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울산의 한 아파트에 청약하려던 예비신랑 김병선 씨는 이 아파트의 청약을 포기했다. 최근 봐둔 아파트에 청약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가격은 다소 비싸지만 부모님을 좋은 집에서 모시고 살고 싶은 생각에 이 아파트 브랜드를 눈여겨 봐둔 터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동안 청약점수를 열심히 쌓아왔기 때문에 청약하면 당첨은 문제 없었다. 그러나 청약을 기다리던 김씨의 기대는 어긋나 버렸다. 이미 이 아파트 단지의 순위 내 청약이 이미 끝났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 이 아파트 단지를 분양하는 건설사는 분양 정보를 소문내지 않는 이른바 ‘깜깜이 분양’을 진행했고 김씨는 보기 좋게 청약 기회를 날려버렸다.
물론 이 단지는 전 가구에서 단 한명도 청약하지 않는 ‘청약률 제로’ 단지가 됐기 때문에 무순위 분양인 ‘4순위’가 가능하다. 하지만 혹여나 4순위에서 청약자가 몰릴 경우 말도 안 되는 탈락을 경험할 수도 있다.
게다가 김씨가 순위 내 청약을 통해 분양받았을 경우 누리는 우선순위 청약자들의 동ㆍ호수 우선지정의 혜택도 박탈당하게 된다. 한 때 분양시장의 복표나 다름없었던 청약가점제가 한순간에 유명무실화 됐다.
◆‘선 분양 후 개관’이 해결책?
아파트 분양시장의 불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분양 후 견본주택을 공개하는 깜깜이 분양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일부 지방 건설사에서 시작된 비공개 분양이 최근에는 상위권 건설사까지 가세하면서 확산 조짐까지 감지되고 있다. 또 해당 지역에서 선순위 예비 입주자들이 정보의 비대칭으로 분양받지 못하는 등 일부에서는 역차별 우려가 지적되고 있다.
건설업계에 따르면 최근 시공능력평가 순위 7위에 해당하는 현대산업개발이 울산 중구 태화강 인근에 분양한 울산 태화 아이파크가 깜깜이 분양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산업개발은 울산 태화 아이파크 202가구 모집에 1~3순위 합쳐 단 한명의 청약자도 받지 못했다. 이 회사는 4순위 마케팅에 주력하려는 듯 울산의 한 지역신문에 형식적인 공고를 냈을 뿐 견본주택을 제한적으로 오픈하는 등 분양에 소극적인 공세를 취해왔다.
깜깜이 분양 의혹에 대해 현대산업개발 관계자는 "소규모 가구에 주상복합 단지이다 보니 거창한 홍보보다는 DM발송을 통한 VIP마케팅에 주력했다"며 정보의 비대칭 문제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양 정보를) 오픈해야 하는가"라며 오히려 반문했다.
또 지난달에는 시공능력 40위 중견건설업체 남광토건이 분양하는 청주 사천동 하우스토리 A,B 단지가 깜깜이 분양 논란에 휩싸였다. 금융결제원에 따르면 남광토건이 청주시 사천동에 811가구 분양한 이 단지에 단 한명의 신청자도 없었다.
이에 대해 건설업계 한 관계자는 “비용절감 차원에서 홍보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라면서 “후순위 분양이라 하더라도 선착순 분양을 통해 동호수 지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특별히 피해를 입을 입주자는 없을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이 단지는 3월26일 3순위 분양까지 견본주택을 공개하지 않다가 2주가 지난 4월11일에서야 공개해 논란이 됐다.
최근 대한전선이 코스닥 기업인 알덱스를 인수함에 따라 남광토건은 대한전선으로 경영권이 넘어간 상태다.
이 외에도 웅진그룹으로 주인이 바뀐 극동건설의 죽전4차스타클래스와 울산강변극동스타클래스와 동양메이저/건설의 부천송내동양엔파트도 깜깜이 분양 의혹을 받고 있는 상태다.
◆깜깜이 분양 더 늘어날 듯
국토해양부 주택공급 관련 관계자는 “청약접수 건수에 관계없이 남은 물량에 대해 재분양을 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이미 미분양이 심각한 사업장은 재분양을 통한 실익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1~3순위 청약에서 전체 3316가구 중 2100여 가구나 미달됐던 고양시 덕이지구 하이파크시티 신동아 파밀리에도 최근 4순위 접수에서 2500여명이 접수해 모집 가구 수를 넘어섰다. 고양시 식사지구 벽산블루밍, 파주신도시 남양휴튼, 김포시 걸포동 오스타파라곤 모두 순위 내 보다 4순위 청약이 인기를 끌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건설사들은 오히려 무순위 마케팅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견본주택의 실제 개장일인 그랜드 오픈 시점을 아예 1~3순위 청약일 이후 실시하는 것이 청약률이 떨어질 1~3순위 때 홍보하는 것 보다 유리하다는 판단에서다.
무순위 분양에 전체 공사비의 5~10%에 이르는 마케팅 비용을 쏟아 붓는 이유도 순위내 분양에서 못보던 ‘재미’를 4순위에서 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상은 그간 순항하던 부동산 분양 시장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함영진 부동산써브 실장은 “견본주택의 개관 시점은 그동안 분양사업장의 입주자모집공고가 게재되는 날이나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로 정하는 것이 관례였다”면서 “순위 내 청약접수에 앞서 견본주택 집객효과를 높여야 정식 청약일에 확실한 수요층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깜깜이 분양은 앞으로 더 확산될 소지가 높아 보인다. 업계 관계자들은 랜드마크 사업장이 아닌 곳이나 지방 분양시장의 경우 지역수요를 상대로 견본주택을 임시 오픈 하겠지만 본격적인 마케팅 시점은 정식청약일 이후로 미뤄 실수요자 유치를 위한 차별화 전략을 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선분양시장에서 청약자의 편의를 무시한다는 의견도 상당수 있는 상황이다. 미분양 사태와 청약률 0% 아파트가 속출하다보니 건설사에서도 울며 겨자먹기로 이 같은 마케팅을 선호하는 것이겠지만 청약통장을 가지고 청약에 임하는 실수요자는 청약 전에 알 권리를 박탈당하는 꼴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