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소설] -6.25에 얽힌 얘기- (단편)
‘인공기’에 겹쳐진 ‘적기가’의 추억
그는 좀 이상한 우파 노인이 있었다. 건강 상태도 오육십 대 보다 더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 아니하다고 생각한다.
보통 노인은 할 일이 없어 무료하다고들 하나 그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아, 늘 시간이 모자란다고 투들 된다. 그는 보수주의자임을 내세워 정치권의 쟁점이 터질 때마다 나름대로 현안에 대해 자기 식 이데올로기로 비판한다.
온라인의 논객이나 통신원, 기자 등으로 활동한다. 여러 넷을 유영하며 넘쳐나는 톱기사와 정치기사를 훑어보고 특별하거나 중요한 기사 및 자료는 퍼서 폴더에 저장해 둔다. 시중에 이슈가 되는 사건이나 쟁점에 대해서는 틈이 나는 대로 자신의 주장을 편 글을 인터넷의 여러 곳에 띄운다. 보통 백이나 천 단위의 방문수를 얻기도 하고 어떤 논평에서는 만 단위의 방문 수를 받기도 한다. 그는 건필을 바란다는 댓글에 용기를 얻고, 소득이 없는 아마추어논객이지만 즐기며 계속 쓴다.
그는 60대 초반에 문단에 등단하여 소설과 희곡을 쓰기도 하며 몇 편을 완성하기도 하였으나 아직 책을 내지 못하고 ‘하드웨어’ 속에 차곡차곡 저장해 두고 있다. 작품성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라지는 효 문화를 개탄하고 노인의 권익 옹호에 관심을 두고 여러 경로를 통해 사회에 고발하기도 한다. 또 작은 교회에 열심히 나가 청년부장이란 직분도 맡고 있다. 목사는 그가 젊은이 못지않게 열정이 있음을 보고 교회사역을 맡긴 것이다. 이렇게 그는 여러 가지 일에 시간을 쪼개다 보니 별 성과물 없이 바쁘기만 하다. 그러나 70대 중반의 노인이지만 삶의 의욕과 열정이 넘치는 자기의 신념을 확인하면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그가 작년 6·25전쟁 61주년을 채 한 달도 남기지 아니하였을 무렵 어느 날 저녁 늦게 자기 방 남측 창문 앞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를 열고 시국에 관련한 기사를 검색하였다. 동국대 강 정구 교수가 ‘6.25는 북의 남침이 아니라 남쪽의 북침이며, 6·25전쟁에서 북한이 이겨 통일이 돼야 했었다’ 한 주장을 보았다. 자유분방한 한국의 현 체제를 부정하는 그가 북의 독제체제로 통일이 되었다면, 그의 기질 상 북의 김정일 우상화와 인권 참상을 보고, 주둥이를 함부로 놀릴 것이 분명하고 그러다가 끝내는 귀신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을 것인데--, 옆에 있다면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퇴박을 주고 싶다고 생각해 본 것이다.
이런 강 교수와 같은 종북 주의자들의 주장에 꼬여 넘어간 젊은 학생들이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을 계기로 반미를 외치며 서울 거리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것을 보며, 그는 한국 사회에서 법치가 무너지고 민주와 자유의 정치이데올로기가 위협을 받는 가장 큰 원인은 이 명박 대통령 의 중도강화론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압도적 5백만 표 차이가 바랜 깃발처럼 너풀거려 가슴을 후벼 파는 아픔이 저려온다.
또 광우병 소를 들먹이며 정부를 뒤엎자고 광분하는 촛불시위대의 군중을 보면서, 에리히 프롬이 ‘건전한 사회’란 책자에서 ‘병든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집단병리 현상에 대해 예리하게 분석한 문장을 저장해둔 폴더에서 꺼내어 보았다.
『한 사회 구성원의 정신 상태에 관한 가장 기만적인 것은 그들 구성원의 「합의에 따른 확인」이다. 절대다수의 사람이 어떤 공통의 인식과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으레 타당한 것으로 인정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처럼 진리에서 먼 것은 없다. 이와 같은 합의에 따른 확인은 이성이나 정신건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두 사람이 서로 「감응성 정신병」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수백만 명 사이에서도 「감응성 정신병」이 일어날 수 있다. 수백만의 사람이 동일한 악을 공유한다고 하여 이 악이 미덕이 될 수는 없고, 모두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여 그 잘못이 진실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수백만의 사람이 같은 형태의 정신이상을 나타냈다고 하여 그 사람들이 건전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지적이다.
1900년에 태어난 에리히 프롬 같은 사람이 아무리 대성한 사회학자라 해도 죽은지 40여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사회의 집단 시위 같은 병리 현상을 어찌 그렇게도 정확하게 꼬집었나 생각하니 감탄을 금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절대다수의 사람이 ‘광우병 소 수입 문제’는 정부가 저지른 절대 악이라고 서로 간에 믿음이 확실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진리라고 볼 수 없다고 에이리 프롬이 일깨운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국에서 자주 일어나고 광폭해지는 시위문화가 집단 히스테리 같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프롬의 예리한 논리에 감격한다.
