 통하여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마음의 평안함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어떤 어려움도 능히 이기게 하십니다
1988년 캐나다 캘거리 동계올림픽의 인기선수는 단 잔센이었습니다. 그는 스피드 스케이팅의 챔피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경기를 시작하기 직전 여동생이 죽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백혈병과 싸우던 동생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500m경기를 위해 빙판 위에 섰을 때 죽은 여동생이 떠올라서 경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경기를 망치고 말았습니다. 그 후부터 그는 삼류 선수가 되었습니다. 1992년 동계 올림픽까지 그의 경기력은 좀처럼 향상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동안 여러 경기에서 챔피언을 따낸 경력과는 아무 관계없이 경기에 참가 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습니다. 1992년 동계 올림픽 1000m경기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이 경기가 금메달을 따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출발지점에서 목에 건 목걸이를 만졌습니다. 8개월 된 딸아이의 탄생석이 달려 있었습니다. 딸의 이름은 제인 이었습니다. 죽은 여동생의 이름을 따서 자기 딸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 있는 팔을 의지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순간 마음의 평정이 왔습니다. 어떤 어려움도 문제가 되지 않는 담대함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금메달을 따는 것만이 하늘나라에 가 있는 동생에게 기쁨을 주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힘차게 스케이트를 지쳐나갔습니다. 마침내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하여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는 경기 내내 하나님의 강하신 팔을 의지하였고 하나님의 강하신 팔이 자신을 붙드는 체험을 통하여 경기에서 우승할 수 있었다고 회고록에 썼습니다.
운동뿐이 아니라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의 핍박과 고난이 닥쳐올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은 언제나 힘과 용기와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팔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후에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있는 팔이 그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모세는 지난 40년 동안의 체험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이 언제나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주셨음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느 곳, 어느 상황에 처한다 할찌라도 하나님의 팔이 승리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때로는 곤고한 날이 다가와도, 때로는 인생의 험한 풍파에 시달려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이 붙들고 계시는 한 세상을 넉넉히 이기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기쁨으로 언제나 찬양하게 하십니다
1887년입니다. 매우 겸손하고 신실한 음악교수 한 분이 있었는데 A. J. 슈발터라는 분입니다. 그 분이 어느 날 매우 슬픈 소식을 접합니다. 그가 가르쳐서 내보낸 두 명의 제자들이 함께 아내를 잃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두 제자는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존경하는 교수님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러나 슈발터교수는 그들에게 위로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펼쳐들었습니다. 신명기 33:27의 말씀이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희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이 구절들을 갖고 슈발터 교수는 합창곡을 만들어서 제자들에게 보냈습니다. 너무나도 은혜스런 찬송인 458장입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날이 갈수록 주의 사랑이 두루 광명 하게 비치고 천성 가는 길 편히 가리니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기뻐 찬미소리 외치고 겁과 두려움 없어지리니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은 슬픔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찬양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시편기자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큰 기쁨으로 찬양합니다. 시편 28편 7절에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문제들로부터 자유 하는 삶을 살도록 약속하신 것은 아닙니다. 문제없는 삶은 지구상에 없습니다. 사노라면 지붕이 샐 때도 있고, 자동차가 시동이 안 걸릴 때도 있고, 사람들이 화를 내는 날도 있습니다. 고통을 느낄 때도 있고, 때로는 이유 없이 거절당할 때도 있습니다. 인정받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병들 때도 있고, 피곤에 지칠 때도 있고, 괴롭힘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삶의 문제들로부터 예외일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 특권은 그 문제를 다스릴 줄 아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이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시편 37편 23절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 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새 번역은 24절을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고 번역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부터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어떠한 경우에서도 기쁨으로 노래하게 하십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게 하십니다. 어떠한 문제도 능히 이기게 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강하고 능하신 팔 아래 거하면서 하나님의 팔을 의지하고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억하라
신 7:17-24 / 정필도 목사
이 세상에서 가장 큰복을 받은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이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잘 살고 큰 권세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구원의 믿음이 없으면 이 세상을 떠날 때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가장 소중한 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산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행하고 믿음으로 말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은 세상을 이깁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4-5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염려와 근심과 불안을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구하면 우리의 구하는 바를 다 받을 수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막 9:23).
성경을 보면,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성공했고,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실패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할 때, 끝까지 믿음을 붙잡고 나아간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다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0:7이하를 보면, 그때에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범한 네 가지 큰 죄악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째, 우상 숭배의 죄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대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명예를 더 사랑하고, 세상을 더 사랑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의 우상이 되어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간음죄입니다. 이들은 집단적으로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범하기 쉬운 죄가 음행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시험한 죄입니다. 이들은 그렇게도 많은 기적을 보았고 체험했으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게 됩니다(민 14:22).
넷째, 원망죄입니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 내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밤낮 원망불평하게 됩니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것은 다 잃어버려도 결단코 믿음 하나만은 꽉 붙잡아야 합니다. 믿음만 잃지 않는다면 승리합니다. 반드시 회복됩니다. 구약의 신명기는,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광야에서 모두 다 죽은 후 그들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 다시 한번 믿음으로 살 것을 다짐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특별히 하나님이 이들에게 행하신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잊지 말고 기억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신 7:18-19, 8:2,18, 9:7, 15:15, 16:3, 24:9, 25:17).
우리가 한번 믿음을 가지면 그 믿음이 저절로 유지되는 것으로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가지기는 어렵지만 잃어버리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믿음은 밥 먹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한끼 배부르게 먹었다고 해서 영원히 먹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듯, 우리가 한번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저절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 평생 교회에 다녔지만 믿음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하는 것을 보나 생활하는 것을 보나 어디를 보나 예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이는 그 사람 속에 예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영혼이 너무 불쌍합니다. 이처럼 믿음은 가지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잃어버리기는 너무 쉽습니다. 얼마나 쉽게 잘 잃어버리는지 모릅니다.
빌립보서 2:12을 보면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됐지’했다가 잘못되기 시작하면 정말 정신없이 미끄러집니다.
베드로 사도는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라고 말씀했습니다(벧전 4:18). 다시 말해서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겨우 구원을 얻는데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쉽게 얻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유다서 1:23을 보면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불구덩이에서 타죽어버릴테니 불 가운데서 끄집어내어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입니다.
여러분의 가족들 중 임종이 가까우면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몇 년 했든지 직분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마지막으로 구원의 확신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빨리 복음을 제시해서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하고, 구원받은 기쁨과 평강 속에서 눈을 감게 해주어야 합니다. 교인들 중에 평생 믿음생활을 하고 직분을 맡아서 열심히 봉사했으면서도 마지막에 가서 배신하거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김일성의 외삼촌 뻘 되는 강양욱 목사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목사님이 된 몇 분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김일성이 북한에서 정권을 잡자 사단의 도구가 되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붙잡아가고 죽이고, 완전히 북한에서 기독교의 씨를 말리는 악한 일에 앞장섰습니다.
고린도후서 13:5을 보면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승리하며 살기 위해서는?
1. 하나님의 말씀을 늘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2을 보면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처음에 예수를 믿을 때는 그 믿음이 갓난아기와 같습니다. 따라서 교회에 출석하여 예수 잘 믿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은혜를 받게 되는 통로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다가 주의 음성을 듣기도 하고 성령의 불을 받기도 하며 병이 온전히 낫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항상 신령한 은혜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며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믿음을 잃지 않고 언제나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7-19을 보면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 그들을 두려워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목도한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그와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행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있는 분들은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지금보다 더 어려운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꼭 망할 것 같았고 죽을 것 같았는데, 하나님이 피할 길을 여시고 축복하셔서 그 어려움을 이겨내게 하시고 오늘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비록 지금 어렵더라도 과거에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되새겨보면, 감사와 기쁨이 넘치고 평강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어려움을 이기기만 하면 믿음이 더욱 단단해질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널 때, 기적적으로 홍해가 갈라진 것을 눈으로 직접보았고 그 바닷길을 밟고 건너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사흘째 되던 날 마라라는 곳에 이르러 물을 구했지만 쓴 물이 나와 먹지 못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원망불평했습니다. 이들은 사흘전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면 믿음이 건강해지고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믿음도 잃어버립니다.
3.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죽고 사는 것, 흥하고 망하는 이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신명기 7:21-24을 보면 『너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점점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두렵건대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이시고 그들을 크게 요란케 하여 필경은 진멸하시고 그들의 왕들을 네 손에 붙이시리니 너는 그 이름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라 너를 당할 자가 없이 네가 필경은 그들을 진멸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면 됩니다.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지 않고 살리시기로 결정하면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면 이 땅에 기근이나 환난이나 흉년이 와도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면 아무리 원수들이 우리를 저주하고 악담해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축복을 막을 자가 없고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살면 낙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민 14:8-9).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하나님만 붙잡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4. 무슨 말을 하든 말대로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평소에 마음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2:35-37절을 보면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악한 말, 더러운 말, 거짓된 말, 남에게 안 좋게 하는 말을 많이 한 사람은 무슨 무익한 말을 했든지 그 말한 것에 대해서 반드시 심문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우리는 죽었다. 망했다.”라고 아우성을 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민 14:28). 우리나라에도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야단칠 때도 악한 말이나 부정적인 말은 입에 담지도 말고 선한 말, 긍정적인 말만 하시기 바랍니다. 믿음 없는 말을 하면 믿음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너무나도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넘치도록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내 길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된다.” “길이 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하나님이 네게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기게 하실 거다.” 등등의 축복의 말, 믿음의 말, 긍정적인 말, 복 받을 말을 하면 믿음이 살아나고 축복을 받습니다.
