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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 12,13-17
오늘 유다인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님께던진 질문은 단순한 세금 문제가 아닙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당시 인두세는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주권의 문제였습니다. 세금을 낸다는 것은 로마 황제의 통치를 인정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내라"고 하면 민족적 기대를 저버린 메시아가 되고,
"내지 말라"고 하면
반란 선동자로 고발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곧바로 답하지 않으시고 데나리온을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당시 데나리온에는 황제의 초상과 함께 황제를 신적 존재로 높이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유다인의 종교 감각으로 보면 우상적 요소가 강한 물건입니다.
예수님은 그 동전을 보여 주시며 묻습니다.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상대방은 "황제의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사실 승부는 이미 여기서 끝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화폐와 경제 체계 안에서 이미 로마 제국의 질서에 참여하고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셈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십니다. 로마 체제를 이용하면서도 마치 순수한 신앙적 고민인 것처럼 질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단순한 반격이 아닙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절반입니다.
첫 번째 절반만 보면
마치 시민의 의무에 대한 가르침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두 번째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직접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독자는 스스로 답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을 아는 유다인이라면 자연스럽게 떠올렸을 것입니다.
동전에 새겨진 것은 황제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황제에게 돌려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새겨진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과 닮음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것은 어떤 재물이 아니라 인간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세금 문제를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 질문을 옮기십니다.
"동전은 누구의 형상을 지녔는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너는 누구의 형상을 지녔는가?"
입니다.
이것이 이 본문의 깊이입니다.
예수님은 황제의 권력을 부정하지도, 절대화하지도 않으십니다. 세상 권력은 제한된 영역 안에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황제는 동전을 요구할 수 있지만 인간의 마음까지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정치에 대한 가르침이라기보다 하느님의 모상이 새겨진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내 삶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누구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가?
황제의 형상이 찍힌 동전은 황제에게 돌아가지만,
하느님의 형상이 새겨진 우리 인간은 결국 하느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마르코는 이 장면 뒤에 곧바로 예수님의 수난을 배치합니다. 세상의 권력은 결국 예수님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 자신을 온전히 아버지께 내어 맡기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라는 말씀을 가장 완전하게 사신 분입니다.
따라서 이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하느님께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가 아니라, 과연 나 자신을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있는가?
인간존재의 근본을 건드리고 계십니다.
그것이 그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했던 질문을 통해 드러난 참된 물음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12, 17)
(정 루치아나 수녀님)
6월2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마르코 12,13-17
미래의 유토피아는 없다
워싱턴 D.C. 지하철 랑팡역,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에 야구 모자를 눌러 쓴 청년이 낡은 바이올린을 꺼내 들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연주한 지 6분이 지났을 때 한 사람이 벽에 기대어 음악을 들었고 43분 동안 일곱 명이 청년의 바이올린 연주를 1분 남짓 지켜보았습니다.
스물일곱 명이 바이올린 케이스에 돈을 넣었고 그렇게 모인 돈은 32달러 17센트였습니다.
다음날 신문을 펼친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지하철역에서 공연하던 청년은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날 350만 달러(한화가치 30억 원)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들고 43분 동안 멋진 연주를 했습니다.
그러나 현장을 오가던 1,070명은 단 1초도 그를 쳐다보지 않고 바쁘게 지나갔습니다.
이 공연을 제안한 ‘워싱턴 포스트’는 현대인이 일상에 쫓겨 자기 주변에 존재하는 소중한 것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현대인의 문제를 꼬집고 싶었던 것입니다.
며칠 전 한 신자분과 대화 중 유토피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언젠가 건설될 하느님 나라. 그것이 유토피아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종말을 향해 가고 있고 결국 주님이 오실 때는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한 대탕녀 바빌론처럼 영원한 바다의 심연속으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많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아마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며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제1독서에서 마지막 날에 이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2베드 3,12)
그렇다면 미래에 유토피아가 이 세상에 건설될 것이라는 희망은 버리는 게 좋습니다.
사실 미래의 유토피아를 말하는 이들은 지금의 행복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요즘 선거철이라 그런지 운전하다보면 여러 후보자들의 공약이 걸린 현수막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은 자주 헛웃음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여전히 미래의 유토피아 이야기를 하는 공약들이 많습니다.
이런 공약들이 먹히는 이유는 우리는 여전히 현재의 상태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가리키는 곳만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유토피아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미래의 유토피아를 위해 지금 당장 기도하고 묵상하고 주님에 대해 더 알아가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하는지를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동전 하나를 가져와보라고 하십니다.
그 동전에는 로마 황제의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돈에 집착하느냐고 하시며 황제에게 줘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에나 집중하자고 하십니다.
하지만 돈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현실적이고 이상주의자라고 말합니다.
돈이 참 행복을 가져다줄 현실적인 대안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행복은 여전히 미래에 돈을 충분히 벌게 되었을 그 때에 있습니다.
우리가 뽑아주어야 할 지도자들은 ‘지금’을 말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미래의 유토피아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하느님 나라’를 말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이 순간 마음만 바꾸어먹으면 만날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입니다.
돈과 상관이 없습니다.
