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예, 영부인이 되실 손금입니다. 실은, 지가 대통령이 꿈이
거든요."
"어머, 쪽집게시네. 미아리 사세요?"
상옥과 현식이가 동석해 있는 파트너와 히히덕거리고 있을 때
약속한 남학생들이 수빈이 일행 앞에 나타났다. 순간, 수빈의 눈
이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빛났다. 일행은 번호표에 의해 파트너
가 결정되자 각자 짝이 되어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유수빈입니다. "
수빈은 상옥을 의식하며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였다.
"전 김판근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
이 무슨 맑은 하늘에 벼락 떨어지는 소리냐? 그때서야 등 뒤에
서 심상치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상옥과 현
식이 뒷좌석을 돌아다 보았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
니 이 무슨 악연이란 말인가.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수빈이를
만나다니.
"야 임마, 현식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모르겠다 귀신이 곡할 일이다. "
'너 임마, 수빈이와 미리 내통한 거 아니야?
상옥은 얼굴빛이 노랗게 되어 현식이를 몰아세웠다.
"판근 씨, 제가 손금 좀 봐 드릴까요? 제 부전공이 동양철학
1거든요"
"정 말입니까?"
상옥은 뒷좌석에서 진행되는 상황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수
빈이는 이제 터놓고 큰 소리로 파트너의 손을 잡고 상옥의 흉내
를 내고 있었다
'허허, 안광이 빛이 나고, 광대뼈가 돌출되었어도, 인중이 뚜렷
하니 정치가 상을 타고 났겠네요, 대통령 한 번 하실만 하네요. 제
꿈이 영부인 되는 거거든요."
상옥은 부아가 치밀었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여 이런 곤욕을 치르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럼 장차, 영부인을 위한 만찬을 위하여 장소를 영빈관으
로 옮기실까요
남학생의 능청에 수빈이 기다렸다는 듯 발딱 일어나 따라나가
며 상옥의 발등을 있는 힘을 다하여 세게 밟았다
"어이쿠! 내 발 깨진다. "
"어머, 죄송합니다. 대통령 각하. 청와대 들어가셔서 나라일 살
피셔야죠
"민정시 이쯤 해서 끝내고 그만 들어와 집에서 보자구:
상옥과 현식이 마주 보면서 대책이 안 선다는 듯이 머리를 흔
들었다.
"상옥아! 너 어쩔래?"
"인명은 재천이란 말 알지?"
"그래, 알지 !"
식식거리며 집에 들어온 수빈이는 신경질적으로 책가방을 집어
던지고는 책꽂이에 꽃힌 노트 하나를 꺼내어 가리가리 찢어 버렸
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가뿐 숨을 몰아쉬었다.
"어디 들어오기만 해 봐라. 느덜은 오늘 지구를 떠난다. 요놈들
아!"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수빈이 앞에 상옥과 현식이 고양이 앞에
생쥐 꼴이 되어 서 있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바른 대로 말해야 돼. 알았어?"
"왜 대답을 못해?"
"알았어, 바른 대로 말할게."
"오늘 일 누가 벌린 거야? 상옥 오빠야? 현식 오빠야? 주동자
가 누구냐구?"
상옥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할 필요가 없
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수빈이가 오늘 일에 대
하여 이토록 심하게 따지고 들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
빈이 일행이 오늘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결과적으로 미팅하러
온 것이 분명한데, 자기들은 미팅해도 되고 우리는 하면 안 된다
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수빈아, 그걸 이야기하기 전에 한 가지 물어보자
'뭔데?"
'넌 뭣 땜에 그 자리에 나온 거니?"
수빈이는 상옥의 예기치 못했던 역습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너도 미팅하러 온 거 아니니?"
"난 느네들처럼 불결한 마음으로 미팅에 참가한 것이 아니
라 순전히 남자들의 심보를 연구 분석하기 위해 나간 거라구."
