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 | 탁효정 |
출간일 | : | 2021년 11월 15일 |
판 형 | : | 152×225mm |
분 량 | : | 368쪽 |
ISBN | : | 979-11-90429-17-7 93910 |
정 가 | : | 20,000원 |
발행처 | : | 도서출판 역사산책 |
도서문의 | : | 031-969-2004 |
* 국내도서>역사문화>한국사>조선시대
[책소개]
숭유억불의 시대,
조선에서 왕릉을 지킨 것은 사찰이었다!
이 책은 조선시대 왕릉을 수호했던 사찰을 학술적으로 다룬 첫 번째 연구서이다. 조선시대는 흔히 숭유억불의 시대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왕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왕릉에는 500여 년간 왕릉의 제사를 돕고 왕릉을 보호 · 관리하는 사찰들이 설치되었다.
조선초기에 재궁으로 불리던 이들 사찰은 조선중기에는 능침사로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조포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조금씩 역할이 변모해갔다. 조선 왕릉수호사찰은 왕실 불심의 기반과 승군 노동력의 우수성을 활용하려는 국가정책, 그리고 억불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승려들의 노력을 기반으로 조선시대 내내 유지되었다.
이 책은 이들 사찰을 통해 조선 왕릉이 단순히 유교적 시설물이 아니라 한국인의 내세신앙이 내재된 유불융합의 문화적 산물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본문 중에서]
p. 15
왜 왕릉에 사찰을 설치했을까
조선시대 대부분의 왕릉에는 능의 제사와 능역 보호를 담당한 사찰이 설치되었다. 조선의 500여 년 역사와 함께 지속된 이들 사찰은 재궁(齋宮), 능침사(陵寢寺), 조포사(造泡寺)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으며 그 명칭에 따라 담당하는 역할도 조금씩 변모했다.
왕릉에 절을 세운 것은 불교가 동아시아에 유입될 당시부터 확인된다. 중국에서는 불교가 처음 유입된 한당(漢唐)대부터,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건립되기 시작했다. 불교 유입 당시부터 능묘에 사찰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능침사에 동아시아의 공통적인 희원(希願)이 깃들어 있음 을 의미한다.
p. 19
왕릉수호사찰의 또다른 이름 ‘능침사’
왕릉을 보호하는 사찰들은 능침사(陵寢寺), 능사(陵寺), 재궁(齋宮), 재사(齋寺), 재사(齋舍), 조포사(造泡寺), 조포속사(造泡屬寺)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능침사와 능사는 광의적으로는 왕릉의 제사와 관련된 사찰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능사라는 용어가 왕릉명과 합쳐져 정릉사(貞陵寺), 광릉사(光陵寺), 선릉사(宣陵寺), 정릉사(靖陵寺)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협의적 의미의 능침사는 사찰 내에 왕이나 왕비의 위패를 봉안하고 정기적으로 능 주인의 제사를 담당한 독립된 사찰을 의미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능침사라는 용어는 총 31건의 기사에 등장하는데, 주로 성종~명종대에 사용되었다.
p. 24
조선 왕릉에 딸린 62개 수호사찰의 의미
이 책에서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왕릉, 즉 왕과 왕비로 세상을 떠났거나 사후에 추존된 인물들이 묻힌 총 50기 능의 수호사찰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고,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묘는 제외하였다. 50기의 왕릉에는 대부분 사찰이 설치돼 있었는데, 그 중 절 이름이 확인되는 사찰은 62개(재궁명 미상 및 중복 제외)이다. 다양한 형태의 왕릉 관련 사찰들을 모두 연구대상에 포함시켜, 조선시대 왕릉수호사찰의 개념과 범주가 어떻게 변모했으며, 왕릉수호사찰의 역할이 시대별로 어떻게 바뀌어갔는지를 살펴보겠다.
