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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얘들아, 나 이번에 새로 나온 가방 질렀다.”
유민지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엊그제 산 것으로 보이는 따끈따끈한 신상가방을 우리들 앞에 선보였다.
포장의 달인 유민지. 유민지는 아주 기가 막힐 정도로 포장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 포장이란 게 무엇이었느냐면 아주 유치하고 시시껄렁한 것들? 진짜 겁나게 많은데 그걸 일일이 다 말하자면 귀찮고. 딱 한 가지 정도 꼽자면 집안환경이 안 좋음에도 매우 좋은 것처럼 말하는, 뭐 대충 그런 식이었다. 아마 저 가방도 엄마한테 애걸복걸하며 겨우 사온 것일 터. 남자들이 껌뻑 죽을 정도로 커다란 저 눈망울로 사정사정 해대면 같은 가족이라도 별 수 있었을까. 노. 절대. 네버.
“이거 우리 오빠가 사준 거야.”
어떻게 산거냐, 누가 사준 거냐는 주위 애들의 말에 유민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을 한다. 저 ‘우리 오빠’라는 작자는 진짜 친오빠는 아니고 지금 유민지와 사귀고 있는 12번째 남자친구. 내가 ‘불쌍한 영혼 12호’라고 부르는 그 분이시다. 12호는 전 남자들에 비해서 좀 잘 버틴다 싶었는데 결국, 유민지의 꾐에 넘어간 것 같다. ‘제 12호 호구’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우리 엄마 것도 사줬어.”
유민지의 옆구리에서 또 다른 명품백이 등장했다. 효녀 심청을 이을 새로운 효녀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심청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여 효녀였고, 민지는 드디어 이번에 엄마의 등골을 피게 하여 효녀였다. 효녀 민지는 엄마한테 가방을 보여주며 자기가 힘들게 일해서 번 돈으로 산 것이라며 난중일기에 버금가는 내용으로 겪은 적도 없는 고난과 역경을 꾸며내 말로써 풀어낼 것이다. 참 환장할 노릇이다.
유민지는 나와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났다. 뭣도 모르고 애들한테 그냥저냥 말 좀 붙여보다가 좀 통한다 싶으면 서로 희희덕 거리던 그 시절. 유민지는 그때도 이랬을까? 아니, 전혀 아니다. 남들이 보기에도 좀 문제다 싶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어렸을 땐 안 그랬는데 크면서 이상해졌다’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유민지도 그들 중 하나였고 나는 초2때 이후로 유민지와 줄곧 다른 반이었다가 중학생이 됐을 때 서로 다른 학교로 떨어지게 되면서 완전히 멀어지게 됐다. 고등학생 때야 당연히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지금 유민지는 ‘어렸을 때는 좀 친했는데 나중에 학교 떨어지고 나선 연락도 잘 안 되는, 그래서 지금은 별로 안 친한 애’였다.
고등학생 때까지 소식은커녕 생존여부조차도 모르다가 대학에 가게 되면서 그제야 유민지를 다시 만났다. 유민지는 같은 대학 경영학과였고, 나는 중어중문학과였다. 그렇다고 OT나 MT때 가서 놀다가 우연히 만나게 됐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나와 유민지와 간간히 연락하고 지내던 임수경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도 같은 학교에 오게 되면서 운명적으로 유민지와 나는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참 반가웠다. 반가워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딱, 그게 끝이었다. 나는 예전의 내가, 유민지는 예전의 유민지가 아니었다. 나도 변하기야 엄청 변했지만 유민지의 변화가 더 두드러졌던 것 같다. 그 두드러진 변화란, 당연히 두드러기처럼 두드러지는 그녀의 포장실력이었다. 난 처음에 유민지의 말을 듣고 그녀가 대단한 부자가 된 줄로만 알았다. 허나, 개인적으로 나를 불러낸 수경이가 해주는 얘기를 듣고 그게 거짓말임을 알았고 그게 좀 중증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이후론 유민지가 꾸며낸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버리기 스킬을 시전하곤 했으며, 상황에 따라 눈치껏 눈웃음을 지어주곤 했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어느덧 1.5년. 만나자고 할 때마다 바쁘다는 핑계로 일관한 적이 대부분이라서 딱히 엄청 신경 쓰였거나 스트레스 받았던 적은 없는데, 아무래도 대화 주제가 저렇다보니 가끔씩 만날 때마다 한심스럽고 재미없는 건 변함이 없다.
