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강쇠타령
咸陽 紀行
에 헤에 이여
함양 산청 물레방아는 물을 안고 돌고
우리집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돈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유년시절, 고향에서 듣던 노래다.
사실적이고 에로틱한 가사의 이 민요는
서부 경남지역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구전민요이다.
함양의 옛 지명은
험한 육십령 고개로 인해
천령(天嶺)이었고,
산청은 지리산 그늘이라는 뜻의
산음(山陰)이었다.
함양은 진주에서 멀지 않는 곳이다.
고향을 오갈 때 이곳에 들려 옛 선비들의
행적의 거울에 나를 비춰 보곤 한다.
육십령을 넘어 함양 땅으로 가 보자.
함양(咸陽)
함양은 덕유산 남쪽
육심령 아래에 위치한다.
산청과 함께
경상우도 사림문학의 중심지이며
풍류와 선비의 고장이다.
산청엔 남명(南冥) 조식(曺植),
함양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정여창과 김일손이 있다.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秦)나라 수도가 함양이었고,
장안(長安)이라고도 불리었던
지금의 시안(西安)이다.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선생은
연산군의 스승이면서,
무오사화에 연류돼
갑자사화에서 부관참시를 당한
조선조 5현(五賢)의 한 분이다.
일두 선생을 배향하는
지곡면의 '남계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우리나라 2번째 사액서원이며,
민속자료 168호인
일두 선생 고택이 있다.
김일손(金馹孫)은
사림파의 거두로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은
것이 무오사화의 발단이었다.
훈구파에 의해 처형되었고,
스승 김종직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그러나 대쪽 같았던
그분의 직필(直筆) 정신은
짧은 생애지만 후대까지
그분를 기억하게 한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 의암(義巖)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
(毛谷村六助)를 죽이고,
순국한 논개의 묘소가
이곳 지곡면에 있다.
상림(上林)
함양읍 상림(천연기념물 154호)은
신라 진성여왕 때
함양 태수였던 최치원이
풍치와 홍수 방지용으로 조성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조림인 '천 년의 숲'이다.
하림(下林)은 사라지고 지금은 없다.
물레방아
함양은 228년 전
우리나라 최초로
물레방아가 세워진 곳으로,
디딜방아나 연자방아에 비해
역사가 길지 않다.
조선 후기 실학파이며
양반전, 허생전의 저자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 사신으로 갔다 와서 쓴
견문록인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처음 등장한다.
1792년
연암은 안음현(안의면) 현감으로 부임해서
용추계곡 입구
안심마을에 물레방아를 세웠으나,
불과 200여 년의 단명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추억 속의 풍경으로 남아 있다.
열하(熱河)
중국 북경의 동북쪽에 있는
온천 관광지로
뜨거운 물이 흘러서 '열하'라고 한다.
정자(亭子)의 고장
화림동계곡은
조선 8도의 풍류를 좀 안다는 선비들은
거의 유람했을 정도로 유명하다.
농월정, 동호정, 거연정, 군자정 등,
8담8정의 60리 계곡은
우리나라 정자 문화의 보고이다.
龍遊潭
지리산 북서쪽으로 흐르는
엄천강 용유담은
가사어의 전설이 전해 오는데,
지리산댐이 건설되며
이 절경은 영원히 볼 수 없게 된다.
가사어(袈裟魚)는 용유담에 살았다는
가사를 닮은 붉은 3선의
전설 속 물고기이다.
봄이면 혼인색이 아름다운
황어(黃魚)의 육봉형으로 추측된다.
엄천강엔
낙동강 유일의 천연기념물(455호)
'꼬치동자개'와
멸종위기 야생 생물 (1급)인
'새코미꾸리'가 서식한다.
龍湫瀑布
명승 제 85호와 자연휴양림으로 지정된
용추계곡에는 용추사와 용추폭포가 있다.
2천 년대 초 용유담의 가사어 실체를 찾아
다닐 때, 나는 이곳에서 촌로들로부터 처음
'일두어'(一蠹魚)의 전설을 채록했다.
일두어는 산메기나 깔딱메기로 불리는
'미유기'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六十嶺
영, 호남을 연결하고
지역 경계가 되는 734m 육십령은
예전에 도둑이 많아서 60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다는 설과,
고개마루까지는 60굽이를 돌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지리산 북쪽의 함양 땅은
6.25 때,
인민유격대(빨치산: Psrtisan) 집결지로,
이곳에 숨어서 활동하던
마지막 여자 빨치산 '정순덕'이
지리산 내원골에서 1963년 체포됐다.