5.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는 사람은 현재 내 형편이 아주 어렵다 하더라도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낙심하다 보면 절망에 빠져서 그냥 자포자기해 버립니다.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하고 병들게 하는 것이 낙심입니다. 그러므로 이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신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믿음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축복받은 비결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높은 분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보다 제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셨을 때의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고, 타협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항상 순종할 마음이 준비되어 있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들의 시기질투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도 그 모든 것이 전화위복되어 나중에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삭도 그 땅에 큰 흉년이 들었지만 하나님의 축복으로 백 배의 축복을 받고 거부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대로, 믿음으로 살면 좋은 일도 안 좋은 일도 괴로운 일도 지나고 보면 그것이 다 선을 이루어 유익하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위에서 말씀한 다섯 가지를 기억하고 살면 믿음이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믿음이 살아납니다. 믿음이 좋아집니다. 성공합니다. 믿음만 붙잡고 나가면 다른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왕벌을 보내시리니
신 7:17-24 / 피영민 목사
6·25가 우리에게 왔듯이 인류 역사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의 인간 역사를 요약하자면 갈등과 투쟁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창 3:1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를 창세기 3장의 표현으로 요약하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일어난 갈등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사라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모세는 말합니다. 가나안 땅에서도 소위 가나안 7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달라고 요구하거나, 노력이나 수고에 따른 보상으로 얻은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언약을 세우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땅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허락하셨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켜서 거룩함을 이루는 삶의 현장으로 삼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가나안 7족의 방해가 끊임없이 지속될지라도 가나안 땅에서 거룩함을 이루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이스라엘 백성과 가나안 7족의 비교
신명기 7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가나안 7족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7족은 헷 족속, 기르가스 족속,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그리고 여부스 족속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도 숫자도 많고 힘도 강한 백성들입니다. 모세는 이 가나안 7족의 특징을 2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가나안 7족은 우상숭배하는 백성들입니다. 아세라 목상과 조각한 우상들을 섬기는 백성들입니다. 둘째로 우상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유혹하는 백성들입니다. 여호와를 떠나서 다른 신들을 섬기도록 유혹하는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7족은 우상으로 유혹하는 백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 7:6-8)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민(holy people)입니다.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거룩하
다’는 말은 ‘윤리적으로 완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백성들이란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해 놓으신 백성들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대전 대흥침례교회의 안종만 목사님께서 제 집에 오셔서 기도를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특별히 구별해 놓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지금도 그 기도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구별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너무 은혜로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해놓으신 백성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다가 멸망당할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으신 거룩한 백성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택함 받은 백성(chosen people)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효가 많거나 능력이 많거나 어떤 조건이 좋아서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그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택하셨습니다. 이 선택을 무조건적 선택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에게 어떤 조건이 있어서 택함을 받았다면 그 조건을 잃게 되었을 때 마땅히 택함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적 선택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택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택함의 은혜를 잃어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받은 백성(loved people)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누렸던 백성이었습니다.
2. 가나안 7족의 영적인 의미
하나님께서는 이런 특징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7족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세 가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로 그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명하셨고, 둘째로 그들과 혼인관계를 맺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도들은 불신자들과 혼인관계를 맺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불신자들이 혼인관계를 맺은 후에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하면 모르겠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면 혼인하지 마십시오. 불신자와의 혼인은 집안에 우상을 끌어들이는 일이요, 집안이 망하는 일입니다. 혹시 지금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집안에 우상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다면 오늘부로 집안에서 우상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우상을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아무리 금이나 은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과감히 제거하십시오. 신명기 7장 25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너는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들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7족을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말고 철저히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겉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순종을 표현했지만, 그 마음은 달랐습니다.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 낼 수 있으리요”(17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속으로 ‘이 가나안 7족이 우리보다 숫자도 많고 힘도 강한데 어떻게 이들을 진멸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한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7족을 진멸하라고 하신 것은 어떤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이는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선 가나안 7족을 진멸하라는 것은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말씀처럼 우리의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회사의 위대한 인물이었던 히포의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에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방탕한 시간들을 보냈으며, 결혼도 하지 않고 한 여자와 동거하여 아데오다투스라는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거스틴이 32세에 밀라노에 가서 유명한 암브로스의 설교를 듣다가 회심하게 됐습니다. 회심한 후 성경도 부지런히 읽고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 길 가에서 왕년에 드나들던 술집의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어거스틴에게 “왜 요즘은 저희 집에 들르지 않나요? 오셔서 함께 술 한 잔 하세요”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러자 어거스틴은 “옛날의 어거스틴은 죽었소. 나는 새사람이 됐소”라고 대답을 했다는 역사의 일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 속에는 예수님을 믿기전부터 있었던 옛 성품, 못된 성품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옛 성품과 새 성품이 공존하는 복잡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새 사람이지만 여전히 그 속에는 옛 성품과 새 성품이 공존합니다. 불신자들은 옛 사람 속에 옛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일관성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죄인 줄 모르는 옛 성품을 지니고 옛 사람으로 살다가 지옥에 갑니다.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의 삶은 천국을 향한 여정입니다. 이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옛 성품이 우리 안에 남아서 지속적으로 우리를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보다 복잡한 존재입니다. 어떤 때는 성자 같다가도, 어떤 때는 죄인입니다. 새 사람이지만 옛 성품과 새 성품이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니라 영토와 주권과 백성을 가진 새로운 민족 국가요, 새 나라입니다. 그러나 새 나라 가나안 땅에도 여전히 가나안 7족이 도사리며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훼방합니다. 그러므로 이 가나안 7족은 구원받은 신자들의 삶속에 남아 있는 죄, 즉 옛 성품을 가리킵니다. 7족이기 때문에 종류도 많고 그 영향력도 강한 것입니다. 본문 20절 말씀을 보면 이 가나안 7족은 숨어 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또 왕벌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여 숨은 자를 멸하시리라” 동굴과 지하와 땅 속 어두운 곳으로 모두 숨어버렸습니다.
우리가 모두 예수님을 믿어서 거룩한 성자가 된 것 같아도 우리 속에는 가나안 7족들이 숨어버린 것처럼 옛 죄악들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용기 없는 굴함이 겸손으로 위장할 수 있습니다. 또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다보면 죄마저도 무조건 덮어버리면서 공의가 희생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죄를 엄히 다스리고자 하면서도 자기 죄는 다스리지 않고 남의 죄만 다스리는 정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뻔뻔스러움이 담대함으로 변질될 수도 있고, 사람과의 의를 지키고자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의무를 저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옛 성품의 간교함, 교묘함, 은닉성입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 속에 교묘하게 숨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 ‘이렇게 숫자도 많고 강력한데다가 숨어 있는 가나안 7족들을 어떻게 잡아서 진멸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와 동일하게 우리도 위대한 사도 바울처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1-24)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3. 왕벌을 보내리니
그렇다면 이 숨어 있는 죄를 몰아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는 무엇일까요? 바로 ‘왕벌’(hornet)입니다. 이 왕벌은 꿀벌(bee)과는 다릅니다. 꿀벌에게는 쏘여도 그냥 조금 부르틀 뿐 고통스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왕벌에게 쏘이면 졸도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해 여름산상성회에서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왕벌에 쏘여 졸도하는 바람에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신 후에 깨어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수양관의 벌을 우습게보지 마십시오. 연약한 사람은 왕벌 몇 마리에 쏘이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옛날 페르시아 군대가 코끼리를 타고 기독교 도시와 전쟁을 하기 위해 접근했을 때 그 군대는 전쟁을 하기도 전에 모두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도시에 있는 왕벌들이 모두 코끼리에게 덤볐기 때문입니다. 왕벌에 쏘인 코끼리들이 가려워서 날뛰는 바람에 그만 군인들이 모두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조그만 왕벌이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왕벌을 보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출 23:28) 또한 여호수아서에서도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사람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수 24:12)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벌을 두셔서 그 쏘는 무기로 남아있는 죄를 다스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계시를 많이 받아서 성경을 무려 14권이나 썼던 사람입니다. 자칫하면 교만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육신의 왕벌을 보내셨기 때문에 교만죄를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정에 왕벌이 옵니다. 자녀들이 속 썩이고 남편이 손찌검 하는 것이 가정의 왕벌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업에 왕벌을 보내십니다. 될듯하다가 안되고 망하는 것이 사업의 왕벌입니다. 또한 국가적인 왕벌을 두어서 국가적인 우상숭배를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20세기에 일제치하 36년의 고통과 6·25 비극을 겪었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어쩌면 우리 조상들이 그런 왕벌을 맞지 않으셨더라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제 36년, 6·25라는 왕벌 두 마리를 보내시니까 유교도, 다른 종교도 모두 고꾸라지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독교가 이렇게 부흥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전 세계에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제가 1991부터 1992년까지 약 400명의 성도들이 모이는 연길의 신풍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얼마나 열심히 목회하시는지 저녁 7시에 설교를 시작해서 1시간 후에 축도까지 마쳤는데 예배를 끝마치지 않고 “피 목사님께서 설교 한 번 더 하시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한 시간동안 말씀을 전했는데 이목사님께서 또 나오셔서 “우리가 집에 가봐야 재미난 일도 없고 하니 피 목사님께서 설교 한 번 더 하시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 날 저녁에 무려 세 번이나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세 번째 예배를 마친 후에도 다른 목사님을 모셔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참 대단한 목사님이셨는데 그 목사님께서 그만 고문과 구타의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다른 분이 그 교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와 같이 종교를 탄압하고 전도하지 못하게 하는 나라가 전 세계에 절반이 넘습니다. 우리나라가 두 왕벌에 쏘이지 않았더라면 이와 같이 무지몽매한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벌을 한꺼번에 보내어 가나안 7족을 한꺼번에 쫓아내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7장 22절 말씀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점점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두렵건대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만약 왕벌이 한 번에 숨어 있는 가나안 7족속을 모두 쏘아 죽인다면 그 땅은 황폐하고 부패한 땅이 되고 말 것입니다. 가나안 땅 전체가 시체로 뒤덮일 것이고 온갖 들짐승들이 활보하며 다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왕벌을 몇 마리씩 보내서 숨어있는 가나안 7족들을 점진적으로 쫓아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와 싸우는 것도 점진적인 작업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사람이 죄와 싸워서 어느 시점에 이르면 단번에 죄를 짓지 않는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완전론(perfectionism)이라고 하는데 이 신학은 성경적이지 못한 이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을 때까지 죄와 싸워야 합니다. 목사라고 해도 절대로 죄가 없는 완전한 성자의 수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저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꾸준히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왕벌을 보내셔서 남은 죄들을 점차 쫓아내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의 점진적인 작업입니다.