p. 62
신라 성전사원(成典寺院)의 운영
신라를 비롯한 삼국에서는 현재까지 각 나라별로 한 곳의 능침사만 확인되고 있다. 발굴조사가 완료된 왕릉에 비해 아직 발굴되지 않은 왕릉이 훨씬 많기 때문에 쉽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고려, 백제, 신라대까지는 능침에 사찰을 두는 것이 제도적으로 정립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구려의 정릉사, 백제의 능산리사원, 신라의 감은사는 왕의 개인적인 불교신앙 내지 선왕의 선양작업을 위해 능 바로 곁에 사찰을 설치한 특수한 사례들로 파악된다.
p. 98
국왕의 정치적 기반
고려의 역대 왕들은 선왕이나 자신의 진전사원을 세워 왕권의 기반을 확보하고 불교계를 통제하는 구심점으로 삼고자 하였다. 태조가 개경 10사(寺)를 창건한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이후 광종은 봉은사, 불일사(佛日寺), 숭선사(崇善寺) 등을 창건하고 태조와 신명왕후의 원당으로 삼은 후 자주 법회를 개최했다. 여기에는 왕권을 강화하고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내재돼 있었다.
p. 147
노산군묘를 수호한 노릉암
장릉 부근에는 단종과 관련된 두 개의 사찰이 위치해 있다. 한 곳은 금몽암(禁夢庵)으로 단종이 살아생전 즐겨 찾던 암자로 전해지며, 또 한 곳은 보덕사(報德寺)로 노산군묘가 장릉으로 추봉되면서 새롭게 조성된 절이다.
금몽암은 단종의 유배 이전부터 영월에 있던 절이다. 원래의 이름은 지덕암(旨德庵)이었으나 단종이 궁궐[宮禁]에 있을 당시 꿈[夢] 속에서 본 사찰[庵]이라 금몽암으로 개칭했다고 전해진다. 양란을 거치면서 전소되었다가 광해군대에 영월군수 김택룡(金澤龍)이 승려들을 모집하여 중창한 뒤부터 노릉암(魯陵庵)으로 불렸다. 이때부터 노릉암의 승려들이 노산군묘를 수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p. 183
열성조의 위패 봉안
봉은사에는 성종과 정현왕후의 위패를 비롯해 총 12명의 열성조(列聖朝) 위패가 봉안돼 있었다. 선정릉지「봉은사사적」에는 봉은사의 여러 건물들이 열거돼 있는데, 이 중 금속루(金粟樓)라는 건물에 대해 “옛날에는 누각 위에 12위패를 봉안하여 어선루(御宣樓)라 하였는데, 중간에 수진궁(壽進宮)으로 위패를 이봉(移奉)하여 금속루로 명칭이 바뀌었다.”라고 부기돼 있다. 이들 12위패 중에는 성종과 정현왕후, 중종, 문정왕후 등이 포함돼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12명의 봉안 대상이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실 내에 12명의 왕과 왕비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는 사실은 봉은사가 선·정릉 능침사의 기능을 넘어 왕실의 위축원당으로 역할하였음을 알려준다.
p. 230
홍릉 조포사: 진관사, 수국사
홍릉의 능침사는 별도로 지정되지 않았으며 수국사와 진관사가 조포사로 지정되었다.
영조대 홍릉을 비롯한 서오릉의 조포사는 수국사였으나 조포역이 막중해 절이 피폐해지자, 1795년(정조 19) 홍릉과 창릉의 조포역은 진관사로 이속되었다. 서오릉에서도 홍릉과 창릉은 북쪽에 위치해 있어 진관사에 이속시키고, 경릉, 익릉, 명릉은 남쪽에 있어 수국사에 배속시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진관사가 폐사되면서 다시 수국사가 조포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 진관사가 중창되면서 1802년(순조 2) 창릉과 홍릉 의 조포역은 진관사로 옮겨가게 되었다.
p. 265
12기의 능에 설치한 불교식 재궁
조선의 개국초에 해당되는 태조~태종대에는 함경도에 위치한 이성계 4대조의 8릉과 신덕왕후의 정릉과 태조의 건원릉, 신의왕후의 제릉, 정안왕후의 후릉 등 총 12기의 능이 정비되었다. 이 시기에 조성된 모든 왕릉에는 불교식 시설이 설치되었다.
p. 285
능역 밖으로 밀려나다
예종~명종대에 설치된 6곳의 능침사 중 정인사를 제외한 능침사는 모두 능역 밖에 설치되었다.
