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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부마사태를 직접 둘러보고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라 직감한 김재규는
궁정동 밀실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갑니다.
자리에는 화려한 진수성찬, 시바스 리갈과 당대 최고의 요정들과 경호실장 차지철이 있었습니다.
부마사태에 대해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지만
술과 여자에 둘러쌓인 박정희에게 이런 소리는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고,
경호실장 차지철은 천국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 자리에서
업무상의 얘기를 꺼내 괜히 흥을 깨는 김재규를 못마땅해 하며 한마디 합니다.
"각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까짓 놈들 땡크로 밀어버리면 됩니다.
인구 800만명도 안되는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 정권은 200만명을 죽이고도 끄덕없는데
우리도 한 100만명 정도 죽여도 끄떡없습니다."
......
이후, 저녁 7시 42분
궁정동 밀실에서는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유명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의 10. 26사태.
수많은 사람들이 유신헌법이라는 이름 아래 안기부에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져간 70년대.
정권에 대한 아주 조그마한 비판적인 언급도 '긴급조치 9호' 가 선포되며 반역분자로 내몰렸습니다.
(이같은 유신헌법에 의해 실제 1979년 한해동안 구속된 사람만 무려 1230명이나 됐습니다)
빨갱이란 이름으로 죽거나 체포당한 사람이 지금까지도 공식적으로 그 수를 알 수 없는 그 시대.
차지철의 주둥아리에서 나온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 정권
대체 어떤 정권이었길래 박정희 정권이 '그들이 비하면 우리는 양반이다' 라고 역설했을까요?
캄보디아 학살의 내막을 아신다면......
'인간'이 미치면 어디까지 미치는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회의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세기 최대의 비극, 캄보디아 학살......
캄보디아는 1세기, 크메르족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세운 동남아시아 최초의 나라입니다.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고, 최초의 동남아시아 국가라는 자긍심도 있었으며,
9세기 경에는 앙코르문화의 기초를 이룩하며 문화계 쪽으로도 눈부신 발전을 보여준 나라가 캄보디아입니다.
그러나 캄보디아는 국가정세에서 평화로웠던 적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베트남과 태국의 국력이 점점 강해지며 중간에 있는 캄보디아를 위협하기에 이르렀고,
이같은 압력으로 인해 1400년경, 수도 앙코르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지경까지 이릅니다.
겨우겨우 나라의 이름만을 존속하며 살고 있던 그들에게.. 괴물이 다가옵니다.
한창 세계정복의 야욕에 빠져 있던 프랑스가 그 주인공입니다.
1863년, 프랑스는 캄보디아라는 나라를 손쉽게 식민치하 해버리고,
이같은 식민 통치는 2차대전 종전 후에도 몇십년 간 이어집니다.
그리고 1953년 드디어! 캄보디아는 프랑스에게 독립을 합니다.
근 100년간 이어져 온 식민치하 아래 감격적인 독립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가 알았을까요.
캄보디아의 독립이 비극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캄보디아 내의 정치적 상황은 상당한 격변을 맞이하며 흘러갔습니다.
시아누크가 세웠던 캄보디아 왕국은 1970년까지 이어졌으나,
1970년, 친미성향의 론 놀 이란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켜 시아누크를 해임하고
'캄보디아공화국'을 세우며 권력을 장악합니다.
쿠데타로 인해 권력을 실추한 시아누크는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하게 되고,
그 곳에서 '캄보디아민족통일전선'(일명 크메르 루즈)란 집단을 조직합니다.
전열을 정비해 캄보디아를 침공해서 권력을 탈환하는 것이 목적이었죠.
이 캄보디아민족통일전선은 중국의 지원을 받으며 현 캄보디아의 권력, 론 놀에 대항했고,
친미성향이었던 론 놀은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이에 맞서게 됩니다. 내전이 일어난 것이죠.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 중이었는데, 베트남과 지리적으로 붙어있는 캄보디아에게
현 정권, 론 놀 에게 시아누크의 '사회주의 전선'에 대항하라며 원조를 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에 힘없는 캄보디아만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는꼴이 되었던 거죠.
