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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608_수요일_06:00pm
제9회 다음작가展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INSA ART CENTER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3층Tel. +82.2.736.1020
2011년 6월 8일부터 인사아트센터 전시장에서는 2010년 제9회 다음작가상 수상자로 선정된 박형근 작가가 일년 동안의 작업성과를 선보인다.9회 수상자인 박형근의 시선은 숲이라는 태고의 공간에 머무르고 있다. 그가 2003년부터 현재까지 Untitled, Tenseless 그리고 A Voyage라는 타이틀로 꾸준히 보여준 그곳의 이야기들은 고도화된 도시 사회에서 멀어져 있는 자연에 대한 색다른 감성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번 다음작가 전시을 통해 첫 선을 보이는 『금단의 숲 Forbidden Forest』에서 작가는 전설과 신화의 이미지를 부활시키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숲은 오랜 경외의 대상이었다. 생명의 기운이 깃든 공간이면서도 동시에 불안과 공포를 품고 있기에 숲에는 항상 탄생과 죽음이라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가 함께 해왔다. 때문에 숲은 많은 문화권의 전설 속에서 신과 영웅들이 존재하는 믿음과 주술의 신령한 공간이거나 혹은 알 수 없는 적들의 영역으로 등장한다. 이제는 다른 자연 공간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보호하고 유지해야하는 대상이 되었지만, 오랜 인류 역사를 통해 남아있는 뿌리 깊은 향수는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남아있다.제주도가 고향인 작가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땅에서 오래 전 사람들이 마주했을 경외와 공포, 신비로움을 담아낸 이 작품들은 정교한 화면 구성과 색상이라는 사진적 요소를 통해 깊이 있는 양면적 혼란을 드러낸다. 과하리만큼 안정감 있는 프레임은 중첩된 시간의 무게를, 정교하게 조절되어 겹겹이 쌓인 청록은 생명과 죽음, 신비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리고 작가의 섬세한 직관을 통해 발현된 틈새의 긴장감은 박형근의 숲을 완성시키고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숲이라는 공간에서 오랜 기간 이어져온 시작도 끝도 없는 혼돈의 방황과 집착이 빚어낸 이 태고로의 회귀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오랜 예술의 태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
우리가 서있는 곳은 숲속이다. 울창한 잎과 가지들로 뒤덮인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단단한 어둠이다. 캄캄한 숲의 고요함을 뚫고 바깥의 빛들이 새어 들어온다. 작은 빛의 구멍들은 마치 밤하늘에 펼쳐져 있는 별들처럼 보인다. 바깥은 햇살이 가득 찬 한낮의 세계인 반면, 이곳은 그 빛이 닿지 않는 안쪽의 영역이다. 박형근의 2010년 작 「Cosmos」는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별빛들로 가득 찬 밤하늘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실 이 빛들은 숲의 바닥에서 올려다 본 하늘의 빛이다. 숲의 안쪽으로 비치는 무수한 작은 빛의 입자들을 기록한 이 '코스모스'는 두 가지 생각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는 실제로 나뭇잎들 사이로 점점이 새어 들어오는 하늘의 빛이 어두운 우주공간에 떠있는 별들처럼 보인다는 사실이고, 두 번째는 코스모스가 의미하는 것이 단지 물리적 우주 뿐 아니라 형이상학적, 종교적, 신화적 우주 등을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자의 경우 우주는 밤에 그것을 바라본 모습 즉, 어두운 공간과 그 안에서 빛을 발하는 행성들의 집합을 가리키는 것에 한정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에 대한 모든 연상과 유추의 형태들이 포함된다. 숲속의 어둠은 우주의 심연과 유사성을 띠며 잎사귀들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별빛과 유사성을 띤다. 유사성(similarity)은 우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 박형근의 작품들 속에서 '숲'은 특별한 지위를 지닌다.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된 그의 대형 사진들에서 숲은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테마다. 