결 론
이 말씀을 통해서 혹시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왕벌의 소리가 들리는 분이 계십니까? 혹시 왕벌에 쏘여서 지금 졸도 직전에 계신 분은 안 계십니까? 왕벌을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왕벌을 보내신 목적은 우리의 삶에 교묘하게 숨어있는 은밀한 죄를 찾아서 쫓아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목적이 달성되면 하나님께서는 왕벌을 거두어 가십니다.
여러분, 왕벌에 쏘여서 졸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날마다 자기점검(self-examination)을 통해서 은밀한 죄를 고백하며 이겨나가시겠습니까? 벌에 쏘이지 마십시오. 매일 자기 점검을 통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서 살게 하신 목적, 즉 거룩함을 이루고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이뤄나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건을 통하여 흐르는 네 가지
신 7:24-25 / 강문호 목사
오늘 나는 집안에 지니고 있는 물건을 통하여서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성경적으로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을 떠날 때는 꼭 흙을 한 자루 넣고 목에 걸고 해외로 나갔습니다. 자기 조국의 정신과 얼을 흙에 담아 가지고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네 가지는 영권, 인권, 물권, 체권 즉 건강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물건을 통하여 흐른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물건을 통하여 영권이 흐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나 그 분이 하여 주셔야 합니다. 이것을 영권이라고 합니다. 영권의 의미를 잘 아는 이가 야곱이요, 영권을 무시한 이가 에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 오는 장자권을 에서는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하였습니다. 야곱은 차자로 태어나 못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빼앗아 쟁취하였습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에서는 그 귀중한 것을 상실하였습니다.
어떤 물건 하나를 통하여 영권의 방향이 바뀌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가 두란노 서원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전할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행19;8-20).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그 때 말씀을 전하고는 기도를 하는 데 바울의 손을 통하여 희안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귀신이 떠나가고 병자가 낫고, 문제가 해결되는 수많은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점점 사람들이 많이 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바울이 일일이 안수기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 제자들이 바울이 가지고 있던 손수건과 앞치마를 가지고 가서 그런 사람들 몸에 댔습니다.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물건을 통하여 영이 흐릅니다.
나는 지금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시카코 무디 박물관에 갔을 때 마이크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왜 마이크를 박물관에 놓아 두었느냐고 물었더니 보통 마이크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무디가 주일 설교할 때 링컨 대통령이 들어 왔습니다. 링컨이 시카코를 방문하였다고 예배를 드리러 온 것이었습니다. 그 날 온 성도들이 성령을 달라고 통성기도를 하는 데 온통 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성령님이 뜨겁게 역사하시는 지 불덩어리가 되어 거룩한 무질서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방언, 통변, 예언하며 딩굴었습니다. 그 때 무디는 너무나 뜨거운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오! 성령님이여! 넉넉하오니 이제 그만 주옵소서. 더 주셨다가는 모두 미치겠나이다"
그 때 그 마이크가 이 마이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마이크를 붙들고 무디에게 임하였던 그 영이 내게도 임하기를 위하여 몸부림쳤습니다. 나는 그 마이크에 임하였던 그 영이 내게 임하기 위하여 간절히 야단맞으며 기도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건을 통하여 영권이 흐릅니다.
두란노에서 바울이 복음을 증거할 때 손수건과 앞치마를 통하여 영권이 움직일 때 마술하는 사람들이 마술 책을 가지고 와서 불사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술하는 책을 통하여 귀신의 영이 흐르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집에 가지고 있는 좋은 물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이 흐르고, 좋지 않은 물건을 통하여 귀신의 영이 흐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가증한 것을 집에 두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 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2. 물건을 통하여 인권이 흐릅니다.
물건을 통하여 영권이 흐를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가 흐르게 됩니다. 말하자면 인권이 흐르게 됩니다. 그 물건으로 그 사람의 영이 흐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할 때였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에 엘리야로부터 엘리야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졸졸 쫓아 다녔습니다. 엘리야가 이리 저리 다니다가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였습니다. 요단강에 물이 많이 흐르고 있으니까 옷을 벗더니 둘둘 말아 요단강을 쳤습니다. 그러니까 요단강 물이 갈라졌습니다.
엘리야가 승천할 때 겉옷이 떨어졌습니다. 엘리사는 그 옷을 주웠습니다. 그 옷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려니 요단강 물이 합하여져 있어서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이 옷으로 요단강을 쳤던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옷을 둘둘 말아 요단강을 치면서 말했습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나이까?"
이 때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엘리야가 가졌던 옷을 통하여 엘리야의 영이 나타났습니다. 엘리야의 믿음이 나타난 것입니다.
물건을 통하여 그 사람의 영이 흐릅니다.
미국 밴나이스 교회에서 집회할 때였습니다. 큰 호텔을 경영하시는 장로님이 제게 오더니 넥타이를 바꾸어 맸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넥타이를 매고 다니면 목사님의 부지런한 정신이 내게 흐를 것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강제적으로 넥타이는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물건을 통하여 그 사람의 정신이 흐르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장로님이었습니다. 그 후 그 장로님은 샌디에고에 큰 호텔을 구입하여 경영자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포항중앙 교회에서 집회할 때 일어난 일입니다. 2천명 가량 모이는 교회입니다. 그 중에 이불 장사하시는 집사님이 계십니다. 그 집사님은 해마다 부흥회 때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이불을 한 채씩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 교회에 오시는 강사는 그 이불을 덮고 잤습니다. 그리고 부흥회가 끝나면 그 교회에 가난한 사람을 순서를 정하여 놓고 차례로 드리는 것이 그 교회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흥회 마지막 날 저녁에 서 임중 목사님이 이렇게 광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전통은 강사님 이불을 한 분씩 나누어 드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 전통을 깨겠습니다. 강 목사님이 며칠 동안 덮고 주무시던 이불을 주려고 하던 사람에게 주지 않고 내가 덮고 잘 것입니다. 그리고 강 목사님의 영이 내게 흘러 들어오게 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이불 장사하시는 분이 일어서더니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불 받을 분은 부흥회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분을 실망시키면 안 됩니다. 내가 한 개 더 헌금하겠습니다"
그 사람이 물건을 통하여 그 사람의 영이 흘러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을 인권이라고 합니다.
부정적인 흐름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부부가 있었습니다. 30년간 금실좋게 잉꼬부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 여행을 부부가 다녀온 후부터는 음란하여졌습니다. 자연히 부부사이에 싸움이 잦았습니다. 원인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놀라운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일본에서 관광을 하면서 부채를 하나 샀습니다. 값비싼 좋은 부채였습니다. 그들은 그 부채를 침실에 펼쳐서 걸어 놓았습니다. 그 부채에는 여인 한 명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기모노를 입고 얼굴도 하얗게 예쁜 게이샤였습니다. 게이샤는 남자들의 성적 환란을 위하여 고용된 여인들입니다. 고급 창녀였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침실에서 늘 그 여인을 무심코 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음란의 역사를 일으킬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이 마귀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남편은 자기도 모르게 음란이 싹트고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부부는 이 부채를 불질러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평온이 찾아 들었습니다. 게이샤 부채를 통하여 음란한 영이 흘러 들어 온 것입니다.