베트남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 론 놀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시아누크 대항군에 대공세를 전개합니다.
당시 미국과 론 놀이 행한 무자비한 공습으로 인해 많은 수의 캄보디아 시민들은
시아누크 대항군(크메르 루즈)의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런 불안한 캄보디아 국내정세 속에서 미국과 베트남 전쟁이 막을 내리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자 미국은 캄보디아의 론 놀에게 해주던 원조를 일체 끊어버리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이상 캄보디아에게 원조를 해주는 건 전혀 미국에게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따라서 압도적으로 유리해진 크메르 루즈 측은 1975년 4월,
드디어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을 함락하고 론 놀의 캄보디아공화국을 붕괴시킵니다.
캄보디아 국민들은 좋아했으나.. 비극의 시작은 지금부터였습니다.
정권의 급작스런 이동으로 혼란스러운 캄보디아의 국내정세가 안정 되어진건
1976년 4월, 폴 포트가 수상으로 민주캄보디아정부(폴포츠 정권)가 발족되어진 그 때부터였습니다.
폴 포트.
사후 세계에 지옥이 존재한다면,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고 있어야 할 20세기 최악의 학살자.
폴 포트의 피의 정치는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폴 포트가 취임하고 나서 가장 먼저 했던 정책은
수도 프놈펜을 비롯한 대도시의 주민들을 강제로 농촌으로 이동시킨 작업이었습니다.
폴 포트 체제의 기반은 '집단화'와 '협동조합화'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도시 주민들을 농촌으로 이주시켜 노동력에 투입시키려 한 것이죠.
이 강제이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죽여버렸습니다.
도시에서 하룻밤 새에 농촌으로 터를 옮긴 이들은 24시간 내내 정권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식사는 집단식당에서 식사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수준의 식사를 배급받았고,
쌀이나 농작물을 비축한다는 생각은 아예 할 수 조차 없었습니다.
지옥같은 이 생활에서 도주란 없었습니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나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감옥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들은 농업 외에도 운하, 댐, 건물, 다리 건설등에 강제로 투입되며
하루 15시간 이상의 혹독한 노동을 해야했고,
병원이나 약국, 학교와 같은 시설은 이들 사이에선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화폐란 개념은 사라졌습니다. 이런 정책 아래 화폐는 필요 없다는게 폴 포트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토할 것 같은 노동 속에서 주민들은 하나씩 쓰러져갔습니다.
쓰러지면 병원을 이용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자리에서 죽는 수밖에...
어떤 이들은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국민들이 기아와 혹독한 노동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폴 포트가 했던 말로 그의 정신사상을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농업에서 외국 기계를 사용한다는 사고방식은 공산주의자의 사고방식이 아니다.
자본주의자의 사고방식이다. 기계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사람의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나의 방침이다."
"학교는 모두 폐쇠한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미 제국주의만을 가르쳐왔다.
국민들은 오늘부터 공산주의자이다. 지금부터 논밭에서 배워야 한다."
..이런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한 나라를 통치했다니..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이 무능력한 지도자의 원시적 정책의 실패는 누가 보아도 당연한 것이었고,
이러한 말도 안되는 정책으로 인해 1000만 달러의 수출에 비해 수입은
1억 달러라는 엄청난 차이를 기록한 것은 그다지 놀라울 일이 아니었습니다.
폴 포트의 통치아래 사람들은 수없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친미성향의 태도를 보인 자는 무조건 죽음을 당했고,
미국에 관해 사소한 것이라도 언급하는 날에도 죽음이 있었습니다.
농업중심의 사회에서 쓸모가 없는 교수나 의사, 선생님, 학자 같은 사람들은 죽여버렸습니다.
또한,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여자와 노인 아이들까지도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피의 통치 아래, 캄보디아 인들에게 '혁명'은 없었습니다.