"오오라, 그랬니, 어쩌면 우리는 전생에서부터 멜 수 없는 인연
이 있는 게 분명하다. 왜냐? 우리도 여자들의 세계를 연구 분석
하기 위한 것밖에 다른 뜻은 전혀 없었걸랑"
"웃기지 마라, 김상옥! 그런 놈들이 손금 본답시고 여자 손을
주물럭거리니? 그리고 뭐! 무릉도원에 별이 세 개 뭐 봉황이 날
고 도화나무 아래 도축이 놀아? 그리고 뭐! 그 여우 같은 계집애
가 영부인 되실 손금이고 저는 대통령이 되는 게 꿈이라고! 웃기
고 있네 야, 상옥아! 가서 거을 좀 봐라. 그 인물이 대통령 될만
한 인물인지 ."
대세를 판단해 보니 별로 꿀릴 게 없다고 생각한 현식이도 한
몫 거들어 상옥을 두둔하고 나섰다.
"피 장파장이지 뭐. 너도 그러더라, 그 복사본 오랑우탕이 대통
령 되고. 넌, 영부인 되는 게 꿈이라고."
다행히 상옥은 기발한 역습으로 위기를 넘겼다. 앞으로 다시 한
번 미팅 같은 거 하면 영원히 절교한다는 수빈이의 엄포로 그날
의 사건은 결국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상옥으로서는 진땀이 흐르
는 순간이었다.
세월은 유수와 갔다던가 어느덧 현식이는 3학년이 되었고 상옥
과 수빈이는 2학년이 되었다. 대학생활에도 익숙해지고 여름방학
도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그들에게 예기치 않던 시련이 찾아들
고 있었다.
당시 학내에는 많은 서클이 있었지만 특히 반정부적인 서클 활
동이 활발했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도 누군가가 불만 댕겨 주면
활화산이 될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이었다.
1965년 6월, 13년 여를 끌어오던 한일회담 끝에 한일국교정상
화라는 기형아가 태어났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1965년은 을사년
이었다.
60년 전 을사년 11월의 을사보호조약에 의하여 외교권을 빼앗
기고 일본의 보호령이 되었던 대한민국 로.로부터 60년 후 한일
간에 체결된 조약은 그 전의 을사조약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 것
이었으나 굴욕적인 외교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대다수였다.
국민들은 그것이 제 2의 을사조약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거기
에다가 66년 5월 재벌 총수 이모씨의 사카린 밀수사건까지 터졌
다 당국은 이러한 엄청난 사건에 미약한 벌금형을 선고하였고,
재벌 총수는 울산 비료공장을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말로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갔다.
거기에다 1966년 5월의 6대 대통령 선거와 6월8일의 대 총선
거는 과거 자유당 시절의 5 10 부정선거에 버금가는 타락 양상
을 보였다. 국민들 대다수는 머지않아 분명히 3선을 위한 개헌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6 8 부정선거의 후유증으로 6개월 간의 우여곡절 끝에 국회가
정상화되기는 했지만 1968년의 학내의 최대 이슈는 개헌 문제였
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68년 1월 10일,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개헌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해 6월 12일, 서울대 법대 학생 300여 명이 학교 강당에 모
여 '헌정수호 학생총회'를 개최함으로써 학원가는 한일협정 반대
데모 이래 전국적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문교당국은
6월 3일, 서울대 법대와 문리대에 휴교령을 내렸다.