자, 우리가 만나면 다섯 시간을 함께 논다고 가정해보자. 일반적으로 두 시간은 영화 보고, 한 시간은 쇼핑하고. 그래, 여기까진 좋아. 근데 나머지 두 시간 동안 뭔가를 먹으면서 누군가의 자랑을 들어야 한다면? 그것도 사실이 아닌 자랑을? 응, 아주 끔찍하겠지. 그래서 지금 난 아―주 끔찍하다. 아! 그러고 보면 ‘제 12호 호구’는 만날 때마다 들을 텐데……. 새삼스레 그가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솔직히 유민지는 예쁘다. 외모는 곱상하니 참 괜찮게 생겼다. 12호가 그녀를 만나는 이유 중에 외모가 어느 정도의 비율을 차지할진 잘 모르겠지만. 아마 꽤 높을 것이다. 몸매도 뭐 쭉쭉빵빵까진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준수한 비율과 볼륨감을 자랑하고 있으니, 굳이 표현하자면 봐줄만하다거나 볼만한 게 아니라 보고 싶은 수준? 풋, 너무 노골적인가. 하여튼 주위에 다른 여자동기들이나 선배들의 질투심과 부러움을 살 정도는 충분하고도 남을 수준이다 이거다. 그래서인지 주위에 남자들이 우글우글 득실대는 것이고, 다른 여성동지들은 그게 영 불만스러운 것이고. 자신이 좋아하던 남자가 유민지와 낄낄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나 같아도 울화통이 터질 것 같긴 한데…… 애초에 유민지의 겉모습만 보고 집적대는 것부터가 그 남자가 여자를 볼 때 뭘 중점적으로 보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기에 그렇게 슬퍼할 필요도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사랑을 꿈꾼다. 서로 쳐다만 보고 있어도 두근거려서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일출몰이 아름다운 기가 막힌 장소에서 노니며 사진을 찍고 추억을 남기고, 서로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폭발할 것처럼 타오를 때 함께 잠자리를 하며 그 사랑을 확인하고, 그 다음날 커튼 사이를 비집고 나온 눈부신 아침햇살에 살짝 눈을 떴을 때 사랑하는 사람의 잠든 옆모습을 확인하며 행복에 겨워 웃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런 사랑이 하고 싶다. 하지만 남자들도 그럴까. 아니 모든 남자들이 그럴까. 당연히 모든 남자들이 그러진 않겠지. 그럼, 앞으로 만나게 될 남자는 그럴까. 대부분의 여자들이 원하고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과연 그도 꿈꿀까.
각자마다 하고 싶은, 꿈꾸는 사랑이 다르다. 모든 남자가 육체적 사랑을 꿈꾸지 않듯이, 모든 여자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사랑을 꿈꾸는 것도 아니다. 단지 각자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 다르더라도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이해할 자신이 있다면 사랑하는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이 맞지 않을까. 물론,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을 찾았더라도 분명 사소한 부분에서 안 맞고 틀어지는 부분은 생길 터이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배려하고 이해할 자신이 없다면 사랑할 준비가 안 돼 있거나, 사랑할 힘이 없다는 거 아닐까. 본인의 심적 상태에 여유가 없으므로 자신의 마음속에 ‘나’ 말고 다른 ‘누군가’를 받아드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사랑을 하고 싶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건 애정결핍이다. 사랑을 주는 건 두려워서 싫은데, 사랑을 받고는 싶으니까. 사랑을 많이 못 받아서 부족하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사람들이 진짜 위험하다. 애정결핍은 곧 집착으로 번지게 되니까.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니 사랑을 주고 싶은데 어떻게 줘야 할지를 몰라서 잘못된 방식으로 사랑을 주게 되고 그 방식이란 게 곧 집착이니까. 그래서 상대방은 그 집착이 무섭고 싫어서 자신을 떠나게 되고 만약 그 집착이 도를 넘어선 수준이었다면, 그것이 곧 스토킹과 같은 범죄로 이어지는 등의 아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될 터.
