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백리127호분<일명 왕광묘>의 낙랑태수 목인장은 가치를 인정받을수 있는가?>
아래 소요자님의 기존 시각이나 댓글을 보니 서북한 일대가 낙랑군 평양설이라는 주장을 지지하고 있는 입장에서 왕광묘의 낙랑태수 목인장및 낙랑 고분 수천기등을 이야기했습니다.
우선 다시 언급하며 낙랑 고분의 양식이나 매장 방식, 매장유물에서
고조선 평양 이동설 나아가 낙랑군 평양설의 지지자들은 목곽묘 양식을 위만조전 멸망의 한나라 지배로 인해 형성된 무덤으로 봐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앞서 <기원전 7-5세기에 목곽묘는 요녕일대에서 고조선 비파형동검문화와 함께 출현하며 서북한일대는 기원전 2세기에 이미 출현하고 있으며 위만조선 멸망인 기원전 108년시기의 기원전 1세기의 서북한 일대의 고분 유물은 여전히 세형동검류의 고조선계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고고학적 유적과 연구 성과를 통해 이미 언급했습니다.>
그럼
왕광묘로 불리는 정백리127호분에서 발견되었다는 낙랑태수 목인장을 통해 서북한이 낙랑군 태수가 머물던 숨길수 없다는 증거가 될수 있는지,일제학자의 발굴 이후 보수지지자들의 견해가 얼마나 올곧은? 견해 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기록상 우리나라 인장의 기원은 <위서>에 “환인(桓因)이 환웅(桓雄)에게 천부인(天符印) 3과를 주어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하니 건국과 같이 합니다.
왕광묘에 대해 전반적 내용을 살펴보죠
왕광묘
王光墓
평양특별시 낙랑구역 정백동에 있는 1세기 전반경의 덧널무덤[土壙木槨墓].원래 명칭은 <정백리127호분>이나 무덤 안에서 출토된 나무도장에 새겨진 글에 의해 묘주인이 낙랑태수(樂浪太守)를 지낸 왕광(王光)이라는 인물임이 밝혀지면서 왕광묘로 불리게 되었다. 1932년 고바 스네요시[小場恒吉] 등이 발굴했으며 출토유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방대형(方臺形)인 봉분의 크기는 동서지름 18m, 남북지름 27m, 중심부 높이 4m 가량이며, 매장주체시설인 덧널[木槨]은 봉분 중심부 지하에 판 세로 4.48m, 가로 5.58m의 네모진 구덩이 안에 설치되었다. 덧널 내부는 나무기둥에 의해 4부분으로 구분했으며 제일 넓은 남동구역 안에는 내곽(內槨)을 설치했고 그 안에 2개의 널[木棺]을 동서로 나란히 배치했으며 모두 북침(北枕)으로 놓여졌다. 덧널 안의 나머지 세 구역에는 각종 껴묻거리들이 놓여 있다. 서쪽널[西棺]에서는 허리띠장식, 쇠장검과 함께 2개의 나무도장이 발견되었다. 그중 1점은 양면도장으로 앞뒷면에 각기 '낙랑태수연왕광지인'(樂浪太守椽王光之印), '신광'(臣光)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다른 1점의 나무도장[鼻紐木印]에는 '왕광사인'(王光私印)이라는 글이 있어 묘주인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
일제학자들은 평양의 왕광 무덤(정백리 127호 무덤, 기원 1세기 말 추정)에서 나온 나무인장도 낙랑의 평양 주둔설을 입증하는 유물이라고 주장합니다.이는 이 인장 한쪽에는 “낙랑태수연 왕광지인”이라고 새겼으며 다른 쪽에는 “신광”이라고 새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하며 오늘날에도 고조선 이동 평양설 나아가 낙랑군 평양설의 지지자는 이런 근거로 서북한 일대가 낙랑군태수가 있던 낙랑군지역이라고 합니다.
그럼 우선 이 목도장의 정체부터 파악해 봅시다.
북한 학계의 반론입니다.
1. 인장의 재질이 한(漢) 대의 인장 재료와 맞지 않는 것이다. 한 대의 인장은 옥, 금, 은, 청동으로 되어 있는데 각기 자기의 신분에 따라서 해당한 재료를 쓰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무덤에서는 나무인장이 나왔으니 그것은 한 대의 인장규례에 벗어나는 것이 명백하다.
한나라 때의 인장에는 엄한 규칙이 있었다. 승상 이상은 금인(金印)이었고, 2천석 이상의 관원은 은인(銀印)이었다. 그 이하는 동인(銅印)인데, 위계에 따라 그 인장을 늘이는 끈, 즉 인수(印綬)의 빛깔도 달리했다.
