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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위에 잔상들, 그러나 진한 상들이 맺힌다.
아니 맺히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저 단순히 머릿속의 퓨즈가 나가 시신경이 오작동을 일으킨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지금 허공에 떠 있는 작은 태아를 보고 있다. 아직 눈도 없고 팔도 다리도 없다.
오직 주변의 공기를 울리며 자신의 생명력을 과시하려는 것처럼 미친듯이 뛰는 저 심장만이 그것이 살아잇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작은 아기는 점점 더 거대해지더니 곧 성숙한 남자로 자라난다.
그것은 한동안 나를 곁눈질로 본다. 저것 역시 왠지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내 몸은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머릿속에서는 도망치고싶다는 생각이 간절하지만 그 눈이 내 몸을 사슬로라도 묶은 듯 움직이지 않는다.
"크앙!"
갑자기 그것이 내게 달려든다. 목을 붙들고는 침대 위에 내 몸을 침대 속으로 묻어버리려는 듯이 강하게 누른다.
기도가 눌리며 숨쉬기가 힘들어진다. 심장이 발딱이며 애를 써 보지만 그것 뿐이다.
"콜록,콜록."
나는 연신 기침을 해대며 거기서 나오기 위해 팔다리를 휘젓는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 날 수 없음에서 오는 무력감과 거기서 오는 굴욕감 때문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크르르르..."
그렇게 발광하듯 몸을 떨면서도 나는 그의 분노에 찬 눈빛을 느낀다.
그의 눈은 피가 잔뜩 괸 사나눈 눈으로 내 눈을 마주한다.
내 뇌를 뚫어버리는 듯한 그 눈빛과 가빠지는 호흡에 정신이 아득해져간다.
나는 다시 일어난다. 그 전과 마찬가지로 침대 위다.
그는...사라진 건가...아니다. 그는 여전히 침대 위에 앉아 있다.
"크르르..."
그가 으르렁 거리면서 나를 바라본다. 이번에도 그의 광기어린 눈에 나는 또다시 숨을 멈춘다.
부탁할게. 제발 날 그런 눈초리로 보지 말아줘.
나도 알고 있어. 내가 유죄라는 거. 사람 새끼라면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겠어?
"나는 유죄야."
그래 나는 유죄야. 그것 만큼은 틀림 없지. 그러니 제발 부탁할게.
"어떻게 하면 결백해질지 가르켜줘."
그 말에 그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의 눈에 고여있던 피가 침대 위로 뚝뚝 떨어졌다.
내가 한 말이지만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와서 죄를 씻어 달라니. 뻔뻔해도 유분수지.
그렇게 생각하니 저절로 고개가 들렸다.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쯤 하늘엔 별들이 그 엿같은 빛들을 발하며 어두운 하늘에서 마냥 즐겁게 춤추고 있겠지. 젠장할.
그때였다. 머릿속이 순간 환해지면서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우주선."
놀랍다. 이런 정신 상태에서 이런 묘안이 생각나다니.
"저 망할 별들을 강간해줘."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경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아. 좋다 이거야. 너의 눈에는 내가 받은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풀려드는 경박한 여자로 보이겠지.
하지만 그건 네가 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나는 한번 죽었어. 그리고 너 역시 한번 죽지 않는 이상 모를거야.
"저 새끼들은 말이야...밤이 되면 내 머리위에서 반짝이고 있어. 그 기분이 얼마나 엿같은지 알아?"
그러자 그가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며 폭소를 터트렸다.
그 폭소에는 진하고 짙은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의 폭소는 끈길줄을 몰랐다. 계속 터지고 또 터져나왔다.
그렇게 그는 한참 동안을 웃더니 거짓말 처럼 딱 끊어버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에도 숙인 머리 너머로 붉으락푸르락하는 그 눈빛은 여전히 나를 휘감고, 방을 휘감고 이 아파트마저 휘감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 도시 전체를 휘감고 이 땅마저 휘감아 버렸을 지 모르겠다.
사무치는 분노, 그것이 저 눈빛의 정수일 것이다.
미안하다. 차마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해서.
지금의 나는 이기적이게도, 내가 할말밖에는 하지 못하겠구나.
"너말이야. 그런 생각 해본적 있어. 네가 이 지구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말이야."
그러자 갑자기 그가 내 멱살을 잡고는 마구 흔들었다.
또다시 어지러움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져갔다. 하마터면 또다시 혼수상태에 빠질 뻔했다.