자, 그렇다면.
유민지는 어느 쪽일까.
2
단체로 만나서 한참 신나게 입을 놀려대던 계집애들이 갑자기 자리를 뜨자고 말하는 이유는 수다와 함께 곁들일 음식이 없기 때문이고, 음식을 살 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더 들어갈 배가 없거나. 저마다 너무 많이 먹었다며 배가 나온 거 같다고 인상을 쓰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후자 쪽인 듯했다. 나는 그 무리와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 광경을 가만히 보고 서 있었다.
“서유림.”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란 티를 감추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누군가’의 부름 때문이라기 보단 그 ‘누군가’가 유민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내 시선은 몇몇 계집애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유민지에게로 옮겨졌고 유민지와 아이들의 시선은 그 전부터 내게로 향해있었던 듯했다. 나는 최대한 어색스럽지 않게 “응.” 이라고 답했다. 딱 한 마디. 그러나 그 딱 ‘한 마디’의 음성은 스스로도 멋쩍게 느껴질 정도였다. 유민지가 천천히 웃으면서 다가왔다. 그녀의 미소도 어색함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마도 기분 탓이겠지.
“오랜만에 만나서 즐거웠어. 유림이 넌 어째 점점 더 예뻐지는 거 같다.”
유민지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안았다. 처음 다시 만났을 때에도 그냥 손만 잡았었는데…… 처음 느껴보는 그녀의 품, 그녀의 행동이 낯설었다. 내 몸을 꼭 감싸 안은 사람이 엄마도 아니고, 외간남자도 아닌, 유년 시절의 추억이자 1.5년간의 기피대상이었던 유민지라는 사실이 참으로 현실감 없게 와 닿았다.
“유림아 너 바쁜 건 알지만 그래도 우리 가끔씩이라도 봤으면 좋겠어. 시간 될 때 꼭 나와 줘. 우리 만나서 진지한 얘기 같은 거 한 번도 안 해봤잖아, 알았지? 잘 가고 다음에도 꼭 봐. 그럼, 안녕.”
말을 끝마친 유민지는 곧바로 내 등을 감싼 팔을 풀었고, 어머니와 같이 인자한 미소를 띤 채로 그렇게 돌아섰다. 나는 답할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아주 일방적이었다.
유민지와 아이들이 탄 택시가 떠나는 뒷모습을 나는 가만히 지켜봤다. 갑작스레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벙 찐 표정으로 말이다.
여자들의 말, 여자들이 쓰는 여자들의 언어. 하나의 문장을 말해도 그 문장에 담겨진 의미는 하나가 아닌, 남자들은 잘 모르는 그녀들만의 신비로운, 한편으론 너무나도 어려운 세계……. 그리고 여자도 여자를 잘 모른다는 말이 급 공감이 가는 지금 이 순간. 진심인 거 같으면서도 아닌 거 같은 유민지의 아리송한 언어들이 계속 머리 주위를 빙빙 맴돌았다.
“야야야! 유민지가 뭐래?”
또각또각이 아닌, 딱딱딱. 7cm짜리 구두를 신은 임수경이 다급하게 발을 놀리며 다가왔다. 사실 유민지가 막 나를 안았을 때, 나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멀찌감치 서서 그 모습을 보던 임수경과 눈이 마주쳤었다.
“나중에 진지한 얘기 좀 하재.”
“뭐? 진짜?”
“그리고 가끔이라도 꼭 봤으면 좋겠대.”
“오, 대―박. 걔가 그랬다고? 대체 무슨 꿍꿍이래.”