또 ‘군중과 권력’이란 책을 쓴 엘리아스 카네티도 이런 프롬과 같은 맥락의 이론을 역설한 것을 기록해 둔바가 있다. 카네티는 1905년에 태어났다. 두 학자가 태어난 해수의 차는 5년이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그의 저서를 통해 ‘시위군중의 핵심적 내부를 보면 다섯, 열 혹은 열두 서너 명의 파괴 욕에 미친 인물들로 결집되어 있고, 괴변과 술수로 대중을 세뇌 시킨다. 이에 현혹된 사람은 그들의 선동에 관한 확실한 증거와 이성적 판단 없이 그저 감성에 의해 부화뇌동 되어 마치 자석에 붙는 쇳가루처럼 백, 천, 만으로 그 수가 급격하게 팽창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카네티는 ‘열린군중’ 이라 칭하였다.
이렇게 생성된 군중은 처음 생겨나면서부터 더욱 많은 사람이 가세하기를 바라는 ‘성장 욕구’ 를 갖는데 이런 성장 욕구야 말로 군중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며, 당연히 군중은 인간의 형상을 한 자는 모두 다 가담시키려 한다고 했다. 이 군중은 집도 문도 자물쇠도 인정하지 않고, 빗장을 채우는 자는 수상한 자로 매도한다.
‘열린군중’의 ‘열린’이란 단어는 어느 방향 어느 곳으로 다 열려있다는 뜻이라 했다. 이렇게 군중 속에 모인 각 개체들은 서로가 몸을 부딪치고 서로 의지하면서 동질감에 묶이고 하나가 되어 정의의 사도인양 착각하게 되고 이런 군중들은 맹목적으로 리더의 구호에 따라 행동하고 열광한다고 했다.
카네티는 군중의 목표는 광기와 확산이라 정의했다. 그러나 이런 똘똘 뭉친 군중도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 열기는 힘을 잃고 묶었든 접착에너지는 소진되어 군중의 확산이 멈추는 순간 각 개체는 집단 최면에서 풀려나 각자의 길을 가게 되고, 이쯤 되면 열린 군중은 급격하게 모래 탑 같이 무너져 와해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카네티가 분석한 군중에 대한 대강의 논지다.
광우병의 촛불시위 군중도 미국의 수입 소를 먹으면 모두가 죽는다는 막연한 최면에 걸린 사람들의 집단이다. 광우병 소를 먹고 죽은 사람의 수가 교통사고로 죽을 사람보다 훨씬 적을 것은 당연하고, 산업체에서 안전사고로 죽는 사람의 통계치보다 낮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좌파 방송인과 언론 그리고 북한 추종 반미분자들이 미친 소를 들먹이며 군중을 들쑤셔 온 광화문 거리와 청계천 광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데모군중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 시각이 위 유명 석학들의 논리로 뒷받침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컴퓨터를 열고 시위의 뿌리와 중심에 박혀있는 반미와 반정부의 핵심 분자가 누구인지, 군중이 왜 갑자기 광분하는지 그리고 혁명군처럼 기세 등등 하는지를 좀 더 깊이 알아보기 위해 온라인을 여기저기 뒤지든 중, 어느 한 귀퉁이에 ‘민노당 당사에 인공기가 웬 말인가’ 하는 제목의 글귀가 눈에 띄어 열어보았던 것이다.
5〜6 층 되는 건물의 중앙 외벽에 5층쯤에서 아래로 2층까지 ‘민주노동당’ 이란 당명을 색인 돌출된 간판이 걸려 있고, 건물의 앞 측 모서리에 기 게양대 두 봉이 솟아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건물 중심 쪽의 다소 높은 게양대에 인공기가, 낮은 게양대에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이상한 광경을 본 기자인지 시민인지 모를 두 사람이 카메라에 담으려는 모습도 그 그림 속에 함께 찍혀 있었다.
‘거참! 민주노동당이 평양에 있지 않고 서울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인공기를 당당하게 내어걸다니--.’
이런 생각을 하는 중, 또 KBS 시사프로그램인 '미디어 포쿠스'가 이라크 출병보도를 하면서 40초가량 북한의 혁명가요인 '적기가'를 배경 음악으로 깔아 방영할 때, 칠십을 넘겨 메마른 피부에 소름이 일고 반사적으로 섬뜩한 전율이 일어 잠시 눈을 감고 흥분한 가슴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던 일이 생각나 함께 되 삭여 보았던 것이다.
그는 작년의 6.25 기념일 전야 있었던 위와 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일 년이 지난 2012년 6월 10일 저녁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는 속담처럼 꿈에서 번득 깨어나 컴퓨터 앞에 멍 한 채 앉아 있다.
‘왜 평소와는 달리 잠에서 깼지--’ 하고 자문해 본다. 잠을 자다가 처음 눈을 뜨면 대부분의 사람은 무슨 꿈을 꾸었는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는 차분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는 잠을 깨기 전 아련한 옛날의 그림 속 소년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6.25동란 피난 시절 어느 날이었다. 따발총을 든 인민군 내무서원과 소련제 장총을 멘 청년이 아버지를 강제로 읍내 내무서로 연행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아버지가 따라가면 그놈들에게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 놈들의 뒤를 따라가며 ‘아버지를 놔주세요, 아부지를--, 우리 아부지가 무슨 죄가 있어요 제발--, 아부지 따라가면 않돼--아부지’ 하고 외치며 내무서원의 다리를 잡고 늘어지자 그 괴뢰군이 따발총 개머리로 내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치는 순간 꽝하고 빠개지는 아픔을 느끼고 이제 죽는구나 하고 절망하는 순간 죽지 않으려고 뒤척이다가 삶을 확인하기위해 눈을 뜨고 잠에서 깨어난 것 같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꿈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곧 알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꿈의 시간과 공간 대 속으로 다시 들어가 옛 기억을 뽑아내어 얘기를 엮어간다.