물건을 통하여 인권이 흐릅니다.
3. 물건을 통하여 물권이 흐릅니다.
물건을 통하여 영권과 인권이 흐르지만 물권도 흐릅니다.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느냐는 물권과 연결이 됩니다. 창세기 30장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라반과 야곱사이에 품삯 계약을 맺었습니다. 양이나 염소중 아롱진 것, 점있는 것, 검은 것은 야곱의 것이 되고 그외의 것은 라반의 것이 되기로 하였습니다.
이 후 야곱은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기고 흰 무늬를 내어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를 향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물을 먹은 양들은 새끼를 얼룩얼룩한 것과 점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거부가 되었습니다. 버드나무는 푸름의 상징, 생명의 상징 곧 생명의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신풍나무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살구나무는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야곱은 성삼위일체의 도움으로 축복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세 나무를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 물권이 흘렀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세 자녀를 두고 다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유능한 사업가였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이였습니다. 하나님의 일도 잘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5년 전부터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얼마 안 가서 사업이 완전히 파산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 하는 일마다 되는 노릇이 없었습니다. 이제 집 한 채 남은 것도 날라가 버렸습니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이제 거지같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때 이들은 <까닭없는 저주는... 이르지 아니 하느니라>(잠26;2)라는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부부는 집안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가증한 것이 집안에 있으면 가증한 것이 올무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증한 것과 함께 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집안에 가증한 물건이 있으면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가증한 물건을 없애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는 데 침실에서 무엇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깜짝 놀라서 가보고 이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몇 년 전에 할아버지가 멕시코를 여행하다가 길거리에서 90센티쯤 되는 걸인 모습 조각 품을 사다가 선물로 주었습니다. 아주 정교하고 잘 조각하여 비싼 조각품이라 침실에 두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걸인이 마귀역사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귀중하게 간직하여 두었었는 데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쓰러져 깨지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부부는 그 깨진 걸인 상을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완전히 부수워 버렸습니다. 그 순간 궁핍의 저주도 깨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시 사업은 번성기를 맞았습니다. 그 동안 잃어 버렸던 재산도 다시 찾았습니다.
그 걸인 조각상에는 궁핍을 가지고 오는 저주가 붙어 있었습니다. 가증한 물건을 집안으로 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물건을 통하여 물권이 오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합니다. 집안에 무슨 물건을 가지고 있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4. 물건을 통하여 체권이 흐릅니다.
물건을 통하여 영권, 인권 그리고 물권이 흐르는 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그런데 물건들을 통하여 몸에 건강과 병도 흐릅니다. 아무 물건이 집안에 두면 안 됩니다. 마귀 역사하는 그림이나 물건은 다 버리는 것이 가정을 위하여 좋습니다.
마태복음 9장을 보면 열두해 혈루증을 앓는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열두 해를 피를 쏟으며 고생하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의사를 만나고 모든 약을 다 써도 낫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통하여 예수님의 능력이 임하였습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베로니카로 알려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가시다가 쓰러지셨습니다. 그 때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예수님의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베로니카는 그 손수건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 황제가 병들었습니다. 로마 총독은 자기 나라가 지배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예수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분이 안수하면 다 낫는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모셔 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때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고 안 계실 때였습니다. 빌라도가 고민하고 있을 때 베로니카가 자기 손수건을 한번 보내 보자고 하였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그렇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몸에 닿았던 그 손수건을 로마 황제에 얹었더니 병이 나았습니다.
물건을 통하여 건강이 흐르는 경우를 본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물건을 통하여 병이 흐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프리카 선교사의 간증입니다.
의사로서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에 병원을 세웠습니다. 수많은 흑인들을 치료하던 어느 날 아내가 병이 들었습니다. 도무지 무슨 병인지 병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 큰 병원을 다 돌아 다녔습니다. 역시 병명을 찾지 못 하였습니다. 아내는 점점 생명이 꺼져 가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이왕 죽을 바에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선교하다가 사명속에 죽겠다고 결심하고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 왔습니다. 그 때 영적으로 깊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선교사 부인 팔목에 걸려 있는 팔거리를 유심히 보고 물었습니다. 형형색색의 줄로 꼰 팔찌였습니다. 어디에서 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병원을 세운 마을에 살고 있는 마술사가 준 장신구였습니다. 그는 그 것이 병의 원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마을에 살고 있는 마술사는 예수믿는 이들을 싫어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이들에게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그 것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늘 마술을 걸어 왔던 것이었습니다. 선교사 부인은 그 팔찌를 빼냈습니다. 그리고 산산조각을 잘라 버렸습니다.
거짓말처럼 병이 나았습니다.
아람 장군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자기 나라에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땅으로 가서 요단강에서 목욕을 일곱 번 하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집으로 돌아 올 때에 자기가 고침 받은 땅의 흙 두 바리를 가지고 돌아 왔다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아만이 가로되 그러면 청컨대 노새 두 바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왕하5;17)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을 고침받은 후에 그 곳에서 흙을 가지고 왔습니다. 기념으로 가지고 온 것이기도 하지만 다시 문둥병이 재발하면 이 곳을 생각하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둥병을 고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물건을 통하여 건강이 흐르기도 하고, 병이 흐르기도 합니다. 물권을 통하여 물권이 흐릅니다.
나는 어느 교인이 잘 때 십자가를 머리맡에 놓고 잔다거나 성경을 펴놓고 잔다고 할 때 이상한 믿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은 정말 성경을 통달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물건을 통하여 영권과 인권과 물권과 체권이 흐르는 것을 잘 이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상기하여 봅니다.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 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26)
가증한 것을 집에 들이지 말라
신 7:24-25 / 강문호 목사
솔로몬은 잠언에서 말하기를 <까닭없는 저주는 ....이르지 아니 하느니라>(잠26;2)라고 하였습니다.
집안에 작은 우환하나라도 까닭없이 일어나지 않습니다.반드시 그 뿌리를 캐내 보아야 합니다.하나님이 사랑하는 가정일수록 예민하게 그런 역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반드시 벌이 있습니다.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왕들을 네 손에 붙이시리니 너는 그 이름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라 너를 당할 자 가 없이 네가 필경은 그들을 진멸하리라.너는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 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들까 하노 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가증히 여기 시는 것임이니라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 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신7;24-26)
가증한 것이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물건을 말합니다.가증이란 히브리어 단어는 <토에바>인 데 이 말은 <몹시 싫은 것><혐오감을 일으키는 물건><혐오감을 일으키는 관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이런 것들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고 하였습니다.이유는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오기 쉬운 가증한 물건들은 무엇일까요?
1.음란 비데오 테이프나 음란 서적,음란 음악
지난 주간 나는 안양에서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도중에 한 집사님이 감사헌금을 하였습니다.그 헌금봉투에는 <우리 남편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음란 비데오 보기를 즐깁니다.자녀들에게 들키기도 하였습니다.집안이 온통 음란 투성입니다.이런 저주가 끊어지게 하옵소서>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음란으로 유황불로 멸망되었습니다.로마 근처 도시 폼페이가 음란으로 화살폭팔 용암에 묻혀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음란입니다.음란 비데오 테이프,음란 그림,음란 서적이 가정에 있으면 빨리 골라내어 불테워 버려야 합니다.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 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바울이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증거할 때였습니다.
온통 마을 사람들에게 귀신이 붙어서 갖은 못 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심지어는 스게아라는 제사장이 있었는 데 아들이 모두 7명이었습니다.악귀들이 그들에게 달려 들어 옷을 벗겼습니다.그들은 옷이 벗겨진 채로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바울이 귀신을 쫓아 내버렸습니다.그들은 마술하던 책을 모아 왔습니다.은 5만량이나 되는 엄청난 책이었습니다.이 책들을 모두 불살라 버렸습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 라.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19;18-20)
그런 가증한 서적들을 불사르고 나니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습니
다.집안을 뒤져서 가증한 서적들을 모두 찾아내어 불사르십시요.이런 가증한 것들이 가정에
서 못 된 일들을 만들어 냅니다.
<까닭없는 저주는... 이르지 아니 하느니라>
2.가증한 가구
가증한 것을 집안에 들이면 함께 멸망당한다고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그런데 가증한 물건중에 가증한 가구가 있습니다.가증한 장신구도 있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사의 간증입니다.
의사로서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에 병원을 세웠습니다.수많은 흑인들을 치료하던 어느 날 아내가 병이 들었습니다.도무지 무슨 병인지 병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미국으로 돌아와서 큰 병원을 다 돌아 다녔습니다.역시 병명을 찾지 못 하였습니다.아내는 점점 생명이 꺼져 가고 있었습니다.아내는 이왕 죽을 바에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선교하다가 사명속에 죽겠
고 결심하고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 왔습니다.그 때 영적으로 깊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그 분은 선교사 부인 팔목에 걸려 있는 팔거리를 유심히 보고 물었습니다.형형색색의 줄로 꼰 팔찌였습니다.어디에서 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병원을 세운 마을에 살고 있는 마술사가 준 장신구였습니다.그는 그 것이 병의 원인인 것을 알았습니다.그 마을에 살고 있는 마술사는 예수믿는 이들을 싫어 하였습니다.그래서 예수믿는 이들에게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그 것을 주었습니다.그리고 늘 마술을 걸어 왔던 것이었습니다.선교사 부인은 그 팔찌를 빼냈습니다.그리고 산산조각을 잘라 버렸습니다.