2.인장의 형식이 한 대 인장제도와 맞지 않는다. 한 대의 인장에는 관인과 사인이 있었다. 관인에는 엄격한 제도가 있어서 거기에는 관직명만 새기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왕광무덤의 인장에는 관직명과 함께 사람의 이름까지 새겨져 있어서 관인과 사인을 겸한 격으로 되어 있다. 이것 역시 한 대의 인장제도와 맞지 않는다.
3. 글씨체가 한(漢) 대의 인장들에 새긴 글씨체와 맞지 않는 것이다. 한대 인장의 글씨체는 전자체(전서체)이다. 그러나 왕광 인장의 글씨체는 예서체로 되어있다. 이처럼 왕광의 인장은 재질, 형식, 서체 등에서 한 대의 인장제도와 맞지 않는다. 만약 왕광이 한나라 낙랑군의 관리였다면 당시의 인장제도와 심히 위반되는 그런 인장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왕광의 인장은 한나라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증거로 될 수 없으며 오히려 평양일대가 한 나라의 관할 밑에 있지 않았다는 근거라는 것이 북한학계의 분석이다.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요서지역 해안도시인 진시시(錦西市) 소황띠(小荒地)라는 고대성곽에서 출토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와 <승>(丞) 자 봉니
2002년 복기대 교수가 쓴 '임둔태수장 봉니를 통해 본 한사군의 위치'의 논문을 잠시 살펴보죠
<'臨屯太守章' 封泥의 書體는 전서체篆書體로써 漢代 官人의 모범母范들에서 보이는 書體와 西漢 초기로 추정되는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 1號 한묘漢墓에서 찾은 封泥의 書體 등과 일치하고 있다.
漢은 200석에서 600石의 질秩(녹봉)을 받는 관리는 모두 동인銅印을 사용하는데 그 文을 章으로 하였고, 2000石 이상의 관리는 모두 은인銀印을 사용하는데 그 文을 章으로 하였다고 했는데, 太守는 2000石의 질秩을 받는 관리이므로 임둔군臨屯郡 太守 印章의 文을 '臨屯太守章'이라 한 것은 西漢의 중앙정부 규정과 일치한다. 이러한 사실은 '臨屯太守章'이라는 印章은 중앙정부에서 만들어 졌으며 臨屯郡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분명하게 해주는 것이다. >
자 님들의 판단은 어떻습니까?
<정백리127호분>에서 발견되었다는
목인장이 한나라의 태수인장입니까???
고조선 평양설이나 이동설 나아가 낙랑군 평양설을 지지하는 이에게 묻습니다.
명도전을 들고와서는 고조선 이동 평양설을 운운합니다.
서북한 일대에 명도전이 나오는 것은 아는가요??
그럼 도대체 위만조선은 이제 어디로 가버린 것입니까???
요하일대에서 한반도의 화폐유적이 어떤 특징인지는 아는가요?
세형동검이 평양 일대로한 남부에만 국한된 고조선 유물입니까?
첫댓글 역사님의 견해를 그대로 인정? 한다고 전제하고, 두가지만 질의 드리겠습니다.
1.왕광이 한나라사람일까요. 아니면 그냥 기원후 1세기경 평양일대에 있던 지배자인가요?
2. 위글에서 목곽분을 언급하고 있는데 역사님이 언급하고 있는 이전 기원전 7-5세기경 요동에서 비파형동검문화와 함께 출현한다고 하였는데 왕광묘가 요동의 기원전7-5세기와 계통적으로 연결될수 있을까요? 나무로 곽을 짜서 목관을 놓은 무덤이라고 다 같은 목곽분이 아니거든요. 어떤 이유로 요동목곽분과 정백리에 있는 왕광묘와 연관지울만한 것이 있는지 그 근거를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목곽분이라는 명칭이외에 계통을 연결할만한 근거 !!!