그가 보여주는 숲은 대체로 줄기와 이파리들이 무성한 짙은 녹음(綠陰)의 공간이다. 2004년의 「Tenseless」 연작 중 「Green Pond」와 「Red Hole」과 같은 작품들은 한 여름의 정기를 뿜어내는 식물의 군집 사이에 존재하는 아무도 모를 빈 공간들을 다루고 있다. 오래도록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것처럼 녹조로 뒤덮인 연못 한 가운데에는 낡은 공 하나가 떠 있다. 혹은 수풀에 가려진 짐승의 굴 같은 구멍에서는 붉은 흙이 뿜어져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장면들을 둘러싼 숲은 어둡고 짙은 녹색이다. 여기에 새벽녘 혹은 늦은 오후의 어스름한 빛이 더해져 화면의 톤은 날카로운 푸른색의 정조로 다가서고 있다. 어두운 숲과 그 안의 빈 공간. 그리고 빛이 사라지는 시간. 박형근의 사진에서 흥미로운 것은 시공간을 특징짓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어떻게 변주를 이루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이 숲 연작은 「금지된 숲」이라고 불린다. 관객은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숲'이라는 주제를 통해 이 숲의 어둠을 이해할 수 있다. 사진이 보여주는 장소는 '안'(inside)이다. 그것은 심지어 '안의 안쪽'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공간이다. 이곳은 은밀할 뿐 아니라 외부로부터 닫혀있다. 외부의 발길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장소, 혹은 '성소'(聖所, sanctuary)라고 부를 수 있을 이곳에 바깥의 희미한 빛이 겨우 다다라 사물들의 모습을 구별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 빛 역시 숲의 어둠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없어진다. 어떤 것이 '안'인가? 안쪽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두 개의 '안'을 떠올릴 수 있다. 첫째로, 푸코는 들뢰즈의 '주름'(pli)에 관한 대화에서 '안'(dedans)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바깥이 어떤 외재적 세계보다 더 먼 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어떤 내재적 세계보다 더 깊은 하나의 안쪽이 존재할 것인가?" 그리고 나서 자신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것은 바깥이 아닌 무엇인가가 아니라, 바로 정확히 바깥의 안쪽(le dedans du dehors)이다." 들뢰즈에게 있어 바깥은 사유가 비롯되는 장소이다. 그리고 그것에 안쪽이 있다면 그것은 사유로서는 생각하지도 생각할 수도 없는 어떤 것 즉, 사유되지 않은 것(l'impensé)이 된다. 그것은 "바깥을 이중화하고 확장하는 사유의 불가능성으로서 사유의 중심에 존재한다."(『푸코』, 미셸 푸코, 동문선, 2003, 147쪽) 두 번째는, 스피노자의 '단자'(monad) 내부에서 발견된다. 그것의 내부는 외부의 빛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어 절대적 어둠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그것의 절대적 심연으로부터 빛이 떠오른다. 그 빛을 이루는 무한한 빛의 입자들은 내부에 바깥의 세계를 반영하는 얼룩을 만들어낸다. 이 빛의 입자들은 단자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밝게 표현하고 멀리 있는 것들은 흐릿하게 표현한다. 이 빛은 개별자가 그것의 내부에 자신이 중심으로 하는 세계를 생성시키는 도구가 된다.(『주름』, 질 들뢰즈, 문학과 지성사, 2004) 그러므로 단자의 내부에 존재하는 어둠은 그것의 개별성을 가능하게 하는 '성소'인 것이다. 이 두 가지 예시는 어둠과 그것 안에 흩어져 있는 빛들이 어떻게 세계의 텍스트로서 개별자의 시선에 떠오르는 지에 대해 알려준다. ● 박형근의 사진은 밝은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어둠이 잔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의 위에 빛들이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진흑색(solid black)에 화면을 넓게 할애한다. 이 검은색은 그가 작품 활동 초기부터 지금까지 촬영의 시간을 어두운 새벽이나 여명으로 선택해 온 이유를 알려준다. 그의 사진에서 검은색은 몇 가지 중요한 역할을 담지하고 있다. 첫째로, 그것은 화면의 낮은 밝기에도 불구하고 높은 수준의 선예도(鮮銳度, sharpness)를 보장해준다. 대부분 어둠과 흐릿한 빛들로 뒤덮인 풍경 사진들의 경우, 짙은 푸른색의 계조와 디테일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검은 나무와 바위의 그림자들이다. 「Forbidden Forest」 연작은 이를 잘 보여준다. 