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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잊지 말라
신 8:11-20
11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20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
신 8:11-20 /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는 주님의 명령과 계명과 규정들을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잠시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12) 여러분이 배불리 먹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며 13) 소 떼와 양 떼도 불어나고 은과 금도 많아지고 여러분의 모든 재산이 많아질 때에 14) 여러분은 절대로 교만해지지 마십시오. 바로 그때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지 마십시오. 주께서는 여러분을 애굽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15) 저 끝없이 넓고 위험한 광야에서 여러분을 인도해 주셨고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물 한 방울 없이 메마른 곳에서 여러분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주께서는 여러분에게 단단한 바위에서 물을 먹여 주시고 16) 광야에서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조상들도 모르던 만나를 먹여 주셨습니다. 주께서는 여러분의 고집을 꺾고 여러분에게 순종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시험하시려고 굶주리고 목마른 고생길로 인도하셨으나 이것은 나중에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7) 여러분은 평안해지더라도 `이 모든 재산은 내 손으로 일해서 모았고 내가 잘나서 부유하게 되었다.' 하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18) 오히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 모든 재산을 얻었다는 것을 아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지키기 위하여 그렇게 부강하게 해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19)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고 다른 신들을 따라다니며 그것들을 섬기고 경배한다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멸망하리라는 것을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단언합니다. 20) 여러분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으면 주께서 이미 여러분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과 똑같이 여러분도 멸망할 것입니다.
성도는 삶이 나아졌을 때, 교만을 경계하며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11-18)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분명히 광야에서의 삶보다는 안정될 것이며 양식도 풍족해질 것입니다. 이러한 안전과 만족은 하나님을 잊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는다는 것은 더는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더 이상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계명에서 떠나 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는 작은 것들 하나까지도 하나님께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없이 자족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교만은 사람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도록 하는 악한 뿌리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풍부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에 의하여서 부자가 되었다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성도들은 이러한 때를 경계해야 합니다.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시험(temptation)이 있습니다. 이는 성도를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test)도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순종하였을 때, 성도는 하늘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늘 자신의 백성에게 하늘의 복을 주시길 원하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재물을 얻을 능력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성도는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면(19-20)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필경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말하는 다른 우상이 될 수도 있고, 또한 오늘날에는 물질과 명예, 심지어 가족과 건강 같은 것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는 확실한 멸망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서 여러 나라와 여러 민족을 멸망시켰습니다. 그 이유는 가나안 족속들의 우상 숭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풍요로운 물질을 허락하신 것은 더욱 하나님을 잘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리고 오늘날의 성도가 끝내 하나님을 버리고 멀리할 때에는 그들이 멸망시킨 가나안 족속의 길을 따라가게 됩니다.
적용: 당신은 지금 누구의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행복은 영어로 happiness 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본래 happen, ‘우연히 발생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들의 인생 목표가 우연하게 일이 잘 되고 우연하게 돈이 벌리고 우연하게 성공하는 것일까요? 산상수훈에서 복은 happiness 가 아니라 blessing 이라는 단어를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blessing이라는 단어는 본래 bleed, ‘피를 흘리다’라는 단어에서 나왔으며, 고대 앵글로색슨족은 피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축복으로 간주했습니다. 행복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 설 교 >
잊지 않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신 8:11-20, 시 126:1-3, 마 5:6, 10 / 인명진 목사
• 말씀에로의 나아감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작은 마을, 광장에는 낡은 영화관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린 소년 토토는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전쟁에 나가 전사하였습니다. 토토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성당으로 달려가 신부님의 일을 돕습니다. 그러나 토토는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나면 좋아하는 영화를 볼 수 있어서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작품은 모두 신부님의 검열을 거치게 되어있었는데, 신부님이 검열한 필름을 극장에 전달하는 것은 토토의 몫이었습니다. ‘나도 아저씨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영사기사 알프레도는 토토를 꾸짖어 돌려보냅니다. 그 길이 배고프고 너무 힘든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정말 영화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영사실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고, 영사기 조작법도 알려줍니다. 알프레도는 토토를 무척 귀여워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두 사람의 우정은 점점 깊어갑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토토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영화관에 취직하여 그 아저씨를 돕습니다. “토토, 네가 영사실 일을 사랑했던 것처럼 무슨 일을 하든 네 일을 사랑하렴.” 알프레도는 아버지와 같이 인생을 사는 법을 알려줍니다.
청년이 된 토토는 은행장의 딸, 엘레나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직업을 가진 청년과의 교제를 찬성할 리가 만무합니다. 토토의 아버지가 전사자였기 때문에 그는 입대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딸과 헤어지게 하려는 은행장의 계략으로 토토는 군 징집을 당합니다. 제대를 하고 나왔을 때 사랑하는 여인은 떠나고 없었습니다. 실의에 빠져 방황하는 그에게 알프레도는 마을을 떠나 넓은 세상 로마로 떠나라고 권고합니다. 성공할 때까지는 시칠리아에 오지도 말고 편지도 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매정해 보였지만 그것은 어른의 지혜였습니다. 잊어버리기 위해서는 떠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었습니다. 로마로 건너간 토토는 알프레도의 조언처럼 30년이 넘도록 고향을 한 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영화감독으로 성공을 거둡니다.
1989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과 골든 글러브 최우수 외국영화작품상, 1990년에 미국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영화작품상을 받은 영화, ‘시네마 천국’의 줄거리입니다. 영화는 한 통의 전화를 받은 토토가 30년 동안 찾지 않은 고향을 찾아가는 내용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알프레도가 세상을 떠난다는 소식을 받고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30년 만에 고향을 찾아갑니다. 영화음악의 거장, 엔리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가 작곡한 주제곡과 함께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랑을 받는 영화입니다. 과거의 아픈 상처를 잊어버릴 수 있었기에 그는 성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기억들, 아픈 기억들, 고통스러운 기억들은 빨리 잊을수록 좋습니다.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이 내린 축복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잊기 위해서 떠났고, 잊기 위해서 이를 악물며 일에 매진하여 성공도 했지만 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했던 과거의 아픈 기억에 발목이 잡혀 있는 한 그는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알프레도는 그렇게 권면했지만 그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 돌아올 토토를 위해 필름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어린 토토가 봐서 안될 장면들, 연인들의 키스 장면을 이어놓은 것이었습니다. 모리꼬네가 작곡한 주제곡 Love Theme이 흐르는 가운데 토토가 혼자 앉아서 알프레도가 남긴 필름을 보고 보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납니다. unforgettable(잊을 수 없음)…. 그것이 마지막 장면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 잊지 말아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
오늘 신명기 말씀은 축복의 땅 가나안 문턱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먼 광야 길을 걸어 이제 가나안의 문턱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듣고 급히 특별집회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오전, 오후, 저녁... 하루 세 번의 집회를 열고 말씀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신명기는 그 세 편의 설교가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신명기 본문은 두 번째 설교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내용의 핵심은 “잊지 말아야 한다. 분명히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입니다.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과 그분이 행하신 일...” “그분은 여러분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해내신 하나님, 여러분을 이끌고 저 막막하고 무시무시한 광야, 불뱀과 전갈이 다니는 황량하고 메마른 불모지를 지나게 하신 하나님, 단단한 바위에서 솟아나는 물을 주신 하나님, 여러분의 조상이 들어보지 못한 만나로 광야에서 여러분을 먹이신 하나님이십니다.”(14-16절, 메시지 성경). 극심한 흉년 때문에 야곱 일가 70여명이 이집트(애굽)로 내려갔습니다. 그 나라의 총리가 된 요셉 덕분에 나일강 삼각주 지역 비옥한 땅 고센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등극하면서 그들은 졸지에 노예로 전락합니다. 거대한 국가 창고를 짓는 공사에 투입되어 힘겨운 노역에 시달립니다. 그들은 자녀를 낳아 기르는 기본 권리마저 빼앗기고 희망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그 아픔과 고통의 기억을 떨쳐 내버릴 만도 한데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종 되었던 너희의 과거의 삶을 기억하라.” 이것은 애굽과 원수로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희가 어떠한 처지에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를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애굽이 있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 정복이라는 야망을 가지고 칼을 갈고 있었을 때 우리 조상들은 당쟁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는 아시아 전체를 점령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기 위해 무력으로 조선의 국권과 강토를 빼앗았습니다. 식량과 자원을 수탈했고, 젊은이들을 강제로 끌고 가 그들이 일으킨 대동아전쟁의 총알받이로, 전쟁터의 군인들 성 노리개로, 군수물자를 나르고 생산하는 노무자로 삼았습니다. 민족의 혼 자체를 말살하려고 안간힘을 쏟았습니다. 교회에 가해진 압박은 더했습니다. 종탑의 종들을 다 철거해가고, 모세오경과 요한 계시록은 삭제를 당했고, 나중에는 구약은 읽지 못하게 했으며 사복음서만 읽게 했습니다. 교회에서도 예배 전에 일본 국기에 배례하게 했고, 1943년 9월부터는 주일 밤 집회와 수요기도회를 모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따르지 않은 수많은 그리스도인과 목회자를 가두었고, 고문하여 죽였습니다. 민족과 교회지도자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고 1945년 8월 18일에는 그들을 모두 학살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유언과 같은 설교에서 애굽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말합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신 32:7). 왜 그것을 강조한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잊어버리고, 주신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잊어버리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힘든 광야 사막길을 걸어갈 때도 그들이 애굽을 기억하기만 하면 새 힘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기억하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의 풍요 속에 살아갈 때 애굽의 종살이 하던 때를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도 영적 애굽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그것을 강조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하던 자들이었다... 너희가 전에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요, 사망의 덫에 걸려 있던 자들이었다. 진노의 자식들이요, 멸망의 자식들이었다...’ 하나님의 긍휼을 도무지 받을 수 없는 그런 자리에 떨고 서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한없으신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된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고, 그분의 은혜였습니다. 어두운 민족 이스라엘의 어느 누구도 바로의 압제에서 풀려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전권을 가지고 바로에게 나아가지만 권력자는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모세의 능력으로 된 것입니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너희를 택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 너희가 대단한 존재들이어서가 아니었다. 무궁한 사랑으로 너희들을 택해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 광야의 길을 갈 때 너희들을 돌보아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 너희에게 하늘 문을 여서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여 주시던 그 하나님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을 때 그들은 건강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 사건을 상세하게 들려주는 출애굽기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내 백성”(출 3:10)이라고 소개하면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6:7).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요,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해방하셨다고 말씀합니다(8:27).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구원 사건을 사명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 잊어버림의 때
그러면 말씀이 권고해주는 잊어버림의 때는 언제입니까? 어느 때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은 “이때”에 대해 깊이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12절 이하는 그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배불리 먹고, 좋은 집을 지어 거기서 살고, 여러분의 소떼와 양떼가 늘어나 돈이 더 많아지고, 여러분의 생활 수준이 점점 높아질 때, 행여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재산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 여러분의 하나님을 잊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신 8:12-14, 메시지성경). 너희가 잘살게 될 때, 모든 것이 풍요로울 때, 아름다운 집에서 살게 될 때 그때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어려울 때, 문제가 있을 때, 고통과 아픔이 있을 때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하나님을 잘 믿을 것 같은데 정작 모든 것이 다 잘 되게 되면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헛셀 포오드의 책 가운데 그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한 청년이 그 목사님을 찾아와 기도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새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사업이 잘되게 기도해 주십시오. 그 사업이 잘되면 하나님께 십일조도 드리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많이 하겠습니다.” 목사님은 그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응답 때문인지 그 청년의 사업도 놀랍게 번창했습니다. 사업 규모가 커지자 정신없이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약속했던 것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렸고, 너무 바빠서 이제는 예배도 제대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회사로 심방을 갔습니다. “요즘에 예배도 안 나오고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십니까? 사업 시작할 때 하나님께 했던 약속을 잊었습니까?” 자기가 한 약속이 생각나서 이 젊은 사업가는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목사님, 사업이 여간 바빠야지요. 또 돈의 액수가 커지니까 회사 경영상 수입의 십분의 일을 떼어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여러 군데 사업장을 벌이다 보니까 교회에 가고 싶어도 시간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 청년 실업가의 손을 붙잡고 함께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하나님, 이 형제가 교회에 출석하고 싶어도 사업이 너무 잘 되어 바빠서 예배에 못 나온답니다. 수입이 너무 많아서 십일조 헌금하기가 어렵답니다. 수입과 사업의 규모를 옛날처럼 줄여 주시고, 가능하면 사업도 잘 안 되게 하셔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예배도 잘 드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세상일이 너무 잘 되어서 신앙이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자 그 청년 사업가는 바로 회개했습니다.
사실 가난할 때, 어려울 때는 어떤 점에서 문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이 잘되고, 편안하고, 풍요롭게 되었을 때,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을 때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걸어가는 이스라엘을 걱정하신 것이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을 걱정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깊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해질 때 교만해지지 말고, 삼가 조심할 것이며, 누가 은혜를 주셨는지, 누가 구원하시고 인도하셨는지를 잊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의 은혜를 누렸지만 우리는 정치적으로 후진국이었고, 국민소득 100불도 안 되는 최빈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강대국의 이데올로기로 나뉘어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루었고,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면서 세계 유일의 분단민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70여년동안 우리는 전쟁 이야기에 시달리며, 그 이야기만을 하면서 살아온 민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살고 있습니다. 잘먹고 잘 살게 될 때, 그때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망하는 길밖에 없고, 무너져 내리는 길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 주신 복을 잊지 않는 길이 사는 길이다
고난 속에서 살아온 유대인들은 이제 예루살렘에 ‘유대인 대학살 기념관’을 지어놓고 그것을 “야드 바솀”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말은 “기억하라”는 히브리어인데,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에서 있었던 600만 유대인 학살사건을 기억하는 기념관입니다. 그 기념관 입구에는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 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혹시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유대인이 있을까 봐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 아픔과 고통의 순간들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어려움을 잊고 살면 우리는 망한다는 생각 때문이며,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일본의 압제로부터 벗어난 광복 74주년 감사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러시아, 청나라, 일본, 그리고 멀리 미국과 영국까지 지정학적 이유로 한반도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놓여있던 작고 힘없는 민족이었습니다. 결국 일본 제국주의에게 국권과 국토는 강탈을 당하였고, 고통을 당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줄타기는 해야 하는 상황은 비슷합니다.
그 아픔의 시간, 많은 사람들이 광복을 염원하며 죽어갔습니다. ‘상록수’의 작가 심훈도 그중의 한 사람이지요. 1930년대 초에 쓴 시, “그날이 오면”에는 광복에 대한 그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이 시에는 광복의 그날을 간절히 염원하는 시인의 염원과 비장한 절규와 호소가 담겨있습니다. 시인 만이었겠습니까? 친일파를 제외하고 대한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염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심훈 선생은 1936년, 35살의 나이로, 윤동주 시인은 광복 6개월 전에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일본 감옥에서 눈을 감습니다. ‘그날은’ 언제나 아득한 미래였으며 민족의 가슴 속에 있던 염원이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했던 시인 이육사나 청산리전투에 참가했던 이범석조차도 해방의 그날은 아득한 미래로 생각했다고 하니 암담했던 당시의 상황을 엿보게 됩니다.
“파락호”라는 말이 있지요. 지난날 행세깨나 했던 집안의 자손으로 허랑방탕한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양반동네 소동기』라는 책의 저자 윤학준은 근대 한국의 3대 파락호로 흥선대원군 이하응, 1930년대 형평사(衡平社) 운동의 투사였던 김남수(金南洙), 그리고 학봉 종손인 김용환을 꼽았습니다. 학봉 김성일은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 임진왜란 때 경남 지역에서 크게 공을 세운 인물이지요. 그의 13대 손인 김용환은 대대로 내려오던 전답 18만평, 현재 시가로 약 200억 원의 재산을 모두 거덜 냈다고 하니 파락호 중에 최고인 셈입니다. 무남독녀 외동딸의 혼수 장만 비용마저 들고 나가 써버렸다니 가히 최고의 난봉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간 탕진했다고 믿었던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으로 보냈음이 알려졌으며 파락호 행세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한 철저한 위장술이었음이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거금을 아낌없이 희사한 것도 경탄할 일이지만 주색잡기, 노름꾼 등 불명예스런 비난 속에서도 식구들에게 조차 절대 함구한 의지력 또한 놀라울 따름입니다. 김용환의 무남독녀 외동딸인 김후웅 여사는 1995년 아버지가 생전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게 되자, 50년이 지나서야 아버지에 대한 그간의 한 많은 소회(所懷)를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글에서 이렇게 남기고 있습니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 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중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농 신행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 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꼬.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 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정말 위대한 위대한 파락호입니다. 가족에게도 숨겼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어려웠다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그날’의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렇게도 염원하였던 바로 그날, 그 광복이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문턱에서 받은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4,000년이 지난 오늘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광복의 은혜, 구원의 은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은혜, 살아오는 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과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이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올해로 우리는 조국 광복 74년, 3.1운동 100주년을 맞고 있습니다. 일본 아베 정권이 제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며 감행한 경제 보복 조치로 인해 어수선한 상황입니다. 경제 보복 행위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며, 제2의 침략과 같습니다. 지난달에는 러시아와 중국의 영공 침공에 이어 북한의 미사일 발사까지 이어지면서 한반도는 편한 날이 없어 보이고, 국제정세는 숨 가쁘게 진행되는 때를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복절을 맞으면서 민족의 역사를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이집트’가 있었고 그 압제가 있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무력으로 국권과 강토를 빼앗고 짓밟으면서 민족혼 자체를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들이 일으킨 전쟁의 총알받이와 위안부로 끌려가 모멸을 당하다가 외국 땅에서 죽어갔습니다. 언어와 성씨와 자유와 민족의 혼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해방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기도했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된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고 그분의 은혜였듯이, 우리 민족이 경험한 해방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다가 “대한이 살아있다”라는 노래를 몇 번을 꺼내서 들었습니다. 광복절 설교를 준비하면서 들었기 때문인지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고 눈물이 났습니다. 3.1 운동 직후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실에는 만세운동에 참가했던 젊은 여성 7명이 갇혀 있었습니다. 김향화, 권애라, 신관빈, 심명철, 임명애, 어윤희, 유관순... 대부분이 10대 중반에서 후반의 젊은 여성들이었습니다. 고문을 받다가 죽은 사람도 있었으니 그때 모두가 두려움과 공포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공포의 밤을 달래며 서로 용기를 불어넣으려 옥중에서 노래를 만들어 불렀던 창가(唱歌)였던 셈입니다. 누가 가사를 썼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7명의 십대 소녀들이 함께 감옥 바닥에 엎드려 이 노랫말을 고쳐 써 노래를 만들어 함께 불렀을 것입니다. 개성 호수돈여학교 졸업생이었던 심명철 지사의 아들(문무일 선생)이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받아 적은 가사에 음악감독 정재일이 곡을 붙인 것이 “대한이 살았다”라는 노래입니다.
