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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내적 자유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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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은 자유의 여정입니다.
진정한 삶은 살아갈수록 자유가 확대되는 자유의 여정입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자유로워지는 내 적자유의 여정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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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없이는 자유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자유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말은 자유로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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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찾는 여정은 그대로 자유를 찾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하여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내적으로 더욱 자유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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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자유는 함께 갑니다.
하느님을 찾아 삶의 진상을 깨달아 알아갈수록 치유와 더불어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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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어느 상담치유사의 다음 인터뷰 내용에 공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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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에 책임이 있는 모든 사람과 구조를 샅샅이 밝혀내는 일에 나서는 것입니다.
해경, 청와대, 안전행정부, 국회의원, 협회, ‘언딘 마린 인더스트리’, 언론사와 언론인들, 일베 등
이 참사에 결정적인 책임이 있거나 치명적인 상처를 준 사람들을 끝까지 찾아내서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요구해야 합니다.
나치를 척결하듯 집요하게 끝까지요.
꼭 광장에 나가지 않아도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진행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떼죽음으로 몬 이 끔찍하고 추악한 구조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집단살인에 가담한 사람들이 여전히 사회를 장악하는 세상에서 생존자와 유족들은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그런 독소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치유의 본질입니다.
정신과 의사가 1 대 1 심리상담을 1천 시간 하는 것보다 1만 배는 더 치유적인 일입니다.
그거 외면하고 심리치유센터를 짓고 심리치유 사업비 1천억원을 들인들 아무 의미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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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알아들었지만 과격한 정치적 주장처럼 듣는 사람도 있겠어요."
-그렇지 않은 거 잘 아시잖아요.
유가족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 자식이 억울하게 죽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완전히 달라졌다면
‘고맙다. 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네 동생이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산다’ 이런 맘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그래야만 아이를 편안하게 놓아줄 수 있어요.
마음의 이치이고 치유의 근본 법칙입니다.
정치적 주장이 아니에요.
치유자는 근본적으로 무당과 비슷하다는 그녀의 지론이 새삼 와닿았다.
나치 척결하듯 독소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그녀의 치유적 해법이 근본적이라는 데 우리 둘이는 김 한 장 차이도 없이 합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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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원인이 제대로 밝혀져 알아야 피해자의 용서와 치유도 가능하고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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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찾는 이들에게도 이런 보복이 아닌 기본적인 정의의 실현은 진정한 치유와 자유의 선결 조건입니다.
하여 진정한 자유는 값싼 자유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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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내적 자유의 확대 과정을 보여줍니다.
다음 주님과 베드로의 문답 내용을 통해 베드로의 환시 체험 중, 그의 내적 갈등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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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야 잡아 먹어라."
"나는 '주님, 절대로 안됩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제 입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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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세 번 반복된 다음에
환시 중에 본 짐승들이 담긴 그릇은 모두 하늘로 다시 끌려 올라갔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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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깨달음을 통해 베드로의 하느님 관은 한없이 깊고 넓어졌고,
내적 자유 역시 크게 확대되었으며
이방인에 대한 선교도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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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자유로운 이들은 성속 이원론을 넘어섭니다.
그 무엇이나 하느님이 지으신 거룩하고 깨끗한 것들이요,
그 어디나 하느님 계신 거룩한 땅 성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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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하느님을 사랑하여 알아갈수록 점차 자유로워져가는 우리 삶의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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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자유의 정점에 서있는 착한목자 예수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의 자유에 도달한 착한 목자 예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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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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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할 때 알게 되고 자유로워집니다.
모든 양 떼가 하느님 사랑의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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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목자 예수님의 사랑은 모든 인류를 품에 안을 정도로,
또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자유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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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님의 '사랑-앎-자유-목숨을 내놓음'이 연쇄고리를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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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주님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내적 자유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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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당신의 거룩한 산,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게 하소서."
(시편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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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어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족이 함께 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직접 운전을 하시고 떠나는 가족 여행이었지요.
그런데 이 여행 중에 커다란 교통사고가 난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로 가셨지요.
이 점을 두고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자기를 보호하려는 마음에 운전대를 돌려서
운전사보다는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더 크게 다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아버지는 가족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운전대를 전혀 돌리지 않고, 자신의 몸 쪽으로 직접 부딪쳤던 것입니다.
가족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자신의 본능을 뛰어 넘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을 전혀 사랑하지도 않고 어떤 특별한 사명심도 있지 않는데 과연 자신의 본능을 역행하는 행동이 쉬울까요?
더욱이 남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팽배한 세상입니까?
이 세상은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 등으로 인해서 다른 이들에게 커다란 아픔과 상처들이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행복한 세상일까요?
과연 주님께서 원하시는 하늘나라의 또 다른 모습일까요?
내가 중심이 아닌, 남이 중심인 사회.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아닌, 함께 어울러 살아가는 사회가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하늘나라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다른 이가 바뀌는 것이 아닌, 바로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범을 당신 스스로 보여주십니다.
바로 ‘착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목자의 주 임무는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양들을 잘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목자들은 대부분 주인의 양들을 대신 돌보고 있을 뿐이었지요.
