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장도를 생각하면 고결한 여인의 정절을 연상하게 된다.
한 올 흩어짐이 없는 머릿결과 단아한 흰 꽃의 단호함과 임을 향한 열정이 활활 타오르는 뜨거움도 같이 느껴진다.
서릿발 갖은 매서움과 정념에 타는 불꽃은 목숨을 뛰어넘어 화산보다 뜨거울 것이다.
극과 극을 모두 함축한 의미를 품고 하늘로 치솟은 높다란 직선을 보는 것 같다.
단호함과 허용된 것을 향해 열린 열정, 빛을 품은 아름다움으로 각인 돼있다.
몸서리쳐지는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필수적으로 부녀자들이 순결을 지키기 위해 휴대했다는 은장도는 정신적 의미가 더 크게 나에겐 작용해 왔었다.
언제나 가슴 속에 은장도를 품은 듯 살아가려 했다 해도 허언은 아니다.
목숨을 경각에 두고 최선을 다하려 했던 것이 틀림없었느냐고 스스로 물어도 얼굴 붉히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잘못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죄의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나도 그 부류에 속하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지난달 식당은 낙찰자가 나왔고, 밭과 창고부지가 이달 첫 경매에서 애지중지하던 밭은 낙찰자가 나왔다.
삼자의 이름으로라도 낙찰받으려 했던 밭인데 손에 쥔 것이 없어 적은 금액인데 날리고 말았다.
다른 것은 그냥 앉아서 날려야 하는 큰 덩치다.
오월에 목욕탕은 이 차 경매 날이지만 아직 낙찰자는 나서지 않을 것 같다.
유월에 삼 차 경매에는 낙찰자가 나올 법하다.
창고부지는 식당과 맞붙어 있어 식당 낙찰자가 아마 나설 것이다.
유월에 목욕탕이 낙찰되면 약 두 달에서 길게는 세 달 후면 비워 줘야 할 것이니 구월이면 이곳을 떠나게 될 것 같다.
그때 가서 법석을 피우는 것이 번잡스러워 창고에 처박아둔 것들을 정리하다 보니 고장 난 기계랑 쇠붙이가 엄청난 분량이다.
무엇이건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 고물을 많이 모아둔 결과가 됐다.
그럭저럭 화물차로 다섯 차나 나왔다.
부속을 빼 다른 것이 고장 났을 때 채워 넣으면 쓸만한 것도 있는가 하면 십 년 가까이 처박아둔 것은 녹 쓸어 범벅인 것도 태반이다.
도막 파이프며 고장 난 샤워기, 전선 토막까지 버리지 않고 한곳에 모아둔 것도 엄청난 양이다.
고물을 팔아 기름을 사 넣었으니 며칠 동안 목욕탕은 고물을 태운 꼴이다.
이런 상황이 될 것을 우려해 형태 없는 은장도를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것인가?
신숙주의 아내가 마루 위에서 하인의 전갈을 기다리는 마음일까?
형장으로 향하는 수레행렬이 끝나도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방안으로 들어가 은장도로 목숨을 끊은 아내의 항변에 신숙주가 뭐라 말했을지 나는 알고 싶지 않지만 아내의 마음은 안다.
많은 부녀자가 가슴에 은장도를 품은 뜻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건만 언제나 죽음과 동행하고 있었던 사람은 정말 최선을 다해 살아갔을 것이다.
나 역시 죽음을 품고, 아니 손에 쥐고 살아야겠다.
모든 것을 다 놓는다 해도 그것만은 놓지 말자.
밀어낸다 한들 밀려갈 것도 아니지만 더 가까이 끌어당겨 놓자.
내가 올라탄 시간이란 마차에서 실수로 떨어지지 않도록 고삐를 단단히 쥐고 달리자.
아직은 가야할 길이 멀다.
또 다른 내 세상을 은장도를 가슴에 품고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첫댓글은장도는 그 시절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그 숭고한 정절을 지키기 위한 도구인데, 아마도 남존여비사상에서 비롯된것이라고도 여겨지네요?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하여도 저로선 순결의 의미를 소중하다 여기지만, 남성의 동정에 대해선 예나 지금이나 동등히 중하게 취급하지 않는것은 제 개인적 유감이지요?
첫댓글 은장도는 그 시절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그 숭고한 정절을 지키기 위한 도구인데, 아마도 남존여비사상에서 비롯된것이라고도 여겨지네요?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하여도 저로선 순결의 의미를 소중하다 여기지만, 남성의 동정에 대해선 예나 지금이나 동등히 중하게 취급하지 않는것은 제 개인적 유감이지요?
지기님 그럼 이제 일을 그만두시는 건가요? 잘 모르지만 모든일들이 지기님께 합당하게 잘 해결되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