진중이 일곱이 진흙색 일복 입고/
두 무릎 꿇고 앉아 하나님께 기도할 때/
접시 두 개 콩밥덩이 창문 열고 던져줄 때/
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
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노래에 나오는 ‘전중이’는 본래 가사에는 ‘진중이’로 되어있습니다. ‘전중이’의 오기로 추정합니다. 국어대사전은 ‘전중이’를 ‘징역살이하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정의합니다. 그 노래를 한번 듣겠습니다.
대부분 10대였던 그들은 기독교에서 세운 여학교를 졸업했고 기독교 신앙을 통해 민족 독립의식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걷지 못할 정도로 치욕스러운 고문을 당하고 돌아온 저녁에 감방에 함께 모여 그들은 피눈물로 기도했답니다. 이 노래를 함께 부르며 서로를 격려했답니다. 여러 차례 간수들이 제지 했지만 그들은 노래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노래했고,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조국 해방의 광복의 그날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 민족이 사는 길은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주신 은혜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 일에 우리 모두가 앞장 서십시다.
행복한 가정은 이것이 있다
신명기 8:11-20 / 이규헌 목사(수영로 교회)
하나님은 가정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가정을 만드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축복하기 원하시고 가정을 통하여 역사를 이루어가기 원하십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며 축복입니다. 그런데 요즘, 가정이 해체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인 추세인데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은 곧 교회생활이라는 등식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교회생활이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신앙의 꽃을 피우고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곳은 먼저 가정이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신앙이 대단한 것처럼 드러난다고 할지라도 가정 안에서 신앙인으로서 증명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신앙의 모습이 쌓여 흘러나오는 것이 교회생활입니다.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이 분리되었다면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정 안에서 어떤 신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믿음이 자녀들에게 어떻게 전수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가정 안에서 신앙의 모습에 실패를 한다면 교회나 사회 속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서 24장에서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이라는 거대한 임무를 완수하고 난 다음, 백성들에게 설교를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정복하기는 했지만, 그 땅은 가나안 정착민들이 섬기던 우상들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지 이전에 섬기던 신을 섬길 것인지 그 땅의 우상을 섬길지 분명한 선택을 할 것을 촉구하면서 자신의 믿음의 태도를 밝힙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그가 강조한 것은 ‘나와 내 집’입니다.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했습니다. 구원 사건은 한 개인만이 아니라 가족 전체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특히 성경에서는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함께 구원을 경험하는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내가 믿는 것 이상으로 다음 세대에 믿음이 전승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특히 본문 신명기는 다음 세대에 주신 말씀입니다. 가나안 정복의 지상과제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의 신앙 계승이었습니다. 앞선 세대가 경험했던 영적인 사건들이 다음 세대에서는 잊히고, 신앙의 계승에서 실패하면 가나안의 축복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다음 세대에게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지나간 날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말라. 가나안의 그 풍부한 문화 속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만을 경외하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다른 것은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당부를 하십니다. 너희들이 내 말을 지켜 행하면 너희 조상에게 약속했던 것을 반드시 이행하겠다고 반복하십니다. 오늘날 내가 누리는 축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의 풍족함에 빠지거나 교만하지 않는 것, 내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 신앙을 가정에서 어떻게 경험할 것인가입니다. 가정 안에서의 영적 경험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장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경험해야 할 곳은 가정입니다. 행복한 가정, 건강하고 좋은 가정, 신앙의 명문가는 좋은 영적인 경험을 많이 하는 곳입니다. 그 경험들이 우리의 신앙을 바꿉니다. 유대 공동체는 가정이 가장 중요한 신앙공동체이고, 중요한 자녀교육의 장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학교나 교회에 맡기는 경향이 많습니다. 세상을 쥐었다 폈다 하고 노벨상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유대인들이 많습니다. 그 가정을 보면 부모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가정의 가장 거룩한 책임은 신앙의 계승이라는 것을 유대인들은 아직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신앙이 손자에게 전해지는 것에 철저합니다. 가족 대대로 함께 예배드리면서 신앙을 전수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유대인들이 세운 학교에서는 오전에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심어주고, 일반 교육은 오후에 이루어지는데 여기에서 탁월한 성적을 올리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가정 부모의 최대의 역할은 신앙의 전수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한 염려와 책임, 두려움과 부담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자녀의 미래를 부모가 책임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자녀들이 일평생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가지도록 돕는 것입니다. 부모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최고의 유산은 신앙입니다. 그것만 제대로 심어주면 그다음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기본적인 것은 자녀에게 최선을 다해 가르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길러주셔야 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신앙적 태도가 아주 중요합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너무 의지하게 하여 의존적이고 부모의 재산만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게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학교 교육에 열심을 내는 문화 안에서 살고 있고 대학입시에 사활을 겁니다. 그러나 공부 잘한다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부모의 일차적 책임은 아이를 대학에 보내는 것이 아니고 자녀의 나이에 맞는 신앙을 가지도록 돕는 일입니다. 자녀가 자라면서 그 나이에 맞는 신앙을 경험하도록 이끌어준다면 최고를 준 것입니다. 신앙만 심어준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지만, 모든 것을 다 해주어도 신앙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방식으로 하면 될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자녀에 대한 확고한 기준은 하나님만이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있다는 믿음을 부모와 자녀가 함께 가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부모의 신앙이 중요합니다. 부모가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자녀들이 삶을 하나님께 맡길 수 없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세대가 그 땅의 풍요에 빠져 마음이 교만해진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날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고 내 힘으로 살아온 것처럼 교만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신앙이 식어질 때 그 신앙이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 신앙은 급격하게 무너집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수 24:31)」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던 세대가 지나니까 신앙이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전수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신명기서의 주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잊지 말라.”입니다. 홍해를 가르고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며 여리고를 무너뜨리신 사건,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늘의 만나로 2백만을 먹이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것과 그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셔서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모여 유월절을 지키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셨는가를 상기하고 광야의 텐트 안에서 누룩 없는 떡을 먹으며 하나님의 현재적 역사를 기대하는 믿음을 길렀습니다.
우리는 부모 세대의 영적 체험을 계속적으로 자녀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은혜에 대한 반복적 재생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반복적으로 기억해 내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주일 예배를 드릴 때 우리 1세대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잠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감동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나도 모르게 식어지고 있다면, 어느 날 나의 식어진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떠나있는 자녀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내 안에 구원의 감격이 살아나고 은혜를 재생하는 작업이 주일마다 일어나야 할 줄 믿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재생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 가정의 영적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성경을 일일이 가르치고 신앙지도를 하는 것도 좋겠지만 중요한 것은 가족들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느냐, 우리의 대화 속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느냐입니다. 가족들 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식하고 결정하려는 분위기가 있는 가정은 영적인 가정입니다. 특히 자녀들의 눈에 비치는 부모의 모습이 중요합니다. 부부의 대화 속에 하나님이 얼마나 존중되어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자녀들은 훤히 알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교회에 다니는 것보다 부모들의 삶과 행동 속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는가를 느낌으로 압니다. 집안에 어떤 일이 생길 때 어떻게 처리를 하고 있는지를 자녀들이 보고 있습니다.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 세상적인 방식인지, 말씀에 따라 해결하려고 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돈과 신앙의 문제로 갈등이 일어날 때 치열한 갈등 끝에 신앙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아이들은 가정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백 마디 말보다 하나님이 소중함을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녀의 신앙교육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부모의 위선적인 태도입니다. 거실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커다란 액자는 있는데 실제로는 “돈이 나의 목자시니”로 살아간다면 자녀들이 액자를 볼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집안의 가장이 주일마다 성경책이 어디 있느냐고 찾는다면 자녀들은 부모의 신앙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아챕니다. 하나님을 믿는 척할 뿐이지 현실에서는 전혀 아닌 모습을 볼 때 자녀들은 혼란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얼마나 잘 믿느냐 안 믿느냐는 신앙의 수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태도입니다. 힘들고 현실이 녹녹지 않지만 내가 최소한 신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경외심을 가지고 애쓰며 살고 있느냐 하는 신앙의 진정성을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대단한 믿음은 아니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붙잡고 살고자 하는 신앙의 진정성을 가진다면 무언중에 그런 모습들이 자녀들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가정은 무엇이 다릅니까? 어느 가정이든 문제가 일어나고 늘 싸우는 내용도 비슷하지만 믿음의 가정에서는 풀어나가는 방식이 다릅니다. 문제가 일어날 때, 고통의 순간에 부딪힐 때 온 가족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 자체가 자녀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줍니다. 가정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았을 때 기꺼이 용서를 구하고 용서해주는 경험들이 가정 안에 있어야 합니다. 많은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다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소연합니다. 부모가 잘못할 수 있지만, 그것을 겸손하게 인정할 줄 알 때 가정 안에서 복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더 큰 위로와 은혜를 경험하는 일이 부모의 신앙을 통해 자녀들에게 전해질 때, 교리적으로는 다 가르칠 수 없는 실제의 복음이 가슴에 와 닿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녀들은 사회 속에서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특히 가정 안에서 영적 추억과 경험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가족이 함께 새벽기도에 참여하는 만큼 좋은 신앙적 경험과 훈련이 없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자녀들이 장성해서 삶의 위기가 왔을 때 기도로 풀어가는 것을 보고 배웠으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영적으로 깊이 각인되고 그들의 삶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토요일마다 많은 분들이 와서 청소를 하는데 아이들이 아빠와 함께 청소하는 것을 한 번씩 볼 때는 멋진 교육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가족들이 함께 농어촌 봉사나 선교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습니다. 좋은 휴가지에 갈 수도 있지만 어려운 지역에 가서 함께 보고 느낄 때, 그 자녀들은 성숙하고 변화된 모습으로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 될 줄 믿습니다. 자녀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도 일 년에 몇 번이라도 부모와 함께 뛰며 찬양하고, 서로 용서하며 예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상처는 가정에서 받습니다. 얼마나 단절되고 대화가 없는 삶을 사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전수를 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세상의 메시지들을 받아 세상의 자녀들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경험들을 공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무언의 메시지로 영적인 영향력을 줄 때 그들의 인생을 주께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 경험해야 할 또 중요한 것은 사랑의 경험입니다. 사랑의 경험은 아주 오랜 기억을 가집니다. 어린아이가 모유를 먹으면서 엄마의 품 안에서 자란 경험은 깊은 안정감을 주는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무의식의 세계지만 영향력이 큽니다. 행복한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공부를 좀 못한다고 해도 가정 안에서 행복감을 많이 느끼는 자녀들이 훨씬 더 탁월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정서적 안정감과 행복감을 가지고 자존감이 높은 아이가 결국에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못했다고 다그치고 억압하고 정서적 불안감을 가지게 한다면 목적을 이룰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아이의 정서는 깨어지고 삶이 피폐해집니다.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들이 해줘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도 아이들에게 사랑의 터치를 할 때, 선생님의 사랑의 손길을 기억하면서 일생동안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친밀함의 경험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친밀하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가끔 신앙이 좋다는 가정 안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장해서는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대개 부모가 율법적인 분위기 안에서 너무 엄격하게 아이들을 다루어 신앙의 이름으로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하거나 하나님에 대해서 지나치게 두려움을 가지게 한 경우입니다. “너 오늘 교회 안 가면 하나님께서 혼내실 줄 알아. 기도하지 않으면 밥 안 준다.” 교회로 인도하고자 하는 열정은 이해하지만, 너무 일방적인 강요는 문제를 일으킵니다. 기독교 최고의 작가 중의 한 사람인 C.S 루이스는 어린 시절에 엄격한 크리스천 스쿨의 선생님에게서 느낀 부정적인 감정들 때문에 기독교로부터 멀어진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에 관련된 사람들은 너무도 엄격하고 매몰차고 굳어있어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깊이 각인시키며 하나님을 떠나게 합니다. 가정에서 아이들을 너무 엄격하게 다루거나 너무 방임해서 양육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부모로부터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의 학교 폭력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렇게 아이들이 분노가 가득 찬 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가정의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이들에게 외형적인 것은 다 해주지만 정말 해주어야 할 사랑은 충분히 공급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바쁘고 피곤하고 일상의 문제에 얽매여 사랑을 충분히 공급해주지 못하니 욕구불만이 분노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데 실패하지 않으면 자녀들은 반드시 건강한 인생으로 자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부모의 사랑이 본능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것에서 나온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특히 사춘기의 자녀들은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양육하다 보면 결국, 하나님이 부모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양육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 인내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향하여 한없이 품어주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을 알아가게 하시고 나의 성품과 모난 부분을 깎고 그 자녀를 통하여 나를 나답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여전한 사랑이 자식을 집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었습니다.
오늘 우리 가정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부모 세대들이 인간적 본능의 사랑, 무분별한 과잉보호의 자식사랑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사랑을 우리 삶을 통해 실천하고 자녀들에게 느끼게 해야 합니다. “우리 부모님은 세상적인 가치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라고 부모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게 할 때 부모의 신앙과 삶을 통해 자녀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가정이 되면 상처를 주고받아도 회복이 빠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 안에서 나오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면 그 가정은 상처투성이입니다. 부부의 관계, 부모와 자녀 사이에 얼마나 많은 아픔과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지옥처럼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들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이 있다면 “천국은 우리 집과 같다.”는 말일 것입니다. 가정의 달을 맞으면서 우리가 좀 더 가정에 관심을 쏟고 우리가 소홀했던 부분들을 점검해보는 기회가 되기 원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이 영적으로 건강하게 세워지는 일에 우리 부모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새기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신앙계승에 실패하면 가나안의 풍성한 축복이 더 이상 축복이 될 수 없고 비극이 되기 때문에 모든 자녀들에게 애굽에서 건져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놓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녀 세대에게 가르쳐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부모가 어떤 책임을 얼마나 질 수 있을까요?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더 알아가고 신뢰하도록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아름다운 믿음의 세대가 되도록 우리가 도울 때,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멋지게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인 믿음의 전승, 이 일에 실패하지 않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세대보다 더 거룩하고 영향력 있는 멋진 세대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나안의 축복을 얻는 길
신명기 8:11-20 / 이한규 목사(분당샛별교회)
< 광야의 존재 이유 >
서부 영화를 보면 아무리 고난이 심해도 끝은 반드시 의인이 이기도록 각본이 되어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도 승리의 각본을 이미 꾸며놓으시고 그 각본대로 잠시 광야를 허락하실 때가 많습니다. 인생에서 광야 공부도 중요합니다. 돈은 있지만 사람이 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느 날, 한 의사가 다리 저는 아이를 고쳐주었습니다. 그 아이가 20년 후 살인죄로 감옥에 갔습니다. 걷게는 되었지만 걸어갈 길은 못 배운 것입니다. 그처럼 가나안에 빨리 들어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직선거리로 14일 거리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출애굽 후 가나안 남방인 가데스 바네아까기 가서 거기서 정탐꾼 12명을 가나안에 보냈습니다. 그때 10명 정탐꾼이 부정적인 보고를 하자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가 안 된 것으로 여기시고 40년 동안 광야를 지나게 하셨습니다.
몸은 교회에 왔는데 마음과 생각과 태도는 애굽의 모습 그대로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기복주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무엇을 얻는 것’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섬길 목적이 아닌 얻을 목적으로 교회를 다니면 교회도 어려워집니다. 옛날에는 교회 장로 선거가 치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새는 장로 선거 후 큰 홍역을 치르는 교회가 많습니다. 교회의 리더가 되어 교회를 움직이는 것에 세상적인 매력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요새 신분상승의 기회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사법고시에 합격하거나 의사가 되면 바로 신분상승이 이뤄졌습니다. 요즘은 그런 기회가 점차 줄면서 ‘사’자 들어가는 호칭을 얻어도 신분상승이 쉽지 않습니다. 이때 가장 얻기 쉬운 ‘사’자 호칭 중의 하나가 바로 ‘목사’입니다. 지금 편법과 속성으로 단기간에 목사 안수를 주는 군소신학교가 몇 백 개나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길로는 도저히 신분상승을 이룰 수 없는 사람이 신분상승을 꿈꾸고 사명을 내세워 뒤늦게 목사가 되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정황 때문에 목회자를 청빙할 때 나이가 들어 신학을 한 사람은 담임목사나 부교역자로 아예 받지 않으려고 나이 제한을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젊어서 신학교에 간 사람을 무조건 신뢰하는 것도 아닙니다. 일반 대학에 갈 실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신학대에 가는 경우도 많은 것을 알고 청빙할 때 학력까지 상세히 따지는 교회가 많습니다. 사명이 학력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데 워낙 사람을 믿지 못하는 시대가 되어서 그런 분야까지 따지고 드는 세태가 된 것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결국 지금은 목사 안수를 받아도 사역할 곳이 없고 신분상승은커녕 “목사님!”이란 호칭도 억지로 해줄 때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점차 교회에 설 자리가 없어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 상처를 교회에서 무의식적으로 자꾸 토해내니까 문제와 분란이 생기면서 더 무시되고 외면되는 상황에 내몰린 무임 목회자가 요새 얼마나 많습니까?
일반 성도가 보기에 별로 목사 자격이 없어 보이는데 목사 안수를 받았다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목사님!”이란 호칭이 진심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부담스러워서 멀리하는 것입니다. 요새 택시 운전사나 트럭 운전사 중에 목사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들이 때가 되어 “사실은 제가 목사입니다.”라고 신분을 밝히면 주변 사람의 놀라움과 함께 더 외면되는 상황에 처하면서 목사 안수 받은 것을 후회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사명은 ‘신분상승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분하락을 감수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업에도 성공하고 세상적인 길이 많은 사람이 사명감을 가지고 신학교에 간다면 성도들도 “와아!” 하며 존경심을 표하지만 사업에 실패하고 세상적인 길이 없는 사람이 사명감을 가지고 신학교에 간다면 “에이!” 하며 좋게 봐주지 않고 은근히 무시합니다. 또한 ‘서울대학교’에 갈 실력이 있는 사람이 신학교에 간다면 “와아!” 하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지 못해서 신학교에 간다면 “에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자기검열을 중시했지만 지금은 사회검열이 강화되어 타이틀만으로 급격한 신분상승을 이루는 것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래도 좋은 신학대학원을 가겠다고 삼수 사수를 하고 교단 총회장이 되겠다고 몇 억 원을 쓴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교회가 세속적인 매력을 추구하면 반드시 그 앞에는 광야가 펼쳐집니다.