사실, 꾸준히 유민지와 연락하고 지내던 임수경도 유민지와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임수경 본인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게다가 유민지를 그렇게 좋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럼에도 임수경이 유민지와 자주 어울리는 이유는 ‘같이 다니면 돈 쓸 일이 별로 없거든, 걔가 거의 다 사니까.’ 딱 그녀의 이 한마디로 정리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뒤에 여러 가지 부연설명을 더 덧붙이긴 했지만 굳이 들어볼 필요도 없이 저게 딱 핵심이었다. 계속 연락을 해오면서 지냈기에 뭔가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 줄 알았건만. ‘혹시나’가 ‘역시나’였고 대학친구라는 것들은 죄다 이해관계 속에서 이뤄진다는 말이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유민지에게 진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애들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열에 아홉은, 아니 열에 열은 다 임수경과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그녀와 가깝게 지내는 척하는 게 아닐까.
유민지는 애정결핍이었다. 그리고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수준은 심각했다. 자신을 있는 대로 과대포장 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해주길,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라고 있었으니까. 반면에 사랑을 주는 법은 전혀 몰랐기에 그녀는 항상 일방적일 수밖에 없었다. 일방적으로 자기 얘기만을 하고, 일방적으로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랐다. 그녀를 거쳐 간 수많은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줬을까. 일반적인 남녀의 사랑은 캐치볼을 하는 것처럼 주거니 받거니가 이뤄져야 하기에 분명, 그녀도 사랑을 줘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주는 법을 모르는 그녀는 남자들에게 물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믿을래.’ 그렇다면 그 남자들은 어떻게 답했을까.
그 이후로 쭉 유민지의 사랑방식은 집착과 스킨십, 그리고 육체적인 관계로 뒤범벅이 됐을 거라는 것. 그게 그들의 대답이 아니었을까.
3
“어, 민지야.”
유민지한테서 연락이 온 건 내가 그녀의 온기를 느낀 지 3일이 지난 무렵이었다. 일방적으로 스킨십을 당했던 그 날 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을 그녀의 행동에 대해 되짚어보았다. 그렇지만 그녀의 속을 모르는 상태이기에 딱히 답이 나오진 않았고, 미련한 짓임을 깨닫고 관두게 됐다. 처음에는 그녀의 행동이 여자들의 언어를 이용한 ‘도와달라’는 ‘헬프 미’ 요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것조차도 ‘포장’의 일부분일 수도 있다는 생각 또한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녀의 돌발행동은 애들이 ‘다 보는 앞’에서 이루어졌으니까. 어쨌든 나는 그 당시 ‘난 유민지가 아니므로 잘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그리고 지금은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로 수화기 너머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유림아 혹시 오늘 시간 돼? 이따가 한 시쯤에 학교 앞 카페에서 단 둘이 볼 수 있으려나 해서…….’
“음― 난 뭐 괜찮아.”
‘그래? 잘 됐다 그럼 이따가 한 시에 봐!’
“응―.”
통화는 그렇게 끊겼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둘 다’ 일수도 있지 않을까.
약속시간 십 분 전, 나는 차임벨이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카페에 들어섰다. 가장 먼저 찬란한 조명과 친환경적인 카페의 배경이 눈에 들어왔고 뒤이어 은은한 커피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카페를 더 둘러볼 필요도 없이 유민지는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창가 쪽 자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있는 책에 시선을 두고 있었는데 카페 분위기와 그 모습이 꽤나 잘 어울렸다.
“민지야.”
“어? 유림아.”
책에서 눈을 뗀 유민지는 나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나 또한 덩달아 미소를 띠며 자리에 앉았다. 유민지가 미리 시켜놓은 차가운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면서 나는 그녀를 흘끔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유민지는 반달모양으로 눈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갑자기 불러낸 거 아닌가 싶네.”
“아니야 오늘은 딱히 별다른 일정도 없어.”
“후훗, 그래? 오늘 만나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그때 내가 너 안으면서 진지한 얘기 한 번 못해봤다고 했잖아…….”
“응.”
“그래서 말인데…… 너랑 그 진지한 얘기 좀 해보려고 해.”
유민지의 마지막 말이 마치 올림픽의 서막을 알리는 듯했다. 유민지의 언어는 의문 투성이었다. 유민지가 하고자 하는 진지한 얘기라는 것은 대체 무엇이며, 어째서 그 진지한 얘기를 나와 하자고 하는 걸까.
“갑자기 이런 거 물어보면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유림이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해?”
“흠, 글쎄…….”