거짓말처럼 병이 나았습니다.
우리 가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지금부터 약 5년전 아내가 직장암 수술을 받았습니다.그 후 아내는 가구를 보다가 장롱에 용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제법 비싼 장이었지만 과감하게 바꾸어 버렸습니다.
지난 주간 수술한 의사에게 정밀검사를 받았습니다.중앙병원 유 창식 박사가 말했습니다.
"이제는 의사를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집에 가면 술병들이 구구 색색 놓여져 있는 것을 봅니다.가증한 물건들입니다.결코 복을 주지 못 합니다.자식들이 이렇게 아버지가 술을 많이 마셨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
다.술종류가 이렇게 많고,술병 종류가 이렇게 많다는 것을 알아서 유익될 것 없습니다.다 깨뜨려 버려야 합니다.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 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3.가증한 사람
가증한 것을 집안에 들이면 함께 멸망당한다고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그런데 가증한 것중에 가증한 사람이 있습니다.
중이나 무당을 집안으로 끌어 드리면 안 됩니다.물론 전도할 목적으로 하나님앞에서 부정
을 제하는 기도를 한 후 집안으로 들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집안에서 놀음꾼들을 불러 들여 놀음을 하여서도 안 됩니다.범죄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불경건한 말이나 일들을 하여서도 안 됩니다.
아름다운 부부가 있었습니다.30년간 금실좋게 잉꼬부부로 살았습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 여행을 부부가 다녀온 후부터는 음란하여졌습니다.자연히 부부사이에 싸움이 잦았습니다.원인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이들은 놀라운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일본에서 관광을 하면서 부채를 하나 샀습니다.값비싼 좋은 부채였습니다.그들은 그 부채를 침실에 펼쳐서 걸어 놓았습니다.그 부채에는 여인 한 명이 그려져 있었습니다.자세히 보니 기모노를 입고 얼굴도 하얗게 예쁜 게이샤였습니다.게이샤는 남자들의 성적 환란을 위하여 고용된 여인들입니다.고급 창녀였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침실에서 늘 그 여인을 무심코 보고 살았습니다.그러나 그것이 음란의 역사를 일으킬 줄은 몰랐습니다.그것이 마귀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남편은 자기도 모르게 음란이 싹트고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부부는 이 부채를 불질러 버리고 말았습니다.다시 평온이 찾아 들었습니다.가증한 그림까지도 끌어 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문신을 한 사람도 가증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28)
문신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지금 얼마든지 지울 수 있습니다.병원에 가서 지워야 합니다.
유행을 따르는 이들도 가증한 사람들입니다.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출23;1-2)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3요11)
머리에 염소꼬리를 하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이는 영국에서 위카(Wicca)라고 불리
우는 우상숭배자들이 사단에게 충성표시로 하던 습관입니다.이것을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렇
게 하고 있습니다.
다 버려야 합니다.<까닭없는 저주는... 이르지 아니 하느니라>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 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4.여행하면서 구입한 이상한 우상같은 물건
가증한 것을 집안에 들이면 함께 멸망당한다고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그런데 가증한 것에 여행하면서 구입하였거나 선물받은 이상한 물건들이 있습니다.이런 것들도 가증한 것
들입니다.
관광지에서 파는 기념품들 중에 반 수 정도가 가증한 물건들입니다.그런 것들을 집안으로 사들이면 좋지 않습니다.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십시요.
<너는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 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들까 하노 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가증히 여기 시는 것임이니라>
그런 우상같은 상이나 귀신상이나 잡종교 상을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면 그 것들을 멸하
실 때 집안식구들이 다칠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족이 있었습니다.세 자녀를 두고 다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남편은 유능한 사업가였습니다.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이였습니다.하나님의 일도 잘 하였습니다.그런데 이상하게 5년 전부터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그러더니 얼마 안 가서 사업이 완전히 파산나고 말았습니다.그 후 하는 일마다 되는 노릇이 없었습니다.이제 집 한 채 남은 것도 날라가 버렸습니다.아무리 노력하여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이제 거지같은 신세가 되었습니다.그 때서야 이들은 <까닭없는 저주는... 이르지 아니 하느니라>라는 말씀이 기억났습니다.부부는 집안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가증한 것이 집안에 있으면 가증한 것이 올무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그 가증한 것과 함께 멸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우리 집안에 가증한 물건이 있으면 가르쳐 주시옵소서.그리고 그 가증한 물건을 없애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는 데 침실에서 무엇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깜짝 놀라서 가보고 이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몇 년 전에 할아버지가 멕시코를 여행하다가 길거리에서 90센티쯤 되는 걸인 모습 조각 품을 사다가 선물로 주었습니다.아주 정교하고 잘 조각하여 비싼 조각품이라 침실에 두었던 것이었습니다.그 걸인이 마귀역사를 하였습니다.그래서 귀중하게 간직하여 두었었는 데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쓰러져 깨지게 만들어 주셨습니다.부부는 그 깨진 걸인상을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완전히 부수워 버렸습니다.그 순간 궁핍의 저주도 깨지기 시작하였습니다.다시 사업은 번성기를 맞았습니다.그 동안 잃어 버렸던 재산도 다시 찾았습니다.
그 걸인 조각상에는 궁핍을 가지고 오는 저주가 붙어 있었습니다.가증한 물건을 집안으로 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 보십시요.그리고 가증한 물건이 발견되면 아무리 비싼 것이라 할 지라도 처분하십시요.
우리 교회 집사로 일하시다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김 XX집사를 기억하십니까? 그 집에 들어가면 천장에 이상한 글씨들이 있었습니다. 대들보 위에 있는 그 글씨를 지우도록 얼마나 권면하였는 지 모릅니다.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도 지우지 않았습니다. 다 나았떤 위암이 재발되었습니다. 그 뒤에 그 글씨를 다 깎아 버렸습니다.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습니다. 지금도 저는 내가라도 그 글씨를 지웠어야 했는 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 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마지막으로 이런 간증을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 나는 오랜만에 몹시 아팠습니다. 주일저녁부터 세광교회 집회인데 화요일 점심식사하고 나서부터 창자가 꼬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긴급하게 김 우영목사님에게 부탁하여 부흥회를 대신하여 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건강하던 몸이 왜 갑자기 이렇게 아파졌는 지를 조용히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박물관을 만들기 위하여 이곳 저곳에서 비싼 돈을 주고 수집한 우상같은 물건들 때문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박물관을 만들기 위하여 세계 곳곳에서 이상하고 호기심 있는 물건들을 많이 수집하여 두었습니다. 나는 아무리 비싼 것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재미있고 호기심나는 물건일지라도 버리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기도원에 두었었습니다. 지난 주간 과감하게 그것들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완벽할 정도의 건강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까닭없는 저주는... 이르지 아니 하느니라>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 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신 7:25 / 이성희 목사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살면서 신기해하는 한국 가정의 물건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김치냉장고, 둘째는 최첨단 밥통, 셋째는 다리접이 센스 있는 밥상, 넷째는 아름다운 잔소리 쟁이 내비게이션, 다섯째는 숟가락 젓가락이라고 합니다. 아마 그들의 눈에는 신기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 집에는 반드시 들여놓아야 할 물건들입니다. 우리 집에 꼭 들여놓아야 할 이유는 우리의 삶이 이것들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가전제품이 풍년입니다. 집에 들여놓은 물건들도 다양해졌습니다. 텔레비전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에어컨, 냉장고, 김치냉장고, 청소기, 러닝머신 등 들여놓은 것들도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런 것들을 다 집에 넣고 나니 텔레비전 봐야지, 운동해야지, 가진 게 많으니 관리해야지, 간수하는 시간도 많이 보내야지 이러다 보니 진짜 해야 할 것은 하지 못하고 엉뚱한 것에 시간을 많이 소모하기도 합니다. 집에 어떤 것들을 잘 못 들여놓으면 오히려 삶에, 인간관계에, 신앙에 지장이 있습니다.
박사과정에서 공부할 때에 도디 도널리라는 교수에게서 좋은 것을 많이 배웠습니다. 수도원 출신의 여교수이신데 이 분은 공부 시작하기 전에 항상 숨쉬기부터 합니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합니다. 들이쉴 때는 내 안에 들어와야 할 것을 초청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묵상하며 숨을 크게 들이쉬라고 하였습니다. 숨을 내쉴 때는 우리 속에서 나가야 할 것들을 묵상하면서 정말 내보내는 마음으로 묵상하며 숨을 내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속에 들어올 것이 나가고, 나갈 것이 들어오면 영혼이 파멸됩니다. 인생에서 나갈 것이 들어오고, 들어올 것이 나가면 인생의 혼돈이 옵니다. 이것이 결국 죄악이며, 결국은 멸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월절 사건은 그들에게 해방 기념일 정도가 아니라 후손 대대로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애급 집에는 죽음 신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모든 처음 태어난 것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집에는 죽음 신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양의 피 때문입니다. 죽음의 신은 절대 집에 들여보내면 안 됩니다. 절대로 집에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15-16에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고 합니다. 말세와 종말의 현상을 말합니다. 거룩한 곳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선다는 뜻입니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것을 삼킨다는 말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자가 거룩한 곳을 짓밟는다는 말입니다. 속된 것이 거룩한 곳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에는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고 합니다. 왜 가증한 것을 집에 들이지 말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구원이란 거룩하게 하신 것을 말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거룩한 사람의 집에 가증한 것이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27에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고 합니다. 가증한 것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거룩한 곳인데 가증한 것이 있을 자리가 못 됩니다.