물론 광야가 반드시 죄와 허물에 대한 징계로 주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더욱 복된 존재로 만들려고 하나님이 광야를 허락하실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광야의 순간에 처할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더욱 하나님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광야가 하나님의 선하신 각본 아래 주어진 것임을 믿고 더욱 하나님을 신실하게 꼭 붙잡고 감사하며 나가면 조만간 그의 앞에 반드시 가나안의 신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 가나안의 축복을 얻는 길 >
인생에서 광야 교육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또한 교육 기회가 생기면 그 회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과 같은 명절을 신앙교육을 위한 기회로 잘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명절이 되면 특별히 3가지 말씀을 전했습니다. 첫째, 과거에 받은 수많은 기적적인 은혜와 축복을 회상해 감사하게 했습니다. 둘째, 앞으로 가나안에서 받게 될 큰 축복의 비전을 그려주었습니다. 셋째, 가나안의 축복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도전을 주었습니다. 가나안의 축복을 준비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1. 고난의 시험을 이겨내십시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잊어버립니까? 의식주가 해결되고 물질이 많아지면서 마음이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12-14절).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 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광야로 인도하셨는데 그것은 그들을 낮추시고 시험해서 마침내 복을 주시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15-16절). 그처럼 하나님은 복을 주실 때 먼저 겸손하게 낮추는 시험을 하신 후 마침내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오면 그 시험을 통해 먼저 복 받을만한 가난한 심령이 되십시오.
큰 시험을 당하면 막막하고 길이 없는 것 같지만 그때도 주님은 피할 길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오면 곧 축복도 뒤따라 올 것을 믿고 용기를 잃지 말고 더욱 주님 붙잡고 열심히 사십시오. 특히 하나님은 어떤 분야에서 축복을 주실 때 먼저 그 분야에서 시험을 치를 때가 많습니다. 즉 물질 축복을 주시기 전에 물질로 시험하고 자녀 축복을 주시기 전에 자녀로 시험하실 때가 많습니다.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말은 자녀 및 후대의 축복을 받았다는 뜻인데 그런 축복을 받은 것은 그가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바치는 자녀 시험을 잘 치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으로 갈 때 얼마나 생각이 많았겠습니까? “아들을 바치라는 그 음성이 정말 하나님의 음성이었을까?” 수많은 의문과 고민 끝에 아브라함은 그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기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좋은 대학에 가려면 대학 입학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합니다. 그 대학 입학시험은 어린이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적어도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주어집니다. 결국 시험이 있다는 것은 축복받을 기본자격이 준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두려워하거나 시험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그런 때일수록 더욱 사명과 직분에 충실하십시오. 그러면 내일 당장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아도 조만간 반드시 축복된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절에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왜 여러 가지 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합니까? 시험 후에는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면 여러 가지 복을 받고 큰 시험을 당하면 큰 복을 받습니다. 시험은 곧 다가올 복의 전조이자 복으로 가는 징검다리입니다. 그래서 시험 칠 때는 힘들지만 시험이 끝나면 비로소 그 시험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큰 시험을 만나면 “곧 큰 축복이 따라오겠구나!”라고 믿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그에 합당한 시험을 합니다. 보통 때의 말과 행동으로는 믿음의 점수를 알기 힘들지만 시험을 쳐보면 믿음의 점수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바로 그 점수대로 대개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오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이 시험을 통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앞으로 더욱 큰일을 감당하게 하소서!” 시험을 잘 치르면 시험 당한 것 이상의 복을 받습니다.
2. 재물 얻을 능력을 구하십시오
본문 17-1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재물이 생기면 그것을 스스로 얻은 것으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이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셔서 얻었음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물질을 구할 때 무조건 물질을 구하지 말고 물질을 얻는 능력을 구하라는 암시도 있습니다.
흔히 “거부는 하늘이 낳는다.”고 하는데 그 말은 사실입니다. 이삭이 어떻게 거부가 되었습니까? 그는 원래 양떼를 치는 축산업 종사자였지만 창세기 26장을 보면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농사를 통해 백배의 결실을 얻고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직업과 생업이 바뀌고 해고가 되어도 그것이 오히려 백배의 축복을 받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어떻게 일하느냐?”보다 “예배하며 일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십시오. 필요하다면 전업도 하십시오. 인간적인 성실함과 수완도 중요하지만 예배하는 삶을 기초로 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의 수완으로는 2배의 결실도 얻기 힘들지만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백배의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작은 부는 본인이 노력하면 얻지만 큰 부는 하나님이 복 주셔야 합니다. 그처럼 거부는 하늘이 낳지만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거부의 몰락도 하나님의 뜻이란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겸손한 예배자의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제 남은 삶 동안 하나님의 영광과 많은 영혼을 위해 큰일을 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재물의 축복을 주셔서 그 재물을 통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그리고 그 전에 제가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되게 하소서!” 자신이 ‘제물’이 될 때 ‘재물’을 얻는 지혜도 생깁니다.
재물 얻는 능력이 없으면 다른 능력을 구하십시오.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동물도 다 다릅니다. 말은 잘 달리고, 소는 힘이 세고, 독수리는 하늘 높이 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신만의 독특한 모습과 역할이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각 사람을 기성품이 아닌 맞춤형 명품으로 만드셨기에 하나님이 주신 자기 재능과 은사를 감사하면서 그 재능과 은사를 개발해 하나님이 쓰시도록 내어 드리십시오. 그처럼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 누구나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재능을 살려 일하면 밤을 새워도 즐겁습니다. 그러면 남들에겐 어려운 일이 자기에게는 아주 쉽게 여겨지고 열매도 많이 나타납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주신 자기 분복과 재능대로 사역하면 됩니다. 요즘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이렇게 하소연을 합니다. “내가 이 정도 사역밖에 못하는 존재인가?” 그러나 큰 교회를 섬겨야만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그것이 성공입니다.
돈을 잘 버는 분들을 보면 재물 얻는 능력이 탁월해서 돈의 흐름을 읽고 돈 버는 길에 서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재물 얻는 능력만이 최고의 능력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신만의 선천적인 능력과 기회를 활용하면 누구나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기 모습 그대로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하면 자기가 몸담은 분야에서 더 유능해지면서 점점 영권과 인권과 물권도 따라올 것입니다. 그처럼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삶이 진짜 성공입니다. 그런 성공을 구하십시오.
3.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십시오
왜 가나안 족속이 이스라엘에 의해 멸망당했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편애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가나안 족속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지면 가나안 족속들처럼 반드시 멸망당할 것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말씀 중심적으로 살라고 도전합니다(19-20절). 사람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말씀 중심적으로 살 때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얻습니다.
미국에 조지 베브리 쉐아(G.B. Shea)란 가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목사 자녀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잘 믿었습니다. 그는 굵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기에 나중에 인기 있는 대중가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기가 올라가면서 왠지 공허했고 자기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느낌이 생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어릴 때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시절에 대한 깊은 향수를 느끼면서 다짐했습니다. “인생을 이렇게 낭비하지 말자!”
바로 그때 미국 NBC 방송국에서 전보다 몇 배의 보수를 줄 테니 전속계약을 맺자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때 그가 대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죄송하게도 전화를 조금 늦게 하셨습니다. 앞으로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노래할 겁니다.” 그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갑자기 속에서 아름다운 멜로디가 솟아났습니다. 그때 그가 작곡한 찬송이 바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란 찬송입니다.
그 후 그는 빌리 그래함의 평생 동역자가 되어 빌리 그래함 목사가 설교하기 전에 언제나 감동적인 찬송으로 청중들의 마음을 여는 세계적인 복음성가 가수가 되었습니다. 집회 때 그의 찬송이 끝나고 청중들이 기립박수를 치면 그는 늘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박수갈채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 찬사와 박수도 예수님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참된 믿음은 예수님이 물질이나 명예나 인기보다 더 귀한 줄 아는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 외에는 어떤 것도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명예를 얻으면 만족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명예가 없으면 고독하지만 이상하게도 세상적인 명예를 얻으면 더 고독해집니다. 물질이 많으면 만족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옛말에 “천석꾼은 천 가지 근심이 있고 만석꾼은 만 가지 근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재물이 많아지면 근심도 그만큼 많아집니다. 인기가 있으면 만족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왜 인기 있는 연예인들이 자살합니까? 잠깐의 인기 후에 찾아올 대중의 외면에 대한 깊은 불안감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것도 영혼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 영생의 물을 추구하십시오 >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왜 그녀는 아무도 물을 길러 집밖으로 나오지 않는 정오 시간에 물을 길러 나왔습니까?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는 사회의 버림을 받고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했습니다. 정오의 태양보다 더 뜨거운 동네 사람들의 조롱하는 혀를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외로운 모습입니까?
많은 현대인의 모습이 바로 그 여인의 모습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으로 향할 때는 희망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결국은 패잔병처럼 된 자신의 모습에 좌절한 사람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세상을 비관하고 더 고독한 자리로 숨습니다. 세상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을 더 많이 경험하는 곳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외로움과 상처와 불안으로 병들어가는 현대인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바로 복음과 말씀입니다.
또한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다섯 남편이 있었습니다. 마치 섬기던 교회가 다섯 개 있던 현대 교인의 모습이 오버랩 됩니다. 섬기는 교회가 많았다는 말은 그만큼 공허했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옮기면서 얼마나 많은 마음고생을 했겠습니까? 새들은 먹이를 찾아 국경을 넘습니다. 그처럼 목마른 영혼이 갈증을 해소하려고 맑은 물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마십시오.
안타까운 것은 맑은 샘물을 찾다가 이단에 빠지는 것입니다. 또한 샘물을 찾다가 사이다와 콜라의 단맛에 취해 이빨과 내장이 썩는 것이 안타깝고 대형교회로 휩쓸리며 자기 존재의미를 사장시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 참고 참다가 교회 담을 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교회는 넘어서는 안 될 나바론의 요새가 아닙니다. 다만 교회를 옮길 때는 하나님의 뜻에 기초한 2가지 원칙을 반드시 따르십시오. 즉 신분상승을 추구하기보다는 신분하락을 감수하며 옮기고, 교회로부터 유익을 얻을 생각보다는 교회에 유익을 줄 생각으로 옮기십시오.
이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몰입되어 범사에 감사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거룩한 나눔의 비전을 가지고 나눔을 실천하며 살게 하소서! 무엇보다 인간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논리에 익숙해지고 항상 말씀을 추구하며 살게 하소서!”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통해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했고, 안식을 얻었고, 찬란한 비전을 발견했고, 그 비전을 향해 달려 나가는 힘을 얻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중심적인 삶은 어떤 삶입니까? 그것이 무엇인지를 상세하고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말씀중심적인 삶은 기복주의와는 정반대의 삶이란 것입니다. 사실 물질과 건강과 성공과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고 복음을 이용하고 예수 이름을 내세우면서 나눔의 삶에 인색했던 기복주의로 인해 공허한 현대 교인들이 양산된 것입니다. 요새는 신앙의 반대말이 ‘불신’이 아니라 ‘기복주의 신앙’이라는 역설도 들립니다.
왜 요새 기독교 신앙이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잘 주지 못합니까? 기독교 신앙의 구체적인 핵심 열매는 결국 ‘말씀의 나눔’과 ‘물질의 나눔’ 2가지인데 그 동안 몇 단계 성경공부나 각종 세미나 등을 통해 말씀을 나누려는 교인은 많이 양산했지만 물질을 나누려는 교인은 많이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누구보다 필요한 사람은 은밀하게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삶을 실천할 때 영적인 공허함도 사라지고 한국 교회는 다시 이 시대의 희망 발전소가 될 것입니다.
참된 신앙을 통해 참된 축복을 받으려면 반드시 기복신앙을 깨뜨려야 합니다. 어떻게 기복신앙을 깨뜨립니까? 무엇보다 나눔을 체질화시켜야 합니다. 지금은 돈이 돈을 버는 시대이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돈을 휩쓸어가는 시대입니다. 인기 있는 게임 하나만 개발해도 1조를 법니다. 그처럼 무서운 속도로 펼쳐지는 기계화 및 정보화로 인해서 사람의 노동력이 점차 설 땅을 잃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나눔의 뜻을 가진 사람이 없으면 부의 지나친 편중으로 인해 세상은 점점 어두워지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뒤집어집니다.
그런 비극이 충분히 예고되는 상황에서 잘 나눌 줄 아는 인물 성도가 나눌 줄 모르는 세상 사람에게 물질이 무섭게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물질적인 영역을 정복해서 자발적으로 나누는 거룩한 조정자 역할을 잘해야 합니다. 그런 사명감을 가진 인물이 되고 그런 인물을 만드는 것이 바로 교인 및 교회의 중요한 책무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나눔의 비전을 이루도록 성공도 구하고 물질도 구하십시오. 성공이나 물질을 최종 목표로 삼지 말고 나눔을 최종목표로 삼으십시오. 나눔이 최선의 성공입니다. 그리고 나눌 때는 신앙과 나눔을 도전하는 특별한 목적 외에는 나눔을 드러내지 말고 은밀하게 나누십시오. 바로 그때 영혼을 채우는 은밀한 행복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나눔의 목표를 가지고 힘써 땀을 흘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전해주고 영생의 물이 흘러넘치게 하는 복의 근원들이 되십시오.
하나님을 잊지말고 기억하라
신명기 8:11-20 / 송기성 목사(정동교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말 속담에 “망신하려면 아버지 이름자도 안 나온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자기 아버지 함자를 잊어버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불효막심한 자식도 자기 아버지 함자를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망신하려면 아버지 이름자도 잊어버려 안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망신(亡身,disgrace)이란 자기 자신을 망치는 것 곧 ‘잘못하여 자기 지위나 명예를 망치는 것’ 입니다.
설마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잊어버릴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영도자인 모세는 그 백성이 하나님을 잊어버릴까봐 걱정하였습니다. 그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을 잊어버릴까봐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말년에 그 백성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신8:11) 라고 주의를 주었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8:18) 라며 명령을 하였습니다. 이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잊지말고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신8:19,20). 그러나 하나님을 잊지않고 기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해야 한다.
모세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신8:11) 하고 말씀하였습니다. 모세의 말씀은 그 백성이 반드시 순종해야 할 명령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들에게 명한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그 백성이 반드시 기억하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기의 설교를 명령조로 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함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지말고 기억하라고 명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종종 잊어버리곤 했습니다. 모세는 지난 40년 동안 광야에서 그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수 없이 거역하고 불순종 하는 것을 겪었습니다. 그는 그가 죽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 백성이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기억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명령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하는 것은 결코 무거운 멍에나 힘겨운 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거룩한 특권이며 보장된 축복입니다. 이에 대해서 모세는 신명기 6:24에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잊지않고 기억할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2009년 새로운교회를 개척하고 담임자로 섬기고 있는 한홍 목사님이「아멘 다음이 중요하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는 한국 크리스천이 가장 많이 쓰는 두 단어는 “할렐루야”와 “아멘” 이라고 했다. 솔직히 그는 목사로서 성도들이 “아멘” 하는 데까지만 책임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설교를 준비해서 성도가 예배에서 은혜받고 “아멘” 하고 돌아가면 그것으로 그의 소임을 다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큰 소리로 “아멘! 아멘!” 하고 외쳤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바뀌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목회를 해오면서 그를 끝없이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주일에 그토록 은혜받은 얼굴로 아멘을 외치고 떠난 성도들 가운데 상당수가 삶의 현장에서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사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멘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라면서 ‘입술의 고백이 삶으로 증명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20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라며 아멘의 신앙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아멘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예(Yes) 곧 아멘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더 바람직한 것은 아멘으로 그치지 말고 아멘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과 더불어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않고 거역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잊지않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삶의 변화를 이루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항상 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8:12~14전반) 하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베풀어 주신 출애굽의 구원과 자유, 광야에서의 인도와 보호, 반석의 물과 하늘의 만나 등을 상기시켜 주면서 이는 다 그들을 겸손하도록 낮추시며 순종 여부를 시험하사 마침내 복을 주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능력과 자기 손의 힘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고 말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다고 생각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지말고 기억하라고 명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종종 하나님을 잊어버리곤 했습니다. 모세는 지난 40년 동안 광야에서 그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수 없이 배은망덕 하고 불평불만 하는 것을 겪었습니다. 그는 그가 죽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 백성이 곡식과 가축과 은금 등이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자기 능력과 수고로 재물을 모았노라고 자화자찬 하며 교만해지고 하나님을 잊어버릴 것이라고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 곧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명령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결코 부당한 의무나 부담스런 책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거룩한 도리이며 당연한 보은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신명기8:10에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라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드릴 것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며 모든 것이 다 풍부하게 될 때에 그 마음이 교만해지지 않고 자기를 낮추며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될 줄 믿습니다.