학교 내에는 눈빛 날카로운 사복 기관원들이 배치되어 학생들
의 동향을 감시하고 있었다
돌팔매질이 난무하는 학교 분위기 속에서 점점 깊숙이 운동권
으로 빠져드는 현식이를 바라보는 상옥과 수빈이의 마음은 불안
하기만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현식이를 말릴 수가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현식은 자기가 옳다고 판단한 일을 그만둘 성격의 소
유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식은 '헌정수호 학생총회'의 핵심 간부로서 그 누구보다
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벌써 몇 차례나 경찰서 신세를 졌으며
주모자로 몰려 지명수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현식은 상옥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아니 비장한
각오라도 한 듯한 태도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상옥아, 우리는 대학인이다. 인격과 지성을 갖추고 있는 대학
인이면 마땅히 대학인다운 사고를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어떠한 억압과 탄압이 가해진다 해도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이 한몸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용기 있는 대학인이 되자고
결심했다. 상옥아 너도 잘 알겠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얼마나 많
은 학생들이 진정한 민주화를 위하여 젊음을 불사르고 있니? 그
젊은이들이 자기 자신만의 영달을 위하여 그런다고 생각하니? 그
건 절대로 아니다.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함이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진정한 민주주의를 물려 주기 위해서이다. 우리 대학인들이 모두
힘을 모아 투쟁하고 있는데 너네 대학은 어쩐 일인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니 너도 우리의 민주화 투쟁에 동참해
볼 생각 없니? 물론 강요는 아니다. 너 스스로 결정해 주길 바란
다. "
상옥은 현식이의 결심이 아주 대단하다고 느꼈다. 빛나는 그의
눈빛이 너무 진지하여 무엇이라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상옥은 현
식이가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는 집 안에 있었다. 현식이와의 밀담을 밖에서 엿들
은 수빈이가 결사적으로 반대를 하고 나선 것이다. 심지어 고향의
아버지에게 연락하겠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현
식이와 굳은 약속을 한 후였다. 상옥은 결코 현식이와의 약속을
파기할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상옥도 민주화 운동에 깊숙이 빠져들고 있었다. 현
식이가 전해 주는 유인물 등을 살포하고 학내 게시판에 대자보도
열심히 붙였다. 그러나 상옥은 아직도 그 일을 할 때면 마음이 불
안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해 10월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집안이 온통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현식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들에게 강제로 붙들려 갔다는 것이었다 현식이를 어디
로 데려간다는 말도 없이 곧 돌아올 거라는 말만 남기고 연행돼
간 것이다.
상옥이 망연해하고 있는데 또다시 낯선 두 사람이 대문을 밀고
들어섰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원도 밝히지 않은 채 다짜고짜 상옥
을 찾았다
"김상옥 학생을 찾아왔습니다 여기서 하숙을 하고 있다던데."
날카롭게 쳐다보는 눈매와 거친 말투로 보아 정보부원이나 수
사기관원들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가 있었다.
'제가 김상옥입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어, 그래?"
그들은 거침없이 반말을 해댔다
"우리는 Oo서 수사과에서 왔는데 잠시 같이 가야겠어."
"무슨 일입니까? 나는 경찰서에 갈 일이 없는데요."
"새끼, 딴에 대학생이라고 말이 많군 그래. 자 봐 임마 이게
영장이라는 거야 임마. 잔말 말고 따라나와 "
수사관이라는 사람은 주머니에서 무슨 종이 쪽지 하나를 꺼내
어 슬쩍 보이고는 다시 집어넣었다.
"예? 영장이라니요? 죄목이 무엇입니까?"
"야 임마 너 수갑 차고 갈래? 그냥 네 발로 걸어갈래?"
두 사람은 상옥의 양 팔을 한쪽씩 나누어 끼고 대문을 나서려
고 했다.
"아니 이보시쇼. 그 아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말을 해주고 데
려가는 것이 도리가 아니겄소. 그렇게 복중에 개 끌고 가는 것 맹
이로 강제로 끌고 가면 어쩐다요? 이놈의 세상은 법이랑 것도 없
당가요? 제미럴 오늘 오지게 옴붙은 날인같다 "
그들은 현식이 아버지의 강한 항의를 묵살한 채 상옥을 강제로
차에 태웠다.
"저도 오빠 따라 함께 가겠어요 가 보면 오빠가 무슨 죄
를 지었는지 알게 되겠지요."
수빈이 앙칼지게 소리치며 그들이 탄 차에 오르려 하자 경찰들
이 거칠게 수빈이를 밀쳐 냈다.
'넌, 누구냐?"
'동생이에요."
"그러면 쓸데없이 앙탈부리지 말고 집에서 얌전히 기다려요. 잡
아먹지는 않을 테니까. 알았어?"
그들은 상옥을 지프에 태운 채 어디론가 빠른 속력으로 달렸다.
상옥이 도착한 곳은 경찰서 건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상옥
을 보호실이라는 명패가 붙은 창살 있는 방에 밀어넣고는 철커덩
빗장을 걸어 버렸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그들은 주먹보다 더 큰
자물통을 채워 놓고 긴 복도 끝으로 사라져 버렸다
보호실 안에는 상옥이 말고도 7 8명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모
두 눈을 감은 채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다. 분위기가
살벌했다
이곳에 붙들려 온 지 세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거
들떠보지 않았다. 죄목도 모른 채 무작정 기다리는 상옥은 극도로
초조해하였다. 거의 다섯 시간이 지날 무렵에야 상옥을 연행해 온
사람들과 낯선 사람 둘이 상옥을 불러내어 조사실이라는 방으로
끌고 갔다.