우리 집에 들여놓은 것이 거룩한 것입니까? 아니면 가증한 것입니까? 영적 삶을 파괴하는 것입니까? 신앙성장을 저해하는 것입니까? 우리 집에 항상 거룩한 것으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언제 하나님이 우리 집 안을 검사하러 오셔도 거룩한 것으로 잘 정돈된 가정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가증한 것은 우상과 물질입니다.
신명기 7:25에는 “너는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네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올무에 걸릴까 하노리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가증하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괘씸하고 미운 것, 매우 불쾌한 것을 의미합니다.
‘가증한 것’의 히브리어는 ‘토에바’인데 ‘몹시 싫어하다’, ‘지독하게 미워하다’는 말입니다. 도덕적 영적 ‘혐오스러운 것’ 또는 ‘구역질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먹지 못하는 가증한 새, 짐승, 고기 등을 열거하여 이런 가증한 것들을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이 가리키는 가증한 것은 구체적으로는 첫째는 가나안 각종 우상들과, 둘째는 은, 금과 같은 물질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오늘날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집에 들여놓기에 가증한 것들입니다.
출애급기 20:4-5 상반절에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증한 것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증한 것이란 애급에서 배운 금송아지와 가나안의 우상을 금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앞으로 가나안에 들어가면 분명히 가나안 사람들의 우상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란 하나님을 제쳐두고 사람이나 사물에게서 육체적,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자원이나 공급을 찾으려는 관습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사물이나 사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돈, 과학, 교육, 연인, 섹스, 권력,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아주 쉽게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5에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5:5에는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이라고 합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가증하기 때문입니다.
가증한 것의 두 번째는 물질입니다. 물질은 언제나 사람을 추하게 만듭니다. 돈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그리고 돈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닌 중립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이 우상이 되면 가증한 것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돈은 굉장히 더러운 것입니다. 실제로 돈은 균이 많아 참 더럽습니다. 천원 권 지폐에는 얼마나 균이 많은지 모릅니다. 스타피로코커스 아루레우스균, 스타피로코커스에피더미디스균, 살모넬라균, 칸디다균종 등 9종의 병원균이 있답니다. 돈을 만지는 것은 병균을 만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전서 6:10에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무엇일까요? 돈을 사랑함이란 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재물을 주신 것은 남을 위해 주시는 것인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잘못 된 것입니다. 중립적이고 선한 것을 더럽고 가증한 것으로 만드는 재주가 인간에게 뛰어납니다. 죄를 지은 인간에게는 이런 재주가 발달했습니다.
가난한 유대인이 랍비를 찾아왔습니다. “랍비님, 40년 동안 사귄 죽마고우가 있는데 일을 함께 하고 함께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막대한 유산을 받아 부자가 되더니 아주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길에서 만나도 인사는커녕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 때 랍비는 “이리 오게. 창밖을 내다보게. 무엇이 보이나?” “예, 나무가 보이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이 보이고, 남자들이 길을 지나가는 게 보이고, 저쪽에서는 차가 한 대 오는 것이 보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랍비는 다시 “이번에는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안을 들여다보게. 무엇이 보이나?”라고 했습니다. “예 랍비님, 저 외에는 없습니다.” 랍비는 “그런 것이야. 사람이 돈이 없으면 창밖을 보는 것 같이 무엇이든지 잘 보이지만, 많은 돈을 가지게 되면 유리 뒤에 은을 바른 것 같이 자기 외에는 아무것도 보잊 않거든”이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것을 가증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면, 내가 가증한 사람이 됩니다. 가증한 삶을 살게 됩니다.
둘째, 가증한 것을 집에 들이면 멸망합니다.
신명기 7:26에는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가증한 것을 집에 들이게 되면 집을 멸망하게 한다고 합니다. 가증한 것을 집에 들이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증한 것에 대한 세 가지 태도를 명령하십니다. 첫째는 탐하여 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둘째는 집안에 들여놓지 말라고 하십니다. 셋째는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고 하십니다. 집 밖에서 우상 숭배하는 것도 금하시지만 나아가서 집 안에 우상을 들여놓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상을 들여놓게 되면 망한다고 하십니다.
각 인종과 각 종교가 신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념품이지만 그들에게는 우상이 있습니다. 아무리 기념품이라도 집에 두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국보급 불상을 재산이라고 하여 집에 두면 결국 그 불상이 집의 우상이 됩니다. 누가 훔쳐갈까 우상시하고, 흠이 갈까 우상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예 집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2에는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라”고 합니다. 형상뿐만 아니라 악한 생각도 가증한 것이므로 버리라고 합니다.
라헬은 야곱이 제일 사랑하던 아내였습니다. 라헬 외에도 레아, 빌하, 실바라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헬이 아버지 집을 도망쳐 나올 때 아버지 집의 수호신인 작은 드라빔을 훔쳐 나옵니다. 그것 때문에 야곱이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성경에 보면 라헬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였지만 조상이 함께 묻힌 막벨라 굴에 장사지내지 못했습니다. 우상인 드라빔을 집에 들여놓은 죄 때문입니다. 복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드라빔이 가정에 복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 자체가 망할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증한 것을 집안에 들여놓는 것을 결코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일전에 뉴스에 보니 어느 비리가 많은 대학교 이사장의 집의 금고에서 수십억 원의 현찰이 쏟아져 나왔다고 합니다. 이런 물건은 집에 들여놓을 것이 아니라 학교에 두어야 하고, 은행에 맡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돈을 집에 들여놓았으니 가증한 물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이 죽고 돈이 태어났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이 환생해 돈이 되었다고 합니다. 망할 것을 집에 두니 집이 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의 어느 독신 성직자의 집에서는 온갖 동영상 등 음란물이 가득이 나왔다고 합니다. 집에 없을 것이 있으니 삶이 엉망입니다. 결국 그의 삶이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증한 것들을 집에 두고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 집에 혹시 하나님이 보실 때 가증한 것이 없나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짐승을 다 쫓아내신 다음, 2:16에는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왜 그렇게 화를 내셨습니까? 가증한 것이 하나님의 집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지내고, 제사용 짐승을 파고, 돈을 바꾸는 일은 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빙자해서 인간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은 가증한 일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마태복음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란 말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로마군대가 예루살렘에 들어와 하나님의 성전을 짓밟을 것을 말합니다. 이런 가증한 것이 이스라엘의 집,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에 들어오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가증한 것이 거룩한 집을 짓밟지 않습니까? 가증한 것이 들어오면 망합니다.
그리스의 디오게네스는 무소유 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동네에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 디오게네스의 명성을 듣고 보고 싶어 하여 그의 집에 초대하였습니다. 그의 집은 졸부답게 입구에서부터 값비싼 대리석으로 꾸미고, 금으로 장식하여 번쩍거렸습니다. 그는 디오게네스에게 말할 기회를 잠시도 주지 않고 자기 집안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디오게네스는 한참 두리번거리더니 ‘퉤!’하고 부자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당황한 부자에게 디오게네스는 “그대의 집과 정원은 훌륭하군. 아름답고 깨끗하군. 그런데 너무 깨끗하여 침 뱉을 곳이란 자네 얼굴밖에 없네. 거만과 탐욕이 가득 찬 자네 얼굴이 곧 쓰레기통일세”하고 말했습니다.
집을 가증한 것으로 채우면 얼굴이 가증하게 변합니다. 탐욕이 우상숭배이며 재물이 부패하게 하여 결국 멸망의 조건이 되고 맙니다. 돈, 과학, 의지하고 싶은 마음, 심지어 성욕도 다 하나님의 은총이며 축복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좋은 것들을 우상으로 만들고 죄를 짓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가증한 삶은 구역질나는 삶입니다. 혐오스럽고 영과 육을 말살하는 것들은 결국 멸망의 길입니다.