미국 사회와 교계에서 영적대각성운동을 일으킨 김춘근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남가주대학교(USC)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페퍼다인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한 그는 1976년, 37세 때 간경화증으로 1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는 빅베어 산에 올라가 6일간을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꺼져가는 이 생명을 다시 살려주신다면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던 야곱을 떠올리며 기도하던 중 그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자신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게 된 그는 1993년 북미주예수대각성운동인 자마(JAMA, Jesus Awakening Movement for America)를 창설하였습니다. 영적으로 타락해가는 미국을 청교도 신앙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열정으로 크게 헌신한 그가 말끝마다 잊지않고 반복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 운동을 전개하면서 한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5:10에 사도 바울은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며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오늘의 우리 각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인 줄 믿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The grace that God gave me was not effect). 그런데 더 바람직한 것은 받은 은혜와 더불어 더 많이 수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On the contrary, I have worked harder than any of other apostles, although it was not really my own doing, but God's grace working with me.). 내가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시인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않고 배은망덕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함으로써 하나님을 잊지않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와 더 많이 수고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1978년 개척교회 시절 유학을 가려고 토플 공부를 하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저의 양심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벌써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1971년 1월에 국립중앙의료원에서 6개월 시한부 인생 진단을 받은 제가 이미 7년 반이나 살았는데 기뻐하며 감사하기는커녕 현실도피적인 유학을 생각한 것이 하나님께 너무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병원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곧,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의 강함보다 강하다”(고전1:25) 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하였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제 자신의 경험으로 볼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않을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모세는 그것을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표현하며 경고하였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잊지않고 기억하면 하나님을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잊지않고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고 번성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진정한 감사
신 8:11-18 / 김광일 목사
세르비아 출신의 목회자인 아버지 보리스와 어머니 두쉬카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8세 이후 장애를 비관하여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과 사랑아래 양육을 받으며 성장하게 됩니다. 팔도 다리도 없는 아이가 부모의 교육철학으로 정상인이 다니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학생회장을 지냈고, 호주 로건 그리피스 대학에서 회계와 경영을 전공했습니다. 그는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서핑을 하고, 드럼을 연주하고, 골프공을 치고, 컴퓨터를 합니다. 그는 바로 허그(Hug)라는 책을 쓴 닉 부이치치(Nick Vujicic)입니다. 허그(Hug)란 포옹을 의미합니다. 죽음만 생각하던 그는 자신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껴안고 나아가 세상을 허그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팔도 없고 다리도 없습니다. 또한 걱정도 없습니다.” (No Arms, No Legs, No Worries) “내 삶에 더 이상 한계는 없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넘어져도 좋습니다!” 얼굴과 몸통만 덩그러니 있지만 언제나 싱글벙글 하는 그를 바라보며 갖는 궁금함이 있습니다. 인생을 감사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자, 몸뚱아리 밑에 꽁지 같은 작은 발과 거기 붙은 발가락 두 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닉 부이치치는 세상 누구보다 커다란 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발가락 두 개로 지금 세상 누구보다 멋진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닉, 왜 그렇게 행복하세요?” 라고 묻는 이가 있을 때마다 그는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그런 자신에게도 한없이 절망했던 때가 있었다고. 태어날 때부터 외모 때문에 아이들로부터 괴물이나 외계인같다는 놀림으로 자살을 시도했었다고요. 그는 땅을 치며 슬퍼했고 끝없이 우울했습니다. 늘 마음이 아팠고 부정적인 생각에 짓눌렸습니다. 어디를 봐도 출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마침내 절망 가운데 행복으로 통하는 문을 찾았습니다. 그 후 그는 달라졌습니다. 자신의 삶을 희망으로 가득 채우고 싶었습니다. 숨이 막히도록 멋진 삶을 맛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의 하루는 감사로 시작해서 감사로 마쳐집니다. 내가 이토록 눈물겹게 감사할 수 있다면 세상사람 누구나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요.” 진정한 감사란 무엇입니까?
본문 신명기 8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 엄청난 풍요를 누리게 될 때 광야 생활을 잊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광야의 시련과 훈련을 절대로 잊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믿고 의지했던 애굽의 생활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감사하라고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예전에 비하면 얼마나 잘 살게 되었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불만스러운 것은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끊어진 감사의 줄을 찾아 진정한 감사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감사가 되려면,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어릴 때 목동이었던 아이가 자라서 나중에 나라 일을 크게 하는 후작이 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늘 자기가 어릴 때 양을 치던 곳을 자주 찾곤 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에 목동의 방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양을 치던 곳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양을 치면서 입었던 옷과 지팡이나 옛날 물건들을 진열하여 놓았습니다. 집을 방문하였던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보고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냄새나고 더러운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까? 불우하였던 과거는 아예 잊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이 말을 듣고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지금 후작이네. 내가 이런 것들을 자주 생각하지 않으면 교만하여 진다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내가 어떻게 후작이 될 수가 있겠는가?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리고 싶어서 늘 이런 것들을 보고 있다네”
본문 11절입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감사란 늘 풍족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한 가운데서도 감사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기억해야 진정한 감사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게 되고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금이 증식되고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하나님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본문의 내용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좋을 때도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지만 고통스러울 때도 그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억압에서 풀어 자유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새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부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언제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순간도 하나님을 잊지 말고 진정한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인도를 깨달으라
네비게이토 선교회에서 국제선교를 담당하는 리로이 아임스(LeRoy Eims) 목사가 시카고에서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 토론토로 가게 되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출발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탑승구가 저 멀리 있습니다. 또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승무원복을 입은 한 사람이 다가와 말합니다. “선생님!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임스가 말합니다. “예, 비행기 출발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제 손을 잡으세요. 안내해 드릴께요” 라며 그를 인도하였습니다. 아임스는 너무나 고마워 “누구십니까?” 라고 물었더니 그가 대답합니다. “저는 선생님이 가시고자 하는 토론토까지 비행기를 몰고 갈 기장입니다.” 그때서야 마음에 안도감이 생겼습니다. 조종사와 함께 있으니 비행기가 떠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 순간 아임스 목사는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으며,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곁에 안 계신 것 같지만 하나님은 가까이서 우리를 항상 인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이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는다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대신 감사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당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삶이 힘들고 어려우십니까? 그럴수록 자신을 의지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지나간 날들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고, 지금까지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의 손을 붙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의 손을 붙들어 여기까지 인도해 주심을 깨닫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달을 때 비로소 진정한 감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하라
웜즈의 회의(Diet of Worms)로 알려진 역사적 순간에 로마 교회 앞에서 자기의 뜻을 밝혔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서 있던 자리가 있습니다. ‘Here I Stand!’ 그곳에 가장 중요한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서 독일의 한 수도사가 선포하는 ‘은혜로만 구원받는다’ 는 교리를 들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루터는 홀로 일어섰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단호한 모습이었습니다. 루터가 교황, 고위 성직자, 추기경, 황제가 듣는 자리에서 말을 하기 직전에, 한 친구가 루터에게 물어왔습니다. '형제 루터여, 두렵습니까?' 그러자 루터는 이렇게 놀라운 대답을 하였습니다. “아닙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교황과 추기경 보다 더욱 대단하고 큰 교황인 내 자아입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교만해지려는 자아입니다. 자아를 겸손히 간수할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들어 쓰십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 힘으로 내 능으로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힘 주시고 능을 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감사는 내 능력과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을 주셨기에 가능했음을 고백할 때 이루어집니다.
본문 17절입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즉 내 힘이 아니고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힘과 능력을 주셨음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 하셨다는 깨달음으로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습니다” 라며 하나님이 능력이심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비로소 진정한 감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빙점’ 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는 은혜에 익숙한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라며 자신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하나님! 은혜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인도해주세요.” 그녀는 중병에 걸렸을 때 한 청년을 만나 전도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그 청년과 결혼을 했습니다. 병든 자신과 결혼을 해 준 그가 너무도 감사하여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몇 년을 같이 살다보니 별로 고맙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저 그랬습니다. 당연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남편에게 신경질도 내고, 화를 내고, 미워하기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은혜, 죄 가운데 나를 구원하신 은혜에 너무나 익숙하여 감사하지 못하고 있는 신앙이 아닙니까? 찬송을 들어도 기쁨이 없으며 기도를 해도 감격이 없는 신앙은 아닙니까? 짜릿한 것을 바라지만 얻지 못하여 불평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배의 타성에 젖어 열정을 상실한 채 시큰둥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이 모든 것이 은혜에 익숙한 나머지 감사를 놓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들입니다.
부디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진정한 감사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이 되었음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감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근본을 잊지 말라
신 8:11-18 / 황광민 목사
들어가는 이야기
1620년 12월 26일 플리머스 해변에는 감사의 대합창이 있었습니다. 메이플라워라는 배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에 막 도착한 146명의 청교도들이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모래를 하늘에 날리며 찬송을 부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위를 끌어안고 시편100편을 외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대 합창을 불렀습니다.
그들은 평탄한 중에 감사했던 것이 아닙니다. 180톤밖에 되지 않는 배였지만 그 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평균 시속2마일로 걷는 속도보다도 느렸지만 117일 동안 계속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드렸습니다. 항해 도중 두 사람이 죽었으나 한 아기가 새로 태어났음을 감사드렸습니다. 폭풍을 만나 큰 돛대가 부러졌으나 배가 파선되지 않은 것을 감사드렸습니다. 산더미 같은 파도에 휩쓸려 여자들이 바다에 빠진 적이 두 번 있었으나 모두 무사히 구출된 것을 감사드렸습니다. 그것은 평탄한 중에 좋은 결과로 인하여 부른 찬양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격상 하나님의 근원적인 은혜를 기억하고 부른 찬양과 감사였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근본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정착하고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될 때 하나님을 잊을까 염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풍족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능력으로 얻은 줄 알고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멀리할까 염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넉넉하게 되도록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라고 권면 하셨습니다. 오늘은 봉독한 본문을 중심하여 <근본을 잊지 말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풍족함과 신앙문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정착하고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될 때에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풍족한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데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12-14절). 생활이 풍부해지고 소유가 많아지면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국에는 여피(Yuppies)라는 집단이 있습니다. 신문은 여피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그들은 일류대학에서 경제학 석사를 마친 사람들로서 연간 1억이상 벌어들이고 최소한 BMW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주식과 부동산을 사들이고 여행과 좋은 식당을 드나드는 것을 기쁨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영적문제는 관심이 적으며 교회나 종교는 둘째 문제로 본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풍요롭게 살면 그것이 최고의 행복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육체를 즐겁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물질이 많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 중에는 물질의 복도 있습니다. 정당하게 일하며 번 돈이라면 많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쓸 수 있다면 물질이 많은 것이 문제될 것 없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벌어서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쓰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질 자체는 중성입니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어떻게 벌고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입니다. 또 물질 때문에 더욱 감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스페인 제국의 멸망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신앙과 물질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의 신세계 탐험의 이유는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대륙에서 황금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황금에 대한 욕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이 퇴색하고 말았습니다.
일례로 피자로(Pizarro)는 잉카 제국을 점령하고 왕을 인질로 잡아 방에 2m높이로 황금을 쌓아 놓아야 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전국적으로 황금을 모아 방안을 채웠습니다. 그러나 왕을 풀어주지 않고 왕이 황금을 좋아하는 이교도라는 죄목을 씌워 사형시켜 버렸습니다. 왕은 풍습대로 화형을 받았는데 불에 타 죽으면 지옥 간다는 전설 때문에 죽기 전에 세례를 받고 죽게 했다니 엄청난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질이 인간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영적인 일에 무관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다 천국이 저들의 것이다"고 하시면서도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물질이 일만 악의 근원"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물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신앙을 퇴색시킬 수 있기 때문에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보이셨던 염려였습니다.
물질의 풍요와 교만
사람이 물질을 많이 갖게 되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두렵건데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고 하셨습니다. 물질이 많아지고 삶이 풍요로워지면 교만해지고 결국 하나님을 떠나기 쉽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경계하여 물질이 풍요해지더라도 교만해지지 않고,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물질이 아무리 많아도 교만하지 마십시다.
인간은 물질이 많아지면 사람들 앞에서도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부자가 되었다고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뛰어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선 안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남을 내려다 볼 권리는 없습니다. 더욱이 물질 좀 더 가졌다고 다른 사람을 내려다 본다면 어리석은 짓입니다. 오늘의 부자가 내일의 가난뱅이가 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물질이 많아질 때 하나님 앞에서도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버리고 물질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돈이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돈은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 속담에 "돈이 말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폴란드인 속담 가운데는 "내게 돈이 있을 때 사람들은 나를 형제라고 불렀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돈은 위력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뿐 아니라 성도들도 돈의 위력을 과대평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물질을 의지하곤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날 동네에서 제일 가는 갑부와 한 가난한 사람이 거의 같은 시간에 랍비를 찾아와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조금 일찍 왔기 때문에 먼저 랍비의 방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가량 이야기하다가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가난한 사람의 차례가 되어 랍비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대화는 약 5분만에 끝났습니다. 그러자 가난한 사람이 항의했습니다. "랍비여, 부자가 들어왔을 때는 한 시간 가량 이야기 나누시더니 저하고는 왜 5분뿐입니까?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그때 랍비가 이렇게 대단하였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그런데 저 부자는 마음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무려 한 시간이나 걸렸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부자는 교만하여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부유해지면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서구사회는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교회는 반대로 텅텅 비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이 팽배해졌습니다. 육체를 즐겁게 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물질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가리워 잘못된 가치관을 갖고 살게 합니다.
근본은 잊지 말라
여기서 하나님은 근본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 것을 명하십니다. 삶이 풍요롭다고 육체적인 일에 즐기는 데 빠지지 말로 오히려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두렵건데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이끌어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14-16절).
그러므로 성도들은 현재의 풍요를 즐기는데 급급하지 말고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사건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홍해를 건네주신 것도 큰 은혜였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신 것이나 광야에서 만나오 메추라기를 먹이신 것은 다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셔서 정착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가 있었기에 오늘의 풍족이 있는 것입니다. 풍요를 누리기에 앞서 풍요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우리 민족도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왔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이스라엘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많은 시련이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습니다.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하나님께서 건져 주셨습니다. 공산주의 침략 때에도 지켜 주셨습니다. 오늘의 번영이 있기까지 하나님의 은혜는 대단히 컸습니다. 문화적인 성장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물을 받고 선물을 즐기는데 빠지면 안됩니다. 선물 주신 이를 기억해야 합니다. 선물이 거저 생겼겠습니까? 주신 이가 있습니다. 철없는 아이들은 선물만 알지 주신 이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철없는 성도가 되지 맙시다. 개들도 밥 주는 주인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풍요를 누리기에 급급하지 말고 정신을 차려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십시다.
또한 하나님은 물질을 얻도록 능력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십니다. "또 두렵건데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17-18절). 비록 우리가 수고하고 물질을 거두었다 할지라도 그렇게 할 수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물질을 얻도록 능력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철없는 자녀들은 장성하면 저 혼자 큰 줄 압니다. 돈 잘 벌고 출세하면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 압니다. 그때까지 부모의 돌보심이 없었다면 가능했겠습니까? 능력 있는 사람으로 키워주는 부모의 은혜는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을 어찌 성도가 잊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을 어찌 성도가 잊을 수 있겠습니까? 혼자 잘나서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석교 가족 여러분!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드립시다. 물질의 풍요 속에서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교만해져도 안됩니다. 오히려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려야 합니다. 또한 능력 주셔서 오늘의 복을 누릴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섭섭하지 않도록 기쁨으로 찬양하십시다.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감사의 예물을 드립시다. 늘 감사하며 기뻐하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십시다.
행복은 감사의 의지에 비례한다
신 8:11-18 / 김영헌 목사
며칠 전 교우들과 함께 야외를 나갔습니다. 벌써 단풍이 짙어 온 산야가 아름다운 색깔들로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있었습니다. 풍년임에 틀림없었습니다. 풍성한 곡식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가을이오면 생각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훌쩍 먼 여행을 떠나고 싶다 했고, 어떤 이는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는 문구가 떠올라 책을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가을이 오면 어머니의 손길이 그리웁고 멀리 있는 친구가 보고 싶다 했습니다. 어떤 이는 가을이 오면 낙엽을 밟으며 시를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가을이 무르익으면 두 가지 생각이 납니다. 하나는 풍성함에서 오는 행복감이요, 다른 하나는 추수감사절입니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추수감사절의 흥분이 제게는 있는 듯합니다.
낙엽을 밟으며 옷을 벗은 듯 맨몸을 드러낸 감나무의 발갛게 익은 감들을 보노라면 또 한 해를 무사하게 보살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가슴을 메우곤 합니다.
많은 이들이 가을이 오면 행복을 느낍니다. 넉넉한 가을이 주는 귀한 선물입니다. 또 가을이 오면 감사할 일들이 생각납니다. 어머니의 손길이 그리웁고 오랜 친구가 보고 싶은 이유가 이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도 행복과 감사는 함께 가는 것들인가 봅니다. 어떤 분의 책을 읽다가 감동적인 문장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행복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흔히 우리는 행복할 때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행복의 원인이 감사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느 영어책에서 같은 의미의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의 행복은 감사하는 당신의 능력에 직접적으로 비례한다.”
(Your happiness is directly proportional to your ability to be grateful.)
감사하는 능력이 행복을 만들어 내는 힘이라는 의미입니다. 너무 감동적이어서 오늘 설교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당신의 행복은 감사하려는 의지에 비례 한다”라는 문장이 여기서 왔습니다.
우리는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요, 공통적인 삶의 목적일 것입니다. “행복하세요”, “복받으세요”라고 인사하는 이유도 바로 행복한 삶이 가장 큰 소원이요 바램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집니까? 한 가지 대답밖에는 없습니다. “감사하세요! 그러면 행복해집니다.” 옳습니다. 결혼식 주례 때마다 제가 신혼부부에게 부탁하는 권면이 있습니다. ‘작은 친절에 늘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아내의 작은 친절, 예를 들면 차 한잔을 주었을 때, 넥타이 한번 매어주었을 때, 따뜻한 밥상을 차렸을 때, “여보, 감사해요!”라는 감사의 표현은 아내에게 큰 행복을 느끼게 합니다. 남편이 콜라병 뚜껑 하나를 따주어도 “감사해요!”하면 남편은 행복을 느낍니다. 이와 같이 감사의 표현은 행복을 만드는 기계입니다.
더구나 감사는 상대방에게 삶의 에너지를 만들어준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감사할 때 그가 감동을 받고, 감동은 또 다른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에너지는 삶을 왕성한 활력이 넘치게 하고 행복을 만들어 줍니다. 따라서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해진다는 말은 옳은 표현입니다. 감사가 없으면 행복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감사는 무엇입니까?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감사는 하나님에게 의지하며 살았던 일들을 궁극적으로 기억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셨던 그 은혜의 날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감사입니다. “추수감사절”을 큰 명절로 지키는 서양 국가들은 추수감사절기가 모든 휴일들 가운데 가장 위험한 날이라고 말합니다. 너무 많이 먹어서 배탈이 가장 많이 나기도 하고, ‘가족모임’(Family Reunion)이 우리의 추석명절 때처럼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날이라 밤 지새워 놀다가 피곤한 몸으로 운전을 하기 때문에 자동차 사고가 제일 많이 나는 날이기도 합니다. 미국에서는 추수감사절 다음 날이 ‘빅 세일’(Big-Sale) 기간이어서 돈을 가장 많이 쓰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래저래 추수감사절은 위험한 날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위험한 것은 다른 것에 있습니다. 물질문명의 발달은 우리에게 무신론적 사고를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우리의 번영, 우리의 좋은 삶, 우리의 많은 축복들, 이런 모든 것들이 자신의 손으로 이뤄냈다는 젊은이들의 마음이 가장 큰 위험이라고 어떤 사회학자가 지적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부모도 없습니다. 선배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없습니다. 오직 제 힘만 믿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신명기의 말씀은 그런 위험을 경고하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집트 왕 바로의 폭정 아래에서 이스라엘은 노예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울부짖는 고통을 들으시고 직접 모세를 보내셔서 출애굽 시켰습니다. 그들이 광야를 지날 때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원수들이 그들의 앞길을 막을 때 하나님이 직접 원수들을 패퇴시켰습니다. 심지어는 태양을 멈추면서까지 이스라엘을 보호하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예비하시고 이스라엘을 그 땅의 주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방족속들이 쳐들어오면 하나님이 천군천사를 보내어 격퇴시켜주었습니다. 샘물이 솟게 하고 푸른초장을 이루게 하시고 양과 소를 기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삶에 간여하셔서 번영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풍족한 삶을 누리는 그들의 기억에서 하나님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잊고 있었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능력과 수고만 앞세웠습니다.