8.15 해방이 되자 아버지는 미 군정청으로부터 합천군수로 임명되어 이년 간 군수로 재직하다가 6.25동란 일이년 전에 퇴임하셨다. 사변 당시는 합천군민회 회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그냥 명예직으로 별 역할이 없었고, 그 직분은 지금으로 치면, 아마 노인회 회장 비슷한 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꿈에서와 같이 인민군 내무서원과 다른 보조병사 에게 연행되어 간 것은 사실이이었다. 아버지가 연행되자 어린 나는 읍으로 가는 길목에 숨어 있다가 낫으로 두 놈을 목을쳐 죽이고 아버지와 함께 먼 곳으로 달아날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다행히 아버지는 이튿날 무사히 귀가 하셨다. 아버지는 겪은 일을 말씀하셨다.
내가 남조선 초대 군수를 역임한 것은 반동의 괴수 급에 속하니 인민재판에 붙이려고 하였으나 전직 군수이지만 논밭을 팔아가며 군청직원의 월급을 주고 불탄 군 청사를 재건하고 군 행정을 정비하여 이끌었다는 사실을 몇몇 지역 공산 분자가 증언을 한 것 같고, 부산에서 남노당 간부로 지하운동을 한 생질 최 필구가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려주어 다행히 풀려났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노인은 좀 더 생생한 그 때의 상황을 끄집어내어 얘기로 엮어 보려고 머리를 굴렸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 어깨를 펴고 심호흡을 한 후, 의자 등바지에 몸통을 기대면서 다시 눈을 감는다.
그의 회상은 6.25에서 2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부산 대신초등학교 5학년 때, ‘적기가’로 인해 낭패를 당할 뻔한 기억을 떠올리며 ‘옳지, 여기부터야’ 하며 눈을 뜨고 무딘 손가락으로 자판에 ‘적기가에 얽힌 앗찔한 추억’이란 글을 찍었다.
밝은 모니터 화면에 그려진 적기가란 단어가 살아 굼틀 그리는 것 같다. 창문 밖으로부터 개구리 집단이 모내기를 한 서마지기 논에서 개골개골하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게 하자, 모니터에서 눈을 때고 개구리 합창소리를 음미한다. 맑은 공기를 마실 겸 창문을 열었다. 갑자기 시원한 바람과 함께 아마 7-80데시벨 이상 되는 개골개골하는 합창소리가 고막을 때린다. 듣기 싫은 한계치 이상의 소음이지만 경쾌한 오케스트라의 화음 같이 듣기 좋다고 생각한다. 새소리 폭포수소리 처마 끝의 낙수소리 등 자연의 소리는 듣기도 좋고 경쾌하지만 인위적인 기계소음이나 자동차 경적 등은 왜 듣기가 싫은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어둠으로 꽉 메워진 창밖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60여 년 전의 옛 것을 찾아내려는 듯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모니터로 눈을 돌려 ‘적기가에 얽힌 앗찔한 추억’ 이란 글을 본다.
이제 그 글속에 박혀 있는 어떤 이미지를 캐내려는 듯 시선을 고정하고 초점을 맞춘다. 10포인터 글이 좀 작다고 생각하고 30포인터로 확대 한다. 큰 글자가 화면을 꽉 메운다. 검은 색과 흰 여백이 서로 얽히면서 아련한 옛 그림이 입체적으로 피어오른다.
그 때가 6.25 직 전 부산에서 이다. 대신동에 있는 구덕공설운동장 축구장에는 고등학교 축구대항전이 자주 열렸고 특히 부산상업고등학교와 경남상업고등학교 간에 벌어지는 축구시합은 재미가 있어 관람하는 자가 많았다.
당시 서면에 자리한 부산상고는 역사도 깊고 선생님들의 수준이나, 학생들의 질도 높아 경남고등학교나 부산고등학교 등에 버금가는 명문 고등학교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한편 경남상고는 구덕 공설운동장 남편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선생들의 수준은 잘 모르지만 재학생들 중에는 소위 깡패가 많았고, 자칭하여 '옴재이'라 칭하였다.
「‘옴’ 이란 뭐꼬, 겁나능 피부 빙이데이, 우리 몸디엔 억수로 무서운 전염병이 있으니 너거들이 빌로 덤빗다가 낭패 볼끼다이」하고 미리 예고하는 듯, 애교 넘치는 공갈용 집단 대명사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럼에도 어린 청소년과 중.고 생들에겐 부산상고보다 옴쟁이 경남상고를 더 좋아했고, 그들에게 이끌리어 애정을 보내고 있었다. 싸움질 잘하고, 각종 경기 대항 때마다 응원단장의 재치 있는 몸동작과 율동지휘에 응원단의 일사불란한 몸놀림은 다른 학교에 비해 질서와 짜임새가 너무 좋아, 보는 이들에겐 신이 돋게 했다. 부산여고 예쁜 여학생들을 옆에 끼고 데이트하는 학생들을 보면, 십중팔구가 경남상고 학생들인 것을 보면 여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대단했다고 생각된다.