변강쇠 타령
판소리의 대부(代父) 신재효 선생이
개작한 판소리 여섯 마당 중
'가로지기타령'(변강쇠)은
한자로는 '횡부가'(橫負歌)이다.
'가로지기'란
서민이나 천민이 죽으면
시체를 거적에 싸서
지게에 가로로 지고 가서
묻는 것에서 유래했다.
정력을 자랑하던 변강쇠가
죄값으로 가로지기 신세가 되어
저승길로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가로지기타령에는
선정적이고 노골적이며,
낯 뜨거운 표현들이 많이 나온다.
변강쇠와 옹녀
옹녀는 서도(평안도) 계집으로
외모는 반듯하나
색을 밝혀,
남편이나 뭇 남정네들과
하루 밤을 지내면
모두 죽음에 이르게 하는 색마였다.
옹녀는 30리 안에
15세 이상 남정네들의
씨를 말리고,
동네에서 쫓겨 나
남쪽으로 간다.
변강쇠는 남도(전라도) 출신으로
원래 빌어먹는 놈(거지)인데
계집질이 주특기로,
부녀자를 겁탈하고
우물에 똥 누고,
임신한 여자 배 차는 등,
못쓸짓만 하는 잡놈으로
역시 동네에서 쫓겨나
북쪽으로 향한다.
두 년놈은 개성 청석골에서
처음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바위 틈에서
요상한 짓을 벌인다.
천하의 바람둥이며 오입쟁이 변강쇠와
뭇 남정네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색마 옹녀는
밤낮으로 방구석에서
이상한 소리만 내는데,
참다 못한 동네 사람들에게
또 쫓겨 난다.
젠장, 정력이 센 것도 죄가 되냐?
왜 사람들은 우리의 애정을 시샘할까?
두 년놈은 의논 끝에 아무도 관섭 없고,
아무 때나 맘 놓고 볼일 볼 수 있는 곳을 찾아
지리산 첩첩산골로 이사를 간다.
변강쇠의 변(便)은 소변을 뜻하고
소변 줄기가 쇠처럼 강하다는 뜻이며,
옹녀는 옥녀(玉女) 또는 옥문(玉門),
여자를 상징하는 항아리 즉
옹기를 뜻한다.
"두 년놈이 지리산 등구마천에 이르니,"
"'등구마천'에 강냉이 방아가 웬말인고?"
지금의 함양군 휴천면 월평리,
그곳 '오도재' 부근이
변강쇠와 옹녀가 살던 곳으로 추정한다.
이곳은 행정구역이 통폐합되기 전,
함양군 마천면 등구(거북 등)
마천으로 불렀다.
첩첩산중 깊은 골짜기에
빈집 하나가 있어서
들어가 사는데,
임진왜란 때
어떤 부자가 피난 와 살던
5칸 8작의 빈집이었다.
우리가 계속 뭉개면
이 집은 1년 안에 무너지겠지만,
그래도 지리산엔 낙낙장송이
많아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옹녀는 또 그짓을 위해서는 방에 불은
지펴야 하므로
나무 좀 해오라고 시켰더니,
변강쇠가 누군가?
동네 장승을 모두 뽑아 와서
불을 지핀다.
급기야,
비상이 걸린 8도 장승들이 모여
응징을 논의해,
800가지 병을 주어
변강쇠는 그만 동티가 나서
앓다 죽어
가로지기 신세가 되고 만다.
함양군은
변강세와 옹녀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오도재 부근에 변강쇠 옹녀공원과,
집과 무덤 등,
여러 상징물도 함께 조성했다.
판소리
판소리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라는 뜻의 '판'과
노래를 뜻하는 '소리'의 합성어다.
한 명의 소리꾼과
고수가 엮어 가는 장르의,
'창'(노래),
'아니리'(말),
'너름새'(몸짓)로 이뤄진,
대중적인 해학과 비평을 담은 예술이다.
판소리는
주로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서
전승되었는데,
전라도 동북지역의 판소리를
'동편제'(東便制),
서남지역 것이 '서편제'(西便制),
경기, 충청 것을 '중고제'(中古制)라고 한다.
판소리 열두 마당은 다음과 같다.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장끼타령,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
무숙이타령, 강릉매화타령, 가짜신선타령.
그후 신재호 선생께서
여섯 마당을 개작했으나
가로지기타령을 뺀,
충효와 정절 등
조선시대 가치관을 담은
춘향가, 삼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다섯 마당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어릴 때 시골 장터에서
풍각쟁이와 초라니,
각설이 품바 공연을 본 적이 있다.
각설이 발상지는
목포 인근 전남 무안군 '일로읍'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