하나님을 잊을 때는 나쁜 시기가 아닙니다. 좋은 시기입니다. 좋을 때는 우리의 마음이 너무 많은 것들에 의해 점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자만도 거기서 나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은 제 능력으로 모든 것을 얻었고 제 재주로 잘 살게 되었다고 자만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이렇게 꾸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신 8:17-19)
아무리 재주가 좋고 머리가 좋아도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태어날지, 언제 태어날지에 대해 내 마음대로 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프리카에 태어났을 수도 있고 지난번 지진으로 폐허가 된 중국의 쓰촨성에 태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날마다 폭탄을 피하느라 공포 속에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대한민국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 맘대로 부모를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학교나 담임선생님을 우리 맘대로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좋은 학교에서 별탈없이 공부하며 성장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온갖 전염병이나 장애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여기 앉으신 분 가운데 60대 이상은 6.25전쟁의 환란 가운데 있었던 분들입니다. 어쩌면 오늘의 내가 될 수 없었던 환경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모두 생존해서 오늘의 “나”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아무도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나는 어떤 환경 중에서도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나는 절대로 죽거나 병들거나 손상되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장담할 수 있는 분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스스로 만들어진 사람’(Self-made man/woman)은 하나도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하신 일이 없다고 여긴다면 여러분처럼 재수가 좋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재수나 행운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졌던 행운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오늘 알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무지한 교만에 빠집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신 8:17)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외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8:18)
둘째로 감사는 행복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인생의 덕목입니다. 에모리대학교의 후레드 크레독 교수(Dr. Fred Craddock)는 아직도 자기의 두 아이들이 어리고 천사들이 방문하여 아이들에게 한 가지 덕목을 줄 수 있다고 한다면 의심없이 감사하는 아이들이 되게 해 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감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 중에 시기를 하거나, 잔인하거나, 남을 증오하거나, 또는 생색을 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을 둘로 나누어 본다면 감사하는 사람과 감사하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요,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백만장자 존 템플톤 경(Sir John Templeton)은 부를 이루는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서슴없이 “감사입니다. 만일 당신이 감사할 줄 모르면, 당신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느냐에 관계없이 부자는 아닙니다”고 답변하였습니다.
리챠드 칼손(Richard Carlson)은 ‘작은 것에 땀 흘리지 말라’(Don't sweat the small stuff)는 책에서 좋은 제안을 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마음속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아침을 맞이한다면 그날 하루의 일은 언제나 기쁨과 축복으로 넘쳐날 것이라 했습니다.
감사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이유가 감사해야 할 일이 도무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감사는 그냥 느껴지거나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감사할 것을 찾으려 할 때 찾게 되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기르려면 감사할 일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야 합니다. 감사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감사할 것을 찾아 나서면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이 보여 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감사는 선택입니다. 우리는 감사절기 때마다 감사할 일들을 일지로 적어서 드리게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기르는 훈련을 위해서입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지나갔을 때 뉴올리언즈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집과 재산을 잃은 수재민들은 언론의 인터뷰에서 허리케인의 참혹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정부를 비난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비난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불만을 터트렸습니다. 그때 한 젊은 여성이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같은 수재민인데도 그녀의 얼굴은 빛이 났고 미소가 아름다웠습니다. 기자가 “어떤 점이 힘듭니까?”고 묻자 그녀는 말했습니다. “힘들지 않아요. 저는 불평하러 나온 게 아닙니다. 터럭하나 다치지 않게 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러 나왔어요. 하나님이 애들까지 무사히 지켜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전기와 수도가 끊기고 교통수단이 마비된 암흑의 상황에서 그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물론 전력은커녕 아예 집 전체가 홍수에 떠내려갔어요. 제가 가진 것들을 말해볼게요”하고는 그는 성경을 집어 들었습니다. “제게는 희망과 기쁨과 평안이 가득해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제 편이십니다” 여자의 얼굴은 더욱 환해졌습니다. 이 여자는 비통하고 불행한 상황에서 오히려 감사를 선택하였습니다. 상황이 아무리 암울해 보여도 믿음을 갖고 감사를 선택하면 희망이 보입니다. 평안이 옵니다. 행복이 찾아옵니다.
영어단어 중에 감사(gratitude), 사랑(love), 존경(respect)은 같은 의미의 뿌리를 갖고 있는데 “자기의 의지적 선택과 노력으로 얻어지는 열매들”이라는 것입니다. 저절로 느껴지거나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의지적 결단과 선택, 그리고 노력해야 만이 찾아오는 단어들이라는 말입니다. 감사를 선택해서 인생의 중요한 덕목을 길러 행복을 얻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감사는 소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옵니다. 감사는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는 물질적 소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마음에 무엇을 가졌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믿음을 가졌으면 감사가 나옵니다. 은행계좌에 많은 돈을 가졌다 해서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창고에 곡식들이 가득 찼다 해서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물질은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Things will make us happy).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이거나 절대적이 아닙니다. 항구적이지도 않습니다. 잠시 행복감을 주는 것뿐입니다. 엄청난 물질을 갖고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비율로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감사는 소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신앙인들은 감사할 줄 압니다. 어떤 환경 중에서도 먼저 감사할 줄 압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박국의 고백을 가슴에 담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하박국 3:17-19)
왠지 아십니까? 감사할 때 모든 걱정, 근심, 염려, 환난을 비범한 축복의 기회로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가 넘치는 가정은 큰 걱정거리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의 재료들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미래를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행복의 열쇠는 하나님이 갖고 계시거늘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비결은 바로 감사입니다. 따라서 행복해지고 싶습니까? 감사하십시오. 복 받고 싶습니까? 감사하십시오. 건강해지고 싶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풍성한 은혜, 풍성한 삶을 누리고 싶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감사는 당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 것입니다.
복 받은 후에 오는 위험
신 8:11-18 / 김홍도 목사
전에 핵주먹을 가진 무적의 챔피언 타이슨(Tyson)이 더글러스(Douglas)와의 대전에서, 틀림없이 타이슨이 이기리라고 예상했으나, 맥없이 무너져 더글러스가 승리했습니다. 그때 동양 챔피언이었던 정 집사님께 왜 타이슨이 졌느냐고 하니까 “힘이나 주먹 못지않게 사생활이 중요합니다. 사생활이 문란해지면 아무리 장사라도 지고 맙니다. 타이슨은 싸울 때마다 계속 승리해서 명예가 올라가고 돈을 많이 버니까, 본처와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전처가 다른 사람과 결혼도 못하게 하고 여자 관계가 복잡해져서, 삼손이 머리깍인 것처럼 그만 맥없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또 E.T. 영화의 주연이었던 베리모어(Drew Barrymore) 양도 인기가 올라가고 돈을 많이 버니까, 9살 때 나이트클럽(night club)에 다니고, 10살 때 마리화나를 피웠고, 12살 때는 코카인(cocaine)을 흡입했습니다. 후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고, 마약에 중독되어 폐인이 되었습니다. 베리모어 양은 “ET 때문에 인기가 올라가고 유명해지면서부터 내 인생의 방향은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와 같이 성공과 복 받은 후에는 더 큰 위험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성공해도 복 받은 후에도 타락하지 않고 복된 생활을 살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끝내고, 꿈에도 그리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하나님이 경고하신 말씀을 보면, 신명기 8장 11절에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찌어다”, 12~14절에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또 17~18절에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라고 경고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평안히 살 때에 경고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방신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배반했던 것입니다. 복 받고 타락할 바에는 복을 안 받는 편이 낫고, 성공하고 나서 교만해지고 부패할 바에는 성공하지 못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① 애굽에서 이끌어 내심을 기억하라.
② 위험한 광야에서 보호하셨음을 기억하라
③ 낮추시고 시험하사 마침내 복을 주려 하셨음을 기억하라
④ 번영한 다음에 하나님이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을 기억하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1. 부강했다가 타락한 왕들
초대 왕 사울 왕은 잘 앎으로 생략하겠습니다.
① 요아스 왕
요아스 왕은 여호사밧 왕의 아들 여호람의 손자이며 아하시야의 아들인데, 여호사밧 왕이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 아합 왕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를 며느리로 즉, 여호람 왕의 아내로 데려왔는데, 그 아달랴는 그 어미 이세벨을 닮아서 악한 여자였습니다.
이 아달랴가 아들 아하시야가 죽자, 자기가 6년을 섭정하다가 권세를 놓지 않으려고, 손자들을 다 목 베어 죽이는 가운데, 이 요아스를 죽이지 못했는데,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몰래 숨겨두었다가 후에 왕이 된 것입니다.
역대하 24장 2절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여호야다는 요아스가 왕이 될 때에 구테타를 일으켜 아달랴를 내쫓은 공로자입니다. 그는 타락한 성전을 증수하고 많은 금, 은을 성전에 드리게 하고 나라를 크게 부흥시켰는데, 위대한 영적 지도자 여호야다가 130세에 죽자 요아스 왕은 타락하기 시작하여, 여호야다의 아들 제사장 스가랴를 죽이고, 성전을 버리고f 우상을 숭배하고 온갖 가증한 죄를 다 지었습니다.
역대하 24장 17~19절에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의 말을 듣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저에게 보내사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저에게 경계하나 듣지 아니하니라”했고,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20절에 “…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라고 할 때에, 왕이 백성들을 시켜 스가랴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스가랴는 자기를 왕이 되게 한 여호야다의 아들입니다.
예수님도 이 스가랴의 피를 말씀하시며 분격해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가랴가 죽은 지 1년 후에 아람 군대가 쳐들어와 요아스를 침상에서 쳐 죽였습니다. 축복을 많이 받고 배반한 요아스의 죄가 아합 왕의 죄보다 더 크고 괘씸하게 보여집니다.
② 웃시야 왕
웃시야 왕은 물웅덩이를 많이 만들고, 망대도 많이 세우고, 육축을 많이 키우는 등, 농업정책을 잘 세워 부강해지고, 강한 군대도 두어 암몬사람들한테 조공도 받았습니다. 공교한 기계를 만들어 방패, 창, 갑옷, 활 등을 만들어 강한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부강해 지고 나니까, 교만해지고 고집이 세져서 하나님의 종들의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역대하 26장 16절부터 보면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그때 제사장 아사랴가 용맹한 자 80명을 데리고 들어가서 “…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이 왕의 할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의 할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하자, 웃시야가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다가 손을 들어 노를 발하니, 웃시야 왕이 노를 발하는 순간 웃시야 왕의 이마에 문둥병이 발했습니다. 그러자 제사장들이 그를 쫓아내어 별궁에 거했는데, 죽는 날까지 별궁에 홀로 거했다고 했습니다(대하 26:16~21).
③ 히스기야 왕
대하 29장 2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는 성전을 수리 하고 성결케 했습니다. 영적인 큰 부흥을 일으켰고, 나라를 크게 부흥시켰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중단했던 십일조도 드리게 했습니다.
역대하 31장 20~21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무릇 그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 하나님을 구하고 일심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는 죽을 병에 걸렸을 때 통곡하며 기도해서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하시며 병을 고쳐 주셔서 15년을 연장시켜 주시고, 앗수르 군대를 다 진멸시켜 나라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역대하 32장 25~26절에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죽을병에 걸렸다가 고침 받았을 때, 바벨론에서 축하 사절단이 왔을 때,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간증을 하지 않고 뽐내고 으스대면서, 궁중 보물과 은금과 향료와 기름창고 무기창고를 다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 39장 5~6절에 “…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하셨는데, 후에 그대로 되었습니다. 왜 그들이 부강해진 자음에 범죄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을까요?
ⓐ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사울 왕도 요아스도, 웃시야도 히스기야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다음에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신 8:11~18).
ⓑ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교만해지면 목이 곧아서 말씀에 불순종하게 됩니다.
사무엘상 15장 23절에 “…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역대하 36장15~16절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 사자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그 백성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며 그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로 그 백성에게 미쳐서 만회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하며 멸망했다고 했습니다.
ⓒ 하나님의 종들을 멸시하고 비웃었기 때문입니다.
좀 전에 읽은 말씀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시 105:15).
ⓓ 은혜에 감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공하고 복 받으면 제가 잘나서 된 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다가 비참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 충만 은혜 받고 난 뒤에 목사말도 안 듣고 예언한다고, 안수한다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고, 물질 축복 받고 난 뒤에 교만해지는 사람도 있고, 권사가 장로가 되고 난 뒤에 교만해져서 말 안 듣고 목사에게 대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2. 복을 받고 더 크게 받은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100세나 되어 아들 이삭을 받은 후에, 너무 귀하고 사랑스러워서 마음의 제일 첫 자리에 하나님 대신 이삭이 올라왔던 것 같습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데, 100세나 되어 얻은 아들이 너무 귀해 이삭이 마음의 지성소에 올라앉았던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큰 시험을 주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자기 생명보다 귀한 독자를 모리아산으로 가서 번제로 잡아 제사 드리라는 명령이었습니다(창 22:1~5). 아브라함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거나 항변할 수 있었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3일 길을 가서 칼을 들어 치려 할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창세기 22장 12절에 “…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하시고, 예비하신 수양이 수풀에 걸려 있는 것을 잡아 제사 드리고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 즉, “하나님이 준비하셨다”고 그곳 이름을 지었습니다. 100세나 되어서 축복으로 받은 독자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이 차지해야 될 마음의 첫 자리, 마음의 지성소에 이삭이 차지하여, 하나님이 시험해 보았는데, 아브라함은 합격하여 수양을 대신 잡아 제사 드리고, 내려와서 더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때에 독자에게 집착하여 불순종했으면, 축복도 끝나고 복의 근원도 되지 못했을 것이고, 믿음의 조상도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때 그 복을 주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의지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이 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께 등 돌리고, 그 물질이나 그 사람에게 집착하여 그 것들이 하나님 대신 우상이 되고 마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3. 세상 물질을 포기하고 더 큰 사명을 받은 베드로
베드로(Peter)는 불학무식한 어부였지만, 영성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물을 깁고 있는 베드로를 보고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그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했을 때, 배와 그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용감히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5장에 보면,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못 잡고 돌아왔을 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실 때, 순종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순종했더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혔습니다.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을 손짓하여 불러서 나눠 가졌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수지맞았다고 펄쩍펄쩍 뛰며 좋아하지 않고, 또 앞으로 예수님을 이용해서 돈 많이 벌어야 되겠다는 생각도 한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 5장 8절에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물고기 잡힌 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 복을 주신 주님께 더욱 집착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빛나는 사람 낚는 어부, 영혼을 구원하는 대 사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이용해서 명예와 재물을 얻으려다가, 주님을 은 30냥에 팔아먹고 목매달아 자살한 것과 얼마나 대조가 됩니까?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11-18 / 박상훈 목사
뜻깊은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향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흠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미국에서 큰 병원을 개업을 하고 있는 어떤 의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의 병원에 특별한 환자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 환자는 병원에 올 때마다 여러 사람의 경호원들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그 사실로 보아서 그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거나 또는 대단히 돈이 많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는 아랍 계통의 어느 나라의 왕자였습니다. 곧 그 나라의 왕이 될 신분이었습니다. 의사는 그 사실을 알고서 온갖 정성을 다해서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 결과 그 환자의 병은 깨끗하게 나아서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진료비를 청구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의사의 마음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그에게 얼마를 청구해야 될는지 제대로 판단이 서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한 나라의 왕자요, 곧 그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니까 그것으로 족하게 생각을 하고 무료로 해 주는 것이 좋을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지금까지 온갖 정성을 다해서 그를 치료해 주었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비싸게 청구를 해야 될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50불 정도만 청구를 할까, 아니면 500불, 아니면 이왕 청구하는 김에 좀 비싸게 5,000불 정도를 청구해 버릴까? 그는 그 문제를 놓고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 목사님에게 그 문제를 상의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목사님에게 설명을 다 드리고 나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럴 경우에 제가 얼마를 청구하면 좋겠습니까?"
목사님은 가만히 생각을 하다가 그에게 한 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목사님이 가르쳐 주신 방법이 지혜롭다고 생각하고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진료비 청구서에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당신의 신분에 걸맞게 지불해 주십시오."
그리고서 그 청구서를 그 환자에게 보냈습니다. 며칠 뒤에 그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덕분에 건강하게 되었다는 감사의 글과 함께 수표 한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금액은 자그만치 7만 달러였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8천만 원에 이르는 많은 돈이었습니다. 의사는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기쁜 소식을 알렸습니다.
며칠 뒤에 의사에게 한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교회 목사님이 보낸 편지였습니다. 그 안에는 자그마한 쪽지 한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당신의 신분에 걸맞게 하나님께 감사 헌금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거기에는 감사 헌금 봉투도 한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받은 바 은혜에 따라서 당신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라는 뜻이었습니다.