다행히도 그는 내가 정신을 잃기 직전에 내 멱살을 놓았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전혀 풀어지지 않은 듯 했다.
오히려 그는 훨씬 더 격해진 눈빛으로 나를 보며 울부짖었다.
"나는 단 한번도 인간인 적이 없었어!"
그의 눈에서 굵은 눈물 두 줄기가 뺨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는 툭, 툭, 침대 위로 떨어졌다. 그것들은 그의 두 눈처럼 붉으락 푸르락 빛을내며 마치 살아라도 있는 듯이 스멀스멀 침대위를 기어갔다.
처음 그것들이 떨어지며 전달하는 정서는 불안함이었다.
자신이 품고 있는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든다는 데서 오는 불안함, 그리고 그 후에는 마치 불꽃이 꺼지고 난 뒤 잿더미 위에서 피어오르는 분노가 마치 연기처럼 방안의 공기를 메웠다.
나는 한번 죽었다. 내 정신은 무참히 짓밟혀 부서져나갔다.
강간당하고 난 뒤, 나한테는 죄가 없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하든 내 몸은 이미 더럽혀졌으니.
그리고 몆 주 뒤 결국 나는 두번째 죄를 범하게 되었다.
처음엔 나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들었고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죄인으로 낙인찍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한번 죽었다.
사회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나는 더 이상 살아있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너는 죽지 않는 이상 그 느낌을 모를 것이다....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는 이미 한번 죽었다. 살해당했다.
그의 육신은 조각나 결국 먼지가 되었다.
결국 마지막에 깨달은 것은 나는 그저 내가 세상의 모든 고통을 끌어안은 것 처럼 편협한 생각에 도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정작 내가 지은 죄로 누군가가 고통받았다는 것은 잊어버리고.
결국 나도 나를 강간한 그 인간 처럼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해버린 것이다.
타인의 기분따위는 아랑곳하지않고 말이다.
그는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고 나는 그 죄를 행한다.
나조차 이런 내가 경멸스럽다.
어느 순간 부터, 내가 그토록 부정했던 죄의 길을 걷고있는 나 자신을 발견 할때면 과장 한점 보태지 않고 내 몸을 분쇄기에 넣고 갈아버리고 싶인 기분이 든다.
"언제부턴가, 그런 꿈을 꾸기 시작했어. 우편배달차에 치이는 꿈."
내 말에 그는 한번 피식 웃더니 역시나 자신의 고통을 과시하듯이 내 말을 되받아쳤다.
"언제부턴가, 그런 현실이 시작됐어. 내 몸의 두배가까이 커다란 가위가 내 몸을 토막내는 현실이."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는 닮았다. 소름이 끼치도록 닮아있다.
우리는 서로 한치의 고통에 대한 우열도 양보하려 들지 않는다.
우리는 깨진 그릇같은 존재들이다. 원래 그것들의 원래모습이 어떻든 간에.
한쪽은 유약을 다 칠해놓고 재벌구이를 앞둔 순간 어이없게도 배고픈 개 한마리가 코를 들이밀다 넘어져 깨진 경우였다.
그리고 또한 쪽은 떨어진 그릇의 파편이 튀겨 흠집이 나버린 유약조차 발리지 않은 진흙덩이였다.
그러나 그날은 영 재수가 없는 날이라 생각했는지 그릇을 빚고 있던 도공은 그 진흙덩이를 아무렇지 않게 휙 던져버리고 개는 대충 철장에 다시 가둔 뒤 여기저기 흩어진 사금파리를 쓸어 담아 쓰레기 통에 버렸다.
그렇게 사기조각은 한때나마 그릇이였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쓰레기통 속에서 죽은듯이 잠들었고(혹은 잠들듯이 죽어갔고) 진흙덩이는 한때나마 꿈꿨던 존재의미마저 잊은 채 말그대로 한낱 진흙덩이로 되돌아갔다.
우리는 그런 존재들이다. 한쪽은 자신의 존재자체가 부정당한 채 이렇게 사금파리의 끄트머리에 묻혀져 있고 사금파리는 깨어진 것들 특유의 모남으로 타인들을 상처입히며 때로는 심장에 꽂아넣는 비수가 되기도 한다.
사회라는 커다란 수레바퀴에 납작하게 깔려 붙은 사마귀 같은 존재들. 우리는 그런 존재들이다.