따라서 그들은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이리가 나타나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재산 때문에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목숨을 희생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삯군과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시지요.
허풍으로 착한 목자인 척 하는 것이 아님을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놓음으로 증명하셨습니다.
즉,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면서도 우리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지 않으십니다.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목자인 예수님은 그래서 착한 목자이신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좋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모범을 따라 우리도 그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나와 상관없는 이웃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이웃임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나의 이웃에게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다가서야 하는 것입니다.
내 이웃에게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세상의 흐름을 쫓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모습을 쫓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이 말씀은 단순히 '착한 목자'를 설명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나는 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너희를 사랑한다."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목자가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는 말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쉽게 이해되는 표현이었을지는 몰라도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별로 실감나지 않는 표현입니다.
(실제로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 목자가 있을까?)
그래서 이 말씀은 "착한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정도로 바꿔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목숨'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마태 16,26).
그런데도 자녀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은 자녀들이 목숨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그 마음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목숨을 내놓을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으신 것은
사람들이 당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고(사람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 말씀에서 '알다.' 라는 말은 '사랑, 일치, 결합'을 뜻합니다.
그런데 "내 양들은 나를 안다." 라는 말씀은
우리 입장에서는 "내 양이 되려면 나를 알아야 한다."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바쳐서 사람들을 구원하셔도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또 구원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자기들이 안 받음으로써 못 받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예수님의 사랑은 짝사랑이 되고,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신 일은 헛일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의 일이 전체적으로 헛일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헛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사람들 쪽에서도 사랑으로 응답해야 하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자녀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부모의 사랑이 결실을 맺으려면 자녀 쪽에서도 사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가 불효해도 목숨을 내놓겠지만,
부모가 목숨을 내놓는 것을 보면서도 자녀가 계속 불효를 하고 악의 길로 간다면...?
그래도 물론 사랑은 사랑으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고...
하느님께서 부모의 사랑과 희생과 보속을 보시고 그 못된 자식에게 자비를 베푸실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회개는 그 자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또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사람들 쪽에서도 예수님을 사랑해야 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그런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다 보면 그 길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고, 힘든 구간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 16,24)
이 말씀은, 힘든 구간을 만나도 잘 참고 견디라는 뜻입니다.
쉬운 길만 선택하고 힘든 길은 피한다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데리고 초원으로 갈 때,
쉽고 편한 길도 만나고 어렵고 힘든 길도 만납니다.
어렵고 힘든 길을 만났을 때 못 가겠다고 주저앉거나, 아니면 쉽고 편한 길을 만났을 때 방심하고 한눈을 판다면,
'잃은 양'이 될 수 있습니다.
앞장서 가던 목자는 '잃은 양'이 생기면 그 양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그때 '잃은 양' 자신도 당연히 되돌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으신 것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도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입니다.
(순교는 '죽는 일'이 아니라 '사는 일'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죽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인생을 포기하라는 사탄의 유혹입니다.
그 유혹을 물리치지 않고 정말로 포기해버린다면 그것은 사탄에게 목숨을 빼앗기는 일이 됩니다.
(이승의 목숨도 빼앗기고 영원한 생명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얻을 수 있었던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잃는 것이고,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목숨을 내놓는 것은
목숨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잃는 것도 아니고, 빼앗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목숨을 다시 얻는 일입니다(요한 10,17).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목자와 삯꾼>
한국 천주교는 다른 나라들처럼 선교사가 먼저 들어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생적으로 발생하여 선교사를 요청한 유례가 없는 교회입니다.
즉, 성호학파와 남인계 실학자들에 의해 천진암-주어사에서 처음엔 학문으로 시작했다가 차차 종교로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각기 주교, 사제 등의 성직을 만들어 자신들이 미사를 행하기도 하였지만(가성직자 제도),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는 비밀리에 선교사를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성직자가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입니다.
그러나 신유박해를 거치며 조선은 다시 성직자를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숫자는 계속 늘어만 갔습니다.
그렇게 다방면으로 성직자들을 모셔오기 위해 노력했지만,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는 생각이 온 유럽 교회에 퍼져 있었기에 당시 선교회들은 조선에 들어가는 것을 꺼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파리외방선교회의 상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때 한 분, 브뤼기에르 신부가 나서서 자신이 그 죽음의 땅으로 들어가겠다고 나섰고,
그렇게 그분은 초대 조선교구장이 되신 것입니다.
파리외방선교회가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할 수 없는 5가지 이유를 들었을 때,
브뤼기에르 신부는 또박또박 반박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1. 전교회는 현재 기금이 없다.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주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2. 해외에 파견할 선교사가 부족하다.
“선교사가 지금보다 많았던 때는 또 언제입니까?”
3. 다른 포교지에도 급한 일이 많다.
“조선의 양떼들이 당하고 있는 것만큼 급한 일은 없습니다.”
4. 조선 포교지로 선교사가 들어가기 어렵다.