어떤 부잣집에 외동아들이 중병에 걸렸습니다. 절망적이었습니다. 병원에서도 그의 병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붙들고 자기 아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아이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부자는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최고급 호텔에 있는 일류 레스토랑으로 초대해서는 좋은 음식으로 대접을 했습니다. 그는 주일날 하나님께도 감사의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가 감사 헌금으로 드린 액수는 고작 2만원뿐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음식값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금액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신분에 걸맞지 않는 감사를 하나님께 드린 셈입니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은혜는 컸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드린 감사는 쥐꼬리보다도 작은 형식적인 감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뜻깊은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우리가 여태껏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일에 쫓기다보니 여태껏 한 번도 제대로 된 감사,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감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오늘만이라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제대로 된 감사,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감사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를 제목으로 삼고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00년 동안이나 종살이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축복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감사의 이유는 출애굽의 은혜였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는 죄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사탄의 권세에 얽매여서 살았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장차 하나님 나라의 모든 영광을 영원히 누리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구원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하루는 길을 걸어가고 잇었습니다. 목사님은 길을 건너기 위해 신호등 앞에 잠시 멈추어 섰습니다. 그때 한 청년이 목사님 앞으로 다가오더니 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교회에 출석하는 청년입니다. 저는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평소에 성경을 읽으면서 늘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목사님에게 좀 여쭈어보고 싶은데 대답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목사님은 빙긋이 웃으면서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지요, 제가 아는 범위에서 대답해 드리지요? 무엇이 그렇게 궁금하십니까?"
그때 청년이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필이면 가룟 유다처럼 자기를 배반할 사람을 자기의 제자로 삼으셨습니까?"
그때 목사님은 빙긋이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글쎄요. 저도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런데 사실 제게는 그것보다도 훨씬 더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있답니다."
청년은 그 말을 듣고서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처럼 늘 믿음으로 사시는 분에게도 궁금한 것이 있으십니까? 그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목사님은 웃으시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늘 궁금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왜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해주셨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청년은 목사님의 그 말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우리에게는 가룟 유다가 문제가 아닙니다. 가룟 유다보다도 더못한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은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구원의 은혜를 깊이 생각한다면 다른 것은 절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과 구원의 감격만 회복이 되면 저절로 다른 문제는 쉽게 풀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405장은 이렇게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그렇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큰 죄악에서 건지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절로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부자가 절망적인 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곧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큰 대학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차도가 있어서 다행스럽게도 그의 몸이 점점 좋아졌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퇴원을 하게 될 때, 그 대학병원에 연구기금으로 5억 원을 희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 주일이 지났습니다. 그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5억 원은 너무 많으니까 절반 정도만 희사를 해야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의 병이 완쾌가 되어서 퇴원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 부자는 일억 원만 희사하기로 또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때 그의 양심이 그를 질책했습니다.
'이놈아, 네가 죽게되었을 때는 너의 재산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게 생각을 하더니 이제는 살게 되었다고 또 욕심을 부린단 말이냐? 이 못된 놈아! 그러다가는 네가 퇴원할 때는 아예 입원비조차도 깍아 달라고 하겠구나!"
그 소리를 듣고서 그는 마음을 뉘우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 생각했던 5억 원의 두 배가 되는 10억 원을 그 병원에 희사하고서 퇴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감사가 식었습니까? 구원의 기쁨,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다시 한번 구원의 기쁨과 구원의 감격을 뜨겁게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는 형통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12∼14절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사람이 배가 고프면 코가 예민해집니다. 그러나 배가 부르면 자동적으로 코가 무디어지기 마련입니다. 영적인 견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절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형통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우리가 흔히들 착각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이런 인사를 했다고 가정을 해보십시다.
"축하합니다. 얼마나 기쁘세요?"
그러면 대개는 어떻게 얼버무립니까?
"뭘요,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요."
우리는 그러한 말이 마치 겸손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겸손이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교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될 때, 형통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하지 않는 것을 바로 교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7∼18절입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축하합니다. 얼마나 좋으세요?"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렇게 인사를 한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대답을 해야 되겠습니까?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우리는 형통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 임금을 한번 생각을 해 봅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왕좌에 올랐습니다. 그는 백향목 궁에 평안히 거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형통할 때 그는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단 선지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좋은 궁에서 평안히 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궤는 아직도 낡은 천막 속에 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옳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궁전보다도 훨씬 더 좋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서 그 속에 하나님의 궤를 보관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의 마음을 보신 하나님은 너무너무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 언제 너더러 성전을 지으라고 말하더냐? 내가 언제 너에게 휘장 속에 거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말하더냐? 그런데 네가 어떻게 그와 같이 기특한 생각을 다 했단 말이냐?"
다윗은 형통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아름답게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존귀케 하셨습니다. 그와 그의 자손 대대로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형통할 때에, 평안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쓴 글을 인용해봅니다.
"당신은 복 받은 사람."
당신 개인 소유의 성경책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복 받은 것입니다. 세상 인구의 3분의 1이 성경을 한 권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당신이 오늘 아침에 건강하게 일어났다면 당신은 복 받은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십만 명이 아침에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전쟁의 위험이나 감옥 생활이나 고문이나 기근에 고통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복 받은 것입니다. 세상에는 거의 5억 명이 그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당신이 위협이나 체포나 고문을 당하지 않고 교회에 갈 수 있다면 당신은 복 받은 것입니다. 세상에는 30억 명의 사람들이 교회와 동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당신의 냉장고에 음식이 있고 따뜻한 옷과 살 집과 잠잘 곳이 있다면 당신은 복 받은 것입니다. 세상 인구의 75%가 그렇지 못합니다.
당신의 통장에 생활비가 있고 지갑에 용돈이 있다면 당신은 복 받은 것입니다. 당신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 상위 8%에 속한 사람입니다.
만일 당신이 어제도 오늘도 기도했다면 복 받은 것입니다. 비록 소수에 속하지만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사람입니다. 거기에 죄 용서와 평안과 영생의 보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다윗처럼 형통할 때에, 평안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는 곤고할 때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형통할 때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되지만, 곤고할 때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15∼16절 말씀입니다.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은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는 그들을 해하는 불뱀과 전갈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곳은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목축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까? 그들을 골탕을 먹이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었습니다.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에서도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전체를 책임지시고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주릴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들이 목말라 할 때 하나님은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셔서 그들의 갈한 목을 축여주셨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갈 길을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을 띄우셨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을 띄우셔서 그들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던 40년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 아니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돌보시고 책임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지금까지 광야와 같은 인생 길을 걸어왔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무사히 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에벤에셀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해서 광야와 같은 인생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그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은 마침내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자동차 왕이라고 불리는 헨리 포드가 한 번은 어떤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포드의 나이가 78세로서 백발이 성성할 때였습니다. 기자는 포드의 얼굴을 보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의 얼굴이 그렇게나 온화하고 평온하게 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자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은 큰 기업을 운영하면서 이런 저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와 같이 곱게 늙으셨습니까?"
그때 헨리 포드가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 가운데서 모든 것을 섭리해 가신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 왔습니다. 따라서 내 앞에 어떤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그 속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 왜 내가 걱정하고 염려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나는 아무리 위기의 상황을 맞이했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언제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가 늘 감사하면서 살아온 것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평온한 삶을 살 수 있게 만든 근본적인 이유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행복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할 때 절로 우리에게 행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잊지 맙시다.
여기에 어떤 글을 한 가지 더 인용하겠습니다.
"하나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고독하고 외로운 것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도록 들어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의 교만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돈이 떨어지고 사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사게 하신 것도 감사합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이 공부를 기대만큼 안 하고, 아내가 미워지고, 어머니와 형제들이 짐스러워질 때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저의 우상이 되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허무를 느끼게 하고, 때로는 몸이 늙고, 아프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그럼으로 인하여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부정이 득세하는 세상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제게 잘못하고 저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그럴수록 더욱 겸손해지고 더욱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밤, 잠 못 이루고 뒤척이게 하신 것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병들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을 더욱 감사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곤고할 때도 얼마든지 그 속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뜻깊은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가 구원의 기쁨과 구원의 감격을 다시 한번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십시다. 기도할 때도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찬양할 때도 감사함으로 찬양하고, 헌금을 드릴 때도 감사함으로 드리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도 감사한 마음으로 받으십시다. 우리는 형통할 때도 감사하지만, 곤고할 때도 변함 없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뜻깊은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향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잊지 말라
신 8:11-19 / 박경수 목사
목적:하나님 없는 풍요는 저주이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 소유하는 것이 참 행복이다.
오늘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요단강 건너 가나안이 보이는 모압 평지에 모아놓고 선포했던 설교이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말씀의 반복’이란 뜻이다. 시내산 언약의 주역인 구세대가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된 후, 신세대가 가나안 정복의 주역으로 등장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재교육하려는 의도에서 쓰인 성경이다.
이것은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세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방법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날의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지침서로 삼으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해야 할 첫 번째, 여호와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는데,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다윗은 주변 대부분의 나라를 정복했다. 정복하기 위해서 굳이 자기가 나서지 않아도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하는 부하들이 알아서 다 해준다. 먹고 굶주리던 시절 갈급해하던 모습이 더 이상 다윗에게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행한다. 사람은 이상하게도 편안하면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신앙의 최대 적이다.
라디오가 전파를 잡아내는 일에 민감함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존재의 의미가 없다. 남편이 아내와 자녀들을 향한 민감함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존재의 의미가 없다. 성도가 하나님을 향한 민감함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존재의 의미가 없다. 다윗은 너무 편한 나머지 하나님과 자기와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민감함을 잃어버렸다.
모세는 광야에서 태어난 신세대들이 하나님을 향한 민감함을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 없는 부와 권력과 명예의 소유는 축복이 아닌 저주이기 때문이다. 히스기야가 신앙의 절정에 있을 때에 차라리 생명을 잃었다면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존귀한 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생명은 연장되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세상에서 부끄러운 자가 되었다.
베냐민의 불량배들이 레위인의 아내를 집단 강간했다.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범죄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있지만,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없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전혀 양심에 꺼리지 않는다. 다른 11지파가 연합하여 베냐민, 한 지파와 전쟁을 벌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베냐민 한 지파를 이길 수가 없었다. 11지파는 모여 눈물을 흘리며 금식하며 회개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자가 되었다. 그때 비로소 베냐민 지파를 이길 수가 있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신세대에게 요구한다. 여호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신앙의 능력이 강하다. 먹을 것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소유가 많아질 때가 오히려 신앙의 위기의 순간이다. 하나님 앞에 특별히 기도할 제목을 잃으니 기도해도, 찬송을 해도, 말씀을 들어도 특별한 갈급함이 없다. 기도하는 것이, 찬송하는 것이, 예배드리는 것이 지겹다. 위기이다. 갈급함이 없는 신앙은 힘이 없다. 위기이다.
풍요는 하나님을 향하던 눈을 어느 새 자기 자신과 물질로 돌리게 한다. 풍요 자체가 나쁘지 않다. 풍요 속에서 사람은 어느덧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사라지게 된다. 육체의 안락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사라지게 한다면 문제이다. 하나님의 위로가 아닌 세상의 위로를 더 우선적으로 갈급해 한다. 세상이 떠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하나님께서 떠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둔감해도 너무 둔감해진다.
솔로몬이 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가 할 일은 너무 많았다. 해결해야 할 문제, 싸워야 할 적들이 너무 많았다.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솔로몬은 자기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솔로몬이 할 수 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기도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천 번제를 드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몸이, 삶이 편안해진 다음이다. 더 이상 일천 번제를 드릴 열심을 품을 이유가 솔로몬에게는 없었다. 지혜의 왕이던 솔로몬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당연하다고? 그것은 교만이다. 교만은 곧 타락의 시작이다.
밥 먹는 것이 당연한가? 숨 쉬는 것이 당연한가? 부모와 사는 것이 당연한가?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진 것이 당연한가? 우리의 마음이 교만하다. 당연한 것이 아니다. 감사한 것이다. 은혜이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은혜이다. 감사이다. 당연한 것을 은혜로 받는 사람이 겸손하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메마른 사막을 지나도록 하셨다. 그 땅은 독사와 전갈로, 그리고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좋은 길, 빠른 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죽음의 땅으로 지나도록 하셨을까? 이스라엘을 낮추시기 위함이다. 겸손을 배우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순종을 배우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요리 경력 75년의 오노 지로(84)씨와 47년 경력의 미즈타니 하치로(62)씨가 운영하는 도쿄의 초밥집이 미슐랭 가이드로부터 별(★) 셋을 받았다. 오노지로가 운영하는 별 셋인 식당에서 식사 한 번 하려면 3개월 전에 예약해야 한다니, 두 사람은 초밥왕으로 세계 공인을 받은 셈이다.
미즈타니씨는 오노씨 밑에서 초반 4년 동안은 화장실 청소만 했다. 그 길로 나갔어도 일가를 이뤘을 세월이다. 그 기간에 청소 대신 초밥을 배웠더라면 어찌 됐을까? 초밥 대감은 몰라도 초밥왕은 되지 않았을 것 같다. 왜? 그랬더라면 그의 초밥은 손끝의 기술, 손바닥의 초밥에 머물렀을 것이다. 화장실 청소야말로 그의 초밥을 마음의 초밥, 혼의 초밥으로 이끈 참스승이라고 후에 고백한다.
속도의 시대가 되다 보니 모든 것이 가볍고 빨라졌다. 겉은 화려해지고 기교는 진보했지만 속은 허하기만 하다. 날림의 손재주, 말재주가 날뛴다. 먼 길을 가려면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하고, 오래 달리려면 기초체력이 튼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몇 발자국 내딛지 못하고 쓰러진다.
기독교인의 고난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낮추시고 시험하시어 축복의 가나안을 주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안 중에도 감사해야 하지만, 환란 앞에서는 더욱 감사해야 한다. 고난 그 자체는 불행같이 보이고 슬퍼 보인다. 그러나 그 배후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축복이요, 은혜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생각하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다.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고통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뜻이다.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절호의 기회라는 뜻이다. 그래서 서양 격언에는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노래를 잃어버린다.”고 했다. 삶에 고뇌가 있을 때 진지한 시와 노래가 나오기 때문이다.
다윗은 전쟁을 치르는 그 한복판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도다.”(시 23:1~2)라고 노래한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3~4)라고 노래한다.
사도 바울은 그가 지닌 육신의 고통 때문에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 드렸다.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다. 죽은 자를 살리기도 했다. 그런 그가 세 번이나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지만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지내야 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사도 바울에게 들린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목적을 이끄는 삶”의 저자 릭 워렌 목사님의 건강은 매우 좋지 않다. 어려서부터 학교에 가면 조퇴하기 일쑤였다. 아드레날린이 너무 많이 분비되는 병이다. 그때마다 앞이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기도 한다. 설교문이 보이지 않고, 예배당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아픔으로 늘 고통을 당했다.
그런 그가 한 가지의 조치를 취했다. 중보 기도팀을 만들어 자기가 예배 도중에 쓰러지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기도팀의 기도 덕택에 지금의 자기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세만 해도 1년이면 수십억 원이 넘는다. 그런 그가 아쉬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이유가 하나 없다. 그러나 그는 목회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건강 상태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그는 세계 곳곳을 누비는 최고의 영향력을 끼치는 목회자이다. 그가 자기의 능력을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약함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 오히려 나의 강함이 그리스도를 멀리하게 만든다. 나의 부요함이 그리스도를 외면하게 만든다. 나의 약함과 가난이 그리스도를 기뻐하고 환영하였다면 그것이 은혜요, 축복이다.
우리는 환란 중에 감사해야 한다. 환란은 교만한 마음을 겸손하게 만든다. 하나님을 떠난 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게 만든다. 형식적 기도를 간절한 기도로 만든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을 보게 된다. 환란을 감사하면 축복이 된다. 그러나 불평을 하면 저주가 된다.
다이아몬드는 무색투명할수록 가치가 높다고 알려져 있지만, 진한 색의 다이아몬드는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훨씬 더 비싸게 거래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노란 다이아몬드 ‘버드 온 어 록’은 220억 원의 보험에 가입됐을 정도다. 흥미롭게도 컬러 다이아몬드가 만들어진 비결은 ‘결함’과 ‘불순물’에 있다.
다이아몬드는 탄소 원자가 정팔면체 형태로 배열돼 만들어진다. 그런데 탄소 대신 다른 원자가 많이 섞여 있거나 분자 구조에 결함이 있을 때 다른 색이 나타난다. 노란 다이아몬드에는 질소가 섞여 있다. 다이아몬드 결정이 만들어질 때 땅 속에 풍부한 질소가 쉽게 탄소 대신 끼어든다. 보석용 다이아몬드의 98%가 질소 원자를 함유하고 있다.
‘가진 자는 죽음에 이른다.’는 저주로 유명한 ‘호프 다이아몬드’의 푸른색은 붕소 때문이다. 붕소는 땅 속에 적게 분포해 다이아몬드 결정에 드물게 포함된다. 흡수되지 않고 반사된 빛이 우리 눈에 보이는 다이아몬드의 색을 만든다. 순수한 탄소로 이뤄진 다이아몬드는 빛을 100% 반사해 무색으로 보인다. 하지만 컬러 다이아몬드는 결정에 포함된 미량의 불순물이 특정 파장의 색을 흡수한다. 불순물과 결점이 최고의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은 모두가 환란 중에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인간 역사에 가장 복되고 유익한 소식을 가져온 사신들은 모두가 슬픔과 고통의 의복으로 변장하고 찾아왔다. 아기를 갖지 못한 한나의 한 맺힌 기도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을 탄생케 하는 축복이 되었다.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깊고 애절한 기도와 노래는 모두 아픔 속에서 나온 귀중한 산물이었다. 진주는 전복 조개가 이물질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 뿜어낸 분비물의 결정체인 것이다. 고난 속에 숨겨진 깊은 뜻을 감사하면 반드시 축복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유해지기를 원하신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복을 내리시면서 번성과 충만한 축복을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의도는 결국 축복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도 우리의 영과 육을 구원하시고 풍성케 하시려는 섭리에서였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8:18)
부유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난하게 살면서 고통당하는 것을 즐기시지 않는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 남는 풍성함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부요케 하시는 축복은 분명한 약속이다.
유월절은 특별한 절기이다. 자기들이 얼마나 애굽에서 고통을 당했는지, 그때 얼마나 특별한 은혜를 받았는지 기억하는 절기이다. 그래서 먼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옷을 입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밥을 먹는다. 밥도 발효되지 않은 무교병을 먹는다. 맛도 없다. 굳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기들이 당한 고통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 고통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도 있기 때문이다. 모세의 마지막 설교도 그때의 갈급함을 기억함이다.
특별한 은혜는 특별한 고통이 있었던 사람에게만, 갈급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다시 광야에 들어가며
신 8:11-20 / 김흥규 목사
<조선의 광야 ‘배론 성지’에 다녀오다>
구정연휴를 맞아 잠시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제천 근교에 있는 천주교 배론 성지에 들렸습니다. 어린 시절 그 근처를 숱하게 지나다녔지만 한 번도 들른 적이 없었기에 큰 맘 먹고 갔습니다.