유명한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달리기 선수 에릭 리델을 그린 ‘불의 전차’라는 영화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에릭, 감자를 깎으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 완벽하게 깎을 수 있다면 타협하지 마라. 타협은 악마의 언어야”. 세상과 타협하고, 악과 타협하고, 부정과 타협하는 것은 온갖 더럽고 추악한 것을 들여놓는 일입니다. 이런 가증한 것들을 끊임없이 채워 결국은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발성’(emergence)이란 단어는 최근에는 아주 중요하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부분에서는 없던 고차원적인 질서가 전체에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꿀벌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집단이 함께 자기 몸보다 40,000배나 큰 집을 만든다고 합니다. 이것을 창발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창발성 발휘하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인류가 창발성을 발휘하여 한 일이 무엇입니까? 인류의 창발성은 결국 ‘바벨탑의 지혜’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머리와 지식으로 하나님의 집을 붕괴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집에 인간의 온갖 가증한 것들로 빼곡히 채웠습니다. 결국 인류가 멸망의 길을 택하고 공멸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결 론
첨단 생명공학이 발달하여 새로운 인간관이 문제가 된 때에 독일의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미 댐은 붕괴됐다”라고 이 시대를 표현하였습니다. 댐이 붕괴되어 팔뚝으로 재방 뚝의 붕괴를 막아낸 ‘한스 브링커’도 이제는 없습니다. 이런 인간의 과학과 하나님을 대항하는 악한 머리는 세계를 가증한 것으로 채웁니다. 결국 지구의 멸망을 가져오게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바닷물이라도 배 안에 물이 차지 않는 한 그 배를 침몰시킬 수 없습니다. 세상에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내면에 악이 침투하지 않는 한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증한 악을 내면에 채우고는 결코 침몰을 면할 수도 없습니다. 거룩한 우리의 집을 가증한 것으로 채우지 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집답게 정결하고 거룩한 것이 가득할 때 가증한 것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물러갑니다.
오늘은 특별히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만에 승천하시고, 사도들은 가룟유다 대신 맛디아를 선택하여 열두 사도의 수에 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120명이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성령강림은 교회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능력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든 가정들이 가증한 것을 들이지 말고 깨끗한 것으로 채우는 거룩한 집들이 되고, 뜨거운 성령님의 강림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가정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신앙승리의 기대
신명기 7:12-26 / 장재효 목사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을 받아 누리기까지는 반드시 믿어지는 믿음이 앞서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12지파의 족장들이 가나안 지경을 40일 동안 정탐을 하고 돌아왔는데 같은 상황을 보고 듣고 돌아온 그들의 느낌이 10대 2로 서로 상반대는 보고를 했다는 사실은 믿음이 일치하지 못했음을 나타냈습니다.
12지파중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소망적인 신앙을 보여주었습니다. 민수기 13:30에서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했고, 민수기 14:8-9에서는 여호수아가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열 명은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다는 절망적인 보고를 합니다. 이들의 불신앙적이고 절망적인 보고에 의한 하나님의 진노에 여호수아와 갈렙 지파마저도 정탐했던 40일을 하루를 일 년으로 계산하여 40년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시기가 연기되는 불행을 낳고 맙니다.
저와 여러분이 목양지간의 인연으로 만나 영적인 소망을 가꾸자고 함께 애써왔는데 그동안 선포되었던 생명의 말씀으로 깨닫는 지혜를 얻고 믿어지는 믿음으로 담대해질 수 있어서 생활전폭으로 실행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면 벌써 신령한 은혜에 젖어 사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어야 하는데도 여러 해 동안 교회 다녔다는 것은 자랑하면서도 그 믿음이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책임져 주신 은혜보장으로 사는 모습을 나타내 보이지 못하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같은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앞뒤가 서로 맞지 아니하고 모순됨)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가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영감으로 애써 당부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서둘러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허락하시는 은혜조건에 나갈 수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케 하시리니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우승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 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나님의 복 주심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단지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대접받기 어려운 상황에 있어서 하나님의 복은 예비되어 있으나 이 모든 조건은 아직도 지체되고 있음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불러 택하셨다는 사실과 오늘의 이 시점까지 하나님이 이끌어 오셨다고 진실로 믿어 사는 사람이면 내일도 그 하나님의 손길에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여러분 마음에 머물러 있는 순간에는 오늘의 나 된 것은 나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은 하게되지만, 행동은 본질적으로 인간 자기인생을 세상조건에 편승하여 육신의 혈기와 정욕에 치우치는 폐단은 예수님 은혜로 사는 인생이 아님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신앙인의 불신앙’이라 합니다. 생각으로만 믿고 행동으로는 불신을 나타내는 폐단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엮어 사는 행동의 범주를 관찰하시어서 행위의 열매로 보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일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신명기 7:1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했습니다. 미래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두고 계획하시고 약속하셔서 역사해 오신바 그 뜻은 변함없이 이루어 가실 것임을 이처럼 확약(確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언제나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해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 들어가 살게 될 때 너는 아무 염려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열 명의 보고자에 의하면 그들의 정탐결과는 불가능하다는 절망뿐이었습니다.
그 절망은 참으로 많은 심령들에게 어두움으로 슬픔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을 하고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합니다(민14:1-3).
오늘까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여 인도해 내시는 과정에 이적과 기사를 보여주었음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하나님은 속이 상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불신앙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날,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이 애굽을 벗어나게 하시고 황무지였던 가나안을 다른 족속들로 하여금 갈고 닦게 만드셨고 결국 그 땅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서 2:26에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는 말씀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가나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들인데 이들이 믿음이 없어 들어가 차지하지 못할 것이라면 이스라엘은 그 땅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금 위로하심으로 격려하십니다. 가나안의 모든 조건들은 이스라엘을 위해 예비 된 것들이며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눈에 보이는 세상, 물리적인 조건의 현실을 절대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실 때 애굽의 악질이 이스라엘에겐 임하지 않은 것과 같이 좋은 것은 이스라엘에게, 나쁜 것은 원수의 몫으로 돌리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격으로 갖추어지기만 하면 좋은 것으로 책임져 주시겠다는 은혜보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지만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그 뜻을 역행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그를 향한 하나님의 대접이 어떠할지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세는 “그들을 두려워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목도한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그와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행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회개하고 전적으로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여 하나님과 연합하려고 애쓰는 진실된 신앙인에게는 하나님의 모든 것으로 책임지시고 구원을 보장하시며 앞길을 열어 인도하시되 어떤 장애물도 없애주시며,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믿어지는 믿음’을 강조하며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자기 멋대로 살고 자기욕심과 정욕대로 살다가 괴로운 상황이 생기면 하나님을 찾으면서 이 상황을 모면하게 해달라고 명령 하는듯한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그분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2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점점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두렵건대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는 말씀은 급하게 가나안 족속들을 멸하게 되어 그 넓은 곳을 이스라엘이 관리하기 어려워져서 들짐승이 번성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치게 될까 하나님이 걱정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세밀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이시고 그들을 크게 요란케 하여 필경은 진멸하시고 그들의 왕들을 네 손에 붙이시리니 너는 그 이름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라 너를 당할 자가 없이 네가 필경은 그들을 진멸하리라”고 약속하시고 위로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원주민 일곱 족속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면서 하신 말씀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지 않는 자들을 불쌍히 여길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신7:2-5)”는 말씀으로 보아 그들이 섬기는 이방신들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를 떠나게 되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하게 될까 우려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음란하고 타락한 백성으로 그들의 이방신 앞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쳐 죽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 앞에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유기된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셔서 구속의 은혜로 오늘까지 인도해 오시는 이유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기 때문임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물려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택하시고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7:8을 보면 하나님이 이들을 택하신 이유는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그런즉 너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신7:9-11)”하셨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로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누릴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올 무
신 7:12-26
부모들이 가정에서 자식 때문에 겪는 갈등과 고민 중의 하나가 공부 문제입니다. 부모 치고 자식이 공부를 못하는데 마음 태연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공부하기 싫어하는 자식이 공부하라는 부모님 말 한마디에 순순히 공부할 자식도 없습니다. 인상을 쓰고 언성을 높이고 매를 들어야 겨우 책상머리에 앉아서 공부하는 척 할뿐입니다. 그러나 그 머리 속에는 온통 다른 생각이 떠돌면서 공부하고는 멀어져 있는 것이 지금 자식들의 현실이고, 또 부모들도 예전에 다 체험했던 일들이다. 하기 싫어하는 공부를 억지로 시킨다고 해서 되어질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또 공부 안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기도 참으로 난감하고 앞일도 걱정되는 것이 부모 마음입니다. 야단이라도 치면 '누가 공부 안하고 싶어서 안하는줄 알아요! 해도 안되고 하고 싶은 마음이 안 일어나는 것을 어쩌란 말입니까? 나도 답답해 미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반발합니다. 이런 자식과의 싸움에서 '저 웬수'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부는 해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이, 신자가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도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공부해라해도 공부에는 전혀 마음 두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척하면서 유행가에 팝송에 정신 팔려 있는 아이들처럼, 냉정히 따져보면 우리들의 신앙이라는 것도 결국 공부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대하고 있는 자식들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의 눈에 자식이 그렇게 보이듯 하나님의 눈에 우리들이 바로 그렇게 보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사실 공부하기 싫은데도 불구하고 야단 맞고 매맞을까봐서 억지로 책상에 앉아 책 펴놓고 A. B. C는 부지런히 읽고 있는데 귀에는 카세트 이어폰을 꽂아 놓고 유행가 가락에 발장난 치고 있는 자식과 같은 그런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공부란 억지로 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어른들의 교육방법은 공부를 못하게 하는 요소를 찾아서 없애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유행가를 듣지 못하도록 카세트를 빼앗아 버린다든지, 전자 오락실을 가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감시한다든지, 연예인들에게서 유행하는 옷이나 머리 모양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든지 뭐가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요소는 모조리 아이들로부터 떼어놓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제재를 가한다고 해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은 생각입니다. 카세트를 빼앗아 버린다고 해서 유행가가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락실을 가지 못하게 한다고 해서 오락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오락실을 가서 공부를 못하나, 오락실엔 가지 못했지만 그것 생각한다고 공부 못하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말한다면 교회가 지금껏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금지하고 막아왔지만 결국 그것이 신앙생활을 잘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술 담배가 신앙생활의 방해꾼인양 술 먹지 말라 담배 피지 말라고 외쳐왔지만 술안먹고 담배 안 피운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욕심을 억제하고 죄를 없애려고 해봐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없애지도 못하고 막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내려지는 결론은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신자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하면서 아무리 신자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려고 해도 인간이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만약 자식이 부모의 말대로 그대로 움직이고 순종한다면 성공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유행가 듣지 말라하면 듣지 않고, 오락실 가지 말라하면 안가고, 공부해라 하면 다른데 신경 안쓰고 공부만 한다면 분명히 성공은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12-16절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13-16절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조건은 12절의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네게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법도대로 실천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약속한 땅에서 세상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복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말씀대로 살지 못한 이유가 복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까? 다시 말해서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면 장차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공부를 안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실력이 좋으면 나중에 자기 인생에 크게 득이 되고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압니다. 또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도 다 있습니다. 하지만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것은 공부가 하기 싫고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 하기 싫고 왜 안되는 것입니까?
