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북도 곡산군(谷山郡) 서부의 대각산(大角山)에서 발원하여 경기도·황해도의 경계를 지나 황해로 흐르는 강. 길이 174㎞. 대각산에서 발원하여 언진천(彦眞川) 및 지석천(支石川)과 합류, 한강 하구로 흘러든다. 이 유역은 고대 낙랑군(樂浪郡)에 속하였고, 뒤에 대방군(帶方郡)에 귀속되었다가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병합되었고, 다시 광개토왕의 경략으로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예성강은 안북하(安北河) 또는 북하라고도 하였는데, 고려시대 연안의 하항 벽란도(碧瀾渡)는 개성(開城)의 문호로서 송(宋)나라와의 교통상 관문 구실을 하여 번영을 누렸다. 강의 상류는 신계군(新溪郡)·평산군(平山郡)·금천군(金川郡)·연안군(延安郡) 등지를 관류하며, 수안(遂安)·신계·평산분지의 연안농경지 관개에 이용된다. 강 하류유역에는 연백평야(延白平野)가 펼쳐져 있다. 유역의 주요도시로는 금천·남천(南川)·한포(汗浦)가 있는데, 금천은 평산군·금천군·연안군 일대의 농산물집산지 기능을 하며, 특히 금천군의 대두(大豆)는 유명하다. 남천은 평산군의 행정·산업·교통의 중심지로서, 그 지방으로 통하는 물자의 집산지이며 동부 산지로의 문호가 된다. 한포는 금천 북쪽 예성강변에 자리잡고 있으며, 예성강 수운의 소항점(遡航點)으로서 부근일대의 농산물 수송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 예성강유역의 교통은 경의선(京義線) 외에도 토성리(土城里)∼해주(海州)를 잇는 토해선이 있고, 1번 국도가 경의선과 나란히 뻗어 있다. <야후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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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북도 개풍군(開豊郡) 예성강 하류에 있던 나루터. 황해도 고달산(高達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경기도와 황해도의 경계를 따라 흘러 황해로 들어가는 예성강은 비교적 물이 깊어 선박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으며, 벽란도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가까웠으므로 고려시대 제일의 나루이자 실질적인 국제항구로서 발전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송(宋)나라 상인뿐만 아니라 일본을 비롯하여 멀리 남양지방(南洋地方)과 서역지방의 해상들까지 자주 드나들면서 교역을 했던 항구였다. 그러나 벽란도의 기능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그 역할이 감소되었다. 더구나 철도교통을 비롯하여 육상교통이 발달하고, 다른 항구들이 개항하자, 그 역할은 거의 상실되었다. 그러나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찾던 곳이었다. 벽란도 부근 언덕에는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관사가 있어 송나라 사신 일행이 묵었다. 벽란도라는 이름도 처음에는 예성항이었으나 이 벽란정으로부터 이름을 따서 벽란도로 바꾸었다. <야후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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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세종실록 지리지 구도개성유후사(舊都開城留後司)에 따르면 개성은 본디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는 지역으로 신라가 고구려를 통합한 후 '송악군'으로 고쳤고, 고려 성종 14년(송나라 태종 원년)에 '개성부'로 명칭이 다시 변경되었습니다. 또한, 개성은 고려 현종 원년(송나라 진종 3년)에 '거란'의 성종황제가 개성으로 들어와 궁궐과 민가를 모두 불을 내어, 한번 사라진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후, 고려 현종 20년(송나라 인종 7년)에 시중 '강감찬'이 성을 쌓아 재건하였던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조선 태조시절 한양으로 천도하기 전에 내성을 쌓는 공사도 진행하였었습니다.
개성은 송악산이란 명산인 위치해 있는 절경이 뛰어났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송악(松岳)은 본디 진산(鎭山)으로 숭악(崧岳)으로도 불리며 숭산(崧山)과 같다라고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꼭대기에는 성황당, 대황당, 국사당의 3개의 사당이 있어,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설명합니다.연경궁의 경우는 송악의 남쪽에 위치하며, 조선의 사람들은 '본대궐'로 불렀었다고 합니다. 또한, 개성은 벽란도와 30리정도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해안도시가 됩니다. 이 벽란도는 처음에 주로 송나라와의 무역의 필요로 개항되었으나, 이후, 일본, 남양, 서역상인들까지 모이는 고려의 제1항구이자, 국제도시로 번성 하였습니다.
벽란도는 고려의 서쪽에 위치해있고, 예성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위치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성강은 '서강(西江)'이라는 것입니다.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 됩니다. 또한, 예성강의 다른 명칭은 '안북하(安北河)' 또는 '북하'로 중조의 기준에서 볼 때, 북쪽에 위치하여야 합니다. 요약하면, 중조의 북쪽에 위치하면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 예성강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개성'은 조선시대 '한양'의 윗쪽에 위치한 지역적 특징을 갖고, 그 가까이 흐르는 예성강은 서쪽으로 흘러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China대륙보다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설명했을 때, 더 적합한 지리적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황하강과 양자강은 모두 동쪽으로 흐르는 동강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 제 1항구인, 벽란도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그 기능이 많이 상실되었습니다. 한양은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지리적 환경으로 바닷가에 위치한 고려의 수도 개성과는 사뭇달랐던 것 같습니다. 사실, 조선태종시절 해상무역을 금지시켜, 벽란도를 비롯한 해양무역을 원천 봉쇄한 것도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고려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공존한 곳에 위치하였다고 밖에는 설명이 안됩니다. 고려말 '삼별초의 항쟁'으로 기억되는 역사는 고려가 해전의 능력이 상당히 우수한 집단이었던 것을 추측케 해 줍니다.
만약, 고려가 동유럽또는 예전 흑해와 카스피해 북쪽지역에 위치하였다면, 고려의 지리적 위치를 설명할 수 있는 많은 산들을 찾을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고려는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 있는 해안가에 위치하였고, 동시에 제사를 지낼수 있는 영험한 산과 그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산들이 함께 있는 곳이었습니다.
과연 이러한 지리적 위치를 설명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코카서스산맥의 남쪽지역도 하나의 후보지로 검토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