곧바로 풀려버린 한 가지의 의문. 나는 말끝을 흐리며 곧장 커피 잔에 검지를 끼워 넣었다.
완벽한 떠보기. 그녀의 질문은 참 그녀다웠다. 자신이 정말로 궁금해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그것과 관련은 있고 스스로도 대략 답을 예상하고 있는 딱 그런 질문이었다. 1.5년간 서유림은 유민지를 피했다. 그런데도 서유림이 유민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과연, 유민지는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떤 말이 듣고 싶어?”
“어떤…… 말이라니?”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딱 두 가지야. 하나는 네가 듣고 싶어 하는 말, 다른 하나는 네가 듣기 싫어하는 말.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네가 듣기 싫어하는 말이 내 진심이야. 그래서 네게 어떤 말이 듣고 싶으냐고 묻는 거야. 한마디로, 선택권을 주는 거지.”
무언가를 선택해야하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반드시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할 때, 그리고 그 책임이라는 게 자신에게 굉장히 큰 타격이 될 만한 것일 때, 인간은 그 어떤 때보다도 무방비상태가 된다. 유민지의 얼굴엔 막연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렇지만, 그녀는 곧 할 말을 정할 것이고 대답 할 것이다. 그 대답이란 것은 굳이 들어보지 않아도 예상이 가는 답안. 유민지는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할 것이다. 삶을 살아오면서 그녀는 이제껏 그래왔을 테니까.
“안 듣고 싶어. 두 개 다.”
“왜? 먼저 물어본 건 너잖아.”
“그냥 둘 다 듣고 싶지 않아졌어.”
“유민지.”
“응.”
“나는 너에게 선택권을 줬을 뿐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어. 내가 ‘네가 듣고 싶어 하는 말’과 ‘듣기 싫어하는 말’이라고 말했을 때 너는 어떤 상상을 했던 거지? 그건 내 기준에서 ‘네가 듣고 싶어 할 거 같은 말’과 ‘듣기 싫어 할 거 같은 말’에 불과한데 말이야. 물론, 아무리 내 기준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각각의 내 말을 들었을 때 그게 듣고 싶은 말일 수도 있고 듣기 싫은 말일 수도 있어. 그렇지만 넌 내 말을 듣기도 전에 네 멋대로 상상하고 판단해버리곤 내 말을 듣지 않았어.”
“…….”
“네가 어떤 상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진심으로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건, 스스로를 네가 상상한 정도로 밖에 생각 안 한다는 말이 되지 않을까.”
울컥,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가슴을 죄이고 턱 끝까지 차오르는 감정. 그 감정을 누르고 또 억누르기를 반복했다. 그 대신, 멈출 수도 없고 멈추기도 싫은, 그녀를 향한 나의 언어들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네가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냥 말할게. 너를 7년 만에 처음 다시 만났을 때 정말 반가웠어. 하지만 꾸며낸 거짓들로 자신을 포장하는 네가 난 더 이상 반갑지 않았고 그렇게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널 피했고, 방관했어. 그렇지만 딱 3일 전 어쩔 수 없이 나간 모임에서 네가 날 처음으로 안았을 때, 그게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어. 없었는데…… 너무, 너무 반갑더라. 그래서 난 더 이상 널 방관할 수 없었어. 그게 바로 내가 이 자리에 나온 이유야. 넌 내가 이 자리에 나온다고 했을 때 조금은, 의아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얼굴을 감싼 채로 어깨를 들썩이는 유민지를 보면서,
나는 힘겹게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당시 네가 어떤 의도와 마음으로 날 안았는지 그건 중요치 않았어. 나는 네 말과 행동에서 내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꼈고, 실제로 넌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어. 7년 만에 다시 만났음에도 꾸며낸다는 이유로 1년 반 동안 너를 피해 다닌 나인데, 그런 나를 처음으로 안아준 너를…… 그런 너를 내가 어떻게 안 도와줄 수 있겠니……. 이렇게 비싼 것들을 걸치고 다니지 않아도 넌 충분히 아름답고 예쁘다는 말, 굳이 그렇게 까지 말 안 해도 넌 충분히 매력 넘친다는 말, 그리고 여태껏 방관해서 미안하다는 말. 못해줘서 미안해, 미안해 민지야 1년 반 동안 피해 다녀서…… 정말, 정말…… 미…… 미안…… 미안해…….”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한 채로 유민지를 끌어안았다. 본인이 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거의 무너지다시피 하면서, 3일 전 그날처럼, 아니 그날보다 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유민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그 모습은 평생 동안 붙잡고 있던 자신만의 가짜 세계관을 놓아버린, 그녀의 진짜 모습이었다.