베트남에서 혁명교육을 받은 수많은 캄보디아 혁명가들은 혁명의 뜻을 채 펼쳐 보기도 전에
캄보디아로 오자 마자 귀신같이 잡혀들어가 생명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 살해 당한 혁명가들의 숫자만 약 500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폴 포트 정권에 대해 국민들은 분노를 엄청난 분노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집단화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는 항상 수많은 희생자만 낳을 뿐이었습니다.
시위 참가자가 늘어나도 더더욱 많은 사망자만 나왔을 뿐, 전혀 진전이 없었습니다.
'킬링필드'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영화로도 제작된 적이 있죠.. 대규모 집단 학살장을 말하는 킬링필드.
정책에 반대하고, 법규를 어기고, 사상이 다른 사람들을 한데 모아 죽였던 학살장소.
이 킬링필드가 바로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20만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처형 당했다고 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보다 더 끔찍했던 지옥의 장소.
(이 킬링필드는 캄보디아에 약 1200곳이 있다고 합니다.)
농촌에서는 사람들이 지쳐서 쓰러지거나, 감시자에 의해 죽음을 당했습니다.
쓰러진 시체는 수습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방치되있기 일수였고,
썩어 들어가는 시체 주위로 파리와 까마귀 떼들이 날아와 시체를 파먹는
참혹한 광경은 공기처럼 흔한 모습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끝없는 암흑의 통치..
이 당시에 폴 포트에게 목숨을 잃었던 수는 전체인구 800만명 중 200만명 이었습니다.
... 상상이 가시나요? 게다가 폴 포트가 통치했던 기간은 겨우 4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4년 동안 200만명의 희생자.... 상상을 초월한 미치광이였습니다.
폴 포트 정권은 1978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침공 하면서 1979년 막을 내립니다.
하지만 폴 포트 정권의 폐혜는 캄보디아 전역에 나타났습니다.
폴 포트가 무너졌는데도 먹을게 없어 굶어죽는 시민들의 수는 줄지 않았고,
내전기간동안 땅 속에 파뭍어 놓았던 캄보디아 전역에 퍼져있는 약 700만개의 지뢰는 사람을 불구로 만들어 놓습니다.
이 지뢰에 대한 피해는 90년대에 들어오면서까지 매달 400명의 사람들이 지뢰로 인해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땅을 경작하기 위해 곡괭이로 땅을 찍으면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람의 시체가 나오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그야말로.. 끝나지 않은 지옥이었습니다.
베트남군이 권력을 장악한 그 때에도 캄보디아의 분위기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폴 포트는 해외에서 세력을 키워 베트남군을 계속해서 침공합니다.
이 끝없는 내전은 무려 15년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결국 1989년 베트남군이 캄보디아에서 철수합니다.
지독한 전쟁의 끝이 보인 듯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누가 캄보디아의 정치권을 장악하는지에 대한 전쟁이 또 시작됩니다.
전쟁과 캄보디아는 도저히 뗄레야 뗄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이 보였습니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이보다 비극적인 운명이 세상에 어딨을까요.
똑같은 인간인데 왜 어떤 생명은 전쟁의 화약냄새 속에서 태어나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처절히 싸워야 할까요..
이 내전은 끝이라곤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1998년, 훈센 총리가 집권하며 캄보디아는 아주 조금씩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21세기가 넘어서야 WTO 가입을 통해 해외투자 및 대규모 사회기반시설이 건설되었고,
외국인 직접 투자에 커다란 비중을 두며 조금씩 캄보디아는 전쟁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나면서
경제 성장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만, 캄보디아 국민들의 생활 수준은 아직까지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폴 포트란 인간은 1998년 숨을 거둡니다. '처형'이 아닌 병사로...)
고등학생 때, 캄보디아란 나라를 알면서
캄보디아를 알아가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죄없이 죽어야만 했던 사람들을 보면서도 무척 슬펐지만,
캄보디아라는 나라.. 우리나라와 정말 너무나도 닮아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앙코르문화로 눈부시게 화려한 예술을 보여준 캄보디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우던 우리나라
이웃 나라들의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억압 받고, 식민 통치 지배에 신음하고..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조국 해방의 기쁨을 채 맛보기도 전에, 정권 분열과 내전 발발..