‘배론’은 계곡이 하도 깊어 배 밑바닥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배론은 과연 심산유곡이었습니다. 충북과 강원도 사이에 깊숙이 박혀있는 계곡이었습니다. 여기에 박해를 피해서 수많은 신자들이 몸을 숨겼습니다. 그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순교자가 황사영입니다. 황사영은 신유박해를 피해서 서울을 탈출해 배론에 숨어들었습니다. 배론에 토굴을 만들어 숨어 있으면서 그 유명한 ‘황사영의 백서(帛書)’를 씁니다. 하얀 비단 위에다가 13,384글자를 빼곡히 적어 천주교 박해 사실을 낱낱이 알린 것이지요. 이내 체포된 황사영은 27세의 젊은 나이로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고 일가족은 노비가 되거나 유배를 당했습니다. 황사영이 백서를 기록했다는 토굴 안을 들어가 봤습니다. 금방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배론은 또한 천주교 최초의 신학교가 있었던 곳이며 김대건과 더불어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의 묘지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 마음을 정말 숙연하게 만든 것은 옹기 가마를 본 순간이었습니다. 백년 가까이 박해가 계속되자 많은 신자들이 산골짜기로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었습니다. 졸지에 가족과 재산을 다 잃어버린 신자들은 산속에서 옹기 굽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옹기구이는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했지만 포졸들의 감시망을 따돌리는데도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더욱이 옹기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걸머진 채 이집 저집 쉽게 다니면서 전도하거나 교우들의 소식을 알리는 데에도 그만이었습니다.
하늘만 빠끔히 보이는 산골짜기 배론은 영락없는 광야였습니다. 조선의 광야였습니다. 그 옛날 언제 어떻게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오로지 하늘만 쳐다보며 신앙의 지조를 지켜나간 이들이 생각나 저절로 경건해졌습니다. 거기에는 매일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순절 특별 새벽기도회를 시작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유리방황했던 광야가 꼭 배론 산골짜기 같았을 것입니다. 도무지 사람이 살기에 적합지 않습니다. 배론에는 그래도 물이라고 풍부하게 얻을 수 있었지만 광야에는 물이 없습니다. 항상 메말라 척박하고 황량합니다. 간간이 보이는 것이라고는 키 작은 관목들만 있습니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낮에는 더위를 피할 만한 나무 한 그루 없습니다. 밤이 되면 기온이 급강하해서 살을 에는 듯 춥습니다. 인간이 살기에 최악의 조건이 광야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광야에서 자그마치 40년을 고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훈련받는 유격장이었습니다. 군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요구받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제(私製)물을 다 빼라는 것이지요. 사회에서 행했던 모든 사적인 행동양식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대에서 요구하는 인간형으로 변해나가는 것입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이나 몸담아 살면서 안주했던 이집트식 생활양식을 다 청산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훈련받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 없이 불신앙에 가득차 우상숭배 했던 옛 생활을 청산하는 곳이었습니다. 그 당시 최고의 군사력 경제력 문화력을 자랑했던 이집트 문명에 길들여진 습성을 버리는 곳이었습니다. 자기의 힘만 믿고 날뛰었던 이집트식 생활양식을 떨쳐내는 곳이었습니다. 광야에는 마실 물도 먹을 양식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화려한 이집트와 달리 아무 볼거리도 없었습니다. 문화생활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하늘만 빠끔히 열려 오로지 하나님만 쳐다보면서 마실 것 먹을 것 입을 것, 일체를 하나님께 의존하는 장소였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살기 위해 훈련받는 유격장이었습니다. 이집트식 생활양식을 청산하는 장소였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음을 절감하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신앙훈련의 장소였습니다. 자기 힘으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으니 오로지 하나님을 삶의 최우선순위로 두는 곳이 광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원하는 사람들은 내남없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순례의 과정입니다. 성도의 영원한 고향이 광야인 것이지요!
어느새 사순절 40일 특별 새벽기도회를 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세월이 참 빠르지요. 내일부터 3월 21일까지 매일 새벽 4시 30분에 모세의 일대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는 40일 새벽기도회가 꼭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생활 같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광야에 나가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40이라는 숫자는 완전숫자요 성수(聖數)요 천수(天數)인 까닭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꼬박 40일 동안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고행을 해야 합니다. 그동안 새벽기도를 하지 않은 분들은 생활습관의 일대 변화와 수정이 불가피할 것입니다. 멀리 한 시간 이상이나 차로 달려와야 할 분들은 매일 새벽 3시쯤에는 일어나야 합니다. 참 힘든 일이지요. 때로 고달프고 짜증나는 일이기도 하지요. 저의 경우만 해도 매일 한 편씩 설교를 준비하는 일이 보통 고역이 아닙니다.
저도 힘들고 여러분도 힘든 일을 왜 해야 할까요? 40일 새벽기도회는 다시 광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최고의 문명문화, 화려하고 찬란한 이집트식 생활양식, 즉 세속적인 라이프스타일을 버리고 혹독한 시련과 훈련이 기다리는 신앙학교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40일 새벽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광야로 들어갈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믿고 자기 능력을 의지하는 생활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황폐해진 마음이 기름진 옥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난 인격이 깎여지고 다듬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내리교인들이 한 분도 빠짐없이 이번 40일 특별 기도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번 새벽기도회가 끝나면 전격적으로 성경을 바꾸려고 합니다. 지금 쓰고 있는 개역성경과 찬송가를 버리고 개역개정판 성경과 새찬송가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지금 서울과 지방에 있는 많은 교회들이 새로 나온 성경과 찬송가를 쓰고 있는데 우리 교회는 뒤늦은 감이 없지 않습니다. 이번 40일 새벽기도회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석하시는 분들은 우리 교회 이름이 멋지게 새겨진 개역개정판/새찬송가를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40일 광야생활을 통과하는 분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임을 잊지 마십시오!
<광야 생활의 두 가지 선택 가능성>
자,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신 8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 엄청난 풍요를 누리게 될 때 광야 생활을 잊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광야의 시련과 훈련을 절대로 잊어서 안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앞으로 40일 동안 우리도 이와 같은 광야 체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를 믿고 의지했던 옛 이집트식 생활습관을 버리고 하나님만 의지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길로 이끄실지 하나님의 뜻을 한 번 물어봅시다. 날마다 겸손하게 하나님께 의지하고 또 의지해서 우리가 누리는 일체의 소유가 다 하나님이 베푸신 선물이라는 고백을 해봅시다.
여러분, 왜 광야로 들어가야 합니까? 본문 15-16절을 보세요.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여기 보세요. 광야는 넓고 황량합니다.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립니다. 물도 없습니다. 사람 살기에 참으로 척박한 곳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광야생활을 이겨내도록 도우시고 이끌어주셨습니다. 물을 구하지 못해 목말라 할 때마다 차돌 바위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쩔쩔 맬 때마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먹여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16절 말씀 후반부에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광야에 들어갈 때마다 두 가지 가능성에 직면하게 됩니다. 고통만 생각하고 유혹을 받든지 아니면 그 고통 한 가운데에서도 먹여주시고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체험하면서 연단을 받든지 할 것입니다.
광야에서 힘들고 부정적인 면만 바라보는 사람은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을 향하여 끝없는 불평과 원망을 쏟아 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나 유혹하시지 않습니다. 유혹은 마귀로부터 옵니다. 광야는 분명히 고통스럽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곳입니다. 광대하고 위험하고 불뱀과 전갈이 득실거리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입니다. 고통스러운 광야의 현실만 바라볼 때 우리는 다시 이집트식 생활양식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하고 내 뜻과 내 고집과 내 실력만 앞세우는 인본주의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했던 마귀가 꼭 그랬습니다. 고통스러운 광야의 현실만 바라보게 해서 돈과 명예와 권세만 붙들도록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최우선해서 붙듦으로서 마귀의 유혹을 차례로 물리치셨습니다.
광야가 아무리 고통스러운 곳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물 없는 사막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책임져주시는 섭리와 보살핌의 장소가 광야였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이와 같은 광야체험이 있는 사람은 나중에 잘 되더라도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고백이 절로 나오기 때문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본문 17-18절을 보세요.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혹시라도 이 재물은 내 능력과 내 손으로 모은 것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조심하라는 말씀이지요. 재산을 모으는 힘도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일부터 40일 동안 우리는 광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이 광야 생활은 두 가지의 선택 가능성을 제시할 것입니다. 고통만 생각해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원망하고 불평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적 생활양식으로 빠져들 유혹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지만 모든 것이 풍족했던 이집트 생활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반면에 고생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고 하나님을 인생의 최우선순위로 두면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야 생활을 하나님께서 자기를 낮추고 시험하시기 위한 소중한 과정으로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다시 광야에서 ‘아빠, 아버지 하나님’만 바라며>
어떤 분이 나이 사십이 넘어 미국에 유학을 갔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박사과정을 다 끝내고 논문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논문을 쓰려니 어려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책상머리에 앉아 있어도 단 한 줄도 쓰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이 분의 전공은 신약학이었기에 논문 주제를 정하는 일조차도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이라는 것이 원래 짧은 분량이기 때문에 지난 5백 년 동안 웬만한 주제는 누군가 미리 연구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 분은 로마서에 대해서 연구하기를 원했지만 지도교수님은 고린도 전서에 대해서 논문을 쓰길 원했습니다.
점점 자신감이 줄어들었습니다. 약속한 유학 기간이 끝나면 장학금 지원도 끝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수시로 찾아왔습니다. 더욱이 고등학교 때 검사했던 IQ가 98밖에 안 된다는 사실도 끝없는 열등감으로 작용했습니다. 그 때마다 이 분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길 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논문에 대해서 절망감이 밀려올 때마다 하루에 몇 번씩이나 캠퍼스를 배회하며 “아빠, 아버지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 쉴 새 없이 하나님만 불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빠, 아버지 하나님’만 의지했더니 논문 주제도 순식간에 통과되었을 뿐 아니라 그 어려운 신약학으로 Ph.D. 학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분은 자기가 정처 없이 광야에서 헤맬 때마다 하나님께서 돌보아주셨음을 철두철미 믿었기에 논문 첫 페이지에다가 “To My God”이라고 써서 박사학위 논문을 하나님께 봉헌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번 사순절 새벽 기도회 시간에 이와 같이 광야 한 가운데에서 돌보시고 섭리하시는 ‘아빠, 아버지 하나님’을 여러분 모두가 다 체험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광야에서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비단 이 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고아원을 운영하는 분들 가운데 단 한 번도 쌀이 떨어진 것을 걱정해보지 않은 분들도 많습니다. 광야 한 가운데 내동댕이쳐져서 힘들어 할 때마다 ‘아빠,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번 40일 광야 체험의 기도회를 통하여 이와 같이 세밀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다 체험할 수 있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내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병고와 가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병고와 가난은 광야체험을 의미합니다. 혹독한 광야의 시련을 당할 때 더욱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었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이지요.
복 있는 사람
신 8:11-20 / 민경설 목사
인간의 진정한 복된 삶은 물질이나 환경, 외부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근본적 생각이나 마음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즉 인간이 마음에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지하고 신앙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행복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의 어떤 물질이나 환경을 소유한다 해도 인간에게는 참만족이나 참행복은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요4:13-1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그래서 심리학자 에릭프롬은 말하길 인간의 행복은 소유(having)에 있지 않고 존재(being)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서는 축복은 없는 것입니다. 인간 누구에게나 복은 없고 인간이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동행하는 자는 복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시67:7]“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73:28]“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성경에서 복 받는 비결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명기에서 다시 한 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복 받는 삶을 사는 영적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좋아졌던 나빠졌던 간에 여호와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 받는 길입니다. [신8:13-14]“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여러분,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범사에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복을 받으며 삶을 살아가는 비결을 생각해보겠습니다.
1) 가나안 땅에 들어가 잘될 때 마음에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한 번 잘되는 것은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잘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이 조금 잘 되면 인간의 마음까지 높아져서 교만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 때 인간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 생활은 부유해지고 지위는 높아졌지만 복의 근원인 하나님은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망하고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나오는 실패하는 삶의 모습은 어렵고 힘들 때 나오지 않습니다. 좀 어렵고 힘은 들어도 그 때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잘 되고 뜻대로 되었다고 할 때 인간은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때 마음이 높아져서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이 교만해지만 다 하나님을 망각하게 됩니다.
2) 성도는 광야의 생활의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8:15-16) 성도는 잘 될 때도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하지만 지극히 어렵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성도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반드시 성도를 광야로 이끄십니다. 그 광야 시험을 통과해야 복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 후 그들은 곧장 가나안으로 갈 수 있었지만 걸어서도 15일이면 가는 거리를 40년 걸려서 갔습니다. 그 사막 벌판 어디도 길은 없고, 물도 없고 먹을 것이 없는 상황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먹고 사는 것을 배웠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살고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살아가는 것을 배웠습니다.
3) 복있는 사람은 자기의 능력의 근원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재물을 잘 버는 것이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능력입니다. 우리가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나거나 내 재주가 좋아서 잘한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떠나십니다. 사탄 마귀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교만한 영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세계최고 갑부로 알려진 마이크로 소프트 회장인 빌 게이츠가 32년 만에 하버드 대학에서 대학 졸업증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수락 연설에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젊은데도 모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기 부부는 남은 생애를 사회봉사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자선 사업으로 평생을 살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자기를 축복하신 하나님께 보답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 여건이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16:5-6) 이런 자들은 복된 자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아멘.
네 하나님을 기억하라
신 8:11-20 / 홍문수 목사
오늘은 8.15 광복 65주년 기념일입니다. 그리고 오는 8월 29일은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 병합되었던 경술국치 100주년이 됩니다.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일본이 어떻게 나올까 하는 게 관심사입니다. 금년에는 일본 총리가 예전보다 진전된 사과를 하고 탈취해 갔던 문화재 일부도 돌려준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담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분들도 있지만, 대개는 아직 미흡하다는 반응입니다. 사죄가 아닌 사과의 수준이다, 강제 병합의 불법성을 고백하지 않았다, 강제 징용이나 정신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언급하지 않았다, 독도 영유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 등등 부정적인 반응들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당연히 일본의 철저한 사죄가 있어야 하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자세입니다. 일본을 비난하고 사죄를 요구하는 것과 별도로, 왜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병합을 당했느냐 이겁니다. 수많은 선열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은 고귀한 일이지만, 그 이전에 나라가 왜 그 지경이 됐느냐 하는 겁니다. 그 당시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무지 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이라는 점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광복절을 맞이할 때마다, 특별히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이하는 금년에는 특별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라의 안위는 개인의 행복과 직결됩니다. 나라를 잃고 일제의 압제 하에서 백성 개개인이 당한 고통이 얼마나 컸습니까? 개인이 아무리 잘 났어도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각자도 광복절을 맞이하여 특별한 반성과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기념식을 한다며 “대한독립 만세! 만세! 만세!” 만세삼창이나 하고 끝낼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셨던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부디 이 말씀을 통해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 바른 삶을 살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져 계속 번영하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은 모세가 광야 40년을 거의 마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신명기’라는 타이틀은 ‘두번째 말씀’(Second Law)이란 뜻입니다. 출애굽 후 40년 동안 광야를 통과하면서 모세가 많은 말씀을 전했지만, 다시 한 번 중요한 말씀을 강조해서 증거한 겁니다. 모세 자신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죠. 그러니까 백성들을 들여보내면서 얼마나 못 미더웠겠습니까? 안타까운 심정으로 당부하고 또 당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나라와 흡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00여 년 동안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인도로 해방됩니다. 그게 바로 유월절(출애굽기 12장)입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해방기념일로 우리나라의 광복절에 해당됩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광야 40년을 보냈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될 겁니다. 그 때 어떻게 살아야 마땅한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오늘 설교 제목대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이겁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게 이스라엘이 살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말씀을 받는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겁니다. ‘너’와 ‘너희’ 두 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개인과 민족은 공동 운명체입니다. 개개인이 모여 민족이 됩니다. 개인이 바로 서야 민족이 바로 섭니다. 민족이 잘 되려면 개인이 잘 돼야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주신 말씀일 뿐 아니라 개개인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은 먼저 우리 각자가 청종해야 되고, 더 나아가 우리 민족 전체가 청종할 수 있도록 우리가 솔선수범하고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백성 : 축복의 선순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 이어지는 선순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과 광야 40년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감사하면 당연히 어떻게 해야 된다고 말씀합니까? 다음 세 가지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① 겸손 :
사람이 어려울 때는 겸손합니다. 그런데 편해지고 형통하게 되면, 안일한 나머지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모세는 이런 인간성을 알기에 미리 일침을 놓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보호해 주셨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뿐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풍요로운 삶이 펼쳐질 것을 예고합니다. 그 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신8: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교만해지면 안 되겠기에 모세는 분명히 경고합니다. 12절~14절.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 ” 배부르고 등 따스우니까 세상만사가 자기 마음대로 되는 줄 알고 하나님을 잊어버릴까봐 염려된다는 겁니다. 모세는 심지어 그들이 할 말을 미리 예상하고 이렇게 경고합니다. 17절.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여기 보면, 대명사 ‘나’(I)가 반복됩니다. 인간의 착각 가운데 가장 큰 착각이 바로 이겁니다. 자기 힘으로 모든 게 되는 줄 압니다. 모든 소유를 자기 힘과 재주로 얻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모세는 지적합니다. 18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 ” 혹시 인간이 힘쓰고 노력해서 무엇을 얻었다고 해도, 그 능력을 누가 주었느냐 이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태어날 때 양손에 신사임당 그려진 5만원권이나 고액 수표를 쥐고 나온 사람 있나요? 집문서 땅 문서 쥐고 나온 사람 있나요? 누구나 다 빈손으로 적신으로 나왔습니다. 지금 갖고 있는 것은 모두 그 후에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혹시 조상에게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해도 그것 역시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인간이 하는 일 중에 노력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게 뭘까요? 농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요, 농사를 지으려면 토지가 있어야죠. 씨앗이 있어야죠. 또 농부가 씨 뿌리고 밭을 갈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햇빛과 비가 적당이 내려야 되고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인간의 노력과 무관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농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농사를 짓는 가운데 인간의 노력은 10%도 채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해 주시는 게 거의 대부분이라는 겁니다. 농사가 이렇다고 하면, 다른 것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죠. 회사에 나가서 사무실에 근무한다 해도 어때요? 취직 누가 시켜줘요? 내가 해요? 그러면 취직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실력이 있다고 취직이 쉽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뤄지는 겁니다. 출근해서 일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건강 주시고 모든 여건을 허락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이런 식으로 따져 보면 정말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전4: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우리는 항상 제로베이스(zero base)에서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나의 본래 모습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 정도로 살게 됐습니까? 사실 얼마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피원조국 중의 하나였습니다. 제가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닌데도 어렸을 적 생각을 해 보면 정말 우리나라가 가난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니까 한 학급이 90명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분유 덩어리 물에 타서 끓인 것과 강냉이 가루 찐 것을 나눠주더군요. 그 당시 미국에서 원조한 시뻘건 밀가루도 있었어요. 포대자루에 한국과 미국이 악수하는 그림이 그려진 것 말입니다. 구제품 옷도 많았습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음식 찌꺼기를 끓인 꿀꿀이죽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쌀이 남아돌아서 고민거리지만, 쌀이 모자라 혼식분식을 장려한다고 난리를 쳤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이런 기억들을 하나하나 해 보면,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나라가 얼마나 풍요로워졌는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필리핀의 라모스 前 대통령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6.25 때 소위로 참전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대통령이 되어서 한국을 공식 방문하게 됐는데, 와서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잿더미였던 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변했는지 눈을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은 기적의 나라다!” 특히 그는 새마을운동에 매료되어 자기 나라로 돌아가 ‘그린 & 클린 운동’(Green & Clean Movement)을 전개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만해지는 순간 추락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 개구리가 있었습니다. 다른 개구리들은 관심도 없는데, 그는 하늘을 새들을 보면서 선망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새에게 간청합니다. 자기도 하늘을 날게 해 줄 수 없느냐고. 그러자 황새가 자기 발을 입으로 꼭 물고 있으면 하늘로 날아갈 테니까 한 번 해보라고 제안합니다. 그 개구리는 좋아하며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러자 정말 하늘을 날게 됩니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땅 위에서 개굴개굴 울어대는 친구들을 내려다보며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야~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추락사! 우리도 마찬가지 내가 이만큼 사는 게 다 하나님을 붙잡고 있기에 가능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살아갈 때 그 은혜가 계속됩니다. 은혜는 물처럼 낮은 데로 임하는 겁니다.