둘째로, 그것은 화면의 관념적 분할을 가능하게 한다. 2009년 작인 「Fade away」나 「Double Screen」에서 보듯 어두운 공간은 비-현실적인 공간적 병치를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Fade away」에서 창문의 커튼과 벽에 드리워진 나뭇가지의 그림자는 실제로는 양립할 수 없는 빛의 얼룩들을 만들어내지만, 이렇듯 부조리한 장면을 의미심장하게 주시하도록 하는 것은 그것들을 둘러싼 어둠이다. 이는 「Double Screen」에서 마찬가지이다. 거울의 틀 안에 보이는 것은 빛의 반영이 아니라 거울의 틀 바깥의 실내보다 더 선명한 바깥의 풍경이다. 이러한 전치(轉置)를 가능하게 하는 것 역시 짙은 검은색의 윤곽들이다. 세 번째로, 검은색은 박형근의 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극적 장치로 사용된다. 검은색은 어둠을 표현할 뿐 아니라 화면을 무대로 전환한다. 가장 극적인 예는 「On the Edge」 연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사진들은 바닷가의 바위들과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바닷물의 자락을 화면의 하단에서 보여주고 있다. 화면의 3분의 2에 달하는 상단은 검은색으로 채워져 있다. 밤바다의 짙은 어둠을 묘사하는 것이겠지만 실제로 보이는 것은 편평한 검은 면일 뿐이다. 작가는 「가장자리에서」로 해석될 수 있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그 검은 화면이 가장자리 바깥을 가리키는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세계의 바깥, 깊이를 알 수 없는 사유의 심연처럼 보인다. 반대로 앞쪽의 바위들은 간단한 무대의 소품들처럼 밝은 조명에 비현실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관객은 깊이를 잃은 밤바다의 가장자리에 서있다. 박형근의 이 사진 연작에서 끝을 헤아릴 수 없는 바다의 공간은 검은색에 의해 관념적인 사유의 내부로 바뀌어 있다. 이 검은색을 바라보는 것은 그것이 함축하는 연상의 흔적들을 떠올리는 것이다. 절대적인 어둠은 얇은 검은색의 면이 된 것이다.
박형근의 사진에서는 종종 극적 연출(mise-en-scène)이 이루어진다. 때로는 화면 안의 장소에 놓인 소품들이나 안료들, 심지어 직접 출연한 작가 자신에 의해 연출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포토샵이나 리터치를 통한 적극적인 사진의 변형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사진적 순수함의 부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가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대형사진이 가능하게 하는 즉물적 사실성은 박형근에게 있어서는 단지 사진적 내러티브를 위한 여러 조건들 가운데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사진은 그 자체로 제시될 수도 있지만, 필요하다면 변형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예컨대 「The Third Moon」과 같은 작품에서 밤바다의 수평선 위에 여러 개의 달이 떠 있거나 「Cosmos」에서 보이는 나뭇잎들 사이의 햇살이 별빛처럼 보일 때, 작가는 의도적으로 그것을 연출하는 것이다. ● 사진이 지니고 있는 문제는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한 개의 프레임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방식을 해결해야 한다. 따라서 연극이나 영화와 달리 모든 연출은 이 유일한 순간 속에 응고되어 있다. 사진의 사실성이 그것의 존재이유(raison-d'ê̂tre)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단 한 순간 실제로 존재했던 것을 기록한다. 바르트(R. Barthes)는 사진에 '미래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것이 보여주는 것을 변형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모든 것은 사진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 완결되어 있다. 그가 사진을 '죽음에 대한 죽은 연극'(le théâ̂tre mort de la Mort)이라고 탄식한 것은 모든 사진이 지니고 있는 자기 완결성 즉, 시간의 고정(l'immobilisation du Temp)이 몰고 오는 모든 귀결의 부재(l'absence de conséquence) 때문이다.(『Chambre Claire』, Roland Barthes, Cahier du cinéma Gallimard Seuil, 1980, pp. 139-141) 장 마리 셰퍼(Jean-Marie Scheffer)의 지적처럼 사진은 어딘가에서 부유(浮遊)하고 있다. 그것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순간을 영원히 고정시킨다. (「L'image précaire- du dispositif photographique」, Jean-Marie Schaeffer, Seuil, 1987) 사진의 덧없음(précarité), 부동성(immobilité)은 반대로 그것을 예외적인 이미지로, 일종의 유령(specter)으로 만든다. 