투두두둑.
굵직한 비가 창문에 몸을 날리며 창문을 두드린다.
어릴 땐 이런 날씨면 침대위에 무릎을 꿇고 신께 빌기도 했었다.
'제발 이 비를 멈춰주세요.'하고.
범해지고 난 뒤에도 나는 그 행동을 그대로 행했다.
'제발, 이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해주세요.' 그렇게 빌고 또 빌었다. 어릴 때보다 수십배는 더 절실히 빌었다.
사흘 밤낮을 자지 않고 빌었다.
하지만 나흘 째 아침에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의미 없는 행동들었다는 것을.
신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
"...."
우리는 한 동안 긴 침묵상태를 유지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만이 빈 공기를 매우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나를 향한 증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계속 나한테 말하고 있었다.
'제발 이 땅위에서 사라져. 당신은 이 세상에서 서있을 자격이 없다고.'
염치없게도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부탁 하나만 할게. 부디 내가 왜 여기에 서 있는지 묻지 말아줘."
"무슨 뜻이지?"
"그 날, 내 정신은 죽었어. 그런데 육체까지 죽이라 한다는 건 너무나 잔혹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자 그는 경멸스런 태도로 말했다. 그의 격렬한 경멸에 그의 손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이미 그 이상으로 잔혹해."
"더 이상은 아니야."
"뭐?"
"미안해. 최근에서야 나는 나에게서 정말로 소중한 것을 찾았어."
"그게 뭐지?"
"꿈, 환상. 그런 것들은 내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아편의 역할을 해주지."
그러자 그의 떨리던 손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는 낄낄 거리며 웃었다. 한참을 웃었다. 손으로 얼굴을 덥고 너무나 재밌다는 듯 쉴새없이 웃었다. 그렇게 한 3분 가까이를 숨넘어가도록 웃은 뒤 그가 다시 말을 뱉었다.
"유치하군."
"그렇지만 멋진 감정이지."
나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다음 말에서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울 수 밖에 없었다.
"네가 있기 전에 그걸 알았다면 좋았을텐데."
그도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다시 긴 시간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을 뻔한 상황이었으나 그가 다시 말을 열었다. 그의 말은 기대는 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은 '사과'였다.
"미안해. 사실 당신 사정 처음부터 이해하고 있었어. 그냥 어미한테 업힌 아기마냥 투정을 부리고 싶었을 뿐이야. 정말 미안해. 당신 힘들게 한거. 그럼에도 어머니라 부를 수 없다는거 사과할게."
"괜찮아. 나도 염치없이 그런 것 까지 바라지는 않아."
그는 사과를 건넨 뒤 시원하다는 듯이 턱을 올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터질듯한 붉은 분노도, 차가운 푸른 증오도 더이상 서려 있지 않았다.
"과연 완벽한 사람이 있을까?"
그는 사람에 강조를 넣어 말했다. 분명히 자신이 원하는 답이 정해져 있을 터였다.
"없겠지."
그가 정답을 맞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순결한 사람은 있을까?"
"역시나 없겠지."
이번에도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그가 내뱉을 다음 말은 그의 의도가 담겨있을 것이다.. 혹은 그 모든 것을 담는 침묵이 이어지거나. 그리고 얼마 뒤 그 객관식 문제의 답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런거, 누가 되고싶어해?"
그는 어깨를 살짝 으쓱해보이고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말이야. 굳이 죄책감 가지지 말라고. 당신은 죄가 없어. 물론 아예 부정할 수는 없겠지, 당신이 무죄면 모두가 무죄니까. 그렇지만 당신이 유죄면 모두가 유죄야. 당신은 그저 평범한 한 여자야. 이해해. 다 이해할 수 있어."
나는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개 올렸다. 그도 내 손에 그의 손을 포갰다. 우리는 미소를 짓고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이번에는 내가 말을 열었다. 용서받았다는 마음에 그 나흘동안 중 가장 밝은 목소리가 나왔다.
"나는 그것들을 받아들일 방법을 찾았어. 그래서 아무데도 가지 않아. 너랑 있으면 고통스러워 질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였어."
"그래, 당신이나 나나 처음 부터 알고 있던 것, 이 비를 멈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다는 거야."
"비는 그저 내릴 뿐이지."
"맞아. 비는 그저 내릴 뿐이야."
첫댓글 재및게 보구잇여요
잼있네요^^
와우~~
요우 재밋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