그 당시 경남상고는 부산상고의 축구 실력에 눌려, 언제나 삼대 영 이상의 골로 패했다. 부상 축구선수 중에 별명이 황소라는 주장선수가 있었는데 골문 앞에서 슛팅 하는 솜씨는 지금의 호나우두에 뒤짐이 없는 일품이었다.
시합이 끝나고 나면, 경상 ‘옴재이’들이 패배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부산상고 선수와 응원단을 운동장 복판으로 몰아넣고 발치기, 주먹질, 쫓고 쫓기는 난투극을 벌리는 일이 몇 번 있어 짜릿한 기분으로 구경한 적이 있다.
이런 천적인 부산상고와 경남상고의 축구시합이 있든 그즈음 어느 날, 나는 두 살 아래 인 동생과 축구장 본부 옆쪽 관중석 한자리에 여러 어른들 틈새를 비집고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 시합의 경남상고 축구 선수에 축구 선수가 아닌 노 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진 농구선수가 끼어 있었다. 그는 힘이 장사요, 키는 팔 대장만한 거구였다. 아니나 다를까, 시합 중에 그는 공차기는 뒷전이고 부산상고의 황소 뒤만 따라다니더니, 그 황소가 문전의 자기 팀 선수에게 볼을 넘겨주자 그 순간 정면으로 돌진하여 그 우람한 오른쪽 다리를 높이 들고 황소 선수의 가슴팍을 향해 냅다 지르니 그 황소는 고목처럼 쓰려졌다. 부산상고 응원석에서는 흥분한 고함이 터져 나오고, 관중도 ‘해도 너무 한다’고 웅성대고 있었다. 넘어진 황소는 수분 간 하늘을 보고 큰 대자로 누워 일어나지 못하자, 운동장으로 들어온 구급 요원들이 덜 것에 싣고 나갔다.
이렇게 경기의 흥미가 극을 달할 때, 내 귓전에 익숙한 ‘적기가’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기에 쳐다보니 아니, 내 동생이 신이 나게 공기 속으로 그 힘찬 곡조를 굴리고 있지 않는가.
그러자 뒤쪽에 서 있던 어른 두 사람이 고양이가 쥐를 노리듯 동생 옆으로 다가서며 허리를 굽히더니 조용하고 다정하게 “아나 니, 그 휘파람 소리 참 좋네, 그 휘파람 한 번 더 불어 보거라” 하니 내 동생이 그 사람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그때야 휘파람 곡조에 대한 심각성을 알았던지 겁에 질려 거만 “응 응” 울음을 터트리는 것이다. 나는 잠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위급한 사태를 어린 동생에게 맡겨둘 수 없어, 동생이 입을 열기 전에, 단호하게 두 어른을 보고 “야는 내 동생인데 와 울리는 기요”하고 고양이게 쫓긴 막다른 골목의 쥐처럼 대들자. “일마야, 니 동생이 방금 분 휘파람 소리는 예사 노래가 아잉데---, 어린놈이 어데서 누구한테 배웠능깅가 알아야 한다 말이다”하는 것이다.
이 때 초등 5년생인 내가 어떻게 그런 꽤가 생각났는지--. 숨을 들이쉬고는 입술을 둥글게 모아 적기가를 휘파람으로 튕기며 “와요, 이 노래가 우쨋다 카능기요. 이 노래는 대신초등학교 정문에 가보면, 해이고보(평행봉의 일본어)가 있는데 거기에서 운동하러 온 동네 청년들이 하도 신이 나게 불러 사서 내나 내 동생이 따라 불러 잘 아는 곡조라 그 말 아잉기요” 하고 능청을 떨었더니 “아 이놈아 새끼가 거짓부리 하능 구마, 너거 집이 오데고 가보자” 하고 내 손을 잡고 끄는 것이 아닌가.
이거, 정말 큰일이다 싶어, 마음을 가다듬고 “아재들이 누깅가 모르지만, 우리 아부지는 요, 합천 군수였고, 내 칭구 아부지는 지금 도청에 높은 사람인 총무국장 이자 용자 상자 이 상용 씨 라요, 그라고 울 아부지와 둘도 없는 친구인 기라요, 가볼라카면 가보자고 요” 하였더니--,
그만 두 사람은 풀이 죽어 “이 국장님도 니가 잘 알고 있다 말가” “그렇구마 그분 아들 하고 내는 둘 도 없는 친구라 그 말이요” 하자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라모 너거 아부지 성명이 뭐꼬” 하는 것이다. “문자 기짜요 성은 이가 이구마, 어디 가서 거짓부린가 알아 볼라카면 알아보라고요” 하였더니 두 사람은 이마를 맞대고 수군수군하더니, 우리 형제를 찬찬히 아래위를 훑어보고 서는, 카기색 소년단의 당꾸스봉(경마용 바지)을 깨끗이 입고, 얼굴이 초롱초롱한 모습을 보고 거짓말쟁이는 아니다 싶었던지 “앞으로 이런 노래는 절대 부르면 않된다 컹께 알았제--” 하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 당시에는 도청 총무국장 아래 경찰과장이 있었는지 아니면 도지사 밑에 경찰국장이 있었는지 생각이 햇갈린다. 당구쓰봉은 도 학무국에 다니시던 삼촌이 준 소년단유니폼 이었다.
이런 위기를 모면한 꼬마 형제는 남아 있는 다른 축구경기도 보지 않고 집에 돌아와서 안방에 있는 작은 형에게 운동장에서 일어났던 ‘휘파람 사건’ 을 그대로 말하였다.