현실과 너무나 유사하게 흘러가는 영화적 이미지와 달리 그것은 우리의 뇌리에 기억의 형식으로 자리잡는다. ● 박형근의 사진은 기억의 형식에 개입한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어떤 귀결을 암시한다. 부정확하지만 고정되어 있는, 먼 곳에 있어 세부(detail)가 누락되어 있는, 극히 사실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런 기억을 우리는 '꿈'에서 찾을 수 있다. 박형근의 사진이 드러내는 아이러니는, 그것이 사진적 사실성을 극대화하는 장소에서 그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의 사진은 가장 해상도가 높은 작품들에서조차 사실성 외의 다른 레이어가 존재한다는 예감을 불러일으킨다. 가장 최근의 「Forbidden Forest」 연작에서 나타나는 숲의 이미지는 아무런 연출도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사실적인 숲이라기보다는 어딘지 숲의 관념들, 혹은 기억 속에 떠오른 숲처럼 보인다. 이는 이 사진들이 의도적으로 어두운 톤을 지니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숲은 금방이라도 밤의 정적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다. 그것은 꿈의 무서운 결말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영원한 장소에서의 안식을 암시한다. 사진의 부동성은 사진적 죽음의 관념과 겹쳐진다. 이것은 연극이지만 사진이 만들어내는 잔인하고 차가운 연극인 것이다. ● 2007년에서 2008년 사이에 제작된 「A Voyage」 연작은 박형근의 작품들 속에서 가장 징후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이 사진들에서 작가는 직접 연기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사진들은 대부분 대형카메라를 메고 추운 겨울산 속을 여행하면서 릴리즈 셔터를 사용해 혼자 찍은 것들이다. 사진 속에서 작가는 자신이 준비한 조명과 소품을 이용해 스스로 특정한 포즈를 취하고 그것을 기록한다. 이 사진들은 마치 스튜디오나 극장의 실내에서 찍은 사진들처럼 보이는데, 그 이유는 밤에 조명을 사용함으로써 대부분의 화면이 인공적인 빛과 어둠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화면 중앙에 드러나 있는 릴리즈 셔터 버튼의 케이블은 이런 느낌을 더욱 강조한다. 작가는 마치 배우가 그러하듯, 카메라의 앵글 안에서 기념비적인 퍼포먼스를 행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시간의 흐름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닌, 순간적인 기억을 위한 것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떨어지는 붉은 꽃잎들, 그리고 폭죽의 불꽃을 포함해서 모든 것은 정지된 순간을 위해 플래시 속에서 고정되어 있다. 심지어 하늘에 떠있는 달조차 작가의 손에 들린 반사판과 조명의 순간적인 번뜩임에 의해 덧없는 서사의 일부로 차용되어 있다. 이 사진들이 기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그것은 작가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 혹은 사진에 의해 잘려지는 시간적 단면일 것이다. 이것은 카메라 옵스큐라의 내부에 비춰지는 세계의 잔상 안으로 작가가 직접 들어서는 순간이기도 하다. ● 박형근의 사진에는 '달'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A Voyage」 연작의 「Full Moon」과 「Daytime Moon」 외에도 「Tenseless」 연작의 「The Third Moon」, 심지어 2003년의 「An Unknown Object」의 수풀 사이에 놓여있는 둥근 반사판과 2008년 작 「No Where」의 둥근 위성안테나 접시까지도 밤하늘에 떠있는 달을 암시한다. 2009년 작 「Night and Day」에서 하늘에 떠있는 흐릿한 빛은 해인지 달인지조차 알 수 없다. 어두운 공간 위에 떠있는 이 밝고 둥근 원은 유일하게 사진의 시공간을 벗어나 있는 기호로 인용되어 있다. 달은 숲의 바깥을 가리킨다. 시간의 영속성과 보편성,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이 기호가 박형근의 사진에서는 화면의 전경, 숲의 내부, 사진의 전면에 나타나는 것이다. 달은 구멍이자 눈, 빛, 얼굴, 그리고 사진의 부동성과 영속성에 대한 또 다른 비유로서 그의 사진에 등장한다. 작가가 연출하는 순간의 드라마에서 그것은 무대가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초월적 기호인 것이다. ● 숲과 그것의 바깥은 작가의 안과 밖, 관객의 안과 밖 그리고 사진의 안과 밖을 대체하는 공간이다. 숲의 안쪽에는 작은 공간들이 있다. 그곳에는 풀과 흙, 작은 돌들과 물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어둠 속으로부터 나온다. 숲이 그것들을 통해 표시하는 것은 세계의 양상이다. 그리고 세계의 존재는 하늘에 떠있는 것들에 의해 알려진다. 눈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고 그것들이 세계를 뒤덮는 동안 사진은 그것들의 기억을 기념한다. 모든 것은 사진적이다. 세계의 어둠은 사진의 그것과 닮아있다. 박형근의 사진은 이 두 세계 사이의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보여준다. ■ 유진상