미래에 건설될 눈에 보이는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행복은 지금 이 순간 눈을 감으면 내 안에서 펼쳐집니다.
지금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는 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라져가는 이 세상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그나마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이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대한 비전이 없으셨습니다.
노예제도를 그대로 인정하셨고 로마의 지배를 받는 것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로마에 세금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선거에 나가셨다면 아무도 찍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우리 옆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만 당부하셨습니다.
배부른 돼지를 만들어주겠다는 이들을 조심해야합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지금의 부족한 현실이 아니라 미래의 유토피아 건설에 대한 환상입니다.
그리고 그 환상을 심어주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줘 버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것인 우리 자신을 매일 주님의 것으로 봉헌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9주간 화요일 강론>
(2026. 6. 2. 화)(마르 12,13-17)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그 뒤에 그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마르 12,13-17)>
1) 로마제국의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것은, 로마제국의 경제 질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실생활에서 그렇게 살고 있으면서도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로 고민하는 척 하는 것, 그것은 위선입니다.
예수님께서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위선을 스스로 드러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드린 데나리온은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라는 말씀은, 세금을 내라는 말씀도 아니고, 내지 말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세금을 내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생각되면 내고,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내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각자 양심대로 판단해서 행동하여라.”입니다.
<당시에는 아직 로마제국의 종교박해가 없었고,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을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일로 생각할 만한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셨을까?
정확한 일은 알 수 없지만, 내셨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호구조사령 때문에 본적지인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 등록을 한 것을 생각하면,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또 당연하게 로마법을 따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가?” 라는 질문에서, 예수님의 재판 때 있었던 일이 연상됩니다.
“빌라도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여러분의 임금이오.’ 그러자 그들이 외쳤다.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그들에게 ‘여러분의 임금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이오?’
하고 물으니, 수석 사제들이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 하고 대답하였다(요한 19,14ㄴ-15).”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 라는 말은, 흥분 상태에서 생각 없이 한 말이 아니라, 평소의 생각대로 한 말인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2)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라는 말씀에는, “온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이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것과 황제의 것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황제의 것은 전부 다, 황제의 목숨까지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황제 자신도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황제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면?
그러면 신앙인들은 그런 황제에게 복종하면 안 되고, 세금 내는 것도 거부해야 합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란 있을 수 없고, 현재의 권위들도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지배자는 그대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이에게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조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조세를 내고 관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관세를 내며,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하십시오(로마 13,1ㄴ.4ㄱ.7).”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생각하여, 모든 인간 제도에 복종하십시오.
여러분이 선을 행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자유인으로서 행동하십시오.
그러나 자유를 악행의 구실로 삼지 말고, 하느님의 종으로서 행동하십시오.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형제 공동체를 사랑하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임금을 존경하십시오(1베드 2,13ㄱ.15-17).”
바오로 사도의 말과 베드로 사도의 말은 같은 가르침입니다.
인간 세상의 법과 제도를 존중하고 따르는 일의 기준은 ‘하느님의 뜻’(하느님의 선)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선을 거스르는 법과 제도라면 복종하면 안 된다.”입니다.
<“악법은 법이 아니다.”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를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종교인들은 정치에 간섭하지 마라.”로 해석하는 것은 독재 정권이 흔히 하는 일입니다.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뜻과 선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정치 문제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의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6월2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 12,13-17
지혜로 충만하신 예수님의 놀라운 대응!
예수님 시대 식민지 유다 사회 안에서 나름 어깨 힘주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었습니다.
최근 그들의 심기를 무척이나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가 있었으니, 마치 혜성처럼 떠올라 군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예수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님께로 집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 입에서 나오는 한 말씀 한 말씀이 유다 본산을 강력하게 성토하고 비판하는 내용이었으므로,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힘을 합칩니다.
머리 좋고 언변이 탁월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보낸 이유는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바리사이와 헤로데 당원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잘 어울리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공공의 적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의기투합한 것입니다.
사악한 자들은 먼저 감언이설로 예수님을 칭찬합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마르 12,14)
웬일로 이렇게 호의적인 모습을?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즉시 난감한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여기서 말하는 세금은 인두세를 가리킵니다.
이 세금은 로마의 은화로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불과 이틀 전에 메시아로 불리셨고, 또 메시아로서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바쳐야 한다.’고 대답하시면 백성들 앞에서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됩니다.
인두세는 유다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방인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는 가장 증오를 받던 표지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바치지 말라.’고 대답하신다면, 제국에 대한 반역이며 혁명가로 오해받게 됩니다.
적대자들은 이 질문을 통해 예수님을 로마의 적, 폭동의 선동자로 몰아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난감한 순간이었습니다.
지혜로 충만하신 예수님의 대응이 놀랍습니다.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라 하십니다.
데나리온은 세금 바칠 때 통용되던 은화였습니다.
당시 데나리온 동전에는 황제의 초상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절묘한 마무리 말씀으로 위기를 넘기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유다인들이 식민지 안에서 황제의 돈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카이사르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리를 더럽히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십니다.
국가 권위와 종교 권위가 저마다 적정한 범위 안에 머문다면 양쪽 다 정당한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