당시 작은 형은 경남상고의 5학년 재학생으로 노 장군과는 동기이고, 경남상고의 육상 400미터 선수인 ‘야나가와’ 와도 친구였다. 이 두 사람은 당시 학연(우익학생단체)에 대항하는 학맹(좌익학생단체)의 주동 인물로 우리 작은 형도 학맹 동조자였다.
형과 나와의 나이 차는 아홉 살로 동생과 나는 형을 마치 하늘의 신 같이 존경했고, 그리고 두려워하였다. 작은 형이 나로부터 두 동생이 겪은 기막힌 이야기를 의미심장하게 듣더니 칭찬하기는커녕 그 매서운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치는데 하늘이 별이 수분 간 번쩍이는 앗찔한 고통을 주었고, 동생에게는 양 볼을 사정없이 서너 차례 후려치자 동생의 여린 뺨은 대번에 벌겋게 부어오르더니 이삼일 후에는 푸르게 멍 자국을 남겼다가 일주일 정도가 지나서야 제 살결로 돌아 왔다. 나는 지금도 내가 뺨을 맞은 진정한 이유를 알 수 없고, 강자의 약자에 대한 이유 없는 폭력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은 동대신동 전차 종점에서 아래쪽으로 두 번째 왼편 동신초등교 뒷담 쪽으로 돌아서서 길 왼 편에서 다섯 번째에 있는 네 칸 외줄백이 한식 기와집이었다. 제일 안쪽에 작은 방이고 그 뒤쪽이 부엌이며, 다음 현관 마루 뒤쪽에 방 두 개가 있었고, 벽에 붙은 길가 쪽에 앞은 부엌 뒤는 방인 한 칸이 있는데 별채의 대문 칸과 접해있다. 대문 옆은 재래식 화장실로 배설물이 항문을 빠져나오고 일초 정도 지나야 바닥에서 ‘풍덩’하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행여 구멍으로 빠질까 조심하며 근심을 풀었던 생각이 난다.
이 집은 아버지가 자식들의 공부와 과부이신 작은 고모님을 위해 장만하여 둔 집이었다. 길 쪽 첫 방이 당시 남노당부산지부인지, 공산당경남지부인지 조직명은 알 수 없지만 이름 모를 빨갱이 어른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무슨 숙덕공론인지 몰라도 자주 회합을 하는 거점이었고, 그 멤버의 우두머리가 나의 고종사촌인 최 필구 형이었다.
작은 형은 그 고종 형으로부터 쇠뇌 당하였고, 적기가의 가사와 다른 노래(빨갱이노래)말을 노트에 적어두고 종종 불렀고, 이 때 어린 동생들인 우리 귀에까지 익숙해진 곡조였다. 그러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두려움이 어린 형제의 토끼 같은 가슴에 공포를 심어주지 않을 수 없었고, 만약 경찰이 우리를 끌고 우리 집에 들어와 첫 방문을 열고 수상한 낌새를 차리고 벽장문을 열어본다면, 그 속에는 빨갱이 문서들이 있을 것이고 이에 대하여 추궁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지금도 온 몸이 저려온다.
나는 요즘 초등 5년생을 보며, 저런 꼬마였던 내가 어떻게 그런 어른스런 꾀를 낼 수 있었는지 스스로 대견했다는 생각을 금치 못한다.
그 날 이후 작은형이 흥얼거리든 ‘적기가’는 차츰 빈도가 줄어들었고, 운동장 ‘위기’ 내용을 필구 형이 알게 되었는지, 우리 집 빨갱이 아지터엔 공산당 아저씨들의 출입이 줄어들었다. 당연히 벽 속에 몰래 숨겨 둔 삐라나 문서들은 말끔히 치워지고 새 벽지로 도배되었음을 내가 그 방에 들어가 확인하였다. 한번은 필구 형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쪼겐 놈이 참 대단타 니는 큰놈 될끼다, 공부 열심히 쪼아라” 하였다. 필구 형이 대신초등학교 우리 반에서 1-2등을 하는 내 실력을 잘 모르는구나 생각했다. 나는 작은형으로부터 ‘운동장적기가’ 사건을 니가 용하게 잘 처리했다는 칭찬을 받고 싶었는데--, 필구 형 칭찬은 별로였다.
그 즈음 필구 형이 우리 집 작은 형 방에서 함께 잠을 자는 날이 많아지고 외출하는 회수는 뜸하여 졌다. 대문소리가 바람에 삐꺽해도 필구 형의 얼굴에 불안과 어두운 기색이 스쳐 가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공산 지하활동이 순조롭지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되었다.
하루는 작은형 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작은 형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 살그머니 눈을 떠보니 필구 형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결에 들은 내용은 ‘필구 형 세포 원 중 한사람이 친척의 밀고로 경찰에 끌려갔다’는 대강의 내용이었다. 나는 동생과의 운동장에서 있었던 재치 있는 ‘대응의 고백’이 있은 후, 내 말을 믿지 못한 형이 필구 형에게 주의를 주어 이로 인해 우리 집 아지트 분위기가 설렁하게 바뀌고 있지 않나 싶어 섭섭하였는데, 이 소리를 듣자 ‘그러면 그렇지 이유는 딴 데 있었나 보다’ 하고 기분이 좋았다.
시간이 갈수록 경찰의 빨갱이 소탕작전이 어부가 거물을 당기듯 옭조여 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짐작되었다.