독재자들에 의한 인권 탄압, 불순분자라는 이름아래 사라져간 수많은 사람들..
정말 너무나 징그러울 정도로 우리나라와 닮아있었습니다.
내전으로 황폐해져버린, 희망이라곤 전혀 없을 것 같은 땅의 모습과
기아와 질병에 생명이 사라져간 그 모습들 까지도...
20세기가 낳은 최악의 비극, 캄보디아 학살..
이 글을 보고 있는 많은 분들의 분노가 사라져간 분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위로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불평하며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항상 꿈꿔오며, 이 시대에 단 1초라도
살고 싶었던 게 소원이었던 분들도 계셨다는 사실 항상 잊지 않으며 살아가려 합니다..
고통의 세월을 보낸 그들에게 남은 건 이제 찬란하디 찬란한 '희망의 미래'였으면 좋겠습니다.
총, 칼보다 무서웠던 이데올로기 아래
소중한 생명을 잃어야만 했던 수많은 분들을 애도하며..
킬링필드는 정말 미국인들이 자신 보호할려고 만든 영화 이미 그 때 자신들도 전쟁을 위해서 한차례 킬링 필드했었죠. 프놈펜에 가면 뚜얼슬랭이라는 수용소가 있는데 꼭 가보세요~! 거기 4년동안 200여만 사람들이 잡혀들어왔는데 딱6명만이 생존했어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좋은자료 두고두고 볼려고 스크랩했어요..캄보디아 꼭 한번 여행가봐야지하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일들이 있었는지 몰랐네요.님 덕분에 많이 배우고 갑니다..앞으로도 좋은 자료 있으면 올려주시길..감사해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편안하고 안전한 사회에 살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군요..
와 정말 잘읽었습니다. 들어보기만했지 이렇게 자세히 알게된건 처음이에요 아 눈물날라하네요 ㅜㅜ
parismatch님 솔직히 말하기 그렇지만 몰랐던이야기였습니다.고맙습니다.알려주셔서.....휴 저는 지금 이시대에 이렇게 컴퓨터 앞에앉아서 이러고있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얼마나 고마운지 이제야 알았습니다.좋은게시물 앞으로도 올려주세요.
캄보디아 킬링필드에 가서 느꼈던 놀람과 공포가 다시금 기억나네요. 생각하게 하는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캄보디아 뿐 아니라, 삶과 자유와 행복을 위해 피흘렸던 세상의 수많은 민중들에게 경의를...ㅠㅠ
좋은 글 정말 감사해요 ~ 오늘 좋은 것 배웠네요 ~
님 진짜 잘읽었어요~~ 고마워요!
좋은글 잘읽었어요! 고맙습니다
저런 인간은 진짜 처형시켜야 함 폴포트.... 이 세상에 악마가 있다면 그 사람일 것임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미쳤어 정말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저 깜보디아 갔다왔는데요..그떄 가이드가 해준말이...그 깜보디아 독재자가 제일 존경했던 인물이 박정희 였대요.깜보디아 정말 못살아요...... 심해여 진짜 ㅠㅠ
님 자료 정말 좋네요. 감사합니다! 개인카페로 스크랩 해 갈게요. 이런 자료 너무 좋아요. ㅠㅠ
잘읽었어요~ㅠㅠ. 정말 너무 슬프네요.ㅜㅜㅜ
캄보디아 다녀오고 킬링필드 다큐 받아봤는데 정말 ㄷㄷㄷ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게 바로 사람인거같아요 여행 마지막날 유골 모셔둔 사찰에 갔는데 두개골이 함몰된 유골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정말 눈물나더라고요 ㅠㅠ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외국에 있고 동아리는 캄보디아에 대한 동아리를 하고 있는데 그동안 좀 무관심했는데 여러가지면을 많이 알고 가게 됩니다. 기회가 있으면 꼭 캄보디아에 가고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끔찍하네요
정말 많이 배우고 가요~ 소름이 돋네요 ㅋㅋㅋ 정수리가 싸해졌습니다
담아갑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