1번 질문 관련하여 왕광의 인장과 함께 묘의 출토유물을 함께 검토해주심이 어떨까 합니다. 그 유물들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주길 바랍니다. 너무나 통설과 달리 마구 질주하시니(특히 고고자료 인용에 있어) 이 왕광묘에서 출토된 유물, 칠기류 목기류 동제품 옥제품 철제품등을 함께 이전시기와 비교하여 어떤 계통으로 보아야 하는지 알려주길 바랍니다. 역사님이 왜 이리 생각하는지 이유를 알고자 함이니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인장이외에도 많은 유물과 유구의 특성이 있으니 함께 검토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통설과 다른게 아니라 일제학자 이후 고조선 전문가라는 이후 보수 지지자들이 제대로된 연구없이 재생산한 결과 일뿐입니다. 분명한 오류는 정확히 인정하고 가야 현재의 고조선위치와 한사군 문제가 풀립니다.정백리 127호분이 일명 왕광묘로 불리운 계기와 나아가 이 서북한 일대를 낙랑군 태수가 다스린 다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 다름 아닌 이 고분에서 나온 양면 목도장의 낙랑태수연왕광지인'(樂浪太守椽王光之印), '신광'(臣光) 이라는 2개의 목인장중 하나입니다. 물론 이들 보수지지자들이야 자신들의 기존 주장에 결정적 증거인냥 하니 제대로 연구를 했겠습니까? 한나라때의 인장은 임둔 봉니처럼 전서체를
기본으로 합니다. 전서체는 저 임둔 봉니처럼 현대인들이 아는 한자형태가 아니라 거의 갑골문에 가까운 원시적 형태이며 태수등의 -현대의 국무총리령도 아무개 국무총리로 찍어 나오지 않듯이-직함이 나오지 이름까지 새기는 형태는 없습니다. 또한 재질 역시 엄격히 구분하고 있구요. 군의 태수 정도이며 상당한 지위입니다. 로마의 총독처럼 거의 상당한 규모의 왕국을 다스리는 왕과 같은 직책입니다. 그리고 앞서도 언급했지만 위만 조선 집권기인 기원전 3-2세기경의 요녕과 한반도의 연화보 세죽리 고조선계 철기문명과 서북한일대는 서로 화폐유적등에서도 그렇고 이질적 공간이 아니라 서북한 일대가 영향을 받으면서 교류하는 곳임을
말했으며 기원전7-5세기의 요녕 정가와자유적은 지금까지 발견된 비파형시기에 이른 형태의 목곽묘 출현을 말한것이고 윤가촌 유적의 하층과 상부 문화층에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경으로 연차적으로 목곽묘가 출현 출토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쓰다 보니 내용이 길어 지는군요 따로 올립니다.
질의한 내용에 일체 답변없이 위 본글에 있는 애기를 반복하고 있군요.
정확이 답변바랍니다.
질의 1: 왕광묘의 피장자가 한나라사람일까요 아니면 평양일대의 동이족인가요 아니면 고조선의 지배자인가요
왕광묘 출토유물이 고조선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지요!!!설마 왕광묘에서 출토된 다른 유물은 보지 못한것은 아닌가요? 칠기류나 목기류 철기류 동제품등 모르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동반출토품이나 유구의 구조를 가지고 이전 고조선이나 동이족의 전통계승이 있는지 답변바랍니다
질의 2: 왕광묘의 목곽분이라는 것이 기원전7-5세기경 바파형동검과 같이 등장하는 목곽분과 어떤 근거로 계통이 연관된다는 것인가요
질의 하나를 추가하겠습니다. 왕광묘에 나온 명문이 있는 동경 두점이 있습니다. 이것이 고조선이나 동이의 전통을 계승한 동경인가요 아니면 한경인가요? 이것에 대하여도 답변해 주길 바랍니다. 두점 모두에 명문이 있으니 참고가 될것입니다.
글쎄요. 관인도 아니고 사인임에 분명한 인장의 양식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고 보입니다. 하나는 대놓고 사인이라 쓰고 있고, 나머지 하나도 사인으로 보이는데요? 세상에 어떤 관리가 관인을 자기 무덤에 부장품으로 묻습니까?? 무덤에서 관인이 나오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인 것 같습니다만. 무덤에서 관인이 나온 예가 있나요? 제가 고고학에는 문외한인지라 그런 예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반박을 하시려면 저것이 관인인지 사인인지를 먼저 논하고 사인이라면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를 함께 논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반박의 핀트가 잘못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야스페르츠님 고고학 문외한이라 하지 마시고 일제시대에 출간된 고적조사보고 2호 낙랑왕광묘를 메타검색등으로 확인하시면 됩니다. 사진이나 도판만 봐도 어느정도 감이 온답니다. 설사 관인이 어쩌구를 떠나도 왕광묘의 유구구조나 출토유물울 본다면 판단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혹 필요하시다면 다운받은 왕광묘 자료를 메일로 보내드릴수 있습니다.
야스페르츠님. 글 내용을 좀 보길 바랍니다. 양면 목도장은 관인성격으로 나머지 하나는 사인이라는 '왕광사인'(王光私印)는 문구가 안보이는가요? 그리고 설령 둘다 사인이라고 해도 이게 한반도 낙랑국의 태수 사인이나 기타 고조선 토착 정치체의 지배사인인지와 한나라 사인인지에 대한 구별을 짓게 하는 유물이 못됩니다.
그런 문구는 없습니다만?
"1점은 양면도장으로 앞뒷면에 각기 '낙랑태수연왕광지인'(樂浪太守椽王光之印), '신광'(臣光)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여기 어디에 관인이라는 말이 있습니까? 그리고, 북한의 반박이라고 역사님이 인용한 내용에는 이 유물이 관인일 경우에나 유효한 반박일 뿐, 관인이 아닌 사인이라고 판단한다면 1번 정도나 적용될까 나머지 반박은 그냥 무용지물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