노인은 더 거슬러 올라가 부산 대신초등학교로 전학 오기 전, 8.15 해방이 되던 해(1945년 초등 2학년)를 더듬어 본다. 합천은 시골이지만 거리는 태극기로 물결치고 만세의 함성이 동리를 가득 울리던 며칠 간을 넘기고 열기가 식어지자 치안대니, 경비대니 하며, 어디에서 몰려 왔는지 알 수 없는 애국청년 아저씨들이 서로가 합천 경찰서를 먼저 점령하여 실권을 잡으려 발버둥치는 어수선한 혼란기였다. 집 건너편에 살던 일본 경찰의 배 부장이란 악질 조선사람 형사를 소위 치안대원들이 가는 밧줄로 목을 감아 이 거리 저 골목으로 끌고 다니고, 또 합천군청에 불이 났었던 그 즈음, 필구 형이 합천읍 우리 집을 방문하였다. 우리 집은 합천 경찰서 북편의 콘크리트 담과 경계를 하고 있었다. 본 채 큰방에 어머니가 차린 깔끔한 술상을 마주하고 아버지와 필구 형이 막걸리 잔을 비우며 주고받았던 대화 한 토막을 호기심을 갖고 들었다.
필구 형이 ‘외삼촌! 우리나라는 광복이 되었고, 곧 남로당이 정권을 잡으면, 가난한자도 없고 큰 부자도 없이 모든 백성이 고루 고루 잘사는 좋은 나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니 외삼촌께서도 그 때까지 참고 기다리면 한 자리 하실 것입니다’ 라는 취지의 말을 하자 ‘아나, 필구야! 니 공산당에 물들어 가서 지하 운동하능거 말릴 수 없다 마능 너무 과격한 행동은 하지 말거라’ 하시면서 ‘이 세상사는 머리 좋고, 부지런한 사람은 잘 살끼고, 남의 눈치나 보고 깨으런 놈은 빌어묵고 사는기 당연한 이치인기라, 그런데 니 말 대로, 누구나 잘사는 세상으로 바뀌기도 어렵고, 또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능 기라’ 라는 뜻으로 하는 말씀들이었다.
초등학교 이삼 학년이면 사타구니 고추가 채 여물기도 전인데, 어찌 그런 가물가물한 기억을 들추어내는가 하며 신빙성을 의심하는 분도 있으리라.
그런데 솔직히 노망 직전의 내가 어떻게 반세기가 지난 옛 일을 그림처럼 꼬집어 낼 수 있는 것인지 신기하다. 좌우간 내라는 인간은 좀 엉뚱한 데가 있고, 당시에도 나이보다 올되었던 모양이다.
필구 형은 큰 고모님의 두 아들 중 맏인데, 볼과 턱에 밀도 높은 수염의 시퍼런 면도 자국이 흰 얼굴 바탕에 조화되어 어울렸고, 쌍꺼풀눈에 광채가 나는 눈동자는 상대의 기를 죽이고, 부드러운 선의 코는 곧게 얼굴 중앙에 자리하여 두꺼운 입술을 돋보이게 하며, 얼굴 전체는 사각형으로 당차고 위엄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말소리는 치렁치렁하며 굵고 힘찼다. 그는 내 막내 삼촌과 비슷한 또래인데, 잘생긴 삼촌이 여자다운 모습이라면, 필구 형은 남자다운 모습이었다.
막내 삼촌은 일정 말기 합천군청 서기였는데, 해방이 되자, 그 즈음 변 창구라는 이름의 아주 부랑한 치안대 대장이 합천의 실권을 장악하려는 세력 다툼의 과정에서 경찰서 옆에 있는 군 청사에 은밀하게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이 불을 작은 삼촌이 질렀다는 누명을 씌워 경찰서 유치장에 구속하였다. 아마 필구 형이 우리 집을 찾게 된 것은 이일로 아버지가 부산에 있는 그 형을 불렀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필구 형이 다녀가고 난 뒤 작은 삼촌은 곧 치안대에서 풀려났다.
아버지는 “필구 그놈 정말 똑똑한 놈인데---, 아깝다” 하고 어머님께 하는 말씀을 가끔 들었다. 그 때 나는 그 필구 형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아니하였다. 작은 삼촌을 괴롭힌 치안대장이라는 사람과 처음 만날 때 서로 부둥켜안고 인사하는 것을 내 동생이 보았다는 말을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그 필구 형이 다녀가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미군이 합천에 들어와 주둔하더니, 우리 아버지는 합천군수로 임명되었다. 영어 잘하는 합천교회 목사가 추천하여 군수로 발탁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아무튼 우리 아버지는 해방 후 합천군을 대표하는 초대 행정기관장이 되셨다.
필구 형 동생은 이름이 봉구였다. 봉구 형은 명절에 몇 번 본 기억이 있는데 아주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봉구 형은 부산 자유시장(국제시장)에서 용두산 쪽으로 난 여러 길 가운데, 중 간 쯤 나 있는 길 어구에 집이 있었고, 일층을 가게로 개조하여 복지원단 장사를 하고 있었다. 생활이 넉넉한 것 같았으나 마산에 있는 큰 고모님에게 효도를 하지 못한다고 작은 고모님이 원망하는 것을 들었다.
6.25가 터지기 몇 개월 전이지 싶다. 꼬마형제의 운동장 적기가 사건이 있은 후 필구 형이 부산 대신동 우리 집에서 잘 나가지 않고 숨어 있었다.