섬에 숲이 생겼을 때 일이다. 아주 오래전 세상을 지배하던 산의 기운은 불로 화하여 천지를 뒤덮고 마침내 인간의 영역마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물의 기운을 품은 숲의 영험함으로 자연에 균형을 부여하지 않으면 마을 전체가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계시를 받들어 인간들은 마을에서 가장 신성한 터에 돌을 쌓고 흙을 옮겨와 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나무들은 자라나 숲을 이루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굳게 각인되었다. 이제 그곳은 세상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신의 언어로 봉인되었다. 바람이 숲을 흔들고 있다. 빛은 바람을 가르고 한참을 달려간 후에야 멈춘다. 기나긴 지움의 과정 끝에, 찰나의 순간 어둠이 쏟아진다. 짙은 울렁거림은 블랙홀처럼 세상을 빨아들이고 토해내기를 수십 번, 비로소 숲은 겹겹이 쌓인 표면너머의 세계를 열어 보여주었다. 한참 동안 나의 시선을 교란시키고 망막 속에 깊은 자욱을 남기더니 끝내 부서지는 빛이 되어 사라져간다. 눈을 감는다. 지워진 것들과 불리워졌던 것들, 숨소리를 거두어들인 것들, 돌, 바람, 흙, 빛, 소리, 나무 그리고 사람. 숲의 거친 호흡이 잦아들 때쯤이면 우리도 지워질 존재에 불과하다. 영원불멸의 견고함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from artist's statement 박형근 2011) ● 최근 작 '금단의 숲-Forbidden Forest' 프로젝트는 급속한 근대화 과정과 개발의 논리에 의해 폐기되었던 삶의 근원적 요소들과 우주의 원리를 환기시킨다. 사진의 무대가 되고 있는 성스러운 숲은 자연에서 신과 인간이 서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교감의 장이며, 그렇게 인간들의 손길과 정성으로 만들어졌다. 그러함으로 긴 시간이 흐른 지금도 이곳은 인간들이 지켜나가야 할 마지막 성역이기도 하다. 신화와 전설이 깃든 숲은 민간, 토속, 기복신앙의 영향으로 여전히 금기와 신성한 영역 안에 위치한다. 신화의 시대, 숲과 인간 사이에 놓인 영적 경계는 역설적으로 자연과 인간사이의 친화력을 더욱 강화시켰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로운 관계 속에 공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번 '금단의 숲' 프로젝트는 '전설'과 '신화'의 이미지를 부활시키려는 시도이다. 또한 이 숲은 현대 도시산업화의 과정으로 잃어버린 우리의 미적, 감각적 정체성을 복원시키기 위한 죽음과 생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숲의 신성함은 하찮은 것들에 부여된 영혼의 누적에서 기인한다. 이성적 판단과 확신을 보류 할 때 숲은 비로소 인식의 틀 너머의 세계, 그 안쪽을 비춰준다. 숲은, 바라볼 수 있는 곳보다 더 먼 곳에 있다. ● '금단의 숲-Forbidden Forest'는 Tenseless(텐슬리스) 시리즈의 4번째 프로젝트에 해당한다. 집중성과 긴장감을 뜻하는 'tense'와 없음을 나타내는 'less'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Tenselss-텐슬리스의 의미처럼 현실의 시공간을 다층적인 영역으로 설정하여 사진 찍혀진 대상의 가시적(actuality) 측면보다는 택스트로 분화되기 이전의 잠재적(potentiality) 층위에 대해 주목한다. 이 접근방식으로 지난 8년여 동안 일관되게 진행해 온 무제Untitled, 텐슬리스Tenseless 그리고 항해A Voyage시리즈를 통해서 '주관적 현실 이해 방식'과 '자연과 인간의 관계성' 이라는 기본 토대로 드러나게 되었다. '금단의 숲' 프로젝트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여행의 귀착점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혼돈 속에서 길을 만들다 지우는 과정의 고단함을 이겨내고 나를 움직이게 하던 무형의 기운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숲이라는 공간보다는 시간의 선분 위를 떠돌았던 영혼과 기억의 성소이며 안식처이다. ■ 박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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