상옥은 그들 중 한 사람과 책상을 사이에 두고 철제 의자에 마
주 앉았다
"김상옥! 너, 이런 곳 처음이지?"
"너, 친구들에게 말 들었지? 이곳에 붙들려 오면 어떻게 된다
는 것을."
들었겠지! 하지만 겁먹을 거 없어. 묻는 말에 솔직하게만 대답
하고 수사에 협조만 잘하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런데 만약에
한 가지라도 거짓말을 하거나 조사에 비 협조적으로 나오면 온전
한 몸으로 이곳을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미리 말해 두겠다. 알았
나?"
상옥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조사관이라는 사람은 아주
나직하고 온순하게 말하고 있었으나 그의 인상에서 풍기는 위압
감은 공포 그 자체였다. 독사의 눈처럼 찢어진 두 눈이 상옥을 강
하게 위협하고 있었다.
"유현식이 하고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서울로 진학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
"너도 데모 많이 했지?"
"데모는 한 일이 없습니다. "
"야. 이 새끼야! 거짓말하면 어떻게 된다고 말했니?"
'사실입니다. 저는 데모라는 거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습니다.
'정 말?"
'네에 !"
'어쭈? 너 이 새끼, 말로만 듣던 거 한 번 당해 볼래?"
'정 말입니다. "
"야 임마, 우리는 바지 저고리니? 아무 죄도 없는 너를 잡아다
가 시간 낭비하고 있게. 이 새끼야!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불
어. 그게 네 몸 보신하는 거야 알았어?"
"야, 임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데모도 한 번 해보지 않은
놈이 뭣 땜에 유현식 하수인 노릇을 했니?"
이 사람들은 이미 상옥의 행적을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러나 여기서 그런 사실을 시인해 버리면 현식이에게 불리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상옥은 견딜 수 있을 때까
지는 버터 보자는 심산이었다.
"제가 언제 유현식 하수인 노릇을 했단 말입니까?'
"이 새끼도 마찬가지 군, 그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사관의 구둣발이 책상 밑으로 날아와
상옥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마치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이 느
껴졌다.
그렇게 시작된 고문은 일주일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상옥은 갖
은 회유와 견디기 힘든 고문에도 현식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상옥은 붙잡혀 간 지 8일 만에야 그곳에서 풀려났다. 그들은 상
옥에게 앞으로는 그러한 일에 절대로 개입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하고 소름끼치는 살벌한 경고를 한 뒤 집으로 돌려보냈다.
집으로 돌아온 상옥은 그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은 현식이의 행
방을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으나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
지 오리무중이었다. 집안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현식이 부모님들은 묵묵히 먼 산만을 바라보
며 애끓는 한숨만 내쏟고 있었다.
그렇게 애타는 날이 흘러갔다. 현식은 연행된 지 52일째가 되던
날 밤 자정이 다 된 시간에 돌아왔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없어
보였지만 피골이 상접해 있었고 눈동자도 초점 없이 흐려져 있었
다. 심지어 언어장애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현식이를 서둘러 병원에 입원시켰다. 현식은 어느 정도 건
강이 회복되었는데도 초점을 잃은 눈으로 병실 천장만 멍하니 바
라보곤 했다. 마치 실어증 환자처럼 보였다. 의사들마저도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잔인하게 당할 수 있느냐고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
다.
현식은 3개월 여의 요양 끝에 퇴원하였다 이제 겨울방학도 끝
나가고 머지않아 새 학기가 시작될 것이다. 현식은 등록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등록을 권유하였지만 그는 고집을 피웠
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온 현식이는, 난데없이 군대에
입대하겠다고 했다.
"머시라고야? 지금 네 놈이 군대 간다고 혔냐? 야. 이놈 현식
아. 너, 왜 이렇게 애비 속을 골고루 태우냐? 이놈아, 군대는 학
교 마치고 가면 될 것 아녀?"