그 즈음 어느 날 저녁 무렵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더니, “이모님! 이모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곧 작은 방에 있던 작은 고모님이 “그 누고” 하며 마루로 나오자, “봉굽니더 문 좀 열어주이소” 하자, “그래 봉구 니가 우짠 일이고” 하며 고모님은 신발을 끌고 마당을 지나 대문을 열었다.
그러자 봉구 형 뒤에서 무지 막한 젊은 형사 서너 명이 밀고 들이닥치며 신발을 신은 채 마루로 뛰어 올라와 작은 형 방 미닫이문을 열고, 겁에 질려있는 필구 형에게 형사들 중 선임 자인 상 싶은 자가 “니가 빨갱이 최 필구 맞제” 하자, 필구 형은 체념을 하였는지 고개를 숙이고, 대답한번 하지 못한 채 순순히 포승줄에 묶이어 끌려 나갔다.
필구 형이 거처하는 방까지 알고 있는 것을 보면, 봉구 형이 경찰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우리 집까지 끌려왔나보다 생각했다. 필구 형의 그 광채 나든 눈빛이 고양이 폭력 앞에 놓인 쥐처럼 공포에 저려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웠다. 강한 사람도 자기보다 더 강하다 싶은 사람 앞에서는 무기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도 그 필구 형이 개처럼 끌려가면서 보인 애처로운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로 나는 필구 형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작은 형은 봉구 형에 대하여 자기 친형을 경찰에 팔아먹은 파렴치한으로 치부하며 멸시하였다.
그 후 반여 년쯤 지나서 내가 경남중학 일학년 때 6.25 사변이 터졌다. 내가 다니던 토성동의 경남중학교는 군 병원으로 바뀌고, 우리들은 강당을 쪼개어 칸을 질러 수업하다 여름 방학을 만났다. 나는 고향 합천으로 갔다. 당시 작은 형은 경남상고를 졸업하고 합천금융조합에 취직하고 있었다.
인민군이 합천읍에 들어오기 전에 엄마와 아빠 작은 형 내외, 동생 그리고 부산서 방학이라 다니러 온 사촌누나와 사촌동생 등 이런 대 가족이 합천읍 우리 집에 있다가 거창, 봉산 쪽에서 대포소리가 들려오고 경찰이 짐을 싸 후퇴하고 미군 전투기가 요란하게 하늘을 맴돌 때, 우리는 미리 전쟁을 피해 처음은 읍 관내 머구재란 칠팔호가 사는 작은 동리로 피란을 갔다.
이틀이 지날 즈음 그 곳에 인민군이 들어 왔다. 며칠이 지나갔다. 그 때 최전선 전쟁터에 나가지 않는 인민군이 읍내는 비핵기 공습이 심해 머구재에 기거하는 놈이 있었다. 그놈은 시도 때도 없이 ‘적기가’를 신이 나게 불되든 놈이다. 낙동강에서 들려오는 대포소리가 끊이지 않는데도 인민해방군이 부산을 점령하고 지금 일본을 쳐들어가고 있다고 거짓말을 능청스럽게 하든 놈이다.
하루는 이 인민군 놈이 우리 형제가 아끼든 가루라는 개가 있었는데, 이 가루를 잡아 보신하겠다고 아버지에게 강요하였다. 우리 개 가루는 이 말의 뜻을 알아차렸든지 슬그머니 빠져나가 어디론가 살아져버린 것이다. 정말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있는데, 삼일 후인가 쯤, 이 가루가 머구재의 피난 집으로 어설렁 대며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 영물의 개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주인과 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여 돌아 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가루를 본 그 못된 빨갱이 새끼가 "깐나 개새끼! 니가 어디 갔다 이자사 오는기야요" 하드니, 아버지에게 보신용으로 제공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가루보다 두 배가 넘는 돼지를 사줄 테니 가루를 그냥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우리 인민군은 조런 약 개를 먹어야 힘이 솟아 미제 놈을 까부술 수가 있는 기야요," 하며, 마루 밑에 웅크리고 있는 가루를 향해 따발총을 몇 발 쏘자 ‘꾕’ 소리를 내며 죽었다.
이를 본 어린 내 동생은 울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 빨갱이 놈이 징그러워 우리는 그 곳에서 더 깊은 골짝으로 들어가 인곡리란 동내로 피란 집을 옮겼다. 우리가 피란한 집은 초등학교 바로 뒤에 있었는데 매일 매일 어디서 모집하여 오는지 남쪽의 열 대여섯도 않되 보이는 청소년들을 사오십 명씩 붙잡아 와서는 집단 훈련을 시키는데 행진하면서 ‘적기가’를 합창, 선창, 후창을 마구 해대는 것이다. 그래서 작은 형은 그 노래가 듣기 싫었던지 또 피란 집을 다른 데로 옮기자고 하길 래 나와 동생도 동조하여 다시 앞산 너머에 있는 용주면 방곡리 끝 동내 윤씨 성을 가진 초가집 사랑방을 얻어 그리로 가 피란처를 정하였다.