조선초의 불교식 재궁은 대부분 능침 내에서도 왕릉이 바라보이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왕릉의 부속시설이라는 의미로 재궁이라 칭했다. 하지만 예종대 이후에 설치된 능침사들은 대부분 능역 밖에 위치했고 조선초기보다 좀 더 떨어진 곳에 조성되었다. 조선초에 재궁이라 칭해지던 왕릉수호사찰은 성종대부터 능침사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이곳이 능역 안에 포함된 부속시설이 아니라 독립된 사찰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p. 321
왕의 위패를 봉안한 어실(御室)
조선시대 능침사는 내세추복을 발원하는 불교 시설인 동시에 유교의 효를 실천하는 공간이었다. 불교의 기복설을 부정하던 태종이 부모를 위해 능 옆에 절을 세운 것이나, 정조가 사친의 능원 옆에 조포사를 마련하고 위패를 봉안한 것은 ‘효’를 실천한다는 명분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불교의 축원 장소이자 유교 윤리의 실천 공간이라는 두 가지 특성은 능침사의 건축 구조에도 반영되었다. 능침사 안에 설치한 ‘어실’은 이곳 이 불교의 신앙공간이자 유교적 조상숭배시설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p. 337
산릉 관리의 비용 절감
조선전기 능침사에는 노비와 위전이 지급되었던 반면 조선후기 왕릉의 조포사에는 경제적 지원이 거의 없었고, 막대한 잡역과 무대가성 승역이 부과되었다.
조선초기와 중기에는 능침사가 제사를 직접 주관했기 때문에 왕실로부터 제사 비용 즉 사위전을 받았다. 연산군대 몰수되었던 능침사의 사사전은 중종반정 직후 환급되었으며, 중종대와 명종대에 내원당 수세지가 내수사로 속공될 때도 능침사의 수세전은 제외되었다. 능침사의 위전이 보호받은 것은 이곳이 왕릉을 관리하고 선왕 선후의 추천재를 주관하는 기구였기 때문이었다. ‘제사 비용의 보전’이라는 명복 하에 능침 사의 사위전은 조선전기 내내 보호받을 수 있었다.
p. 342
유불융합의 조상숭배시설
조선전기 능침사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사찰인 동시에 유교식 사당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선왕 선후의 극락왕생을 발원했다는 점에서 불교식 추모공간이었지만, 설립 명분이나 건물 형태에 있어서는 유교식 조상숭배시설의 역할을 담당했다.
[차 례]
책을 내며
서 론 1 5
왜 왕릉에 사찰을 설치했을까 | 조선 왕릉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 수호사찰의 존재 | 왕릉수호사찰의 또 다른 이름 ‘능침사’ | 왕릉수호사찰의 시기 구분 | 조선 왕릉수호사찰 관련 자료 | 조선 왕릉에 딸린 62개 수호사찰의 의미
1부 왕릉수호사찰의 기원과 변천
1장 중국 역대 왕조의 능침사 29
2장 삼국시대의 왕릉수호사찰 42
3장 고려시대 왕릉수호사찰 71
2부 조선시대 왕릉수호사찰 현황
4장 조선초기의 왕릉수호사찰 103
5장 조선중기의 왕릉수호사찰 155
6장 조선후기의 왕릉수호사찰 204
3부 조선 왕릉수호사찰의 변화와 특징
7장 조선초기: 불교식 재궁의 설치 265
8장 조선중기: 왕릉 제도에서 소외되다 276
9장 조선후기: 조포사의 등장 286
결론: 조선 왕릉수호사찰의 역사적 의미 321
1. 건축적 의미: 사찰 안에 들어선 유교식 사당 321
왕의 위패를 봉안한 어실 | 폐쇄적 가람 배치
2. 경제적 의미: 능의 효율적 관리와 비용 절감 334
능역의 보호 | 산릉 관리의 비용 절감
3. 종교적 의미: 효(孝)와 정토(淨土)의 결합 340
정토왕생을 발원한 기도처 | 유불융합의 조상숭배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