"아버지, 너무 걱정 마세요. 학교는 군대 갔다 와서 복학
해도 됩니다. 기왕에 가야 할 거 빨리 갔다 오는 게 좋을 거 같아
서 그럽니다. "
'니가 무슨 맘을 먹고 그러는지 모르겄는디 하여간에 지금 니 몸
이 워쩐 줄이나 아냐? 현식아, 니가 나헌티는 워떤 자식인 줄 아
냐? 너는 말이다 이 세상을 다 준다 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헌
내 자식인겨 그런디 성치도 않은 너를 군대에 보내야? 어림없는
소리 허덜 말어야. 내 눈에 혼이 들어가기 전에는 어림없는 소리
여 ."
현식이 부모로서는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제 간신히 건
강을 회복해 가고 있는데, 군대에 자원 입대하겠다니 그야말
로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현식의 부모는 어떻게 해서든 현식
의 결심을 바꾸어 보려고 했지만 현식은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군요. 아무 말씀 안 드리고 편한 마음으로 입대하
려 했는데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 제가 지금 입대하지
않는다 해도 머지않아 징집영장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붙들려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원하는 것이 마음 편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남들 다하는 군대 생활을 저라고 못하겠
습니까 "
"모르겄다 나는, 니가 하나밖에 없는 내 자식이라는 거밖
에는 내사 모르겄다
현식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말로는 자원 입대라 했지만 강
압에 의한 입대가 분명하였다.
입대 전야에 상옥과 현식은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드럼통 탁자
를 마주하고 앉아 벌써 여러 병의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상옥아 그 동안 고마웠고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너까지 온갖
고생을 하게 만들어 정말 미안하다. 후회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해야만 할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마음
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 누군가가 바로 너와 나였다고 생각한다면 조금은 마음이 가
벼워질까. 이제 나는 그 일을 더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마음 아프
지만 이제 앞으로의 일은 너 스스로 판단하여 잘해 주기 바
래. 그리고 네가 우리 집에 있는 동안 우리 부모님 잘 부탁한다.
너를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의지하시게 해다오. 부탁이다, 상옥아,
너에게 왜 이런 부탁을 하는지 너는 알고 있지? 나는 너와 수빈
이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어. 너를 믿었기 때문에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야,
난 네가 수빈이를 결코 불행하게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어
그러나 너에게 다짐받고 싶은 것이 있어. 너에 대한 믿음이 깨져
버릴 때는 너를 그냥 두지 않겠어. 이것은 수빈이의 오빠가 아닌
김상옥의 친구 유현식이가 하는 경고니까 명심해 두라구."
현식은 술이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부모님과 수빈이를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이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 현식아, 네 마음 내가 왜 모르겠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히 떠나라. 부모님은 물론이고 수빈이 걱정도 하지 마라.
결코 친구를 실망시키지 않겠다. 그리고 너에게 분명히 해 둘 게
있다. '나 김상옥은 수빈이와 너의 가족 전부를 영원히 사랑할 것
이다: 믿어 다오."
"고맙다, 상옥아. 나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다. 너,
김상옥이 있으니
현식과 상옥은 어깨동무를 하고서 고래고래 노래를 불렀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현식은 며칠 뒤 논산 훈련소로 떠났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기에
나는 밤에 그토록 설레며 그대에게로 가 속삭였읍니다.
내가 그대의 마음을 따 왔읍니다.
좋거나 싫거나
그대의 마음을 나와함께 있으니
오로지 내 것입니다.
설레고 불타오르는 내 사랑에서
그 어느 천사도 그녀를 구하지 못합니다.
헷세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에 전믄
결혼
집안은 죽은 듯이 조용했다. 밖에서 돌아오면 마치 깊은
인적 없는 산사에 들어온 기분이 들 정도였다.
현식이가 없다는 사실이 이토록 허전하고 집 안이 텅 빈 것 같
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또한 이렇게 불편하리라는 것
도 예상치 못했었다.
수빈이도 현식이가 있을 때는 상옥의 방을 제방 드나들듯 드나
들며 즐겁게 웃고 떠들었는데 어쩐 일인지 서먹해하며 상옥의 방
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수빈이와 상옥은 집 안에서의 어색함을 풀기 위해 '셸부르
찻집을 자주 찾게 되었다. 셀브르에서는 언제나 엘비스의 '러브
미 텐더'를 들을 수 있었다. '러브 미 텐더'는 상옥이나 수
빈이 모두 아주 좋아하는 노래였다
그들은 엘비스의 잔잔한 노래를 음미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
곤 하였다.