② 순종 :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 당연히 순종하는 사람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광야 생활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순종의 훈련을 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신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만나를 내려주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죠. 매일 아침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줍니다. 매일 식구 수대로 적당한 분량만 거둬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머리를 굴리다 낭패를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욕심을 내서 많이 가져온 사람들은 남은 게 모두 썩어서 곤욕을 치렀습니다. 또 안식일에는 예배에 집중하기 위해 만나를 거두러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대신 이틀 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때도 머리를 굴린 사람들이 있었죠. 혹시 썩을지 모른다고 지레 짐작하고 안식일 아침 일찍 나갔다가 허탕을 칩니다. 이런 과정을 여러 번 거치면서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게 축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게 바로 사람이 떡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유해서 말하면 차선과 같습니다. 자동차가 차선을 지키면 안전합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더 빠릅니다. 운전할 때보면 이상한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있죠. 빨리 가겠다며 차선을 안 지키고 요리조리 곡예 운전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나중에 보면, 사고가 나든지 혹은 오히려 뒤에 처지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따라가면 계속 승리합니다. 불순종하면 인생이 꼬입니다. 이건 인생의 공식입니다. 공식대로 살면 공식대로 축복을 받습니다.
③ 헌신 :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 또한 사명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만민 중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시내산 언약을 체결할 때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출19:5~6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 ” 제사장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연결해주는 다리와 같은 존재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모범을 보이며 이방 여러 민족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사명이 있다는 겁니다. 사49:6 “ ...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그러나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을 때 얼마나 많은 징계와 고난을 당했습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조금 잘 살게 됐다고 우리 자신만 호의호식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실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축복과 사명은 동전의 앞뒤와 같이 항상 짝을 이루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정말 특이한 나라입니다. 전통적으로 다종교국가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더 심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참 놀랍습니다. 해방 후 남복이 분단되고 남과 북이 각각 정부를 수립하게 됐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해 제헌 국회가 열렸습니다. 그때 의장이 이승만 박사(후일 초대 대통령)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개회사를 했습니다. “대한민국 독립 민주국회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사상이 무엇이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목사였던 이윤영 의원에게 기도 인도를 부탁했습니다. 공식 순서에도 없었던 대표기도를 부탁받은 이윤영 의원은 즉석에서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일제의 압제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남북으로 갈라진 민족을 통일시켜 주실 것과 도탄에 빠진 우리나라 국민에게 복락을 주실 것과 전 세계에 영구한 평화를 허락해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기독교 국가도 아닌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게 놀랍지 않습니까?
정말 이 기도처럼 우리나라가 걸어왔습니다. 앞으로도 걸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해 봅니다. 성서한국, 통일한국, 선교한국! 이 민족이 하나님 말씀대로 성결해지고, 남북이 갈등을 청산하고 평화적인 통일을 이룩하고, 더 나아가 세계 민만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나라가 되는 겁니다. 이게 대한민국과 한국교회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이 사명을 계속 감당하면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고 계속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게 바로 ‘은혜 위에 은혜’의 역사요, ‘축복의 선순환’의 역사입니다. 악순환이 아니라 축복에서 축복으로 이어지는 축복의 선순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시33:12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2]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백성 : 멸망의 경고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자행자지하면 큰일 납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반드시 멸망한다는 무서운 경고가 나와 있습니다. 19절.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여기서 “증거하노니 ... ” 이 말은 영어 성경을 보니까 “엄중하게 경고한다”(I solemnly warn you-RSV)는 뜻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어떻게 됐습니까? 그들은 이 말씀을 새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부패하고 음란하고 모든 면에서 부도덕했습니다. 이방의 빛이 되는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소홀히 했습니다. 그들의 한심한 모습은 사5:2에 단적으로 표현됩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포도원을 근사하게 조성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듯이, 세계 모든 민족 가운데 최고의 축복을 주셨지만 들포도를 맺듯이 실패한 이스라엘!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분단으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두 나라가 됐는데, 각각 앗수르(B.C. 722)와 바벨론(B.C. 586)에게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특별히 남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게 망해서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갑니다. 70년 동안 종살이를 합니다. 그때의 슬픔이 어떠했습니까? 시137: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포로민들이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시절의 모습입니다.
이런 역사적 비극을 보고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운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시50:22에도 무서운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우리는 IMF 외환위기 등을 통해 뼈아픈 교훈을 얻은 바 있습니다. 누구라도 언제라도 망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면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라도, 민족이라도 별 수 없습니다. 개인도 마찬가지 하나님의 잊어버리고 교만하면 큰일 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 받을 자가 누구입니까? 이미 받고 있는 자입니까? 아닙니다. 과거에 받았다고 미래에도 여전히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입니다. 미래에 계속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는 이미 받은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 속에 계속 흥왕할 나라가 어디입니까? 이미 선진국이 된 나라들입니까? 우리나라는 자동 케이스입니까? 아닙니다. 어제의 선진국이 미래의 후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 로마, 舊소련, 그리고 동 유럽이 후진국이라 망했습니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놓으시면 망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에 대한 사명을 다하는 나라와 민족에게만 미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삽시다. 그리고 이 나라 이 민족이 이제 교만과 부패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민족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이스라엘은 구약 시대에도 비극을 당했지만, 신약 시대에도 계속 세계의 떠돌이 신세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나치 독일에 의해 6백만 명이 학살되는(그 중에 150만 명 이 어린아이들임)이나 처참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다시는 그런 비극을 당하지 않으려고 절치부심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학살기념관 ‘야드바셈’(Yad Vashem)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어린아이들로부터 노인까지, 일반 시민과 군인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계속 물밀듯이 방문합니다.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을 겪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입니다. 그곳 전시실에 이런 글귀가 붙어 있습니다. “망각은 파멸로 이끌지만, 기억은 구원의 비결이다”(Forgetfulness leads to exile, while remembrance is the secret of redemption) 무슨 말입니까? 과거의 뼈아픈 역사를 기억하면 흥하고, 망각하면 망한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큽니다.
오늘 우리도 광복 65주년을 보내면서 냉정한 반성과 다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전보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삽시다. 그리고 이 나라 이 민족이 하나님 앞에 겸손한 민족, 세계 만민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 나라가 힘써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네 하나님을 기억하라
신 8:11-20 / 박봉수 목사
제가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고 있는 장로님 한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결혼한 지가 30년이 다 되신 분이신데 아직도 아이가 없으십니다. 이제 서서히 노년을 바라보고 계신데 아이 없이 내외가 어찌나 금슬이 좋으신지? 그동안 아이도 없이 그 긴 세월 부부가 어떻게 그렇게 금슬이 좋게 지내실 수 있는지 그 비결을 물었습니다.
뜻밖의 답변을 들었습니다. 장로님 부부는 매년 결혼기념일이 되면 주례해 주신 목사님을 찾아뵙는다는 것입니다. 감사의 인사도 드리고 축복 기도도 받는다는 것입니다. 처음 몇 해는 별 생각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찾아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30년이 다 됐는데 돌이켜 보면 이 일이 당신 부부를 긴 세월 사랑하며 살수 있게 해 주었다고 생각이 된다는 것입니다.
30년 살면서 서로 불평할 일이 왜 없었겠습니까? 이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 때가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목사님을 찾아뵙고 나면 결혼 당시 서약이 떠오릅니다. 그 때 이런 남편, 이런 아내를 만나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했던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 한 구석에 떠 밀려있던 남편과 아내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새삼스럽게 피어납니다. 당신 없으면 어떻게 사나 하는 두려운 마음도 듭니다. 그래서 서로의 소중함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아마 이래서 결혼기념일에 주례 목사님을 찾아뵙는 것이 부부금슬을 지켜주었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에 대한 소중한 기억이 오늘 우리 삶의 기반을 만들어줍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을 확실하게 기억할수록 오늘의 우리 삶은 풍성해 집니다.
기억하라
오늘 본문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기는 유언적 설교의 일부분입니다. 이제 자기는 요단강 동편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이끌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서 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저들에게 꼭 들려주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을 모아 놓은 것이 신명기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기억하라”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억하는 것이 앞으로 가나안 땅에서 저들의 삶의 든든한 정신적 기반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기억하는 것이 앞으로 저들의 삶을 풍성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찌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마도 당시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무슨 그런 말씀을 하느냐고 했을 것입니다. 잊을 것이 따로 있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여호와를 잊겠느냐고 장담을 했을 것입니다.
저들은 지난 43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출애굽하여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애굽 땅에 내렸던 10가지 재앙을 보았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자기들이 출애굽하여 자유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정말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지난 40년 광야생활을 해왔습니다. 장정만 60만이 넘는 그 많은 사람들이 아침마다 내리는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낮에는 그 작열하는 태양 빛을 구름기둥으로 막아주셨습니다. 밤에는 불어오는 사막 바람의 그 추위를 불기둥으로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자기들이 광야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정말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모세가 지금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왜 결코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사실을 잊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의 이념 논쟁이 너무 심각해져서 국론 분열은 물론이고 이러다가 나라가 자중지란에 빠지지 않을까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진보세력들이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를 시도하려다가 저지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과격한 좌파 진보세력들은 맥아더 장군 동상을 인천 자유공원 내에 그대로 두는 것이 냉전적 시대의 유물이기 때문에 철거하자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철거해야 한다는 논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맥아더가 우리 남북 분단의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6.25라는 통일전쟁에 개입해서 남북통일을 방해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그 동상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모한 인천상륙작전으로 우리 남북한 수많은 한국인을 죽음으로 몰아간 전쟁의 화신이기 때문에 그 동상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일일이 논거를 대며 지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과 연관해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 동상을 누가 왜 세웠느냐는 것입니다.
맥아더 동상은 1957년 인천시민들이 우리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준 UN군 총사령과 맥아더 장군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아서 자발적으로 세운 것입니다. 당시 정부가 세운 것이 아닙니다. 미국이 요청해서 세운 것도 아닙니다. 시민들이 너무 고마워서 감사의 뜻으로 세웠습니다. 그 때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잘한 일이라고 박수를 보냈습니다.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이 동상 건립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감사해서 동상을 세워놓고 이제 와서 그 동상을 철거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미국에서 차라리 그럴 바에는 우리에게 돌려달라고 했답니다. 그러면서 저들이 감사를 잃어버린 한국인들, 배은망덕한 한국인들에 대한 불쾌감과 배신감의 속내를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 우리나라에 미군이 지금 이 모습으로 주둔해야 할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맥아더가 과연 위대한 영웅인가 그런 문제에 대해 역사적 평가를 새롭게 논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논의 과정에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맥아더와 미군이 우리를 도왔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이 땅에 자유와 평화를 지킬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이런 번영된 나라에서 살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이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아무리 미국이 싫어도 이 사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왜 모세가 이토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사실을 잊지 말라고 그렇게 강조하고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고 사는 존재 그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레테(lethe)라는 말이 나옵니다. “망각의 강”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이 레테가 저승의 5개 간 중의 하나인데 사람들이 죽으면 이 강을 건너게 되는데 이승에서의 모든 기억을 지우기 위해 이 강물을 마시도록 강요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죽기 전에도 우리는 망각을 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더 문제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고 산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다 잊어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결코 레테의 강물을 마신다고 해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분의 그 크신 은혜입니다.
기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면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1절에 잊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잊지 않으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 인간의 기억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감각기억입니다. 듣고 보고 잠시 머리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합니다. 머물러 있는 시간이 1초 남짓입니다. 보고 그대로 흘러가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단기기억입니다. 약 15-20초 동안 머물러 있는 기억을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전화번호를 듣고 나서 적어 놓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그런 기억을 말합니다.
셋째는 장기기억입니다. 머리 속에 장기가 어떨 경우에는 영구적으로 머물러 있는 기억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장기기억도 재생하지 않으면 망각의 강으로 흘러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빙하우스란 분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우리가 장기기억 속에 담아둔 내용들이 20분이 지나면 47%, 2일 지나면 66%, 6일 지나면 75%, 그리고 20일 지나면 80%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기기억이 계속 우리 머리에 남아있게 하려면 재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그것을 기억하면 그 기억이 두고두고 남아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려면 그 기억을 반복해서 재생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우리 머리 속에 늘 살아있는 기억으로 남아있게 하려면 늘 그 기억을 재생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하나님에 대한 기억 재생 방법은 감사입니다. 영어로 감사라는 thank라는 말은 생각이라는 think에서 왔습니다. 그 은혜를 깊이 생각하면 저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고 감사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 보스톤 바닷가에 매일 같은 시간에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는 노인이 있었답니다. 그것도 비싼 새우를 나눠주었답니다. 갈매기들도 그 시간쯤이면 새까맣게 몰려든답니다. 하나의 진풍경이 되었답니다. 사람들이 이 노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답니다. 노인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자기가 2차 세계 대전에 참전을 했는데 당시 함선을 지휘하던 해군 제독이었답니다. 독일 군이 어뢰를 발사해서 배가 침몰했고 간신히 구명정에 올라 탈 수 있었답니다. 뜨거운 태양과 배고픔과 싸우며 견디던 중 부하들 하나씩 죽어가고 있었고 자기도 정신이 희미해지며 쓰러지고 말았답니다.
그 때 자기 얼굴 앞에 희미한 물체가 서있는데 그것은 갈매기였답니다. 갈매기가 도망치지 않고 자기 앞을 지키고 있더랍니다. 갈매기를 잡는 순간 입에 물고 있던 새우를 떨어뜨렸답니다. 그래서 몇 시간을 더 버틸 수가 있었고 그러다 섬을 발견해서 살 수 있었답니다.
그 이후 퇴역한 뒤에 이 바닷가에서 갈매기 먹이를 주면서 매일 갈매기를 보내주신 하나님과 갈매기에게 감사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늘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을 늘 인정해야 합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광야 생활 힘들 때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잘 살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잘 살게 됐다고 생각할까봐 두렵다는 것입니다.
선교학자들의 연구 조사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이 부흥한 나라의 경우 국민소득과 교세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대체로 국민소득이 5000불 정도까지는 교세가 급격하게 증가한답니다. 그러다가 국민소득이 5,000불이 넘어서게 되면 그 증가율은 완만해 진답니다. 그러다가 국민소득이 1만 불이 넘으면 하강곡선을 긋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1980년대까지 교세가 급속히 증가했습니다. 그러다가 90년대에 정체가 시작됐고, 이제 전체적으로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대체로 이런 경향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살기 힘들 때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자기 힘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만해 지면 달라집니다. 자기 힘으로 웬만한 것은 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별로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다 더 잘 살게 되면 하나님 자체도 필요치 않습니다. 오히려 성가실 뿐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 하지 말라고 규제만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점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인생의 위기 중에 하나님을 믿는 일은 어떻게 보면 쉬운 일입니다. 하나님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드러나 모든 일이 다 잘 풀리고 나 혼자서도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 일은 어떻게 보면 힘든 일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도 모든 일이 다 잘 풀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은 잘 살 때 믿음 생활 잘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때 믿음 생활 잘하는 사람입니다.
작곡가 하이든의 작품 중 가장 걸작이라면 대개 “천지창조”를 꼽습니다. 성경 창세기와 존 밀턴의 실낙원을 읽으며 기도하다가 영감을 얻어서 이 곡을 작곡했답니다.
한 번은 이 곡을 비엔나에서 공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날따라 몸이 아파서 객석 저 뒤편에 앉아있게 되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큰 감동을 받은 청중들이 지휘자에게 기립박수를 보냅니다. 이 때 지휘자가 작곡자 하이든을 소개했습니다. 청중들의 박수가 하이든에게 쏟아졌습니다. 그 때 하이든이 청중을 중단시키며 “아니오”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가리키며 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분이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하이든은 당시 최고의 작곡가였습니다. 누구도 그의 재능을 의심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얼마든지 자기를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분이 계셨기에 그분이 도와주셨기에 여러분의 오늘이 있음을 인정하십시오. 잘 될 때 더 그렇게 하십시오.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 때문에 오늘 우리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늘 그분을 생각하며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주목할 때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더 큰 은혜로 함께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