하루는 동내의 내 또래 아이와 나무 하러 앞산으로 올라가 정상에 이르렀을 때 마침 미군 중형 폭격기가 합천 읍내를 향해 공습을 한차례 하고 바로 작은 소나무 밑에 숨어 있는 우리 앞으로 치솟아 올라와 방향을 바꾸어 읍내를 향해 곤두박질치며 포탄과 기관포를 뿌리고는 다시 방향을 틀어 우리 쪽으로 올라와 또 방향을 읍 쪽으로 바꿀 때, 그 비행기에 탑승한 조종사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신이 날까 생각하며 부러워했다. 그 비행기가 다시 읍내 쪽을 향해 내리꽂히며 빨간 불덩이가 직선으로 슛하고 투하되면, 검은 연기와 불기둥이 치솟고 잠시 후 꽈당탕탕 하며 폭음이 고막을 울렸던 것이다.
사람에겐 파괴 욕이 있다고 누가 했던가, 어린 나도 비행기 폭격을 가슴 조이며 재미있어했다. 그날 저녁 마당에 묻어둔 간장과 된장을 가지러 읍내에 들어가 보니 우리 집 본채 절반이 흔적도 없이 날아갔고 반쪽만 찢어진 탱크처럼 처참하게 남아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 집이 폭격을 당해 파괴당하는데 나는 방곡리 산마루에서 구경하며 즐거워하였던 것이다.
이때쯤 작은 형은 공산주의 사상에 회의를 느꼈고,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쪽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보았다.
공산군이 마치 반도를 다 점령한 양 우리 앞에서는 의기양양하였으나 매일 매일 멀지 않는 산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포소리, 그리고 수없이 많은 부상병과 패잔병이 합천초등학교 임시 야전 병원으로 혹은 지리산 쪽 황매산을 향해 걸어서, 사람에게 업혀서, 혹은 들 것 등에 실려 가는 것을 보고,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 내무서원이 충혈 된 눈으로 인곡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보충병들 입을 통해 ‘적기가’ 등 행진곡을 토해내었지만, 그 노래는 미래가 없는 공허한 절규였으며, 특히 형에게는 한 때 무지개의 꿈을 갖게 했던 그 행진곡이 곳곳에 늘려있는 인민군 시체를 위한 장송곡이거나 단말마의 비명처럼 들렸는지는 모를 일이다.
방곡리에 있을 때 내무서원이 들어와 밭에 커가는 고추며 가지, 배추포기 등을 일일이 세며, 공출을 부과하는 것을 보고, 필구 형이 말한 공산주의 국가가 국민을 위한 이상주의 국가가 아님을 깊게 깨달은 모양이다.
작은 형이나 우리 동생들도 그 이후 ‘적기가’ 를 들으면 분노했고, ‘적기가’ 는 사람의 혼을 빼는 주술적 가락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노인은 오랫동안 감았던 눈을 뜨고 컴퓨터를 끄면서 다시는 이 땅에 위 같은 악몽을 떠올릴 ‘적기가’가 들려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50여 년의 시공을 넘어서, 그 저주의 적기가를 KBS가 무려 40초간이나 공중파를 통해 전국에 뿌린 그 잔존 음파가 이 지구상으로 돌아다니다가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노인의 살갗에 파고들었는지, 소름이 일고 몸을 떤다.
해방의 감격을 모르는 세대, 6.25가 남침이고 그 아픔이 얼마나 큰지를 모르는 세대, 남의 나라를 지켜주려 수많은 젊은이를 보내준 미국의 정을 모르는 세대들이 ‘한민족’ ‘우리끼리’ ‘평화와 자주’를 내걸고 북을 찬양하면서 대한민국의 거리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젊은 난동 꾼을 보고 혀를 껄껄 차며 탄식이나 할 뿐, 겨우 이런 글이나 컴퓨터에 찍어 저장하고 다시 넷에 띄울 수밖에 다른 수단을 갖지 못한 것에 늙은이는 그저 한탄만 할 뿐이다.
이제 6.25 사변 62주년을 맞이하여 그 감격했던 해방의 환희와 처절했던 6.25동란 후의 폐허화된 아득한 과거의 기억을 멀리한 채 반세기를 훌쩍 띠어 넘은 지금, 북에서는 김씨 왕조가 인민의 권리를 박탈하고 게다가 인민은 굶주림마저 이부자리처럼 덮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로 만든 저주의 그 땅, 그 체제에서 핵과 미사일만은 열심히 조립하는 북한, 기어이 피둥피둥하게 살이 오른 김정은을 삼대세습의 괴수로 떠받들어 열광하는 지구상의 이상한 나라--.
그런데 남에서는 평양과 서울을 구별하지 못하는 학생과 선생들 그리고 정치권과 산업 현장에서 언론, 학계, 법조계의 조직 속에 박혀 아무 제제를 받지 않고 그들의 손발이 되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뒤 엎을 궁리만하는 종북, 친김들 때문에 이 늙은이는 뼈를 깎는 아픔을 견딜 수 없다.
노인이 창밖을 보니 이미 해가 중천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침밥도 그 좋은 잠도 잊고 무려 십여 시간 만에 의자에서 일어났다.
침대로 먼저 간다. 빨갱이 이석기가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애국가가 국가가 아니라고 말 하는 여의도를 보면서 “망쪼야, 이거원 정말 망쪼가 들었어--” 하며 제 62차 치욕의 6.25 기념일을 며칠 앞두고 그 노인은 깊은 잠으로 빠져든다.
첫댓글 지금 막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을 읽고 있는 차에 이 글을 읽었는데 또 제가 합천 출신이라서 깜짝 놀랐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