상옥은 요즘 아주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자식이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한 그의 아버지가 고향에 참한 신부감을 물
색해 놓았으니 틈 나는 대로 내려와 선을 보라 재촉이 대단했던
것이다.
지금 형편에 수빈이를 사랑한다고 아버지한테 이야기할 수도
없고, 수빈이에게 지금 당잘 결혼하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
다. 그래서 상옥이 혼자만 애를 태우고 있었다.
'오빠, 무슨 고민 있어?"
"왜?"
'요즘 말도 잘 안 하고 얼굴빛도 안 좋은 거 같아 "
'그럴 일이 있다. "
'나한테도 말할 수 없는 일이야?"
상옥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수빈이와는 언제 결혼하자고 확
실하게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둘이 서로 결혼을 전제로 하고 만
난다는 무언의 합의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모두 털
어놓고 이야기해 버리자고 상옥은 생각했다
"수빈아, 우리 결혼하자."
수빈이는 상옥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제정신이 있는 사람
이냐? 하는 표정이었다.
'뭘 그렇게 빤히 바라보니, 무안하게."
"오빠, 지금 제정신으로 말하는 거야?"
"그래 !"
"오빠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아니, 말짱해 "
수빈은 상옥의 심각한 표정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
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빠, 우린 아직 학생 신분이잖아. 게다가 이제 겨우 3학년이
고. 더구나 현식 오빠는 군대 가서 고생하고 있는데 그런 오빠 제
껴 두고 내가 먼저 결혼을 한다고? 그건 말도 안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오빠가 생활 능력이 있느냐가 문제야. 그러니까 오빠
가 졸업하고 취직해서 생활 능력이 있을 때 정식으로 청혼하라구
그땐 아무 미련 없이 오빠 마누라가 되어 줄게. 알았어?"
"야 너, 내 심정을 그렇게도 몰라주니? 내가지금 어떤 어려움
에 처해 있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니? 나 지금 사면초가에 빠져
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수빈아, 지금 집안 분위기
가 어떻니? 현식이 군에 간 후 너의 부모님 맨날 한숨으로 날을
보내시지, 또 현식이가 있을 때는 우리들의 관계가 얼마나 자연스
러웠니? 게다가 시골 부모님은 참한 색시 있다고 선 보러 내려오
라고 성화시지.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은 거니? 뾰족한 해결책 있
으면 말좀 해 봐라."
'그렇다고 지금 당장 결혼하자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냐?"
"야! 이 바보야, 내가 언제 지금 당장 결혼하자 했니? 그냥 결혼
하자 했지.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너와 나의 관계를 너의 부모님
과 우리 부모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아 두자는 거야.
그러면 너의 집에서도 자연스러을 수 있고 우리 집에서도 더 이
상 선보라는 소리는 안 할 것 아니냐."
'난 지금 당장 결혼하자는 줄 알았잖아."
'왜? 당장이 아니라서 섭섭하니?"
' 요런
수빈이는 주먹으로 상옥의 가슴을 쥐어박았다.
'오빠가 양가 부모님께 허락 받아 낼 자신은 있어?"
"염려 마 현식이는 이미 내 처남이 된 지 오래고 부모님
이 문젠데, 그건 내가 책임진다. "
"아주 자신 만만한데, 뭘 믿고 그렇게 큰소리치는 거야?"
며칠 뒤의 토요일 오후, 고향에 내려온 상옥은 부모님 앞에 무
릎을 꿇고 앉아서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시험기간이라서 올 수 없다 하더니 웬 일로 내려왔느냐?"
전화도 없이 갑자기 내려와 무릎 꿇고 진땀을 흘리는 상옥이에
게 아버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예, 말씀 드리기 쑥스럽습니다만 실은 제 결혼 문제를 말씀 드
리러 왔습니다 "
상옥이 아버지의 얼굴이 대번에 환히 밝아졌다
첫댓글 보고 갑니다........
잘보고갑니다,
^^
즐감
감사히 잘 봤습니다~
즐감 합니다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와우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