4
역시나 습관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가짜 세계관을 놓고 펑펑 울고 난 이후로도 유민지는 꾸밈을 멈추질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비싼 화장품을 이용했으며, 비싼 옷과 비싼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을 더 좋아라했다. 하지만.
“오늘은 5천원 더 싼 곳에서 매니큐어 했다! 비록 5천원 차이지만 뭐 거기도 나름 괜찮더라고.”
이렇듯 소소하게나마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유민지는 한 달 전에 12호에게 이별통보를 날렸다. 기존에 해왔던 가상 시뮬레이션 같은 사랑이 아닌, ‘진짜’ 사랑이 하고 싶다면서. 12호에게는 참으로 안 된 일이지만 이제 그녀도 사랑을 받을 줄만 아는 사람에서 탈출하게 된 듯했다. 물론, 그 이후로 얼마 안 돼서 만난 13호에게 9대1정도의 압도적인 비율을 자랑하고 있는 듯했지만, 1이라도 생긴 게 어딘가! 용기 있는 그녀의 시도에, 그리고 앞으로 그녀와 함께, 어쩌면 그녀보다 더 고생할, 13호에게 응원과 박수를 보낸다.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눈물을 쏟은 지 약 세 달여가 지난 지금. 이렇게 그녀의 소소한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 어느덧, 일상의 즐거움 중 하나가 되었다.
그 후에 유민지가 해준 얘기이지만 그녀가 모임 막바지 무렵에 날 안았던 건 예상대로 두루두루 다 친하다는 것을 애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포장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나한테도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었는데, 내가 1년 반 동안 거의 만나주질 않아 포기하려고 했었단다. 그러다가 그 날 모임에 나온 나를 보며 마지막으로 날 시험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그 시험이라는 건 ‘서유림이 자신에게 사랑을 줄 것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었다. 그 시험은 그 날 그 카페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는데 시험은커녕 도리어 본인의 가짜 세계관만 박살나고 온 것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갖고 있는 세계관이 있다. 그리고 절대로 그 세계관이 누군가에 의해서 부서지거나 부서질 위기에 처하게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민지는 그 세계관을 더 이상 유지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든 상태(유민지가 날 안았던 걸 포장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 힘든 상태가 자기도 모르게 은연중에 행동으로 드러났던 것 같다)였고, 그렇기에 내가 그런 충격적인 말을 했을 때 스펀지처럼 그 충격이 그대로 흡수 돼 지금처럼 소소하고 느리게라도 바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충격이 또 다른 충격을 낳아서 눈물을 보이기는커녕 아마 머리채를 잡혔을 게 분명하다.
아, 그러고 보니 엊그젠가. 최근 들어 유민지의 어머니로 보이는 분과 그녀가 함께 지나가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됐다는 말을 그녀의 집 근처에 사는 대학 친구들로 부터 전해 들었었다. 몇 년 간 그 근처에 살면서 단 한 번도 못 본 광경이라서 놀라웠다고 말이다. 희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애정결핍의 근원적인 문제까지 좋게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그녀의 어머니 생일이 아마 다음 달 초인 걸로 알고 있는데, 그땐 쇼핑 할 때마다 한 번씩 눈 여겨 봐야겠는 걸?
……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민지가 안았을 때 그제야 반응한 나도.
실은, 애정결핍이 아닐까.
공백포함 11051자 18782 byte
공백제외 8177자 15908 byte
첫댓글 잘감이예요
현실적이고 섬세한 묘사가 좋네요. 여러모로 공감이 가요. 잘 읽었습니다.
뭔가 친구들을 생각하게하네요ㅎㅎ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