“예전에 중국인 사제 한 분이 조선에 들어가서 순교한 적이 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5. 너무 많은 일을 하면 하나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우리 선교회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데, 이 말은 현실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 파리외방 선교회의 걱정인 이것이었습니다.
“누가 저 위험한 조선 사목을 맡겠는가?”
브뤼기에르 주교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응답합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75일간의 생사를 건 위험한 항해와 3년여에 걸쳐 남에서 북으로 중국 땅을 횡단하다가
결국 힘이 다하여 조선 땅에 들어오지 못하고 마가자라는 곳에서 마침표를 찍고 말았습니다.
한 여름에도 파란 눈과 큰 코, 노란 머리를 감추기 위해 거지 복장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다녔고,
기후와 음식, 피로와 열병 등 그 풍토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여행 중 파리외방선교회에 자신이 못 이룬 일을 부탁하였고,
모방, 엥베르, 샤스탕 등의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조선교구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참조: 개포동 성당, 브뤼기에르주교의 발자취를 찾아서(유투브)]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고 하시며,
위험이 닥쳐 양들을 버리는 목자는 ‘삯꾼’들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또 아버지께서는 당신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브뤼기에르 조선교구 초대 주교님을 비롯하여 많은 참 목자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한국천주교회가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목숨을 내어놓으셨기 때문에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 목숨을 다시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상황을 보더라도 미사나 강의, 특강을 할 때마다 사례비를 받습니다.
강의할 때 기쁘게 하지만 막상 그 봉투를 받을 때쯤엔 왠지 그것 때문에 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좋은 데 쓴다는 명목으로 받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어찌 자녀에게 무언가 받으며 자녀를 보살피고 키워줍니까?
저는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삯꾼’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사랑이 불타고 있기에
내가 행복해서 내 자신을 바칠 수 있는 그런 목자가 될 날을 기대해봅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모든 것을 감당하라>
'도모시용(道謀是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길가에 집을 짓는데, 길 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짓는 것이 좋을까 상의하면 구구한 의견으로 제대로 완성할 수 없는 것처럼
주견(主見) 없이 남의 의견만 쫓으면 일을 성취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되 소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에게 기대거나 이사람, 저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요한 10,16)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적인 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깊은 사랑을 주고받는 앎, 인격적인 일치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러하듯
목자와 양인 우리들과 예수님의 관계가 서로에게 스며드는 잘 아는 관계이기를 희망합니다.
한편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는 말은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 대한 신앙의 순명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안 듣는다.”는 신앙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떤이가 ‘저놈은 말귀를 잘 알아듣는다.’고 말한다면
귀로 듣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한 목자에 한 양떼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순명은 강압에 의하여 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치신 것은
목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하신 것이지 결코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루카 22,42)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신뢰하는 사람은 사랑의 응답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주님의 사랑을 인식한다면
자신을 내어 맡기신 예수님의 희생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요한 10,17)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은 십자가 사건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했다는 것이 아니라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아들은 그렇게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 놓은 순명에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히브 5,8)
참 사랑을 깨우치면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감당하게 됩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한 집에 살고 있는 개들이 서로 자기 자랑을 하였답니다.
‘우리 주인은 나를 좋아해!.’ ‘아니야 나를 좋아해!.’
옆에서 듣고 있던 늙은 개가 말했습니다.
‘이봐, 주인이 진짜 좋아하는 것은 나야, 나는 내일 주인 뱃속으로 들어가거든!’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본당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부활 시기 동안의 미사 독서는 「사도행전」이 계속됩니다.
이 부활 시기 내내 봉독되는 「사도행전」을 꼭 전체적으로 묵상해 보라는, 신학생 시절 은사 신부님의 당부를 기억합니다.
교회가 어떻게 자신의 '얼굴'을 여러 시험대를 거치며 찾아갔는지를 「사도행전」이 보여 준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 생활의 이상이자 원형인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본받으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의 모습이 언제나 이상적이고 조화롭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을 공유하는 초대 공동체의 삶이나, 스테파노와 같은 순교자의 모습,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놀라운 활동처럼 빛나는 부분들도 있지만,
시행착오와 파당 짓기, 속 좁은 반목들도 등장합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여러 어려움을 주었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갈등이 그 대표적인 보기일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 개인도 꾸며 대는 것이나 흉내 내는 것을 넘어 참으로 성숙한 자기 본연의 '얼굴'을 지니려면
시련과 과오라는 아픈 시기를 겪어야 합니다.
겸손한 인내와 용기 있는 희망으로 부정적 체험에서 교훈을 배우고 올바른 길을 체득해 가야 합니다.
초대 교회 역시 그러한 과정을 겪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 읽을수록 찬란한 시간만이 아니라 교회가 겪은 갈등과 혼돈의 시간 역시 우리에게 큰 영감을 준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오늘날의 우리 교회 역시 자신의 본디 '얼굴'을 찾는 데 그러한 과정이 면제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불목, 탐욕, 편견, 퇴행, 태만, 질투 같은 부끄러운 모습을 교회 안에서 자주 보는 것은 우리에게 고통이지만,
진정한 의미의 '교회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게 이끄는 소중한 계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는 늘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여정에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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