성공하는 것은 나중 일입니다. 우선 눈에 보이고 하고 싶은 것은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서 노는 것입니다. 지금 부모들은 이런 시절을 지내지 않았습니까? 공부하면 성공한다는 것을 몰라서 공부를 안했습니까? 다 알면서도 게을리 하다가 어른이 되어서 실력이 필요한 세계를 접했을 때 비로소 후회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볼 때 신앙이란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다고 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듯이 교회 나오고 성경 펴놓고 있다고 해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나오고 성경책을 펴놓고 찬송을 불러도 여러분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고개를 흔들고 그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해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고 오히려 여러분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생각은 여러분을 붙들고 괴롭힐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런 한계를 '하루에 성경을 몇 장 읽어라' '하루에 몇 분 기도해라' '성경을 손을 직접 써라'는 등의 행위적 규례들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까? 불가능합니다.
지금의 신자들이 성경을 보기 싫어서 보지 않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기 싫어서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아는 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무엇이 복이 되는 길인가를 알고 있지만 자기 뜻대로 그 길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겨우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기사 잔소리 듣기 싫다고 뛰쳐 나가버린 사람도 많은데 앉아있는 것만도 대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앉았으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정상적인 신자가 되어가고자 이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과 25절에 보면 '올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올무라는 것은 사냥꾼이 짐승을 잡기 위해서 놓은 덫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의 우상을 섬기거나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면 그것이 올무가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올무로 인해서 복을 받지 못하게 됨을 말씀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올무에 들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 올무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들고 그들을 괴롭힙니다. 말씀을 지켜야 할 줄을 알면서도 그것이 복이 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올무에서 놓여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올무란 무엇입니까? 지난 시간에 성민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서 이스라엘이 성민된 것은 7,8절의 말씀대로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은 연고로, 여호와께서 다만 사랑하심을 인하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성민 되게 하였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성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철저하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성민 되게 하신 방식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수효를 보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도 수효를 보지 말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만 여호와께서 사랑하셔서 성민 되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에만 감사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이 지키심으로 성민 되었으니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고 이렇게 살아갈 때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마귀의 올무에 붙들려 있는 인간은 성민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17절에 보면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 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들의 수효를 보고 두려워 할 것에 대해서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이 있을 때 "그들을 두려워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목도한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그와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행하실 것이요 "(18,19절) 라고 말씀하시면서 수효를 보지 말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올무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결국 수효를 두려워했었습니다. 그들의 힘을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에 대한 믿음보다는 내 앞에서 나를 가로막는 자들의 힘을 더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마귀의 올무입니다. 마귀는 신자들이 약속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약속이란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만 힘이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귀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전혀 효력이 없고 실현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도록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탐을 보냈을 때 가나안 민족이 장대 같다는 말만 듣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의심을 가진 것이 아닙니까? 이 올무로 인해서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수효를 보고 두려워하고, 보이는 것 때문에 보이지 않는 약속에 대해서 희미하고 의심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자신의 힘을 더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 올무라면 이 올무는 한마디로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복음을 전할 때 마귀는 노회 총회라는 세력을 앞세워서 목사를 두려워하게 할 수 있습니다. 노회 총회의 말대로 순종하지 않았다가는 목사라는 직에서 짤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일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을 약화시키게 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올무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권력과 수효가 두려워서 복음을 복음대로 말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마귀의 계책이 승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직장에서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아가면서 믿음의 모습을 나타내고자 할 때 여러 사람들로부터 핀잔과 반대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주위의 눈총이 두렵거나 회사에서 쫓겨날 것이 두려워서 믿음의 모습을 감추고자 할 때 마귀가 승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수효를 보고 두려워 할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앞에 두려움의 대상이 있을 때, 굴복해 버리면서 '내가 힘을 길러서 저 두려움을 이기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힘을 길러서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힘으로 두려움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그 누구도 나 위에 군림하는 자가 없는 힘을 길러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결국 아무리 힘을 길렀다고 해도 또 다른 힘있는 자 앞에서는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힘을 주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을 물리치고 그들을 봐도 두려워하지 않을 많은 수효와 힘을 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유는 말씀드린 대로 힘을 준다해도 또 다른 힘센 민족 앞에서는 다시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방법은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힘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힘이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힘이 있고 능력이 있다 해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전혀 쓰지 않으신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그 강한 손과 편 팔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고, 오늘날 우리들을 세상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올무를 벗어버리는 길입니다.
올무란 그것을 벗기 위해서 힘을 쓰면 쓸수록 더욱 자신을 조여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스스로 올무를 벗기 위해서 힘을 쓴다는 것은 결국 더욱 더 올무에 조여지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은, 우리가 힘쓸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힘과 능력은 하나님께 있으니 너희는 다만 하나님을 기억하고 안심하라는 것이 말씀이고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공부는 나는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임을 깨닫고 스스로 뭔가 해보려는 포부를 버리고 가만히 하나님만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참으로 힘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현실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자꾸 우리에게 뭔가 해볼 것을 부추깁니다. 해보면 좋은 결과가 주어질 것으로 유혹합니다. 말씀대로 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될 것같은 의심이 들게 합니다. 손해가 될 것같은 생각에 빠지게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손짓에 끌려가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닌 것이 우리들의 삶의 실체이지 않습니까? 이 올무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살아오시면서 수없이 많은 두려운 일들을 겪고 또 그것을 이기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지나온 자리에서 과거의 두려움의 일들을 생각해 보면 '왜 그때 그토록 두려워했고 근심 걱정에 빠졌던가?'라고 하면서 뭔가 후회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우린 항상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초조해하고 두려워합니다. 두려워했던 것이 별 것 아니었다는 것을 지나고 나서 깨닫지 마시고 두려움이 있는 현장에서 깨닫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공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 두려움이 될만한 일들로 우리를 가로막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순간이 곧 올무에 매이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질 때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아이가 빵점을 받아왔을 때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남편이 애를 먹일 때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비하면 시시한 것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간 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순간순간 그런 깨달음이 있음으로서 세상을 두려워하고 부러워하고 일이 잘 안된다고 짜증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리에 잊지 못했기 때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찾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할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법도를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모든 법도와 규례를 완전하게 지키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말씀에 약속되어 있는 모든 복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믿으면 잘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약속된 복은 눈에 보인 약속의 땅에서 실현될 것들입니다. 즉 약속이 눈에 보인 땅인 만큼 눈에 보인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약속의 땅은 보이지 않는 땅입니다. 따라서 복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이는 땅, 보이는 복은 보이지 않는 복을 약속하는 그림자였습니다.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복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무에 매이지 않는 것이고, 우리를 세상에서 구출하신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여러분에게 참된 복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자신에게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분임을 알고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누가 뭐래도 복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복임을 알 때 세상의 좋고 나쁜 것을 초월하게 됩니다. 좋은 것이 없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내 비록 나쁜 것이라고 해도 거절하지 않겠다는 용기로 살아가게 됩니다. 좋은 것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하나님만이 내 여호와라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건강하게 해주셔서 믿는 것이 아니라 병들게 하셔도 믿습니다. 사업 잘되게 해주셔서 믿는 것이 아니라 망하게 하셔도 믿습니다. 나쁜 것이라고 생각되는 속에도 인간의 낮고 얕은 생각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선한 뜻'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내가 생각하는 좋고 나쁘다는 개념으로 판단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치 않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나를 붙드시고 이끌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자가 올무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올무란 내 쪽에서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못된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복으로 안 순간 세상의 좋고 나쁨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신자의 삶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올무에 매여서 두려움에 빠져 살지 마시고 참된 복안에서 살아가는 신자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